지선아 사랑해
이지선 지음 / 이레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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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독실한 기독교신자인 친구녀석이 있습니다.

입대하던 날에 성경을 선물했었는데,
뭐 이것저것 가지고 들어오지 말라고 해서 받지 못했었답니다.

자대에 와서야 소포를 받았는데,
한권은 역시 성경이었고, 또 한권은 '지선아 사랑해!' 라는 책이었죠.

이지선씨 역시 독실한 기독교신자인데,
대학 2학년 때 교통사고를 당해,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심한 화상을 입었답니다.
그 후 3년동안, 죽을 고비를 넘기는 것으로 시작해,
화상 치료와 성형 및 재활 치료를 받으며 그녀가 느꼈던 절망과 고통, 그리고 다짐과 감사, 행복을 담은 일기 형식의 글입니다.

전 이제서야 알게됐지만,
'주바라기' 라는 개인 홈페이지와 그녀의 다시 일어서기를 응원하는 사람들의 팬사이트, 그리고 언론을 타면서 많이 유명해져버린 그녀라고 합니다.

사실, 그저 그렇게 책을 집어들었는데,
고작 몇장을 넘기지도 않고서, 조심스레 고쳐앉는 저를 볼 수 있었답니다.

그녀의 의지와 마음에,
저 역시 작은 축복을 더하면서,

제게 꼭 와닿았던 이지선님의 글을 발췌합니다.
(출처: 지선아 사랑해! - 도서출판 예림)

" 예전에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에 많이 집착했었다. 사람, 물건, 시간, 추억들.. 하지만, 사고를 당하고, 사고 전에는 한번도 겪어보지 못했던 도난을 두번이나 당하면서 나는 예전에 정말 소중하다고 생각했던, 그래서 내가 손 안에 꼭 쥐고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던 많은 것들을 잃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이 정말 내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내가 진정으로 이 땅에서 가질 수 있는 것, 그것은 나의 육신도 나의 재물도 나의 운명도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

" 사람들이 장애에 대해 갖는 또 한가지 착각은 '장애는 곧 불행' 이나는 것입니다. 저 역시 장애인 판견을 받기 전까지의 25년을 그런 생각으로 살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누가 누구를 동정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장애인들을 쳐다보곤 했습니다.
장애는 불편할 뿐이지, 결코 불행하지 않습니다. 행복과 불행의 경계는 장애와 비장애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땅이 장애의 기준을 눈에 보이는 것으로, 신체의 다름과 불편으로 삼았을 뿐이지, 실제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의 건강과 다름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누가 장애인이고 비장애인일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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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 읽기의 혁명 - 개정판
손석춘 지음 / 개마고원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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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을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신문이 신문사주와 광고주의 압력으로터 자유롭지 않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 아니 비밀도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런 공공연한 비밀이, 우리가 정보를 접하는데 있어서 메이저 신문을 선택하는데 크게 영향을 미치는 것 같지는 않다.

그건 왜일까?
신문을 보는 우리는 최소한 신문이 객관적인 사실을 가지고 기사를 써내려간다는 기본적인 믿음은 가지고 있고, 객관적인 사실만 주어진다면, 자신의 판단기준으로도 충분히 사건을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는 약간의 오만(?)도 한몫을 한다.

<신문 읽기의 혁명>은,

위에서 언급한 공공연한 사실에 대한 구체적 진술과, (지은이는 실제로 언론사 부장기자이고, 대학 신방과 교수인 손석춘씨이다.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있나?)
또한, 우리가 '편집된 사실로서의 신문' 에 대해서 소극적이나마 긍정하는 만큼, '사실에 미치는 편집의 영향력', 그리고 '우리의 가치판단에 대한 메이저 신문의 지배력'에 대해서는 간과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객관적인 사실이, 취재기자의 취사선택으로부터 시작해 취재부장, 편집기자, 편집부장, 편집국장을 거치고 초판부터 5판 6판이 나올 때 까지 편집되는 과정,
취재와 편집의 전 과정을 실제로 지휘 감독(?)하는 신문사주와 광고주, 정치권력의 압력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지나친 다단 편집, 50% 가까운 광고 비율, 등 실제 편집의 기술적인 측면에서 어떻게 선정성을 보이고 있는지를,

실제 신문지면의 스크린샷과 지은이의 생생한 언어를 통해 옅보는 것이,
우리의 가치판단에 대한 메이저 신문과 그 이면의 권력의 지배력에 대해서 다시 한번 각성하게 할 것이다.

또한, 지은이는 의식적으로 노력하지 않으면 계속적으로 이미지를 심어내는 매스미디어의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과, 이에 대한 나름대로 독법의 필요성, 소수자의 권력에 휘둘리는 매스미디어의 영향력에 맞선 다수의 조직적인 대응 사례 또한 제시하고 있다.

개인적인 느낌을 얘기하자면,
사실, <신문 읽기의 혁명>은 제목만큼 센세이셔널한 주제를 다루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그 해법 또한 조금은 평범한 듯 하다.
그렇다고 해서, 언론의 생리에 대해서 옅보기에는 또한 분량이 적은 듯한 느낌도 준다.

하지만, 북클럽 책가지에도 언론과 관련된 칼럼들이 많이 올라오는바,
매일같이 접하는 언론의 이면을 다시 한번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싶은 분이나,
언론의 역할에 대해서 문제'해결'의식이 있는 분이라면,
선고민한 지은이의 책을 집어드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책을 읽는 과정이 진정 지은이로부터 일방적으로 받는 과정이 아니라,
상호 영향을 주고받는 과정임을 상기한다면,
아직, 모두가 가진 문제의식임에도 해결되고 있지 않은 현실에서의 의미가 있을 것이다.

단, 비판뿐인 말잔치가 아닌, 진정 문제'해결'을 위한 목적에서만.

마지막으로,
분량은 아마 한나절쯤,
텍스트 크기는 중학교 교과서 정도이다.

[보탬] 책에 대한 소개와 더불어 내 생각을 잠깐 밝힌다면,
인터넷 이용의 보편화와 게릴라 언론(?)이 대두되면서,
메이저 언론에서 벗어나 우리가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돌파구들은 조금씩 생기고 있다고 본다.
인터넷의 발달이 정보 독과점을 막을 수 있을까? 조심스럽게 긍정을 해보기도 하는데..
사실, 이는 중요하면서도, 별로 중요하지 않은 사실이다.
왜냐하면, '백문이불여일견'이라고, 아는 것과 행동하는 것은 또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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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의 종말
제레미 리프킨 지음, 이영호 옮김 / 민음사 / 199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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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노동의 종말>이라는 책을 보고 있습니다.
이전 북클럽에서 독서후기를 읽고 충동구매한 경우죠. 허허 ^^;

'노동의 종말' 이라는 문제의식이 새로운 것은 아닙니다.
'종말' 이라고 하니까 좀 무서운데, 익숙한 표현으로는 '20대 80의 사회' 가 있겠죠.

20대 80의 사회라는 것은,
빈부격차를 표현하기도 하지만,
20의 사람만으로도 100을 먹여살릴 수 있다는 표현이기도 하죠.
80의 사람이 해야할 일은? 기계가 대신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술' 이라는 것에 대해서 가지는 이미지는 굉장히 좋은 편입니다만,
이것이 또 하나의 편견이고 선입견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1.

전 '기술' 하면, 핸드폰 광고가 먼저 떠오르는데요.
정말 매일 같이 새로운 핸드폰들이 출시되는 것 같아요.

그리고, 우린 그 광고들을 보면서,
'와 세상 좋아졌다.' 라는 생각과,
'아 갖고싶다.' 라는 생각을 하게되겠죠.

'와 세상 좋아졌다.' 라는 생각이,
바로 우리가 '기술' 에 대해 가진 좋은 이미지입니다.

그 핸드폰을 샀을 때,
우리가 누리게 될 놀라운 기능과 그만큼의 편의가,
우리를 설레이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새로운 기술이 우리에게 편의를 제공하지 못한다면?
아마 기술을 싫어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예를 들어,
식상한 예로 공장에 도입된 자동생산시스템 덕분에,
10명이 하던 일을 5명이 할 수 있게 되었다면?

아마 그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그 기술을 싫어하지 않을까요?

아시겠지만,
흔히 핵폭탄을 예로 들어 설명하는, 좋은 기술과 나쁜 기술에 대한 얘기가 아닙니다.
더 많은 편리와 효율을 제공하는 좋은 기술인 산업 기술에 대한 얘기입니다.

분명, 좋은 기술임에도 불구하고,
좋아하고 싫어함이 나뉜다는 것.
우리가 가진 기술에 대한 좋은 이미지를 재고해 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2.

좋은 기술이냐 나쁜 기술이냐를 판가름 하는 기준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기술 자체는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것입니다.

다만, 그 기술을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좋은 기술이냐 나쁜 기술이냐를 판가름 하는 것입니다.

더 많은 편리와 효율을 제공하는 좋은 기술의 하나로 이미지화되어 있는 산업 기술도 마찬가지입니다.
산업 기술 자체는 좋은 것임에도,
이것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그 가치판단을 달라질 수 있는겁니다.

3.

산업화되어가는 농촌 마을(가칭 책마을)을 예로 들어볼까요.

요즘 농촌은 예전처럼 이땅은 박씨네땅, 저땅은 윤씨네땅, 이런 식이 아닙니다.
마을 사람들은 변하지 않았지만, 땅주인은 변했죠.
마을의 몇몇 사람(촌장)이 대부분의 땅을 소유하고 있고, 나머지 사람들은 그 땅에서 일당을 받으며 생계를 꾸립니다.

손으로 하던 추수를 기계로 한다고 생각해봅시다.
여러 사람이 몇시간에 걸려서 해야하는 추수를 기계로 하면 금방 끝나겠죠?

이 성범표 자동추수기를 박씨네땅, 윤씨네땅에 들여오면,
매일 저녁 평상에 앉아 쉬고있는 박씨와 윤씨를 볼 수 있겠지만,
이 성범표 자동추수기를 박씨와 윤씨가 일하는 농장 주인에게 판다면,
아마 매일 저녁 일자리를 구하러 읍내에 다녀오는 박씨와 윤씨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4.

성범표 자동추수기는 고장도 잘 안나고 정말 좋은 기계임에도 불구하고,
박씨와 윤씨를 웃게도 하고 울게도 하니.. 조금은 아이러니하네요.

그렇습니다.
산업 기술 자체는 좋은 것임에도,
이것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그 가치판단을 달라질 수 있는겁니다.

산업 기술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의 문제는,
곧 산업 기술을 도입하는 이유와 주체의 문제입니다.

누가, 왜 기술을 도입하느냐는 것입니다.
'왜'는 '누구'의 이해관계에 불과하니까,
누가 기술을 도입하느냐가 중요해집니다.

박씨와 윤씨가 도입하느냐,
아니면, 농장 주인이 도입하느냐.

박씨와 윤씨가 도입하면, 산업기술은 일을 줄이겠지만,
농장 주인이 도입하면, 산업기술은 일자리를 줄이는겁니다.

기술 자체는 중립적이되,
자본주의적 생산방식 아래에서의 기술은 결코 중립적이지 않은 셈입니다.

5.

이런 역설적인 현실은,
그대로 역사의 한 장면으로 남게됩니다.

산업혁명 초기 영국에서는 러다이트 운동(기계파괴운동)이라는 것이 있었거든요.
100명분의 일을 거뜬히 해내면서 자신의 일자리를 쫓아버린 기계를 미워해버린 영국사람들을 보면서,
웃어넘길지도 모르겠지만.

역사는 오늘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바로 오늘 오래전 영국과 같이 효율적인 생산과 더 많은 이윤을 위한 새로운 기술들은 계속 도입되고,
오래전 기계를 파괴했던 영국의 노동자들과 같이,
오늘날 한국의 노동자들은 신기술 도입 시 노동조합과 사전 협의를 하라며 신문 한구석을 장식하기도 합니다.
기업의 경영권을 침해하고, 신기술의 도입을 방해한다는 누명이 씌워진 채로.

씁슬한 현실입니다.

6.

제러미 리프킨은,
그의 저서 <노동의 종말>의 2/3 이상을 미국의 근대사를 예시로 들어,
기술의 발달과 그에 따른 일자리의 감소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실제, 경제학을 전공한다는 경제학자들 또한,
기술의 발달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시장과 고용의 창출을 부각시키고 있지만,

이는 기술 발달의 단면을 나타내는 것일 뿐,
실제, 새로운 기술의 도입이 새로이 고용하는 사람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을 쫓아낸다는 사실을, 은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본주의 경제는 기업의 힘만으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기업이 만든 상품을 구매하고 기업에 이윤을 만들어주는 사람은, 크게 보아 그 기업에 고용된 노동자이기 때문입니다.

효율을 기치로 한 서로간의 경쟁으로 너도나도 인력감축에만 열을 올려,
전 산업에 걸쳐 실업자와 저임금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양산하는 지금의 추세는,
상품의 구매자를 재료로 상품을 만드는, 즉 스스로의 존재기반을 무너뜨리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윤과 시장, 시장과 경쟁이 없는 자본주의를 상상할 수도 없는 노릇.

우리는 이런 예측 가능한 비극 속에서,
오늘도 일자리를 찾아 헤매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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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아들 - 양장본
이문열 지음 / 민음사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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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년에 쓰여졌으니, 제가 태어나기도 전이네요.
그해 있었던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하고,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심지어 연극으로까지 만들어졌다는 소설.

이제서야 읽고나니,
지난 찰나의 기억들이 새삼스럽네요.

책을 덮고 나서 마음이 무거워지는 좋은 느낌을 받아 부족하나마 몇자 적어보려고 합니다.
마음 무거움을 덜어내는 가장 좋은 방법일 것 같아서요.

게시판을 둘러보니,
몇분의 후기도 찾을 수 있었는데,
설혹 지루하지는 않을지 걱정입니다.

여러분은 <사람의 아들>의 어떤 부분에 주목하셨는지요.
神과 종교에 대한 반정립? 아니면 神과 종교로 대변된 기존 사회 질서에 대한 도전?

듬성듬성 읽은터라,
조금은 뻔한 (하지만 중요한) 결론을 내며 책을 덮었으나,
이남호씨의 서평을 읽으며 좀 더 생각해보고 싶은 부분이 생겼습니다.

종교와 신에 대한 변증법적 반정립이 전부라고 생각할 수 있으나,
그 반정립의 주체가 민요섭과 조동팔 두명이라는 것에 착안한다면 조금 더 재밌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는거죠.

민요섭과 조동팔 모두 현실의 모순 위에 선 기독교적 신앙과 실천에 대해서 회의했고, 인간의 정의에 주목하였으나,
민요섭이 '신앙'이라는 테두리 주위를 배회하며 새로운 신앙을 찾았던 반면에,
조동팔은 틀 자체를 벗어나 있었다는 발견이 그것입니다.

소설의 시작이자 시간상의 끝 무렵,
(어떤 이유에서) 지친 민요섭은 기도원으로, 즉 神에게로 돌아가게되고,
이를 본 조동팔은 그에게서 '기독교적 신앙'이라는 테두리를 벗게했던 (물론, 그에게서는 기존 사회질서에 대한 도전이라는 색깔이 두드러지지만) 민요섭의 회기를 보면서,
그 자신의 정체성 상실을 두려워하며 민요섭을 살인하게됩니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다음처럼 질문할 수 있을 것입니다.

민요섭은 왜 회기했을까?
그리고, (서평에서 비판스럽게 다루어지고 있는) 조동팔의 극단적(?) 탈주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여러분들과 같이 얘기해봤으면 좋겠네요.

참, 마지막으로,
뻔하지만(?) 중요했던 결론에 대해,

'어쩔 수 없다' 며, 이기적 인간의 본성이라는 허울에 숨어 자기 자신을 합리화시키지 말고,
자신조차 돌아보지 못한 채, 자신과 문제를 포괄한 구조조차 고찰하지 않은 불평 불만만을 늘어놓지 말고,
비록 때로 굽히고 꺽이더라도, '사람이 만들어야 할 희망' 앞에 '사람의 정의' 앞에 솔직하고 당당해야 하겠다는 다짐 또한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네요.

작가가 얘기하고 싶었던 '사람의 정의' 가 그들의 교과서에나 나오는 빛바랜 도덕적 문구는 아니었을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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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의 선택 룰라
브리 뚜 알비스 지음, 박원복 옮김 / 가산출판사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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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1.

브라질은 우리나라와 굉장히 비슷한 역사적 흐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포르투갈에 의해서 오랜 식민지배를 받았고, 60년대 군부독재와 70년대 브라질의 기적이라는 경제호황기를 누렸죠.
80년대 들어 군부독재가 끝나고 들어선 민간정부에서는, 소위 신자유주의 정책을 통해서 많은 폐단을 낳게 되구요.

5천 4백만 명이 하루 1달러 미만의 돈으로 살고, 15%가 넘는 실업율.
3%의 인구가 차지하는 토지가 전체 면적의 60%를 차지하는 반면, 최빈층 40%는 1%만 소유하고 있는 나라.
가장 높은 수준의 세금과 불평등한 세금구조, 2천5백억 달러에 이르는 천문학적 규모의 외채더미가 브라질을 상징합니다.

복지국가를 상징하는 벨기에와 빈부격차를 상징하는 인도의 합성어인 '벨런지아'라는 별칭이 나타내듯이,
경제규모 세계 12위 이면서, 세계최고의 빈부격차와 사회적 불평등이 공존하는 나라.

브라질입니다.

2.

2002년이었습니다.
신문 사회면이나 국제면을 뒤적거리다가 발견했던 기사가, 브라질에서 좌파정권이 집권했다는 대선 기사였습니다.

그 주인공은 '루이스 이나시오 룰라 다 실바', 그냥 '룰라'입니다.
18세에 수도공으로 시작해서, 브라질 금속노조 위원장으로, 그리고 3차례의 낙선 끝에 대통령에 당선된겁니다.

그의 당선이 이렇게 이슈가 되었던 것은,
단지 좌파정권이라는 사실 외에도, 선거가 유례없이 많은 국민들의 참여와 지지 속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인데요,
위와 같은 사회적 갈등 속에서, 뭔가 달라질거라는 기대감이 많은 국민들의 참여와 지지를 이끌어냈겠죠.

국제사회도 민감하게 반응했던 것 같습니다.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아마도 조중동 메이저급 신문들은 그저 '좌파'라는 단어를 부각시켜 이미지 만들기에 여념을 없었을텐데, 그건 그렇다 치고,
민주노동당을 비롯해서 노동계 인사들이 줄줄이 성명을 발표하고 그 중 몇몇은 브라질로 건너가기도 했던 사실이 기억에 남습니다.

2002년이면 우리나라에서도 대통령 선거가 그 즈음이었을테니,
우리나라의 진보정당이라는 민주노동당의 입장에서는, 그리고 노동계 인사들의 입장에서는,
룰라, 그리고 그가 속한 노동자당(PT)의 집권이 반가웠을만도 합니다.
자신들이 그리고있는 미래가 될테니까요.

3.

그런데, 막상 브라질의 분위기는 그들이 기대하는 그것과는 사뭇 다른 모양입니다.

저자인 브리뚜 알비스씨의 논조는,
엄하게 말해서, 룰라가 좌파적인 성향을 계속 유지했다면 당선될 수 없었을 것이다 라는 것이거든요.

이 자유주의 경제학자의 논평에서 볼 수 있듯이,
실제, 룰라는 89년, 94년, 98년 3차례 대통령 선거에서 낙선한 경험을 가지고 있고,
여러차례의 낙선을 거치면서 그의 정치 경제적인 입장을 상당부분 절충하는 과정을 거치게됩니다.
미국에 대한 태도, IMF, IBRD와 같은 세계금융권에 대한 태도와 같은 정책기조나 대외발언도 많이 물러졌구요.

극좌파에서 중도좌파로 우향우했다는 평가를 받으면서, 급기야 그의 선거 캠페인은 '평화와 사랑'이었을 정도로 두리뭉실해집니다.
( 두리뭉실하다고 표현한 것은, '평화와 사랑'이 언뜻 보기에 말은 좋지만,
굉장히 구체적이고 이해타산적인 현실 정치영역에서, 평화니 사랑이니 하는 단어들은 불분명한 정책기조를 뜻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

대선 당시 룰라 후보의 경제정책 참모 기도 만테씨는 "우리는 70∼80년대가 아닌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다." 면서,
노동당과 룰라 정부의 변화가 무죄임을, 나름의 융통성임을 얘기하지만,
룰라가 집권에 자신을 맞추었다는 느낌이 드는건 왜인지요.

뭐 자신의 신념을 유지한 채로 집권을 이루어내든, 집권에 맞게 타협을 하든,
그건 룰라의 자유고, 브라질 유권자의 자유일겠지만,
좌파정당의 정치 경제적 미래를 짚어볼 욕심을 가졌던 독자에게는,
브라질 노동당과 룰라가 적절한 예시가 될 수 없다는 실망감을 안겨주었습니다.

4.

이제 집권 1년반을 넘어가는 룰라 대통령은,
집권 당시 굉장히 긴장했던 우파로부터는 '쟤가 왜 저러지?'하는 의혹의 시선을,
좌파와 극빈층으로부터는 실망과 배신이라는 힐책을 받으면서,
굉장히 어정쩡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좀 더 두고 볼 일이지만,
캐나다, 브라질까지 묶었던 NAFTA에 이어 남미 전체까지 미주대륙 전체를 2005년까지 묶어내겠다는 미국의 FTAA 의 추진의지를 옅보자면,
간판 유지가 언제까지 가능할지 두고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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