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정치 사상 현대의 지성 67
브라이언 레드헤드 / 문학과지성사 / 199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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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 들어가며

요즘엔 빛바랜 책들을 연이어 보게 되는군요.

『서양 정치 사상』이라고, 영국 BBC 라디오 방송의 정치사상강좌 원고들을 묶어낸 책이라고 하는데,
짤막한 원고에 플라톤에서부터 마르쿠제, 한나 아렌트까지, 열댓명의 사상가들을 담고있습니다.

이번 후기도 각 사상가들에 대한 단편으로 대신하겠습니다.
(참,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아퀴나스는 건너 뛰었습니다.)

# 니콜로 마키아벨리 - 『군주론』

1513년에 집필한『군주론』덕택에 '마키아벨리적인' 이라는 형용사까지 달고다니는 불명예를 감수하고 있는 분입니다. 자신의 이름이 '교묘한 정책과 교활한 협잡, 폭군 정치 지향' 정도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으니 불명예라고 할 만 하죠.

하지만, 저자는 『군주론』을 독해함에 있어서 시대적 배경(16세기 이탈리아)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고 변호?합니다.
구체적인 역사를 모르니 쉬이 이해하는데에 무리가 있습니다만, 16세기이면 중세의 말미이니만큼 대략적인 밑그림은 그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마 마키아벨리가 암묵적으로? 『군주론』을 헌상하게되는 메디치家의 경우 신흥교역가문 정도가 되지 않을까 하는데에 생각이 미치는군요.

여튼, 마키아벨리는,
타락이 지배하는 세상에서는 모든 윤리적인 규범을 무시해버릴 마음의 준비를 갖춘 무자비한 군주만이 성공을 거둘 가능성이 있다고 한 덕분에, 부정적인 평가를 받고있지만,
제 생각엔, 그가 내린 결론에만 천착하기 보다는, 결론에 전제되어 있는 가치판단들을 살펴보는 편이 더 생산적일 듯 합니다.

예를 들면, 군사적 기율이나 종교신앙을 중요한 정치수단으로 바라보았던 점 같은거요.
충분히 논해볼 만한 가치가 있지 않을런지.

# 쟝 칼뱅 - 『기독교제도론』

'종교개혁' 하면 떠오르는 두 사람. 칼뱅과 루터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고등교육의 영향이죠. 아니, 루터의 그것이 칼뱅보다 좀 더 자유분방했다는 것 까지가 고등교육의 영향입니다. 므흣

칼뱅과 루터의 차이는 칼뱅의 단언으로 더욱 두드러지는데,
칼뱅은 "기독교도의 자유가 기독교도의 의무를 결코 능가할 수는 없다." 고 했다죠.

고위 성직자들의 전제정치, 가톨릭 교회가 소유하고 있던 부와 권력.
칼뱅은 딱 거기까지만을 바랬던 것 같네요. 복음이 지향하는 바대로, 순수하고 물욕을 버린 영혼성의 회복. 이런거요.

어쩌면, 칼뱅과 루터를 묶고있는 '종교개혁' 이라는 분류?가 다소 피상적이라는 생각도 드는데요.
저자 역시도 후일의 자유주의 사조가 칼뱅에게 빚을 지고있다고 표현했지만,
본원의 종교로 돌아가려했던 칼뱅과, 잠재적이지만 종교로 부터 벗어나려 했던 루터의 그것은, 방향 자체를 달리하는 것이 아닐까.. 잠시나마 생각해봅니다.

참, 종교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김규항씨가 『예수이야기』라는 책을 준비중이래요.
지금 집필이 끝물이라는데, 동네 주민들하고 마가복음인가 누가복음 읽기?토론?을 하고있답니다. 내년 3, 4월 중이면 만나볼 수 있지 않을까요.
『예수이야기』돌베개 출판사와 계약했답니다. 후후 개인적으로 김규항씨 좋아요.

# 토마스 홉스 - 『리바이어던』

홉스의 성장기를 보면서, 아담 스미스와 상당히 유사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를테면 이런거죠.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귀족집안의 가정교사로 들어가는 출세구도?라고나 할까.
아담 스미스는 OO대학에서 철학교수로 있다가, 무슨 귀족집안 가정교사로 들어가 대륙여행을 한 것이 기회가 되어 대륙의 자유주의 사상가 - 흄이나 밀과 같은 - 들과 교류할 기회를 맞게 되거든요. 홉스 역시도 윌리엄 카벤디쉬 집안의 가정교사 노릇을 해야했다고 합니다.
당시 섬나라의 학자들에게는 일반적인 출세구도라고 하는군요.

저자는,
홉스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홉스 이전의 종교개혁으로부터, 좀 더 정확하게 종교개혁 세력의 도그마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조언하고 있습니다.

『리바이어던』도 그렇고, 홉스는 쉬이 이해하기 힘들더군요.

# 존 로크 - 『인간오성론』, 『관용론』, 『정부에 관한 두 논고』

서유럽의 철학이니 정치사상 사조에 익숙하지 않으신 분이라도, 로크부터는 친숙함을 느끼실 수 있을 것 같네요.

신민들의 동의('신민'이 뭐죠?)가 정부의 정통성을 근거한다는 점이나, 종교적 신념과 실천의 자유에 대한 옹호, 재산권의 근거로서 노동을 중시했던 점, 등 오늘날에는 꽤나 당연시되는 논리들이 그 당시에는 굉장히 급진적인 주장이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습니다.

# 장 자크 루소 - 『인간 불평등 기원론』, 『사회계약론』, 『에밀』, 『엘로이즈』

드디어 루소가 나왔군요.
루소는 우선, 정치를 인간의 삶의 핵심적인 요소로 보았다는 점에서 특이할 만 합니다. 관념이 아닌 물질적인 조건에 천착했다는 점이, 당시로서는 새로운 시도였겠죠.
우리들의 악함은 본성 때문이 아니라, 우리들이 나쁜 방향으로 통치되었기 때문이라는건데. 그는 인간의 본성은 선한 것으로, 제도나 문명 자체에 대해서는 약간의 불신?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전 종교개혁이나 계몽주의에 가려진 루소의 다른 관심사들에 더 매력을 느꼈는데요.
루소는 정치사상 외에도 교육이나 음악, 인류학, 식물학, 등에 관심을 갖고 활동했다고 합니다.

특히, 아직 읽어보진 못했지만『에밀』에 서술되어 있을 교육에 대한 관점이나,
「연극론」에 쓰여있는 문화에 대한 입장이 굉장히 흥미로웠어요.

본문에 짧게 소개된「연극론」을 보면,
루소는 직업적인 배우들에 의한 연극의 대안으로서, 인민들이 함께하는 그리고 우애가 넘치는 페스티벌을 제안하였다고 하네요. 집단적인 자기 표현의 아이디어에 강한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는데, 이는 독재에 대한 인민 주권이라는 그의 정치사상과 같은 맥락을 타고있구요.

모르긴 해도, 루소의 「연극론」은 예의 문화의 상품화를 걱정하는 예술인? 문화인?들의 고민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의식을 담고있는 듯 합니다.
'집단적인 자기 표현의 아이디어' 무대나 마당에 서봤던 분이라면 한번쯤 설레였던 고민거리 아니었을까요.

# 잠시, 사물놀이와 풍물굿에 대해서

루소의 「연극론」이 이 사람의 가슴을 뛰게 하는 데에는 나름의 사연이 있습니다.
어느새 서너해가 지나버렸지만, 연이은 술자리와 함께 하나 둘 동기들을 춘천으로 의정부로 떠나보내던 그 해에,
전 입대도 전자전기공학도 다 물리치고 문화만을 끌어안고 살았습니다.

덕분에 다시금 같은 술자리에서 떠나보낸 동기들을 맞이하고, 또 그 자리를 빌어 느지막히 의정부로 떠나는 동기가 되었지만.
참 행복했던 한해로 기억을 합니다. 루소의 「연극론」이 그때 끌어안고 있었던 고민들에 '자기 표현으로서의 풍물굿' 이라는 제목을 붙여주면서 묘한 동질감을 느끼게해요.

대학생이라는 사회적 삶을 표현하기 위해서, 스물하나의 삶을 표현하기 위해서,
전라북도 고창으로, 홍대 근처의 사회패로, 인터넷 자료실로, 무던히 돌아다녔습니다.

열정의 깊이에서 쉬이 비교하기는 힘들겠지만, 사물놀이를 만든 김덕수씨가 그랬을까요.
그 역시도, 풍물굿 역시 하나의 문화상품이 될 것이라는 시안을 가지고 있었나봅니다. 그래서 그는, 과거의 풍물굿에서 다른 요소들은 차치하고, 음악적인 요소 시각적인 요소만을 뽑아 특화시켰고, 오늘날엔 '사물놀이' 라는 파생명사가 '풍물굿' 이라는 본명사를 압도할 지경에 이르렀으니까요.

저와 제 몇다리 선배들, 그러니까 90년대 중후반에 풍물을 고민한 사람이라면 의례 김덕수씨에 대한 묘연의 감정들을 가지고 있을겝니다.
'외다리 풍물굿' 이라 비꼬았던 사물놀이에 대한 반정립을 합으로 만들어내지 못하고 학교축제에 관성적인 공연만 올리던 우리들이었으니까요.
(선배님들 미안 훌쩍)

하지만, 우리의, 최소한 제 깊은 바램은,
풍물굿의 '자기 표현적 요소'를 복원하는 것이었습니다.

'우애가 넘치는 페스티벌' 설레이지 않나요?
루소의 표현 역시도 풍물'굿'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그건 '굿판'이 '공연'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의미있는 몸부림의 제목이기도 하구요.

# 아담 스미스 - 『도덕감정론』, 『국부론』

오랜만에 그나마 친숙한 분이 등장했네요.

스미스에 대한 언급을 재차 접하면서 더욱 뚜렷해지는건,
스미스로부터 배우고자 한다면, 이제껏 그를 상징해왔던 '보이지 않는 손' 의 무게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단언하건데, 스미스는 오늘날의 시장신봉자들과는 다르니까요.

저자의 경우, 익히 알려져있는 스미스의 태도, 이를테면 시장의 자율적 질서나 정부 역할의 축소에 대한 부분 외에,
스미스의 두 저작 사이의 연관관계를 밝히면서 이 부분을 좀 더 명확히 밝혀주고 있을 뿐 아니라, 스미스의 정치적 견해의 단편 또한 제시하고 있습니다.

우선, 『도덕감정론』과 『국부론』 두 저작의 관계는 '인식의 확대'라고 생각하시면 큰 무리가 없을 것입니다.
『도덕감정론』에서 다루고있는 한 사회의 도덕적 문제에 대한 응답을 정치, 제도의 차원까지 끌어올리고 있는 것이 『국부론』이죠.

이는 『국부론』에 대한 곡해를 줄인다는 점에서 중요합니다.

흔히 경제적인 변화들은 기존의 정치나 제도의 압력을 이겨내려 하고,
그렇게 만들어진 정치, 제도의 변화들은 다시금 경제적인 변화를 촉진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요,
그렇다면, 스미스의 『국부론』은 이미 종교개혁이나 왕정의 붕괴와 같은 정치, 제도의 변화의 시점에서, 시장경제라는 새로운 경제원리를 논증하는 성격을 띄고있다는겁니다.
당시로서는 굉장히 진보적이었던거죠.

그 외에도, 스미스가 이윤율의 지속적인 감소 경향이나 계급 분화에 대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나, 당시 영국의 식민지 시절 (오늘날 미국의) 식민지 주권에 대한 스미스의 입장들을 주목할 만 합니다.

# 존 스튜어트 밀 - 『자유론』

고전의 가치에 대해서 다시금 돌아보게 해주는 평론이었습니다.
단편은 말 그대로 단편으로 그치고, 『자유론』꼭 한번 읽어볼 참입니다.

밀이 가지고 있던 문제의식은 일종의 비주류적인 그것이었던 것 같습니다.
산업혁명과 민주주의라는 세풍 밑에서,
밀은 법률이나 여론, 관습의 질곡에 대해서, 민주주의가 다수의 독재로 전락할 가능성에 대해서, 여성과 소수자의 권리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습니다.
당시로서는 물론이요, 오늘날에도 충분히 유의미한 문제제기라는 생각이 드네요.

그 외에도 밀은, 정치와 교육, 산업 전반에 관한 구체적인 정책들을 제시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에 대한 저자의 논평까지 함께 담겨있습니다.

" 창조적인 갈등이 빈번히 표출되는, 그리고 서로서로의 자유를 존중하되 자신들이나 남들에게 결코 무비판적이지 않은 사회, 개인주의적이고, 다원주의적이며, 민주주의적이고, 사회주의적인, 그러면서 소수의 권리를 보장하고, 시장 경쟁의 장점을 보존하는 사회 "

밀이 꿈꾸었던 자유주의적 유토피아라고 합니다.

# 칼 마르크스 - 『자본론』

마르크스에 대해서도 역시 짧게 언급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저자는 논평 전체에 걸쳐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불편함을 내비치고 있습니다만, 두가지 점에서 주목할 만 합니다.

첫째는, 마르크스의 경제학에 대한 주된 오독 중에 하나인 경제결정론에 대한 반비판을 벌이고 있다는 점이고,
둘째는, 흔히 마르크스-엥겔스로 불리우는 엥겔스의 그것을 마르크스와 차별화시키는 점입니다.

" 인간은 자신의 역사를 만든다. 그러나 그들이 좋아하는 대로 그것을 만들지는 못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선택한 상황 속에서 그것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과거로부터 직접 맞닥뜨려지는, 주어지는, 그리고 전승되어지는 상황 속에서 그것을 만드는 것이다. " - K.마르크스

# 버트런드 러셀, R.H.토니, 존 롤즈
# 허버트 마르쿠제, 한나 아렌트 - 각각, 『에로스와 문명』, 『전체주의의 기원』

마지막 두 단락의 경우 논평 자체가 그리 매끄럽지는 못한데,
각 사상가들이 주목받게 된 시대적 분위기에 대한 언급을 제외하고는, 특징적인 측면만을 짧게짧게 언급하는 것에 그칩니다.

어디까지나 라디오 프로그램의 원고라는 제약이 한몫 한 것 같아요.
대략의 분위기를 옅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할 것 같습니다.

# 나오며

입문서는 어디까지나 입문서인지라, 몹시 빈약한 후기가 되었습니다.

홉스의 『리바이어던』, 루소의 『에밀』『사회계약론』 『연극론』, 스미스의 『도덕감정론』, 밀의 『자유론』, 마르쿠제의 『에로스와 문명』, 아렌트의 『전체주의의 기원』
몇편의 고전에 대해서 욕심을 가지게 된 것이 나름의 소득이기도 했습니다.

입문서. 참 계륵(鷄肋)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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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미래 - 라다크로부터 배운다, 개정증보판
헬레나 노르베리-호지 지음, 김태언 외 옮김 / 녹색평론사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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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적 다양성' 이라는 단어가 오래도록 남네. 주위 사람들이 꼭 한번 읽어봐야 할 책인데.
그런데, ‘반개발’ 과 ‘탈중심화’ 라는 헬레나 노르베리-호지의 생각은 충분히 긍정적이긴 하지만, 좀 더 따져볼 필요가 있는 것 같아.

음 일상의 스트레스에 아둥바둥 하면서 사람들이 흔히, “ 시골 내려가서 농사나 짓고싶다. ” 는 흰소리들을 많이 하는데, 이 흰소리가 어찌보면 개발중심적이고 소비중심적인 사회에 대한 내면의 저항일수도 있겠다 싶거든?
그런데, 실제 시골 내려가서 농사 짓는 사람은 거의 없지. 역설적으로 경제적인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값싼 부동산을 매입해서 전원주택을 짓는 경우가 훨씬 많고.

‘반개발’ 과 ‘탈중심화’ 는 늘 한편의 기획으로 끝나버리곤 했다는거야.
‘라다크 프로젝트‘ 그룹에서 시행한 유기농업을 장려라던지, 지역 전통공예품과 소규모 태양열 기술의 개발, 그리고 라다크 사람들에게 생태적 인식을 높이는 일 역시도,
본래의 긍정적 의도에도 불구하고, 결국 한편의 기획으로 끝나거나 변형 왜곡될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건데..

라다크의 상황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지만, 만약 그곳이 이미 세계경제의 일부분으로 충분히 편입된 이후라면, 유기농업이나 전통공예품과 같은 생태적인 기획도, 결국 ‘상품‘ 으로 평가되지 않았을까? 그런데, 그렇게 되면 비용상에서 밀리는 라다크의 상품들은 시장에서 밀려 자취를 감추거나, 혹은 오늘날의 웰빙상품들처럼 변형 왜곡될 여지가 있을 수 있고.
거기서, 헬레나 할머니는 ‘시장과 상품을 소비하는 합리적 개인만을 상정할 때 그렇겠지요.’ 라고 쓴웃음을 지을 수 밖에 없을지도 모르지.

앉은 자리에서 이리저리 재면서 볼 일 다보겠다는건 아니지만,
‘반개발’과 ‘탈중심화’ 가 가진 일종의 ‘한계지점‘ 을 고민하게되는 대목이지.

새벽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코피 쏟아가며 수능 시험을 준비해야하는 고3 수험생들에게 공부가 선택의 문제가 아니 듯이, 오늘날의 개발도 그런 것 아닐까. 그들 모두는 고된 현실에서 벗어나길 꿈꾸지만, 그러지 못해. 여기서 벗어난다는건, 단지 수능시험에서 벗어나는게 아니라 취업이며 자아실현의 기회에 대한 박탈, 생존에의 박탈인 것을 잘 알기 때문이지.

그런데, 한 학생이 있다고 해. 이 학생이 진심으로, 게을러서가 아니라, 자신을 비롯한 고3 수험생들의 고된 현실이 안타까워서 ‘반수능’을 외쳤다면? 아니, 좀 더 나아가서 ‘대안학교’ 모델은 어떨까?
‘반수능’의 결말은 물론이요, 건방지긴 하지만 대안학교 모델 역시도 흔히들 동경하는 서구식 교육까지가 최선은 아닐까?

‘수능지옥에서 벗어난‘ 으로 시작하지만 ‘이번에 어디학교 수시로 합격했어요’ 로 끝나는 모 TV 프로그램의 씁슬한 대안학교 소개장면처럼.

‘반개발’과 ‘탈중심화’가 개발지상주의에 길들여진 입맛에 별미 정도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지.
헬레나 할머니의 ‘반개발’ 이 그저 개발에 대한 반대가 아니라면, ‘탈개발’이 더 적절한 표현일 것 같은데. 벗어난다는 ‘탈‘ 은, 죄 없는 ’개발‘ 과 죄 있는 ’지상주의‘를 모두 버리는 것이 아니라, ’개발’에서 ‘지상주의‘ 만을 떼어내는 일일테니까.

헬레나 할머니의 오래된 미래 속편, ‘(가칭) 라다크 프로젝트’ 가 마저 나왔다면 좋았을거야.
프로젝트의 이모저모며 좋았던 점, 어려웠던 점, 궁금하네.
아 그에 앞서 헬레나 할머니의 용기에 박수를 보내고싶고.

마음에 들었다면 프로젝트 후기도 알려주세요-
당신의 후기는 계속 되어야 할 듯. 므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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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미국사 - 한 권으로 풀어 쓴, 이야기 역사 시리즈 한 권으로 풀어 쓴 이야기 역사 시리즈
김종일 엮음, 청솔역사교육연구회 추천감수 / 청솔 / 199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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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보면 곧잘 샛길로 새곤 합니다.

달러약세에 관한 책을 읽고있었는데, 70년대 환율제 운운하더니, 비교를 한다고 40년대까지, 20년대까지 내려가기에,

결국, 오래된 미국사 한권을 구해 보았습니다.


한국문인협회에 계신 분들이 집필하셨다는데,

고등학생 필독서 시리즈 인 듯, 그저 정치적인 사건을 나열하는 형식으로 되어있습니다.

책을 뒤적거리며 떠올렸던 몇가지 메모를 정리하는 것으로 후기를 대신할까 합니다.


# 독립전쟁


이주민의 역사로 알려져있는 미국의 초기, 그러니까 16세기부터 18세기까지의 미국역사를 이해하는데 있어서는, 이주민들의 정부(식민지 정부)와 본토정부(영국 정부) 와의 갈등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아요.


이주민들의 경우,

유럽의 식민지산업에 의해 건너온 무리와, 종교적 박해를 피해 건너온 신교 무리가 있다고 익히 알려져있는데,

실제 갈등의 표출은, 정치적 갈등 보다는 무역제재에 따른 경제적 갈등이 대부분입니다.


식민지에서 모자를 생산하고 수출하는 것을 방해하는 모자법을 비롯해서 제철법, 설탕법, 인지세법, 타운센트법, 그리고 잘 알려진 보스톤 차(茶) 사건까지.

대부분 직접적인 무역제재나 관세조치, 교역에 필요한 행정조치들에 대한 세금부과입니다.


결정적으로, 화폐도 만들지 못하게 했다고 하는데,

『빚의 경제』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화폐의 발달은 산업규모의 발달과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화폐 생산 자체를 규제했다는 것은, 경제 자체를 움켜쥐고 있는 것과 같았겠죠.


하긴, 음모론으로 익히 알려져있는『그림자 정부』의 이리유카바 최는,

미국의 독립전쟁이, 미국의 화폐를 말살하기 위한 영국 거간꾼들의 음모라고 하기도 했었습니다.


간단히 얘기해서, 전쟁을 하게되면 물자의 생산과 소비가 급격히 늘어나니 빚을 내어 화폐량이 늘어날 수 밖에 없는데,

전쟁을 배후조정한 것도, 빚을 내어준 것도 영국 거간꾼들이라는 겁니다.

영국의 거간꾼들이 전쟁을 이용해서 미국의 신용(화폐)을 고의적으로 확장했다가, 급격히 수축시키는 방법을 통해서 미국을 장악한다는 것이죠.


실제, 미국은 독립전쟁 당시 프랑스를 비롯해서 외국에 많은 빚을 졌을 뿐만 아니라, 국내 발행 화폐량도 만만치 않게 많았어요.

그래서, 결국 화폐량을 규제하기 위해서, 화폐로 세금을 징수하고, 화폐 대신 금화만을 사용하도록 하는 등, 화폐량을 줄이기 위한 정책을 시행하는데,

그 때문에 많은 파산자들이 발생하고, 심지어 세금징수에 반대하는 농민들이 집단적으로 반발하는 '셰이스의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다는군요.


# 남부와 북부


이주민의 역사가 독립전쟁으로 끝나면,

'남북전쟁'과 '미국 정당 변천사'가 새로운 이슈가 됩니다.


독립 초기 정당은 연방파와 공화파, 쉽게 연방주의를 주창하는 무리와 그렇지 않은 무리로 나뉘어 시작하게 됩니다.

각 무리의 대표적인 인물이 해밀턴과 제퍼슨. 이 두사람의 지지기반은 각각 북부의 상공업세력과 남부의 농업세력이었구요.


이후에 연방파가 쇠퇴하면서, 공화파가 국민공화파와 민주공화파로 나뉘고, 다시 국민공화파가 민주당-휘그당으로, 결국에는 오늘과 같은 민주당-공화당 구도가 완결되는데요,

산업구조가 변하면서 퇴색된 측면이 많겠지만,

적어도 초기에는, 구도의 핵심이란 지지기반이 어디인가 - 상공업 세력(공화당)과 농업세력(민주당) - 하는 점이었습니다.


다시 독립 초기로 돌아가서,

연방파의 해밀턴은 초대 정부에서 재무장관을 했던 인물인데, 그가 시행한 일련의 경제정책들이 재밌습니다.

그는 우선, 연방정부가 전쟁을 통해 지고있던 상당액수의 빚을 국채로 교환해주고, 상공업을 보호 육성하는 정책을 폈을 뿐만 아니라, 영국의 잉글랜드 은행과 같은 중앙은행을 미국에도 설립하려고 했죠.

이는 철저하게 북부의 상공업세력에게 유리한 정책들이니까요.


주로 자유무역에 대한 태도, 중앙은행에 대한 태도에서 차이를 보였던 정책상의 갈등 역시 이와 관련이 있습니다.


후일 남북전쟁으로 비화되는 남부와 북부의 갈등 역시 흔히 노예제 폐지와 관련된 것으로 알려져있지만,

노예제도라는 정치적인 사건의 배경이, 남부의 면화산업 북부의 상공업이라는 산업기반을 바탕으로 한다는 사실이 주목할만하구요.


실제, 1863년 노예해방을 선언한 인물로 잘 알려져있는 '에이브러햄 링컨' 역시,

" 노예제도는 연방을 수호하는 데 관련된 정도만 중요할 뿐이다. " 라고 강조했는데,

노예제도는 정치적인 이슈였다기 보다는, 남부와 북부의 경제적 주도권을 둔 갈등이었던 것 같아요.


# 록펠러와 카네기, 그리고 노동절


남북전쟁이라는 진통을 겪고 난 이후, 미국이 본격적인 성장을 하게되는 것은 19세기 중반 이후입니다.

이 시기를 이해하는 다양한 코드 중의 하나는, 단연 카우보이가 등장하는 서부진출이겠구요, 후반으로 넘어가면서 석유왕 존 록펠러, 강철왕 카네기가 등장하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또한 흥미로운 점은,

미국 노동운동의 역사 또한 이 시기, 즉 성장의 시기에 쓰여지기 시작했다는겁니다.

( 전국노동연합, 노동기사단, 미국노동총연맹과 같은 단체들이 설립된 것이 이 즈음이고, 5월 1일 '노동자의 날' 의 발단이 되었던 '헤이마켓 광장 사건'이 벌어진 것 역시 1886년입니다. )


노동조합운동이 경제의 성장기에 시작되었다는 것은,

80년대 후반에 시작된 우리나라의 역사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공통점인데,

이는 분배를 기본적인 이해관계로 하는 노동조합운동이 경제의 순환에 강하게 종속되어 있다는 것을 일면 상징하는 것 같습니다.


한편으로, 노동조합운동에 의해 꾸준히 분배가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미국경제가 이후 두번의 루스벨트 대통령의 집권시기를 거쳐 1차 세계대전까지 주욱 성장기(호황기)를 유지했다는 것은,

경제성장이라는 것은 '투자 아니면 분배'라는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라, 투자와 분배가 만들어내는 선순환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구요.


이후 미국경제는 물자소비가 많은 전쟁(1914-1919, 1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더욱 성장하게됩니다.


# 29년 경제대공황(Black Monday)과 뉴딜(New Deal)


1차 세계대전을 빌은 전시호황 이후에는,

'29년 경제대공황'과 '뉴딜정책'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익히 알려진  이 두 사건보다 흥미로웠던 것은,

'타운센드 계획' 이라는 사회보장 입법과 국가산업부흥법, 국가노동관계법과 같은 경제불황기에 시행된 지원법이었습니다.


위 단락에서 서술한 19세기 중반 이후가 대표적인 호황기였다면, 1차 세계대전 이후는 대표적인 불황기였는데,

극과 극으로 보이는 두 시기에 사회보장법이니 노동조합운동과 같은 분배 관련 이슈들이 공통적으로 부각되었다는 사실은 쉽게 이해하기 힘들지도 모릅니다.


전시에 경제가 호황인 까닭은, 다름아닌 전쟁이 물자의 소비를 전제로 하기 때문인데요,

이렇게 만들어진 생산과 소비의 선순환이, 전쟁의 종료와 함께 소비라는 순환고리를 잃으면 순환은 깨어지게 됩니다. 생산만이 남게되죠.


생산은 원활한데 소비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소비할 수 없는 너무 많은 상품들은 가격의 하락, '디플레이션(deflation)' 을 부르게됩니다.


수지타산이 맞지 않으면서 기업이 생산을 멈추고 실업이 늘어난다는 사실은 익히 알려져있을테니, 좀 다른 그림을 그려보겠습니다.


선순환이라는 도식에서 빠진 것은 소비. 소비라는 고리만 다시 이어주면, 선순환은 다시금 이루어 질 것이라는 직관적인 판단이 가능합니다.

유수의 경제정책 시행자들이 저처럼 직관적인 판단에 의존하지는 않았겠지만, 여튼 뉴딜정책은 소비를 촉진시키기 위해서 등장합니다.


소비를 촉진시키기 위해서는 직접적인 방법과 간접적인 방법이 있습니다.

전자가 '소비 자체' 를 자극하는 방법, 즉 신용거래의 활성화나 금리의 인하, 마케팅에 의해 이루어진다면,

후자는 '소비할 수 있는 능력' 을 자극하는, 다소 우회적인 방법입니다. 바로, 고용을 늘리는 방법이겠죠.


뉴딜정책은 후자에 초점을 둔 국가정책이었습니다.

'테네시 계속 개발공사' 로 대표되는 대대적인 공공사업을 벌여 고용을 만들어내는겁니다. 한마디로 정부가 빚을 내서라도, 소비라는 선순환의 고리를 채워넣겠다는 것이죠.


불황기에 나타난 사회보장입법과 국가노동관계법의 시행 역시도 같은 맥락에서 바라볼 수 있습니다.

빚을 내서라도 소비를 만들어내는 판에, 극빈층 노동자들의 얼마 안되는 소비마저도 위축시킬 필요는 없었던거죠.


당시 대통령이었던 루스벨트는,

" 이 법은 개인의 욕수충족과 함께 경제의 한정화에도 큰 역할을 할 것이다. " 라고 말했습니다.


투자와 성장을 동일시하거나, 역으로 분배를 성장에 반하는 것으로 규정하는 통속적인 관념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발언일겁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뉴딜정책은 그다지 실효성을 발휘하지는 못합니다.

이유는 당연하게도 정부의 재정에 무리가 간다는 것이었는데, 빚을 내서 부양한 경기가 다시금 정부의 빚에 의해서 위축당하게 된 것입니다.


미국경제는 1937년을 기점으로 해서 1939년 2차 세계대전과 함께 시작된 전시호황기 때까지 불황에 빠져들게됩니다.


# 마치며


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20년만에 집권하는 공화당의 트루먼,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마셜플랜을 비롯한 반공정책. 케네디, 닉슨 대통령으로 이어지는 월남전, 히피문화, 반핵운동. 카터, 레이건, 부시에서 클린턴으로 주욱 이어지고 있네요.

( 95년에 초판된 책이라 클린턴 대통령이 제일 마지막입니다. )


익숙하게 접하는 서유럽의 역사를 제외하고는, 『발칸분쟁사』이후로 두번째였는데.

윤곽이 잡히는 느낌이 좋습니다.

앞으로 더 읽어보고 싶어요. 상대적으로 외소했던 남미나 일본에 대해서도.


아 쓰고나니 후기가 좀 그렇네요. 부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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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러의 위기 세계 경제의 몰락
리처드 던컨 지음, 김석중 옮김 / 국일미디어(국일출판사) / 2004년 11월
평점 :
품절


 

얼마 전에 환율이 1,000원대로 떨어졌죠. 지금도 큰 변동은 없는 것 같습니다만.

환율 떨어지면, 당장 괴로운건 수출기업들입니다. 수출을 해서 달러화를 벌어와도 환전하면서 손해를 볼테니까요.


얼마 전에 한은 총재와 한국개발연구원의 연구원이 환율하락에 따라 다른 평가를 냈다고도 하는데, 다른 평가라기 보다는 환율하락의 일면만을 다룬 평가 같더라구요.

한은 총재는 수출의 입장에서, 한국개발연구원은 수입의 입장에서. 수출은 줄어들고 수입은 늘어나기 마련입니다. 상대적으로 원화가치가 오른 셈이니, 팔기는 어렵지만 사기는 쉬운 셈입니다.


여튼,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국가들의 경제구조는 수출의 비중이 크다는 공통점이 있는데, 비중이 큰 수출이 환율 때문에 발목이 잡혔으니, 단지 몇몇 수출기업들만의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달러의 위기 세계 경제의 몰락』이라는 험악한 제목으로 책을 발표한 리처드 던컨 (이하 던컨) 은 IMF, 세계은행과 같은 국제금융기구에서 오래도록 일해온 경제 분석가라고 하는데요, 던컨은 이를 두고 ‘수출주도형 성장시대의 종결’ 이라는 제목을 붙였더군요.

중국, 일본,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국가들은 물론 남미 국가들까지, 대미 의존도가 낮은 유럽을 제외하고는 모든 국가들이 영향을 받을 것으로 예측하고 있습니다.


대미 의존도가 높은 세계경제라 함은, 쉽게 얘기해서 세계 각국에서 생산된 상품을 주로 미국 소비자들이 구매했다는 것을 뜻합니다. (세계경제를 100으로 보면, 미국 소비자들이 약 30, 그 다음 15개국 정도가 50, 최하위 150개국은 1에도 미치지 못한다는군요.)


그런데, 문제는 이제 미국 소비자들이 더 이상 구매를 하지 않는다는겁니다. 화투판에서 주머니 사정도 고려하지 않고 마구 바둑알을 사용하며 돈을 잃어주던 친구 덕분에 오늘 저녁 뭘 먹을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이 친구가 주저주저하는겁니다.


눈치빠른 친구들이라면 이미 눈치를 챕니다. ‘ 저 녀석 주머니 사정이 별로 안좋구나. ’

그리고는 계속 생각합니다. ‘ 이러다가 저 녀석이 아예 판 깨는거 아니야? ’


이런 의심 속에서 이 친구 회심의 제안을 합니다. 제안인 즉은, 바둑알당 30원 하던 판을 바둑알당 10원으로 하자는거죠.

이미 여러판을 따서 바둑알이 이마만큼 쌓인 이 친구. 속이 쓰렸겠지만, 한푼도 받지 못하는 것 보다는 낫다는 생각을 했을겁니다.

바둑알당 10원으로 대폭 낮추어 화투판은 계속됩니다.


이것이 환율하락의 배경입니다. 매년 엄청난 경상수지 적자를 기록하면서도 세계경제를 부양했던 미국경제. 01년에 투자가 멈추고, 03년에 소비마저 멈추면서 엔진이 꺼지자,

막대한 달러화를 보유하고 있던 국가들, 쓰린 속을 움켜쥐고 달러화의 가치를 하락시킬 수 밖에 없는겁니다.


#

처음 시작할 때부터 가진 돈 모두를 바둑알과 바꿨다면, 주머니사정 이상으로 화투판을 벌이지는 않았겠죠.


하지만, 문제는 귀찮음과 우정이었습니다.

이 친구들 매번 돈과 바둑알을 교환하는게 귀찮았을뿐더러, 수도 없이 바둑알을 꺼내 빚을 지더라도 꼭 갚을거라는 믿음이 있었던거죠.


수도 없이 일어나는 크고작은 국제무역에서 신용이라는게 그렇습니다. 물물교환 시절부터 환거래에 이르는 화폐변천사는 다름아닌 무역의 규모가 커지는 것과 연관이 있습니다. 화폐가 등장했을 때부터, 이미 화폐를 실물과 교환한다는 신용거래를 시작한 것입니다.

국제무역으로 더 많은 부를 창출하기 위해서 신용거래는 필수적이었죠.


이렇듯, 신용이란건 편리하기도 하고, 위험성을 잠재하고 있기도 한 것입니다.


#

그럼, 문제는 이 신용이 가진 위험성을 어떻게 보완할 것인가겠죠.

신용을 무역에 필요한 만큼만 이용하는겁니다.


그런데, 오늘날 실물경제를 엄청나게 압도해버린 금융경제는 이것이 실패했음을 보여줍니다.

오늘날 주식시장에서는, 신용(화폐)으로 신용(화폐 변화의 차액)을 거래하기까지 하니까요.


리처드 던컨이 주목하고 있는 것도 바로 ‘통제할 수 없는 신용‘입니다.

통제할 수 없는 신용은 항상 문제점을 안고 있습니다.


그는 신용이 통제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것을 환율제의 변화, 즉 73년 브레튼우즈협약의 파기에서 찾고있습니다.

미국정부가 금과 달러의 교환을 중단하면서, 달러는 금이라는 고정된 가치로부터 멀어진 것입니다. 신용이 통제로부터 멀어지는 순간이죠.


#

던컨은 책의 서두에서 73년 이후의 변화들을 기술하고 있는데,

각국의 지급준비금 구성이, 금에서 달러로 변했을 뿐 아니라 각국 달러보유고가 엄청나게 늘어났음을 알 수 있습니다.


( 이제 금이 보전하는 화폐가치란 미국정부에 의해 보증된 고정된 가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번에도 환율이 떨어지 후 금을 사모으는 분들이 있었지만, 이제 금의 가치는 엄연히 시장의 시세라는 것이 존재합니다. )


‘지급준비금’이란, 은행에서 예금자들의 돈을 대출해주는 것으로 수익을 올리면서도 일정정도는 금고에 보관하는 것과 같이, 화폐의 신용을 유지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인데,

각국 중앙은행의 경우 국제무역에서 필요한 달러를 일정정도 보유하죠.


그런데, 달러보유고가 2,000%까지 늘어났다는 것은, 그동안 금으로 가지고있던 가치를 변제하고도 훨씬 남는 액수입니다.

이 정도면 브레트우즈협정이 파기된 이후에 달러 자체가 엄청나게 많이 찍혀나왔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각국 중앙은행에 지급준비금으로 쌓인 달러의 출처는 미국의 중앙은행밖에 없을진데,

협정 파기 이후로 달러화의 생산, 즉 얼마나 신용이 부풀려졌는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미국은 이 신용을 가지고, 전 세계의 개발도상국들의 경제를 부양한겁니다.


#

던컨이 분석한 것과 같이,

73년 이후로 세계적으로 많은 달러들이 넘쳐났고, 통제를 벗어난 달러화에 의해 세계경제가 침체기에 빠져들었음은 기정사실로 보입니다.


그는 이것을 빗대어 ‘과음에 따른 숙취‘ 라고 하는데요.

몸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음주, 즉 소비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과도한 생산이 이루어졌다는겁니다.

술을 한참 마실 때는, 풍요로운 생산과 소비 속에서 모든 것이 완벽해보이지만, 술이 자신의 주량을 넘어가게 되면서 과도한 생산을 소비가 감당하지 못해 진통이 따르게되죠.


그런데, 저는 신용이 과도하게 남발된 원인을 협정의 파기에서 찾는 던컨에게 의구심을 갖게됩니다.


협정 파기 이후의 세계경제를 과음에 빗댈 수 있다면,

협정은 ‘오늘은 1병만 마시고 집에서 공부해야지.’ 라는 다짐에 불과할 터인데,


오늘날 경제위기의 원인이 협정을 파기한 데 있다고 한다면,

이는 전날 몹시도 과음한 친구에게, ‘너 1병만 마시기로 했잖아’ 라고 질책하는 것 밖에 더 될런지요.


화폐경제는 지속적인 확장의 역사였습니다. 오늘날 경제규모는 상상도 못할 만큼 커졌고, 이런 경제규모를 감당해야 할 화폐의 양도 어마어마하게 늘어났습니다. 어렸을 적 삼양라면의 가격이란 십여년의 시간이 지난 오늘날 천원을 낸 거스름돈 정도니까요. 그에 따라 환율제 역시도 물물경제에서 단순화폐경제로, 금본위제로, 금달러본위제(브레튼우즈협정)로, 오늘날의 달러본위제까지 발달했구요.


날이면 날마다 다짐을 깨고 술독에 빠져사는 친구라면,

다짐이네 뭐네 잔소리를 늘어놓기 보다는, 다른 방법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뭐 병원에 데려간다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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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hoice - 자유무역과 보호주의, 도전할 것인가 도망칠 것인가
러셀 로버츠 지음, 유종열 옮김 / 생각의나무 / 2003년 7월
평점 :
절판


#1
<경제학 카페> 의 저자 유시민씨는 '경제학은 반직관적 학문'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반직관적'이라 함은, 직관적으로 옮고 그름을 판단하기 힘들다는 것을 뜻합니다.

유시민씨는 '자유무역의 수해자와 피해자'라는 대목에서 이 얘기를 꺼내는데,
결국, 자유무역은 잃는 것 보다 얻는 것이 많다는 결론을 내릴 유씨는,
아마도 자유무역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논리가 심히 직관적인 나머지 그릇된 판단을 내리고있다는 얘기를 하고싶었던거겠죠.

직관적인 판단.
사람들은 보통 자신의 이익에 해가 될 때, '이건 안돼'라고 직관적인 판단을 내리게 됩니다.

사실, 어떤 사안이든 그렇습니다.
'옳으냐 그르냐'를 따지는 것 보다는 '나에게 이익이 되느냐 해가 되느냐'를 따지기가 훨씬 쉽죠.
'옳으냐 그르냐'에는 하나 이상의 입장을 따져봐야 하는 양적 어려움도 있지만, 여러 이해관계들 사이에서 기준을 세워야하는 질적 어려움도 있죠.
하지만, '나에게 이익이 되느냐 해가 되느냐'는 양적 어려움도, 질적 어려움도 없는 것입니다.

#2.
그럼, 유시민씨의 얘기대로,
자유무역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직관적인 판단을 내리고 있다 함은,
곧 자유무역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나에게 이익이 되느냐 해가 되느냐'로 판단을 내리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나에게 이익이 되느냐 해가 되느냐'로 자유무역이라는 국가적 사안을 판단하다니.. 라고 하면서, 몇몇 분들은 눈살을 찌푸릴지 모르겠지만,
사실,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행위'는 정당한 권리 아닐까요. 모든 경제활동이라는게 기실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욕심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니까요.

자칭 '자유주의를 표방하는 얼치기 경제학도' 유시민씨 역시도 이 생각에 동의합니다.
그리고, 그는 바둑의 귀퉁이집과 본집을 예로 들면서, 자유무역에 대한 반대는 이들에게 귀통이 한집을(당장의 이익) 내주기 싫어 본집을(장기적인 이익) 내어주는 것과 같다고 말하며 이 대목을 마무리 짓습니다.

#3.
하지만, 유시민씨의 견해는 자유무역에 대한 반대논리의 일부분을(그것이 주류이긴 하지만) 다룬 것 뿐입니다.
그가 자유무역에 대한 독자들의 판단을 왜곡할 여지를 가지고있는 것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자유무역이란 반직관적으로도 반대할 수 있는 사안이며,
'자유무역이 나에게 이익이 되느냐 그렇지 않으냐'가 '자유무역이 옳으냐 그르냐'를 기준으로 판단하는 반대논리도 있다는 것입니다.

을순이가 갑동이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서,
을순이가 갑동이를 싫어한다고 할 수는 없는거니까요.
을순이는 단지, 갑동이의 이러이러한 점이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입장들을 접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긴 하나,
무엇보다도 자유무역을 둘러싼 논점/쟁점들을 정리해나가는 것 또한 하나의 접근법이 될 것입니다.

러셀 로버츠의 는,
유시민씨와 같이 도전하는 자유무역이 도망치는 보호주의를 설득하는 내용입니다만,
소설의 형식으로, 자유무역과 관련한 논점들을 풍부하게 펼쳐보였다는 데에서 나름의 의의가 있습니다.

#4.
'생각의 나무' 출판사에서는 연이어 두편의 경제소설을 내어놓았습니다.
한편은 『국부론』의 저자 아담 스미스에 대해서, 한편은 『정치경제학 및 과세의 원리』의 저자 데이비드 리카르도에 대한 것입니다. 제목은 각각, <아담 스미스 구하기> 와 입니다.

두편 모두, 19세기의 고전경제학파 경제학자들의 환영이 등장한다는 공통점이 있죠.
<아담 스미스 구하기> 에서는 스미스의 영혼이 정비공 해럴드 팀스에게 투영되고, 에서는 리카르도가 하늘나라의 허락을 받아 직접 20세기 중반의 미국으로 내려옵니다.

의 리카르도가 현실세계로 내려온 이유는 텔레비전 공장을 운영하는 사업가 에드를 설득하기 위해서인데요,
에드는 자국(미국)의 텔레비전 시장 개방에 반대하는 찬조연설을 준비하고 있었죠.

리카르도와 에드의 대화는 전편에 걸쳐 이루어지고,
기네스 펠트로우가 주연한 <슬라이딩 도어즈> 처럼, 에드가 지지하는 그 법안이 통과된 1990년대 미국과 그렇지 않은 경우 1990년대 미국을 뛰어넘으며 서술됩니다.

그런데, 실제 이 두사람의 대화는 설득에 더 가깝습니다.
당연하겠지만, 이 우화의 기획이라는게 실제 데이비드 리카르도의 사상을 잘 이해하는 것일테니까요.

#5.
우리가 익히 알고있는 아담 스미스와 같은 시대를 풍미했던 데이비드 리카르도는 두가지로 우리에게 알려져있습니다.
상품의 가격은 그에 투입된 노동시간에 비례한다는 '노동가치설'이 그 하나이고,
1814년 영국의 농산물 보호법이었던 곡물법("영국에 들어오는 농산물에 세금을 먹이겠다!") 논쟁에 맞추어 쓰여진 대표적인 저작. 『정치경제학 및 과세의 원리』로 시작된 자유무역/보호무역 논쟁이 그것입니다.

뒤에서 말씀드리겠지만,
그가 주장한 '비교우위설'은 오늘날까지도 자유무역을 옹호하는 많은 경제학자들에게 인용되고 있구요.

그렇다면, 에드는?
에드는 당장 미국 텔레비전 시장의 개방으로 자신의 텔레비전 공장과 소속 노동자들의 밥벌이를 걱정하고 있던 차였죠.

앞서 '옳으냐 그르냐'를 따지는 것 보다는 '나에게 이익이 되느냐 해가 되느냐'를 따지기가 훨씬 쉽다고 말씀드렸는데,
에드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텔레비전 시장 개방이 자신의 공장과 소속 노동자들의 일자리를 빼앗기 때문에 옳지 않다고 판단하게됩니다.

경제학자 명함을 달고있는 리카르도의 경우 '비교우위설'이라는 이론을 통해서,
자유무역이라는 것이 직관적인 피해의식과는 달리, 무역을 하는 양국 모두에게 이로운 일이라는 것을 반직관적으로 증명해내구요.

#6.
<아담 스미스 구하기>에 이어 까지,
[생각의 나무] 출판사의 연이은 저작들에 대해 호평을 드리고 싶습니다.

저자의 생각에 공감하느냐 그렇지 않으냐를 떠나서,
'19세기 경제학자들과 21세기 사람들과의 만남'이라는 인위적인 설정 자체가,
경제학이 우리 삶과 즐거운 접점을 시도하는 것일 테니까요.

아주아주 긍정적인 시도입니다.

#보탬1.
쓰다보니 서론에서 시작해 서론으로 끝나버렸네요. 다음엔 본론을 올릴께요. ^^;

#보탬2.
오늘날 맹위를 떨치고있는 경제학은 신자유주의 경제학이라는 말씀을 드렸었죠.
얼마 전 <10년 후 한국>을 낸 공병호 소장을 비롯해서 유수의 경제학자들이 인용하는 <자본주의와 자유>가, 바로 신자유주의가 이론적으로 생산된 시카고 학파 밀턴 프리드먼의 저작입니다.

신자유주의 관련해서는 밀턴 프리드먼과 F.A.하이예크의 <노예의 길>을 꼭 읽어보셔야 해요.

여튼, '新자유주의'에서 '新'을 빼면 '자유주의'인데,
20세기 말에 새롭게 시작하려는 '舊자유주의'가 바로 [생각의 나무] 출판사의 고전경제학 시리즈들입니다.

묘한 맥락이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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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이란 학문 자체가 짠하고 세상에 나오게 한 사람들을 고전경제학파라고 합니다.
유명한 사람으로는 『국부론』의 아담 스미스, 『정치경제학 및 과세의 원리』의 데이비드 리카르도 등등이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이 모르고있는, 고전경제학파를 이해하는 핵심 열쇠 중에 하나가 바로 '중상주의'입니다.
고전경제학이란 '중상주의'에 대한 반정립으로 나왔거든요.
"중상주의는 우리를 풍요롭게 하는게 아니야!" 하면서 나왔습니다.

중상주의가 지배적인 시절에는 무역이라는 것 자체에 대해 억압적이었죠.
예를 들어, 영국이 프랑스에서 쌀 10가마를 사고 금을 한덩이 주면, 금이 유출된다 하여 싫어했습니다.
'자국이 보유한 금'이 바로 부의 척도였죠.

무역을 못하게 하니, 무역하는 사람들이 가장 불만이 많았겠죠.
오늘날 세계무역기구(WTO, World Trade Organization)가 각국의 관세를 없애고, 자유로운 무역을 하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고전경제학파는 '무역'을 아주 좋아합니다.
무역이란, 내꺼 팔고 니꺼 사는건데요. 이게 대충 분업이죠.

고전경제학파 경제학자들의 이론을 보면,
'분업'에 대한 강조가 꼭 있습니다. 아담 스미스는 분업 일반에 대해서, 데이비드 리카르도는 국가간 분업인 자유무역의 이로움에 대해서 강조합니다.

저는 자유무역에 초점을 두고 말씀드릴께요.

# 서울과 부산 對 칠레와 한국

한-칠레 FTA 협정이나, 쌀시장 개방, 등등 자유무역과 관련한 진통들을 옅보면서,
자유무역이란 것에 대해서 한번쯤 고민해보신 분들이라면.

국가 내 자유무역과, 국가간 자유무역의 차이점은 무엇인지 생각해보세요.
서울 사람이 부산에 물건 파는건 아무렇지 않은데, 칠레 사람이 한국에 농산물 파는건 왜 문제가 될까.

위에서 말씀드린 중상주의가 지배적이었던 시절에는,
서울 사람이 부산에 물건 파는 것에도 세금이 붙고 그랬다고 합니다. 그래서, 서울 상인들은 집단적으로 반발해서 프랑스 혁명같은 부르주아 혁명을 일으켰죠.
그래서, 국가 내 자유무역이 성립이 되었습니다.

서울을 서울 나름대로, 부산은 부산 나름대로 생산의 이점들이 있겠죠.
그 이점을 활용하는 것이 바로 분업이고 무역입니다.

사람 많은 서울에서는 공장 지어 물건 만들고, 바다와 가까운 부산에서는 물고기 잡습니다.
그리고, 공산품이 필요한 부산 사람들과 생선 요리를 좋아하는 서울 사람들이 서로 교환을 합니다.

이렇게 분업에 의한 특색화가 진행되면서,
우리는 어디는 무슨 도시, 어디는 무슨 도시 하는 명칭들에도 익숙해지게 됩니다.

국가 간 무역도 본질적으로 마찬가지 아닐까요.
도시 뿐만 아니라 국가 전체적인 생산의 이점들이 있을 것입니다.
이런 이점을 살려서 자유무역을 하는 것은 참 바람직한 일이겠죠.

하루 24시간 우리가 소비하는 것들을 모두 직접 생산한다는거,
쉽게 상상하실 수 없을겁니다.

현실적인 얘기로,
한국의 경우 자동차, 무선통신, 반도체, 조선과 같은 주력산업이 있고,
이 주력산업을 하기 위해서는 중동의 석유나 해외 자원들이 꼭 필요하죠.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우리는 세계적인 분업체제에 한발을 담그고 있는 것입니다.

# 우회적으로 부유해지는 방법

제가 위 단락에서 말씀드린 '효율적인 생산을 위한 분업'.
이것을 수치적으로 정식화 한 것이 데이비드 리카르도의 '비교우위론'입니다.

영국에서 반도체보다 자동차를 더 잘 만들고,
프랑스에서 자동차보다 반도체를 더 잘 만든다면,
한 국가 내에서 비교우위가 있는 영국의 '자동차'와 프랑스의 '반도체'를 교환하는 것은 양국에게 이롭다는 것이죠.

『The Choice』에서 1960년대 미국으로 내려온 하늘나라의 리카르도는 '비교우위론'이라는 딱딱한 명칭 대신,
'우회적으로 부유해지는 방법'이라고 표현하죠.

영국에서도 직접 반도체를 만드는 것 보다,
자동차를 프랑스에 판 돈으로 프랑스에서 반도체를 사다 쓰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는 것입니다.

# 자원의 효율적 배분

왜 효율적인고 하니, 바로 '자원의 효율적 배분'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자원이란, 꼭 석탄/석유와 같은 지하자원 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고, 생산에 필요한 여러 요소들을 모두 포함하죠.

국가마다 특성이 있으니만큼,
우격다짐으로 한 국가가 반도체, 자동차, 모두 만들기 보다는,
반도체 만들기 좋은 국가(프랑스)는 반도체만 만들고, 자동차 만들기 좋은 국가(영국)는 자동차만 만들자는 겁니다.

어차피 각국의 주력산업,
우리나라의 반도체, 자동차, 조선, 무선통신, 등등은 자국의 제품들이 경쟁한 결과로 선택된,
자국의 생산입지에서 가장 유리한 제품들일테니까요.

# 괴리에 있어서 현명한 판단을

개인적인 오만인지 모르겠지만,
전 여기까지를 부정할 사람은 별로 없다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좋은 자유무역을 두고 현실에서는 티격태격입니다.
현실의 자유무역화란 실제 굉장히 폭력적인 과정이죠.

자국의 산업을 보호하려는 국가와 그 국가의 수출품에 매기는 보복관세와 같은 국가 간 갈등 뿐만 아니라,
국내에서 상대적으로 경쟁력이 취약한 산업들의 경우 엄청난 반발이 있기도 하죠.

이론과 실제.
이 괴리에 있어서 우리는 현명한 판단을 내려야 합니다.

세계화가 대세이니 모든 산업의 경쟁력을 향상시켜야 한다고 침튀기는 사람들이나,
자유무역에 반대하는 모든 갈등들이 당장 자기 이익에만 집착한 '직관적 판단'이라 매도하는 사람들이나,
자국의 산업을 몰락시키는 세계화는 나쁜 것이라고 말 그대로 '직관적 판단'을 내리는 사람들이나,

그다지 현명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 다양한 스펙트럼

사람들은 흔히 명쾌하게 말할 것을 주문합니다.
"그래서, 니가 하고싶은 말이 뭐야?"

전 "윽박지르지 마세요." 라고 말하고 싶군요.

이 좋은 자유무역을 두고 찬성과 반대로 나뉘어져 있다 하더라도,
실제 찬성하는 측이든, 반대하는 측이든 다양한 스펙트럼이 있습니다. 찬성하는 이유, 반대하는 이유는 제각각입니다.

요즘 TV에서 하는 드라마 『미안하다 사랑한다』를 보면,
극중 소지섭은 실로 다양한 행동을 하지만, 그 이유는 자신을 버린 어머니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서잖아요.
소지섭군이 서지영양에게 접근한다고 해서, '소지섭이 서지영을 좋아하는구나' 라고 감탄하는 사람이 있다면?

'TV 좀 봐라.' 그러겠죠.

# 스펙트럼 나눠 보기

'사랑'이란 것은 마냥 좋은 것이지만,
현실에서의 사랑이 보여주는 모습이란 천차만별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누가 어떤 마음으로 사랑하느냐의 차이입니다.

마찬가지로,
자유무역 역시도 마냥 좋은 것이지만,
누가 어떤 이유로 추진하느냐에 따라 현실에서 드러나는 모습은 달라지는 것입니다.

지금 자유무역을 추진하는 주체가,
리카르도가 강변한 자유무역의 진정한 장점인 '자원의 효율적 분배'니 '우회적으로 부유해지는 방법'을 위해서 추진하고있지 않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 선택, 합의 對 압박, 생존

아시겠지만, 자유무역을 추진하는 힘이란 '자원의 효율적 분배'에 대한 공정한 합의가 아닙니다.
'자원의 효율적 분배'를 대의로 밀어붙여지고 있죠.

제가 이렇게 뭉뜽그려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오늘날 세계화의 화두가 되고있는 국제무역기구들 때문입니다.

세계화 하자면서도, 실제로는 크게 NAFTA, EU, ASEAN, APEC, ASEM, 등으로 쪼개어져있죠.
이중 결속력이 강한 것은 NAFTA와 EU뿐. (결속력이 약한 ASEAN에 대한 NAFTA와 EU의 구애의 결과가 바로 APEC과 ASEM입니다.)

이렇게 자국의 이해를 중심으로 시장을 넓히는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이,
세계화가 '자원의 효율적 분배'를 위해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는 근거가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결속력이 약한 - 즉, 자국의 이해를 반영할 시장이 좁은 - ASEAN 이나 중국, 일본, 러시아와 같은 국가들에게 세계화란,
선택이나 합의가 아니라 압박이고 생존의 논리가 되는 것입니다.

압박에 의해 이루어진 '자원의 분배'가 '효율적'이라는 수식어를 달 수 있을지는 정해져있지 않습니다.

이를테면, 갑동에서 빵장사를 하던 갑이 을동에서 신발장사를 하던 을에게,
" 빵을 만들기엔 갑동이 더 낫군. 내가 보니 을동에서는 신발 만들기가 더 좋구.
을, 자네 갑동에다 신발 팔게. 대신, 난 을동에 빵 팔게. " 라고 한다면?

갑동의 신발장사들과 을동의 빵장사들은 억울하지 않을까요?
사실, 갑은 자기 빵을 을동에서도 팔려고 할 뿐인데.

# 윽박지르기

얼마 전에, 공병호 소장의 <10년 후 한국>을 보니,
곧 몰락할 위기에 놓인 한국 농업인들을 보고 그동안 정부가 준 지원금으로 경쟁력 향상 안시키고 뭐했냐고 하시던데,
이다지도 윽박지르시다니.

이 분은 자유무역의 요체인 '자원의 효율적 배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걸까요.
정부가 준 지원금이면 한국 농업은 동등한 경쟁의 조건을 갖춘 것이고,
농업인들이 제정신만 차렸다면 모든 산업을 한국이 떠맡을 수 있다는 생각이신지?

갑이 을과 자유무역 체결하면서, 갑동 신발장사들에게 윽박지르기까지 한다면?
좀 그런데요?

하긴, 공병호 소장님.
자유무역이 무엇인지에 대한 얘기는 없고, '대세' '추세'만 강조하시더라구요.

# 자원의 이동성에 대해

자유무역에 따른, 전체적인 부의 증대, 그리고 일자리의 교환.

당장 국내 취약 산업의 일자리는 사라지더라도 주력 산업의 일자리가 늘어나니 손해보는 장사는 아닌데에다,
주력산업이 활기를 띄니 경제가 활력을 보일 것이라는 소기의 목적.

그런데, 못된 사랑이 파국으로 치닫는 것 처럼,
주체와 방법이 비틀어진 자유무역도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는데에도 어려움이 있음은 어쩌면 당연한 결론일런지요.

일단, 갑동의 을동에서 빵을 팔게된 갑이,
갑동에서만 빵을 만들라는 방법은 없기 때문입니다.

갑동의 신발장사 중 빵공장에라도 들어가려고 준비하고 있던 이들 허탈해집니다.
을동이면 또 몰라도, 농업 하려고 칠레 건너가기는 힘든 일 아니겠습니까.

'자원의 각기 다른 이동성' 문제입니다.

세계화와 관련한 필독서로 알려진 한스 페터 마르틴의 <세계화의 덫> 서문을 보면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세계화라는 것이 일반 사람들 - 월급쟁이들을 뜻하겠죠? - 에게 살갑지 않은 이유 중의 하나는, 이동성의 문제가 크다는 것입니다.
기업하는 사람들에 비해 취업하는 사람들은 이동성이 떨어진다는 것이죠.

즉,
갑동에 빵공장이 증축될거라는 보장은 없는겁니다.
대신, 갑동 사람들은 을동 사람들과 경쟁력 싸움을 해야겠죠.

기업이 하나둘 한국을 떠난다는 '산업공동화'니,
주력산업에 대한 '경쟁력 강화 주문'이 바로 그것입니다.

갑동 사람들, 갑에게 배신감을 느끼지 않을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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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날 자유무역에 대한 찬반논쟁의 논점은 어느정도 왜곡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The Choice』의 경우, 데이비드 리카르도의 ‘비교우위론‘을 쉽고 재미있는 방식으로 보여주는 것을 목적으로 쓰여진 듯 한데, 비교우위론이란 아직까지도 자유무역 찬성론자에게 두고두고 인용되는 고전이론입니다.

제가 자유무역에 대해서 선뜻 찬성이니 반대를 논하지 않으면서도 굳이 『The Choice』를 들먹이는 이유는,
저자의 생각에는 동의하기 힘들지만, 어느정도 찬반논쟁상의 논점을 바로잡아 주기 때문입니다.

#
이를테면, 우리는 한국 기업이 외국계 자본에 매입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흔히 반대론자들이 갖는 논점상의 왜곡입니다.

얼마 전에 소버린이라는 투자기관이 LG그룹의 경영권을 인수할 ‘뻔’한 일이 있어서 이슈가 되었던 그런거요.
기업의 인수합병이 어제오늘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특별히 이슈가 되었던 이유는, 주체가 외국계 투자기관이라는 이유 때문이었을겁니다.

흔히들, 외국계 투자기관은 핫머니(hot money)니 뭐니 해서 기업경영에는 관심이 없고, 자산 불리기에만 관심이 있다고 하는데,
외국계 자본은 그렇고, 한국계 자본은 그렇지 않다는 믿음은 어디로부터 오는 것인지.

굳이 역설할 필요없이 현실적인 예를 들어볼께요.

01년에 대우자동차가 GM에 매각된다고 말이 많았었는데, GM에 매각되어 GM대우가 된 이 자동차회사. 어떤가요?
버젓이 자동차 개발하고 생산하고, TV에 광고도 내고있습니다. 매각되면 무너진다던 부천경제 역시 그대로입니다.

#
자본을 자본으로 보지않고, 자본의 국적을 따지기 때문에 자유무역의 진정한 논점이 왜곡됩니다.
그럼, FTA라는 국가간 협정을 통해 이루어지는 상호간의 무역과 투자에서 자본의 국적을 빼버린다면?

시장의 확장만이 남게됩니다.
‘자원의 효율적 분배’도, ‘국가기반산업의 보호’도 결국은, 시장의 확장에 대한 찬성반대를 두고 그럴듯한 명분을 붙인 것 뿐입니다.

한번 속는 셈 치고, ‘시장의 확장‘을 논점으로 자유무역의 찬반논쟁을 살펴보도록 하죠.

#
시장이 확장된다는 것의 의미.
그런데, 시장이란 재화나 서비스를 매매하는 공간에 불과하니만큼, 같은 확장이라도 매매의 주체마다 느끼는 바가 다릅니다.

A국가의 특정산업에서 업계순위를 A1, A2, A3가 각각 차지했고, B국가의 특정산업에서 업계순위를 B1, B2, B3가 각각 차지했다면,
통합된 A, B 양국의 특정산업시장에서 업계순위는 A1-B1-B2-(A2-B3-A3) 뭐 이런 식으로 되겠죠?

이렇게 되면, 소비자들에게는 선택의 폭은 넒어진 것을 제외하고는 큰 문제가 없어보입니다.
하지만, 생산자들은 다르죠. 상위 3개 업체만 살아남을 수 있는 업계특성상 과거 A2, B3, A3가 차지했던 시장은 A1, B1, B2에게 적당히 흡수될테니, 상위 3개 업체들 입장에서는 더 넓은 시장과 더 많은 이윤을 뜻합니다. 물론, 하위 3개 업체들은 아니겠죠.

#
이제 예상했던 반응을 기준으로 찬성반대로 편가르기를 해보죠.
[소비자와 A1, B1, B2] - [A2, B3, A3]
이렇게 나눌 수 있습니다. 전자는 찬성을 후자는 반대를 할 것이라 예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저 간단한 편가르기에서 또 많은 얘기를 할 수 있습니다.
우선, 소비자 그룹이 제 예상과는 달리(훌쩍) 현실에서 그다지 목소리를 내지 않는 것도 특이할 만한 사항이구요. 생산자 그룹이 찬성과 반대로 나뉜 것이 인상적이에요.

찬성과 반대로 적당히 나뉜 생산자 그룹의 경우, 현실에서 나타나는 그대로입니다. 찬성 그룹은 반대 그룹의 ‘경쟁력 없음‘ 을 질타할 것이 뻔하죠.
그럼, 이 생산자 그룹에게 남는 선택이란, B국가에서 업계순위 2위를 하던 B2社와 같이 경쟁력 상승을 도모하야 업계 3위로 살아남는 방법 밖에는 없는겁니다.
오늘도 경쟁력 내일도 경쟁력. 다들 노력해도 승부는 상대순위겠지만.

한편, 소비자 그룹의 경우 현실에서 그다지 목소리를 내지 않는 이유는, 그들이 소비자인 동시에 생산자이기도 하기 때문일겁니다. 소비자가 아마 위 6개 중 어느 한 곳에 소속되어 찬성이든 반대를 주장할 것입니다.

결국, 이론상의 편가르기가 아닌 현실의 편가르기는,
[A1, B1, B2] - [A2, B3, A3]
이렇게 되겠네요.
생산자의 이해관계가 소비자로서의 이해관계에 우선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의미심장합니다.

#
결국, 자유무역에서 중요한 논점은 ‘시장의 확장’ 이고, 시장의 확장에서 중요한 것은 생산자의 이해관계라는 그림을 그려봤습니다.

생산자의 입장에서 시장의 확장이란, 더 많은 생산요소를 이용할 수 있는 기회임과 동시에 경쟁의 심화를 뜻합니다.

생산요소. 고등학교 때는 토지-자본-노동 이렇게 배웠는데, 이제 토지-자본-노동-지식 이렇게 된다더군요.
여튼 이런 생산요소들을 더 널리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선택의 폭이 넓어진거죠. 그리고, 넓어진 선택은 더 나은 조합을 만들어내기도 할 것입니다. 찬성론의 명분인 ‘자원의 효율적 분배’ 가 여기서 나오게됩니다.

하지만, 더 많은 생산요소를 이용할 수 있는 대가는 경쟁의 심화입니다.
그 결과에 따라, 상위 3개 회사는 추가적인 시장을 확보할 수 있고, 하위 3개 회사는 자신의 시장을 잃어야합니다.

#
이제까지 엉터리 그림을 인내심과 더불어 지켜봐주신 분이라면,
자유무역 찬성론자들의 ‘자원의 효율적 분배’ 가 왜 명분에 불과한지를, 그리고 왜 소비자의 목소리보다 생산자의 목소리가 더 큰지를 알게되셨길 바랍니다.

‘자원의 효율적 분배’ 는 시장의 확장에 따른 단면만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니, 찬성론자들이 ‘자원의 효율적 분배’ 만을 부각시킨다고 표현하는 것이 낫겠군요.

자원의 효율적 분배란,
나의 토지 대신에 타인의 토지를 사용할 수 있듯이, 나의 노동 대신에 타인의 노동을 사용할 수 있음을 뜻하고, 물론 동시에 타인의 노동 대신에 나의 노동을 사용할 수 있음을 뜻하고, 결국 그의 노동과 나의 노동이 생존의 경쟁을 해야함을 뜻하기도 합니다.

선택은 국적이 아닌 상대순위입니다.
그리고, 상품의 꽃(?)은 피어납니다.

#
한국은 90년대 초반까지 FTA에 반대하다가 뒤늦게 이에 합류했습니다. 한-칠레를 시작으로 미국, 일본, 싱가포르, 아세안에 이어 인도, 유럽까지 확장할 계획이라고 합니다.

한국이 회원국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다자간협정인 WTO에 머무르고 싶었던 것은, 아마도 B2社와 같은 어정쩡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일겁니다.
다자간협상이라는 방식은 모 아니면 도와 같은 방식이었는데, 이것이 난항을 겪으면서 FTA라는게 등장합니다. 협정을 맺은 상호국 사이에 WTO협정을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특혜협정이 가능한 FTA.

땅따먹기 하듯이 EU는 물론, NAFTA(북미대륙FTA)니 AFTA(아세안지역FTA)가 잠식해오는데, 눈치만 보고있다가는 순식간에 따가 될수도 있는 상황이었죠.

뒤늦게 FTA를 추진하기 시작한 한국에서,
앞으로도 찬반논쟁은 계속될 수 밖에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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