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과학자로 살다
타까기 진자부로오 지음, 김원식 옮김 / 녹색평론사 / 2000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마지막 책장을 덮고나서, 다소 벅찬 나머지 책을 가슴에 꼭 안고 있었습니다.
누렇게 뜬 속지와 단정한 표지가 더욱 정겹게 느껴집니다. '녹색평론사'의 책을 더 구해서 읽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 생태주의에 대한 호기심

세살 터울의 누나가 한명 있습니다. 누나는 대학과 대학원에서 조경을 공부했죠.
그녀의 석사시절, 밤낮 없이 연구실에 매여 얼굴 보기도 힘들더니만, 졸업과 함께 엄청난 양의 책과 논문, 보고서, 팜플렛, 등을 가져왔습니다. 그것도 잠시 자리를 비운 제 방에.

떡 하니 방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으니 신경이 쓰이는 것은 당연지사.
게다가, 그림이나 사진이 많은 자료들이라 가끔 들춰보는데, 지난 번엔 꽤 마음에 드는 책을 찾아냈습니다.

<시민과학자로 살다>
내용을 확인했을리 만무하고, 이번에도 제목에만 눈독을 들인 셈입니다. 고질병이죠.
누렇게 뜬 속지와 꾸밈이 많지 않은 책 표지에는, 책의 저자 타까기 진자부로오의 활동사진이 있습니다. 그가 반핵집회에서 연설을 하는 장면이죠.

사실, 환경문제, 혹은 생태주의에 대한 제 문제의식은 대략 이랬습니다.
" 흔히, '환경'이라 하면 꽤나 가치중립적이라 생각하지만, 실상은 그것 역시도 경제논리 - 정확히, 경제개발논리 - 와의 한판 싸움에 분명 얽혀있는데, 경제논리를 비껴갈 수 없는 환경이 제시하는 카드가 바로 '반(反)개발' 혹은 '생태주의' 이다. "
뭐 대충 이런 식이었죠. 정말 대충.

그런데, '생태주의'는 경제라는 괴물과 싸우기에는 너무 약해보였습니다.
그래서, 전역한 민관이 친구가 올렸던, 헬레나 노르베리-호지의 <오래된 미래> - 나중에 알았지만, '녹색평론사'에서 낸 책이더군요. - 독서후기에도, 맥빠진 코멘트(comment)를 주절거렸던겁니다.

더구나, 생태주의에 대한 비관에는,
'생태주의'가 제게 하나의 이미지(image) 혹은 선입견으로만 존재한다는 챙피함까지 섞여 늘 제 자신을 불편하게 했습니다.

이만하면, <시민과학자로 살다>는 눈독을 들일만 했던거죠.

정작 중요한 소개가 늦었는데,
이 책은, 97년 '바른생활상(RLA)'를 수상한 일본의 반핵활동가 - 그는 스스로를 '시민과학자'라고 부릅니다. - 타까기 진자부로오씨(이하 타까기)의 자서전입니다.
당연하게도 그의 자서전에서 원자력, 혹은 반(反)핵에 대한 얘기를 빼놓을 수 없겠지만, 제가 제목을 그리 선택한 데에는, '반핵'보다 '시민과학자 타까기'의 삶에 더 깊이 감명한 탓이겠지요.

# 과학자가 세상을 만나다

그의 성장기는 일본의 2차 세계대전 패망과 함께 시작됩니다. 소위 '전후(戰後) 민주주의' 시기죠.
얼마 전 어떤 칼럼니스트는 독도 문제에 대해 얘기하면서, 일본의 민주주의 - 이는 전후 민주주의와 같습니다. - 가 '제 스스로 이루어 낸 성과가 아니기 때문에 충분히 성숙하지 못한 것이다' 라고 논평했는데, 타까기씨가 바로 그 시대에 성장했습니다.

" 나의 체험적 인상에서 말하면 국가나 공권력, 제도 등이 교육의 전면에 거의 나타나지 않던 시대에 선생들도 신헌법 하의 민주교육에 대해서 당혹스러워하면서 학생들과 함께 시행착오를 되풀이하고 있었다. 그게 오히려 학생들에게 좋은 환경을 제공할 수 있는 묘한 시기였을지도 모른다. "

책이 그의 자서전이니 만큼, 성장기에 대한 언급은 자연스럽게 등장하는 것이지만,
그의 성장기는 유독, 이후 그의 삶의 우여곡절을 대변하는 인상을 주고있습니다.

그는 이런 혼란상 속에서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하는 데에 익숙해지고, 동시에 약간의 반골기질을 보이게 되는데,
이는 공교롭게도 그를 수학에 - 혼자서 몰두할 수 있는 - 빠지게 합니다. 그리고, 후에 수학을 포기하고 화학을 선택한 그는, 대학원에 진학하는 친구들과는 다르게 '일본원자력사업 주식회사'에 취직하면서 다시 한번 청개구리 성향 - 전적으로 그의 표현을 빌릴 때 - 을 보이게 되는데,

'일본원자력사업 주식회사'는,
그에게 여러 면에 있어서 실험실의 핵이 아닌, 현실의 핵과의 만남을 주선하게 됩니다.

뭐 저도 잘 알고있는 것은 아니고 대략적인 밑그림을 그리는 수준입니다만,
여기서 일본의 원자력산업에 대해서 얘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익히 알려져있다시피, 일본은 45년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두 차례 원폭을 당하면서 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한 국가이죠.
일본인들에게 '핵'이란 어떤 것일지 대략 짐작할 수 있는 대목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런 일본에서 원자력 산업, 즉 에너지로서의 원자력 이용이란, '에너지' 보다는 '원자력'에 강조점이 찍혀있었을 겁니다.

타까기씨가 '일본원자력산업 주식회사'에 취직한 61년은,
일본이 전후에 원자력산업을 막 시작하고 있을 즈음이었죠. 그리고, 동아시아의 개발모델에서 흔히 보여지듯, 게발시기 산업이란 정치적 의도나 금융자본의 의도가 앞서가며 시작하기 마련입니다.

평범한 과학도의 갈등은 여기서 시작됩니다.
그의 흥미는 방사성물질의 방출이나 오염에 관한 것이었고, 그 결과 역시도 "방사성물질의 거동은 복잡해서 아직 모르는 게 많다. 더욱 기초 연구를 충실히 하지 않으면 않된다." 뭐 이런 류의 것이었는데, 전후 개발의 에너지원을 구상하고 있는 회사의 입장은 그와 달랐던 겁니다.

# 과학자가 세상과 갈등하다

후에 언급되지만, 그는 이 때 까지만 해도 '원자력 반대'가 아니었다고 합니다.
다만, 회사 - 그것도 익히 알려진 일본형 기업 - 와의 갈등을 참지 못했고, 결국 전직을 하게 되는데, 그는 좀 더 학문 중심적인 대학의 부속 연구소로 자리를 옮기게 됩니다.

그는 토오꼬오대학 부속기관인 원자핵연구소로 자리를 옮겨 마음껏 연구를 하는데,
다시 한번 갈등에 부딪히게 됩니다. 연구를 위해 바다와 산의 고암석을 찾는 도중, 진흙과 암석 일부에서 세슘-137 이라는 '죽음의 재' 성분을 검출한 것입니다.
그가 직접 발견한 '죽음의 재'는, 당시 일본 사회를 두드리던 공해문제 - 미나마따병, 이따이이따이병, 요까이찌 천식 - 와 함께 그의 마음을 두드립니다.

" 특히 나에게 인상이 깊었던 것은 기업측이 데이터를 감추고 있었다는 사실과 미나마따병을 비롯한 많은 공해 문제의 원인조사에 참가한 과학자들이 일부 예외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풍토병이나 바이러스설 같은 가설을 세워 기업측을 옹호하려고 했다는 점이었다. (중략) 이 일이 자기의 문제가 되면 어떻게 대처했을까. (중략) 내가 과학자이기 때문에 갖게 된 이해관계를 이미 무자각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과학자 집단에 귀속되는 것을 받아들이고 그들의 이해관계에 서있었다면, 원체험에 입각하여 어디까지난 자립된 개인의 입장을 관철하기로 했던 너의 의지는 도대체 어디로 가버렸는가. "

그는 피난처와 같았던 원자핵연구소를 떠나, 토오꼬오 도립대학 이학부의 조교수로 자리를 옮기게 됩니다.
- 여담이지만, 조교수 승진에 대한 욕심도 있었다고 고백하네요.

잠시 숨을 돌리며 말씀드리자면, 일전에 구입했던 <일본 근대의 풍경>을 미리 읽어두지 않은 것이 몹시 애석했습니다.
오늘날 한국의 정치지형을 풍자하는 '386세대' 라는 조어가 30대, 80년대 학번, 60년생과 같이 시대적 배경을 함축하고 있듯이, 일본의 전후 민주주의 세대라는 타까기씨를 이해하기에는 그가 사회에 첫발을 내딛은 60년대 일본의 시대상을 이해하는게 필요했습니다.

한국의 60년대 역시도 4ㆍ19 와 함께 시작되었지만,
일본의 60년대 역시도, 베트남전 반대, 오끼나와 반환과 같은 사회적 사건 뿐만 아니라, 미나마따병, 이따이이따이병과 같은 공해문제, 학생운동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그 중 나리따 공항 건설에 반대했던 농민들의 운동이었던 '산리즈까 투쟁'은, 위에서 언급한 '죽음의 재'사건, 문필 미야자와 켄지와 더불어 타까기씨의 원체험을 이루는 세가지로 꼽히고 있습니다.

" 그것은 그야말로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거대한 입을 벌리고 덤벼드는 불도저는 문자 그대로 국가권력 자체였고, 그 앞에 맨몸으로 자기 농토를 지키려고 싸우는 농민들이 있었다. 그리고, 속수무책으로 서있는 나 자신이 거기에 있었다. 나는 어느 편에 서있는가. 심정적으로는 농민들 편이었지만, 실제로 나는 국가권력이라는 거대 시스템 측에 속해있는 게 아닌가. "

" '우리는 어떠한 방법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과학을 우리의 과학으로 만들 수 있는가?' 이 말을 읽고 나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이것이야말로 내가 지금 직면하고 있는 문제가 아닌가. 이 말은 1926년 켄지가 시작했던 라스찌진협회에서 만든 모임 안내서에 들어있는 말로서, 켄지가 농민들에게 한 강연의 제목이었다. "

# 과학자가 시민과학자가 되다.

세상과 갈등하는 과학자 타까기는 잠시 독일 막스-프랑크 핵물리연구소에 외래연구원으로 재직하며 자기 자신을 돌보는데,
이때 호르크하이머, 하버마스와 같은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저작을 탐독하고, 독일의 신학ㆍ철학자 출신의 활동가들과 여러차례 토론을 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 '비판'이라고 하면 우리 자연과학자들을 무엇보다 논문의 계산착오나 기껏해야 논리적 정합성을 확인하는 정도밖에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근원적인 비판은 우선 인간의 관심을 어디에다 두어야 하는가를 문제 삼고, 그러한 관심을 전제로 인식이 나아가는 과정을 성찰하는 것이다. 그러한 성찰 없이 객관성이라는 명분만 가지고 측정 데이터 등을 절대적인 진리라고 강요하는 것은 자연과학의 전형적인 이데올로기이다. "

그가 깊은 도움을 받았다고 회고하는 하버마스의 <인식과 관심>은 역사학자 에리히 프롬의 <역사란 무엇인가>와 맥을 같이 합니다. - 후에 알게된 일이지만, 에리히 프롬 역시도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일원이었습니다.

과학의 객관성 내지는 과학자로서 가치중립적인 위치를 지킬 수 있는가 하는 점은,
그가 독일생활을 정리하고 '원자력자료정보실(이하 자료실)'을 세우며, 소위 '시민과학자'로 자신을 정립한 이후에도 그에게 끊임없이 던져지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자료실은 타까기씨가 이후 일본의 원전 연구자들과 함께 설립한 단체인데, 이후 반핵운동 과정에 정보실이 역할을 맡으면서, 그는 이 단체를 공동으로 설립한 과학자들과 '단체의 중립성'에 대해 갈등하게 되는거죠.

자료실의 원로인 다께따니 선생은,
" 과학자에게는 과학자의 역할이 있고 주민운동에는 운동이 해야 할 역할이 있다. 자네, 시계를 쇠망치 대신으로 쓰다가는 시계만 망가뜨리게 되고 결국 시계도 쇠망치도 안된다. " 라고,

타까기씨는,
" 자료실은 어떻든간에, 저 개인은 그런 역할을 하는 사람이기를 거부합니다. 적어도 쇠망치가 될 수 있는 시계가 되고 싶습니다. 시계가 망가지더라도 최소한 쇠못의 역할만이라도 하는 게 옳다고 생각합니다. " 라고 입장을 밝히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이후 <반원발신문> 이라는 일본의 반핵운동 소식지 편집에 그가 깊이 관여하는 것으로 표현됩니다.

하지만, 타까기씨는 자료실과 반원발신문 모두를 포기하지 않으면서,
건강을 몹시 해치게됩니다.

# 과학자는 과학자가 아니었다.

또 잠깐 숨을 돌려보죠.
일전에 옛 친구들이 그리워 싸이월드에서 사람찾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박OO'를 검색하니 백명이 넘는 사람이 나왔지만, 한명한명의 미니홈피를 둘러보며 그 친구를 찾아봤습니다.

백명이 넘는 사람 중에서 그 친구를 찾는 방법이란,
그 친구의 '이름'일 수는 없었던거죠. 가장 인기있는 사진을 제외한다면, 취미며 특기부터 시작해서, - 절친했다면 - 그 친구의 필체와 생각들을 기억하는 것이 그 친구를 찾는 방법일겁니다.

그 많은 '박OO' 앞에는, 사실 보이지 않는 수식어가 있는거죠.

타까기씨는, '시민'이라는 수식어를 '과학자'에 덧붙임으로서 자신의 가치를 표현했습니다.
아니,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모든 과학자들이 보이지 않는 수식어를 붙이고 다니는겁니다. 타까기씨는 그것을 드러내보였을 뿐이구요.

비약하자면, 타까기씨가 걷어내고자 했던 보이지 않는 수식어란,
'일본원자력산업 주식회사' 였고, '죽음의 재' 였으며, '산리즈까' 였을겁니다.

과학자는 과학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과학자들은, 수식어를 붙인 과학자들을 싫어하는 듯 보였지만, 사실 수식어를 바꾸는 과학자들을 용납할 수 없었던겁니다.

# 이후의 문제. 그럴싸한 스펙트럼(spectrum)

그의 얘기를 좀 더 들어볼께요.
" 이미 과학자나 기술자가 되어있었던 사람들의 경우, '학문이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에 세가지 방향의 대응을 했다. 하나는 과학자나 기술자라고 하는 전문가 자체를 특권적인 존재로 보고 그러한 특권을 스스로 버린 사람들이다. 둘째는 체제 내에 머물러 모순과 싸운다는 입장이었다. 세번째 입장은 체제 내의 지위를 버리고 자립적인 과학ㆍ기술을 지향했다. (중략) 현대의 과학기술은 연구개발을 위해서 거대한 시스템이 필요하다. 사회 비판적인 일을 하더라도 일정한 조직적 배경이 없으면 안된다고 당시는 생각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세번째 길의 가능성을 부정적으로 보았다. "

과거에 대한 회고 치고는 참으로 그럴싸한 스펙트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정답은 없을 수도 있습니다.
다만, 첫째는 갈등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수식어) + 대명사'를 갖게 될 것이고, 둘째는 마음고생을, 셋째는 꽤나 허약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짐작할 따름이죠.

타까기씨는 셋째를 선택했고,
마지막장에는 그가 시민과학자로서 자신을 정립한 이후의 활동들에 대한 회고가 담겨있습니다.
'돈과 생명의 싸움', '주민들에게 배우다', '무시와 유혹', '괴롭힘'과 같은 소제목들은, 셋째 역시 둘째 못지 않은 마음고생을, 아니 더한 마음고생을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 진심

" 진지한 마음으로 하면
십중팔구 이루어진다
진지한 마음으로 하면
무엇이든지 재미있다
진지한 마음으로 하면
누군가 나를 도와줄 것이다 "

타까기씨가 친구 K씨 부부로 부터 선물받아 걸어둔 액자의 한 구절이라고 합니다.
일본 나가노현의 안라꾸지 주지스님의 글이래요.

정작 눈독을 들인대로 생태주의에 대한 호기심을 채우지는 못했지만,
'핵이 없는 사회를 반드시 실현시키고 싶다'는, 진지한 마음 하나로 살아왔다는 타까기씨.

그의 진심이,
대학생 타까기, 공무원 타까기의 가려진 수식어를 밝혀냈다면 너무 감상적인가.

# 보태어

말씀드린 '수식어' 얘기를 하느라, 놓친 부분들이 많이 있어 아쉽습니다.

우선, 원자력에 대한 부분.
책을 통해 옅본 일본의 원자력산업도 그러했지만, 한국의 원자력산업은 어떠한지요. 중앙집권적인 성격을 가진 원자력산업을 비롯해서, 거대 테크놀로지와 민주주의가 어디까지 서로를 허용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
그리고, '환경 인종주의'. 즉, 원자력시설 입지가 인구 과소지역에 편중되는 문제, 방사성 폐기물이 타국ㆍ타민족에게 전가되는 문제, 등은 다시 살펴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생태주의'에 대해서.
갈등의 대치선이 명확한 경제논리에 익숙하다보니, 자꾸 둔감해지는 것 같아요. 책을 제대로 골라 꼭 한번 읽어보고 싶어요.

마지막으로, 기회가 된다면,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일련의 저작도 둘러보고 싶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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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문학과지성 소설 명작선 5
조세희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9년 11월
평점 :
절판


원제 보다는 '난쏘공' 이라는 줄임말로 더 익숙한 책. 70년대를 대표하는 노동문학으로서, 당시 대학가에서는 신입생들의 필독서로, 이제는 수능 필독서가 되었다는 그 책.
조세희씨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무척이나 늦게 만났습니다.


" 나는 어머니에게 내가 하는 일을 설명하지 않았다. 나는 승용차 시트 뒤에 달려 있는 트렁크에 구멍을 뚫었다. 드릴로 구멍을 뚫은 다음 십자나사못을 틀어넣는 것이 나의 일이었다. 나는 권총 모양의 두가지 공구를 사용했다. 하나로는 구멍을 뚫고 다른 하나로는 나사못과 고무 바킹을 넣었다. 선참 공원들은 나를 <쌍권총의 사나이>라고 불렀다.

일을 하면서 처음으로 기계에 의한 속박을 받았다. 난장이의 아들에게 이것은 아주 놀라운 체험이었다. 콘베어를 이용한 연속 작업이 나를 몰아붙였다. 기계가 작업 속도를 결정했다. 나는 트렁크 안에 상체를 밀어놓고 두 가지 작업을 동시에 해야 했다. 트렁크의 철판에 드릴을 대면, 나의 작은 공구는 팡팡 소리를 내며 튀었다. 구멍을 하나 뚫을 때 마다 나의 상체가 파르르 떨었다. 나는 나사못과 고무 바킹을 한입 가득 물고 있했다. 구멍을 뚫기가 무섭게 일에 문 부품을 꺼내 박았다.

날마다 점심 시간을 알리는 버저 소리가 나를 구해 주고는 했다. 오전 작업이 조금만 더 계속되었다면 나는 쓰러졌을 것이다. <쌍권총의 사나이>는 점심 식사를 제대로 할 수 없었다. 혓바늘이 빨갛게 돋고, 입에서는 고무 냄새와 쇠 냄새가 났다. "

인용한 단락은, 극중 주인공격인 난장이의 첫째 아들 영수의 독백입니다.
<난쏘공>을 이미 일독하신 분들, 그리고 혹 제가 인용한 단락을 통해 <난쏘공>을 처음 접하신 분들께 한가지 물어볼께요.

" 영수의 심정을 가장 극적으로 표현해주는 문장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

물론, 모범답안 같은건 애초에 없습니다. 그저 제 생각과 여러분의 생각을 좀 더 깊이 살펴보고싶을 따름이니까요.

전 많은 분들이 '오전 작업이 조금만 더 계속되었다면 나는 쓰러졌을 것이다.' 를 지목하셨으리라 미루어 짐작해봅니다. 저는 '일을 하면서 처음으로 기계에 의한 속박을 받았다.' 를 지목했습니다.

...

엄밀히 말해, 무자르듯 나눌 수는 없지만,
전자(前者)를 선택하신 분들은 '분배' 라는 관점, 후자(後者)를 선택하신 분들은 '소외' 라는 관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분배'는, 삶의 물질적 조건에 대한 구체적인 표현입니다.
영수라는 노동자가 곧 쓰러질 것 같은 몸을 이끌고 있는 곳은, 휴일도 없이 잔업이니 철야니 하는 장시간의 고된 노동과 볼품없는 저임금, 먼지와 기름때로 알려진 열악하고 더러운 작업장이죠.

'소외'는, 삶의 정신적 황폐입니다.
잔업 철야로 24시간 쉬지않고 돌아가는 기계, 하루가 멀다하고 새로 들어오는 개량된 기계. 일의 수고를 덜기 위해 만든 기계일진데, 되려 노동자들은 기계에 매달려가는 듯한 느낌과 왠지 모를 불안함을 느끼는거죠.

앞서, '대부분이 전자를 선택하셨을 것이다' 라고 감히 추측한 것은,
많은 분들이 '부의 분배' 가 노동문제의 전부인 양 생각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후자인 '소외' 의 문제 역시 굉장히 중요하거든요. 오히려, '소외' 를 빼고는, 과거든 현재든, 자본주의 사회의 임금노동문제를 온전히 이해하기 힘듭니다. 심지어, 자칫 오해를 낳을 수도 있구요.

오늘날은, 한층을 둘로 나눈 닭장과 같은 공장도 없고, 잠 안오는 약을 먹어가는 소녀노동자도 없고, 철야를 하는 노동자들의 잠을 깨우기 위해 옷핀을 들고다니는 작업장관리자도 없다는 항변이죠.
<난쏘공>이 고발하는 70년대 노동현실이, 30년이 지난 오늘, "그땐 그랬지" 라는 하나의 굳어진 과거로 치부되어, 스테디셀러로, 수능필독서로 박제화되는 겁니다.

하지만, '소외' 라는 관점으로 바라볼 때,
난장이는 오늘도 작은 공을 쏘아올려야 합니다.

오늘날, 울산이며, 광주, 아산에 있는 세계 유수 기업의 자동차 생산라인에서 일을 하는 난장이 첫째아들 영수는, '시래기와 꽁치를 넣어 끓인 국에 보리가 더 많은 푸석한 밥, 허연 김치 몇 조각의 점심' 을 먹지는 않았더라도, '오전 작업이 조금만 더 계속되었다면 나는 쓰러졌을 것이다.' 라고 말하지는 않을지라도,

여전히 기계에 속박받고 있으니까요.
여전히 돌아가는 라인에 몸을 맡겨야하고, 여전히 신기술 도입에 일자리 걱정을 해야하는 영수입니다. 그에게 일이란, 무언가를 만드는 것이 아닌, 먹고 살기위해 라인에 매달리는 것이죠. 여전히 기계가 그의 일과, 삶을 결정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절대척도로 생각하는 '분배' 란, 즉 물질적 조건이란, 기실 '소외' 의 일부분일 따름입니다. 결국, 정당하지 못한 분배란, 소외의 '결과'라는거죠.

기계를 소유하지 못한 영수, 기계를 통제하지 못하고 기계에 매달려가는 영수, 소외된 난장이 첫째아들 영수의 몫이야,
응당 기계의 다음이 아니겠습니까.

'분배' 라는 척도는,
<노동의 종말> 이 예견하듯 점점 정도를 더해가는 소외 속에서, 점점 더 척도로서의 자격을 잃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난쏘공>에서 그저 70년대 분배의 문제를 회상하는 것으로 그치는건 참 아쉽고, 무기력한 일일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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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재벌
조동성 / 매일경제신문사 / 199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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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시 논문

<한국재벌연구> 라는 딱딱하기 그지 없는 제목에서 충분히 유추할 수 있듯이, 이 책은 유머감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학자들에 의해 쓰여진 책입니다. (교수님 죄송합니다.)
돈 많아 질투심을 유발하는 재벌 2세에 대한 유쾌통쾌한 뒷조사를 기대하셨다면, 크게 실망하실거에요.

책이 쓰여진 80년대 말에서 90년대 초에 이르는 기간은, 해방 이후 줄곧 동반자적 관계였던 기업과 정부의 관계에 앙금이 생기기 시작한 시기 - 오늘날에는 너무나 당연하게 인식되고 있는, 공정거래법이니 수입자유화, 중소기업육성, 수출금융 및 특혜금융지원의 축소, 등등 - 이고, 동시에, 80년대 후반의 사회적인 변화들(87년 민주화투쟁)을 통해서 재벌에 대한 사회적인 비판이 이루어졌던 시기이기도 하죠.
단적으로 얘기해서, 재벌기업들이 일말의 위기의식을 감지했던 시기가 될겁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좋은 의도이든 나쁜 의도이든, 재벌에 대한 비판 자체를 승화시켜야 할 필요성이 제기되는 것은 당연지사 인지상정.
서울대 연세대 서강대의 유수 경영/경제학자들이 모여, 재벌에 대한 인식 전환을 꾀하고자 쓰여진 셈입니다.

형식은 깔끔한 논문형식입니다.
매쪽 빠짐없이 통계자료가 들어가있을 정도로, 간단하게 잡아낼 수 있는 결론에도 실증적 근거를 놓치지 않으면서 학자 특유의 성실함을 보여주고 있는 책입니다.
이야기? 전개 역시도 논문 특유의 그것으로서 명쾌하구요.

# 재벌을 비판하는데에도 충분조건이 있다?

너도 재벌 나도 재벌, 참 쉽게들 말하는 재벌을 대체 무엇이라 정의해야 하는가 부터 이 책은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 지극히 학자스러운 목차 구조를 바라보며 벌써부터 볼멘소리를 하시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사실 '재벌의 정의'는 후반부의 결론으로까지 나아가는 중요한 구조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필자 - 서울대 경영학과 조동성 교수 - 는, 재벌의 정의와 더불어 논점을 잡아내는데 100여쪽이 넘는 분량을 할애하면서,
기존의 서적이나 논문에서 정의된 재벌에 대한 정의를 살펴보는 것은 물론이고,
미국, 일본, 동남아, 한국의 재벌의 역사와 경제적 사회적 영향력에 대한 분석,
재벌에 대한 일반적인 비판까지 두루 분석한 다음에야 이렇게 논점을 잡아내고 있는데,

" 위의 표를 볼 때 비교대상 중에서 사회로부터 비판이 되어온 대상은 세 그룹, 즉 20세기 전반 이전의 미국 거대기업과 전전의 일본재벌, 그리고 1986년 이전까지의 필리핀 재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반면에 현대 미국의 거대기업과 전후의 일본재벌, 그리고 대만과 홍콩의 재벌에 대해서는 그 사회로부터 반감 또는 비판이 별로 일어나지 않고 있다. (중략)
다시 말해서, 일본의 전후재벌처럼 정경유착의 결과 나타나는 독점적 이윤이 특정개인에게 귀속되지 않고 재벌 주식을 보유하고 있는 분산된 불특정 다수인에게 귀속된다면 이는 사회적 비판의 대상이 되지 않을 것이고, 1920년대 이전의 미국 거대기업처럼 정경유착이 없더라도 기업집단의 독점적 기회가 국민경제의 균형을 파괴하는 경우에는 사회적으로 비판을 받게되는 것이다."

즉, '개인소유의 정도'와 '국민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
이 두가지가, 재벌을 비판하는데 있어 일종의 충분조건이 된다는 것입니다.
둘 중 한가지만으로는 비판의 대상이 아니었다는 다소 도식적인 결론을 끌어냅니다.

" 개인소유지만 국민경제적 비중이 큰 한국의 재벌도 사회적 비판과 제대의 대상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으며, 이를 피하기 위해서는 규모를 줄이거나 개인소유형태를 탈피하는 방안중 적어도 하나를 택일해야 함을 알 수 있다. "

# 노련한 한 수. 둘 다 취할 수 없거든 하나를 버리라.

그렇다면, 쉽게 얘기해서,
비판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둘 중 한가지는 포기해야 되는 상황이 된겁니다.

필자는 '개인소유의 정도'를 선택합니다.

" 대규모성은 기업이 규모의 경제와 내부화의 효익을 누리고 치열해지는 국제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어느정도 수준까지는 경쟁력 확보의 방안으로 갖추어야 하며, 정경유착에 의한 파행적 자본축적은 국민의식과 사회구조의 성숙에 따른 민주화ㆍ다원화의 큰 흐름속에서 더 이상 지속될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재벌에 대한 비판이 경제적 효율성보다 사회적 공정성 측면에 강조점이 두어지고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개인소유형태의 탈피, 즉 소유집중 및 탈법적 승계문제의 해결이야말로 재벌에 대한 사회적 비판을 완화시켜 재벌은 물론 자본주의체제의 존속기반을 확고히 해 주는 정도(正道)라고 할 수 있다. "

국민경제에서 재벌기업이 차지하는 비중이나 영향력들을 고려할 때, 재벌기업의 형태에서 나타나는 효용성을 감안해서,
후자는 포기하기 힘든 가치라는 결론을 내린겁니다.
여담이지만, 특별히 1장을 할애해 한국재벌의 경영성과를 집필했으니까요.

그리고 당연하게도,
포기하게될 '개인소유'와 관련해, 비판 항목들에 대한 대안이 제시되구요.

이를테면,
부의 편중과 관련해서는, 소액주주나 노동조합의 이권 그리고 지주제를,
가족ㆍ혈족 중심의 권력 승계와 관련해서는, 상속ㆍ중여세제 개혁안이나 전문경영인에 의한 경영을 제안하고 있고,

정부의 역할로 넘어가,
특혜대출과 정경유착(정치와 경제의 유착관계), 중소산업의 몰락과 산업구조의 왜곡, 등의 문제를 지적하는 방식입니다.

# 혁명적인 한국경영학회장?

여기에서 중요한 논점 하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필자가 인정하듯이, '우리도 재벌기업이 국민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인정할 것이냐' 하는 것인데요.

사실, 답은 간단합니다. 객관적인 자료를 앞에 두고서 그 비중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죠.
앨빈 토플러의 제4물결이 현실로 다가오지 않은 이상, 오늘날과 같은 대규모적인 생산양식은 재벌기업과 같은 '대규모적이고 사회적인 조직체'를 필요로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소유의 문제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대규모적이고 사회적인 조직체'를 누가, 어떻게 소유할 것이냐.

다시 필자에게로 돌아가보죠.
필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 한국의 재벌이 사회적 비판을 극복하고 한국경제의 성장과 형평의 조화에 기여하기 위해서는, 재벌의 소유경영자가 기업을 사적 소유물이 아닌 사회적 실체로 인정하고 경영의 전문화, 그리고 개인이 아닌 사회 전체를 위한 기업활동을 실천하려는 의지를 보이는 일이다. "

와 KS(경기고-서울대) 출신에다가 경영학회장까지 맡고있는 엘리트 인사가 이렇게 혁명적인 발언을 하다니.

사실, 자본주의경제의 운동방식이 필연적으로 거대한 생산조직을 출몰시킬 것이라는 주장은,
한평생 자본주의를 연구한 K.마르크스에 의해서 주장된 바 있습니다.

마르크스에 의하면,
세계적인 규모로 조직된 생산조직은, 응당 생산조직을 운영할 노동자들 역시도 세계적인 규모로 조직할 것이라고 했는데,
조직된 노동자들이란, 다름아닌 생산수단의 사적인 소유가 폐지된 공산주의 사회에서 생산조직을 운영할 주체들이기도 했습니다.

조동성 서울대 교수가 '혁명적'이라구요?
믿기 힘들지만, 그도 분명 기업을 두고 '사적 소유물이 아니다' 라고 하고 있으니까요.

# 작지만 큰 간극

농담이 지나쳤던 것 같습니다.
윗 단락에서 아스라히 만날 뻔한 필자와 K.마르크스 사이에는 작지만 큰 간극이 있습니다.

결정적인 근거를 제가 인용한 필자의 글에서 다시 찾을 수 있습니다.
'기업을 사회적 실체로 생각해야 한다' 라는 문장의 주어가, 엄연히 '재벌의 소유경영자' 라는 점과,
'기업의 공공소유'가 아니라, '기업을 사회적 실체로 인정' 이라는 부분입니다.

미묘한 단어의 차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현실에서의 간극은 그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니까요.

제대로 된 경제학 수업이라고는 전연 들어본 적도 없는 젊은이로서 무례를 감수한다면,
필자인 조동성 교수님께서 대략 '오버'하신 듯 합니다. 사회적 분위기가 판이하게 달랐던 90년대 초라지만, 책임지지 못할 발언이었죠.

재벌의 소유경영자가 공식석상에서 '인정'을 하느냐 마느냐와 상관없이,
기업이 기업으로 존재하는 이상, 그것은 분명 사적인 소유물입니다.

제가 책을 제대로 읽었다면,
필자 역시도 이점을 부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후반부, 필자의 대안에서도 드러나듯이,
'인정'하는 수준에서의 '사회적 실체'란, 익히 알려진 '기업의 사회적 책임' 정도가 될테니까요.

일련의 논조가 <한국재벌연구>라는 제목과 다르게, '재벌에 대한 비판'에 맞추어져있다는 점과,
'기업을 사회적 실체로 생각해야 한다' 라는 문장의 주어가, 엄연히 '재벌의 소유경영자' 라는 점으로 미루어보아,
일종의 '구색갖추기' 정도로 느껴지는건 제 선입견일런지요.

# 떼었다 붙였다하는 옵션(option), 복지와 공공성.

거리에서 소위 '데모'하는 사람들을 보면, '공공성'이라는 이슈를 줄곧 내세우는데,
사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복지'나 '공공성'이란, 떼었다 붙였다 할 수 있는 일종의 옵션(option)에 불과합니다.

복지의 경우는,
소위 '나누어질 파이'가 있는 호황시기에도 가능하지만,
생산은 이루어지는데 소비가 안되는 디플레이션(de-flation) 불황 시기에 구원투수마냥 등장하는 것입니다.

복지를 통해 빈곤한 다수의 소비능력을 보충하는거죠.
보충된 소비능력이 생산과 소비 사이클(cycle) 중에서, 무너져있는 소비를 일으켜세우면서 다시금 사이클(cycle)을 만들어냅니다.

이는 그동안 경제사 면면을 보면서 깊이 느꼈던 부분이기도 합니다.
29년 대공황 시기에 미국의 경제부흥법은 불황시기의 복지의 대표적인 그것이죠.

공공성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북클럽에도 몇편 올라온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독서후기에도 쓰여진 바 있지만,
자본주의가 우리가 숨쉬는 공기와 같다고 느껴지는건, 그것이 특정 집단이나 사상의 조류가 아니라 '생산양식'을 지칭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삶을 영위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생산하고 소비해야 하는 재화.
그 재화를 생산하고 유통하고 소비하는 양식이 바로 '생산양식'이고 '경제체제'인 것이죠.
그것이 숨쉬는 공기와 같지 않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따름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공공성이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 즉 이윤을 위한 생산양식에서 동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이윤적자적인 사업양식이 용인된 사업공간이라고 보는 것이 더 현명할겁니다. 밑지는 장사를 하는건 국민, 장사밑천은 세금이겠죠.

하지만, 더 이상 밑질 수 없게 되는 순간,
여느 기업과 다름없이 팔려나갑니다. 국민의 손에서.
 
# 얼마면 돼?

책 고르기를 인터넷 쇼핑몰 구경하듯 하다보니, 간혹 실수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번 <한국재벌연구>가 그랬습니다.

헌책방의 책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신간(新刊)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보니,
'그땐 그랬지' 하며, 시대에 뒤떨어진 주장들에 피식 웃음이 나올 경우가 있는데요.

미국이나 영국에서는 60년대에 시작된 신자유주의 경제사조가 한국에서 본격화 된 것은, 90년대 중후반.
더군다나, 신자유주의가 그 속도를 유달리 하여, 제반경제구조를 급격하게 변화시켰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 책이 쓰여진 90년초를 '그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겁니다.

필자가 후반부에 제시한 대안 역시도, 오늘날에는 굉장히 무색하게 느껴지는 것들이죠.
단적인 예로, <한국재벌연구>에서 종종 등장하는 '국민경제'라는 말을 요즘에는 별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국민경제'는 '국가경제'로, '국민총생산(GNP)'은 '국가총생산(GDP)'으로 대체되었죠.

그 배경에 세계화가 있습니다.
얼마 전부터 MS에서 내보내기 시작한 CF 처럼,
- 그 왜 아시죠. "넌 어디야? 런던?" "아니, 파리" "언제 갔어? 오전엔 베를린이었잖아." "계약, 일정 모두 바뀌었다구" "보내줘" "보냈어"
투자도 생산설비도 국적을 넘나들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시장'과 '국가'중 이점을 가지게 되는 것은 '시장'입니다.
미우나 고우나 국내에서 투자 및 생산을 하던 시절과, 미우면 떠나면 그만인 오늘날을 비교하는건 좀처럼 쉽지 않죠.

필자의 대안이 무색해지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필자가 주장하는, '기업의 사회적 실체', 즉 공공성을 재벌의 소유경영자에게 요구하려면 힘이 있어야하는데,
그 힘을 이 책의 쓰여진 90년대까지만 해도 국가가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죠.
무슨 드라마의 원빈처럼 물어볼겁니다.
" 해외투자 비용, 얼마면 돼? " 하고 말이죠.

시장의 힘, 기업의 힘은 더욱 세지고 있습니다.

# 나름대로 재밌는 기업-정부 모델(model)

시장의 힘이라. 한마디로 역전된거죠.

필자의 대안부분에 치중하느라 다소 소홀했습니다만,
해방 이후 재벌성장사에서 기업과 정부의 관계도 세심히 검토하고 있는 이 책에는, 과거 기업과 정부, 시장과 정부와의 관계도 깔끔하게 분석하고 있습니다. 통계와 도표, 수식에 모델까지 동원되었죠.

필자에 따르면, 기업과 정부의 관계는,
(1)중상주의 → (2)자유방임주의 → (3)입법주의 → (4)가부장주의 의 단계로 발전한다고 합니다만,
이제 탈(脫)모델화 한 것 같습니다.

다소 도식적이긴 합니다만,
시장과 정부라는 두가지 주체의 대립이,
(1)무정부상태 → (2)시장>정부 → (3)정부>시장 → (4)정부-시장 했던 시기로 볼 수 있을거에요.

한국은 자본주의를 수입한 경우라 중상주의 단계는 없었지만,
해방 이후부터 시작해 해외원조를 받아가며 장사밑천을 마련하던 60년대를 거쳐 계획경제를 시행했던 70년대까지를 (2)자유방임주의 단계로,
80년대부터는 (3)입법주의 단계로 볼 수도 있는데,

솔직히, (4)도 그렇고 한국의 실정에 잘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드는건,
아마도 한국에서는 경제발전과정에서 시장과 정부의 유착이 유달리 심했던 탓일겝니다.

한국일보의 누가 쓴 것 처럼,
이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인적 연속성' 때문일 수도 있겠구요.

# 논문의 매력 + 잡담

번번히 실망하면서도 학자들의 논문에는 묘한 매력이 있는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저처럼 서문 읽기를 돌같이 하여 무조건 달려드는 사람들에게는,
문제의식을 뚜렷하게 보여주는 학자들의 글은 결론과 상관없이 명쾌해서 좋습니다.

하지만, 간략하게나마 한국 경제사와 정부-기업관계, 삼성ㆍ현대ㆍ기아를 비롯한 10대 재벌기업의 역사를 훑어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 소득이 있었고,
소액주주 운동이나 상속ㆍ증여세제의 변화에도 더 관심을 가지게되었습니다.

일본 경제사를 생략한 것이 좀 아쉽지만,
이제 경제사 여행도 얼추 마무리지을 때가 된 것 같아요.

여지껏 읽은 책 보다 좋은 책들이 얼마든지 더 있지만,
제가 받아들일 수 있을만한 수준은 아닌 것 같아, 일단 이 정도로 만족해야할 것 같습니다.

역사책 한권에 책갈피를 끼워둔 것이 기억납니다만,
당분간은 소설을 읽을 생각입니다.

<한강> 이후로 오랜만에 발을 동동구르게 하는 책을 발견했거든요.
저만 이제서야 읽는 것 같아 챙피하지만,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어제 우연히 얻었지 뭐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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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란 무엇인가
E.H.CHRR / 다문 / 1991년 2월
평점 :
품절


# 들어가며

'역사란 대체 얼마만큼 객관적일 수 있을까'
역사의 대상이 되는 것은 '과거의 사건과 인물'.

유일하게 진실인 하나의 행적이 존재한다 한들,
너무 많은 역사가가 너무 많은 사료를 바탕으로 지어낸 저마다의 역사가 그것과 합치하는지 알게 뭐람.

이 의문을 해결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루에도 몇번씩 과거의 사건들에 대해서 얘기하고, 그 의의에 대해서, 교훈에 대해서 얘기를 한다니.
어쩌면, 내 입맛에 맞는 역사만을, 내 입장에 유리한 역사만을 취사적으로 선택한 것은 아닌지.

한번쯤 고민해보셨을겁니다.

# 역사가와 사실

" 시저가 루비콘이라는 작은 강을 건넜다는 것을 역사적 사실로 본 것은 역사가들이 자기들의 비유에 따라 관심을 갖고 결정한 것이지 그 전에나 그 후에 수백만의 다른 사람들이 루비콘 강을 건넌 사실에 대해서는 어떤 역사가도 관심을 두지 않는다. "

사실성을 전제한다면, 사료 자체는 절대 객관적일 수 없습니다.
역사가가 과거의 특정 사실에 주목하여 취사선택하여 사료로 삼는 그 순간,
이미 과거의 인물과 사건이라는 객관적 실체는, 역사가 개인의 주관을 통해 한번 걸러지게 되는 셈이니까요.

우리가 일컫는 역사는, '역사가의 주관'과 '과거의 사실' 과의 만남을 통해서 비로소 시작됩니다.
여기서 저 유명한 한구절이 등장하는군요.

" 역사란 역사가와 사실 사이의 상호 작용의 부단한 과정이며 현재와 과거와의 끊임없는 대화이다. "

그리고, 역사학자 Carr 는 조언합니다. 역사를 연구하기에 앞서, 역사가를 연구하라고.

# 사회와 개인

" 인간을 개인으로서 취급하는 것은 전기이고, 인간을 전체의 일부분으로서 취급하는 것은 역사라고 구분한다는 것은 그럴 듯 하고,
또한 좋은 전기는 나쁜 역사를 만든다는 생각도 그럴 듯해 보인다. "

그런데, '과거의 사실' 이야 이렇다 저렇다 할 말이 많지 않으니, '역사가의 주관' 을 좀 더 들여다보도록 하죠.
역사라는 것이 역사가의 '주관'에 달린 문제라면, 대체 어디에서 객관성을 확보할 수 있단 말인가 라는 질문을 던져봅니다.

Carr 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역사가의 '주관' 이란, 사실 '주관' 이 아니다..
갸우뚱하던 독자에게, 이 온화해보이는 역사학자는 다시 일갈합니다.

" '주관'이라는 것이 대체 있기는한가? "
역사가 역시도 하나의 사회 현상이고 자기가 속한 사회의 산물인 동시에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그 사회의 대변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한가지 조언을 덧붙입니다.
역사책을 집어들 때에는 표지에 적혀있는 저자명을 찾아보는 것 만으로서는 충분치 못하다. 간행자나 집행 시일도 아울러 유의해야 한다고.

# 역사와 과학과 도덕

" 관찰자와 그 대상, 사회 과학자와 수집된 자료, 역사가와 사실들, 이들의 관계는 연속적인 것이고 부단히 변화한다. "

그래, 좋다. 역사가도 연구하고, 간행자와 집행 시일도 아우러 유의하지.
그럼에도 독자에게 풀리지 않는 의문, 그래도 역사란 별로 믿을게 못되는 것 같은데. 쩝

그러자, 역사학자 Carr, 드디어 성이 났나 봅니다.
" 이제껏 무엇을 들으셨소? 역사란 '믿는다/안믿는다' 처럼, 정체되어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오. "

엥. 이제껏 몇편 안되는 역사책을 뒤적이며, '아 이런 일이 있었군' 내지는 '아 이래서 저렇게 된거였군' 따위의 감탄사를 연발하기 바빴던 독자.
통념은 깨어졌고, 심기는 불편해졌습니다. 이제서야 진지하게 이 역사학자의 얘기에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그도 이제 친절하게 재차 설명해줍니다.

" 내가 강조하고 싶은 단 한 가지 요점은, 추상적 초역사적인 기준을 세워 놓고서 그것에 의하여 역사적 행동을 판가름할 수 없다는 것이다.
...
오늘날 완전한 독립성을 주장할 수 있는 과학이란 거의 있을 리 없고, 사회과학의 경우는 특히 그러하다. "

# 역사에서의 인과관계

" 역사에 있어서 인과관계라는 논의의 열쇠는 바로 앞에서 본 목적이라는 관념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반드시 가치 판단을 포함하게 된다. (중략) 역사에 있어서의 해석은 언제나 가치 판단과 결부되고, 인과 관계는 해석과 결부된다. "

말씀드렸다시피, 이제 독자의 통념은 깨어졌습니다.
같은 시대를 다르게 서술해놓은 두권의 역사책을 제 앞에 놓아둔다해도, 흥분하지 않을 자신이 생겼습니다.

저자와 시대적 배경을 포함해 두권 모두 고루 읽은 다음 해야할 일은, 옳게 쓰여진 한권을 취사선택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알았습니다.
각자에 담겨진 역사의 인과관계 - 이러저러한 사건이 '왜' 일어났는가 - 를 모두 주목해야겠죠.

# 진보로서의 역사 & 넓어져 가는 지평

" 진보를 믿는 것은 결코 어떠한 자동적인 불가피한 과정을 믿는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 가능성의 계속적인 발전을 믿는다는 뜻이다. 진보라는 말은 추상적인 것이다. 인류가 추구하는 구체적 목적은 역사 진행의 과정 속에서 나타나는 것이지 역사의 외부에 있는 원천에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

Carr 는 마지막 두장에서 지금껏 펼쳐놓은 얼개를 실제 세계사에 대입하고 있습니다.
그가 초판을 낸 것은 냉전이 한참이던 1961년. 냉전은 산업혁명 이래로 믿어왔던 일련의 진보, 즉 인류의 역사가 직선으로 발전한다는 헛된 믿음이 학문의 세계에서 그리고 현실세계에서 저만치 물러가던 시기였습니다.

영국의 경험주의자들로부터 근대철학을 구해내고자 했던 칸트처럼,
Carr 역시도 냉전의 한복판의 회의주의와 시니시즘으로부터 '인간 가능성의 계속적인 발전'을 구해내고자 했던 거겠죠.

# 보탬 - 포퍼의 결정론에 대해

이등병 시절 <세계 자본주의의 위기> 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제목도 자극적이었을 뿐더러, 저자 또한 조지 소로스라는 걸출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생각없이 집어들었죠.

제 기억이 맞다면, 이 책은 굉장히 친절하게 쓰여있습니다.
1부와 2부로 나누어, 1부에는 2부에 사용할 개념들을 미리 소개하고 있거든요.
오류성이니 반사성이니 평형에의 접근이니 하는 것들이 그것입니다. 그리고, 이 개념을 소개하기 이전에 그의 스승, 칼 포퍼를 소개하고 있구요.

역사학자의 책을 읽다가 뜬금없이 옛생각이 났던 이유가 아마 포퍼 때문이었을겁니다.
Carr 가 「역사와 과학과 도덕」에서 제시하고 있는 논지가 포퍼의 그것과 굉장히 흡사하기 때문이죠.

이른바, 완전히 독립적인 과학이란 없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이를테면, 경제학이나 사회과학 - 역사학도 물론이겠지만 - 의 영역에서, 주체 자체가 사건으로부터 독립적이지 않다는 겁니다. 역사란 역사가의 의식을 반영하고, 경제는 경제학자의 예측을 반영하고, 사회는 사회과학자의 논술을 반영한다는 것이죠.
한국은행의 경기예측과 삼성경제연구원의 경기예측이 단지 예측으로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소비자들의 심리와 행동에 일정정도 영향을 끼치는 것 처럼.

그런데, 재밌는 것은, 포퍼의 논지는 일찌감치 나왔건만,
실제 포퍼는 다음 단락 「역사에서의 인과 관계」에 등장해 Carr 로부터 '죽은 말에 채찍질을 해서 산 말처럼 보이게 하려는 자' 라는 싫은 소리를 듣고있다는겁니다.

Carr 가 포퍼를 비판하는 이유는, 단락의 제목이 암시하고 있습니다. '역사에서의 인과관계'에 대한 입장이 달랐던거죠.
포퍼는 그의 저서 - <과학적 연구의 논리>, <열린 사회와 그 적들> - 에서 헤겔과 마르크스의 역사관에 대해 '역사주의', '결정론적 역사철학'이라고 혹평한 적이 있습니다.

제목부터 좀 따분하긴 합니다만, 오늘날 까지도 구설수에 오르는 것을 보면 충분히 살펴볼 만한 가치가 있을겁니다.
포퍼는 헤겔이나 마르크스의 유물사관을 두고, 편협하게 물질의 변화에 의해서만 세계의 변화를 해석하고 있으며, 역사라는 일련의 운동에 '물질'과 같은 불가항력적인 요소는 있을 수 없다고 비판합니다.

그에 대한 Carr 의 재치있는 反비판을 인용합니다.

" 당신은 하루 일을 시작할 때 항상 스미스를 만난다. 당신은 날씨나 대학 사정에 대해 친절하지만 무의미하게 인사하며, 스미스도 마찬가지로 날씨나 대학 형편 등에 대해 친절하지만 무의미하게 답한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스미스가 늘 하던 방식으로 답례하지 않고 당신의 외양이나 성격에 대해 심한 욕설을 퍼부었다고 하자.

이에 당신은 어깨를 으쓱하며, 이야말로 스미스의 의지가 자유롭다는 뚜렷한 증거이고 인간사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분명한 증거로 생각할 것인가?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반대로 아마 당신은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불쌍한 스미스! 그래 저 친구의 부친은 정신 병원에서 돌아가셨지.' 또는 '가엾은 스미스! 마누라와 또 싸운 모양이군.' 즉, 당신은 뭔가 원인이 틀림없이 있다고 생각하고 얼핏 보기에 원인이 없는 듯한 스미스의 행동을 파악하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두려워 하는 것은 이렇게 함으로써 당신은 '포퍼'(원문에는 포퍼와 같은 논지를 지녔던 '아이자이어 버린경'으로 되어있습니다.) 의 분노를 사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포퍼는 스미스의 행동을 인과적으로 설명함으로써 당신은 헤겔과 마르크스의 결정론적 전제를 맹목적으로 받아들여 스미스를 못된 사람으로 비난해야 할 덩신의 의무를 몹시 게을리했다고 탄식할 것이니까. "

책을 내려놓고 키득대며 웃었던 구절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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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은행제도론
이방식 / 법문사 / 199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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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치보다 재밌는 속편, 경제

음모론으로 익히 알려져있는 <그림자 정부>(이리유카바 최) 는,
정치편과 경제편 두편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정치편은,
우리가 익히 알고있는 역사의 사건에 대해, 그림자 정부의 개입을 오버랩(overlap)하며,
'그림자 정부'라고 속칭되는 조직에 대해서, 기원과 조직형태, 활동방식, 인물의 면면을 알리고 있습니다.

경제편은 속편치고는 내용의 깊이가 더 있죠.
체계가 없어 다소 산만한 듯한 인상을 주는 정치편과는 달리, 구체적이고 일관됩니다.

제 기억이 맞다면, 경제편은 영국의 모건가(家) - 후일, 미국 월스트리트의 J.P.모건 - 에서 시작합니다.
그림자 정부와 동격으로 놓일만한 이 신흥집단이 노리는 것은 '화폐의 발행권'.

읽은지가 꽤 되어 기억이 희미합니다만,
영-프 전쟁과 독립전쟁, 남북전쟁, 프랑스혁명, 러시아혁명과 같은 굵직한 역사에서부터 오늘날의 금융위기까지,
화폐의 발행권를 사이에 두고 두 세력 - 공공세력과 그림자 정부 - 간의 힘겨루기로 일관되게 묘사되고 있습니다.

# 세련된 음모론

음모론 치고는 좀 세련되었었나요.

어쨌든, 저는 이리유카바 최의 음모론 덕분에 경제사와 화폐제도, 중앙은행에 대해서 좀 더 관심을 갖게 되었고,
역사 몇권과 경제사 몇권, 환율과 화폐제도와 관련해서 몇권의 책을 더 보게됩니다.

여차여차하여 이제 중앙은행에 대해서는 처음 보는 셈입니다만,
글쓴이 - 김O주 한국경제신문사 정치부 부장 - 의 서문과 목차를 보니, 깔끔한 중편논문입니다.

글쓴이는 한국의 중앙은행제도의 허와 실을 조명하기 위해서 각국의 중앙은행제도와 운영를 조사한 모양인데,
'중앙은행의 권력구조'에 대해서도 놓치지 않고 있습니다.

# 중앙은행은 공공기관일까?

다시 음모론으로 돌아가서요,
<그림자 정부> 경제편에서 이리유카바 최가 던지는 첫 질문이 바로,
'중앙은행은 공공기관인가, 사기업인가' 입니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중앙은행을 공공기관으로 오해하고 있다고 일갈합니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한국의 중앙은행인 한국은행은 공공기금을 출자해서 만든 공공기관이 아닙니다.
특정의 주주와 소유지분이 엄연히 존재하는 사기업이죠.

<중앙은행>은 세계 최초의 은행인 릭스은행(스페인, 1668)을 시작으로, 각국의 은행사를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하는데,
각국 고유의 역사에 따라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오늘날의 각국 중앙은행은 사기업에서 시작했고, 오늘날도 사기업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고 보는 편이 맞습니다.

이는 물론 상식에서 어긋나는 일이기도 하죠.
한 국가의 공식화폐를 발행하고, 외환을 관리하며, 통화신용정책을 수립 집행하고, 일반은행의 은행으로서 對은행 대출업무, 심지어 은행업무의 감독까지를 하고있는 기관이 대체 사기업이라니.

분명 사기업이 맞습니다.
최초의 중앙은행으로 알려져있는 영국의 잉글랜드은행을 보면,
1694년 민간출자로 설립되었고, 발권업무와 예금은행의 기능을 가지게 된 것은 18세기 초. 그것도 국왕의 특허를 받아 가능했던 일입니다.
그것도 잉글랜드 은행권만이 영국의 공인화폐가 된 것은 1833년, 그러니까 은행의 기능을 갖추고도 100년이 지난 후에 가능했던겁니다.

물론, 말씀드렸다시피, 이는 국가마다 약간의 차이를 무시했을 경우입니다.
프랑스처럼, 정부와 민간이 공동출자 - 물론, 정부는 일부였지만 - 한 경우도 있었고, 일본처럼 그 탄생부터 국가에 의해 이루어진 경우도 있었습니다.
(1909년에 설립된 한국최초의 중앙은행인 舊한국은행의 역사는 일본과 굉장히 흡사합니다.)

하지만, 대체적인 흐름 면에서 대략 일치하며,
설립초기만 해도 여타 은행과 다를바 없이 제각각의 화폐를 찍어내는 기관에 불구했지만,
공식화폐를 발행하는 발권은행의 지위와 함께 점차 책임과 의무를 함께 지며 국가의 힘에 강하게 붙들렸다고 하는 것이 가장 그럴싸한 표현이겠습니다.

책임과 의무.
우리는 의무 - 발권의 막강한 권한과 맞바꾼 - 에 좀 더 초점을 두도록 하죠. 정부와 중앙은행간의 묘한 연관관계는 여기서부터 시작하니까요.

# 공통화폐의 필요성 하나 - 상업 나고 금융 나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금융업의 필요야 상업이나 무역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화폐'라는 것 자체가 교환의 용이성이라는 기능에 초점을 맞춘 것이니까요.

여기서 영국 잉글랜드 은행의 역사를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잉글랜드 은행이 18세기 초에 발권업무를 수행했음에도 불구하고, 공식화폐가 되기까지 100여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는 것은,
한세기도록 어떤 은행이든 발권을 할 수 있었다는거니까요.

쉽게 상상이 가지 않습니다.
우리화폐, 국민화폐, 조흥화폐, 기타 등등.
황당한건 둘째 치고라도, 오늘과 같은 질서잡힌 교역이 불가능할 것이라고 상상할 것입니다.

하지만, 말씀드렸다시피, 금융 나고 상업 난 것이 아닙니다.
상업 나고 금융 났죠. 100여년의 시간동안 식민지 시대를 거치며 발달한 교역의 규모가 규정된 공통화폐의 필요성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 공통화폐의 필요성 둘 - 명백한 거래

이제부터는 제 추측이지만, 공통화폐의 탄생배경은 비단 그것, 그러니까 교역의 규모를 감당하기 위해서 만은 아니었을겁니다.
은행은 '자본'이 있는데 시장을 독점할 '권한'이 없었고, 정부는 '권한'은 있었지만 '자본'이 없었던거죠.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하는 묘한 결합이 공인화폐의 탄생배경이 됩니다.

그리고, 화폐라는 상품의 시장을 독점할 권한(공인화폐발행권)를 주는 대신 은행의 자본을 요구하게 됩니다.
이렇게 은행으로부터 국가로 들어가는 자본. 이것이 오늘날 각국 중앙은행의 국고금 관리업무일 것입니다.

한국은행의 경우, 세금과 같은 국가수입을 국고금으로 보관하는 것 이외에도, 정부의 자금이 부족할 경우 국회에서 미리 정한 한도 내에서 국가에 대출을 해주기도 하니까요. 이른바 국채발행이죠.

여기서 당장 돈이 필요한 것은 정부입니다. 더구나, 근대적인 개발이 한창이던 시절은 말할 나위 없겠죠.
한국은행의 금고를 가운데 놓고 보면, 지출의 압력은 정부가 가지고 있는겁니다.

# 전장의 이름은 '통화신용정책'

지출의 압력이 정부라면, 은행은 인플레이션의 압력을 받습니다.
정부가 필요로하는 만큼의 화폐를 발행하게되면, 실물가치보다 화폐량이 많아져 화폐가치가 떨어지게되니까요. 인플레이션입니다.

화폐 역시도 상품인 것을, 인플레이션은 화폐가치의 하락, 상품가격의 하락을 뜻하죠.
은행으로서는 좌시할 수 없는 현상인 것입니다.

결국, 인플레이션과 정부지출의 압력.
이 힘겨루기의 한복판에서 우리는 중앙은행의 업무를 또 하나 발견하게 됩니다.
이른바, '화폐가치(물가)의 안정' 입니다. '통화신용정책'이라고도 할 수 있을겁니다.

통화신용정책이란, 한마디로 통화량을 알맞은 수준으로 조절하는 것입니다.
통화량이 경제규모에 비하여 지나치게 많으면 경기가 과열되고 물가는 상승, 온갖 투기가 일어나게 되고,
반대로 통화량이 지나치게 적으면 경기는 침체하고 실업이 발생하니까요.

중앙은행의 통화신용정책으로 익히 알려져있는 세가지는,
바로 대출정책(재할인정책), 공개시장조작 및 지급준비율정책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기회가 있을 때 자세히 얘기하기로 하죠.

# 전장 중의 전장, 정책기관 금융통화위원회

이제 본격적으로 힘겨루기의 면모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힘겨루기의 한복판에 통화신용정책이 있는데, 이 정책을 결정하는 실제 기구를 보겠습니다.

우선, 정부 팀(Team)은 한 국가의 재정정책을 결정하는 주무부서인 재무부가 대표입니다.
은행 측이야 말할 것도 없이 중앙은행일 것이구요.

그럼, 재무부장관과 중앙은행총재와의 싸움으로 비화되느냐. 그것은 아닙니다.
어느 국가든 재무부서와 중앙은행 사이에는 정책기관이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금융통화위원회(이하 금통위)'가 그 역할을 하고있구요.

살피고 살펴 들어간 전장의 한복판에 금통위가 있는 것입니다.
대략 대여섯명 정도가 되는 금통위의 위원을 누가 할 것이냐. 그리고, 의장은 누가 할 것이냐.

# 금통위 둘러보기

다시 한국의 경우를 살펴보죠.
제가 본 <중앙은행>은 워낙 오래된 책 - 88년 판본 - 인데, 그간 관련법제들이 많이 변경되었더군요.

현재 금통위는 한국은행 총재 및 부총재, 국민경제 각 분야를 대표하는 5인 등 총 7인의 위원으로 구성되고 있습니다.
의장을 겸임하게 되는 한국은행 총재는 국무회의의 심의를 거쳐 대통령이 임명하고, 부총재는 총재의 추천에 의해 대통령이 임명.
다른 5인의 위원은 각 추천기관의 추천을 받아 대통령이 임명하는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이렇듯, 금통위 위원을 결정하는데 있어 정부(대통령)의 권한이 어느정도는 막강한 셈이죠.
물론, 결론은 금통위가 내는거니까, 위원이 누구이냐 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금통위 내의 의사결정과정일겁니다.

즉, 선임상의 문제 뿐만 아니라,
구성원은 몇명으로 하며, 의결권 부여의 문제, 재의 요구권(금통위의 결정에 대한 번복 가능성) 여부, 등등이 함께 교려되어야 한다는겁니다.
실례로, 한국처럼 대통령이 최종임명권을 가지고 있는 경우는 미국ㆍ독일ㆍ필리핀ㆍ오스트리아 정도이고, 노르웨이ㆍ스웨덴ㆍ핀란드와 같은 나라들은 의회가 임명권을 갖고있기도 합니다.

# Joker, 중앙은행의 독립성

'중앙은행의 독립성'이란 여기서 던져지는 일종의 뿅카드(Jocker)입니다.
정부의 지출압력 앞에서 화폐가치의 안정성을 고수할 수 있다는 것이 중앙은행 독립성의 대의가 되는겁니다.

금통위에 대해서 대통령이나 행정부의 임명권한이 클수록,
한 나라의 금융정책이 소수에 의해 좌지우지 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죠.

하지만, 여기서 그어지는 행정부-입법부 라는 대립구도를 보면 아시겠지만,
이는 행정부를 장악한 집권당을 견제하는 야당의 단골메뉴가 될 가능성이 지극히 농후한 것이구요.

이제 이 대립구도까지 찾아왔다면,
다시 처음 - 중앙은행의 탄생 - 에 제기한 자본과 권한의 묘한 관계로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것입니다.

권한이란 행정부에 있는 것이고,
자본이란 행정부에도, 입법부에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니까요.
한국의 정치구도를 보시면 쉽게 이해하실 수 있을겁니다.

저도 한국의 경제사 몇권을 끝으로 여정을 일단락지을까 생각중이구요.

# 보태어 - 흥미진진한 미국 중앙은행의 역사

전쟁에서 고지에 깃발을 꼽는 것이 승리를 상징한다면,
사실, 금융전쟁에서 나부끼는 깃발은, 다름아닌 '공식화폐의 발행권'일 것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중앙은행의 역사 중에서 뺏고 뺏기는 깃발 싸움이 가장 치열했던 곳이 다름아닌 미국이라는겁니다.

미국의 금융제도에서 한국의 금통위와 같은 정책기관의 역할을 하는 곳은, 우리가 익히 알고있는 '연방준비제도이사회(이하 연준)'가 될겁니다.
경제기사를 들춰보시는 분들은 잘 아실겁니다. 연준의 회의결과, 연준 의장의 한마디 한마디에 얼마나 많은 세계의 눈과 귀가 쏠려있는지를.

그 의장자리에 앨런 그린스펀이라는 거물이 있습니다. '경제대통령'이라고도 하죠.

그런데, 연준은 한국의 금통위와는 상당히 다릅니다.
대부분 국가의 중앙은행 설립역사는 공통화폐의 필요성을 정부가 제기하는 형태에서 시작했지만,
미국은 그럴 필요도 없이 충분히 상업이 발달되어 있었던겁니다. 이미 은행업 자체가 자리를 잡고 있었죠.
참고로, 연준이라는 중앙은행의 역사는 1913년에야 시작된 것이구요.

성행한 은행업을 대표하는 것이 바로 주립은행입니다.
미국은 독립전쟁을 전후로 해서 주에 흩어진 주립은행을 통일시키기 위한 국법은행을 설립하려고 노력하지만,
국법은행의 공식화폐 발행권이란 1791년에 미합중국 제일은행(First Bank of th United States)이 쥐었다가 20년 기한을 채우고 돌려주고, 1816년에는 미합중국 제이은행(Second Bank of th United States)이 쥐었다가 1836년 다시 해체되는 등, 뺏고 뺏기는 싸움이 계속됩니다.

다른 국가의 경우 자본과 권력이 서로를 필요로 하고 있었지만,
미국의 경우 자본이 권력을 필요로 하지 않을 만큼, 주(州)에서의 권한이 막강했던겁니다. 국립은행은 은행의 형색만 갖춘 보릿자루가 되어버린겁니다.

아무튼 이 흥미진진한 역사는,
주립은행의 위세가 20세기초의 금융공항을 계기로 가라앉으며 연방준비법을 끝으로 마감하게 된다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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