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캐럴>을 이전의 모든 연말 휴가철 책들과 구분해주는 것은 이 명절이 스크루지에게 첫째 마당에서 상기시키듯, "다른 어떤 계절보다도 이때 결핍이 무엇이며 풍요가 무엇인지를 가장 뼈저리게 절감하게 마련"임을 의식적으로 인식시킨다는 점이다. _ 찰스 디킨스, <주석 달린 크리스마스 캐럴>, p39


 찰스 디킨스(Charles Dickens, 1812 ~ 1870)의 <크리스마스 캐럴 The Annotated Christmas Carol>과 차이코프스키(Pyotr Ilyich Tchaikovsky, 1840 ~ 1893)의 <호두까기 인형  The Nutcracker>. 크리스마스에 널리 사랑받는 이들 작품이지만, <크리스마스 캐럴>안에 담겨진 의미는 사뭇 진지하다.  


 스크루지의 영혼은 말리의 영혼처럼 "현찰 통, 열쇠, 자물쇠, 장부, 증서 묵직한 철가방"에 짓눌려 있다. 그의 직업은 엄밀성과 정확성을 요구하기에 엄격한 수학과 경제학의 법칙들을 흔들어놓는 인간적 감성이나 나약함이 설 자리는 전혀 없다. 그의 작고 좁은 세계에는 헛소리나 개소리 같은 헛것들이 들어설 자리가 전혀 없다. 그의 냉랭한 의견들은 당시 경제이론가들의 뒤틀린 학설들을 그대로 반영한다. 가난한 자들이 가난한 이유는 스스로의 잘못 때문이니 스크루지는 "게으름뱅이들이 흥청거릴 돈"을 제공할 의향이 전혀 없다. 그가 이들에게 제공하고자 하는 유일한 해결책은 감옥과 구빈원인데, 이미 자기 뜻과는 상관없이 이 기관들의 유지비를 내고 있다. _ 찰스 디킨스, <주석 달린 크리스마스 캐럴>, p122


 주인공 스크루지는 전형적인 맬서스주의자(Malthusianism)다. 또한, 모든 것을 효율적으로 관리해야 하는 시장주의자이기도 하며, 개인의 효용극대화를 추구한는 공리주의자(Utilitarianism)다. 그런 그에게 무능력하고 천성적으로 게을러 가난해진 이들에게 자선은 낭비에 불과하다. 열악한 삶의 조건에서 끈질기게 살아남은 이들을 잉여인력으로, 그리고 이들을 악덕(惡德)의 근원으로 본다는 점에서 그안에 자리한 맬서스(Thomas Robert Malthus, 1766 ~ 1834)이론을 발견하게 된다.


 지주들은 꼭 필요한 인력 외에는 가급적 빈민들을 자신의 땅에 들이지 않기 위해 남아 있는 빈민 오두막을 허물어버린다. 이로 인한 주택부족은 필연적으로 혼인의 강력한 억제력으로 작용하게 된다. 구빈법 제도가 오랜 세월 존속해 올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이러한 억제요소 덕분일 것이다. 이와 같은 여러 억제요인에도 불구하고 끝내 결혼을 선택한 빈민들은 더럽고 초라한 거처에 머물며 보잘것없는 보조금에 의지해 연명해가거나,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비좁고 불결하기 짝이 없는 구빈원에 수용되어야 한다. 구빈원의 끔찍하고 비위생적인 환경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있다. 특히 어린아이의 사망비율이 두드러진다. _ 맬서스, <인구론> , p356


 그런데 여기서 살아남은 과잉인구의 존재로 인해 노동유지기금은 본래의 적정 인원수보다 훨씬 더 많은 이들에게 분배되어야 하고, 그 결과 근면하고 신중한 노동자들에게 돌아가야 할 몫이 게으르고 무지한 빈민에게 돌아가게 된다. 이는 해가 갈수록 구빈원 바깥에 존재하는 모든 이들의 삶을 무겁게 짓누르는 부담이 되어 결국엔 개탄해야 마땅할 거대한 악덕을 낳는다. 전체 인구 가운데 자선에 의지하는 이들으 ㅣ숫자가 비정상적일 만큼 높은 비율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_ 맬서스, <인구론> , p357


  소설에서 냉혹한 스크루지는 크리스마스 전날 밤 유령을 만난다. '과거-현재-미래'의 유령을 만나면서 점차 변화되었다는 것은 너무도 유명한 이야기다. 과거의 자신과 현재 자신을 둘러싼 주변의 평가와 미래의 자신의 죽음을 본 스크루지가 마음을 차츰 열어가는 과정에 대해 <주석 달린 크리스마스 캐롤>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가난한 이들의 진정한 보호자는 '현재의 크리스마스 정령'이다. '과거의 크리스마스 정령'은 "이미 지난 일들의 그림자"를 보여줄 능력만 있을 뿐, 판단을 내리거나 지난 일들을 바꾸지 못한다. '미래의 크리스마스 정령'은 뒤를 돌아볼 역량을 갖고 있지 않다. 이 음침한 추수자는 오직 앞으로만 나아갈 뿐이고 그의 필연적인 여정은 그 어떤 것도 바꾸지 못한다. 오직 '현재의 크리스마스 정령'만이 사건들에 대해 논평하고 스크루지에게 구원의 기회를 제시한다. _ 찰스 디킨스, <주석 달린 크리스마스 캐럴>, p123

 마치 그리스 신화의 운명의 세 여신 모이라이(Moirai) - 클로토(Klotho), 라케시스((Lachesis), 아트로포스(Atropos)-를 떠올리게 하는 이들 존재를 거치면서 스크루지는 자신 안의 숨겨진 어린이와 같은 감성을 의식의 세계로 끄집어 올릴 수 있었고, 행복하게 마무리된다. 여기서 잠시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 1564 ~ 1616)의 <맥베스 Macbeth>를 떠올리게 된다. 스크루지와 같이 이질적인 세 존재들을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스크루지는 자신을 반성하고 다른 미래를 그렸다면, 맥베스는 미래를 향해 폭주를 한 이유는 무엇일까? 예언의 시점이 달랐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예언이 보여주는 미래의 전망이 달랐기 때문이었을까.


 스크루지에게 세 정령은 과거-현재-미래의 순서로 자신의 삶을 보여주면서 비참한 결말을 통해 변화의 계기를 마련했다면, 맥베스에게 세 마녀는 '가까운 미래 - 먼 미래 - 훗날'과 그의 인생에 내릴 빛나는 미래를 하면서 이들의 운명을 바꿨다. 이후 구두쇠 스쿠르지는 좋은 이웃이 되지만, 충신 맥베스는 대역죄인으로 변화된다는 점에서 이들 작품 안의 예언(oracle)은 여러 모로 비교된다.


 맥베스 : [마녀들에게] 말해라, 너희는 누구인가?

 마녀 1 : 맥베스 만세! 글래미스 성주 만세!

 마녀 2 : 맥베스 만세! 코더의 성주 만세!

 마녀 3 : 맥베스 만세! 훗날 왕이 되리라.

 뱅코   : 장군, 왜 놀라시오? 그처럼 좋은 말을 겁내는 듯하시오?... 내 말은 없었는데, 과연 너희가 시간의 씨앗을 살펴 자랄 싹,  못 자랄 싹을 알 수 있다면 내게 말하라. 나는 너희의 호의도 악의도 구하지 않으며 미움도 원치 않는다.

 마녀 1 : 맥베스보다 작으나 크다.

 마녀 2 : 그처럼 행복하지 못하나 더 행복하다.

 마녀 3 : 왕은 되지 못하나 왕을 낳을 것이다. 따라서 맥베스와 뱅코 만세.

 마녀 1 : 뱅코와 맥베스 만세.

 맥베스 : 잠깐, 불완전한 말이다. 더 말하라. _ 윌리엄 셰익스피어, <셰익스피어 전집> <맥베스> , p645


 그(스크루지)가 크리스마스의 기쁨과 슬픔의 장면을 보면서 느끼는 양심의 가책은 진실되다. 그는 자신의 옛 사랑 벨의 딸을 바라보며, 자신이 무엇을 놓치고 살아왔는지, 그의 탐욕으로 인해 상실한 가능성들이 무엇인지 깨닫는다. 그가 이 세 정령과 여행을 다니는 동안 그의 내부에 감춰져 있던 또 다른 분위기가 되살아난다. 음울한 안개가 크리스마스 날의 눈부시게 밝은 해 앞에서 물러나듯이, 차감고 딱딱한 외피는 녹아 없어진다. 그의 독기 섞인 냉소주의에도 불구하고 스크루지가 완전히 크리스마스 정신을 상실하지는 않았고, 다만 그 정신이 잠자고 있었음을 보게 된다. 그 정신을 되살리는 일은 별로 어렵지 않다... 그가 선택한 것은 일상사의 기쁨과 성가심으로부터 자신을 차단하는 것이었고, 그 결과 한때 자신의 성품에서 핵심적 부분을 차지했던 감성들을 억압하게 되었다. _ 찰스 디킨스, <주석 달린 크리스마스 캐럴>, p115


 구두쇠 스크루지에게 구원의 기회를 제공하는 현재 크리스마스 유령과의 배회에서 스크루지에게 가장 충격적으로 다가온 것은 바로 '결핍'과 '무지'의 모습이다. <올리버 트위스트 (Oliver Twist)>의 페이긴 집단의 아이들 모습과도 같은 소년, 소녀의 모습을 통해 현재 크리스마스 유령은 가난한 이들 - 특히 어린이들 - 에 대한 무관심과 사회적 책임을 작가는 독자들에게 분명하게 묻는다. 


 가난한 이들의 아이들에 대한 그의 배려는 유령 소녀와 소년인 '결핍'과 '무지'를 통해 추가로 표현된다. 이들을 변호하면서 '현재 크리스마스의 정령'은 모든 버려진 아이들을, 잉글랜드의 공장과 콘월의 탄광에서 일하며 런던의 야학에 다니는 "비참하고, 처참하고, 무시무시하고, 끔찍하고 비천한" 아이들을 위해 호소하고 있다. 이 대목에서 디킨스는 예언자의 역할을 떠맡아 하며 사회의 무관심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 경고한다. 결핍과 무지는 어린이들을 방치한 나라의 산물들인 것이다. _ 찰스 디킨스, <주석 달린 크리스마스 캐럴>, p40


  이들은 남녀 어린이였다. 누렇고 깡마르고 남루하고 찡그리고 사나운 인상이었지만 그래도 미천하게 납작 엎드린 모습이기도 했다. 우아한 어린 생명이 이들의 안색에 생기를 주고 가장 신선한 색조로 빛나게 했어야 하건만, 꼭 늙은이처럼 깡마르고 쪼글쪼글한 손으로 꼬집고 비틀어서 너덜너덜해진 얼굴이었다. 천사들이 권좌에 앉아 있어야 할 자리에 악마들이 들어가서 도사리며 협박하는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어떤 변화, 어떤 타락, 어떤 인간성이 아무리 심하게 변질된 상태라고 해도, 이 놀라운 창조된 세계의 온갖 신비를 다 둘러보아도, 이들보다 더 섬뜩하고 무시무시한 괴물들은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_ 찰스 디킨스, <주석 달린 크리스마스 캐럴>, p262


 "얘들은 인간의 아이들입니다." 정령이 아이들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런데 자기네들의 아버지에 대해 탄원을 하면서 나한테 달라붙는 거지요. 이 사내아이는 '무지'라고 합니다. 여자아이는 '결핍'이지요. 둘 다. 또 이들과 같은 급의 모든 아이들을 조심해야 할 거요, 특히 사내아이는요. 아이 이마에 파국의 조짐이 적혀 있는 것이 내 눈에 보이기 때문이오. 그것을 지우지 않는 한 조심해야 하오." _ 찰스 디킨스, <주석 달린 크리스마스 캐럴>, p263


 개인적으로 <크리스마스 캐럴>은 매년 크리스마스 즈음에 <All I Want For Christmas Is You>와 함께 하는 크리스마스 세트와 같은 책이다. 매년 읽는 책이지만, 올해 책이 주는 의미는 예년과는 참 다르다. 예전에는 스크루지의 굳었던 마음이 풀리는 것처럼 다가올 새해를 맞아 새롭게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즐겁게 읽었다면, 올해에는 '무지'와 '결핍'의 어두움이 무엇보다 크게 느껴지는 것은 2022년 한 해를 보낸 내 자신과 주변 상황때문일 것이다.


 읽을 때마다 새로운 느낌을 주는 것이 고전이 가진 매력이지만, 올해 <크리스마스 캐럴>에서는 밝은 미래에 대한 희망보다 우리를 둘러싼 어두움에 시선이 가는 것을 어쩔수가 없다. 이러한 어두움이 계속되지 않기를 원한다면, 우리 자신의 변화만이 유일한 해결방안이 될 것이다. 2022년의 마지막은 희망과 기대보다는 더 굳은 각오로 마무리 되는 것 같다...


 "그런들 어떻소? 죽어야 할 것 같으면 차라리 죽는 게 낫지 않겠소, 잉여인구도 줄일 겸." 정령이 대답했다. 스크루지는 정령이 자기가 했던 말을 인용하는 것을 들으며 고개를 숙였고, 뉘우침과 애통함에 압도되었다. "이보시오, 인간." 정령이 말했다. "댁이 돌덩어리가 아니라 인간이라면 '잉여'라는 게 무엇이고 그게 어디 있는지 발견하기 전에는 그 사악한 괴담은 좀 자제하시오. 어떤 사람이 살고 어떤 사람은 죽어야 할지를 당신이 정하겠다는 거요? _ 찰스 디킨스, <주석 달린 크리스마스 캐럴>, p244 


 "꼬마 팀은 안 죽고 살아 있었기에 스크루지가 이 아이의 제2의 아버지가 되어주었다." 이 문장은 나중에 첨가한 것으로 본래 원고에는 나오지 않는다. 디킨스는 교정쇄 단계에서 독자에게, 현재의 크리스마스 정령이 언급한 빈자리가 이제는 없고 사람이 달라진 스크루지는 '무지'와 '결핍'의 유령들의 운명에서 적어도 한 아이는 건져낼 수 있었음을 확인시켜줘야 할 필요는 느꼈던 것이 분명하다. _ 찰스 디킨스, <주석 달린 크리스마스 캐럴>, p306


 여전히 정령은 무덤만을 가리킬 뿐이었다. "인간들의 삶의 여정은 계속 그대로 그 길을 따라 산다면 결국에는 예정된 지점에 도착하겠지요. 하지만 만약 그런 길에서 떠난다면 도착점도 바뀔 것이오. 정령님이 나한테 보여주고 있는 바도 그런 것이라고 말해주시오!" 정령은 여전히 요지부동이었다. _ 찰스 디킨스, <주석 달린 크리스마스 캐럴>, p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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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2-12-23 22:5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스크루지 나오는 책이 크리스마스 캐럴이었지요. 크리스마스가 되면 생각나는 책 중의 하나예요.
겨울호랑이님, 이번 일요일이 크리스마스입니다.
따뜻하고 좋은 주말 보내세요.
메리크리스마스.^^

겨울호랑이 2022-12-23 23:17   좋아요 2 | URL
서니데이님 말씀처럼 <크리스마스 캐럴>의 스크루지는 산타 클로스와 함께 크리스마스를 대표하는 캐릭터라 생각합니다. 크리스마스가 일요일이어서 공휴일이 줄어 아쉬움도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미사를 한 번에 끝낼 수 있다는 작은 즐거움을 느끼려 합니다.ㅋ 서니데이님께서도 즐거운 크리스마스 보내세요! 감사합니다. ^^:)

:Dora 2022-12-24 09:0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메리크리스마스~

겨울호랑이 2022-12-24 09:31   좋아요 2 | URL
도라님께서도 행복한 크리스마스 보내세요! ^^:)

그레이스 2022-12-24 09:4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디킨스가 그의 작품들에서 멜서스주의, 공리주의, 자본주의를 일관되게 비판하고 있더라구요.

성탄절에 읽는 크리스마스캐럴!

복된 성탄되세요.

겨울호랑이 2022-12-24 10:17   좋아요 2 | URL
그레이스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디킨스의 맬서스주의, 공리주의,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은 어린 시절 노동현장에서 힘들게 일해야 했던 작가 자신의 불우한 경험이 큰 영향을 미쳤으리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감사합니다, 그레이스님께서도 따뜻하고 행복한 크리스마스 되세요! ^^:)

하나의책장 2022-12-25 18:0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크리스마스만 되면 크리스마스 관련된 책과 영화가 더 재미있게 느껴지는 것 같아요^^
겨울호랑이님도 행복한 크리스마스 보내셨나요?
돌아오는 주가 지나면 2023년이라는 게 믿겨지지 않네요ㅎㅎ
따뜻하고 행복한 저녁 보내세요! Merry Christmas🎄❤

겨울호랑이 2022-12-25 21:35   좋아요 0 | URL
올해는 유난히 12월부터 추운 겨울인 듯합니다. 덕분에 가족과 함께 집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냈습니다. 하나의책장님께서도 좋은 시간 되셨는지요? 이제 한 주만 지나면 2022년도 마무리되네요. 남은 한 주 잘 보내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
 

 209d 이보게, 설명을 추가로 포착한다는 게 차이성을 판단하라는 게 아니라 인식하라고 지시하는 것이라면, 앎에 관한 설명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이런 설명은 그것 참 즐거운 것이기도 할 걸세. 그러니 앎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받게 되면, 차이성에 대한 앎을 동반한 옳은 판단이라는 답변이 제시될 것 같네. 우리가 앎을 찾을 때, 차이성이 되었든 그 어떤 것이 되었든 그런 것에 대한 앎을 동반한 옳은 판단을 앎이라고 말하는 건 전적으로 어리석은 일일세.  그러므로, 테아이테토스, 앎은 지각도, 참된 판단도, 참된 판단에 덧붙여진 설명도 아닐 것이네. _ 플라톤, <테아이테토스> , p218


 플라톤(Platon, BCE 428 ? ~ 348 ?)의 대화편 <테아이테토스 Theaitetos>에서는 제기된 '앎이란 무엇인가?' 라는 물음이 난관(aporia)에 봉착되고, 소크라테스는 테오도로스와 동틀 녘에 다시 만나기로 하는 대화로 마무리된다. 이처럼 밤사이 무너져 내린 대화의 논리 대신 떠오르는 햇살이 비친 후 드러나는 것은 단일한 총체로서의 이데아(idea)이며, 필멸의 감각 너머에 있는 불멸의 형상(形像) 그리고 형상에 도달하기 위한 방편으로서 사유(思惟)와 상기(想起)다. 


 플라톤이 자신의 이데아론이 사실상 기대고 있는 근거들을 아주 풍부하게 서술하는 곳은 <테아이테토스>이다. 왜냐하면 이데아론은 감각과 앎[인식]이 서로 완전히 다르고, 앎은 감각에 의해 지각되지 않는 존재들을 그 자신의 대상들로 요구한다는 믿음에 기대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감각과 앎의 차이에 관한 가장 정교한 증명을 최종적으로 제시하는 곳도 <테아이테토스>이다. 더 나아가, 그는 명시적으로 <티마이오스>에서 말하듯이, 그의 이론은 앎과 참인 의견은 완전히 다르다는 믿음에 기대고 있다. 이것에 대해서도 가장 정교한 증명이 <테아이테토스>에 제시되어 있다. _W.D. 로스, <플라톤의 이데아론> , p120


 

 형상은 이성(理性, logos)에 의해서만 드러난다. 그렇지만, 필멸의 존재인 우리가 사는 감각의 세계에서 이성은 발견되지 않는다. 동굴 안의 우리는 동굴 밖 태양과도 같은 불변의 진리를 결코 깨달을 수 없다. 태양을 보기 위해서 우리는 감각의 세계를 벗어나야 하지만, 손발이 묶인 죄수들에게 쉬운 일이 아니다. 혼(魂)이라면 모를까. 그렇기에, 소크라테스가 논증에 실패하며 마무리되는 <테아이테토스>의 논리 붕괴는 앎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데아의 긍정을 의미한다.


 202c 복합체들은 인식될 수 있는 것들일 뿐만 아니라 서술될 수 있는 것들이면서 참된 판단에 의해 판단될 수 있는 것들이네. 그러니까 누군가가 어떤 것에 대해 설명 없이 참된 판단을 취할 때면, 그의 영혼은 그것에 관해 참된 생각은 하고 있는 것이나 인식하고 있는 건 아닐세. 설명을 주고받을 수 없는 자는 그것과 관련해서 앎이 없는 자이니까. 반면에 설명을 추가로 얻은 자는 이 모든 것을 할 수 있게 되고, 앎에서 완벽하게 되네. _ 플라톤, <테아이테토스> , p200


누가 참된 생각을 우연히 말로 표현한다면, 그것은 그자체로는 물론 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 사람에게는 참도 거짓도 아니고 다만 그것을 인식하는 사람에게만 참입니다. '정견'을 '이성'을 통해 완성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성의 개념은 발견되지 않습니다. 요컨대 그(플라톤)는 [정견] 인식= 인식에 의거한 바른 견해라는 관점에 이릅니다. 가능하지 않는 정의입니다. 지각도, 바른 견해도, 이성에 의한 정견도 인식일수는 없을 겁니다. _ 니체, <언어의 기원에 관하여 외 (유고 1864 가을 ~)> <플라톤의 대화 연구 입문> , p120/387


 그렇다면, 인간의 한계로서 진리에 근접하는 경계면은 '서술될 수 있는 것이면서 판단될 수 있는'  지점일 것이다. 비록 우리가 감각의 세계에 살면서 보편적인 진리를 인식하는데는 실패할 지라도, 동굴 속의 흐릿한 불로 간접적으로 형상을 인지하듯 개별적인 특징을 어렴풋하게나마 구분할 수는 있을 것이며 더듬으며 진리에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이 보여주는 수많은 은유를 통해 논리를 끌어가는 방식은 이데아가 드러난 구체성으로부터 진리를 찾아가는, 감각의 세계로부터 형상의 세계로의 여정 - 양극과 유비- 이라 할 것이다.


 그(플라톤)는 한 가지 감각만의 대상들인 소리와 색과 같은 대상들과, 우리가 여러 감각의 대상들에 공통된 것으로 인정하는 특징들 - 존재와 비존재, 다름과 같음, 둘임과 하나임, 비슷하지 않음과 비슷함, 짝수임과 홀수임, 아름다움과 추함, 좋음과 나쁨, '그리고 이와 같은 종류의 것들 모두' - 을 구별한다. 더 나아가 그는 뒤의 것들은 감각이 아닌 사유에 의해 파악된다고 주장한다. 이렇듯, 두 가지 접근 관점으로부터 플라톤은 아주 폭넓게 미치는 속성들의 부류를 따로 뽑아내는 데에 이른다. 이것을 이후 사상가들은 초월자들(transcendentalia)로 인정하게 되었다. _W.D. 로스, <플라톤의 이데아론> , p119


 현실 속에서 이데아는 서술된다. 그 서술은 언제나 거짓되지 않고 참된 것이라는 전제 하에 플라톤의 이데아와 감각의 세계가 연결되며, 이러한 세계관은 고대를 넘어 중세로까지 이어지며, 이데아의 세계는 천상의 세계로 대체된다. 


 196c  왜냐하면 이런 일을 겪는 자는, 자기가 알고 있는 그것을, 역시 자신이 알고 있는 것들 중의 다른 어떤 것이라고 여기게 되는데, 우리는 이것이 불가능하다고 했고, 바로 이 점 때문에 우린 거짓된 판단은 없다고 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말일세... 사실은 거짓된 판단이 없거나 아니면 어떤 사람이 알고 있는 것을 알지 못할 수가 있거나 둘 중 하나일세. _ 플라톤, <테아이테토스> , p187


 켄터베리의 안셀무스(Anselmus Cantuariensis, 1033 ~ 1109)의 <프로슬로기온 Proslogion>의 신 존재 증명은 순수 사유에 의한 이데아의 인식과 언제나 참인 판단에 의한 논증의 전형적인 예를 잘 보여준다. 거칠게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하고 위대한 존재'를 가정하고, 존재성에 대한 판단 유무로 존재성을 부여하며, 이 존재보다 더 큰 존재 있을 수 없다는 것으로 전지전능(全知全能)을 증명하는 안셀무스의 신 존재 증명은 <테아이테토스>의 깊은 영향을 실감하게 된다. 


 그리고 확실히 '그것보다 더 큰 것이 생각될 수 없는 어떤 것'은 단순히 지성 속에만 존재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만일 그것이 지성 속에만 존재한다면, 실제로도 존재하는 것이 생각될 수 있고, 이것은 [지성 속에만 존재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것보다 더 큰 것이 생각될 수 없는 어떤 것'이 단지 지성 속에만 존재한다면, <그것보다 더 큰 것이 생각될 수 없는 어떤 것>이라는 것에 대해 [사실] 그것보다 더 큰 것이 생각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확실히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아무 의심 없이 '그것보다 더 큰 것이 생각될 수 없는 어떤 것'은 지성 속에 뿐만 아니라 실제로도 존재합니다. _ 켄터베리의 안셀무스 , <모놀로기온 & 프로슬로기온> , p186


 그런 실재는 확실히 존재하기 때문에 그 실재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없는 어떤 것'을 존재한다고 생각할 수 있으며,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보다 위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고 '그것보다 더 큰 것이 생각될 수 없는 어떤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다면 그 실재는 '그 보다 더 큰 것을 생각할 수 없는 어떤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그것보다 더 큰 것이 생각될 수 없는 어떤 것'은 진실로 존재하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실재가 바로 우리의 주님이요 우리의 하느님인 당신입니다. _ 켄터베리의 안셀무스 , <모놀로기온 & 프로슬로기온> , p188


 이러한 플라톤 이래 형이상학적 논증에 대해 러셀( Bertrand Arthur William Russell, 1872 ~ 1970)은 기술이론(theory of descriptions)을 통해 논박한다. 플라톤의 논리- 서술 자체가 참이며, 실존을 증명한다 - 는 논리는 잘못된 것이며, 더 나아가 형상의 세계가 감각의 세계가 결코 분리되지 않음을 러셀은 주장한다.


 내가 "황금산은 실존하지 않는다" 라고 말하고, 네가 "실존하지 않는 것은 무엇인데?" 라고 묻는다고 가정해 보자. 내가 "그것은 황금 산이야"라고 말할 경우, 나는 황금산이라는 구에 일종의 실존 existence을 돌리고 있다. _ 버트런드 러셀, <러셀의 서양철학사> , p1380/1474


 플라톤의 이데아는 문장에서 주어에 해당한다. 그리고 주어는 동사와 형용사로 설명된다. '스콧은 스코를랜드인이다', '스콧은 1771년에 태어났다', '스콧은 아이반호도 썼다'와 같이 스콧은 여러가지로 서술될 수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서술된 문장 하나하나가 스콧의 존재성을 실증하는 것은 아니다. 스콧의 존재성은 '독립된 존재가 있다'는 존재성에 대한 별도의 기술로만 참/거짓 판단이 가능하다. 플라톤의 논증에서와 같이 서술되었다는 것만으로 실증되거나, 사유만으로 실재를 파악한다는 안셀무스의 논증은 기술이론으로 인해 무너지게 된다. 사유는 결코 형상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 아니고, 더욱이 형상의 존재를 보장하지도 않는다.


 기술 이론에 따르면 '그러한 것 the so-and-so'이라는 형식의 구를 포함한 진술은 올바르게 분석될 때, '그러한 것'이라는 구가 사라진다. "스콧은 <웨이벌리>의 저자였다 Scott was the author of <Waverly>"라는 진술을 예로 들어보자. 기술 이론은 이러한 진술을 "한 사람이, 그리고 오로지 한 사람이 <웨이벌리>를 저술했으며, 그 사람은 스콧이었다"라고 말한 것으로 해석한다. 또는 더 충분히 진술하면 다음과 같다. "x가 c라면 'x는 <웨이벌리>를 썼다'는 진술이 참이 되고 그렇지 않으면 거짓이 되는 c라는 독립된 존재 entity가 있고, 더욱이 c는 스콧이다." '더욱이'라는 낱말 앞에 첫 부분은 "<웨이벌리>의 저자는 실존한다(혹은 실존했거나 실존할 것이다)"라는 진술의 의미를 정의한다. 따라서 "황금산은 실존하지 않는다"라는 다음과 같은 진술을 의미한다. "x가 c라면 'x는 황금이고 산이다'라는 진술이 참이 되고 그렇지 않으면 거짓이 되는 c라는 독립적 존재는 없다." _ 버트런드 러셀, <러셀의 서양철학사> , p1380/1474


 기술 이론에 따르면 '실존'은 기술구로만 주장될 수 있다. 우리는 "<웨이벌리>의 저자는 실존한다"라고 말할 수 있지만, "스콧이 실존한다"라는 진술은 틀린 어법, 아니 틀린 구문이다. 이로써 플라톤의 <테아이테토스>에서 시작되어 '실존 existence'을 둘러싸고 2000년 동안 지속된 지리멸렬한 수수께끼가 풀린다. _ 버트런드 러셀, <러셀의 서양철학사> , p1381/1474


 플라톤은 <테아이테토스>를 통해 아포리아를 통해서 논리의 한계, 감각세계의 한계를 보여주며, 이로부터 증명할 수 없는 선험적인 이데아의 세계를 여백으로 제시했다면, 러셀은 선험적인 이데아의 세계가 사실은 '존재에 관한 서술'이라는 끈으로 연결된 무수히 많은 서술의 집합으로서의 '감각의 이데아'를 보여주며 고대 형이상학의 한계를 드러냈다. 이처럼 플라톤이 <파르메니데스>를 통해 보여주려 했던 형상의 속성이 실은 감각의 연장임이 드러났다. 실존은 과연 서술 안에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해서는 다음 페이퍼에서 하이데거와 함께 살펴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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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4운동 이후, 중국 선각자들은 마르크스주의의 주요 관점을 비교적 구체적으로 소개했다. 그들은 유물사관 측면의 관점에서 사회 발전의 근원을 생산력과 생산관계, 경제토대와 상부구조 사이의 상호 모순 운동에 있다고 보았다. 계급투쟁학설 측면에서, 계급과 계급투쟁의 정의, 계급의 구분과 계급투쟁인 서로 다른 경제이익으로 발생한다는 관점을 설명했다. 그리고 국가는 계급투쟁의 수단이며 무산계급이 정권을 장악해야만 다수인이 소수인에 대한 독재를 실현한다는 등 기본 사상을 집중적으로 설명했다. 잉여가치이론 측면에서, 잉여가치는 자본의 본질을 중심으로 한다. 생산과정에서 자본가가 노동자의 노동 일부분을 무상으로 점유하는 것이다. 이는 무산계급에 대한 착취이고 자본축적의 중요한 구성 부분이라는 등의 관점으로 소개했다. _ 중국공산당중앙당사연구실, <중국공산당 역사 제1권 상> , p155/952  


 중국 공산당 제20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시진핑(習近平, 1953 ~ )주석의 3연임이 확정되고, 상무위원회 자리가 모두 그의 측근들로 채워지면서 덩샤오핑(登小平, 1904 ~ 1997)이후 지속되어온 집단지도체제가 사실상 끝나게 되었다. 이러한 역사 진행을 중국공산당 내부에서는 어떻게 바라본 것인가에 대한 궁금증은 <중국공산당 역사>로 이어지게 된다. 청나라 말기부터 문화대혁명기까지 다룬다는 시대적 제약은 있지만, 공산당의 역사관(歷史觀)을 파악하는 것에는 큰 무리가 없어 보인다.


 상세한 내용은 각 리뷰에서 정리해야겠지만, 대체적으로 <중국공산당 역사>는 역사의 진보와 발전에 대한 긍정적 기대를 담고 있다. 중도의 실패도, 이어지는 혁명의 다른 과제를 부여하는 변곡점으로 이해된다. 마치, 출발점인 원점과 끝점인 문화혁명기의 중국 사이의 점을 직선(直線)으로 연결하고, 좌우 약간의 표준오차만을 인정하며, 필연적으로 공산주의혁명이 도출될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는 역사관 속에서 공산주의자가 아닌 민족주의자들이 '인민의 적(敵)', '배신자'로 그려지는 사관에 대해 긍정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지만, 이 역시 역사철학의 일부임을 일단 인정해야 할 것이다.


마르크스의 역사철학은 헤겔과 영국 고전 경제학이 뒤섞여 형성된다. 그는 헤겔처럼 세계는 변증법적인 정칙에 따라 발전하다고 생각하지만, 발전의 원동력에 대해서는 헤겔과 의견이 완전히 다르다. 헤겔은 '정신 Spirit'이라는 신비적 존재가 <논리학>에 제시된 변증법의 여러 단계에 따라 인간의 역사가 발전하도록 이끈다고 믿었다. 정신이 왜 그러한 단계를 밟아야 하는지는 분명치 않다... 마르크스의 변증법은 법칙의 불가피성을 제외하면 앞서 말한 헤겔 병증법의 특성을 전혀 나타내지 않는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정신이 아니라 물질이 추진력이다. 마르크스에게서 추진력은 실제로 인간이 물질과 맺는 관계이며, 그러한 관계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생산 양식이라는 뜻이다. 이렇게 마르크스의 유물론은 실질상 경제학이 된다.  _버트런드 러셀, <서양철학사> , p990


 러셀(Bertrand Russell, 1872 ~ 1970)의 <서양철학사 History of Western Philosophy>에 서술된 마르크스(Karl Marx, 1818 ~ 1883)의 역사철학이 잘 드러난 역사서임을 새삼 실감하게 된다. 다만, 제국의 중심부가 아닌 주변부인 20세기초의 중국에서 칼 마르크스의 '물질'은 생산양식보다 분배문제인 '토지개혁'에서 더 첨예한 문제로 드러난다는 것은 중국 역사의 특수성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요약하건대, 중국은 아편전쟁에서 패배한 후 점차 반식민지 반봉건 사회로 전락하고 말았다. 나라와 민족을 멸망의 위기에서 구하기 위해 중국 인민들은 간고한 투쟁을 벌였다. 중국의 선각자들은 천신만고를 겪으면서 구국구민의 진리를 모색하며 중국 사회를 변혁하는 여러가지 방안을 시도했다. 이러한 모색과 투쟁은 일정한 역사적 조건에서 중국 역사의 진보를 어느 정도 이끌었다. 그렇지만 중국의 반식민지 반봉건의 사회성격과 중국인민의 비참한 운명까지 바꾸지는 못했다. _ 중국공산당중앙당사연구실, <중국공산당 역사 제1권 상> , p94/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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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엇이 나를 가장 근본적으로 의문에 빠지게 하는가? 그것은 유한한 내 자신에 대한 나의 관계, 즉 죽음으로 향해 있고 죽음을 위한 존재임을 의식하는 내 자신에 대한 나의 관계가 아니다. 그것은 죽어가면서 부재에 이르는 타인 앞에서의 나의 현전 presence이다. 죽어가면서 결정적으로 멀어져 가는 타인 가까이에 자신을 묶어두는 것, 타인의 죽음을 나와 관계하는 유일한 죽음으로 떠맡는 것, 그에 따라 나는 스스로를 내 자신 바깥에 놓는다. 거기에 공동체의 불가능성 가운데 나를 어떤 공통체로 열리게 만드는 유일한 분리가 있다. _ 모리스 블랑쇼, <밝힐 수 없는 공동체, 마주한 공동체>, p23


 모리스 블랑쇼(Maurice Blanchot, 1907 ~ 2003)의 <밝힐 수 없는 공동체 La Communaute inavouable>에서는 타인(他人)의 죽음에 대한 의미를 묻는다. 나 자신의 죽음이 아닌 다른 이의 죽음이 왜 나에게 의미를 갖는가. 이 물음에 대한 답하기 위해 블랑쇼는 조르주 바타유(Georges Bataille, 1897 ~ 1962)가 말한 '모든 존재의 기초'로서 결핍으로부터 출발한다. 인간 또한 결핍의 충족을 추구하지만, 영원한 배고픔과 갈증의 형벌을 받은 탄탈로스(Tantalus)처럼 자기 자신을 위한 결핍 충족은 결코 채워질 수 없다. 단지 자기 자신을 미래를 향해 기투(project)할 수 있다는 가능성만을 가져올 뿐. 궁극적으로 이러한 가능성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자신의 유한성을 넘어선 그 무엇이 필요하며, 이를 통해 우리는 실존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 블랑쇼의 주장이다. 그리고, 이는 죽음의 문제에서도 마찬가지다.


 '내'가 '죽어가는 타인의' 손을 붙잡고 그와 함께 이어나가는 무언(無言)의 대화. 나는 그 대화를 다만 그가 죽어가는 것을 돕기 위해서만 이어가는 것이 아니다. 그를 근본적으로 상실로 이끌며 나눌 수 없는 그의 소유인 것처럼 보이는 사건으로 인한 고독을 나누기 위해, 나는 그 대화를 이어간다. _ 모리스 블랑쇼, <밝힐 수 없는 공동체, 마주한 공동체>, p23


 타인의 죽음에 대한 공감과 나눔. 그것은 내 존재의 근원적 문제로서의 결핍을 충족할 뿐 아니라, 죽음이라는 공통의 운명을 가진 필멸(必滅)의 존재들이 갖는 관계속에서 공동체는 규정되어간다. 죽음을 싫어하는 공통된 감정 속에서 지금 죽음을 맞아야만 하는 이들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 그것은 어떤 방식으로든 통제될 수 없는 가장 기본적인 첫 번째 자유다. 


 각자의 것일 수 없는 최초의 그리고 최후의 사건(탄생, 죽음)이 만일 각 사람에게서 공통된 것이 아니라면, 공동체란 있을 수 없다. 그 사실이 공동체의 근거를 이룬다. 공동체는 너나들이로 말하기가 금지되어 있는 비대칭성 asymetrie의 관계만을 '너와 나에게서' 완강히 보존하려 한다... 공동체는 죽어간다는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을 반복한다.  "우리는 홀로 죽지 않는다. 만일 죽어가는 자의 이웃이 된다는 것이 인간적으로 진정 필요하다면, 그 이유는 하찮기는 하지만 역할을 나누기 위해서, 죽어가면서 현재 죽을 수 없다는 불가능성에 부딪힌 자를 내리막길에서 붙들기 위해서이다. 가장 부드러운 금지의 명령으로. 지금 maintenant 죽으면 안 돼. 죽기 위한 지금이 있을 수 없다는 것. _ 모리스 블랑쇼, <밝힐 수 없는 공동체, 마주한 공동체>, p24


 156명의 안타까운 희생자가 발생한 10.29 참사. 이 사건을 바라보는 관점은 분명 다르지 않을 것이다. 죽음을 맞이해야하는 유한한 존재로서 죽음을 바라보는 안타까움.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바라보는 여러 시선이 공존하는 것을 다양성의 존중이라는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을까. 출입금지 구역도 아닌 곳에 자유롭게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방문한 이들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다름아닌 평소 '자유민주주의'를 그토록 외치는 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리고, 평소 그렇게 '자유'를 외치던 자들이 정작 '책임'에 대해서는 왜그렇게 침묵하는지. '자유-책임'은 동전의 양면임을 알지 못하는 것일까. 이렇게 참사의 기억은 일부에서 왜곡되고, 논쟁거리로 소비되고 있다.

 

 세기를 거치며 새로이 덧붙여진 자산으로 점점 더 풍부해진 이 공생관계는 대혁명과 더불어 파경을 맞았다. 모든 것이 요동을 쳤다. 이제껏 사회적 결속의 원칙이요 민족적 일체성의 기초였던 교회의 맏딸이라는 준거관념은 두 충성의 대상 - 신도인가 시민인가 - 가운데서 선택을 강요받은 프랑스인들 사이에 깊은 분열의 씨앗이 되었다. 그러한 파열은 몇 달 사이에 이루어졌다(p197)... 교회의 맏딸 반대편에 또 하나의 프랑스가 들어서 있었으니, 이 프랑스는 대혁명을 자신의 세례 시점으로 잡고, 랭스의 종교에 혁명의 서사시를 대립시켰다. 그 사건의 파장은 막대했다. 그것은 거의 2백 년 가까이 민족의식을 분열시키는 결과를 몰고 왔다. _ 피에르 노라 외, <기억의 장소 5> , p198


 기억의 왜곡 문제는 오늘날 우리만의 문제는 아니다. <기억의 장소 5 Les Lieux de Memoire>는 1572년 프랑스에서 가톨릭 신자들에 의한 대대적인 위그노(개신교 신도) 학살이 일어난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 학살(Massacre de la Saint-Barthelemy)이 분열된 프랑스 역사 속에서 어떻게 기억되었는가를 알려준다. 


 대개 공식적 프랑스에 속하며, 따라서 고도로 중앙집권화된 나라에서 권력의 보유가 허용한 모든 수단들을 마음껏 이용할 수 있었던 절반의 프랑스는 프랑스의 종교적 과거에 관한 모든 전거를 공동의 기억에서 지워 버리는데 힘을 쏟았다... 반대기억을 풀어놓는 반대역사(contre-historie)를 가르치는 것에 대한 지지자들은 종교에 관한 편집(偏執)에서 비롯된 박해 이외의 어떠한 사실도 좀처럼 기억하려 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프랑스의 종교사는 생바르텔르미 학살과 미구엘 세르베토나 라바르 기사의 처형 사건, 또는 낭트 칙령의 철회 등 확실히 종교적 소수파나 무신자들에게 고통스러운 기억들만을 떠올리게 하는 사건들로 축소되었다. _ 피에르 노라 외, <기억의 장소 5> , p199


 프랑스 대혁명이라는 하나의 분기점에서 자신의 입장에 따라 역사의 기억을 하나의 방향으로만 바라보기 위해 이를 소거(消去)하려는 움직임과 이에 대항해 하나만을 강조하고 다른 모든 것을 편집하는 반대의 흐름. 이러한 두 갈등은 오랜 분열 끝에 공동체에 닥친 공통의 위기 속에서 극적으로 화해하게 된다. 그렇지만, 역사적 의미가 퇴색한 뒤 이루어진 화해가 갖는 한계 또한 <기억의 장소 5>에서는 분명하게 지적된다. 10.29 참사를 보면서 우리는 이 비극을 어떻게 기억해야 할까. 타인의 죽음이 현재의 우리에게 갖는 의미, 타인의 죽음을 대하는 우리의 마음을 기본으로 이 참사의 진정한 의미를 되새겨야 하지 않을까.


 한 세기여에 걸쳐 점점 더 사이가 벌어진 끝에, 두 개의 프랑스는 1914년에 터진 전쟁과 함께 민족 공동체가 겪어야만 했던 시련을 계기로 서로 화해하기 시작했다. 두 갈래 기억들 사이의 화해는 '신성한 단결'(Union sacre)의 필연적 결과들 가운데 하나였다(p204)... 오늘날 이러한 관념에 의거하는 하나의 프랑스와 그것을 거부하고자 했던 또 하나의 프랑스 사이의 대립은 확실히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문제는 양쪽 모두의 기억상실일 것이다. 그리고 교회의 맏딸이 지나온 종교적 과거가 잊혀져감에 따른 민족문화와 민족적 기억의 손실을 누구보다도 먼저 염려해야 할 이들이 바로 세속성 원칙에 가장 투철한 구성원들, 즉 근대 프랑스의 기초자들을 계승한 사람들이라는 점은 현 상황의 커다란 역설이다. _ 피에르 노라 외, <기억의 장소 5> , p209


 다만,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10.29 참사에 대해 애도하는 것과는 별개로 이러한 참사의 원인과 재발방지에 대한 노력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만인(萬人)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를 방지하고자 만들어 낸 합의체로서 '국가권력'이라는 리바이어던을 인정한 것은 이를 통해 최소한의 안정을 보장받기 위함이 아닐까. 스스로의 손바닥에 왕(王)자를 쓰면서까지 리바이어던이라는 용(龍)의 머리에 올라탔으면, 그에 걸맞는 행동을 해야하는 것은 당연한 그의 의무가 아닐까. 되려 역린을 건드려서 용의 분노를 샀더라도 할 말은 없을 것이다. 스스로 공동체 구성원들의 일반의지를 모두 담아낼 그릇이 못된다면, 스스로 그릇을 깨뜨리고 내려오는 것만이 모두를 위한 마지막 충정이라 생각된다...


 공통의 권력(common power)은 외적의 침입과 상호간의 권리침해를 방지하고, 또한 스스로의 노동과 대지의 열매로 일용할 양식을 마련하여 쾌적한 생활을 보낼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이 권력을 확립하는 유일한 길은 모든 사람의 의지를 다수결에 의해 하나의 의지로 결집하는 것, 즉 그들이 지닌 모든 권력과 힘을 '한 사람'(one Man) 혹은 '하나의 합의체'(one Assembly)에 양도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자신들 모두의 인격을 지니는 한 사람 혹은 합의체를 임명하여, 그가 공공의 평화와 안전을 위해 어떤 행위를 하든, 혹은 [백성에게] 어떤 행위를 하게 하든, 각자가 그 모든 행위의 본인이 되고, 또한 본인임을 인정함으로써, 개개인의 의지를 그의 의지에 종속시키고, 개개인의 다양한 판단들을 그의 단 하나의 판단에 위임하는 것이다. 이것이 달성되어 다수의 사람들이 하나의 인격으로 결합되어 통일되었을 때 그것을 코먼웰스(Commomwealth)라고 부른다. 이리하여 바로 저 위대한 리바이어던(Leviathan)이 탄생한다. 코먼웰스의 정의(定義)는 다음과 같다. '다수의 사람들이 상호 신의계약을 체결하여 세운 하나의 인격으로서, 그들 각자가 그 인격이 한 행위의 본인이 됨으러써, 그들의 평화와 공동방위를 위해 모든 사람의 힘과 수단을 그가 임의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_ 토머스 홉스, <리바이어던 1> , p232


 용(龍)이라는 동물(虫)은 유순해 길들이면 탈 수 있다. 그러나 턱밑에 직경 한 자쯤 되는 역린(逆鱗, 거꾸로 난 비늘)이 있는데, 만약 사람이 그것을 건드리면 반드시 그 사람을 죽인다. 군주에게도 역린이 있어, 설득하려는 자는 군주의 역린을 건드리지 않을 수 있어야만 성공을 기대할 수 있다. _ 한비자, <한비자> , p118/5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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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2-12-08 18: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따뜻한 하루 보내세요.^^

겨울호랑이 2022-12-09 04:52   좋아요 0 | URL
서니데이님 감사합니다, 즐거운 주말 되세요! ^^:)
 

일상적 활동은 경기에 참가한 선수의 행동과 같은 것이며, 관습상/법률상의 틀은 그 경기의 규칙과 같은 것이다. 경기에서나 사회에서나, 그 어떤 규칙도 참가자 대부분이 외부적 강제 없이 그에 따라 주지 않는 한, 다시 말해 광범위한 사회적 합의가 뒷받침되지 않는 이상, 보편화할 수가 없다. 그러나 우리가 규칙을 해석하고 적용하기 위해 관습이나 합의에만 의지할 수는 없는 일이므로 심판이 필요하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 규칙을 수정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하는 일, 규칙의 의미에 대해 이견이 있을 때 그 차이를 조정해주는 일, 내버려두면 정정당당하게 경기하려 하지 않는 극소수의 사람들에게 그 규칙을 준수하도록 강제하는 일, 이러한 일들이야말로 자유사회에서 정부가 맡은 기본적 역할이다. _ 밀턴 프리드먼, <자본주의와 자유> ,p62


통화주의자이자 자유주의 시장경제 옹호자, 이른바 신자유주의자 밀턴 프리드먼(Milton Friedman, 1912 ~ 2006)은 <자본주의와 자유 Capitalism and Freedom>에서 규칙의 제정자 겸 심판으로서의 정부의 역할을 강조한다. 절대적 시장의 자유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일종의 조정자로서 역할을 프리드먼은 강조한다. 같은 장 결론에서 그는 최종적으로 정부의 역할을 다음과 같이 명시한다. 법과 질서를 유지하고, 개인을 보호하는 정부의 기능. 작은 정부 옹호자인 프리드먼의 시각에서도 이태원 참사를 대처하는 현정부의 모습은 일관성없는 자유주의자에 다름아니다. 대통령 스스로가 자신의 가치관에 프리드먼이 가장 큰 영향을 미쳤음을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프리드먼의 기준에도 못 미치는 행정을 펼치고도 반성없이 애도(哀悼)를 강요하며 슬퍼할 자유를 강제하는 모습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모르겠다... 


관련기사 : https://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45289


 법과 질서를 유지하고, 재산권을 유지하고, 재산권이나 경제적 게임의 다른 규칙들을 수정하는 수단 노릇을 하고, 그 규칙의 해석을 둘러싼 분쟁을 재결 裁決하고, 계약의 이행을 강제하고, 경쟁을 촉진시키고, 통화운용체계의 구조를 마련하고, 정부 개입을 충분히 정당화할 만큼 중요하게 생각되는 것으로서 기술적 독점에 대응하고 외부효과를 극복하기 위한 활동에 관여해온 정부. 정신이상자건 어린아이건 간에 무능력자를 보호하는데 있어서 사적인 자선이나 가족의 기능을 보완해온 정부. 이처럼 정부는 분명히 앞으로도 중요한 기능을 수행할 것이다. 일관성 있는 자유주의자는 무정부주의자가 아니다. _ 밀턴 프리드먼, <자본주의와 자유> ,p75


 정부가 수행하기에 적합한 활동이 무엇인지 결정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문제는 서로 다른 개인들의 자유가 저촉되는 것을 어떻게 해소하느냐 하는 것이다. _ 밀턴 프리드먼, <자본주의와 자유> ,p63


견딜 수 없었던 하루. 점점 비참해지는 날들. 울다. _ 롤랑 바르트, <애도일기> ,p102/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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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22-11-01 21: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밀턴 프리드만 이야긴 공감할 수 없지만, 롤랑 바르트의 “애도”는 지금 이때 맘에 다가옵니다.
삼가 고인들의 명복을 빕니다.

겨울호랑이 2022-11-01 21:37   좋아요 1 | URL
저 역시 밀턴 프리드먼의 주장에 동의하기 어렵지만, 자유를 좋아하는 어떤 이가 존경하는 인물이라 옮겨봅니다. 참 힘든 요즘입니다...

북다이제스터 2022-11-01 22:10   좋아요 1 | URL
“자유”란 단어가 가장 어려운 말인 거 깉습니다. 이제 “자유”를 다시 재정의하거나 더 이상 주장하지 않는 사회가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자유”가 모든 걸 망치고 있는 거 같습니다. ㅠㅠ

겨울호랑이 2022-11-01 22:14   좋아요 1 | URL
북다이제스터님 말씀처럼 어떤 것으로부터의 자유인지, 누구의 자유이며 그 한계는 어디까지인지 사회적 재합의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북다이제스터 2022-11-01 22:27   좋아요 1 | URL
자유가 명사형(freedom)이 아닌 부사구형(A is free from B)이라고 본다면 자유는 뭔가에서 결핍된 상태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자유는 그분 말씀처럼 모든 것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위해 자유롭지 않는 것을 선택하는 자유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겨울호랑이 2022-11-01 22:30   좋아요 1 | URL
^^:) 북다이제스터님의 ‘자유‘ 정의는 마침 얼마 전 정리한 하이데거의 ‘자유‘와 통하는 바가 있는 듯 합니다. 제약 상황 아래에서 어쩔 수 없이 주어진 선택지 중에서 골라야 하는 자유. 자신의 뜻대로 모든 것이 되어야 하는 절대자의 자유가 아닌, 유한한 존재로서의 자유가 더 현실적으로 다가옵니다.

북다이제스터 2022-11-01 22:36   좋아요 1 | URL
답글 감사합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제가 감히 하이데거 반열에 든 거 같습니다. 감히… ㅋㅋ
하이데거는 제가 넘 좋아하는 분이라서 더욱 몸 둘봐를 모르겠습니다. ㅋㅋ
즐거운 저녁 시간 되세요. ^^

겨울호랑이 2022-11-01 22:44   좋아요 0 | URL
북다이제스터님 좋은 대화 감사합니다. 평안한 밤 되세요! ^^:)

나와같다면 2022-11-01 21:4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어떻게 이런 일이...”
상가에서 자주 듣는 말입니다.
‘문상(問喪)’이나 ‘조문( 弔問)’에 ‘물을 문(問)’자가 있는 것은, 죽음의 진상에 대한 의문과 애도가 본디 둘이 아니라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진상을 알아야, 망자와 유족, 그 친척 친지들이 한을 품지 않고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지금은 애도할 때이니 진상규명과 책임문제는 나중으로 미뤄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가 많습니다.
이들이야말로, 무식을 선동하여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자들입니다.

- 전우용 사학자

겨울호랑이 2022-11-01 21:44   좋아요 2 | URL
정말 그렇습니다. 위패도 없이 하얀 국화꽃만 한 손에 덜렁덜렁 내려놓는 위선적인 모습들이 오히려 진실을 은폐하려는 그들의 진심을 드러내 보이는 것 같습니다...

그레이스 2022-11-02 17:3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바르트의 애도일기 좋았습니다.
자유시장경제를 주장했기에 아마도 그는 작은 정부쪽이 아니었을까 싶네요.
그럼에도 그가 생각한 정부는 지금 우리 정부 그 이상이죠!ㅠ

겨울호랑이 2022-11-02 18:38   좋아요 1 | URL
그렇습니다... 주권을 정부에 위임한 뜻이 어디에 있는가를 생각해 본다면 답은 상식선에서 나올 것이라 여겨집니다. 그럼에도 비상식적인 정부의 행태는 우리를 더 슬프게 하네요...

그레이스 2022-11-02 18:39   좋아요 2 | URL
오늘 막내가 저 사람은 사회계약론부터 다시 공부해야 해! 라고 하더군요 ㅠ

겨울호랑이 2022-11-02 21:25   좋아요 1 | URL
그레이스님 자제분께서 날카롭게 짚어주셨다고 생각됩니다... 어쩌면 그보다 더 일찍 객차 안에서 다리를 올리지 않아야 한다는 도덕부터 다시 배워야할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