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10월과 11월 사이에 할머니 산소가 있는 전라도 강진을 갑니다. 하루동안의 짧은 일정이지만, 산소에 들르고 어른들께 인사를 드린 다음 강진과 해남의 문화재나 유적지를 돌아본지도 5년 정도 되었습니다. 그동안 다산 유배지, 김영랑 생가, 백운동 별서정원 등을 들렀고 이번에는 병영(兵營) 성터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멀리서 바라본 병영성터는 황금색 벌판과 어울어져 마치 황금성처럼 보였습니다. 곡창지대인 호남에서도 병영이 위치한 곳은 산으로 둘러싸여 천연의 군사요새임을 한 눈에도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병영과 관련한 내용을 해설 <대동여지도 大東輿地圖>에서 찾아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병영(兵營) 조선의 전라도 육군 전체를 호령하던 병마도절제사영(兵馬都節制使營)이다. 원래 광주(光州)에 있었는데, 1417년(태종 17년) 도강고현(道康古縣)으로 옮겨온 것이다. 전라도는 물론 제주의 군대를 총괄하는 본부였기에 소속 군인들과 몰려든 상인들로 제법 큰 고을을 이루었다. 17세기 중반, 제주도에 표류한 네델란드인 헨드릭 하멜(Hendrick Hamel) 일행이 곳에 8년 동안 억류되기도 하였다.(p247) <해설 대동여지도> 中


 전라도 육군을 총괄하는 군사기지인만큼 요충지에 자리잡고 있는 것도 당연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제는 성 가까이 다가가 보겠습니다.



 원래 성터만 남은 곳이었으나 최근 복원 공사가 한창이라 제법 모습을 갖춘 읍성(邑城)의 모습을 확인하게 됩니다. 마치 서산의 해미읍성(海美邑城)을 연상케 하는 성의 외관입니다. 복원된 성에는 성곽 일부분을 외부로 돌출시켜 적을 제압하는 옹성(甕城)도, 외적으로부터 침입을 방어하는 해자(垓字)도 갖추어져 있어 작지만, 완벽한 요새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읍성(邑城)은 고려 말에 홍건적(紅巾賊)과 왜구(倭寇)가 들끓자 이를 방어하기 위해 관아가 있어 나라를 다스리던 지역에 쌓기 시작하여 조선시대로 계승된 것이다. 세종, 성종 때에 많은 읍성들을 축조하였는데, 기존의 토축성을 석축성으로 다시 쌓은 것이 많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95개소, <증보문헌비고>에 따르면 104개소의 읍성들이 있었다고 한다. 읍성의 모양은 방형과 원형이 많은데, 이는 산 위에 건축되기보다 평지나 구릉지에 축성되기 때문이다. 또 때로는 부정형의 읍성도 있다. 성내에는 관아, 객사, 향청, 훈련원, 중영, 군기고 등을 두어 나랏일을 보고 평시나 비상시 성을 방비한다. 현재 전국에는 동래읍성 등 109개소의 읍성이 남아 있다.(p229) <한국건축사> 中


 역사 속에서 병영은 하멜(Hendrik Hamel, 1630 ~ 1692)과 그 일행이 머물던 곳으로 유명합니다. 이곳에서 하멜과 일행은 1656년부터 1663년 대기근이 일어나 남원, 순천, 좌수영(여수)로 분산되기까지 약 7년간 머무르게 됩니다.


 1656년 3월 어느날 아침에 출발하여 오후에는 태창(泰倉 큰 창고) 혹은 전라 병영(兵營)이라 불리는, 성채가 있는 어떤 큰 고장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관찰사 다음으로 권위가 있는 전라도 군사령관인 절도사 節度使의 관저가 있었다... 우리가 있는 곳은 제주로부터 90km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고 해안과 가까운 곳이었다.(p55) <하멜표류기> 中


 <하멜 표류기> <조선왕국기>로 처음으로 서양에 조선을 소개한 하멜이기에, 그가 한동안 병영에 머물렀다는 사실때문에, 병영성 근처에는 하멜 박물관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병영과 조선에서의 기억은 하멜에게 그리 좋은 기억만은 아닌 듯 합니다.


 신임 좌수사가 7월에 부임해 왔는데 그도 역시 전임자와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많은 일을 시키려 했다. 우리들 각각에게 매일 일백 패덤(fathom 약180m)이나 되는 새끼를 꼬라고 했다. 우리는 이 일이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전임자에게 했던 것처럼 우리의 제안을 이야기했다. 그러나 그는 만약 우리가 그 일을 할 수 없다면 다른 종류의 일을 시키겠다고 협박했다. 만약 그가 우리에게 일을 시키면 후임자들도 계속 똑같이 할 것이며, 일단 그런 관행이 이루어지면 쉽사리 바꾸어지기 어렵기 때문에 우리는 노예가 될 것이라는 자각이 들었다... 그래서 우리는 배를 구하려고 온갖 수단을 다 모색했다. 이 심술궂은 사람들 밑에서 매일 슬픔에 젖어 노예 상태로 사느니보다 차라리 한번 모험을 해보기로 했다.(p68) <하멜표류기> 中


 그렇다면, 조선에게 하멜은 좋은 방문자였을까 생각해보면 이 역시도 아닌듯 합니다. 인도네시아를 식민지로 삼던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소속의 하멜은 밀린 급여를 받기 위해 일지를 썼으며, 조선의 풍습, 지리 등을 기록하는 것이 제국주의(帝國主義) 국가들의 초기 탐색 과정임을 생각한다면 조선에게도 하멜은 그리 달가운 손님은 아니라 여겨집니다.


 원전인 <하멜일지>는 헨드릭 하멜이 조선에서의 억류생활 후 탈출해 네덜란드로 돌아간 다음에 쓴 기록이며 보고서였다. 그리고 이 보고서의 목적은 조선에 억류된 기간의 임금을 동인도회사에 청구하기 위함이었다.(서문)... 조선을 서해안으로 접근해야 하는 이유는 동해안과 남해안에는 만의 안쪽과 입구에 눈에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절벽과 암초가 많기 때문이다. 조선의 수로 水路 안내인은 우리에게 서해안이 가장 접근하기 좋다고 말했다.(p141)<조선에 관한 기술> 中


 하멜과 조선과의 관계는 하멜의 말처럼 포로 - 간수의 관계 이상은 아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원수일지도 모를 이들의 관계를 오늘날 우리가 필요에 의해 친한 관계로 포장한 것은 아닐까 생각을 하면서 병영성을 떠나왔습니다... 



 러나 우린 이교도의 국가에 잡혀 있는 불쌍한 포로라는 것을 깨닫고 그들이 우리를 살려 주고 죽지 않게 먹여 주는 것만으로도 하나님에게 감사하며 이 모든 고통을 견뎌야 했다.(p66) <하멜표류기>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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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9-12-06 09: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래전 정민 선생님과 함께 한 강진 답사
에서 하멜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나네요.

하멜 표류기가 사실은 하멜이 소속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인가에서 보험금
을 받기 위해 작성한 보고서라는 이야
기도 어렴풋이나마 기억이 납니다.

겨울호랑이 2019-12-06 09:27   좋아요 1 | URL
그렇습니다. 하멜의 이기적인 마음에서 한 행동이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조정되어 의도치 않게 조선을 소개한 역사적인 책이 되버린 듯 합니다.^^:)
 


임종 환자의 침실은 가정에서 병원으로 전이되었다. 이러한 전이는 의학적 기술을 빌미로 가족들에게 용인되었으며, 이들의 적극적인 협조로 더욱 보편화되고 절차도 매우 간편해졌다. 이때부터 병원은 죽음이 공개성 혹은 그것의 잔재들로부터 확실하게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장소가 된다. 이렇게 해서 병원이 고립된 죽음의 장소가 된 것이다.(p1030) <죽음 앞의 인간> 中


 <죽음 앞의 인간 'homme Devant la Mort>의 저자 필립 아리에스(Philippe Aries, 1914 ~ 1984)는 20세기의 죽음을 '역전된 죽음'으로 특징짓는다. 죽음을 입에 담지 않고 '침묵'을 통해 회피하는 모습이 <죽음 앞의 인간>에서 그려진다.


 죽음이라는 말은 금기처럼 차마 입에 올릴 수 없는 말이 되고 있어서 예의범절을 아는 보통 사람이면 누구나 합당한 표현으로 완곡하고 정숙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사고가 보편화되어 있다... 낭만주의자들이 수사학을 사용해서 발설할 수 없는 현실을 은폐하고자 했다면, 20세기에 와서는 침묵에 내맡기고 있는 것이다.(p1032) <죽음 앞의 인간> 中


 이러한 죽음을 대하는 태도가 현대인의 일반적인 모습이라면,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 Tuesdays with Morrie>에서는 루게릭 병으로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노교수의 모습은 많이 다르다. 시한부 삶을 남겨두었지만, 노교수는 아직 젊은 제자에게 어떤 말을 해주고 싶었을까. 이번 페이퍼에서는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의 내용을 중심으로 죽음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죽음과 삶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모리 교수의 태도 안에서 우리는<사물의 본성에 관하여 De Rerum Natura>에서 루크레티우스(Titus Lucretius Carus, BC 90 ? ~ BC 50?)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우린 죽음의 광경을 보는 걸 너무도 두려워하지. 저번에 책을 읽었네. 병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바로 시트를 머리에 씌운 다음 바퀴 달린 침대에 주검을 싣고 통로를 지나 내려간다더군. 죽음의 광경에서 빨리 벗어나려고 안달하는 거지. 사람들은 죽음이 전염이라도 되는 것처럼 행동하곤 해. 자네도 잘 알듯이 죽음은 전염되지 않아. 삶이 자연스러운 것처럼 죽음도 자연스럽다네. 그것은 우리가 맺은 계약의 일부일 뿐이야.(p249)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 中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고 우리와 전혀 관련이 없다.(830)... 우리가 존재하지 않게 될 때, 서로 하나로 합쳐져 우리의 존재를 이루고 있는 바 육체와 영혼의 분리가 일어날 때, 그때는 분명코, 이미 존재하지 않을 우리에게, 전혀 아무 일도 일어날 수 없을 것이며, 그 무엇도 감각을 일으킬수 없으리라.(839~840)... 그가 언젠가 태어났었든, 아무 때도 태어나지 않았었든, 이제는 전혀 차이가 없다는 것을. 그대는 물론 죽음 속에서 잠든 것처럼, 그렇게 남은 온 세월 동안 괴로운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우리라. 하지만 우리는 소름 끼치는 화장장 가까이에서 그대가 재가 된 것을 그칠 줄 모르고 애곡했노라, 그리고 그 어떤 날도 우리 가슴에서 영원한 슬픔을 없애지 못하리라.(904~908)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 中


 살아간다는 것이 서서히 죽어간다는 것의 다른 이름임을 생각한다면, 모리 교수와 루크레티우스의 말은 머리로 이해할 수 있지만, 가슴으로 긍정하기는 쉽지 않다. 마음으로도 죽음을 받아들인 그가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일까. 그것은 자신만의 길을 걸으라는 말과 사랑을 나누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을 듯하다.


 받는 것은  내가 죽어 가는 느낌을 준다네. 하지만 베푸는 것은 내가 살아 있다는 느낌을 주지.... 심오한 말이다. 그리고 과연 맞는 말이다. 받는 것, 소유하는 것은 살아 있는 느낌을 주지 않는다. 아마도 그것이 마케팅, 영리주의, 광고계의 기본이겠지만, 모리는 '문화에 현혹되지 말라.'고 말한 바 있다. 새 차, 새 옷, 새 평면 TV를 소유하는 것. 이런 것들은 살아 있다는 느낌을 주지 않는다. 일시적인 흥분감이 있지만, 신제품 냄새가 빠지기도 전에, 품질 보증 기간이 끝나기도 전에 사라진다.(p30)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 中


 우리 문화는 사람들에게 행복감을 느끼지 못하도록 하네. 우린 거짓된 진리를 가르치고 있어. 그러니 스스로 제대로 된 문화라는 생각이 들지 않으면 그것을 굳이 따르려고 애쓰지 말게. 그것보다는 자신만의 문화를 창조해야 해.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못하네 그래서 그들은 불편한 상황에 처한 나보다 훨씬 더 불행해.(p83)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 中


 죽기 전 자신만의 문화를 만들라는 모리 교수의 말은 쇠렌 키에르케고르(Sψren Aabye Kierkegaard, 1813 ~ 1855)의 '신(神) 앞에 선 단독자'의 개념을 연상시킨다. 독실한 기독교도인 키에르케고르와 달리 모리교수는 유대교 신앙을 가졌기에 차이가 있지만, 유일신이며 인격신이라는 점에서 본다면 크게 무리한 해석만은 아닐것이다. 이에 <불안의 개념 Begrebet Angest>, <죽음에 이르는 병 Sygdommen til Døden>의 일부를 옮겨본다.


 내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아주 분명하고도 단순하다. 말하자면, 단독자가 스스로 행위를 통해서 진리를 낳을 때 오직 그 때 비로소 진리가 그에게 존재하는 것이다.(p358)...  우리는 동정심을 가져야 한다. 그렇지만 이런 동정심은 한 사람에게 일어났던 일은 모두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올바르게 그리고 진지하게 인정할 때만 진실하다. 오직 그때에만 자신과 다른 사람들 모두에게 유익한 존재가 될 수 있다.(p186) <불안의 개념> 中


 그리스도교적 관점에서 보자면, 그 어떤 세속적, 육체적 질병도 죽음에 이르는 병이 아닌데, 왜냐하면 죽음은 사실 모든 질병의 끝이기는 하지만, (궁극적인) 끝은 아니기 때문이다. 만일 엄밀한 의미에서 죽음에 이르는 병에 대한 그 어떤 물음이 있다고 한다면, 그 병은 곧 그 끝이 죽음이고 또 죽음이 그 끝인 그런 질병이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절망이라고 하는 것이다.(p63) <죽음에 이르는 병> 中


 죽음이 필멸의 존재인 우리 모두에게 공통된 과제라는 점에서 <불안의 개념>에서 말한 단독자가 가져야 하는 동점심은 우리 모두에게 서로 공통된 감정일 것이다. 우리 모두가 죽음 앞에 선 단독자이기에 서로 사랑하고 동정심을 가져야 하는 것이고, 이러한 행위를 통해서 진리가 실현되는 것이며, <죽음을 이르는 병>에서 말한 죽음을 가져오는 절망을 넘어 영원한 삶을 사는 것은 아닐런지. 다소 기독교적인 해석이지만, 모리 교수의 태도에서 키에르케고르의 그림자가 살짝 느껴진다.('살짝'이라고 말하는 것은 모리 교수의 이야기에서는 '원죄'의 개념이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불안의 개념>과 <죽음에 이르는 병>의 리뷰에서 다룰 계획이다.) 다시 돌아오면, 모리 교수는 키에르케고르의 동정심보다 더 나아가 사랑을 나눌 것을 강조한다. 


 내가 이 병을 앓으며 배운 가장 큰 것을 말해 줄까? 사랑을 나눠 주는 법과 사랑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는 게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거야.(p104)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 中


  내 말을 믿게. 죽어 가고 있을 때는 사람들이 모두 다 같다는 게 참말임을 알게 되네 . 우리 모두 출생이라는 걸로 똑같이 시작하지. 그리고 똑같이 죽음으로 끝나네. 그런데 뭐가 그렇게 다르다는 거야? 인류라는 대가족에 관심을 가져야 하네. 사람들에게 애정을 쏟게.(p231).. 여기에 비밀이 있네. 아이 때와 죽어 갈 때 이외에도, 즉 살아가는 시간 내내 사실 우린 누군가가 필요하네.(p232)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 中


 사랑을 나누는 것과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 이것은 사선(死線)의 지평을 바라본 한 노학자의 깨달음이다. 그리고, 이것은 오직 살아있을 때만 가능한 것이다. 죽어서는 단독자로서 심판대에 서는 것은 동서양(東西洋) 모두에서 공통된 처지인 듯하다. 차이가 있다면 영원한 생명이냐, 아니면 환생(環生)을 통해 업(業)을 소멸하는가 하는 점인 듯하다.

 

 아, 고귀하게 태어난 자여. 만일 그대가 애착심과 혐오감을 떨쳐 버릴 수 없다면 앞에서 말한 어떤 환영이 나타나더라도 진리와 진리를 깨달은 자와 그를 따르는 구도자들에게 기도하라. 그리고 자비의 신에게 기도하라. 그대가 지금 사후세계에 있다는 것을 알라. 모든 나약함을 버리라. 그대의 아들과 딸들 또는 두고 온 친척들에 대한 애착을 끊으라. 그들은 그대에게 아무런 도움도 될 수 없다.(p447) <티벳, 사자 死者의 서 書> 中


 메멘토 모리 Memento Mori. "자신의 죽음을 기억하라"라는 의미의 이 라틴어는 고대 로마 개선식 때와 초대 기독교 공동체에서 인사로 사용되었다. 기쁜 날 사용된 이같은 말이 사용된 이유는 우리에게 삶과 죽음이 결코 분리되지 않음을 일깨우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크로노스(Chronos)와 카이로스(Kairos). 절대 시간을 의미하는 크로노스와 '기회', 'timing'을 의미하는 카이로스에서 이 또한 분리될 수 없음도 생각하게 된다. 우리에게 주어진 지금 이 순간(카이로스)를 잘 살릴 때, 우리가 죽음 이후 시간이 소멸된 어느 지점에서 절대 시간(크로노스)를 잘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닐까.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을 통해 죽음의 의미와 크로노스와 카이로스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이 책을 낸 지 20년이 흘러서야 마음 깊이 깨닫는다. 모리를 힘들게 한 것은 죽음이 아니었음을. 그것은 잊히는 것이었다.(p27)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 中


  잊히기를 두려워 한 이름이 '죽음'인 노교수를 위해서 '메멘토 모리'를 읊어보며 페이퍼를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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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19-11-24 00: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죽음에 대한 겨울호랑이님의 깊은 고찰에 경의를 표합니다.
죽음에 대해 잘 알 수 없어서 그저 카이로스적 시간의 소중함을 붙들고 살 수밖에 없는 저인것 같습니다^^

겨울호랑이 2019-11-24 00:32   좋아요 1 | URL
에고 아닙니다. 죽음에 대한 수많은 이야기 중 제가 아는 몇가지를 옮겼을 뿐입니다. 좋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예전에 이스라엘 시나이 산에 올랐을 때가 생각이 납니다. 새벽에 출발해서 제 발끝만 보고 무작정 걸은 후 아침해가 떴을 때, 매우 높은 돌산 정상에 도착했었던 경험이었습니다. 돌아보면, 우리 삶이 그런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불안한 미래속에서 무작정 걷는 카이로스의 삶을 살다보면 크로노스의 결과는 주어지는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페넬로페님 감사합니다.^^:)

2019-11-24 08: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1-24 09:3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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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25 12:0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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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25 14:0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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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 머뭇거림은 내가 영원히 뉴요커들의 특징으로 여길 성격, 즉 소심함을 본능적으로 또한 즉각적으로 밀어내는 특성을 자극할 뿐이었다. 처니는 차에서 내렸다. 나는 차를 모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냥 한번 해봐. 그리고 즐겨봐. 이것이 그녀가 말하려는 메시지였다.(p113)

 아이가 없을 때는 이런 일로 인한 좌절감을 사소하게 넘길 수 있었지만, 풀타임으로 일하는 엄마로서 절반 동안만 곁에 있어주는 배우자를 두고 새벽같이 일어나야 하는 처지이다 보니 인내심이 차츰 줄었다. 그러다 결국에는 아예 바닥났다. 버락이 집에 오면, 화내는 나를 만나거나아예 못 만나거나 둘 중 하나였다. 나는 집 안의 불이란 불은 다 끄고 부루퉁하게 잠자리에 든 뒤였다.(p273)

남편이 정치인인 탓에, 정치와 권력이 돌아가는 양상을 가까이에서 목격해왔다. 그래서 모든 선거구에서 투표자가 몇 명씩만 빠져도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 이 후보자가 당선되느냐 저 후보자가 당선되느냐만이 아니라 이 가치 체계와 저 가치 체계 중 무엇이 채택되느냐가 달라진다는 걸 알았다.(p366)

여성들은 평생 그런 모욕을 겪는다. 길거리에서 듣는 성희롱, 더듬는 손길, 성폭력, 억압 행위를 통해서. 그런 일들은 우리를 상처 입힌다. 우리의 힘을 앗아간다. 어떤 상처는 간신히 눈에 보일 만큼 사소하다. 반면 어떤 상처는 거대하게 쩍 벌어져 있고, 평생 아물지 않을 흉터를 남긴다. 어느 쪽이든 상처는 누적된다. 여성들은 학교나 직장을 오갈 때도, 집에서 아이들을 기를 때도, 종교 활동을 하러 갈 때도, 한 발 전진하려고 애쓰는 모든 순간에 그런 상처를 품고 다닌다.(p540)

무언가가 된다는 것은 하나의 과정이고, 하나의 길을 걸어가는 발걸음이다. 인내와 수고가 둘 다 필요하다. 무언가가 된다는 것은 앞으로도더 성장할 여지가 있다는 생각을 언제까지나 버리지 않는 것이다.(p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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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25 12:0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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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25 14:0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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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우주가 과학의 법칙에 따라서 무(無)에서 자연스럽게 생겼다고 생각한다. 과학의 근간이 되는 기본 가정은 과학적 결정론이다. 일단 우주의 초기 상태가 주어지면, 이후의 그 진화는 과학의 법칙이 결정한다. 이 법칙은 신이 결정한 것일 수도, 그렇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신은 법칙에 간섭하거나 법칙을 깰 수 없다.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법칙이 아니다. 이렇게 되면 신에게 남는 것은 우주의 초기 상태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뿐인데, 이 초기 상태마저도 지배하는 법칙이 존재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신은 애초에 아무런 자유도 가지지 못하게 된다.(p62)

시간을 아무리 거슬러올라가도 빅뱅 이전으로는 갈 수 없다. 빅뱅 이전에는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마침내 원인이 없는 무엇인가를 발견했다. 원인이 존재할 수있는 시간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나에게 그것은 창조자가 존재할 가능성이 없다는 뜻이다. 창조자가 존재할 시간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p73)

허수 시간에서 경계가 없다는 것이 우주의 경계조건이라면, 우주는 단 하나의 과거만 가지고 있지 않을 것이다. 허수 시간에는 수많은 역사들이 있고 그 역사들 각각은 진짜 시간에서의 역사를 결정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주에 대해서 과잉 역사들이 넘쳐나게 될 것이다. 그럼 무엇이 우주의 가능한 역사들 중에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특별한 역사의 집합을 선택한 것일까?(p94)

간편하고 우리가 가진 능력으로 지금도 가능한 방법은 기계를 보내는 것이다. 이 기계는 장거리 성간(星間) 여행을 견디도록 설계된다. 이 기계 장치가 새로운 별에 도착하면, 그 별에 착륙해서 채굴을 하고 더 많은 기계를 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새로 제작된 기계들이 더 많은 별들을 향해 떠난다. 이 기계들이 화학적 고분자가 아닌 전자 소자 기반의 새로운생명 형태가 될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DNA 기반의 생명을 대체할 것이다. 마치 DNA가 원시 형태의 생명체를 대체했던 것처럼.(p125)

 우리가 새로운 우주 시대에 진입하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최초의 민간 우주비행사는 선구자들이 될 것이고, 최초의 민간 우주여행은 대단히 비쌀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지구에 사는 사람들 중 대부분이 우주여행을 할 수있게 되는 것이 나의 소망이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우주로 나가게 되면, 지구 위에서의 우리의 지위와 지구를 관리하는 관리자로서의 책임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우주 안에서의 우리의 현재와 미래를 인식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우리의 궁극적인 운명이 우주에 있다고 믿는다.(p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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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25 12:1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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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11 17:2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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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시백 작가의 <35년> 3권은 1910년부터 1925년까지의 시기를 다룬 작품이다. 일제무단통치부터 1920년대 사회주의 운동이 일어난 이 시기의 변환점은 역시 3.1혁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무단통치에 대한 저항으로 일어난 3.1혁명과 이의 좌절. 그리고 이어지는 투쟁이 시대의 큰 흐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35년 1권 : 1910 -1915 무단통치와 함께 시작된 저항>


 1910년 초대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다케의 임명으로 시작된 일제의 조선지배는 시작되었다. 사상, 언론, 종교, 교육의 모든 분야에서 내선일체(內鮮一體)을 지향하며 기존 질서를 뿌리부터 흔든 일본의 통치는 민족 탄압으로 이어졌으며, 일제는 강제 동화정책을 추진했다. 동양척식주식회사에 의한 토지수탈은 지주-소작제도의 정착과 함께 많은 이들을 국외(특히 간도)로 떠날 수 밖에 없었는데, 이들이 훗날 해외독립투쟁의 주역이 되었다. 


<35년 2권 : 1916 -1920 3.1 혁명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함께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의 영향으로 일본에서 2.8 독립선언, 1919년 3.1 혁명이 일어나게 된다. 서울에서 시작된 만세운동은 일본의 야만적인 진압으로 인해 비록 뜻을 이루지 못했지만, 이를 통해 대중들이 깨어나면서 만주, 연해주 지역에서 독립군 투쟁과 1920년대 대중투쟁의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다.


<35년 3권 : 1921 - 1925 의열투쟁, 무장투쟁 그리고 대중투쟁>


 3.1혁명의 결과 일제는 문화통치를 표방하였으나, 실제로는 조선의 지식인들을 친일파로 포섭하고, 보이지 않는 차별, 검열 등으로 민중에 대한 통제는 더 강화되었다. 또한, 산미증식계획으로 대표되는 식민지 수탈이 이 시기로부터 본격화되었다. 한편, 국외의 무장독립투쟁은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의 성과를 올렸으나, 경신참변으로 대표되는 일제의 민간인 학살 등으로 근거지를 옮기게 되었고,  자유시 참변을 계기로 그 세가 크게 꺾이게 되었다. 이후 독립 투쟁은 약산 김원봉으로 대표되는 의열단 활동과 사회주의 운동이 뒤를 잇게 되었다.


 <35년>이 배경으로 하는 일제시대는 어둡고 희망이 없던 시대로 느껴진다. 원치 않은 식민지배의 역사는 아픔을 전해 주기에, 찢겨진 상처를 바라보는 것처럼 고통스럽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이 시기 역사를 똑바로 바라봐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1910년대 조선에 신작로와 각종 근대화 설비를 가져다 놓으며, 일제 시대 이후 생활양식이 크게 변화한 것처럼, 우리 삶과 현대의 많은 문제들이 일제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 시대로부터 결코 눈을 뗄 수 없다. 조선의 근대화를 부르짖은 개화기 지식인들과 독립선언서를 작성한 민족대표들이 1920년대 이후 변절하는 모습에서 우리는 뉴라이트 지식인들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또한, 1920년대 민족 신문인 동아일보, 조선일보가 1925년 일제탄압으로 인해 어용신문으로 변질되는 모습에서 현재 언론 모습의 뿌리를 발견할 수 있으며, 1921년 자유시 참변을 통해 한국전쟁 이전 동족상잔의 비극도 확인하게 된다. 또한, 1920년대 일제에 의한 학교설립 규제가 오늘날 사학재단의 문제와도 무관하지 않음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지금 이 순간도 일제의 잔재와 함께 살아가고 있음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 이처럼 일제시대에 이루어진 많은 사건들이 오늘날 우리 삶과 직접, 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기에 우리는 고통스러워도 이 시기로부터 눈을 돌려서는 안될 것이라 생각한다.


 이러한 면에서 볼 때, 박시백 작가의 <35년>은 암울한 시기의 역사를 만화로 그려내면서도 많은 내용을 담고 있는 책이라 생각된다. 그리고, 이 시기의 문제점과 함께 과거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결코 무기력하게 일본에 굴복한 것이 아니라 국내, 하와이, 연해주, 만주 등지에서 치열하게 독립을 위해 싸웠음을 잘 보여준다는 점에서 일독(一讀)할 가치가 있는 책이라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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