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많은 사람이 생각하듯이 대륙 간 유도 미사일과 같은 새로운 병기 한 가지가 전쟁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양차 세계대전 사이 영국과 프랑스가 이런 질문 중의 몇 가지에 그릇된 대답을 했던 것은 그들이 재래식 군사 전략 개념에 젖은 채 국력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런 실수는 제2차 세계대전 말엽에 양국을 거의 패전의 위기로까지 몰고 갔다. 그들이 보유한 군사적 기술을 토대로 할 때 위의 질문들에 대한 대답은 달랐어야 했다. 오늘날 이와 비슷한 질문들에 우리가 어떤 대답을 내놓느냐에 따라서 장차 미국의 대외적 힘도 결정될 것이다.(p332) <국가 간의 정치 1> 中


 2020년 1월 1일 새해가 밝았지만, 정초부터 북미 간의 팽팽한 긴장을 느낀다. 우리나라 대통령 신년사보다 북한 지도자의 신년사에 더 큰 관심을 보이는 언론이 행태가 마땅치 않지만, 핵(核 Nuclear)과 대륙간탄도미사일(大陸間彈道 missile, intercontinental ballistic missile; ICBM)을 둘러싼 양국의 대립을 생각해보면 수긍할만한 면이 없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만, 아쉽게도 이들이 그토록 고대하던 북한 지도자의 육성 대신 노동당 전원회의 결과로 새로운 전략 무기를 목격할 수도 있다는 발언이 나와 주목과 우려를 함께 받고 있다. 


 전략무기를 둘러싼 이러한 현실은 고전적 현실주의 국제정치학자인 한스 모겐소(Hans Joachim Morgenthau, 1904 ~ 1980)가 <국가 간의 정치 Politics Among Nations>를 통해 전망한 내용을 잘 반영한다. 무기체계는 발전했는데, 이를 고려하지 못한 인식의 부족을 지적한 저자의 말은 21세기 미국 지도부에도 의미하는 바가 클 것이다. 그렇지만, 여기에서 한 가지 물음이 제기된다. 북-미 간의 문제를 전략 무기 문제로 치환할 수 있을 것인가?


 이에 대해서 케네스 월츠(Kenneth Waltz)의 <인간 국가 전쟁 Man, the State and War>가 적절한 답을 제시한다. 저자는 만약 전쟁을 막을 수 있는 수단이 존재한다면 전쟁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며, 전쟁은 결코 단일 요인에 의해 발생하지 않는 것임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를 통해 자칫 전쟁으로 갈 수 있는 북-미간의 문제가 단순히 전략무기만의 문제가 아님을 깨닫게 된다.


 루소의 사상을 국제정치에 반영해보면 '전쟁은 이를 방지할 것이 없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라는 명제를 얻게 된다. 루소의 분석은 특정 전쟁의 경우에 의존하지 않으면서 전쟁의 지속적인 발생을 설명해준다. 하지만, 국가 A가 국가 B를 공격하도록 만드는 직접적 원인은 국가를 단위로 한 세계 체제가 아니다. 전쟁의 개시 여부는 지리적 요건, 국토의 넓이, 국력, 이익, 정부의 형태, 역사, 전통 등 여러가지 특수한 환경에 따라 결정되며 이들 각각의 요인은 관련된 양국의 행동에 영향을 끼친다. 만약 두 국가가 전쟁을 벌이게 된다면 그 전쟁은 양측의 국가가 이 전쟁과 관련하여 명확히 정의내린 원인들로 인해 치러지는 것이다.(p318) <인간 국가 전쟁> 中


  전쟁과 평화. 레프 톨스토이(Lev Nicolayevich Tolstoy, 1828 ~ 1910)의 장편 <전쟁과 평화 War and Peace>에는 죽음과 삶을 갈라놓는 사선(死線)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여기에 표현된 죽음을 바라보는 인간의 모순된 태도를 보면서, 개인적으로는 미지에 대한 호기심으로 사선을 넘기보다 보다 호기심을 접고 선 안에 머무르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다.


 산 자와 죽은 자를 갈라놓은 것 같은 이 선을 한 발짝 넘어서면 미지와 고통과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 거기에는 무엇이 있을까? 이 들과 나무와 태양에 빛나는 지붕 저쪽에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알고 싶다. 이 선을 넘는 것은 두렵다. 그러나 넘어보고 싶다. 그리고 머지않아 이 선을 넘어 거기에, 이 선 저쪽에 무엇이 있는지 알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고, 그것은 죽음 저쪽에 무엇이 있는지 결국 알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p280) <전쟁과 평화 1> 中


 2020년 새해가 한반도 평화의 원년이자 세계 평화의 원년이 되기를 바라며 페이퍼를 갈무리한다. 그리고, 칸트(Immanuel Kant, 1724 ~ 1804)에 따르면 아마도 이러한 평화의 출발은 평화 조약이 될 것이다. 


 1. "장차 전쟁의 화근이 될 수 있는 내용을 암암리에 유보한 채로 맺은 어떠한 평화 조약도 결코 평화 조약으로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 - 국가 간의 영구 평화를 위한 예비 조항 제1항- (p15) <영구평화론> 中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4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cyrus 2020-01-01 22: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트럼프가 탄핵당할 위기에 처하게 되면서 그의 지위가 흔들리게 되니까 김정은이 트럼프를 만만하게 봅니다. 그래서 김정은이 군사 전략을 거론하면서 강경하게 나오는 것 같아요.

겨울호랑이 2020-01-01 22:22   좋아요 0 | URL
cyrus님께서 말씀하신 측면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거기에 더해서 다른 요인이 있을 수도 있겠구요. 잘은 모르겠지만, 거의 모든 이들이 북-미간 외교 갈등이 전쟁으로 이어지는 것을 원치 않으리라 생각하기에, 잘 해결되기를 바라봅니다...

2020-01-02 07: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1-02 08: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1-02 10: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1-02 11: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1-06 14: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1-06 16: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1-02 09: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1-02 09: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정신이 진실을 발견해야 한다. 그러나 어떻게? 매번 정신은 스스로를 넘어서는 어떤 문제에 직면할 때마다 심각한 불안감을 느낀다. 정신이라는 탐색자는 자기 지식이 아무 소용없는 어두운 고장에서 찾아야만 한다. 찾는다고? 그뿐만이 아니다. 창조해야 한다.(p87)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中


 '찾기 Recherche'에서 본질적인 것은 마들렌 과자나 포석들(鋪石) 안에 있지 않다. 한편으로 '찾기'는 단순히 추억해 내고자 하는 노력, 기억에 대한 탐색이 아니다. '찾기'는 '진리 verite 찾기'라는 표현에서처럼 그 말이 지닌 문자 그대로의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 다른 한편 잃어버린 시간 le temps perdu은 단지 지나간 시간 le temps passe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잃어버리는 (낭비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기억이 찾기의 수단으로 작용하는 것은 물론이지만 그것이 가장 근본적인 수단은 아니다.(p20) <프루스트와 기호들> 中


 질 들뢰즈(Gilles Deleuze, 1925 ~ 1995)는 <프루스트와 기호들 Proust et les signes>는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 1871 ~ 1922)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A la recherche du temps perdu>의 내용을 '진리 찾기'로 규정한다. 그렇지만, 진리는 결코 평범한 일상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들뢰즈에 따르면 진리는 우리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기호의 결과로서 우리에게 인식되는 것이다. 기호의 폭력이 난무하는 극한의 상황에서 비로소 우리는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


 진리는 결코 미리 전제된 선 의지의 산물이 아니라, 사유 안에서 행사된 폭력의 결과이다. - 이것만큼 프루스트가 강조한 테마는 거의 없다. 명시적이고 규약적인 의미는 결코 근본적인 것이 아니다. 외현적(外現的)인 기호가 감싸고 있고 그 기호 속에 함축되어 있는, 그런 의미 sens 만이 오로지 근본적이다... 마주침의 [속성인] 우연과 강요의 [속성인] 압력을 프루스트의 두 가지 근본적인 테마이다. 대상을 우연히 마주친 대상이게끔 하는 것, 우리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 - 이것이 바로 기호이다.(p41) <프루스트와 기호들> 中


 그렇다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진리를 찾는 이는 누구인가? 들뢰즈는 사랑에 빠졌지만, 애인(알베르틴)의 거짓말로 고통받는 이가 진리를 찾는다고 말한다. 주인공은 사교장, 공연장 등에서 수많은 기호들의 압력을 받으며 진리 찾기를 강요받는다.


 어쩌면 그녀는 정말 슬펐을지도 모른다. 그 순간 자기가 한 행동에 대해 나보다 더 잘 알았고, 나 이상으로 자신에게 엄격하면서도 관대한 그녀는, 그렇지만 이런 식으로 날 떠난다면 내가 더 이상 그녀를 만나고 싶어 하지 않을 거라고 의심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나는 다른 사람이 나보다 더 질투를 느낀다고 생각할 만큼 그녀가 나를 좋아한다고 믿었다.(p354)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7> 中 


 <누가> 진실을 찾는가? 그리고 <나는 진실을 원한다>라고 할 때 그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프루스트는 인간이란, 설령 순수하다고 가정된 정신이라 할지라도, 참된 것에 대한 욕망, 진실에 대한 의지를 처음부터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가 구체적인 상황과 관련하여 우리가 진실을 찾지 않을 수 없을 때, 그리고 우리를 이 진실 찾기로 몰고가는 어던 폭력을 겪을 때만 우리는 진실을 찾아 나선다. 누가 진실을 찾는가? 바로 애인의 거짓말 때문에 고통받는 질투에 빠진 남자이다. 찾기를 강요하고 우리에게서 평화를 빼앗아 가는 어떤 기호의 폭력이 늘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진실은 친화성 affinite이나 [진리를 인식하고자 하는 인식 주체의 자발적인] 선(善) 의지를 통해서 찾게 되는게 아니다. 진실은 비자발적인 기호들로부터 <누설되는 것이다>(p40) <프루스트와 기호들> 中


 내 소년 시절을 통해 메제글리즈가 이미 더 이상 콩브레 토양과는 닮지 않은 땅의 기복 탓에 멀리 가면 갈수록 시야에서 사라지는 지평선처럼 접근할 수 없는 그 무엇이다면, 게르망트는 현실적이라기보다는 관념적인 것으로, 그 '길'의 종점과도 같은, 적도나 극지방, 혹은 동양처럼 일종의 추상적이고 지리적인 표현이었다... 나는 그 두 길을 서로 다른 두 실체로 간주하며 오로지 정신적인 창조물에만 속하는 일관성과 통일성을 부여했다.(p238)... 나는 메제글리즈 쪽과 게르망트 쪽을, 내 정신적인 토양의 깊은 지층으로, 아직도 내가 기대고 있는 견고한 땅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p316)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中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진리 찾기라고 규정한다면, 이는 기호들의 의미를 해석하는 과정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현실적인 메제글리즈와 관념적인 게르망트. 이들은 배움의 두 측면이며, 주인공(혹은 화자)는 이러한 토대 위에서 배움을 펼친다는 것이 들뢰즈의 해석이다. 그리고, 진리 찾기의 방향은 미래로 향한다.


 이 책은 어떤 배움 apprentissage의 이야기이다. 더 정확히는 한 작가의 배움의 과정의 이야기다. 메제글리즈 Meseglise 쪽과 게르망트 Guermantes 쪽은 추억의 원천들이라기보다는 배움의 원료들이자 배움의 선(線)들이다. 그것은 수련 formation의 두 측면이다.(p22)... 이 배움은 배움의 목적들과 원리들을 통해서 [수단인] 기억을 넘어선다. '찾기'는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향하고 있다. 배운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기호들>과 관계한다. 기호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배워 나가는 대상이지 추상적인 지식의 대상이 아니다. 배운다는 것은 우선 어떤 물질, 어떤 대상, 어떤 존재를 마치 그것들이 해독하고 해석해야 할 기호들을 방출(放出 emettre)하는 것처럼 여기는 것이다.(p23) <프루스트와 기호들> 中


 메제글리즈 쪽과 게르망트 쪽은 내 삶의 수많은 작은 사건들과 연결되어 있었지만, 우리가 나란히 보내는 여러 다양한 삶 중에서도 가장 변화가 많고 이야깃거리가 풍부한, 지적인 삶과 연결되어 있었다. 물론 이 삶은 우리 안에 서서히 진행되어, 우리를 위해 의미와 양상을 변화시켜주고, 우리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 주는 진리 발견을 위해 이미 오래전부터 준비해 온 것이고, 또한 우리가 알지 못하는 채로 준비해온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진리는 우리 눈에 보이게 된 날에야 비로소 존재하기 시작한다.(p315)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中


 또한, 들뢰즈는 기호들의 세계에서 궁극적인 기호인 예술의 중요성에 대해 언급한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작가를 지망하는 주인공에게는 문학이 궁극적인 기호로 작용하며, 예술을 통해서만 진리는 비로소 모습을 나타낼 수 있다.


 예술의 세계는 기호들의 궁극적인 세계이다. 예술의 세계에서의 기호들은 <물질성을 벗은> 기호들이다. 이 기호들은 관념적 본질 속에서 자신의 의미를 찾는다. [예술의 세계에서 기호들의 의미를 깨달은] 그때부터, 예술을 통해 드러난 세계는 [먼저 거쳐 온] 다른 모든 세계들에게 거꾸로 영향을 미친다. 특히 감각적 기호들에 대해서 그렇다. 예술을 통해 드러난 세계들은 감각적 기호들을 자기의 일부로 편입한다.(p37) <프루스트와 기호들> 中


 기호와 의미의 진정한 통일을 구성하는 것이 바로 본질이다. 그리고 기호가 자신을 방출하는 대상으로 환원되지 않는 한에서 본질은 기호를 구성한다. 또 의미를 파악하는 주체에게로 의미가 환원되지 않는 한에서 본질은 의미를 구성한다. 배움의 과정에서 최종적 결론 혹은 최종적으로 깨닫게 되는 계시가 바로 본질이다.... 오로지 예술의 층위에서만 본질은 드러난다.(p68) <프루스트와 기호들> 中


 내가 책을 읽고 있을 때 내 의식은, 내 자아의 가장 깊은 곳에 숨어 있는 열망에서부터 저기 정원 끝 내 눈앞 지평선 너머 보이는 곳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상태를 동시에 펼쳤는데, 그와 같은 일종의 다채로운 갖가지 상태를 동시에 펼쳤는데, 그와 같은 일종의 다채로운 스크린에서 우선 내게 가장 내밀하게 느껴진 것, 쉴 새 없이 움직이면서 나머지 모든 것들을 지배하던 손잡이는, 바로 내가 읽고 있는 책의 철학적인 풍요로움과 아름다움을 내 것으로 만들려는 욕망이었다.(p153)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中


 그렇다면, 시간의 의미는 무엇일까. 진실은 시간안에서 우리에게 인식되기에, 시간을 빼놓을 수 없다. 들뢰즈의 네 가지 시간 구조는 각각의 진실을 가지고 있으며, 주인공은 잃어버린 시간이라고 부르는 헛되이 보내버린 시간의 의미를 찾는 것. 예술을 통한 절대적인 시간의 획득. 이것을 들뢰즈는 배움의 성과로 해석한다.  


 진실을 찾는 것은 해석하고 해독하고 설명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설명>은 기호  그 자체의 전개와 섞여 버린다. 바로 이 때문에 '찾기'는 항상 시간에 관계하며, 진실은 항상 시간의 진실이다... 이 점에서 중요한 구별은 잃어버린 시간과 되찾은 시간의 구별이다. 되찾은 시간의 진실 못지 않게 잃어버린 시간의 진실도 있다. 하지만 더 분명하게는 각기 저마다의 고유한 진실을 가지고 있는, 시간의 네 구조를 구별하는 것이 적절하다.(p42)... 헛되이 보내 버린 이 시간 안에 진실이 있다는 것을 마지막에 가서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배움의 본질적인 성과이다.(p47) <프루스트와 기호들> 中


 우리가 잃어버리는 시간, 잃어버린 시간, 그뿐 아니라 되찾는 시간과 되찾은 시간 등의 시간선들이 있다. 각각의 종류의 기호들은 확실히 [각각에 있어서] 특권적인 어떤 시간선에 상응한다. 사고계의 기호들은 무엇보다도 우리가 잃어버린 시간을 함축한다. 또 사랑의 기호는 특히 잃어버린 시간을 감싸고 있다. 감각적 기호는 종종 우리로 하여금 시간을 되찾게 해주며, 그 시간을 잃어버린 시간 한복판에서 우리에게 되돌려 준다. 마지막으로 에술의 기호는 우리에게 되찾은 시간을 준다. 이 되찾은 시간은 다른 모든 시간들을 포함하는 절대적인 근원적 시간이다.(p51) <프루스트와 기호들> 中


 시간이란 이미 펼쳐져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즉 시간이 그에 맞추어 전개될 서로 구별되는 차원들은 아직 없으며 또 시간이 그 안에서 서로 다른 리듬들에 맞추어 분포될 서로 분리된 계열들조차 아직은 없다... 예술이 우리에게 되찾도록 해주는 것은 본질 속에 휘감겨 있는 시간들, 즉 본질로 감싸여진 세계 속에서 태어나는 시간들이다. 이 시간들은 영원과 동일하다... 우리에게 시간을 되찾게 해주는 것은 예술 작품밖에 없는 것이다. 예술 작품은 최고의 기호돌을 지니고 있으며 그것의 의미는 근원적인 복합, 진정한 영원, 절대적인 근원적 시간 속에 있다.(p79) <프루스트와 기호들> 中


 잠든 사람은 자기 주위에 시간의 실타래를, 세월과 우주의 질서를 둥글게 감고 있다. 잠에서 깨어나면서 본능적으로 그 사실을 생각해 내기 때문에 자신이 현재 위치한 지구의 지점과, 잠에서 깨어날 때까지 흘러간 시간을 금방 읽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순서는 뒤섞일 수 있으며, 끊어질 수도 있다.(p19)... 이제 나는 확실히 잠에서 깨어났다. 내 몸은 마지막으로 한 바퀴 빙 돌더니, 확실성이라는 착한 천사가 내 주위 모든 것을 고정해 나를 내 방 이불 아래 갖다 눕혔고, 어둠 속에서 내 옷장, 책상, 벽난로, 길가 쪽 창문, 두 문을 대충 제자리에 갖다 놓았다.(p25)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中


 들뢰즈의 주장을 요약하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헛되이 보낸 시간의 의미를 찾는 배움의 과정으로, 주인공이 맞게 되는 수많은 기호 중 예술이라는 궁극의 기호를 통해 진실을 발견하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들뢰즈에게 (절대적) 시간은 진실이 표현되는 다른 차원이며, 진실 찾기의 결과로 주어지는 것이다.


 들뢰즈의 추론은, 단지 '되찾은 시간'을 비의지적인 기억 memoire involontaire의 경험과 혼동하는 해석, 그리고 이로 말미암아 비의지적인 기억의 단편적이고 우발적인 경험에는 결여되어 있는 풍성함을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작품에 부여하는 기나긴 각성의 체득을 무시하는 해석들을 무너트릴 뿐이다... 예술 작품의 초시간적 extra-temporel인 차원을 발견하는 것은 기호의 체득에 비해 아주 독특한 경험이 된다. 결국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비의지적인 기억이나 기호의 체득과 동일시 되기 때문이 아니라, 이 두 층위의 경험과 화자가 거의 삼천 페이지에 이르는 작품의 끝에서야 뒤늦게 베일을 벗기는 전대미문의 경험 사이의 관계라는 문제를 제기한다는 점에서, 바로 시간에 관한 이야기라 말할 수 있게 된다.(p273) <시간과 이야기2> 中


 이에 반해, 폴 리쾨르(Paul Ricoeur, 1913 ~ 2005)는 <시간과 이야기 Temps et Re'cit>에서 들뢰즈와 의견을 달리한다. 배움의 끝에 '헛되이 보낸 시간'의 의미를 발견한다는 들뢰즈의 의견과는 달리, 리쾨르는 '되찾은 시간' 속에서 주인공과 화자라는 두 개의 목소리가 통합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그리고, 이는 되찾은 시간에서 이루어진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주인공의 목소리와 화자의 목소리라는, 적어도 두 개의 목소리를 들려준다. 주인공은 세속적이고, 애정적이고, 감각적이고, 미적인 모험들을 그것이 닥쳐오는 대로 하나씩 이야기한다. 여기서 언술 행위는, 주인공이 과거를 회상할 때조차도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형태를 택하고 있다. 그 결과 결말을 향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투사하는 "과거 속에서의 미래"라는 형태가 생겨났다. 이 점에서 주인공의 목소리를 화자의 목소리와 구별하는 일은 가장 중요하다. 그러나 화자의 목소리도 들어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주인공에 의해 이야기되는 경험에 되찾은 시간과 잃어버린 시간이라는 의미를 두게 한다는 것이다.(p279) <시간과 이야기2> 中


 초시간적 존재(l'etre extra-temporle)로 주인공을 내려다 보고 있는 화자, 그리고 이야기를 끌고가는 주인공. 이들이 '되찾은 시간'에서 '글을 쓰겠다는 결정'을 통해 영원성이 시간성을 갖게 되는 것으로 리쾨르는 해석한다. 잃어버린 시간은 되찾은 시간을 통해서 비로소 온전히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


 이야기를 통해 화자의 절대적 현재로부터 두 단계 멀어지게 되는 유년기의 추억은 바로 비몽사몽의 과거 속에 삽입되는 것이다. 그 추억들은 마들렌 과자의 경험이라는 독특한 삽화를 중심으로 연결된다. 이 삽화는 그 자체가 표면과 이면을 가지고 있다. 즉, 표면적으로는 서로 연관성이 없는 추억들이 모여 있는 것에 불과하다.(p281)... 우리는 의지적인 기억의 취약함을 선언하고 잃어버린 대상을 다시 발견하는 일을 우연에 맡기는 화자의 진술을 통해, 이 삽화의 표면에서 이면으로 옮겨가게 된다.(p282)... 화자가 유보시키고 있는 표지는 <되찾은 시간>에서 결말을 알고 다시 책을 읽을 때 그 의미와 효력을 갖게 된다.(p283) <시간과 이야기2> 中


 그러다 갑자기 추억이 떠올랐다. 그 맛은 내가 콩브레에서 일요일 아침마다 레오니 아주머니 방으로 아침 인사를 하러 갈 때면, 아주머니가 곧잘 홍차나 보리수차에 적셔서 주던 마들렌 과자 조각의 맛이었다.(p89)... 아주 오랜 과거로부터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을 때에도, 존재의 죽음과 사물의 파괴 후에도, 연약하지만 보다 생생하고, 비물질적이지만 보다 집요하고 보다 충실한 냄새와 맛은, 오랫동안 영혼처럼 살아남아 다른 모든 것의 폐허 위에서 회상하고 기다리고 희망하며, 거의 만질 수 없는 미세한 물방울 위에서 추억의 거대한 건축물을 꿋꿋이 떠받치고 있다. 그것이 레오니 아무머니가 주던 보리수차에 적신 마들렌 조각의 맛이라는 것을 깨닫자마자 아주머니의 방에 있던, 길 쪽으로 난 오래된 회색 집이 무대장치처럼 다가와서는 우리 부모님을 위해 뒤편에 지은 정원 쪽 작은 별채로 이어졌다.(p90)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中


  되찾은 시간이라는 말은 때로는 초시간적인 것을, 때로는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는 행위를 가리킨다. 오로지 글을 쓰겠다는 결정만이 되찾은 시간의 의미가 갖는 이원성에 종지부를 찍을 것이다.(p300)... 글을 쓰겠다는 결정은 이처럼 근원적 전망에서 비롯된 초시간적인 것을, 잃어버린 시간이 되살아나는 시간성으로 옮긴다는 효력을 갖는다. 이러한 의미에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되찾은 시간이 갖는 한 가지 의미 작용에서 다른 의미 작용으로의 이행을 이야기한다고 단언할 수 있다. 바로 그 점에서 그것은 시간에 대한 이야기인 것이다.(p301) <시간과 이야기2> 中


 내가 기억해 낼 수 있는 것은 단지 의지적인 기억, 지성의 기억에 의해 주어진 것으로, 이런 기억이 과거에 대해 주는 지식은 과거의 그 어떤 것도 보존하지 않으므로 나는 콩브레의 다른 것에 대해서는 생각할 마음조차 없었던 것이다. 사실 내게 있어서 이 모든 것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다.(p84)... 영원히 죽은 것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이 모든 것에는 많은 우연이 개입한다. 그리고 우리의 죽음이라는 두 번째 우연은 첫 번째 우연의 은총을 오래 기다리도록 허락하지 않는다.(p85)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中


  리쾨르의 주장을 요약하면, 화자와 주인공의 서로 다른 층위의 경험은 되찾은 시간 안에서 예술(글을 쓰겠다는 결정)을 통해 만나게 되고,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작품 후반부에 이루어지는 이러한 경험을 통해 독자들은 작품을 처음부터 새롭게 바라볼 것을 요구받게 된다. 초시간의 시간화. 결국, 들뢰즈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진실찾기'로 '근원적인 절대적 시간'을바라봤다면, 리쾨르는 '화자와 주인공의 시간속에서의 통합'으로 해석하며 '초월적 시간'의 '시간화라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또한, 들뢰즈의 시간방향이 미래로 지향한다면, 리쾨르의 시간방향은 되찾은 시간의 이행을 의미하기에 과거로 지향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종합하면, 들뢰즈에게 시간은 진실찾기 끝에 도달한 결론인 반면, 리쾨르에게 (되찾은) 시간은 진실찾기의 출발점이 된다. 알파와 오메가. 
















이들의 해석은 이처럼 차이가 있음에도, 새로운 2020년을 눈 앞에 둔 시점에서 이들의 해석이 모두 마음에 와닿는다. 우리 삶을 결국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의 의미 찾기 과정으로 본다면, 우리는 많은 시간을 흘러 보냈고, 보내고 있으며, 맞이한다. 그리고, 과거-현재-미래의 삶의 의미는 우리와 주변의 상황들에 의해 기호로서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다. 이러한 삶의 의미를 각각의 시점에서 바라보는 것이 들뢰즈의 관점이라면, 우리 앞의 생이 끝나갈 때 신 앞에서 선 단독자로서 영원의 상 아래에서 우리 삶을 조망하며 삶을 재해석하는 것이 리쾨르의 방식이 아닐까.


 2019년과 그 이전의 시간들을 매 순간 정리할 수 있겠지만, 개인의 삶의 끝에서 바라본 모습과 의미는 또 다를 것이다. 비록 지금은 2019년을 보내면서 아쉬운 점이 많은 한 해로 기억하겠지만, 혹시 누가 알겠는가. 먼 훗날에는 2019년이 내 인생의 분기점으로 기억될런지. 한 해를 보내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바라보는 들뢰즈와 리쾨르의 관점을 통해 시간의 의미를 생각하며 한 해를 마무리 짓는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4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9-12-30 01: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2-30 01: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2-30 08: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2-30 08: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1-02 07: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1-02 08: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미노아 문명과 미케아 문명이라는 에게 해 문명의 토양을 이어받아 그리스는 예전과는 다른 독특한 문명을 구축하게 되었지요. 해안가에 폴리스라 불리는 조그만 도시국가들이 형성되었고, 이들은 민주주의라는 정치 제도를 발명해 냈습니다... 그리스는 인간중심주의라는 축을 잡고 개성적인 문명을 이루었습니다.(p335) 「 난생 처음 한번 공부하는 미술 이야기 2」에서

그리스의 조각은 민주주의적 공동체를 표현하는 신성한 상징이었습니다. 이에 비해 로마 공화정 시기의 조각은 공화제라는 복잡한 정치체제 안에서 개인이 지녀야할 가치, 즉 시민의 덕성을 보여주었죠. 하지만 제정 시대가 되면 조각상을 비롯한 미술 작품이 개인의 사유물이 됩니다.(p503) 「난생 처음 한번 공부하는 미술 이야기 2」에서

그리스의 폴리스에서 행해진 민주주의의 영향으로 그리스 미술에는 이전 시대와는 달리 ‘개성‘이 표현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로마 미술은 그리스 문화와 기독교 문화를 제국 전역으로 확산시켰다는 점에서 평가받을만하다. 그렇지만, 가라타니 고진이 지적한 바와 같이 로마의 포용과 융합이 ‘제국‘이라는 구조에 기반한 것임을 고려해본다면, 미노아 문명에 미친 이집트/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영향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로마 문명에 내재한 오리엔탈 요소는 의도적으로 무시되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게 된다...

부정할 수 없는 건 로마가 서양문명의 근간을 형성하는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이에요. 민주주의를 구축했던 그리스의 유산을 이어받았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의 유산도 계승하여 유럽 전역에 이식했으니까요.(p531) 「난생 처음 한번 공부하는 미술 이야기 2」에서

로마도 처음에는 그리스와 같은 폴리스였지만, 헬레니즘제국보다는 그보다 선행하는 페르시아제국의 원리를 받아들였을 때 마침내 제국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을 뒷받침하는 것은 거대한 관료기구와 세금을 확보할 수 있는 한 각지의 관습을 존중한다는 ‘제국의 원리‘였습니다.(p121) 「제국의 구조」에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기독교 전설은 초기부터 그리스 신화 - 예를 들어 레다와 백조의 신화나 다나에와 황금의 비(shower of Gold) 신화 - 와 조로아스터교의 사오샨트 신화 양쪽에 이미 잘 알려져 있는 모티프를 채택하였다.(p387) <신의 가면 3 : 서양 신화> 中


 조지프 캠벨(Joseph Campbell, 1904 ~ 1987)는 <신의 가면 III : 서양 신화 The Masks of God Vol.III: Occidental Mythology>에서 기독교에서 드러나는 페르시아/이집트 문명의 영향에 대해 말한다. 그는 <신의 가면>에서 페르시아/이집트 문명의 영향은 성모 영보(聖母領報 Annunciation), 그리스도 탄생, 동방박사의 방문에서 잘 드러남을 지적한다.


 진짜 기적의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고 단순히 전설의 수준에서만 본다면, 동정녀의 탄생은 기독교 유산 가운데 헤브루 측면이 아니라 페르시아나 그리스 측면에서 나온 신화적 모티프로 해석해야 한다.(p389) <신의 가면 3 : 서양 신화> 中


[그림] 성모영보(출처 : https://www.visituffizi.org/artworks/annunciation-by-simone-martini-and-lippo-memmi/)


 그리스도의 탄생 장면에서는 미트라가 어머니 바위로부터 출생하는 전설에 나오는 귀에 익은 모티프를 되풀이한다. 하늘의 군대라는 것도 조로아스터교적인 배경을 암시한다. 특히 주님의 영광의 빛이 비친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러한 광채 - 아베스탄, Xvarnah, "영광의 빛" - 는 아후라 마즈다에 의한 태초의 창조의 빛이다. 이것은 후광으로 상징된다. 후광은 페르시아의 예술에 처음으로 나타나서, 동쪽으로는 불교도들에게, 서쪽으로는 기독교권에 전파되었다.(p389) <신의 가면 3 : 서양 신화> 中


[그림] 보티첼리, <신비한 탄생, 그리스도의 탄생> (출처 : https://www.pinterest.co.kr/pin/522769469215540357/)

 

 우리에게 예수는 여관 마굿간에서 태어난 전설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콥트 기독교 전승에서는 이집트의 영향을 보다 깊게 확인할 수 있다.


 중동 기독교는 예로부터 예수가 동굴에서 탄생하셨다는 데 초점을 맞춰왔다. 성지의 전통 촌락에 있는 많은 소박한 집들도 동굴에서 시작하여 그 수가 늘어갔다. 예수가 태어나신 곳을 동굴로 보는 전통은 2세기 중엽에 저술 활동을 했던 순교자 유스티누스(Justin Martyr)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p54) <중동의 눈으로 본 예수> 中


 그리스도의 구체적인 탄생 일자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200년 무렵)는 4월 19일로 추정하는 연대기 학자에서부터 5월 20일로 보는 학자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 탄생일에 대한 다양한 견해를 전한다. 클레멘트 자신은 기원전 3년 11월 17일을 그리스도 탄생일로 보았다. 서기 2세기로 거슬러 올라가 동방 그리스도교들은 1월 6일을 그리스도 탄생일로 축하했다. 354년에 로마 교회를 비롯한 일부 서방 교회들은 12월 25일에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했다. 당시 이것은 낮시간이 길어지기 시작하는 동지로 잘못 계산되었다. 동지는 이미 미트라교의 중심 축제로서, 정복당하지 않는 태양의 탄생일이었다.(p371) <문명이야기 3-2> 中 


 동방박사 방문은 1월 6일에 기념된다. 이 날짜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는 "처녀" 코레에게서 새로운 아이온(오시리스가 통합주의적으로 인격화된 존재)이 태어나는 것을 기념하는 축제의 날이었다. 그곳에서 코레는 이시스와 동일시되었다. 지평선에 빛나는 별 시리우스(천랑성)가 떠오르는 것이 아이온의 탄생의 표시라고 하여, 사람들은 수천 년 동안 때가 되면 그 별이 떠오르기를 기다려왔다(p390) <신의 가면 3 : 서양 신화> 中



[그림] 동방박사의 방문 <Adoration of the Magi> (출처 : https://smarthistory.org/gentile-da-fabriano-adoration-magi-reframed/)


 캠벨은 페르시아 미트라와 이집트 오시리스 신화의 영향을 받은 그리스도 탄생(성탄 聖誕)을 근거로 헬레니즘(Hellenism)과 헤브라이즘(Hebraism) 더 나아가 기독교에 미친 오리엔트 요소를 찾아낸다. 그리고, 이러한 캠벨의 관점은 마틴 버날(Martin Bernal, 1937 ~ 2013)의 <블랙아테나 Black Athena>의 연장선상에 놓여있다. <블랙아테나>는 이전에도 여러번 넘겼지만, 이번에도 훗날을 기약한다...


 그리스도 탄생을 12월 25일에 기념하는 현재의 관행은 353년이나 354년이 되어서야 제도화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일은 로마에서 교황 리베리우스가 시행한 것이다. 미트라가 어머니 바위에서 태어난 것을 기념하던 축제가 그날 열렸기 때문에, 그것을 흡수하려는 목적이 있었던 것 같다. 당시에는 12월 25일이 동지였다. 따라서 그때부터 그리스도는 미트라나 로마의 황제와 마찬가지로 다시 떠오른 태양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그리스도 탄생 장면에는 2개의 신화와 2개의 날짜가 연결되어 있는 셈이다. 12월 25일과 1월 6일이라는 이 두 날짜는 각각 페르시아권과 이집트권을 가리키고 있다.(p391) <신의 가면 3 : 서양 신화> 中


 캠벨의 저작에서는 그리스도 탄생과 관련한 헬레니즘 영향을 간략하게 언급하기에, 이 부분과 관련해서는 칼 융(Carl Gustav Jung, 1875 ~ 1961)의 <인간과 상징 Man and His Symbols>의 내용을 옮겨본다. 칼 융은 이 안에서 디오니소스교를 계승한 오르페우스교(Orphicism)와 초기 기독교의 관계를 주목한다. 비록, 두 개의 종교는 지향하는 방향이 과거와 미래로 각각 다르지만, 로마 제국 대중에게 소망의 상징이라는 면에서 같은 의미로 다가갔다. 오르페우스와 기독교의 관계에 대해서는 미르치아 엘리아데(Mircea Eliade, 1907 ~ 1986)의 <세계종교사상사 2> 리뷰에서 자세히 다룰 계획이다... 이 역시 훗날에.


 디오니소스교는 정신에서 육체로, 육체에서 정신으로 끊임없이 변전하기 때문에 금욕적인 사람에게 이런 의례는 너무 야만적이고 너무 광폭한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이같은 사람들은 오르페우스 신앙을 통해 내적으로만 종교적 무아경을 체험하게 된다. 오르페우스는 실제 인물이었던 것 같다. 가수, 예언자, 교사였던 그는 결국 학살당했고, 그의 무덤은 성지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초기 기독교 교회가 오르페우스에게서 그리스도의 원형을 봤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못된다. 이 두 종교는 후기 헬레니즘 세계에 내세의 신성한 삶을 약속한다. 로마 제국의 치하에서 사라져 가는 그리스 문화를 지키려던 대중에게, 신의 중재자이자 인간이었던 오르페우스와 그리스도는 미래의 삶에 대한 간절한 소망의 상징이었다.(p214) <인간과 상징> 中


 페르시아/이집트 문명과 이의 영향을 받은 서양 문명 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동지(冬至)는 큰 명절이었다. 과거 페이퍼에 올렸던 내용을 다시 올려본다. 팥죽을 먹으면서 액을 쫓는 행위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팥죽할멈과 호랑이 이야기에서 잘 재현되어있다. 이 책들은 딸아이가 좋아하는 책이므로 곁들어 올려 놓는다.


 동짓날은 작은 설(亞歲) 이라고 한다. 팥죽을 쑤고 찹쌀가루를 새알 모양으로 만들어 그 속에 넣어 심으로 삼는다. 꿀을 타서 명절 음식으로 제사에 올린다. 팥죽을 대문에 뿌려 액운을 없앤다. <형초세시기>를 보면 "공공씨(共工氏)에게 어리석은 아들이 있었는데 동짓날에 죽어서 역귀가 되었다. 팥을 무서워하므로 동짓날에는 죽을 만들어 쫓는다."하였다.(p215)... 동짓날 팥죽에 대한 기록은고려시대 문헌에도 보인다. 이제현(李齊賢, 1287 ~ 1367)의 <동지 冬至>에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동지에 반드시 팥죽을 끓인다. 東人冬至必烹豆粥"라고 주석이 달려 있다.(p217) <동국세시기 東國歲時記> 中


 밤이 가장 긴, 어둠의 힘이 가장 강한 때인 동지가 거의 모든 문명에서 명절인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깊은 어둠이라는 현재 상황의 어려움보다 이제는 밝음이 길어질 것이라는 희망에 초점을 맞췄기 때문이 아닐까. 문학작품 <어린 성냥팔이 소녀>, <행복한 왕자>, <크리스마스 캐롤>에서 잘 나타나는 현세의 어두움이 밝은 미래로 바뀌는 순간. 이제는 낮이 밤보다 길어질 것이라는 기대가 동지(크리스마스)를 명절로 만든 것이라 생각된다. 


 다음날 새벽 어린 소녀는 장밋빛 뺨을 하고 미소를 띤 채, 두 집 사이에 옴츠려 있었다. 소녀는 지난해 마지막 날 밤에 얼어죽은 것이었다.... 소녀가 보았던 것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할머니와 함께 행복한 새해를 맞이하러 간 것이 얼마나 영광스러웠는지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었다.(p360) <주석달린 고전 동화집, 어린 성냥팔이 소녀> 中


 마침내 작은 제비는 자신이 곧 죽을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제비는 행복한 왕자에게 입맞춤을 하고는 왕자의 발 밑으로 떨어졌습니다. 그 순간 동상 속에서 무엇이 쪼개지는 듯한 알 수 없는 소리가 났습니다. 납으로 된 왕자의 심장이 두 쪽으로 갈라진 것입니다. 다음날 이른 아침, 흉해진 행복한 왕자의 동상을 본 사람들은 동상을 끌어내려 용광로에 넣고 녹여 버렸습니다. 그러나 쪼개진 심장은 아무리 해도 녹지 않았습니다.(p26)... 천사는 조각난 납 심장과 죽은 제비를 가지고 하느님께 돌아갔습니다. "이 새는 천국의 뜰에서 노래를 부르도록 할 것이며, 행복한 왕자는 이 곳에서 영원히 살게 할 것이니라.(p28)  <행복한 왕자> 中


 페이퍼가 매우 길어졌는데, 우선 이번 페이퍼에서 말하고 싶었던 것은 크리스마스는 그리스도교 신자들 뿐만 아니라 모든 이들에게 의미있는 날이라는 것이다. 힘든 한 해를 돌아보면서 수고한 자신과 주위를 위로하고 새로운 한 해에 대한 희망을 가지는 날로서. 그리고, 이러한 결론을 내려고 한다.


 크리스마스가 되면 아이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좋아합니다. 무슨 선물을 받을까 설게기 때문이지요. 이때 왜 선물을 주고받는지 이유를 설명해 주는 것은 어떨까요? 크리스마스의 진정한 의미는 사랑과 행복을 모두와 나누는 것이니까요. <크리스마스를 찾아서, 추천사> 中


 살펴본 이 모든 것을 종합해서, 이웃분들 모두 행복한 크리스마스 보내시길 바랍니다. 힘든 시간을 잘 이겨내심을 축하드리며, 어제보다 나은 오늘, 그리고 오늘보다 나은 내일이 되시길 기원합니다. ^^:)


 페이퍼의 마지막은 크리스마스에 많이 공연되는 차이코프스키(Pyotr Ilyich Tchaikovsky, 1840 ~ 1893)의 <호두까기 인형 Op.71 The nutcracker Op.71>을 소개하며 "Merry christmas!" 라고만 하면 썰렁할 것 같아 작성하다 늘어져버린 페이퍼를 갈무리합니다...



 <호두까기 인형>은 차이코프스키가 작곡한 세 편의 발레 중에서도 가장 짧은 작품으로, 음악성이 원숙에 달한 만년의 시기에 만들어진 대표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백조의 호수>, <잠자는 숲속의 공주> 등의 경험이 충분히 살아있는 작품으로서, 음악적으로도 앞의 두 곡에 필적되는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곡 전체를 통해서도 독특한 그의 어두운 음영이 보이지 않고, 프랑스 민요 등을 교묘히 인용해 시종 밝고 부드러운 분위기에 넘쳐 있다. 더욱이 동화적 세계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어, 섬세하고 독창적인 수법으로 묘사되고 있다. 천진난만하고 사랑스런 소녀 클라라의 심리와 쥐의 대군을 대조적으로 표현한 것은 찬사를 금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그 당시의 발레음악으로서는 처음 시도되어지는 부분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눈의 왈츠>에 어린이 합창을 첨가시켜 그 색채를 풍부하게 그려내었다는 점이다. 또한 첼레스타를 채용하여 훌륭한 효과를 거둔 점 등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p111) <차이코프스키> 中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4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9-12-24 19: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2-24 19: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갱지 2019-12-27 09:2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겨울호랑이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셔요!
항상 건강하시고 댁내 두루 평안하시길 기원합니다:-)

겨울호랑이 2019-12-27 10:09   좋아요 2 | URL
갱지님 감사합니다. 갱지님께서도 행복한 연말 보내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다시 인사드립니다.

2019-12-27 10: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2-27 19: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1-02 07: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1-02 08: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1-06 17: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1-06 18: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 책은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부분은 그 자체로 총체적인 설명을 시도한다. 제1부는 거의 움직이지 않는 역사, 곧 인간을 둘러싼 환경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 대한 역사이다. 그것은 서서히 흐르고 서서히 변화하지만, 흔히 완강하게 원래대로 되돌아가는 역사, 늘 다시 시작하는 순환의 역사이다.(p20)... 이런 움직이지 않는 역사의 층위에 느린 리듬의 역사가 따로 형성된다. 이는 그 용어의 완전한 의미를 그대로 간직한다는 조건에서 사회사(histoire sociale)라고 부를 수 있다. 즉 집단과 집단화의 역사를 가리킨다. 이 큰 파도가 지중해의 삶 체를 어떻게 들어올리는가, 이것이 내가 이 책의 제2부에서 제기하려는 질문이다... 제3부는 전통적인 역사를 다룬다. 말하자면 인간의 차원이 아닌 개인 차원이며, 폴 라콩브와 프랑수아 시미앙이 말하는 사건사(ㅣ'histoire evenmentielle)이다. 비유하자면 조류가 자신의 강력한 움직임 위에 일으키는 파도, 곧 표면의 동요를 가리킨다. 이는 짧고 빠르고 신경질적인 요동의 역사이다.(p21) <지중해 :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 세계 - 초판 서문 - > 中


  페르낭 브로델(Fernand Braudel, 1902 ~ 1985)는 <지중해 :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 세계 La Mediterranee et le monde mediterraneen a l'epoque de Philippe II>에서 한정된 시공간에서 서로 다른 역사층위를 보여주며 이 시대를 역사적 시간 시간의 외부에서 조명한다.


 이렇게 우리는 여러 층위로 이루어진 역사를 해부해보았다. 달리 말하면 역사의 시간을 지리적 시간, 사회적 시간, 개인의 시간으로 구분하는 것이다. 다시 달리 표현하면 인간을 여러 성격으로 구분하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p22)  <지중해 :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 세계 - 초판 서문 - > 中


  역사의 시간을 분할하여 사건을 바라보는 브로델의 역사관이 16세기 말 에스파냐 제국의 흥망을 어떻게 그려냈는지는 이후 리뷰에서 살펴보도록 하자. 다른 이야기지만,  브로델의 역사 층위 개념을 크리스토퍼 놀란(Christopher Jonathan James Nolan, 1970 ~ ) 감독의 영화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면 너무 나간 이야기일까?  개인적으로 놀란 감독의 <덩케르크 Dunkirk>에서 유사한 구조를 발견하게 된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2017년 여름, '다이나모 작전 Operation Dynamo'을 소재로 한 <덩케르크>를 내놓는다... 영화는 수십 만 명의 영국군과 프랑스군이 고립되어 있던 덩케르크 해변을 배경으로 육지 The Mole, 바다 The Sea, 하늘 The air 세 군데서 일어나고 있는 전쟁 상황을 보여준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그 공포의 여러 얼굴을 묘사하기 위해 세 개의 공간을 사용했다. 그런데 항구에서는 일주일, 바다에서는 하루, 하늘에서는 한 시간 동안 일어난 일을 보여준다는 차이가 있다. 바로 이어지는 장면이라도 공간이 달라지면 그 사건들 사이에 시간차가 발생한다는 의미다... 각 공간이 당면하고 있는 상황, 위기에 집중하다 보면 세 개의 시간차는 점차 줄어들어 결말부에 가면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일이 된다. 관객이 인지하지 못하고 있을 때조차 영화는 바다와 공중, 해변의 시간이 만날 때까지 각기 다른 시공간을 정밀하게 직조해 나간다. 놀란의 지적인 연출은 이러한 부분에서 발휘된다.(p145) <미국영화감독 1> 中


[그림] 영화 <덩케르크 Dunkirk> 포스터 ( 출처 : https://www.ebay.com/itm/Dunkirk-original-DS-movie-poster-27x40-D-S-2017-Advance-Christopher-Nolan-/312699658008?hash=item48ce5a1f18) 


 덩케르크 해변가라는 동일한 공간에서 바다, 공중, 해변의 서로 다른 시간 교차. 그리고, 이러한 다른 시간의 교차를 통해 '전쟁' '죽음' 을 바라보며 의미를 찾는다는 점에서 유사함을 느낀다. 물론, 브로델의 역사 층위는 서로 다른 시간의 기반 위에서 상호 영향을 미치는 반면, 놀란의 작품 안에서 이들은 각각 고립된 시간을 살아간다는 점에서 이들은 차이가 있다. 그렇지만, 종합적으로 사건을 바라보는 브로델의 관점이나 영화 <덩케르크>에서 결론 부분에 이르러 서로 다른 시간들이 점점에서 만나면서 주제를 부각시키는 구성은 전체적으로 주제를 조망한다는 점에서 통한다 생각된다. 근거 없는 몇몇 생각으로 <지중해>의 인트로를 써본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4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9-12-24 09: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2-24 14: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1-06 17: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1-06 18: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NamGiKim 2019-12-25 22: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난학기 영화보는 수업에서 덩케르크를 비판적으로 보는 시간을 가졌었습니다. 나중에 올리겠습니다.ㅎ

겨울호랑이 2019-12-26 07:46   좋아요 0 | URL
네 NamGiKim 님의 리뷰를 기대해 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