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리 시간은 셋인데 과거에 대한 현재, 현재에 대한 현재, 미래에 대한 현재라고 하는 편이 적절하다. 이 셋은 영혼 속에 존재하는 무엇이고 다른 곳에서는 이것들이 안 보이며, 과거에 대한 현재는 기억(記憶)이고 현재에 대한 현재는 주시(注視)이며, 미래에 대한 현재는 기대(期待)다.(11권 20,26)...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기대에 해당하는 영역은 짦아지고 기억에 해당하는 영역은 길게 연장된다.(11권 28.38) <고백록> 


 아우구스티누스(Sanctus Aurelius Augustinus Hipponensis, 354 ~ 430)에게 '시간'은 인간의 개념이다. 하느님(神)의 시간은 영원이며 불변이다. '시간'과 '공간'마저 창조된 것이기 때문에, '창조 이전의 시간'은 존재하지 않고, 시간은 인간에게 있어, '현재'로 존재한다. 우리는 영혼 안에서 시간을 가지고, '미래->현재-> 과거'라는 일련의 흐름으로 통해, 생명의 확장이 일어나게 된다. 이처럼 끊임없는 시간의  확장을 통해 하느님께  영혼이 흘러간다는 것이 아우구스투스의 '시간론'이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시간을 연속적으로 바라본다면, 빅터 프랭클(Viktor Frankl, 1905 ~ 1997)에게 시간은 연속적이되 각자 의미를 가진 독특한 상황들로 정리된다. 프랭클은 <의미를 향한 소리없는 절규>에서 (의미있는) 시간이 가진 '카이로스'의 특성에 주목한다.


 상황들은 각자 독특하고 유일한 것이고, 의미도 각자 독특하고 유일한 것이기 때문에 이제 "상황에 대응해 뭔가를 할 가능성"도 각자가 역시 독특하고 유일한 것이다. 그것은 "카이로스 Kairos"의 특성을 갖고 있다.... 상황이 부여한 가능성을 실현하기만 한다면, 상황이 붙들고 있는 의미를 채우기만 한다면, 우리는 그 가능성을 현실로 전환시킬 수 있다. 그렇게 한번 하기만 한다면 '영원히' 지속되고, 더 이상 일시성에 시달리지 않게 된다.(p61) <의미를 향한 소리 없는 절규> 中


 카이로스는 주관의 시간이며, 기회(機會)다. 빅터 프랭클의 말은 이 기회를 잘 살려 적절한 의미를 찾을 수 있다면, 우리는 순간을 사는 것이 아닌, 영원을 살 수 있다로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카이로스에서 흐로노스로의 전환. 이것은 순간의 영원으로의 전환이며, 주관의 시간이 객관의 시간으로 흐름을 의미한다. <한국인이 캐낸 그리스 문명>에서 흐로노스(크로노스)와 카이로스의 차이를 살펴보면서 다음으로 넘어가자.


 '흐로노스 chronos"는 우리가 잘 아는 베테랑 할아버지, 시간의 아버지 Father Time, 즉 누구나 인식할 수 있는 객관적인 시간을 의미한다. 반면, "카이로스 Kairos"는 완전히 반대의 예측 불가능한 주관적인 시간이다. 객관적인 시간이라는 것은 바로 아이작 뉴턴이 얘기하는 시간의 특징 aquabiliter fluit - 즉, 강의 물이 항상 일정하게 흐르듯 영원히 고정된 시간이 바로 흐로노스이다.(p35)... 그에 반해서 주관적인 시간 "카이로스"는 흔히 "기회 opportunity"라고 번역되기도 하는데, 이는 일정하게 아주 "적절한 때 right timing"을 의미한다. 흐로노스가 신적인 우주의 영원한 시간이라면, 카이로스는 인간세상의 찰나, 즉 짤막한 현재의 시간이다.(p37)' <한국인이 캐낸 그리스 문명> 中


 빅터 프랭클은 각 시간이 나름의 의미가 있지만, 과거에 우리의 지나간 삶이 담긴 저장소라 해석한다. 그런 면에서 '과거에 대한 현재는 기억'이라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연속적 시간론을 떠올리게 된다. 


 지나간 시간(과거) 속에서는 아무것도 돌이킬 수 없고, 아무것도 잃어버릴 게 없다. 그러나 모든 것이 과거에 영원히 저장된다. 사람들은 대부분 일시성의 그루터기가 가득한 황야만 본다... 의미들은 독특하고 유일하기 때문에 영원히 변한다. 그러나 결코 잃어버리지 않는다. 삶에는 반드시 의미가 있다.(p62) <의미를 향한 소리 없는 절규> 中


 반면, 레비나스(Emmanuel Levinas, 1906 ~ 1995)의 시간론은 철저한 분리를 전제 한다. 레비나스 초기 철학에서 자아는 현재에서 자기의 존재를 확인하는 작업을 '홀로서기(hypostase)'는 말로 표현하면서, 연속적인 흐름보다는 관계성(關係性)에 주목한다. 이는 레비나스 철학 중 '타자와의 대면'으로도 연결되겠지만, 리뷰 몫으로 넘기도록 하자.

 

 지금, 곧 현재는 과거와의 단절을 전제한다. 현재라는 순간에 사람은 홀로 선다. 현재는 언제나 지나가기 때문에 홀로서기를 우리는 언제나 확인해야 한다. 홀로서기는 과거를 통해 설명될 수 없다. 현재는 항상 새로운 시작이고, 그렇기 때문에 현재는 과거와 미래 사이의 한 순간이기 이전에 자기 자신을 새로운 시작으로 긍정하는 그 무엇, 곧 자아(自我)와 관계한다. 자아는 현재 이 순간에 그 무엇, 곧 자아(自我)와 관계한다.(p128) <시간과 타자, 해설> 中


 과거와의 관계를 끊음으로서 새롭게 생명을 얻는 자아(自我). 이러한 입장에서 바라본다면 레비나스의 시간론은 단속적(斷續的)이라는 면에서 아우구스티누스, 프랭클의 연속적(連續的) 시간론과 차이가 있음을 발견한다.


 현재는 자기하고만 관계한다. 자유를 가지고 현재를 눈부시게 해야만 했던 이 관계는, 그러나 현재를 동일화 속에 가두어버린다. 과거에 관해 자유로우나 그 자신의 포로가 되어 있는 현재는, 현재가 연루되어 있는 존재의 무게를 생생하게 나타낸다. 현재가 과거와 단절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력은 현재의 한가운데에 있다. 현재를 으스러뜨리는 숙명은 현재를 [과거로부터] 상속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이 숙명은 현재를 [과거로부터] 상속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이 숙명은 현재에게 강요되지 않는데, 왜냐하면 현재는 탄생을 선택하지 않고 태어났기 때문이다.(p133) <존재에서 존재자로> 中


 이처럼 레비나스와 프랭클의 시간론은 다소 다르지만, 이들은 모두 독일 수용소에서의 경험을 가진 삶과 죽음의 극한(極限)을 봤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진다. 사선(死線)을 넘어서 레비나스가 '존재와 존재자'를 발견했다면, 프랭클은 '의미'를 찾는다. 같은 경험에서 나온 다른 깨달음. 이제 레비나스의 <시간과 타자>, <존재에서 존재자로>로 넘어갈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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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05 17: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4-05 18: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4-05 22: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4-05 22: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저기 빨갱이 중대장이 있다˝하는 누군가의 말에 남편은 빨갱이가 되어 버렸고 3일 동안 구금되었다가 총살당하였다. 남편이 빨갱이가 되어버려 우리집의 젊은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피신하여야 했다... 4.3 이 지난 후 습격이 끊이지 않았다. 산으로 피신했다 해서 산사람이 되어야 했고 마을에 남았다 해서 군인이나 경찰 가족들처럼 죽임을 당해야 했다. 4.3 이후 죽는 것은 마을 사람들뿐이었다.(p293) 「해방전후사의 인식4」중

제주 4.3 사건을 규정하기는 쉽지 않다. 1948년 4월 3일 남로당 무장세력 350여명이 제주도 경찰 지서를 습격하면서 발생한 이 사건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적어도 4.3 사건 이전의 태평양전쟁 시기 제주도의 지정학적 위치로부터 시작해서, 해방 직후 많은 재일 동포의 귀환, 인민위원회조직, 1946년 제주도(섬)의 도(행정구역)승격, 1947년 3.1운동, 1948년 남한 단독선거 반대까지의 사건과 함께, 4.3 이후에는 1948년 11월 계엄령 선포 및 초토화 작전 이후 대대적인 진압작전 그리고 1954년 9월 21일 한라산의 금족 지역의 개방이 이루어지기까지의 사건을 알아야 하고, 이와 더불어 4.3사건과 밀접한 관련있는 1948년 여순 사건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한국 현대사의 아픔과 상처가 압축되어 있기에 해방 전후사의 제주도 역사를 바라보는 시선은 복잡할 수 밖에 없다.

일부 미국 소식통들은 이 투쟁에서 15,000 ~20,000 명의 섬사람들이 죽었다고 생각했지만, 대한민국 통신사는 27,719명이라는 공식적인 숫자를 인용했다. 북한측의 수치는 3만명이었다. 그러나 제주도지사는 비공식적으로 미국 정보기관에 6만 명이 사망했으며, 4만 명이나 되는 인원이 일본으로 달아났다고 말했다. 공식적으로 39,285채의 가옥이 파괴되었으나 지사는 ˝중산간지대의 가옥들 대다수˝가 사라져버렸다고 생각했다. 400개의 마을 중 170개만 남았다. 바꿔 말하자면 섬사람들은 대여섯 명 중 한명 꼴로 죽었고, 절반 이상의 마을이 파괴되었다.(p311)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중

아직 4.3사건에 대한 연구가 채 끝나지 않았기에 전문가가 아닌 일반인으로 4.3의 역사적 평가를 말하는 것은 성급한 일이겠지만, 1950년대 인구 30여만명의 섬에서 일어난 가슴 아픈 일에 대해 다시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고, 이미 지금도 상당히 늦은 일이리라. 4.3사건의 모든 피해자들의 상처와 고통을 생각하며, 2016년 8월 제주 4.3 평화공원 사진을 마지막으로 페이퍼를 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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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무스 2020-04-03 12: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도올 선생님의 책으로4•3항쟁을 읽고 있습니다! 가보지 못 한 평화공원을 보니 의미가 더 깊어지는것 같아 좋습니다!
건강한 하루되십시요!ㅎ

겨울호랑이 2020-04-03 12:45   좋아요 1 | URL
막시무스님 독서에 작은 도움이 되어 기쁩니다. 화창한 날, 즐거운 독서 되세요! 감사합니다^^:)

302moon 2020-04-03 12: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글과 평화공원 사진을 보며 여러 감정이 생겨납니다.
고맙고, 죄송하고.

겨울호랑이 2020-04-03 12:50   좋아요 1 | URL
302moon님 말씀처럼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제주의 역사를 알고 나니, 저 역시 제주를 아름다운 섬으로만 바라볼 수가 없게 됩니다. 섬 곳곳의 숨겨진 아름다운 장소가 예전에 수많은 이들이 무고하게 또는 저마다의 사연을 가지고 죽어갔음을 생각한다면, 관광의 섬 제주 이전에 제주의 아픔에 공감하는 우리가 먼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단발머리 2020-04-03 12: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리 현대사의 비극,이라는 말로는 다 담지못할 고통과 아픔이겠지요. 더 늦기 전에 진상이 밝혀져서 제주 시민들의 억울함이 천에 하나라도 풀어지기 바랄 뿐입니다.

겨울호랑이 2020-04-03 13:09   좋아요 0 | URL
그렇습니다. 우리 현대사의 비극이 너무도 많아, 단발머리님 말씀처럼 수사로는 부족함이 큽니다. 하루 빨리 모든 현대사의 은폐된 진실들이 다 밝혀져야 겠지요... 4.3의 진상을 알기위해서는 4.16이전에 4.15로 밝혀야 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jelee87 2020-04-04 00: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찬찬히 잘 읽엇습니다

겨울호랑이 2020-04-04 06:41   좋아요 0 | URL
jelee87님 부족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2020-04-04 09: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4-04 10: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4-04 10: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4-04 11: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앙리 피렌(Henri Pirenne, 1862 ~ 1935)은 <마호메트와 샤를마뉴 Mahomet et Charlemagne>에서 두 가지를 강조한다.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바와는 달리 게르만 민족의 로마 제국 멸망은 고대 사회의 단절을 가져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지중해를 '제국의 호수(湖水)'로 만들었던 로마에게 게르만의 침입은 제국의 성격을 바꿀 정도의 충격을 주지 못했다. 반면, 고대에서 중세로의 이행을 이끈 원동력은 이슬람(Islam)의 진출에 있음을 앙리 피렌은 강조한다.

 

고대 전통이 단절된 원인은 급작스럽고 예기치 않은 이슬람의 진출이었다. 이 진출의 결과는 동방과 서방의 최종적 분리였고, 지중해적 통일성의 종말이었다. 이제 이슬람교도의 호수가 된 서지중해는 과거에 늘 그랬던 것 같은 상업과 사상의 교통로가 더 이상 아니었다. 서방은 봉쇄되었고, 닫힌 세계에서 자체의 자원으로 삶을 영위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변화로 메로빙거 왕조과 쇠퇴했고 그 대신 게르만적인 북방에 기원을 둔 새로운 왕조인 카롤링거 왕조가 등장했다(p334)... 지역에 따라 조금씩 다른 모습이 나타났지만, 전반적으로 로마 교회와 봉건제에 의해 지배된 유럽은 새로운 양상을 띠었다. 전통적인 용어를 빌리면 중세가 시작된 것이다. 이러한 동향은 800년에 새로운 제국(서로마 제국)이 건설됨으로써 완성되었다.(p335) <마호메트와 샤를마뉴> 中


 <마호메트와 샤를마뉴>에서 저자는 이슬람의 지중해 장악이 가져온 서구 유럽의 봉쇄가 유럽의 변화를 가져왔음을 강조한다. 서아시아에서 시작되어 북아프리카를 거쳐 이베리아반도에 까지 팽창한 이슬람 세력은 동로마제국과 서유럽의 게르만 왕국들에게 큰 위협이 되었고, 유럽에서 전통의 단절을 가져올 정도의 위협적인 존재였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이렇게 팽창하는 정책을 택했을까? 


 무아위야와 그 부족은 칼로써 칼리프 지위를 획득했다. 그것은 혈연과 수니파 교리에 의해 결합된 전사와 상인의 사회이며 동시에 신정체제였다. 그 체제는 정치에서는 실용주의를, 종교에서는 절제를 강조했다. 칼리프 보위의 찬탈자가 성공하려면 아랍의 호전성을 잘 막아서 다른 곳으로 전환시킬 줄 알아야 하고 또 전쟁을 통해 국가 부흥의 과정을 공고히 할 줄 알아야 했다. 따라서 팽창 정책은 다마스쿠스에 수도를 둔 새로운 체제의 핵심 정책이 되었다.(p150) <신의 용광로> 中


 이슬람의 팽창정책은 무아위야(Muawiyah bin Abi-Sufyan, 602 ~ 680)가 무함마드의 사위 알리(Ali ibn Abu Talib, 601 ~ 661)를 제거하고 칼리프의 지위에 오른 사건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정통성을 인정받지 못한 정권이 국내 여론을 잠재우기 위해 외부로 관심을 돌리듯, 무아위야 왕조는 정복전을 통해 자신들이 신의 선택을 받았음을 입증해야 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이슬람은 두 가지 선물을 받게 된다. 하나는 세계사에 유래없이 빠른 기간에 이루어진 광대한 이슬람 제국이며, 다른 하나는 이슬람 내부 시아파와 수니파의 분열과 대립이다.


[그림] 푸아티에 전투(출처 : https://www.britannica.com/event/Battle-of-Tours-732)


 732년 푸아티에(Battle of Tours-Poitiers) 전투는 이와 같이 팽창하는 이슬람의 침입을 막아낸 결정적 사건으로 평가된다. 푸아티에 전투가 없었다면 유럽은 이슬람의 지배 하에 놓였을 것이며, '기독교의 유럽'이 아닌 '이슬람의 유럽'이 되는 위기의 상황을 극복한 성전(聖戰)이었다는 것이 유럽학자들의 인식이다. 그렇지만, <신의 용광로 God's Crucible: Islam and the Making of Europe, 570~1215>의 저자 데이비드 리버링 루이스 (David Levering Lewis)는 이러한 시각에 의문을 던진다. 


 카롤링거 왕조의 유럽 사람들은 카를 '마르텔(해머)'이 거둔 푸아티에 승리 덕분에 자신들의 세계를 구축했다고 생각하는데, 혹시 그 반대로 푸아티에 전투에서의 패배가 더 바람직한 게 아니었을까?(p433) <신의 용광로> 中


  그렇다면, 이러한 의문이 제기된 이유는 무엇일까. 에브로 강과 피레네 산맥을 경계로 남쪽의 우마이야 왕조(Umayyad dynasty, 661 ~750)과 북쪽의 프랑크 왕국(Regnum Francorum, 481 ~ 870)은 여러 면에서 대조되는 두 제국이었다. 무슬림, 기독교인, 유대인들 간의 관용과 상호의존을 바탕으로 꽃을 피워낸 이슬람 문명은 개방적인 반면, 철저한 신분제 사회였던 서유럽 문명은 폐쇄적이었다.


 그리스도교, 이슬람교, 유대교 문화는 서로 융합하여 그보다 더 오랫동안 800년도 넘게 이베리아 반도에서 피어났다. 이슬람교는 시칠리아에서처럼 이베리아 반도에서도 다른 문화에 대해 강력한 상징적 특성을 보여주었는데, 남부 아랍의 힘야르족, 유대인, 그리스인, 시리아인, 메소포타미아인, 콥트인, 베르베르족, 아프리카인, 페르시아인, 인도인, 터키인, 몽골족, 심지어는 중국인에게 이미 그 점을 보여 주 바 있었다. 이슬람교는 주어지는 모든 것을 도덕적 갈등 없이 결합했다. 알안달루스에서는 이베리아-라틴의 그리스도교 공동체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매우 긍정적인 요인이 되었다.(p210) <중세 1> 中


 아브드 알-라흐만 1세는 무엇보다도 백성의 사회생활을 코란의 원칙으로 통치해야 했다. "알라에 대한 의무를 다하고 진정으로 증명하라." 예언자는 그렇게 명령했고 아브드 알-라흐만은 그에 순응하여 이렇게 말했다. "사람에 대한 증오를 부추겨 부당하게 행동하지 않도록 하라."... 이 문명화된 정책에서 곧 저 유명한 콘비벤시아 convivencia, 즉 역사적으로 유명한 관용과 상호 의존의 기풍이 흘러나오게 되었다. 이곳 알-안달루스에서 무슬림, 기독교인, 유대인은 오랫동안 유럽 대륙에 하나의 역할 모델을 제공하는 공존의 문명을 누렸다.(p311) <신의 용광로> 中


 한 중세학자는 샤를마뉴 시대를 이렇게 요약했다. "카롤링거 사회는 세 집단으로...... 이루어졌다. 싸우는 사람들, 기도하는 사람들, 노동하는 사람들."(p434)... 샤를마뉴의 통치가 끝나갈 무렵 남녀노소의 자유들은 처음에 서서히 그리고 나중에 가속적으로 사라졌고, 노예의 나락으로 떨어진 사람들을 제외한 대다수는 농노로 전락했다. 경제와 정치의 피라미드 꼭대기까지 기어올라 권력을 움켜잡은 소수의 사람들은 세속과 교회의 유력자 대열에 합류했고, 그들의 많은 재산은 카롤링거 왕조의 전쟁기계와 영주들의 화려한 생활양식을 지탱했다.(p435) <신의 용광로> 中


 이러한 사회 분위기 차이는 이슬람에서 상업(商業)이 발전하게 되고, 유럽에서는 농업(農業)의 발전을 가져오게 된다. 방대한 제국에 거주하는 인구와 자원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우마이야 왕조에서 상업이 융성했다면, 이슬람의 침입을 막기 위한 전사집단을 유지하기 위해 유럽은 농업사회로, 이후 중세 봉건 사회로 나아간다. 상업사회인 우마이야 왕조와 농업사회인 프랑크 왕국은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재현(再現)이라고 여겨질 만큼 여러 면에서 공통점을 보여준다.


 종교에 따라 경제적 길드로 편성된 유대인, 기독교인, 이슬람교도는 영리하고 활발하게 경쟁하면서 물건을 사고팔고 수입하고 수출했으며 거기에서 나오는 이득을 도시에 쏟아 부었다. 아브드 알-라흐만의 은화는 국제무역 통화의 일부로 사용되었고, 아랍 공동체가 방대한 자원의 은과 구리를 통제했기 때문에 실현 가능한 역동적 현상이었다. 대조적으로 피핀 왕조의 프랑크 왕국에는 정금 正金 통화가 거의 없었다.(p317) <신의 용광로> 中


 타리크 이븐 지야드가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던 시점에, 지중해 북쪽 해안 지대인 셉티마이아와 프로방스에 사는 갈로-로마인들은 경제적 동력이 멈춰선 상태였고 농업과 상업도 고대 로마 초창기 때처럼 느리게 움직이고 있었다... 기독교권의 문명과 비교해볼 때, 아랍 문명은 유기적 통합, 문화, 테크놀로지, 정치적 조직 등의 측면에서 메츠와 파리에 작용하는 원시적 힘보다 훨씬 우월했다.(p237) <신의 용광로> 中


 안-안달루스에서 중시되는 일은 비즈니스였고, 카롤링거의 유럽과 사뭇 다른 상황이었다. 유럽에서는 전쟁이 비즈니스의 대부분을 차지했으며 전쟁 준비가 곧 전사 계급의 존재 이유였다... 프랑키아에서는 모든 자유인이 마치필드(군사 소집)에 신고했야 했지만, 알-안달루스에서는 세금 거두는 사람에게 성실하게 납부액을 신고하기만 하면 되었다.(p491) <신의 용광로> 中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2/3차 산업 중심의 이슬람 제국으로의 편입이 1차 산업 중심의 프랑크 왕국보다 유럽에게 있어 더 나은 선택이 아니었을까 하는 저자의 질문은 새롭지만, 의미있는 질문이라 생각된다. 이러한 질문은 마치, 아테네 중심의 델로스 동맹에 들어가는 것이 좋았을까, 아니면 스파르타 중심의 펠로폰네소스 동맹에 들어가는 것이 좋았을까 하는 질문으로 느껴지도 한다. 


 서구 역사가들은 푸아티에 전투를 엄청나게 중요한 무슬림의 패퇴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푸아티에 전투의 승리는 경제적으로 후퇴한, 분열된, 동포를 죽이는 퇴행적 유럽을 형성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카를 이후의 유럽은 자신이 이슬람과 정반대되는 문명이라고 자처하면서 종교 박해, 문화 배타주의, 세습 귀족 정치를 미덕으로 여겼다는 설명이다.(p268) <신의 용광로> 中


 <마호메트와 샤를마뉴>와  <신의 용광로> 둘 다 역사의 새로운 해석을 내렸다는 점에서 각자의 의미가 있다. <마호메트와 샤를마뉴>가 게르만 민족의 침입이 중세를 가져왔다는 관점 대신 이슬람의 부상이 중세를 가져왔다는 새로운 해석을 제시했다면, <신의 용광로>는 이러한 앙리 피렌의 입장을 받아들이되, 새로운 변화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는 의미를 달리 갖는다. 즉, 푸아티에 전투가 유럽의 새로운 시대를 연 결정적 순간(The Decisive Moment)인 것은 사실이겠지만, 과연 그 순간이 의미있는 순간이었는가에 대한 질문에 저자는 그렇지 않다고 대답한다.  

 

유럽이 이슬람화되었다면 더 빠른 발전을 이루었을 것이라는 저자의 주장에 대해 그럴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역사의 변수는 워낙 많기에, 이처럼  '만약(if...)'이라는 조건을 달고 있는 질문은 큰 의미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만약,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했다면...'이라는 질문이 우리에게 지나가는 이야기에 불과하듯.) 이보다는 무아위야조(朝)의 팽창정책을 통해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정권은 역사적으로 끊임없이 외부로 국민의 관심을 돌리려는 노력을 한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하게 되며, <마호메트와 샤를마뉴>에서 말하는 '마호메트가 없었다면 샤를마뉴도 없었을 것이고, 샤를마뉴가 없었다면 마호메트도 없었을 것이다'라는 내용 속에서 국제관계에서 적대적 공생관계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하게 된다. 또한, 폐쇄사회에서의 종교(宗敎)와 권력(權力)의 결탁은 오늘날 분단체제 하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도 분명 의미있는 지점이라 여겨진다...


[사진] 그라나다에 있는 알람브라 궁전의 나스르 왕궁(출처 : 이슬람)


[사진] 알람브라 사자들의 안뜰(Patio de los Leones)의 중앙(출처 : 이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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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0-04-02 19: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퇴근 길에 아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정독했습니다.

역사에서 투르 푸아티에 전투를
아주 거대한 사건으로 다루고 있
던데 무슬림 세력이 이겼다면
어땠을 지 궁금하네요.

<신의 용광로> 땡기는데 절판
책이네요...

2020-04-02 19: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4-02 23: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4-03 04: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4-03 10: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4-03 15:5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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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03 21:1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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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06 17:0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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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06 17:1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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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04 12:3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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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04 12:3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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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이 글을 아주 훌륭한 시라고 본다. 그리고 우리가 흔히 감동하는 어린이 시에 공통으로 나타나는 순수한 직관(바로 보고 곧 느끼는 것)의 지혜로움이 아무런 장애도 입지 않고 잘 나타난 시라고 본다. 어린이가 가진 이런 '바로 봄'과 '바로 느낌'을 방해하지 않고, 그것을 불러일으키고 꾀어내도록 하는 분위기를 만들어 주는 것이 시 지도에서 기본적으로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p49) <우리 글 바로쓰기 5> 中


 이오덕(李五德, 1925 ~ 2003)의 <우리 글 바로쓰기 5>에는 좋은 어린이 시에 대한 이야기가 다뤄진다. 저자에 따르면 좋은 어린이 시의 조건을 어린이 생각(지혜로움)이 잘 표현된 시라고 할 수 있겠다. 다소 엉뚱해 보이지만, 좋은 시의 조건을 수식으로 표현한다면, '생각 * 표현 = 작품'이 되지 않을까. 생각과 표현 둘 중 어느 하나라도 없다면('0'이라면) 작품이 되지 않을테니 이들을 곱셈으로 연결시킬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조금 더 나가서, '좋은 생각' 또는 '잘된 표현'을 '+1'로 '좋지 않은 생각' 또는 '서툰 표현'을 '(-)1'로 바꿔보자. 간단히 '+1'을 긍정으로, '-1'을 부정으로 표현했을 때 수학에서와 마찬가지로 부호의 법칙이 성립할까?


(1) (+)1 * (+)1 = (+)1 -> 좋은 생각의 잘된 표현이 갖춰지면 좋은 작품이다.

(2) (+)1 * (-)1 =(-)1 -> 좋은 생각을 서툴게 표현하면 좋은 작품이 아니다.

(3) (-)1 * (+)1 = (-)1 -> 좋지 않은 생각을 잘 표현하면 좋은 작품이 아니다.

(4) (-)1 * (-)1 = (+)1 -> 좋지 않은 생각을 서툴게 표현하면 좋은 작품이다.


 부호의 법칙 (1) ~ (4) 번까지는 일반적으로 수학의 세계에서 공리(公理, axiom)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지만, 이번 명제에서는 내용을 좀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1)번의 예는 다음과 같은 평가를 받은 작품이 속할 것이고, (1)과 (2)의 법칙은 받아들이는데 굳이 크게 무리가 없다 생각된다. 


 자연을 이렇게 따스한 정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은 너무나 훌륭하다. 읽으면 저절로 웃음이 나는 좋은 시다. 여기서는 자연이 인간이고 인간이 자연이다. 자연과 인간이 아주 하나로 되어 있는 훌륭한 시다.(p33) <우리 글 바로쓰기 5> 中


 그렇지만, 문제는 (3)법칙에서부터 의견이 갈릴 수 있다. <우리 글 바로쓰기 5>에서 여기에 해당되는 예를 살펴 보면 다음과 같다.


 이 글에 대한 김 씨의 의견은 "아이가 어른의 눈치를 계산하지 않고 솔직한 자기 생각을 쓴 용기가 좋다. 그렇지만 이 글을 두고 자기 생각을 숨기지 않고 정직하게 썼기 때문에 좋은 글이라고 하며, 어른들의 잘못된 생활 태도를 지적하고 비판한 점을 칭찬할 수 있을까?" 하는 말로 시작하여 아주 부정적인 생각을 길게 적어놓았다.(p156) <우리 글 바로쓰기 5> 中


  김 씨의 의견에 따르면 '좋지 않은 생각(-1)'을 '숨기지 않고 잘 표현(+1)' 했기에, '좋은 글이 아니다(-1)'가 성립한다. 이는 수학의 부호의 법칙에 완벽하게 부합한다. 그렇지만, 이러한 주장은 수학과는 달리 논란의 소지가 있기에. 모두에게 받아들여지지는 않을 것이다. 저자도 이에 대해 비판하는 입장이다.


  나는 김 씨의 주장이 잘못되었다고 보는 사람이다.(p158)... 우리의 학교 교육은 자주성이고 자발성이고 창의성 같은 것은 철저하게 둘러막아버리고, 다만 지시와 명령만으로 아이들을 기계같이 움직이고 있다. 그래서 아이들은 자기의 마음과 삶을 잃어버리고 어른들이나 그밖에 힘이 있어 보이는 사람이 시키는 대로만 움직이는 슬픈 버릇을 몸에 익혀버렸다.(p160)... 많은 아이들이 시키는대로 움직이기만 하지만 이 아이만은 행동만 하지 않고 생각을 했다. 자기를 움직이게 한 사람의 태도에 대한 생각이다. 어쩌면 이 생각은 이 아이뿐 아니고 그 자리에 있었던 대부분의 아이들이 다 같이 가지고 있었을 것 같다. 그러나 그 생각을 이 아이는 확실히 붙잡았고 그래서 그것을 글로 밝혔다. 이것이 소중하다. 이것저것 다 살피고 계산해서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 우러난 절실한 느낌과 생각을 솔직하게 나타내는 이것이 귀중하다.... 만약 교사가 참 교육자라면 학생의 이런 비판의 소리에 마땅히 반성해야 한다.(p163) <우리 글 바로쓰기 5> 中


 이 명제에서 부호의 법칙 (3), (4)는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김씨의 생각을 요약하면,어린이들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어른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의견을 숨겨야 좋은 작품이라는 것으로 이는 수학의 법칙에는 들어맞는 생각이다. 그렇지만, 위와 같은 저자의 반대 입장처럼 다른 의견도 존재할 수 있기에, 부호법칙 (3)과 (4)에 대한 맞고 틀림은 각자의 몫으로 넘기도록 하자. 현실과 이론의 세계는 다르니까. 

 

 법칙(-1)(-1) = 1은 음수의 곱셈에서 성립하는 법칙인데 이와 같은 법칙은 분배법칙a(b + c) = ab + ac를 유지하고자 하는 바람의 결과이다. 왜냐하면, (-1) (-1) = -1이 성립한다면, 분배법칙에서 a = -1, b = 1, c = -1로 각각 잡았을 때, - 1(1 - 1) = -1-1=-2가 되어야 하지만 실제로는 -1(1 - 1) = -1.0 = 0을 얻기 때문이다. 음수와 분수에 적용되는모든 다른 정의가 증명될 수 없다는 사실과 ˝부호의 법칙˝ (3)을 수학자들이 받아들이기에는 오랜 세월이 걸렸다.(p73) <수학이란 무엇인가> 中


 수학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도록 하고, 책으로 넘어가 보자. <우리 글 바로쓰기>의 저자 이오덕은 생각의 가치보다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가에 더 큰 가치를 부여한다. 글은 자신의 생각을 나타내는 것이며, 글을 쓴다는 것은 자신의 생각 중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다. 때문에, 글의 내용에 무엇이 담겼는가에 대한 책임은 어른의 몫이고, 아이들의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가가 중요하다는 저자의 교육철학을 우리는 배울 수 있다. 


 이 시는 실제로 체험한 것을 쓴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니 거짓스럽게 느껴진다. 자기의 마음과 삶을 정직하게 쓰려고 하지 않고 '이런 것을 써야 근사한 시가 되겠지'하고 썼으니 말이다. 실제로 겪지 않은 일을 상상으로 쓸 때는 바로 그것이 상상임을 읽는 이들이 알도록 써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니까 거짓말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어른의 시와 어린이 시가 다른 점이다.(p37) <우리 글 바로쓰기 5> 中


 글쓰기는 인간교육의 가장 좋은 수단이 된다. 그러나 아이들에게 저마다 쓰고 싶은 것을 정직하게 쓰게 하지 않고, 교육을 잘 한 것처럼 윗사람이나 학부모나 사회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는 선전의 수단으로 이용이 될 때는, 이 글쓰기가 아이들을 아주 좋지 못한 사람 - 꾀부리고 거짓말 꾸며대고 사람답지 못한 짓을 하는 사람으로 만들게 한다.(p101) <우리 글 바로쓰기 5> 中


 그리고, 이러한 저자의 생각은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ere, 1940 ~ )의 <무지한 스승 Le Maitre Ignorant >에서 '보편적 가르침'과 맞닿아 있음을 우리는 볼 수 있다. 교육에서 중요한 것은 강요가 아닌 해방이며, 이를 위해서 생각을 받아들여야 한다. 

 

 지도와 교육의 조화로운 균형은 이중의 바보 만들기의 균형이다. 여기에 정확히 해방이 대립된다. 해방이란 모든 인간이 자기가 가진 지적 주체로서의 본성을 의식하는 것이다. 그것은 데카르트의 정식을 거꾸로 뒤집은 평등의 정식이다. "나는 인간이다. 고로 나는 생각한다." 이 뒤집기는 인간 주체를 코기토(Cogito)의 평등 안에 포함시킨다. 생각은 사유 실체가 가진 한 속성이 아니다. 그것은 인류의 속성이다.(p33)... 보편적 가르침의 모든 실천은 다음의 질문으로 요약된다. "너는 그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니?"(p77) <무지한 스승> 中


 우리는 아이들에게 그들의 생각을 끊임없이 물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주의깊게 들어야 한다. 우리(어른)들의 생각을 아이들에게 무조건 따를 것을 강요했을 때 어떤 결과가 나왔는가. 배에 가만히 있으라는 선내 방송에 따른 이들이 희생되었던 4.16 세월호 참사는 (비록 그것이 모든 원인은 아닐지라도) 어른들의 일방적인 강요가 비극적인 결과의 한 원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 사건이라 생각한다. 가볍게 시작한 글이 무겁게 끝나게 되지만,  자신이 가진 생각을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좋은 생각보다 더 중요한 것이라는 것을 <우리 글 바로쓰기> <무지한 스승>을 통해 생각하며 글을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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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존슨(Paul Johnson, 1928 ~ )의 <모던 타임스 2 : Modern Times: The World from the Twenties to the Nineties>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1980년대를 다룬 책이다. 1권과 마찬가지로 주요 인물의 성격과 태도를 상세히 묘사하며, 이들이 세계사를 어떻게 움직였는가를 서술하는 방식은 마치 <삼국지연의 三國志演義>에서 조운이 유선을 구한 장판전투(長坂戰鬪)나 관우가 유비를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 오관참육(五關斬六)을 그리는 것과 같은 호쾌함을 주기에 전체적인 현대사의 사건을 파악하는데 유용하다. 


[그림] 장판전투(출처 : 위키백과)


 그렇지만, 역사(歷史)가 우리에게 의미가 있는 것은 현대에 교훈을 주기 때문이 아닐까. 그런 면에서 저자가 매카시즘(McCarthyism)을 다룬 장에 유독 시선이 머무른다. 1950년대 미국 정부의 고위직에 공산주의자가 침투해 체제전복을 꾀하고 있다는 근거없는 고발로 1950년부터 1954년까지 미국 전역에 공산주의자 색출 열풍을 일게 한 이 사건에서 데자 뷰(deja vu)를 느끼게 된다.


 매카시(Joseph Raymond McCarthy, 1908 ~ 1957)가 여러 사람의 인생에 피해를 입힐 수 있었던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첫째 미국의 명예 훼손에 관한 법률이 불완전했기 때문이다. 언론은 그의 근거 없는 주장을 그대로 발표했다. 사실 그들은 그럴 권한이 없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다. 무책임한 비방을 일대 스캔들로 만든 것은언론, 특히 통신사들이었다. 이러한 상황은 워터게이트 사건이 마녀 사냥으로 확대되었던 1970년대와 비슷하다. 둘째 일부 사회나 단체, 특히 할리우드와 워싱턴의 도덕적 비겁함 때문이다. 그들은 곳곳에 만연한 불합리와 비이성에 굴복했다.(p176) <모던 타임스2> 中


 21세기에도 빨갱이, 좌파 등의 이야기로 상대를 공격하고 온갖 거짓뉴스가 세상을 어지럽히고 있는 가운데 우리는 1950년대 미국의 사례로부터 교훈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든다는 기대감을 갖게 된다. 


  아이젠하워( Dwight David "Ike" Eisenhower, 1890 ~ 1969)는 '감추어진 손'이라 할만한 은밀한 통치 스타일의 가장 전형적인 사례를 보여준다. 그는 재임 기간 내내 이런 통치 스타일을 즐겨 사용했다. 그의 사후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그 사실이 밝혀졌다. 아이젠하워는 20세기 미국에서 가장 성공적인 대통령이다.(p178) <모던 타임스2> 中


 폴 존슨은 <모던 타임스 2>정치에서 '보이지 않는 손 invisible hand'을 통해 미국을 번영의 시기로 이끈 아이젠하워가 어떻게 매카시즘을 잠재울 수 있었는가를 보여준다. 그리고, 우리는 이로부터 트럼프(Donald John Trump, 1946 ~ )가 왜 그토록 북한문제에 매달렸는지, 문재인 정부의 대북정책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배울 수 있다. 아직, 문재인과 트럼프 두 대통령이 역사의 평가를 받기에는 이르지만, 적어도 이들이 택한 가치가 무엇인지는 역사가 답해주고 있다...  


 평화는 미국 선거에서 언제나 필승의 카드였다...  공화당 후로보 대통령에 당선된 1952년의 아이젠하워는 한국전쟁을 불필요한 전쟁이자 반복된 실책으로 여겼다. 그는 교착 상태에 빠진 협상을 마무리 짓기 위해 행동에 나섰다. 이 전술은 효과를 거두었고, 9개월이 안 되어 불완전하나마 협정을 타결 지을 수 있었다. 그는 반공 히스테리를 막기 위해 아무런 조치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당시 심한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사실 그는 문제의 본질을 잘 알고 있었다. 매카시즘이 선풍을 일으킨 것은 한국전쟁 때문이고, 한국전쟁이 끝나면 매카시즘도 곧 시들해질 것임을 알았다. 그는 평화를 위한 노력에 우선 순위를 부여했다.(p177) <모던 타임스2>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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