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고컨대 2018년은 참으로 평화와 희망의 한 해였다. 불행히도 2019년 2월 27일 ~ 28일 하노이 2차 북미정상회담이 결렬되면서 한반도는 불확실성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었다. 미국이 제시한 "선(先) 비핵화, 후(後) 보상"이라는 빅딜(big deal)과 북한이 제시한 "영변 핵시설의 완전하고도 영구적인 폐기와 유엔안보리 제재의 부분적 완화의 동시 교환"이라는 섬딜(some deal)간에 절충이 실패하면서 하노이 북미정상회담은 결렬되었고 그 여파로 한반도의 불확실성은 과거 어느 때 보다 크게 증폭되고 있다.(p32)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20.6.> 中


  2020년 6월호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Le Monde Diplomatique>에는 한국전쟁 70주년이자, 6.15 20주년을 맞아 문정인 특보의 기고문이 실렸다. 며칠 전 남북공동연락사무소가 폭파되면서 급냉한 현 시점에서 이 글을 읽으니 마음이 무겁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고문에는 몇몇 생각할 지점이 있기에 이번 페이퍼에서는 기고문의 주요 내용을 살펴보려한다. 


 문정인 특보는 한반도 정세가 불안정하게 된 시기를 2차 북미회담 결렬 이후로 파악하고, 이 시기를 전후해 우리 정부도 상황의 주도권을 잃고 상황은 정체될 수밖에 없었다고 본다. 또한, 문특보는 이러한 상황 이전 평화로운 2018년을 주도한 정부의 정책은  임마누엘 칸트( Immanuel Kant, 1724 ~ 1804)의 평화론에 기반하였음도 함께 밝힌다.


 평화 유지가 소극적 평화전략이라 한다면 평화 만들기는 적극적 평화전략이라 할 수 있다. 이는 평화 구축(peace - building) 전략이다. 평화 구축은 임마누엘 칸트의 영구평화론과 맥을 같이 한다. 영구평화론의 제1명제는 '무역하는 국가들끼리는 서로 싸우지 않는다'는 소위 자본주의 평화론이다. 제2명제는 '민주주의 국가들끼리 싸우지 않는다'는 민주평화론이다. 그리고 제3명제는 평화연방(The pacific federation)이다. 세계 정부의 한 형태인 평화연방을 만들면 사실상 국가간의 전쟁은 있을 수 없다. 이 세 가지 조건이 충족되면 영구평화가 가능하다는 게 칸트의 기본명제이다. 물론 문재인 대통령의 평화구축 전략은 이에 훨씬 미치지 못한다. 남북한이 경제교류협력을 하고 철도, 에너지를 연결하여 경제공동체가 형성되면 남북이 싸울 일이 없는 것이 아니냐는 게 이 구상의 핵심이다.(p32)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20.6.> 中


 위의 내용에 대해, 칸트의 <영구 평화론>에서 해당 내용을 찾아보자. 문 특보가 말한 영구평화론의 제1명제는 '제1추가조항 영구 평화의 보증에 대하여'에 나온다. 칸트는 해당 명제의 설명에서 재물의 이익을 추구하는 인간의 정신을 통해 자연이 영원한 평화를 보장함을 밝히는데, 이는 애덤 스미스(Adam Smith, 1723 ~ 1790)가 <국부론> <도덕감정론>을 통해 개인의 이기심이 타인의 동감을 불러와 최선의 결과를 도출시킨다는 논증과 통한다. 우리가 물질적이라고 여길만한 감정이 보다 높은 이상을 달성시킨다는 아이러니는 여기에만 머무르지 않는데, 이는 뒤에서 칸트의 '자연'에서 간단하게 살펴보자.


 자연은 여러 민족을 현명하게 분리시키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다른 한편으로 자연은 또 세계 시민법의 개념에 의해서는 폭력과 무력에 대항해서 자신들을 보호할 수 없었던 여러 민족들을 상호 이익에 의해 서로 통합시킨다. 그것은 전쟁과 양립할 수 없는 상업적 정신인데, 조만간 각 민족을 지배하게 된다. 금력(金力)이야말로 국가 권력 안에 포함되는 모든 권력(수단) 가운데에서 가장 믿을 만한 것이기 때문에, 각 국가는 부득불 영예로운 평화를 추구해 가지 않을 수 없게 되며, 그리고 전쟁이 발발하는 곳이 어디가 되었든 간에 중재를 통해 전쟁을 막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러한 방식으로 자연은 인간의 경향성의 기제에 의해 영원한 평화를 보장하게 된다.(p56) <영구평화론> 中


 또한, 칸트는 이러한 인류의 영원한 평화는 자연의 숨겨진 의도에 따라 '세계공화국'으로 이끌린다고 보고, 자연의 의도에 따라 영원한 평화라는 국제 질서가 확립될 수 있음도 밝힌다. 개인적으로는 홉스(Thomas Hobbes, 1588 ~ 1679)와 마찬가지로 자연 상태를 투쟁상태로 파악하는 칸트가 영원한 평화를 주는 존재로 자연을 말하는 것은 또한 역설적으로 느껴진다. 마치, 힌두교의 친절하면서도 난폭한 신 루드라(Rudra) - 시바(Siva)을 떠올리게 하는 칸트의 '자연'. 이러한 '자연'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대해서는 <판단력 비판>과도 연결지어 생각해 보는 것으로 일단 넘기자.


 (제8명제) 인류의 역사는 국내적으로도 완전하며, 그리고 이 목적에 맞으면서 국제적으로도 완전한 국가 체제를 성취하고자 하는 자연의 숨겨진 계획을 실현하는 과정으로 간주될 수 있다.(p38)... (제9명제) 인류의 완전한 시민적 통합을 목표로 하고 있는 자연의 계획에 따라서 보편적 세계사를 편찬하려는 철학적 시도는 가능한 것으로서, 또 이런 자연의 의도에 공헌하는 것으로서 간주되어야만 한다.(p40) <칸트의 역사철학, 세계 시민적 관점에서 본 보편사의 이념> 中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 1941 ~ )은 <세계공화국으로>에서 칸트의 평화론이 단순히 국가간의 관계를 고려한 국제정치에서 통용되는 것이 아니나, 세계공화국의 틀 안에서 행해질 수 있음을 밝힌다. 그는 구체적으로 세계공화국으로 접근하기 위해서 국가가 가지고 있는 군사 주권을 국제연합에 양도해야한다는 주장을 펼치는데, 현실적으로 이루기는 어려워 보인다. 이러한 한계 안에서 우리는 칸트의 평화론이 냉혹한 국제 정치의 현실 속에서 그대로 적용되기 어려움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칸트의 평화론에 근거한 평화구축 전략 역시 구체적으로 진행되기도 전에 예비 조항 단계에 머물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이러한 문제 해결을 위해 무엇을 해야할까?

 

 칸트의 생각은 단순히 단독행동주의에 대한 다국 간 협조주의 같은 것이 아닙니다.국제연맹이나 국제연합이 칸트의 '국가연맹' 구상에 기초한 것이 확실하지만, 그는 딱히 그런 것을 목표로 삼았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가 그것을 제기한 것은 현실적인 타협안에 지나지 않습니다.(p222)... 그의 이념은 궁극적으로 각국이 주권을 방기함으로 형성되는 세계공화국에 있습니다.  그 이외에 국가 간의 자연상태(적대상태)가 해소될 수 없으며, 따라서 그 이외에 국가가 지양될 방법은 없습니다. 한 나라 안에서만 국가를 지양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p223) <세계공화국으로> 中 


 국가 간의 영구 평화를위한 예비 조항 (1) 장차 전쟁의 화근이 될 수 있는 내용을 암암리에 유보한 채로 맺은 어떠한 평화 조약도 결코 평화 조약으로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 <영구평화론> 中


 문 특보는 기고문의 마지막에서 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 현재의 접근법을 벗어날 필요가 있다고 제시한다. 최종 목적은 분명히 하되 유연성있는 태도 변화가 현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첫걸음임을 밝히는 그의 글 속에서 효과적인 군비 축소를 위해서는 정치 문제 해결이 먼저라는 한스 모겐소(Hans Joachim Morgenthau, 1904 ~ 1980)의 논지를 떠올리게 된다. 비록, 핵 군비 통제와 재래식 무기 통제라는 차이는 있지만, 정치 분쟁 해결을 위한 협상이 필요함은 석학들의 주장을 통해 분명해 보인다.


 밴 잭슨 교수도 주장한 바 있지만 '선 비핵화'에 기초한 비핵화 패러다임으로는 북한 핵문제를 풀지 못한다. 목표는 비핵화에 두지만, 실질적으로는 핵군축 협항의 기법을 적극적으로 모색해야 할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북한이 현재 가장 역점을 두고 있는 제재 완화를 의제로 설정할 필요가 있다. 일방적이고도 맹목적 제재 완화는 비핵화 협상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북이 원하는 것은 미국의 적대시 정책 폐기다. 북미간 국교 관계가 정상화되고 한반도 평화체제가 제도적으로 구축이 된다면 북한의 핵보유는 정당화되기 어렵다.(p33)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20.6.> 中

 

 (다양한 국가들이 군축 시) 적용하는 기준은 자신의 정치적 목적에 따라 결정될 뿐 객관적인 기준 같은 것에 따라 결정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이런 기준은 관련 국가들이 자신들을 갈라놓는 정치적 문제의 해결에 일차적으로 합의한 뒤에야 비로소 자유로운 합의를 통해 결정될 수 있다. 따라서 군비 할당 기준의 문제는 비율 문제와 마찬가지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정치적 분쟁 해결이 군비 축소에 선해오디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치적 해결 없이는 군축은 성공 가능성이 없다.(p173) <국가간의 정치 2> 中


 최근 우리가 겪고 있는 여러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평화로 나가야 한다는 사실은 분명하기에, 걱정스러운 마음을 가지고도 분명하게 평화로 나가기 위한 걸음을 가야하지 않을까 생각하며 페이퍼를 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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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같다면 2020-06-19 00: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문대통령의 6.15 남북공동선언 20주년 축사를 다시 읽었습니다

그러나 나와 김정은 위원장이 8천만 겨레앞에서 했던 한반도 평화의 약속을 뒤로 돌릴 수는 없습니다

평화는 누가 대신 가져다 주지는 않습니다
우리의 운명을 우리 스스로 개척해야 합니다
남과 북이 함께 해야 할 일입니다

이 땅에 민주. 평화.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기를 기대합니다

겨울호랑이 2020-06-19 07:00   좋아요 1 | URL
여러 모로 뜻깊은 한 해인데, 상황은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지난 시간 중 어렵지 않았던 시기가 많지 않았음을 생각해 봤을 때, 중단없이 왔던 길을 다시 나가야한다 여겨집니다...
 

 [엄마]의 생각 : 책을 보고 죽음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았어요. 인간은 누구나 태어나 언젠가 죽기 때문에, 늘 죽음을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죽음을 반가운 손님으로 받아들이시는 할아버지의 모습이 감동적이에요.


나[연의]의 생각 : 할아버지는 참 좋으시겠어요. "저도 이모 보고 싶은데..." 아내 잘 만나시고 하늘나라에서도 잘 지내세요.


[아빠]의 생각 : 결코 돌아올 수 없는 여행을 떠나는 할아버지. 할아버지가 챙겨가는 물건들은 비록 그쪽에서는 필요없는 것들 뿐이지만, 할아버지는 이미 새로운 만남을 준비하고 기다렸기에 두려움없이 설레는 마음으로 여행을 떠납니다. 그런 할아버지를 통해 지금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 지 생각하게 됩니다.



 학교 과제로 나오는 [가족과 함께 하는 독서] 중 이번에 <여행 가는 날>을 함께 읽게 되었습니다. 설레는 마음으로 손님을 기다리고, 그 손님과 함께 여행을 떠나는 할아버지. 이것저것 챙겨서 좋은 날 떠나는 할아버지는 사실은 저 세상으로의 여행을 떠납니다. 독자들은 처음에는 이러한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하지만 낯선 손님과의 대화 속에서 무언가 보통의 여행이 아님을 알아가게 되고, 마지막 페이지에서 우리는 여행의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동화임에도 죽음이라는 결코 가볍지 않은 주제를 다룬 <여행 가는 날>. 이번 페이퍼에서는 [아빠]의 생각에서 미처 담지 못한 이야기를 풀어가볼까 합니다. 


"걱정 말거라. 나는 그리운 사람을 만나러 가는 거란다." <여행 가는 날> 中 

 

 <여행 가는 날>은 두 가지 면에서 새롭게 다가오는 책입다. 하나는 '뽀얀 안개같은 손님'으로 표현되는 저승사자이고, 다른 하나는 죽음을 맞이하는 할아버지의 자세입니다. <신과 함께>의 저승 3차사로 알려진 저승사자의 존재는 전통적으로 우리에게 공포의 신(神)이지만, <여행 가는 날>에는 마치 '꼬마유령 캐스퍼'처럼 친근하게 등장합니다. 친근한 여행 동반자로서의 저승사자를 통해 독자들은 죽음이 결코 두려운 존재만은 아님을 깨닫습니다.


 명신손님처럼 멀리 낯선 땅에 깃들어 있으면서 긴 여행을 통해 이 땅을 찾아오는 신들이 있다. 그 대표적인 존재가 바로 어둠의 신 저승사자다. 그들은 저 멀리 저승 황천에 살면서 인간 세상으로 훌쩍 건너와서는 수명이 다한 사람들을, 또는 신의 노여움을 산 사람들을 왈칵 붙잡아서 아득한 어둠의 땅으로 데려간다. 한번 그네들에게 붙잡히면 꼼짝없이 모든 것을 다 잃어야 하는 공포의 대상이 저승사자다.(p134)... 망자를 잡아가는 삼차사는 일직사자와 월직사자, 강림도령이라 돼 있는데, 강림도령의 활약이 두드러진다.(p180) <살아있는 한국 신화> 中


 "이제야 왔구나. 기다리고 있었단다." 할아버지는 손님을 반갑게 맞이했어요. 손님이 왔으니 할아버지는 이제 먼 여행을 떠날 준비를 해야 해요. 뽀얀 안개같은 이 손님은 할아버지가 길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도와주러 왔답니다. <여행 가는 날> 中


 또한, <여행 가는 날>에서 할아버지의 모습은 낯선 손님과 함께 떠나는 여행이 돌아올 수 없는 여행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두려움이 없습니다. 오히려, 손님을 기다렸다는 할아버지의 말 속에서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 (Marcus Tullius Cicero, BC 106 ~ BC 43)가 <노년에 관하여 Cato Maior de Senectute> 했던 죽음이 편한 것이라는 말을 떠올리게 됩니다. 

 

 죽음이 임박했다는 것. 그것은 우리 나이의 사람들을 가장 불안하고 걱정스럽게 하는 것 같네. 죽음이 노년에서 멀지 않다는 것은 사실이니까. 그토록 오래 살아오면서도 노인이 죽음은 무시되어 마땅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면 그것이야말로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네. 왜냐하면 죽음이 영혼을 영생할 어떤 곳으로 인도한다면 죽음은 바람직한 것이기 때문이네.(p78)... 내가 죽음에 더 가까이 다가갈수록 마치 오랜 항해 끝에 마침내 육지를 발견하고는 항구에 입항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네.(p81) <노년에 관하여> 中


 또는 남겨진 이들에게 미안하다는 할아버지의 말 속에서 시몬 드 보부아르(Simone de Beauvoir, 1908 ~ 1986)가 <노년 La Vieillesse>에서 말한 '죽음은 주변인에게 의미가 있다'는 사실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보부아르가 말한 죽음에 대한 주변인들의 태도에 대해서는 <죽음 앞의 인간 L'homme Devant la Mort >에 자세히 나오지만, 이미 여러 페이퍼에서 다루었기에 여기서는 짚고만 넘어가겠습니다.


 "아, 그렇지! 가는 길에 이 동전으로 통닭을 사 가자. 오랜만에 함께 둘러앉아서 먹으면 눈물 나게 맛있을 거야." "그런데 할아버지, 안 슬퍼요?" "슬프기는, 미안하지. 남겨진 사람들이 슬퍼할까 봐 그게 미안해."<여행 가는 날> 中 

 

노인에게 죽음은 더 이상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운명이 아니다. 죽음은 이제 임박한 것, 개인적인 사건이다.(p614)... 죽음은 사르트르가 '실현 불가능한 것들'이라고 부르는 범주에 속한다. 우리는 노년을 이 범주에 넣었었다. 대자는 거기에 도달할 수도, 그것을 향해 자신을 투사시킬 수도 없다. 죽음은 내 가능성들의 외적인 한계이다... 내가 죽게 되면 그 죽음은 타인에게 죽음인 것이지 나 자신에게 죽음은 아니다. 나는 나 자신에 대해 타인들이 나를 보는 관점을 취하여 내가 늙는 것을 알듯이 내가 죽는다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이 앎은 추상적이고 일반적이며 외적으로 제기된 것이다.(p615)... 사실 죽음이 가까이 온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죽음은 가까이도 멀리도 있지 않다. 죽음은 존재하지 않는다.... 죽음을 바란다는 것, 혹은 죽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긍정의 의미다.(p617) <노년> 中


 <여행 가는 날>은 이와 같이 죽음을 잘 준비해서 맞이하는 할아버지의 모습을 통해 우리에게 준비된 삶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합니다. [연의]의 생각에도 살짝 언급이 되었지만, 사실 몇 개월 전에 연의는 이모를, 연의 엄마는 언니를 긴 여행으로 떠나보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이 책의 의미가 저희 가족에게 깊숙하게 와 닿습니다. 


 <여행 가는 날>에서 할아버지는 여행 끝에 헤어진 부모님과 아내와의 만남을 기대하며 여행을 떠납니다. 마지막 페이지에서도 우리는 할아버지가 만남을 이뤘는지에 대한 답을 들을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바가바드 기타 Bhagavadgita>에서 스승 크리슈나가 왕자이자 제자인 아르주나에게 한 이야기 속에서 할아버지 여행의 끝을 짐작해 봅니다. 그리고, 우리 삶의 지향도 그곳을 향해야하지 않을까요. 하루 하루를 살아간다는 것은 하루 하루 죽어간다는 다른 말이기에.

 

 목숨이 끝나는 순간에 나만을 기억하며 육신을 버리는 사람은 누구나 다 나의 지경에 이를 것이니, 거기에는 의심이 없느니라. 어쨌거나 목숨이 끝나는 순간 어떤 성질의 것을 기억하며 떠났거나 간에 틀림없이 그대로 되는 것이니, 쿤티의 아들아 그것은 일생을 거기 젖어 있었기 때문이니라.(p331) <바가바드 기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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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같다면 2020-06-13 23:4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겨울호랑이님의 세계의 장례. 100만 번을 산 고양이 글을 일고 저도 구입해서 읽었어요. 죽음은 드러내지는 않고 잊고 사는 것 같아도 늘 우리 안 깊은 곳에 있는 질문이죠.

죽음을 소멸로 인식 한 아이와

헤어진 사람을 다시 만날 수도 있고, 하늘 나라에서도 잘 지내며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아이는 세상을 대하는 반응이 확실히 다를 것 같습니다

저는 죽음이 소멸이라는 생각을 너무 어렸을 때 해서 힘든 시간을 보내왔어요

연의의 글을 한참 들여다보며 따뜻한 위안을 받습니다

겨울호랑이 2020-06-14 07:53   좋아요 2 | URL
나와같다면님 말씀으로부터 죽음과 고통에 대한 질문으로부터 종교가 시작되었다는 말을 떠올려 봅니다. 사실 죽음 이후에 대해 말하는 것 자체가 인식을 벗어나지만, 이를 통해 우리의 삶의 자세가 조금 달라진다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감사합니다...

2020-06-15 14:5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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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15 19:0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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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16 09:2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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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16 14:3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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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민지 폭동을 지원하는 것부터 위성국을 무장침략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아시아에서 사용된 공산주의자들 방식의 대표적인 예로 1950년 한국 전쟁을 들 수 있다. 1950년 6월 25일 러시아식 훈련을 받은 북한군이 38선을 넘어 남한을 침략했다. 남한에서 미군이 철수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어느 면에서 한국 전쟁은 그 지역에 국한된 제한적인 전쟁(국지전) limited war였다... 한국 전쟁은 1953년 7월에야 끝났다.(p939) <전쟁의 역사> 中


  <전쟁의 역사 A Histoty of Warfare>의 저자 버나드 로 몽고메리 (Bernard Law Montgomery, 1887 ~ 1976)가 한국전쟁에 대해 기술한 바는 적지만, 짧은 내용 안에 담긴 한국전쟁의 기원은 우리가 알고 있었던 바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에 반해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 1943 ~ )는 한국 현대사에서 전면전으로서의 한국전쟁의 원인을 양측의 입장을 함께 제시한다.


 1950년 6월의 전쟁 발발 상황에 대한 설명들 대부분은 완전히 방심하고 있는 적을 향해 북한이 새벽녘에 38도선 전역에서 공격을 개시한 듯한 인상을 남긴다. 그러나 전쟁은 1949년에 많은 전투가 벌어진 바로 그 외진 옹진반도에서 시작되어 몇 시간 후에 38도선을 따라 동쪽으로 확산되면서 개성, 춘천, 동해안에 이른 것이다.(p364)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 中


 공식적인 미국사에 따르면, 옹진반도에서는 제17연대 병사들이 1950년 6월 24일, 25일, 조용한 여름밤에 경계를 서고 있었다... 그런데 새벽 4시 정각에 너무나 급작스럽게... (대포와 박격포의 사격이) 굉음을 울리며 대한민국의 경계선을 침입하였다.(p364)... 북한의 공영 라디오 방송은 이와 다르게 발표했다. 남한 군대가 6월 23일 오후 10시에 은파산 일대를 포격하기 시작했으며, 곡사포와 박격포를 동원한 이 포격은 6월 24일 새벽 4시까지 계속되었다는 것이다.(p365)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 中

 

 브루스 커밍스는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에서 1950년 이전에 남북간에 이미 많은 충돌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공간적으로 옹진반도가 전면적인 한국전쟁 확산의 진원지라면, 시간적 배경을 올바로 이해할 때 비로소 한국전쟁의 기원의 참다운 모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한국 전쟁의 기원>은 이러한 시간적 배경을 보다 상세하게 서술한다. 본래 2권으로 이루어진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중 1권을 번역한 <한국 전쟁의 기원>에서는 해방 정국을 중심으로 그 원인을 보다 상세하게 고찰한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에서 도올 김용옥(金容沃, 1948 ~ )의 '동아시아 30년 전쟁'의 사관(史觀)을 통하는바를 발견한다 .



  만주에서의 항일 활약상의 인식은 한국 공산주의의 특성을 이해하는 데 긴요한 것이다... 만주를 배경으로 한인이 이룩한 최소한의 성공도 항일운동이라는 사실로 인하여 대전 후의 한국에서 영도적 지위를 확보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p71)... 이러한 만주에서의 경험에 있어서 특히 언급해야 할 다른 요소 하나가 유격대들을 살해하는 데 기꺼이 참가할 한인들을 발견했다는 사실이다. 한인(韓人) 수백 명이 사병 혹은 하급장교로 토벌작전에 가담했다. 일본신문들을 이들 한인들 사이의 대결을 크게 보도한 바 있다... 1950년 6월의 실상은 일본인들이 바람의 씨앗을 뿌렸으며, 한인들은 거센 회오리바람을 거둬들인 것이다.(p72) <한국 전쟁의 기원> 中


 미국의 정책들은 개념과 결과에 있어서 식민 잔재의 완전한 재편성을 요구하는 한인들의 염원을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무리 의도한 바가 좋았다 하더라도 이러한 염원을 대치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것은 무지와 과오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에서의 미국의 실패의 본질인 것이다. 그리하여 해방 후의 첫 해는 한인뿐만 아니라 미국인들에게도 하나의 시련을 제공했으며, 그 속에서 새로운 통치체제가 그 자체의 이익에 입각한 논리를 전개시켰다.(p541) <한국 전쟁의 기원> 中


 일단 읽던 책은 마무리하고 한국전쟁 70주년을 맞이하여 한국 전쟁의 기원을 정리하는 것도 의미있는 독서가 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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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15 14:5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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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15 19: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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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16 09:2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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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16 14:3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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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우리가 음미하려고 하는 더욱 세련된 감정은 주로 두 가지 종류인데, 숭고함의 감정과 아름다움의 감정이 그것이다. 이 두 가지 감정에서 생겨난 감동은 아주 다양한 방식으로 기분 좋게 angenehm 한다.... 숭고함은 감동시키고, 아름다움은 매료시킨다.(p15)... 숭고한 것은 언제나 반드시 거대한 것이고, 아름다운 것은 작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숭고한 것은 단순한 것이 틀림없고, 아름다운 것은 장식적이고 치장된 것일 수 있다.(p16) <아름다움과 숭고함의 감정에 관한 고찰> 中


 채용된 덕들 adoptierte Tugende은 아름답고 매력적이며, 순수한 덕 die echte Tugend은 숭고하고 존경할 만하다. 우리는 전자의 느낌을 지배하고 있는 심성을 선한 마음씨라 부르고, 그런 마음씨를 가진 부류의 사람들을 마음이 곱다고 한다. 이와는 달리 원칙에 따라 덕을 행하는 사람에게는 고귀한 마음씨를 가졌다고 하며, 그런 사람만을 정의로운 사람이라 부른다.(p31) <아름다움과 숭고함의 감정에 관한 고찰> 中


 <아름다움과 숭고함의 감정에 관한 고찰 Beodachtungen u"ber das Gefu"bl Scho"nen und Erbabenen >에서 임마누엘 칸트( Immanuel Kant, 1724 ~ 1804)는 아름다움과 숭고함이 만들어 내는 감정과 이들의 혼합과 균형이 세상을 어떻게 구성하는가를 설명한다. 에드먼드 버크(Edmund Burke, 1729 ~ 1797)의 <숭고와 아름다움의 관념의 기원에 대한 철학적 탐구 A Philosophical Enquiry into the Origin of Ideas of the Sublime and Beautiful>를 떠올리게 하는 책 제목 속에서 우리는 칸트의 미학(美學)을 엿볼 수 있다.


 두 가지 감정을 자기 안에서 하나로 조화시킨 사람들은 숭고함의 감동이 아름다움의 감동보다 훨씬 더 강력하다는 점과, 그리고 아름다움에서 비롯한 감동의 수반이나 변형이 없다면 숭고함의 감동도 사라져버리고 그 즐거움 또한 오래 갈 수 없다는 점을 알게 될 것이다.(p21) <아름다움과 숭고함의 감정에 관한 고찰> 中


 숭고함이나 아름다움의 그 어떤 성분도 특별히 눈에 띌 만큼 점액질적인 혼합물에 속하지는 않기 때문에, 이 고유한 심성은 우리가 고려하려는 맥락에 속하지 않는다.(p42) <아름다움과 숭고함의 감정에 관한 고찰> 中


 

칸트는 아름다움과 숭고함을 인간의 본성(本性)에 속하는 것으로 보았고, 이들을 축으로 인간을 성(性),별, 민족(民族) 별로 구분하여 설명한다. 구체적으로 2장 - 인간에게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숭고함과 아름다움의 성질에 관해 - 에서 인간의 성격은 이들 요소가 어떤 비율로 혼합되는가에 따라 달라지는가를 설명하는데, 칸트의 이러한 설명은 마치 <필레보스 Phile'bos>에서 플라톤(Platon, BC 428 ~ BC 427)이 '좋은 것'을 '즐거움(쾌락)'과 '지혜'의 혼합이라는 관점으로 접근한 것을 연상시킨다. 플라톤이 적정한 혼합을 가장 바람직한 것으로 보았듯, 칸트 역시 숭고함과 아름다움의 적절한 조화를 가장 높은 가치로 쳤다는 점에서 플라톤의 영향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아름다움과 숭고함의 감정에 관한 고찰>에서 숭고함은 아름다움보다 높은 가치를 지닌다. 이 책은 중국의 <주역 周易 >의 영향을 받은 듯 음(陰)과 양(陽)을 아름다움과 숭고함의 이름으로 설명한 느낌을 준다. 이는 칸트보다 한 세대 앞선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lm Leibniz, 1646 ~ 1716)가 <주역>에 관한 주석을 달았다는 점을 생각하면 전혀 근거가 없는 추측은 아니라 생각하지만,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의견에 불과하다... 3장 - 여성과 남성의 상호 관게에서의 숭고함과 아름다움의 구별에 관해 - 과 4장 - 숭고함과 아름다움의 열어 감정에 기인하는 한에서의 민족 특성에 관해 - 에 담긴 칸트의 사상은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받아들이기 힘들다. <영구평화론 Zum ewigen Frieden. Ein philosophischer Entwurf >의 저자와 같은 저자인가 의심이 갈 정도로' 차별주의자 칸트'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은 그렇게 기분좋은 일은 아니다. 대체로, 이러한 차별은 당대 유럽 문화의 특성에 원인을 두었겠지만.


 여성을 아름다운 성 das schone Geschlecht이라고 정의한 사람은 어쩌면 그들에게 아첨하고 싶어 했던 것일 수도 있지만, 그는 자신이 믿고 있었던 것보다도 훨씬 더 적절하게 표현했다.(p51)... 아름다운 성은 남성만큼이나 지성을 갖추고 있다. 그렇지만 그것은 단지 아름다운 지성 ein shoner Verstasnd일 따름이다. 반면에 남성의 지성은 심오한 지성 ein tiefer Verstand임이 분명하다. 그것은 숭고함과 동일한 의미를 지닌 표현이다.(p53) <아름다움과 숭고함의 감정에 관한 고찰> 中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의 여러 민족들을 생각해볼 때 나는 이탈리아인과 프랑스인은 대개 아름다움의 감정의 측면에서 다른 민족과 구별되고, 독일인과 영국인 그리고 스페인인은 흔히 숭고함의 감정에서 다른 민족들과 구별된다고 생각한다.(p79)... 독일인들은 운 좋게도 숭고함에서나 아름다움에서나 모두 잘 혼합된 감정을 가지고 있다. 더욱이 숭고함의 감정에서 영국인과 같지 않고, 아름다움의 감정에서 프랑스인과 다르다면, 그런 두 가지 감정들을 결합시키려 할 경우 독일인은 양 자 모두를 넘어서게 될 것이다.(p85)... 아프리카의 니그로는 본래 유치함을 넘어설 만한 감정이라고는 갖고 있지 못하다... 두 인종간의 차이는 본질적이며, 그것은 피부색에서와 마찬가지로 심성의 역량에서도 크게 나타난다.(p93) <아름다움과 숭고함의 감정에 관한 고찰> 中


 독일 남성이 아니면 글을 읽기 심히 불편한 부분이 있고, 여기에 더해 다분히 국뽕 MSG가 물씬 첨가된 느낌을 주는 <아름다움과 숭고함의 감정에 관한 고찰>이 쓰여진 년도가 프로이센이 전성기에 있던 프리드리히 대왕(Friedrich der Grosse, 1712 ~ 1786)의 치세 시기인 1765년도 쓰여진 것임을 생각해본다면, 완전히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당시 프로이센은 7년 전쟁을 통해 떠오르는 신흥강대국이 되고 있었으니, 조국의 미래에 대한 낙관이 칸트에게 있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동시에, <영구 평화론>은 프로이센이 프랑스에게 연패를 당하고 거의 몰락하던 시기에 쓰여진 저작이라는 점을 고려해 본다면, 이러한 시대상황이 칸트의 사상에도 영향이 있지 않았을까 짐작해본다. 이에 대해서는 뒤로 미루고, 여기서는 칸트의 작품 안에 담긴 유럽의 근대사상의 한계와 함께 나아가 일본이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을 통해 이루려고 했던 탈아입구(脫亞入歐)의 본질을 거칠게나마 그려보는 것으로 그치자.


 [그림] Frederick the Great( 출처 : https://withberlinlove.com/2014/08/03/sunday-documentary-frederick-the-great-and-the-enigma-of-prussia/)


 이 세상에 존재하는 성별 관계를 살펴보면, 오직 유럽인들만이 강력한 경향성의 감각적인 매력을 수많은 꽃들로 장식했으며, 그들만이 그것을 여러 도덕적인 것들과 엮어놓은 비밀을 발견할 것이다.(p94) <아름다움과 숭고함의 감정에 관한 고찰> 中


 <아름다움과 숭고함의 감정에 관한 고찰>은 칸트의 저작 중 비교적 쉽게 읽히는 책이다. 그렇기에, 다른 책과 함께 비교해서 읽는 것이 즐겁게 읽는 방법이 아닐까 생각된다. 예를 들면,  이 책에 영향을 준 에드먼드 버크의 <숭고와 아름다움의 관념의 기원에 대한 철학적 탐구>와 비교해서 읽어도 좋을 듯하다. 또한, 칸트의 생애 내에서는 초기 저작에 속하는 이 책과 비교해서 <판단력 비판 Kritik der Urteilskraft >을 보는 것도 의미있을 듯하다. 프랑스 대혁명(1789) 이후 노철학자의 아름다움과 숭고함에 대한 생각은 과연 얼마나 바뀌었는지 살펴보는 것도 재밌는 지점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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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08 15: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6-08 16: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북다이제스터 2020-06-08 21: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책을 유발 하라리의 <극한의 경험> 그리고 알랭 드 보통의 <여행의 기술>과 함께 읽기를 추천드립니다.
숭고함도 일종의 이데올로기라는 점을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
결국 요즘 주로 드는 생각은 ‘칸트가 죽어야 인류가 산다’는 느낌입니다. ‘ ㅎㅎ

겨울호랑이 2020-06-08 21:23   좋아요 1 | URL
그렇군요. <극한의 경험>은 예전에 읽어보았는데, 숭고함의 측면에서는 미처 바라보지 못했습니다. 북다이제스터님 말씀을 들으니, 다시 읽어보고 싶어지네요. 추천해주신 <여행의 기술>은 처음이지만, 곁들어 읽어봐야겠습니다. 추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 면에서 칸트가 근대를 대표하는 인물인만큼 근대를 넘어서기 위해서 칸트를 부정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러기 위해서는 ‘anti-칸트‘가 아닌 합리론과 경험론의 결합으로 만들어진 서양철학을 대신할 새로운 시대의 철학이 우리에게 필요하지 않을까도 여겨집니다. ^^:)

북다이제스터 2020-06-08 21:33   좋아요 1 | URL
네ㅎㅎ... 겨울호랑이 님께서 이미 <극한의 경험> 읽으신 거 기억하고 있습니다. 전 나름 ‘극한의 경험’=‘숭고함의 경험’으로 읽어서 기억에 남았던 것 같습니다.
칸트가 오랫동안 합리론과 이성 관련 일련의 책을 쓴 이유 중 하나가 데이비드 흄 이론을 뒤집기 위함이었다는 얘기가 있던데요, 그렇다면 칸트 이론 정반대인 흄 이론만으로도 칸트 대안으로 이미 충분할 것 같습니다. 하여튼 전 칸트가 흄을 극복하지 못 했다고 믿습니다. ^^

겨울호랑이 2020-06-08 21:43   좋아요 1 | URL
제가 아직 데이비드 흄의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자세히 읽어보지는 못해서 대략의 내용만을 알고 있습니다만, 북다이제스터님 말씀을 듣고 보니 빨리 읽어보고 싶어 집니다^^:) 다만, 흄이 나중에 회의주의에 빠진 것에 반해 칸트는 이성에 대해 낙관하는 편에 서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칸트의 흄에 대한 반박이 충분하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북다이제스터 2020-06-08 21:46   좋아요 1 | URL
제가 원래 회의주의 책을 좋아하는 탓도 있습니다. ^^
 

 보내주신 설계 의뢰 편지를 기쁜 마음으로 읽어보았어요. 오랜만에 직접 손으로 쓴 의뢰 편지를 받아서 그런지 가슴속에 등불이 켜진 듯이 따뜻한 기분을 느끼면서 여러 번 되풀이해 읽어보았습니다(p33)... 손으로 쓴 편지에서는 글쓴이의 체온과 숨결이 분명하게 전달되는 듯한 느낌이 들어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런 점을 느끼는 것이 설계할 때 중요한 단서가 될 듯싶고요.(p34) <건축가, 빵집에서 온 편지를 받다> 中


 <건축가, 빵집에서 온 편지를 받다 パン屋の手紙: 往復書簡でたどる設計依賴から建物完成まで >에서 건축가 나카무라 요시후미 (中村 好文)는 빵집 주인 진 도모노리 (神 幸紀)로부터 빵 가게의 설계를 수락하면서, 그의 손 편지에 깊은 감동을 받았음을 밝힌다. 주택 건축가인 나카무라에게 주택의 의미는 단순한 생산품이 아닌, 사람과 사람의 신뢰의 축적물이기에, 정성어린 의뢰인의 손 편지는 더욱 남달랐을 것이다. 또한, 의뢰인 진에게도 자신의 집 옆에 있는 빵 가게는 소중한 곳이기에, 그 역시 간절하게 자신과 뜻이 맞는 이를 만나고 싶었을 것이다. 이러한 진의 마음은 르 코르뷔지에 (Le Corbusier, 1887 ~ 1965)가 잘 표현한 듯하다. 


 설계 의뢰자와 건축가 사이에는 무엇보다도 서로의 마음이나 입장을 존중하고 경의를 표하는 신뢰관계가 쌓여야 하는데, 그런 점에서 손으로 쓴 편지가 큰 도움이 되었다.... 담백한 마음으로 편지를 주고받은 행위를, 하나하나 돌을 쌓아올리는 석조건축에 비유할 수 있지 않을까. 하나하나를 살펴보면 별다른 특징이 없는 돌이지만 그것들이 쌓이고 나면 견고하고 존재감이 있는 건물이 된다.(p6) <건축가, 빵집에서 온 편지를 받다> - 머리말 - 中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 소유의 안전하고 영구적인 집에서 안주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이 꿈이 도저히 실현 불가능할 때, 사람들은 감정적 히스테리를 일으키기도 한다. 자신의 집을 짓는다는 것은 마치 유언을 남기는 것과 흡사하다(p235)... 내 집을 짓는 때가 왔을 때, 그것은 석공이나 기술자의 시간이 아니라 자기의 인생에서 최소한 하나의 시 詩를 짓는 시간이다... 왜냐하면 집은 경력의 완성이며... 생활로 인해 많이 늙고 지쳐 류머티즘과 죽음... 그리고 가당치 않은 생각에 사로잡혀 버리는 바로 그 순간이기 때문이다.(p237) <건축을 향하여> 中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만나 결혼을 하더라도 좋은 시절이 없는 것처럼, 이들의 작업기간에도 갈등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비록 한 번뿐이었지만, 이들의 작은 어긋남은 건축 철학과 관련된 부분이었기에 큰 문제로 발전할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이들은 처음의 만남처럼 편지를 통해 슬기롭게 위기를 극복해 나간다.


 그동안에 주고받은 편지를 찬찬히 다시 읽어보니 설계나 공사 내용에 대해서 의견이 대립했던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딱 한 번 사소한 갈등이 있었던 것 외에는 대체로 평온한 분위기 속에서 편지를 주고받았으며, 점차 서로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고 신뢰관계가 착실하게 구축되어갔다.(p5) <건축가, 빵집에서 온 편지를 받다> - 머리말 - 中


 저는 건축가이니 역시 구조, 성능, 사용하기 편리한 정도나 내구성을 최우선으로 생각해요. 이것을 다르게 표현하자면 기능성이나 합리성이라고 말할 수 있을 거에요. 그리고 이와 같은 기능성이나 합리성이 뒷받침된 건축이야말로 '아름답다'는 신념이 제 속에 있고요... 여기서 잠시 멈춰서서 생각해보면, 혹시 도모노리 씨와 마리 씨가 추구하고 있는 것은 '분위기의 건축' '화장의 건축'이 아닐까 하는 점이에요. 이런 관계로 저는 '오래된 느낌' '소박한 느낌' '작은 집다운 모습'을 내기 위해 연출하는 것 역시 본말전도가 아닐까 생각해요. 이것도 일종의 '화장'이기 때문이죠. 이 점을 확실하게 이해해주었으면 해요.(p132) <건축가, 빵집에서 온 편지를 받다> 中


 건축가의 건축철학과 의뢰인의 방향이 맞지 않는 상황에서 이들은 자신의 생각을 상대에게 충분히 내보이며, 이해를 구한다. 오해를 풀고 상대를 존중하는 마음으로 더 신뢰관계를 다져가는 모습 속에서, 짧은 건축기간이 인생의 축소판임을 깨닫게 된다. 결혼을 통해 부부가 되어 각자의 삶을 지어내는 것도 긴 건축작업이기에, 각자의 삶의 철학을 이해하고 대화를 통해 완성해 가는 것이 부부에게 주어진 미션(mission)이 아닐까.


 '분위기의 건축' '화장의 건축'이란 말을 들으니 가슴 한구석이 찔립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저의 질문은 깊은 의미가 담긴 말이 아니라 나카무라 선생님이 설계한 건물의 그 부분이 좋다는, 결국 표충적인 질문이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굳이 이렇게까지 엄하게 지적해주시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저는 나카무라 선생님과의 사이에 틈이 생기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아요. 오히려 나카무라 선생님의 감각에 가까워지고 싶고 더욱 더 배우고 싶은 마음이지요.(p135) <건축가, 빵집에서 온 편지를 받다> 中


<건축가, 빵집에서 온 편지를 받다>를 통해서 결혼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면, 다른 한 편으로 포스트 코로나(Post Corona) 시대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된다. 전염병의 확산으로 인해 맞게 된 비대면(Un Contact)의 시대. 이 사태 이후에 분명 사회는 5G를 기반으로 자율주행, 드론을 활용한 무인택배, 사물인터넷(IoT), 로봇을 활용한 제조업, 의료제도 개편 등의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시대의 변화가 우리에게 긍정적일까? 현재까지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이 언택트 사회에서 유일하게 이득을 보는 존재는, 매년 베르사유궁에 초대되는 IT 스타트 기업과 대기업인 셈이다. 아직 인터넷 기기를 사용하지 않고 있는 인구도 수백만 명이나 되지만, 전 세계가 '초연결 사회'로 진입하는 광경을 지켜보는 에릭 슈미트 전 구글 회장은 지난 5월 10일, 그는 미국 CBS 뉴스 방송에서 "코로나 사태로 인한 자가격리 기간 동안 우리는 10년을 앞서 성장했다. 이제 인터넷을 쓰지 않는 날이 없을 정도로 중요해졌다. 인터넷 없이는 일도, 일상생활도 불가능할 것이다"라고 말하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출처 : 르몽드디플로마티크(http://www.ilemonde.com)


  만약, 그러한 삶이 우리에게 바람직하지 않다면, 우린 다른 길을 살펴봐야할 것이다. <건축가, 빵집에서 온 편지를 받다>에서는 자신의 꿈을 혼자 힘으로는 이룰 수 없기에, 건축가의 힘을 빌려 함께 만들어가는 의뢰인과 건축가의 모습이 그려진다. 건축가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회적 분업의 원칙에 따라 움직이지만, 그가 작업을 수행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은 단순한 이기심이 아닌, 감정(sentiment)의 발로라는 사실은 자본주의의 기원을 애덤 스미스 (Adam Smith, 1723 ~ 1790) 의 <국부론 An Inquiry into the Nature and Causes of the Wealth of Nations> 보다 먼저 쓰여진 <도덕감정론 The Theory Of Moral Sentiments>으로 올라가야함을 일깨운다. 이들 두 권의 책을 종합해서 보면, 애덤 스미스에게 이기심은 타인의 동감을 끌어내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아무리 인간이 이기적이라 할지라도, 타인의 행/불행에 관심을 가지게 하는 요인, 원리가 인간의 본성 속에 명백히 내재하여 있다... 타인의 슬픔을 보고 슬픔을 함께 느끼는 감정의 존재는 증명을 요하지 않는 하나의 명백한 사실이고, 그 사람이 얼마나 선하냐 유덕하냐에 따라 좌우되지 않는 본원적 감정의 하나이다.(p672) <도덕감정론> 中


 인간은 항상 다른 동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데, 단지 그들의 선심에만 기대해서는 그 도움을 받을 수 없다. 그가 만약 그들의 자애심(自愛心, self-love)이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발휘되도록 할 수 있다면, 그래서 자기가 그들에게 해주기를 요구하는 일을 그들이 자기에게 해주는 것이 그들 자신에게 이익이 된다는 것을 설득할 수 있다면, 그들의 도움을 얻으려는 그의 목적은 더 효과적으로 달성될 것이다.(p18) <국부론 (상)> 中


 우리가 매일 식사를 마련할 수 있는 것은 푸줏간 주인과 양조장 주인, 그리고 빵집 주인의 자비심 때문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이익을 위한 그들의 고려 때문이다...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한 고려에서 그는 활과 화살의 제조를 그의 주된 업무로 삼게되며, 그리하여 그는 일종의 무기 제조자가 된다. 그는 이 일에 종사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자기에에 이익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자기 자신의 노동생산물 중 자기 자신의 소비를 초과하는 잉여부분 모두를 타인의 노동생산물 중 자기가 필요로 하는 부분과 확실히 교환할 수 있다는 사실은, 각자로 하여금 특정 직업에 종사하여 그 특정 직업에 적합한,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재능과 자질을 개발하고 완벽하게 만들도록 장려한다.(p19) <국부론 (상)> 中


 아직도 코로나 19의 확진자가 계속 발생하고 있는 현 시점에서 전염병에 대한 공포가 가져온 변화가 우리에게 더 큰 위협이 된다면, 우리는 인간과 공동체의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하고 물어야 하지 않을까. 다시 말해, <국부론>의 빵집 주인의 이기심에서 발현된 사회적 분업이 산업화, 자동화라는 극단으로 치닫는 현실에서 우리는 초심(初心)으로 돌아가 동감(同感)과 우리의 공동체에 대해 다시 생각해야 할 때가 아닐까. 코로나 19가 던져준 이러한 물음에 대해 <건축가, 빵집에서 온 편지를 받다>에 담긴 삶의 모습은 이에 대한 답을 넌지시 던져주는 듯하다.

 

 가장 개인적인 것은 한 사람이 간직한 자신만의 비밀로 남아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가장 개인적인 것은 개인이라는 테두리를 부수고 나눔을 요구하며, 나아가 나눔 자체로 긍정되기 때문이다. 그 나눔에서 공동체가 비롯되고, 그 나눔은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진다.(p40) <밝힐 수 없는 공동체> 中


PS. <건축가, 빵집에서 온 편지를 받다> 속에서 <도덕감정론>, <국부론>의 내용을 떠올릴 수 있다면, 빵집 시리즈의 연장선상에서 <시골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 田舍のパン屋が見つけた「腐る經濟」>는 주제면에서 좋은 생각할 거리를 준다하겠다... <자본론> 리뷰를 채 마무리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페이퍼를 갈무리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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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06 12: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6-06 20:08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