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구멍가게를 그릴 땐 오래되어 낡고 소소해서 볼품없어 보이는 가게가 지닌 은근한 아름다움에 마음을 빼앗겼다. 40년 넘게 한자리를 지키며 뚝심 있게 살아온 주인의 삶이 궁금했다. 그러나 차츰 시간이 흐르며 그 구멍가게들이 더 이상 대물림되지 않을 것 같아 안타까웠다. 부디 구멍가게를 지키고 있는 어르신이 오래오래 건강하시길 빌었다. 우리 곁에서 완전히 사라지기 전 기록할 수 있다면, 내 그림 속에라도 남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었다. _ 이미경, <동전 하나로도 행복했던 구멍가게의 날들>, p6


 예전 시골학교 관사 옆으로 나 있는 작은 길은 동네 구멍가게로 나가는 후문이었다. 커다란 은행나무를 지나 약 30m 정도 걸어나가면 나오는 작은 가게. 없는 것 빼곤 다 있다는 시골가게 할머니는 항상 푸근하고 좋은 미소로 반겨주시곤 했었다. 초등학교 전교생의 수가 300명에 달할 때는 학교 준비물도, 간식도 이 곳에서 모두 해결했지만 이제는 전교생의 수가 그 때의 1/10 수준으로 떨어지고 준비물도 학교에서 제공하며, 인근에 편의점이 생기면서 점차 가게보다는 떡이나 은행을 파는 것으로 운영하셨던 할머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일정 부분을 모아 초등학교 장학금으로 전달해주셨던 그 어른의 모습을 뵌 지도 벌써 5년 전의 일이 되었다.







 물건은 많이 없지만, 가끔 다니는 버스를 기다리는 손님들을 위해 작은 공간과 꽃으로 아름다웠던 시골가게는 동네 어른들의 사랑방이기도 했다. 시골학교를 떠나고 다시 도시로 들어오면서 시골가게와 같은 동네가게를 볼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는데, 반갑게도 손자와 함께 지내는 노부부가 운영하시는 동네슈퍼를 볼 수 있었다. 작은 가게지만 편의점에는 없고, 대형마트에서는 필요 이상으로 많이 구입해야 하는 물건들이 여기저기 숨겨진 보물창고와 같은 곳. 이제  이 곳도 늘어가는 편의점의 파도와 코로나 19가 가져온 위기를 넘지 못하고 지난 주 문을 닫게 되었다.




 코로나 시대가 시작되던 즈음 알바를 시작해 수많은 일을 전전하며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다. 사람들은 마스크가 숨통을 막은 것처럼 힘들어했다. 일자리는 희박하거나 불안했고, 더럽거나 위험했다. 부유한 누군가는 마스크도 좋은 걸 쓰고 거리두기로 인해 자기만의 시공간에서 자신의 일에 집중할 수 있었겠지만, 근배와 같은 도시 빈민에게 코로나 시대는 전시체제와 다름없었다. 생존에 대해 고민해야 했고 감염되고 나면 부상병처럼 후송되어 재기가 불가능한 꼴이 되었다. _ 김호연,  <불편한 편의점>, p236/370


 이제는 더 이상 예전과 같은 동네슈퍼를 찾아보기 힘든 상황에서 아쉬움이 드는 것은 사람과 사람이 이어지는 연결이 점차 끊어지기 때문이 아닐까. 얼굴을 보고 거래를 하고, 안부를 묻거나 세상 이야기 하는 것을 부담스러워 하는 상황에서, '1+1'과 같은 다양항 혜택과 첨단 유행하는 상품이 갖춰졌고, 자주 바뀌는 점원과 인간관계를 신경쓰지 않아도 되는 편의점이 시골가게나 동네슈퍼를 밀어내는 것은 자연스러운 시대의 흐름일지도 모르겠다.


 편의점이란 사람들이 수시로 오가는 곳이고 손님이나 점원이나 예외 없이 머물다 가는 공간이란 걸, 물건이든 돈이든 충전을 하고 떠나는 인간들의 주유소라는 걸,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_ 김호연,  <불편한 편의점>, p280/310


 이러한 흐름에 자연스럽게 적응하면서 '사랑방'과 같은 가게 분위기를 기대하지는 않지만, 이러한 아쉬움이 채 가시기도 전에 이제는 '무인 편의점'이 등장해서 그나마 학생들이 편하게 일하는 일자리가 사라지는 것을 걱정해야 하는 빠른 변화가 다소 답답하게 다가온다. 이제는 우리가 진정으로 인간의 노동과 그 가치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사회적 합의를 도출해야 할 때가 아닐까...


 슈퍼마켓 부문에서도 온라인 주문과 배송이 인기를 얻고 있고, 코로나바이러스 위기가 한창일 때 거의 모든 사람이 집에 있어야 하자 급격히 성장했다. 소비자 선호의 변화가 계속될지는 시간이 말해주겠지만 일단 고객이 문 앞까지 식료품이 배달되는 편리함에 익숙해지면 이 변화는 꽤 오래갈 것이다. 이는 슈퍼마켓 매장의 전반적인 구조 조정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매장 뒤편에서 이루어지는 자동화가 상대적으로 더 중요해지고, 고객이 쇼핑하는 통로 공간이나 제품 진열은 점차 축소될 것이다. 결국 배송이든 픽업이든 순식간에 주문을 처리하는 물류 창고 개념의 슈퍼마켓 매장이 출현하고, 이곳에는 고객이 키오스크나 모바일 기기로 주문하기 전에 진열된 제품을 볼 수 있는 작은 공간만 있을 것이다. _ 마틴 포드, <로봇의 지배>, p89/396


댓글(4) 먼댓글(0) 좋아요(5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호시우행 2023-06-25 20:4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정말 안타까운 광경이지요,ㅠㅠ

겨울호랑이 2023-06-25 22:10   좋아요 1 | URL
사람과 옛 추억이 변화의 흐름 속에 쓸려가는 것 같아 참 아쉽습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23-07-01 17:1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립네요. 저렁 아름다운 구멍가게들이 하나둘 자취를 감춘다는 것이.....

겨울호랑이 2023-07-01 18:05   좋아요 1 | URL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도 함께 했던 시대도 모두 추억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성 니콜라오 또한 생전에 행한 무수한 선행이 알려졌고, 그 이야기들은 온 유럽으로 퍼져 나갔다. 성 니콜라오는 살아 있는 동안에 많은 도움을 준 어린이와 선원들의 수호성인이 되었다... 12세기 초부터 프랑스와 벨기에 지방에서는 성 니콜라오 축일 전날인 12월 5일에 수도자들이 가난한 어린이들에게 선물을 주는 풍습이 생겼다. 당시 사람들은 성 니콜라오가 굴뚝을 타고 내려와 양말이나 신발에 선물을 놓고 간다고 아이들에게 이야기했다... 그렇게 유럽의 많은 사람에게 사랑을 받은 성 니콜라오의 라틴어 이름은 '상투스 니콜라우스(Sanctus Nicolaus)'인데, 네덜란드 사람들은 '신터 클레스(Sinter Claes)'라 불렀다. 그리고 산타클로스의 붉은색 옷은 성인의 축일(12월 6일)에 선물을 나눠 주던 주교들이 입던 붉은색 주교복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_ 황중선, <굴뚝으로 들어간 니콜라오> , p200


 이번 주에 읽은 책 <굴뚝으로 들어간 니콜라오>는 가난한 이들을 성(聖) 니콜라오스(Saint Nicholas of Myra, 270 ~ 343)에 대한 이야기다. 부자로 많은 유산을 받았지만, 그 유산을 모두 사회적 약자를 위해 사용한 성인의 삶과 함께 오늘날 크리스마스의 산타 할아버지의 기원으로 연의에게 인상깊게 다가온 것 같구나. 이제는 5학년이 되어 산타 할아버지를 믿지 않게 되었지만 말이야. 


 가난한 이들을 위해 자신의 것을 아끼지 않고 나누는 성인의 삶이 우리에게 많은 모범이 되고 우리가 그런 삶을 본받도록 하자. 끝. 이렇게 하기에는 조금 아쉬움이 남으니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해 볼까. 연의는 의적(의로운 도적)이야기를 들어본 적 있지? 나쁜 사람들을 혼내주고 재물을 빼앗아 약하고 힘없는 이들을 도와주는 의적들의 이야기. 서양에는 로빈 후드. 우리 나라에는 홍길동 등이 대표적인 의적들이야. 니콜라오 성인과 의적들은 모두 가난한 이들을 도와 준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지만, 다른 점도 있어. 니콜라오 성인은 자신의 것을 나누는 반면, 의적들은 다른 사람의 것을 빼앗아 나누지. 좋은 행동(선행)을 위해 다른 사람의 물건을 빼앗는다면 그것을 의로운 행동이라고 할 수 있을까? 연의가 이 점에 대해 한 번쯤 생각해 보면 좋겠어.


 한 가지 더. 책에서 처럼 산타클로스의 기원이 성 니콜라우스인 것은 사실이지만, 오늘날 우리에게 친숙한 빨간 옷을 입은 하얀 턱수염의 뚱뚱한 할아버지의 모습의 이미지가 만들어진 것은 사실 코카콜라(Coca Cola) 때문이야. 시원한 음료인 코카콜라를 사람들이 겨울에도 찾도록 하기 위해 만들어 낸 이미지. 이와 관련해서는 아래 자료로 보면 좋을 것 같아. 어쩌면, 산타할아버지가 없다는 충격적(?)인 사실만큼 새롭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우리 주변에 익숙한 문화들 중 많은 부분이 기업들의 광고와도 관련있다는 점을 가볍게 생각해보도록 하자. 이와 비슷한 것으로 발렌타인 데이(Valentine Day), 빼빼로 데이가 있어.


출처 : 우리가 알고 있는 산타클로스! 코카-콜라가 만들었다고? https://www.coca-cola.co.kr/stories/since-1886/funfact-santa-claus?utm_source=google&utm_medium=GDN



 이제 날이 많이 더워졌구나. 조금만 움직여도 땀이 나는 여름철 우리 모두 건강하게 보내자! 사랑하는 아빠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약속... 잊지마. 채록아. 내가 기억을 잃어도 넌 계속 나아가고 멈추지 않을 거라고 가슴 깊이 기억할게.... 다시... 이런 말을 해줄 수 없게... 난 곧 다 잊겠지만. 그래도 넌 잊지마. " _ HUN, 지민, <나빌레라 커튼 콜>, p174


 커튼콜(curtain call). 오페라, 발레, 연극, 뮤지컬 등에서 가수, 발레 댄서, 배우, 지휘자, 연출가가 무대에 나타나 관객에게 인사하는 것을 말한다. (출처 : 위키백과)


 <나빌레라 커튼 콜>에서는 제목 그대로 <나빌레라>의 모든 이야기가 끝나고 그 후의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방황하던 청소년이었던 채록이는 발레단은 맡고, 예전의 자신처럼 방황하는 후배 지슬이를 이끌어 주면서, 할아버지로부터 받은 사랑을 보답해준다. 연의가 독후감에서 <나빌레라 커튼 콜>에 대한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아빠는 다른 이야기를 해볼까 해. 바로 할아버지가 걸린 알츠하이머라는 병에 대해서야. 알츠하이머는 치매를 일으키는 뇌 질환으로 흔히 기억력을 점차 잃는 것으로 연의도 알고 있을거야. 그런데, 단순히 덕출 할아버지는 기억력을 잃기만 한 것일까? 


 웬디 미첼이라는 작가가 쓴 <치매의 거의 모든 기록>에서 작가는 치매에 걸린 환자이기도 해. 마치 <나빌레라>에서 덕출 할아버지가 기억을 잃지 않기 위해 수첩에 빼곡히 메모를 기록했던 것처럼, 웬디 미첼 작가도 글을 썼단다. 차이가 있다면, 덕출 할아버지는 치매에 걸렸다는 것을 거부하고 치매를 이겨내기 위해 발레를 했다면, 미첼 작가는 치매에 걸린 삶을 받아들이고 이에 대한 글을 썼다는 점이야. 우리는 작가의 글을 통해서 덕출 할아버지가 발레를 배우면서 마주했던 어려움에 대해 더 알 수 있게 돼.


 사람들은 치매라고 하면 바로 기억력과 연관시킨다. 반면 치매가 기억력과 상관없는 감각이나 감정, 의사소통 같은 것들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 치매 진단을 받았다면 내부와 외부 환경을 그에 맞게 바꿔야 하며, 그렇게 그것을 조금 바꾸는 것만으로도 큰 효과를 낼 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도 거의 없다. _ 웬디 미첼,  <치매의 거의 모든 기록>, p14/262


 <나빌레라>에서 할아버지는 필사적으로 메모를 하면서 기억을 하려고 했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단순히 기억이 나지 않아서 메모를 한 것일까? 아빠는 기억이 나지 않은 부분도 있겠지만. 병에 걸렸다는 사실이 가져다 주는 슬픔, 실망 등의 감정을 이겨내기 위해 할아버지가 메모를 한 것은 아니었을까도 생각하게 되었어. 비록 이 부분은 크게 강조되지는 않지만 말이야. 


 <나빌레라 커튼 콜>에서는 항상 멍하게 앉아 계신 할아버지의 모습이 주로 그려지지? 그리고, 그 곁에서 알아듣지 못하시는 듯 하는 할아버지 곁에서 속삭이듯 말하는 채록이의 모습이 언뜻 이해가 안 될 수도 있을 것 같아. 할아버지가 알아들으실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그렇지만, 아래 글을 읽어보면 채록이는 아주 잘 하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된단다. 


 의사소통은 온갖 형태로 이루어진다. 간혹 환자가 치매 때문에 언어 능력이 많이 쇠퇴하고 심지어 아예 말을 못하게 되면 환자에게 말하기를 중단하거나 방문을 중단하고 식탁에 환자를 부르지 않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잘못된 선택이다. 그들은 비언어적 표현을 전혀 생각도 못하지만, 우리는 평생을 다른 사람과 의사소통하면서 그것을 필수적으로 사용한다. 남편과 아내 사이에 흘끗 오가는 시선에는 천 마디의 의미가 담겨 있고, 힘든 하루를 보낸 그들의 목소리에는 염려가 담겨 있다. _ 웬디 미첼,  <치매의 거의 모든 기록>, p102/262


 거의 모든 기억을 잃고 마음도 잃어버린 것처럼 보이는 할아버지. 그렇지만, 멍하게 하늘만 바라보는 할아버지도 실은 모든 것을 들으시고, 함께 기쁨과 슬픔 등을 나누며 가끔 표현하는 순간이 찾아올 때 이 모든 것을 주위 사람과 나눌 수 있다는 것. 덕출 할아버지가 걸린 치매라는 병에 대해 조금 알고 책을 읽는다면, 이야기가 더 연의 가슴에 깊게 와 닿을 것 같아.


 채록아... 이렇게 어쩌다 네가 떠오르는 기적 같은 순간이 찾아오면... 마음이 한가득 벅차오른다. 힘없고 떨리는 손으로 언제 기억이 다시 어두워질지 몰라 길게 마음을 전하지도 못하는구나. 걸어도 걸어도 끝이 안 보이겠지만 그 나아감에 용기를 잃지 말기를... 그리 믿고 한걸음 내디딜 수 있다면 우린 분명 어제보다 꿈에 닿아가고 있구나... _ HUN, 지민, <나빌레라 커튼 콜>, p340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치매에 걸린 덕출 할아버지의 무표정이 할아버지가 모른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과 말하지 못하는 동물과 식물도 각자의 방식으로 감정을 표현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반드시 말로만 서로의 생각과 감정이 전해지는 것은 아니지 않을까.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작은 행동 하나하나가 연의의 마음을 전하는 방법이 될 수 있다고 아빠는 생각해. 


 이제 5월도 다 지나가고 6월이 시작되는구나. 벌써 일년의 절반이 다 지나갔어. 이번 한 주도 건강하고 즐겁게 잘 지내보자. 사랑하는 아빠가.


 나는 매일 이렇게 치매와 영원한 추격전을 벌이지만, 내가 지는 날이 너무 많다. 그러나 그날은 치매의 실수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겁을 먹는 대신 오래전에 헤어져서 많이 그리웠던 사람의 방문을 받는 축복을 받았다. 아버지는 입고 있는 옷을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았고, 나 역시 화창한 오후에 식은 찻잔을 들고서 만족스러웠다. 찻잔을 내려다보았다가 다시 시선을 올렸을 때는 아버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_ 웬디 미첼,  <치매의 거의 모든 기록>, p52/26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문명론 개략 후쿠자와 선집 1
후쿠자와 유키치 지음, 성희엽 옮김 / 소명출판 / 2020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지금 일본국 사람을 문명으로 나아가게 함은 이 나라의 독립을 지키기 위해서일 따름. 나라의 독립은 목적이고, 지금의 우리 문명은 이 목적에 다다르기 위한 수단이다. 지금의 우리 문명이라고 말하는 것은 문명의 본지가 아니라, 우선 일의 첫걸음로서 자국의 독립을 도모하고 그 밖의 것은 두 번째 걸음으로 남겨서 다른 날에 이루려는 취지이다. 생각건대 이와 같이 논의를 한정하면 나라의 독립은 곧 문명이다. 문명이 아니면 독립을 지킬 수 없다. _ 후쿠자와 유키치, <문명론 개략>, p535


 후쿠자와 유키치 (福澤諭吉, 1835 ~ 1901)가 <문명론 개략 文明論之槪略>에서 말하는 문명(文明)은 일반적인 의미와는 조금 다르다. 나라의 독립을 지키기 위한 문명,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된다. 후쿠자와는 서두에서 문명을 우열(優劣)에 따라 구분하고, 앞선 문명인 서구 문명을 따라가는 것을 지식인의 과제로 정의한다. 


 지금 세계의 문명을 논하면, 유럽 국가들과 아메리카합중국을 최상의 문명국이라 하며, 투르크 土耳古, 지나, 일본 등 아시아의 여러 나라는 반개화국 半開國이라고 말하고, 아프리카 阿非利加 및 오스트레일리아 墺太利亞 등은 야만국이라고 일컫는다(p108)... 사물의 이치를 조금이나마 아는 자는 그 이치를 더 깊이 앎에 따라 점점 더 자기 나라의 형국을 분명히 알게 되고, 더 분명히 알게 됨에 따라 서양 나라들에 미치지 못함을 점점 더 깨달아 이를 걱정하고 비관하며, 때로는 그들에게 배워 모방하려 하고 때로는 스스로 노력하려 이에 대립해보려고도 하는 등 아시아 나라들에서 식자 識者들의 평생 걱정은 오직 이 일 하나에 달려 있는 것 같다. _ 후쿠자와 유키치, <문명론 개략>, p109


 이 책 전체에 걸쳐 논하고 있는 이해득실은 모두 다 유럽문명을 목적으로 정하여 이 문명을 위해서 이해가 있고 이 문명을 위해서 득실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니 학자들은 그 큰 취지를 그르치지 말지어다. _ 후쿠자와 유키치, <문명론 개략>, p117


 그렇다면, 반개화국이나 야만국의 지식인들은 왜 문명화 - 서구화 - 되어야 하는가? 그것은 국체 國體 - 나라 - 를 지키기 위해서다. 보다 앞선 과학기술을 앞세워 무력을 갖추고 일본을 위협하는 외세 - 외부문명 - 를 이겨내기 위해서는 그들과 같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문명론 개략>의 주된 내용이다. 


 일본 사람의 의무는 오직 이 국체를 지키는 일 한 가지뿐, 국체를 지킨다 함은 자기 나라의 정권을 잃지 않는 것이다. 정권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인민의 지력 智力을 높이지 않으면 안 된다. 그 항목은 매우 많지만, 지력을 계발 發生하는 길에서 첫 번째로 급한 일은 고습 古習에의 혹닉을 깨끗이 쓸어버리고 서양에 널리 퍼져있는 문명의 정신을 받아들이는 데 있다. _ 후쿠자와 유키치, <문명론 개략>, p150


 국체 國體. 체 體는 합체 合體라는 뜻이고, 또 체재 體裁라는 뜻이다. 사물 物을 모으고 이를 온전하게 하여 다른 사물과 구별할 수 있는 형체 形를 말한다. 따라서 국체란 한 종족 一種族의 인민이 서로 모여 고락 憂樂을 함께하고,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것보다 따뜻하며, 서로 상대방에게 힘을 쏟음이 다른 나라 사람들을 위해 하는 것보다 열심이고, 한 정부 아래 살면서 스스로 지배하고 다른 정부로부터 제어받음을 달가워하지 않고, 화복을 함께 감재하며 스스로 독립함을 말한다. _ 후쿠자와 유키치, <문명론 개략>, p136


 후쿠자와 유키치는 <문명론 개략>에서 탈아입구(脫亞入歐)를 해야하는 이유를 국체를 보존하고 독립을 유지하기 위함이라고 말한다. 이를 위해서 지식인들은 반개화상태에서 벗어나 선진문명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이러한 기풍을 전체 인민으로 학장시켜 마침내 문명 전체의 변화를 이끌어내야 함을 강조한다. 


 전국 인민의 기풍을 일변 一變하는 것과 같은 일은 지극히 어려우며 하루아침 아루저녁의 우연으로 공을 세울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단 하나의 방법은 인간의 본성 天然에 따라 해 害를 없애고 장애를 멀리하며, 인민 전체가 스스로 지덕을 계발하도록 하여 스스로 자신의 의견을 고상한 영역으로 나아가도록 하는 데 있을 뿐. 이와 같이 천하의 인심을 일변하는 실마리가 열리면 정령과 법률의 개혁도 차츰 이루어지고 장애도 사라질 것이다. _ 후쿠자와 유키치, <문명론 개략>, p123


 천 번을 갈고 백 번을 단련하여 겨우 한 때의 이설 異說을 누르고 얻은 것을 국론 혹은 중설 衆說이라고 이름할 뿐, 이것이 바로 신문, 연설회가 성행하고 다중의 입 衆口이 떠들썩한 까닭이다. 인민은 분명 나라의 지덕에 의해 편달되기 때문에, 지덕이 방향을 바꾸면 인민 또한 방향을 바꾸고, 지덕이 파당으로 나뉘면 인민 또한 파당으로 나뉘고, 진퇴와 이합집산 모두 다 지덕을 따르지 않음이 없다. _ 후쿠자와 유키치, <문명론 개략>, p236


 후쿠자와 유키치는 <문명론 개략>을 통해 단순히 피상적인 주장만을 외치는 것이 아니라, 서구의 정치, 종교, 과학의 역사와 일본 역사의 비교를 통해 나름 치밀하게 서구화를 해야 하는 당위성을 이끌어낸다. 그러한 저자의 논리를 일본이 근대화로 나아갔고, 후에 제국주의를 거쳐 군국주의로 나아갔음을 알고 있는 독자들의 시각에서 바라봤을 때 발견되는 위험요소가 있는 것이 사실이고, 또한 서구 계몽주의자들의 논리를 그대로 옮겨온 것과 같은 오리엔탈리즘 등의 요소는 책의 논리를 약화시키는 것이 사실이다. 


 일본문명은 서양문명보다 뒤처져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문명에 앞뒤가 있다면 앞선 자는 뒤처진 자를 다스리고 制 뒤처진 자는 앞선 자로부터 다스려지는 게 이치다(p485)... 무릇 문명이라는 것 物이야 지극히 광대해서 대개 인류의 정신이 도달하는 것은 모조리 그 이 범위 區域 안에 들지 않는 게 없다. 외국에 대하여 자국의 독립을 도모하는 것 따위는 본래 문명론 중에서도 아주 사소한 일개 항목에 지나지 않지만, 문명의 진보에는 여러 단계가 있으므로, 진보의 단계에 따라 그에 맞는 조치가 취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_ 후쿠자와 유키치, <문명론 개략>, p486


 개인적으로 <문명론 개략>을 읽으며 개화기 일본 지식인들의 사상과 함께 일본 근대화의 한계 등을 함께 엿보게 된다. 생존을 위한 이른바 문명화. 서구화를 이루기 위해 전통을 야만으로 규정하고, 서구 문명을 닮아가기 위한 노력이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을 빠르게 제국주의 열강으로 올라서게 한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들의 근대화는 과연 제국주의를 넘어선 비전을 제시할 수 있었는가.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의 몰락으로 끝난 일본의 문명화 노력은 오늘날에도 이어지는 영원히 거북이를 이기지 못하는 아킬레스, 제논의 역설을 떠올리게 한다...


 서양 인민의 권력은 쇠와 같아서 이를 팽창시키기도 아주 어렵고 이를 수축시키는 것도 또한 결코 쉽지 않다. 이에 반해 일본 무인의 권력은 고무와 같아서 그들이 서로 접하는 곳의 물질에 따라서 수축과 팽창의 형태가 다른데, 아래와 접하면 크게 팽창하고, 위와 접하면 갑자기 수축하는 성질이 있다. 이처럼 치우쳐서 수축하고 치우쳐서 팽창하는 권력을 한 덩어리 一體로 모아서 이를 무가의 위광 威光이라고 이름하며, 그 한 덩어리의 위광으로부터 억압을 받는 자가 무고한 소민 小民이다. _ 후쿠자와 유키치, <문명론 개략>, p449

감히 한 마디 말을 내걸어 천하 사람들에게 묻겠다. 지금 이때를 맞아 앞으로 나아갈 進것인가 아니면 뒤로 물러설 退것인가, 나아가 문명을 좇을 것인가 아니면 물러서서 야만으로 되돌아갈 것인가, 오로지 진퇴 進退라는 두 글자가 있을 뿐이다. - P107

덕의의 도에 관해서는 마치 옛사람 古人에게 전매 권한을 빼앗겨 후세 사람은 그저 중매인 같은 일이나 하는 것 외에는 다른 수단이 없다. 이것이 바로 예수와 공자 이후에 성인이 없는 까닭이다. 따라서 덕의에 관한 일은 후세에 이르러 진보할 수가 없다. 개벽한 처음 때의 덕 德이나 오늘날의 덕 德이나 그 성질 性質에는 차이가 있을 수 없다. 지혜는 말하자면 그렇지 않다. 지혜의 항목이 날로 증가하여 그 발명의 수가 많음은 예로부터 일일이 거론할 겨를이 없으며 앞으로의 진보 또한 가늠할 수 없다. - P290

사람의 정신이 발달함에는 한계가 있을 수 없으며, 조물주 造化의 장치 仕掛에는 법칙 定則이 없을 리 없다. 무한한 정신으로 유한한 이치를 궁리하여 끝내는 유형, 무형의 구별 없이 천지 사이의 사물을 모조리 다 사람의 정신 안에 포괄 包羅하여 빠뜨리는 게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 - P333

최종 목적을 자국의 독립으로 정하고 마침 지금의 인간만사를 모두 녹여 하나로 되게 하고 이 모든 것을 다 저 목적에 다다르기 위한 수단으로 삼을 때에는 그 수단의 다양함에 제한이 있을 수 없다. 제도든, 학문이든, 상업이든, 공업이든, 하나같이 이 수단이 아닌 것은 없다. - P53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인체 생리학 교과서>와 <혈관/내장 구조 교과서>, <뇌/신경 구조 교과서>는 서로 보완하는 내용으로 구성된다. 전반적으로 <인체 생리학 교과서>가 인체의 기능과 작용에 초점을 맞춘 동(動)적인 부문에 초점을 맞췄다면, 구조 교과서 시리즈는 세부 기관의 명칭과 위치 등 정(靜)적인 부분에 무게를 둔다. 


 마치 경제학에서 소득 활동이 flow 개념이고, 자산 부문이 stock인 것처럼 이들 책들은 내용면에서 상호 보완 관계에 있다. 내용면에서 이러한 차이가 있다보니, 일반 독자의 관점에서는 아무래도 구조 교과서는 보다 전문용어 설명 위주로 구성되어 다소 어렵게 느껴지는 반면, 생리학 교과서는 상대적으로 쉽게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물론, 전문가들 수준에서 본다면 구조 교과서의 내용 역시 낮은 수준이겠지만. 


[사진] <혈관/내장 구조 교과서> 中 심장 관련 부문


[사진] <인체 생리학 교과서> 中 심혈관 관련 부문


 이미 상식적으로 충분히 알고 있는 내용이지만, 세포를 만들어내거나 에너지를 얻기 위한 소화활동과 노폐물을 배출하기 위한 배설활동, 세포의 활동을 위해 산소와 이산화탄소를 교환하는 호흡활동 등이 여러 기관들의 협조와 연결을 통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본문 중에서 가장 인상 깊은 부문은 '혀'와 관련된 부문이었다. 예전 과학시간에 혀에서 맛을 느끼는 부분에 대한 설명과 그림이 당연하게도 따라왔었는데, 본문에서는 이에 대한 내용을 찾을 수 없다. 아마도 이전까지 당연하게 여겨졌던 맛을 느끼는 혀 부위 지도가 잘못된 것으로 검증되면서 이제는 기각된 가설이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과학기술의 발전과 함께 많은 것이 새롭게 밝혀졌지만,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 중 과연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있을까? 예전에는 지방이 비만의 원흉으로 지탄을 받다가 어느 순간 좋은 지방과 나쁜 지방으로 구분되고, 이제는 비만의 원인이 탄수화물로 상식이 바뀌는 것을 보면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특히 건강관련 상식) 중 상당 부문은 의도된 마케팅이나 연구활동의 결과물은 아닌가를 생각하게 된다...


[사진] <혈관/내장 구조 교과서> 중 혀(tongue) 관련 내용



 


댓글(2) 먼댓글(0) 좋아요(4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베텔게우스 2023-05-16 21: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부분에 공감합니다.. 요샌 커피 연구가 가장 심한 것 같습니다.

겨울호랑이 2023-05-16 22:22   좋아요 1 | URL
네... 요즘은 많은 정보가 쏟아져 나오고, 그 정보에 대한 충분한 검증이 언론이나 학계에서 이루어지지 않다보니 대중들이 유행에 쓸려다는 것 같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더 깊이 있는 공부를 통해 흔들리지 않는 중심을 잡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