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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으로 가르치기 - 학생이 스스로 생각하고 배우는 핀켈 교수의 새로운 교육법
도널드 L. 핀켈 지음, 문희경 옮김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0년 5월
평점 :
절판
알묘조장이란 말이 있다.
揠苗助長(알묘조장)[揠:뽑을 알, 苗:싹 묘, 助:도울 조, 長:길 장] 성공을 도와준다는 것이 싹을 뽑아올려 자라게 해서 결과적으로 망치는 일.
한국의 교육이란 것이 이런 것 아닐까?
성공을 하려면 이렇게 해야해! 이러면서 비교육적인 일을 자행하는 일, 그걸 교육이란 이름으로 덧칠한 역사.
그래서 과외를 하는 것이고, 치맛바람을 일으키고 촌지를 전달하는 것이고, 체벌이란 이름의 폭력을 용인했던 것이다.
어른들의 가치관을 내세우면서 그대로 따라하라는 산업사회의 패러다임에 따른 가르침.
서태지가, 됐어, 됐어 이제그런 가르침은 됐어~하고 소리지른 게 벌써 17년이나 지났는데, 매일아침 7시 30분까지 우릴 이 좁은 교실에 몰아 넣는... 어른들은 그대로를 넘어서, 아이들을 지옥으로 집어넣고 있는 것이다. 여고괴담과 고사 같은 영화도 일상이 되어버린 현실...
내가 초중고대원까지 18년 반을 학교를 다니면서, 정말 인상적인 수업은 딱 한 강좌 들었다.
대학원에서 깐깐하다고 소문난 교수님 강의였는데, 괜히 공부하고 싶단 생각에 내가 좋아하지도 않는 국어학 강좌를 신청했다.
첫시간 갔더니 학부에서 갓 올라온 20대 중반의 남학생 하나, 여학생 둘, 그리고 노땅 나 하나... 이랬다.
교사 원생들은 절대로 신청하지 않는 강의인데 신청한 나를 교수님도 조금 의아하게 생각한 듯...
뭐, 첫 시간 오리엔테이션 시간부터 빡셀 것으로 느껴졌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 강의만큼 나를 단련시킨 것은 없었던 것 같다.
매 시간 자료를 요약해서 발표해야 하고, 따로 제시한 과제도 레포트로 작성해서 내야 했는데,
내가 그 강의를 유독 인상깊게 여기는 것은, 그 교수님이 내 글을 참 좋아해 주셨다는 데 요인이 있다.
그 교수님이 공저자로 펴낸 책에 리뷰를 올리기도 했는데, 딱 내 글을 보시더니 정선생 글이 참 맛있다는 평을 해 주셨던 거다.
학부에서 갓 올라온 어린 원생들이야, 경험이 부족하니 교수님이 던져주는 과제를 버거워하기 바빴지만,
직장인인 나야 15년 이상의 경력자였으니 과제를 하는 일도 수월했다.
결국, 그 강의는 교수님과 나의 대화시간 비슷하게 흘렀고, 논문도 교수님 강의의 한 꼭지를 참고하여 쓰게 되었다.
불행히도... 그 교수님이 젊은 나이에 작고하셨다는 풍문을 술자리에서 듣고 말았지만, 세상은 그런 것이니 유감은 없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 교수님이 불현듯 그리워 눈물이 다 나려 한다.
고인이 되었단 소리 들었을 때야 뜨악해서 별 감정을 느끼지 못했는데, 대학원의 한 강좌로 만난 인연이 이렇게 교수님 강의를 들은 지 7년이 지나서 눈물을 빼는 일도 있다. 살다 보면 별 일이 다 있는 법이다.
이 책의 요점은, 교사나 교수는 지적인 쇼를 하기 쉬운 직업인데, 아무리 명강의라 할지라도 학생에게 바로 교육의 효과가 드러나는 것은 아니라는 것.
핀켈 교수가 집착한 듀이와 삐아제에게서 '경험'을 통한 학습, 그리고 '인간 지능에 대한 신뢰'가 만든 것이 '마우스 셧'이란 도구로 가르치기,를 이 책의 제목으로 삼게 한 것이다. Teaching with your mouth shut!
가르치는 일을 주로 입으로 나불대며 지식을 읊는 것으로 여기는데, 거기다 입을 다물라는 도구를 붙였으니, 한 문장에 모순된 두 주장을 담은 <역설>로 보여지지만, 책을 읽노라면, 결코 그 주장이 역설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한국 교육의 맹점은 학교교육이 '잘못된 평가 방식'에 휘둘리고 있다는 것이고,
그 잘못된 평가 방식이 모든 학생을 '줄세우기'에 치우쳐, 불필요한 부가적 학습이 과잉 생산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누구나 알지만, 손을 대는 일은 쉽지 않다.
학교 현장에서, '자율'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지만, 그것은 등록금 자율화나 학생 선발, 수업의 양 같은 것을 자율로 한다는 데 있다. 학교의 교육과정을 자율적으로 편성하기엔 아직도 갈 길이 멀다. 입학사정관제의 미래가 자율화와 맞물려야 하는 것인데도, 그런 철학적 기초를 이해한 입학사정관이 얼마나 학생을 선발할 수 있는지 의문이다.
단적으로, 모든 학생을 입학사정관제로 입학시킬 요량이 아니라면, 수능과 내신, 논술 등 평가에 학교 교육과정이 얽매일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렇지만, 틈이 없는 것은 아니다.
동아리 활동을 할 수도 있고, 분명히 학교에는 이런저런 수업 시간을 활용하여, <정해진 커리큘럼>대로 독서를 하고, 그 독서 내용을 토대로 토론과 글쓰기를 하고, 교사와 학생, 학생과 학생간에 의견을 공유하는 선생님들도 세상에는 많지 않지만 존재하고 있는 것도 현실이다. 물론 <입시 지상주의>가 대세인데, 그런 활동들이 <입시에 지극히 도움>이 되었다는 논문이 나오기 전에는 그런 것들에 초점 맞추기 어렵겠지만, 변화는 언제나 밑에서 일어나야 하는 법이다.
핀켈 교수는 <일리아드>같은 유명한 고전을 통하여 학생들이 독서, 토론, 작문, 편지쓰기 활동 등을 자발적으로 <세미나>형식으로 이끌어 내는 방식을 제시한다. 교사나 교수가 굳이 입을 열어 설명하는 일이 불필요하다는 것이다.
좋은 책은 교사의 설명 없이도 교육적 기능을 발휘한다.(73)
이 한 마디가 이 책의 가치를 90%는 제시한다. 나머지는 그 좋은 책을 설명하지 않고, 어떻게 교육적으로 활동하도록 학생들을 이끌 것인가... 하는 문제다.
학생들의 세미나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서, 교사는 '권력'을 행사하지 않지만, '권위'를 얻게 된다는 말은 충격적이다.
그렇지만, 교사는 분명히 권력을 행사한다. 수업 방식을 결정하거나 수업 내용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교사의 침묵 뒤에 나오는 이야기들은 훨씬 '권위'를 얻는 말이 되어 인상적인 교육이 이뤄진다는 것.
관심, interest이란 단어는 라틴어의 '사이 +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다.
사이에 있다, 곧 욕구와 충족 사이에 관심이 있다는 것.
문제를 해결하려면 평소 습관을 바꾸고 행동 양식에 변화를 줘야 한다.(114)
글 속에 파묻혀있어 드러나지 않지만, 관심과 변화, 삶에서 놓치기 쉬운 덕목이 아닌가 싶어 남겨 둔다.
그래서 루소는 '현재의 관심이 배움의 가장 큰 동기이자 끝까지 이끌어줄 유일한 동기'라는 말이 유의미한 것이다.
지도 교사는 사전에 충분히 자료를 검토하고 섭렵하는 능력을 갖춰야 한다.
그렇게 지도자료를 제시하고, 침묵하면, 나머지는 학생들이 길을 찾아 간다.
그 길에서 지도자는 평가 제시도 하고, 편지를 통하여 정의적 충동질로 강화를 하기도 하는 것이다.
나는 이제 빨간 펜을 들고 학생의 글을 수정하거나 삭제하지 않는다.(150)
학생들도 내가 얼마나 시간과 공을 들여서 보고서를 읽는지 잘 안다.
편지를 통해 내가 자기 글을 진지하게 읽는다고 여겼다. 다음 번 보고선 더욱 진지해진다.
아, 성의없는 코멘트가 학습 의욕을 북돋우지 못할 것은 뻔한 일이다.
글쓰기는 발견과 소통의 길로 이어진다고 가르친다.(159)
발견의 길에서는 진지한 질문에서 출발해서 질문을 마음 깊이 새긴 후 교재로 돌아와 형식과 문체에 구애받지 않고 글을 쓰면서 생각을 발전 시킨다. 발견의 길의 최종 목적지는 논제를 찾는 것, 곧 질문에 답하는 것이다... 그리고 보고서는 배움의 최종 결과물이자 결과물에 도달하는 과정이며, 공동 탐구와 집단 탐구 과정으로 글쓰기를 쓰게 하여, 서로 돌려보기 위해 글을 씀으로써 결과를 공유하게 되었다.
수업을 글쓰기 모임으로 운영하면 '조용한 학생'도 더이상 '이류 시민'으로 머물지 않게 된다.(166)
대학에서 배운 것보다 사회과학 세미나를 통해 배운 것이 더 많은 나로서도, 지금의 토론 능력이나 리뷰 작성의 틀 같은 생각은 모두 대학의 친구와 선배들에게서 배운 것이나 다름없다.
글을 쓰고, 말을 하는 발견과 소통을 통해 이류시민에서 '대자적 자아'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타인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 이런 것을 고려하면서 성숙하게 대화하게 되는 자아 말이다.
보통 회의, 라고 하면, 엄격한 절차적 구성을 가르쳐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회의는 절차보다는 발견과 소통에서 나오는 것인데 말이다.
경험을 제공하고 생각을 불러 일으켜라!(287)
이 책의 주제를 한마디로 함축한 말이다. 교수는 말로 인기를 끌 것이 아니라, 유의미하다고 생각된 경험을 조직하에 제공하고, 학생들에게 생각을 불러 일으켜 표현하고 소통할 수 있는 방식의 교수법을 이끌어야 한다는 것.
교육은 말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이고 건설적인 과정(296)이라고 듀이가 말한 것이 1916년이라고 한다.
세계대전 이후의 진보주의 교육이 경험을 중시하게 하고, 결과물을 만들어 내는 일에 집착한 결과라고 볼 수 있지만,
미래 교육을 내다보게 하는 이론적 토대로서 듀이와 삐아제의 이야기들은 한국적 토양에서 상당히 유의미하다.
세계에서 가장 아이를 낳지 않는 나라.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50% 이상이 4년제 대학에 진학하는 나라.
그렇지만, 경쟁만 있고 경쟁력은 없는 교육.
한국의 교육이 붕괴되는 것은, 내부에서가 아니라 외부에서이기 쉽다.
이미 한국의 교육을 거부한 사람들이 자식들을 외부로 내보내고 있지만,
외국 학교들이 한국에 들어오면, 한국의 학교들은 스르르 사상누각의 붕괴를 보여줄 것이다.
내가 근무하는 학교도 내년부터 자율형 공립고로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런 철학적 토대를 놓고 고민하는 사람들은 잘 보이지 않는다. 찾아보면 있긴 할 것이다.
철학적 논의가 제도적 실험으로 이어지도록 움직이는 사람이 될 것인가, 현실에 안주하며 개인적 영달을 꿈꿀 것인가...
요즘 화두 하나 붙안고 잠을 못 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