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기와 3 마음이 자라는 나무 37
차오원쉬엔 지음, 전수정 옮김 / 새움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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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그랬다.
'교육'이란 말이 잘못되었다고...
'가르쳐 기르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자라는 것을 보는 일이어야 한다고...

그래서 <교육자>, <교사>보다는 <선생>이 더 적절한 어휘라고.
'가르쳐 기르는 이, 올바른 길을 가르치는 이'의 역할보다는, '먼저난 이일 뿐'인 동등한 입장.
그러나 선배이기에 후배의 길을 바라보는 것이다. 사랑과 인내를 가지고...

문화 혁명기, 중국의 청소년들의 성장을 담은 소설이다.
고등학생용 우리말 우리글에 수록되어 많은 학교에서 구입해 둔 듯한데,
문화 혁명이 한국 청소년들에겐 생소하기 그지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특히 제3권은 고교생으로서의 <하이틴>으로서, 이성에 눈뜨는 소년들의 모습을 잘 그리고 있다.
그 하이틴들은 성공적으로 성장하기보다는, 씁쓸한 눈물을 머금고 쓰러진다.
가난과 적은 기회로 인하여 평탄한 교육의 기회를 갖지 못하는 아이들.
인습과 현실 사이에서 인격을 빼앗긴 아이들...

그러나, 그들은 쓰러지면서도 자란다.
가난도, 인습도, 시골이란 환경도 그들에겐 척박하지만 성장의 토양이 되는 것이다.
60년대 성장했다면 지금은 환갑을 바라볼 연배가 되었을 것이다.

그들에게 문화 혁명기는 어떤 빛깔일까?
중학생처럼 얼치기 청소년기의 빨간 기와와,
고등학생의 단맛, 쓴맛을 좀 아는 까만 기와의 추억은...

나의 학창 시절이 쓴맛 중심으로 기억나지만, 간혹 아스라하게 떠오르기도 하는 것은,
그 척박한 토양이 나를 성장하게 했기 때문이리라.

지금 한국의 학교가 가지고 있는 한계. 부조리 속에서도 아이들은 성장한다.
훨씬 강도가 높은 <학대형 학교>에서 아이들은 신음하지만, 때론 밝게 웃고, 때론 울부짖는다.
졸업식 날, 교복을 찢고 밀가루를 뿌려대는 아이들에게 난 솔직히 욕하지 못한다.
오히려, 그래, 이렇게라도 퍼포먼스를 통해 너희를 드러내는 게 오리혀 자연스럽다...란 생각이 든다.

난 건전하지 못한 사고를 가진 교사임에 분명하다.
사회가 요구하는 중립적인 선을 지키지 못하고,
늘 갈팡질팡 줄타기를 하다가 휘딱 뒤집어지고 만다.
교생 실습때부터 수업 시간에 조는 아이들이 불쌍하단 생각이 들더니,
아이들의 저항이 오히려 아름답게 보인다.
난 또 안다. 나처럼 얼치기로 저희들을 이해하는 체 하는 교사가, 그 아이들에겐 더욱 힘들다는 것을.
다른 시간엔 잘 수도 있는데, 난 저희를 재우지도 않는 악랄한 교사라는 것을.

아아, 임빙이 학교에서 느끼는 달콤 쌉싸롬하고 싱그러우면서도 뒷맛이 씁쓸한 하이틴의 감정들을 미각으로 후각으로 가득 느낀 오늘 밤엔, 보름달이라도 화안하게 비친다면 눈물이 쏟아질 것 같다.

새까매서 오히려 좋을 수도 있는, 그믐날 까만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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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기와 2 마음이 자라는 나무 37
차오원쉬엔 지음, 전수정 옮김 / 새움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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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빨간 기와와 까만 기와의 접점을 2권으로 편집한 것은 정말 맘에 안 든다.
아마 두 권으로 만들었으면 가격을 만원 정도밖에 못 받았을 것이다.
그런데 세 권으로 나눠서 8천원으로 했으니 좀 더 벌겠지. 칫.
산다는 건 모두 다 속임수일까?

이 말은, 문화혁명기의 갈등을 잘 나타낸 말이라 생각한다.
한국의 70년대, 망명의 길을 떠난 홍세화씨나 윤이상씨가 그랬을 것이고,
이 땅으로 유학와서 간첩이 된, 서승, 서준식 형제가 그랬을 것이고,
80년 광주에서 산화한 숱한 꽃들과, 시들어버린 꽃들이 그랬을 것이다.

이 땅에서도 산다는 건 모두 다 속임수였다.
중국도 천안문에서 88년 다시 속았다.

빨간 기와는 참 낭만적인 소설이다.
많은 성장 소설들이 그렇듯이,
성장하는 아이들은 사실 제 몸 안의 에너지를 감당하지 못하여, 주변을 살피지 못한다.
그래서 성장 소설은 어른의 시선으로 바라보아야 제격이다.

이 소설이 회고체로 되어있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어린 아이가 화자가 된다면, 그건 <신빙성이 떨어지는, 그렇지만 더 재미있는> 상황을 연출하기 위한 것일게다. 은희경의 새의 눈물이나, 주요섭의 사랑 손님과 어머니 처럼...

이 책은 뒤로 갈수록, 사소한 띄어쓰기, 오, 탈자가 많이 띈다.
가장 짜증나는 것은 중국 최대의 스승으로 일컬어지는 루쉰(魯迅)의 한자 이름을 盧迅으로 잘못 적었다는 거다. 어떻게 루쉰의 한자를 틀릴 수도 있는 것인지... 이런 사소한 것이 책의 신뢰도를 떨어뜨리는 것은 생각해 보지 않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매력덩어리다.
화자인 임빙과 여자 친구, 주변의 <도련님들>, 뭐니뭐니해도, 왕유안 교장 선생님의 복귀는 전설과도 같았고, 못난이 작문 선생님 <아이원>은 선생님이란 어떠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하는 귀감이 된다.

폐허에 핀 꽃도 아름답다.
역시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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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6-03-26 19: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떻게 루쉰의 한자어를 틀릴 수 있는지 정말 루쉰의 왕팬으로서 화가 나네요

글샘 2006-03-26 2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죠, 맞죠. 그런 거죠? 제가 이상한 게 아닌거죠?
 
빨간 기와 1 마음이 자라는 나무 37
차오원쉬엔 지음, 전수정 옮김 / 새움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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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기와는 중학교고, 까만 기와는 고등학교다.
1권과 2권의 중간까지는 빨간 기와고,
2권에서 3권까지는 까만 기와다.
그러면, 산술적으로 두 권으로 편책하면 될 것을, 왜 세 권으로 만들었을까?
얄팍한 장사꾼의 상술이 속보인다.
이 책엔 간혹 오타도 많고, 탈자도 보인다.
소설이 재밌어서, 그런 걸 적어 두진 않았지만, 좀 짜증나기도 한다.

중국 역사상 가장 야만적인 혼란기가 <문화혁명기>였던 모양이다.
십여 년전 다이호우잉의 <사람아, 아 사람아>를 밤을 새워 읽었던 추억이 있는데,
이 책에선 피해자 어른의 시각이 아닌 가해자 중학생의 시각을 볼 수 있다.

처음엔 재미삼아 유람삼아 저지르는 군중 심리의 파괴 본능이 차츰 시들해지는 장면.

이 소설을 읽으면서 몇 가지 생각이 교차했다.

우선, 하방(下放, 지식인을 강제 노역으로 몰아내는 일)당한 교장 선생의 모습.
그 교장의 하심 下心에 나는 자꾸 눈이 가는 것이었다.
내가 나이가 들어도 정말 아이들과 학교를 위해 아무 욕심없이, 그야말로 낮춘 마음으로
나를 버릴 수 있을까? 아니지, 이제 십년 정도 뒤면 나도 50줄에 접어드는데,
그러면 나를 비우고, 그야말로 하심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곱씹었다.
꽃도 심고 나무도 돌보고, 우아한 퇴직자로서가 아니라, 할아버지같은 자애로서...

그리고 그토록 그악스럽던 홍위병의 야만적 폭력을 읽으면서 이십 년도 더 된 장면이 떠올랐다.

그 날, 나는 종로 거리를 선배와 같이 걷고 있었다.
시각은 저녁 5시가 가까워지고 YWCA 건물 앞은 지나가는 행인들로 복작거렸다.
선배가 내게 안내해준 직업은 구로공단 소켓공이었다.
5시가 되자, 어느 건물에서던가, 갑자기 "독재정권 박살내자"며 앙칼진 목소리의 여학생이 뛰어나왔다.
옆구리에 끼고 있던 유인물을 공중에 뿌리면서...
그 여학생이 열 걸음도 걷기 전에, 어디선가 나타난 짭새들(사복)이 그 여학생을 끼고 어디론가 끌고갔다.
그 여학생은 끌려가면서도 다부지게 소리쳤고, 결국 입이 틀어막혔다.
앞 건물 옥상에서 현수막을 내리면서 두세 명의 마스크 쓴 학생들이 구호를 외치고 유인물을 뿌린다.
유인물은 도로로, 버스 위로 흩날리고, 다시 수많은 사복들이 뛰어 가고,
다시 저쪽에서 고함을 치고, 시내 한복판에서 사과탄(사과만한 최루탄)을 터트려댔다.

이십 년을 잊고 있던 그 끔찍한 장면이 갑자기 떠오른 것은, 야만성 때문이었을까?
비둘기를 기르고, 침대에 집착하는 여인들이 등장하는 대목은 다소 낭만적이기도 하지만,
친구를 교실에 가두고, 서로를 학대하는 모습은
결코 인간의 세계라 볼 수 없었다.
짐승만도 못한 야만의 세계 그대로였다.

내가 어린 시절, 그토록 감동하며 읽었던 아미치스의 사랑의 학교를 요즘 아이들에게 읽히면 낯설어 하듯이,
이 소설은 중국 아이들에게도 낯설 것 같은 느낌이다.
오히려 성장소설이긴 하지만, 중국의 현대사를 조금은 아는 어른들이 읽어야 할 법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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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짝반짝 빛나는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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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쿠니 가오리의 글은 가볍다. 가벼워서 부담이 없기도 하지만, 그 가벼움이 싫은 날도 있다.

반짝반짝 빛나는... 이라는 제목은 얼마나 독자를 끄는 힘이 강한 제목인지...
그렇지만, 읽지 않고 있었던 것은, 일본 소설의 오묘한 분위가가 조금은 어색해서 선뜻 손을 대지 못하고 있었다.

이 소설엔 이상한 세 사람이 나온다.
우울증에 알콜중독자 아내 쇼코, 그 남편인 무츠키는 호모다. 남편의 남친 곤.
쇼코는 아이를 가질 것을 권하는 주변 사람들의 의견을 듣고,
남편의 아이를 곤치 낳아 줄 수 없음에 안타까워한다.
그리고는, 남편과 곤의 아들을 한꺼번에 낳을 수 없을까를 궁리하는 아내.

엽기적이고 사이코틱하다고 본다면 어쩔 수 없이 희한한 일이지만,
나와 다른 것도 인정하려고 하는 그 사람들의 섬세한 마음이 다사롭기도 하다.

누런 금빛 사자떼와는 섞일 수 없는 은빛 사자들이 세상엔 있는 법이다.
사람들은 금빛 사자들만이 정상적인 범위 내에 있다고 금을 그어 두고는
그 금 밖에 있는 존재들을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틀렸다>고 판정한다.

그래서 금밖에 있는 존재들에게 세상은 언제나 좌충우돌 복마전일 따름이다.
누가 언제 금밖으로 내몰릴는지 모르는 세상에서,
특히 한국인들은 집단을 지어 남을 내모는 일에 익숙하지 않은가?
아직도 중세 독일의 마녀 사냥이 쉽게 일어나는 동네가 아닌가 말이다.

일본도 그런 측면에서 더하면 더했지 덜하다고 볼 수는 없지만,
그래도 <나는 다르다>는 말을 할 수 있다는 것.
<다르면서도> 반짝일 수 있다는 것을 소설로 쓰고 읽을 수 있다는 것.
사실은 세상 모든 사랑이 다 다르고,
세상 모든 사람이 다 다를 수밖에 없음을 공감한다는 것이 소중하다는 생각을 갖게 하는 소설.

제목만큼 주제도 반짝반짝 빛나는 가볍고 경쾌한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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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 노이즈
돈 드릴로 지음, 강미숙 옮김 / 창비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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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 소설이라고 쓴 건지, 난 또 왜 이 소설을 읽은 건지... 잘 모르겠다.

내가 싫어하는 책 중의 하나가, 무협지를 싫어하는데 무협지보다 더 싫어하는 책 중 하나가 바로 <현대 문명으 진단> 뭐, 이런 류의 책이다. 테크놀로지 시대, 전자 문명의 시대를 진단한다는 허접한 담화 말이다.

이 책이 딱 그런 책이었다. 제목과 두께, 표지만 보고는 <스릴러>라고 착각했더랬는데, 그래서 반신욕하면서 들고 들어갔었는데, 진짜 재미없었다. 잡음으로 가득한 소설 속에선 맛대가리도 없는 현대 문명이 또 한번 진단되고 있었다.

제목인 '화이트 노이즈'는 가청 주파수의 모든 소리가 동시에 나서 아무런 의미도 전달하지 못하는 전자음이라는 과학용어에서 빌려온 것이란다. 이 소설에선 압도하는 정보와 상품들에 둘러싸여 살아가는 현대 미국의 상황과 죽음의 미망에 사로잡힌 주인공들의 상태에 대한 은유로서 그 의미를 확장하고 있다는 것이 역자의 설명이다.

20년 전의 미국 상태가 그랬다는 것이다. 9.11 테러 이후로 한층 심각해지지 않았을까 한다.

미국인들이 사는 것을 보면, 마지막에 등장하는 고속도로를 달리는 꼬마의 자전거를 연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성 싶다.

해체될대로 해체된 가족의 단면,
첩보원, 킬러 뭐, 이런 직업들인 전 부인들,
애정을 담은 대화는 없고, 정보를 담은 대화들로 가득한 생까기의 식탁...

은행 카드의 비밀 번호나 각종 홈페이지 회원 가입시의 <아이디와 패스 워드> 같은 것들에 대한 주의 사항. 비밀 번호를 꼭 기억하십시오. 단, 적지도 말고, 생일과 관련된 비밀번호, 주민번호에 관련된 번호는 안된다고 해서 수십 개의 아이디와 비번을 가진 나로서도 저자의 이야기들은 낯선 것들만은 아니었다. 아마 20년 전의 한국은 전혀 그렇지 않았을 것이지만...

지은이는 죽음에 대해서 계속 생각한다.
"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왜 이렇게 오래, 이렇게 지속적으로 갖고 있었을까..."
그는 이렇게 답한다.
"그거야 분명하다. 억압하는 법을 모르니까. 우린 모두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지만, 이 엄청난 사실을 억압하고 위장하고 숨기고 배제한다. 다만 이런 것을 더 잘 하는 사람이 있고, 못하는 사람도 있다."
좀 어설프다.

텔레비전과 인터넷의 현대 문명으로 도배된 방에서, 거울에 낱낱이 비춰진 자기 모습을 보면서 아내 배비트는 말한다. "난 내 얼굴이 싫어요." 그래서 미국은 성형 수술의 일번지다. 한국도 그에 못지 않지만...

텔레비전의 소음에선 하루 종일 음식을 볶아 대고, 미국식 폭발음이 울리고, 짱구는 못말릴 지경으로 사고를 저지르며, 연예인이란 이름의 장사꾼들은 성형된 미남 미녀들을 앞세워 쌩쑈를 하고 있다. 시청자들의 손은 리모콘으로 조금 더 자극적인 시청거리를 찾아 허무한 여행을 매 순간 하지만, 결국 선택하는 것은 과대 포장된 상업성 외엔 아무 것도 없다.

히틀러학이란 얄궂은 과목 교수인 주인공을 통해, 작가는 현대의 학문이 얼마나 얄팍한 상업성인지를 나타내는 듯하다. 그는 이 소설을 왜 썼을까?를 곰곰 생각해 보았다. 그는 미국인들에게서 이걸 보았던 거다.
미국인들의 눈에서, 뭔가, 허기랄까, 제어할 수 없는 욕구를...

제어할 수 없는 욕망의 시대.
모든 것이 하얀 잡음에 포장되어 판단을 흐리게 하는 시대.
텔레비전 보는 법 조차도 가르쳐야 한다는 이 우매한 시대.

온 천지는 잡음과 소음 투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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