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꽃을 저녁에 줍다
루쉰 지음, 이욱연 엮고 옮김 / 예문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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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루쉰. 아큐정전의 작가. 일제의 침략이 진행되던 20세기 초반의 중국, 세계의 중화임을 착각하던 중국은 종이호랑이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중국인들은 정신적 승리법을 통해 아직도 세계의 중심으로서의 중국을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니...

아큐는 얻어맞으면서도 실망하지 않는다. 나는 벌레일 뿐인데, 나를 밟다니... 바보같은 놈. 자기의 어리석음을 모르고 상대방을 욕하던 어리석은 민족을 일깨우려던 스승으로서의 루쉰을 읽는 일은 늘 우리를 서늘하게 한다. 아침 꽃을 저녁에 줍는다. 조화석습(朝花夕拾). 아침에 떨어진 꽃을 그 자리에서 매정하게 쓸어버릴 것이 아니라, 저녁까지 기다리는 여유를 가져야 한다는 뜻인데... 차근차근 중국의 본질을 깨닫도록 일깨워서 중국의 힘을 되찾자는 의지라고 보아도 될까?

이 책이 번역되기 전, 중국과 수교를 제대로 트기도 전에, 연변인민출판사에서 간행된 책을 들불이란 작은 출판사에서 발행한 적이 있었다. 내가 이 책을 산 것은 91년 6월 10일로 기록되어 있다. 그 젊었던 나이에 이 책을 읽고 무엇을 생각했을까? 별로 기억에 남는 것은 없지만, 이 산문집은 루쉰의 사상이 어떤 과정을 통해서 결정을 맺게 되었는지를 읽을 수 있는 단서가 되는 것 같다. 짙은 갈색으로 찌든 책갈피를 넘길 때 맡는 매캐한 내음 속에는 십여년 전의 내 독서의 행보가 미세한 먼지가 되어 추억처럼 부유한다.

꿈에서 늘 방황하는 모습, 그리고 죽음을 향해 기어가고 있는 조국을 향해, 지식인으로서 나약하기만 한 현실. 송곳니를 번득이며 달려드는 개들의 악몽... 이런 것들이 나의 젊은 시절을 심장 두근거리게 했던 것 같다. 그의 <견해를 세우는 방법>은 아직도 나를 엄숙하게 가르친다.

나는 꿈에 소학교 교실에서 작문을 짓기 위해서 선생님께 견해를 세우는 방법을 물었다. "어렵느니라!" 선생님은 안경테 너머로 나를 흘끔 바라보면서 말하였다. "내 이야기를 하나 들려주마." 어떤 집에서 귀동자를 낳고 온 집안이 기뻐 어쩔 줄을 모라했단다. 그러던 중 달이 차니 애를 안고 나와 손님들한테 뵈였단다. 물론 축하의 말이나 듣자는 데서 였을테지. 그러자 한 사람은 '이 앤 장차 부자가 되겠구려'라고 말하여 고맙다는 말을 들었지. 그리고 또 한 사람도 '이 앤 앞으로 벼슬을 하겠구려'라고 말하여 치하를 받았지. 그런데 한 사람은 '이 앤 앞으로 죽겠구려'라고 말하여 모두에게 되게 얻어맞았단다. '죽을 것이라고 한 것은 당연한 말이고 부귀를 누리겠다고 한 것은 거짓말일 수도 있는 거지. 하지만 거짓말을 한 사람은 대접을 받고 당연한 말을 한 사람은 매를 맞았단 말이다. 그러니 너는...' "저는 거짓말도 하지 않고 매도 맞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자면 선생님, 저는 어떻게 말해야 합니까?" 그러면 너는 이렇게 말해야 하느니라. "아아! 이 애는 정말! 이걸 보슈, 얼마나, 어이구! 하하!! Hehe! he, hehehehehe...!"

세상을 개혁하고 바꾸려면 진실한 조국을 만들어야 한다는 일념에 불타던 루쉰에게 이러한 부조리한 현실은 꿈속의 혼미함을 드러내는 글들을 써내리게 했을 것이다. '무릇 희생자가 제단 앞에 피를 흘린 후, 여러 사람들에게 남겨주는 것이라면 오직 제사고기를 나누어 먹는 한 가지 일 뿐인 것'이란 현실을 바라보는 관점은 당시의 세계가 얼마나 암울한 것이었던가를 잘 읽을 수 있는 글이다.

과거를 통해서 미래를 읽어야 한다. 책을 읽어 미래를 읽으려는 우리는, 우리의 가식적인 견해 세우기를 반성해 봄직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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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4-12-16 0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루쉰의 '희망은 길이다'를 읽고 있습니다. 이 책은 못 읽었어요. 담번에 도전(?)을 해야 겠군요^^

글샘 2004-12-18 15: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루쉰. 조금 지루한 문체기도 하고, 간혹 시원하기도 한 사람이죠. 백 년 전에 이런 사람이 살았다는 것만으로도 지구에 인간으로 태어난 것은 자랑스런 일일 수도 있지 않나요? 여우님의 글을 읽는 것도 즐거운 일이랍니다. ^^

sprout 2004-12-29 18: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이 책을 산 것은 91년 5월 15일로 되어있네요. '도서출판 창'에서, 그때만 해도 루쉰도 아니고 '노신'이었고, 리영희가 아닌 '이영희'선생님의 발문이 들어있지요. 글샘님께서 인용해주신 '견해...'를 읽다가 책을 다시 꺼내 봅니다. 15년전, 그때 읽고는 넘겨버렸던 이야기가 지금은 새기게 됩니다. 저와 이 책의 인연을 새로 일궈주신 님께 감사드립니다.

글샘 2004-12-30 14: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같은 책을 읽고 즐거워하는 것만도 고마운 인연이지요...

철없던 시절의 독서와 나이든 시기의 독서는 같은 제재를 읽고도 상당히 다른 것을 보면, 텍스트는 움직이는 것 같애요.
 
나무를 심은 사람
장지오노 지음, 김경온 옮김 / 두레 / 200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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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를 심은 사람’은 많이 들었던 이야기다. 고등학교 작문 교과서에도 등장할 정도로 유명한 이야기인데, 전체를 읽기는 처음이다. 하긴 전체라고 해도, 십분 정도면 모두 읽을 수 있다. 그 뒤의 설명, 부연들은 장 지오노의 원작을 이해하기에 별로 도움을 주지 못한다.




‘나무를 심은 사람’의 힘은, 그가 나무를 심었다는 것(친환경적)과, 그는 철저히 아래에서부터 변화를 시도한 사람이라는 것(민중적), 그리고 자신이 이룩한 일을 드러내지 않았다는 것(철학적) 같은 다양한 관점으로 읽을 수 있는 데서 우러나는 힘이다.




이런 간단한 이야기라도, 우리의 삶을 통째로 흔들어 놓을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의 생각은 상당히 오랜 기간 반복적으로 학습된 것을 정답으로 이해하고 있을 수도 있지만(正), 어느 날 눈에 보이지 않는 진실을 불현듯 깨닫고 이제까지의 정답을 부인할 수도 있다(反). 이 正과 反의 변증법적 통일체로서의 인간, 合의 모습을 이끌어낼 수 있는 좋은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처한 반환경적 조건과, 이런 환경 문제에 대해 접근하는 숱한 국가적, 집단적 음모들, 여기에 맞서야 할 우리의 자세는 어떠해야 하는지를 이 이야기처럼 간단히 보여주는 글도 없다. 여기에 이 글의 환경 소설로서의 역할이 있는 것이다.




난 이 글을 읽으면서, 교사로서의 나, 선생으로서의 나를 돌아보게 되었다. 나는 정말 아무 사심없이 매일 열 개씩의 정갈한 도토리를 심고 있었던가. 그 도토리들이 간혹은 말라 죽고, 상하기도 하겠지만, 매일매일 성실하게 도토리를 심는 자세로 아이들 곁에서 살고 있었던가. 위에서는 어떤 허투른 짓을 해서 학교를 휘두르더라도, 늘 평상심을 잊지 않고 오늘도 열 그루의 나무 묘목을 옮기는 교사였던가. 그리고 내가 해냈던 것은 잊고, 할 일만 성실하게 해 낼 수 있는 그런 선생이었던가... 아이들이 숲이 되고, 산 속의 메아리로 살아갈 만큼 그들이 의지할 수 있는 흙이 되고, 나무가 되고, 산새가 되고, 시냇물이 되어 살고 있었는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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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마개 2005-01-03 1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게 책보다 바디오가 더더 멋있답니다. 으뜸과 버금에서 판매하는데 전 그 비디오 보고 며칠을 두고 두고 생각했답니다. 참 멋진 그림이예요.
 
꾸뻬 씨의 행복 여행
프랑수아 를로르 지음, 오유란 옮김, 베아트리체 리 그림 / 오래된미래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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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정신과 의사가 많은 나라의 정신과 의사, 꾸뻬씨는 행복을 찾으러 다니면서 스물 세 가지의 배움을 얻는다. 그런 스물 세 가지의 행복은 읽고 나면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한다.

요즘 개그콘서트에서 제일 재미있는 코너로, 깜박 홈쇼핑이란 코너가 있다. 아들과 내가 제일 재미있다고 합의했다. 좀 모자란듯한 두 사람이 진행하는 코너는 우리에게 <희극>의 진수를 보여준다. 부족한 사람이 보여주는 부족함은 다른 사람에게 유쾌함을 준다. 이것이 <희극>, 즉 코메디의 핵심이다.

나의 부족함이 다른 사람을 즐겁게 할 수 있는 것이 세상의 이치다. 내가 너무 돋보이려 하면, 다른 사람들이 그걸 인정하더라도 시샘하고 외면하기 십상이다. 다른 사람, 특히 나보다 잘나보이고, 뭔지 카리스마가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을 아리스토텔레스는 '영웅'이라 한다. 그런 영웅이 벗어날 수 없는 기하학적 절대적인 곤란함, 위기에 빠지는 이런 연극을 그는 <비극>이라 했고, 비극을 보면서, 거역할 수 없는 운명의 좌절을 보면서 관객은 카타르시스(배설이란 뜻)를 느끼게 된다고도 했다.

세상에 행복론이 그다지도 많은 것은 인간이 그만큼 간절하게 행복하길 원한다고 볼 수도 있고, 그만큼 행복하기 어렵다는 반증이기도 한다. 결국 행복은 나 혼자서도 즐길 수 있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즐길 수 있는 것이다. 만족하는 삶에서 행복할 수 있을 수도 있고, 절제하는 속에서도 찾을 수 있다. 다만, 나의 뇌가 행복한 오렌지 색으로 물들 수 있는 일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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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 조르바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이윤기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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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이맘 때, 고딩 1,2학년 애들이랑 연극제 준비를 한창 하고 있었다. 아이들에게 모든 권한을 맡겼더니(자율적인 선생님이라서가 아니라, 너무 무지한 선생님이라서) '청춘예찬'이란 대본을 구해왔다. 욕설이 난무하고, 조금은 나이들어 보이는 연극. 애들은 어려운 대본을 나름대로 수정해 가면서 잘 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떤 문제아에게 사회과인 담임 선생님께서 '그리스인 조르바'란 책을 읽어 오게 숙제를 내 주신다. 그 문제 학생은 이 책을 읽어낸다. (지금에사 이야기지만, 정말 대단한 고등학생인가보다. 이런 책을 읽어 내다니. 그런 정도의 수준인데 학교에서 왜 문제아가 됐을까?)

그리고 그 학생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물레를 돌리는 데 걸리적거린다고 손가락을 잘라버린 사내, 여인들의 치모를 모아 베개를 만든 사내, 그리고 자유를 생각하고 누렸던 사내... 조르바. 난 조르바처럼 될 수 없는 것일까?" 결국 학생은 자퇴를 하고 찻집에서 일하는 간질병 환자와 사랑을 나누며 인생을 고뇌하고, 조르바를 읽히던 선생님은 사표를 던지고, 호주의 널따란 풀밭으로 자유를 찾아 떠난다.

선생님에게도 학생에게도 자유는 없었던 것이다. 우리 연극반 아이들이 연극을 만들어가면서 열두시까지 새벽한 시까지 수위 아저씨랑 싸워가면서 만들어냈던 그 어설픈 연극이 바로 그들에게는 '자유'였던 것일까?

자유롭다는 것은 구속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시간의 구속, 관습의 구속(요즘처럼 관습이란 말이 짜증스럽게 하는 적도 없었다.), 언어의 구속, 관계의 구속, 도덕의 구속, 질서의 구속... 끝없는 구속의 틈바구니에서 겨우 숨쉬며 살고 있는 것이다. 조르바의 여행을 따라나섰던 지난 며칠간은 부끄럽고 무기력한 내 삶을 반추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반신욕 하는 욕조 안에서 조르바가 바라보던 지중해를 상상하는 것은 따가운 햇살에 내 몸을 맡길 수 있는 상상의 기회를 제공해 주었지만, 푸르른 하늘과 바다, 하이얀 집들의 그리스 풍경을 아무리 떠올려도 내 삶의 구속들에 조르바의 열쇠는 보이지 않았다.

새장안의 새가 그 좁은 문으로 드나들듯, 우리 일상속의 구속틀은 이런 작은 작품들로 숨통을 틔어주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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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 가라사대, ‘많은 사람은 자기보다 높은 곳에서 혹은 낮은 곳에서 복을 구한다. 그러나 복은 사람과 같은 높이에 있다.’던가. 모든 사람에겐 그 키에 알맞은 행복이 있다는 뜻이겠네. 나는 내 키 높이를 열심히 재고 있다네. 자네도 알겠지만 사람의 키 높이란 늘 같은 게 아니라서 말일세. 인간의 영혼이란 기후, 침묵, 고독, 함께 있는 사람에 따라 눈부시게 달라질 수 있는 것이네.

나같이 고독한 상태에서 보면 사람이란 개미처럼 보이는 게 아니고 그 반대로 엄청난 괴물(생명을 생성시키던, 탄산가스와 썩어가는 식물로 포화 상태가 된 대기를 호흡하던 공룡이나 익룡 같은)로 보이는 법이라네. 이해할래야 이해할 수 없는 부조리한 떠돌이 노동자의 합숙소지. 자네가 즐겨 입에 올리던 ‘국가’와 ‘인간’ 같은 개념. 나를 매혹시키던 ‘초국가’, ‘인간성’ 같은 개념은 이곳의 파괴적인 강력한 입김 속에서도 같은 가치를 갖는다네. 우리는 의식의 표면으로 떠오른 것 같아 이따금 몇 마디 음절로 소리를 지르지만 때로는 음절이 되지도 못하거나, ‘아!’, ‘그래!’ 같은 불확실한 소리로 끝나 버리기가 일쑤라네. 그러고는 그들의 입김에 부서져 버리는 거지. 이렇게 해체되어 버리고 보면 아무리 고귀한 사상이라도 겨를 잔뜩 채운 꼭두각시 인형에 지나지 않아서 겨 속의 강철 용수철이 드러나 버리곤 한다.

부처가 ‘나는 깨달았다.’고 했다. 나도 깨달았다. 이제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지고 마는, 유쾌하고도 변덕스러운 조물주를 사귄 나머지 나는 이제 내가 맡은 역에 이 세상이 끝날 때까지 충실할 수 있을 것.


나는 어느 날 아침에 본, 나무 등걸에 붙어 있던 나비의 번데기를 떠올렸다. 나비는 번데기에다 구멍을 뚫고 나올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나는 잠시 기다렸지만 오래 걸릴 것 같아 견딜 수 없었다. 나는 허리를 구부리고 입김으로 데워 주었다. 열심히 데워 준 덕분에 기적은 생명보다 빠른 속도로 내 눈앞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집이 열리면서 나비가 천천히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날개를 뒤로 접으며 구겨지는 나비를 본 순간의 공포는 영원히 잊을 수가 없다. 가엾은 나비는 그 날개를 펴려고 파르르 몸을 떨었다. 나는 내 입김으로 나비를 도우려고 했으나 허사였다. 번데기에서 나와 날개를 펴는 것은 태양 아래서 천천히 진행되어야 했다. 그러나 때늦은 다음이었다. 내 입김은 때가 되기도 전에 나비를 날개가 쭈그러진 채 집을 나서게 한 것이었다. 나비는 필사적으로 몸을 떨었으나 몇 초 뒤 내 손바닥 위에서 죽어 갔다. 나는 나비의 가녀린 시체만큼 내 양심을 무겁게 짓누른 것은 없었다고 생각한다. 오늘날에야 나는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는 행위가 얼마나 무서운 죄악인가를 깨닫는다. 서둘지 말고, 안달을 부리지도 말고, 이 영원한 리듬에 충실하게 따라야 한다는 것을 안다.


어린아이처럼 그는 모든 사물과 생소하게 만난다. 그는 영원히 놀라고, 왜, 어째서 하고 캐묻는다. 만사가 그에게는 기적으로 온다. 아침마다 눈을 뜨면서 나무와 바다와 돌과 새를 보고도 그는 놀란다. 그는 소리친다. ‘이 기적은 도대체 무엇이지요? 이 신비가 무엇이란 말입니까? 나무, 바다, 돌, 그리고 새의 신비는?’


조국 같은 게 있는 한 인간은 짐승, 그것도 앞 뒤 헤아릴 줄 모르는 짐승 신세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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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 2004-10-25 2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고 갑니다...

파란여우 2004-10-25 2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욕조 안에서 지중해의 파란 물결을 떠올리시는 글샘님의 풍부한 상상력이 부럽습니다.^^
 
붕어는 왜 거미줄에 안 걸려
라 퐁텐 지음 / 디자인텔 / 199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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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3학년 때 고전읽기라는 미명하에 여름방학을 반납하고 이솝 이야기를 달달 외우던 때가 있었다. 그 때는 군사문화 시절이라 어린이들 모아놓고 고전읽기 경시대회를 했다. 난 우화를 읽으면 그 시절 생각이 난다. 더운 여름날 선생님과 오밀조밀 모여앉아 글을 읽고 선생님께서 문제를 내시면 사뭇 정신없는 이야기에서 답을 찾아 내던. 난 그 때 선생님이 예쁜 여선생님이어서 기분이 그닥 나쁘지 않았지만, 여름방학 내내 땀흘리며 대회에 나갔던 일은 지금도 기분이 별로다. 아무 생각없이 나간 부산시 대회에서 떨어진 건 당연한데, 아무 생각 없는 3학년인 내가 그 대회에 나간 것도 신기하고, 그 대회에서 상을 탄 다른 아이들도 신기하다. 어떻게 그 아이들은 상을 탈 수 있었던 것일까...

오랜만에 우화를 읽으면서 우화는 재미있는 이야기만이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 우화는 풍자를 위하여 우의적으로 쓴 이야기라고 가르치는데, 우화의 핵심은 풍자에 있다. 지금 생각하면 노예였던 이솝이 주인에게 비꼬아댔던 풍자의 수준은 정말 대단했다. 프랑스의 라 퐁텐드의 우화는 조금 낯선 것도 있지만, 봉건시대의 지혜가 들어있다.

당나귀와 주인 ; 밭일을 하는 당나귀가 새벽이 오는 것을 보고 '수탉은 아침에 노래만 하면 되지만, 나는 늑장을 부릴 수 없어. 장에 내다 팔 야채를 싣고 가려면 언제나 새벽잠을 설쳐야 해.' 당나귀의 불평을 들은 주인은 구둣방 주인에게 당나귀를 넘겨 주었다. 무거운 가죽과 지독한 냄새는 불만투성이 당나귀에게 충격적이었다. '옛 주인이 그립구나. 머리만 돌려도 그를 따라갈 텐데. 그 곳에는 야채 같은 것은 거들떠보지 않을 정도로 지천이었는데. 이 주인은 회초리만 휘두르니.' 불쾌한 구둣방 주인은 당나귀를 숯장수에게 팔아 버렸다. 숯을 잔뜩 지고 가면서 그는 또 불평을 했다. 그러자 운명이 화를 냈다. "또 뭐야? 너 같은 불평은 유명하다는 군주들도 갖고 있어. 누구든 자기 처지에 만족하는 줄 아나. 나는 허구한 날 네 불평만 들어야 하니?"

운명이 옳다. 모든 사람들이 마찬가지다. 우리는 만족하는 법이 없다. 현재를 늘 불평한다. 자신의 운명에 늘 불평하는 자는 어떤 상황이 되어도 만족하지 못한다.

늑대와 어린 양 : 어린 양이 목을 축이고 있었다. 먹을 것을 찾고 있던 배고픈 늑대가 그냥 지나칠 리 없었다. "누가 내 물을 흐려 놓으라고 했지? 네 행동은 벌을 받아 마땅해." 늑대는 호통을 쳤다. "늑대님, 그렇게 화내지 마세요. 저는 늑대님의 옹달샘에서 스무 발자국이나 떨어진 곳에서 목을 축였어요. 제가 늑대님의 옹달샘을 흐려 놓다니요." 어린 양은 있는 힘껏 변명을 해댔다. "시끄러, 너는 작년에도 내 샘을 흐려 놓았어." 늑대는 차갑게 쏘아붙였다. "잘못 아신 거 아니에요? 저는 작년에 태어나지도 않았는데요. 이제 막 엄마 젖을 떼었단 말이에요." 어린 양은 계속 변명을 했다. "네가 아니었다면 네 형이 그랬겠지." 늑대는 좀처럼 믿지 않았다. "저는 형제가 없어요." "그렇다면 네 가족 중 누군가 그랬겠지. 게다가 너를 치는 목동이나 개들이 나를 얼마나 귀찮게 하는 줄 알아? 그 벌을 네가 대신 받아야겠어." 늑대는 어린 양의 설명에 더 이상 귀를 기울이지 않고 숲으로 물고 가 버렸다.

이유가 분분한 자가 이길까?

예리한 그림들과 함께 중세의 삶을, 그 팍팍하던 계급 사회를 잘 보여주는 우화들이었다. 지금도 역시 마찬가지 상황이 아닐까 하는 이야기 꼭지들을 되씹으면서 역사는 발전하는가, 사람의 삶은 과연 나아지고 있기나 한 걸까? 하는 생각으로 복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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