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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의 아이
하이타니 겐지로 지음, 오석윤 옮김 / 양철북 / 2002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교사 초년 시절에... 그 시절엔 일본 문학이 우리 문단에 소개될 기회가 거의 없었다. 미국이 만든 국립서울대학교에는 일어일문학과가 없다. 그것은 미국이 부추긴 것이기도 하고, 일정 정도 국민 정서 반영이기도 할 것이지만, 일본에 대한 무지 또한 미국과 지배 계층의 조장 탓일 수도 있다.
그 때 읽은 하이타니 겐지로의 <나는 선생님이 좋아요>는 참 신선하다는 느낌을 주었다. 여느 한국 소설이 주는 뻔한 결말과 감동과 다른 시선이랄까.
이 책은 오로지 하이타니 겐지로 이름만 믿고 대출해 온 책이다. 그의 책은 두어 권 더 읽을 것이 있었지만, 그의 책이라고 뽑아 읽을 생각을 한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것도 나의 무심과 함께, 일본에 대해 무식한 증오심만 길러 주려는 <지배 이데올로기> 탓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태양의 아이는 한 마디로 <류큐>였던 오키나와의 상처를 감싸안는 소설이다. 이 소설을 아동 문학으로 처리하는 것은 등장 인물과 이야기 구성이 아이들도 읽을 수 있도록 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 소설은 결코 아동 문학이 아니다. 어린이들이 그 고통과 시련을 이해할 수도 없을 뿐더러, 어린 아이들에게 남의 나라 고통까지 들여댄다는 것은 자못 잔인한 일이다.
일본은 태평양전쟁에서 엄청난 전투를 치렀지만, 본토에선 전쟁을 하지 않았다. 오직 이 오키나와에서만 치열한 전쟁이 벌어졌다고 한다. 결국 전후 오키나와를 미군 기지로 주게 되고, 오키나와의 원주민들은 일본인들의 멸시 속에 죽어갔고, 스스로를 부정하며 상처투성이 삶을 살아가게 된다.
오키나와를 고향으로 둔 어른들의 상처투성이 과거를 이해하지 못하는 아이들은, 삐뚤어지게 되고, 저항하며 자라나고, 그것을 보는 어른들은 더욱 상처 속으로 빠지는 악순환이 벌어진다. 일본에서 가장 학력이 낮고 소득이 낮은 땅, 오키나와...라는 강박관념 속으로...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이 땅에서 벌어졌던 학살과 피비린내, 그리고 쉬쉬하며 숨겨왔던 징그러운 역사와, 아직도 그 역사를 반도들의 무리에 의해, 폭도들에 의한 반란이라고 곧이곧대로 믿고있는 사람들이 서로 대립하면서, 전라도는 빨갱이와 같은 <적대적 존재>로 규정짓는 현실이 오버랩 되어 마음이 착잡하다.
‘모래 시계’나 ‘박하 사탕’ 등의 영상 예술을 통하여 <광주의 진실>이 얼핏 비추어지긴 하였지만, 아직도 이 땅에선 진정한 의미의 <용서>를 경험하기엔 지난한 시간과 경험이 필요하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된다. 죄를 지은 자들은 당당하게 대머리를 빛내며 돌아다니고, 그들의 징그러운 배암 껍질들은 전국 곳곳에서 범종에 또아리를 틀고 앉았고, 각종 현판과 기념 조형물에 새겨져 치가 떨리게 하고 있다.
광주를 휩쓸었던 피의 망령들은 아직도 한반도에서 <전쟁의 이데올로기>로 살아남아 이 땅의 평화와 민주주의를 짓밟고 있다.
어떤 이들은 말한다. 80년 광주와 06년 대추리는 명백히 다르다고.
그때는 민주화 운동이었지만, 지금은 민주 정권이 지배하고 있는데 어떻게 두 사건이 같은 맥락이냐고... 그들은 아마 그랬을 것이다. 80년 광주에서 시대의 어둠만이 가득하던 시절, 폭도들을 어쩔 수 없이 진압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그들이 가진 자들일 수도 있고, 못가진 자들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의 의식의 공통점은 이것이다. <지켜야 할 것은 자유 민주주의>이고 <막아야 할 것은 적화 통일>이라는 레드 콤플렉스.
한국에서 민주 노동당이 국회의원이 되는 데는 1948년 제헌국회 이후 56년이 걸렸다. 기회주의적인 가진 자들의 정당이 이전투구를 벌이는 동안, 다시 레드 콤플렉스는 국민들의 의식을 휘감을 것이다.
한국을 두 동강 낸 분단도, 정치를 두 동강 낸 지역 의식도, 원인을 따져 보면 오키나와와 다르지 않다. 오키나와라는 피해자 집단을 서로 미워하고 서로 욕보이는 본토사람들의 의식 속에는 ‘미국’이라는 보이지 않는 조종자가 피아노줄을 놀리고 있었던 것이다. 부산항에 미군의 제7함대가 입항하여 광주를 살려줄 것이라고 어리석게도 믿었다는 믿기 힘든 전설을 들으면서, 나는 오늘날에도 그 피아노줄은 시퍼렇게 살아 이 땅에서 유일한 이데올로기로 횡행하는 것을 본다.
신동엽이 껍데기는 가라고 외쳐도 들은 척도 하지 않던 그 껍데기.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네가 본 건 하늘 덮은 쇠 항아리일 뿐이라고 했을 때도 사람들은 하늘을 보았다고 착각하며 살았다.
아직도 한국의 하늘에는 쇠항아리가 가득 덮여 있다. 내가 보고 있는 저 하늘은, 하늘이 아니다.
80년 빛고을에서 죽어간 형제들, 그 소용돌이 속에서 정신을 놓아버리고, 원통해서 마음을 빼앗기고 넋을 잃은 동포들... 그들의 넋을 위한 진혼곡은 아직 이 땅에서 울리지도 못했는데, 이 땅에는 다시 군홧발 아래 짓밟힌 땅이 생겼다. 그 방패로 간고히 막고, 군홧발로 짓밟은 농토에, 서리서리 서릿장보다 엄한, 북한과 대치한다는 휴전선보다 강고한 몇 겹의 철조망을 두르고, 그 안에 거주하실 분들은, 바로 그 피아노줄의 주인들이시다.
백 년 전, 동아시아의 평화와 번영을 이야기하던 일본 제국주의자들에게 조선 영토를 내준 이씨 조선 패거리들과, 을사 오적 같은 잡놈들은 죽일 놈이고, 이제 백 년 후, 다시 동아시아의 평화와 번영을 이야기하는 코쟁이들이 여기 나섰는데, 거기 도장을 찍은 대한민국 정부 패거리들은 살릴 놈들일까? 과연 그 때와 지금이 다른 것은 무엇인가.
오키나와의 눈물은 약자의 눈물이었다.
빛고을의 눈물은 약자의 그것이었고,
대추리의 눈물 역시 마찬가지였다.
억누르는 자의 논리는 언제나 정의롭고 평화를 가장하며,
죽은 자는 말 없기를 강요당한 것이 <거짓된 역사>라는 것이다.
그러나, 또한 역사는 말한다.
<말 없기>를 강요당한 존재들은 언젠가는 <진실>을 밝힌다는 것을.
<거짓된 역사>의 쇠항아리를 찢고, 태양 아래 반짝이는 바다를 보며 진실의 아름다움을 이야기 하리란 것을.
하이타이 겐지로는 피비린내나는 역사를 ‘따뜻한 마음’으로 이겨내려 한다.
좋은 사람일수록 이기적인 인간이 될 수 없으니까 쓰라리고 고통스러운 거지... 좋은 사람이란 자기 안에 남을 살고 있게 하는 사람이야... 하는 말로써.
용기란 싸움을 해서 이기는 일도 아니고, 용기란 조용한 것이란다. 용기란 것을 따뜻하고 착한 거야. 용기란 것은 서슬이 퍼런 거야... 하는 말은 어쩐지 빛고을 사람들이 두런두런 나누는 이야기란 착각이 든다.
바닥 위에 마루
마루 위에는 다다미
다다미 위에 있는 것은 방석
그 위에 있는 것이 안락
안락 위에는 아무 것도 없는 것일까.
어서 깔고 앉으세요, 권하는 대로
안락하게 앉은 쓸쓸함이여.
바닥 세계를 멀리 내려다보고 있는 듯이
생소한 세계가 쓸쓸하구나.
야마노구치 바쿠의 <방석>이란 시다. 오키나와 사람 바쿠의 시.
일본의 오키나와는 그렇게 내게로 왔고, 이제 막 18일이 된 이 아카시아향 진한 오월에, 핏빛 빛고을과, 군홧발에 유린된 미군의 땅, 한국 복판의 오키나와, 대추리로 사고는 헤매이고 다닌다.
역사는 끝없는 순환인가... 생소한 세계가 쓸쓸하구나. 나는 너무도 안락하여.
하이타니 겐지로는 아이들의 입을 통해 “불행이나 슬픔은 제각기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고 줄줄이 이어져 있는 것임”을 깨닫게 만들고, “동그라미를 그릴 수 없는 컴퍼스”가 가슴에 묻힌 가난과, 지쳐 자살한 누이와, 불발탄을 건드려 죽은 아빠와, 집떠난 엄마... 이런 군상을 통하여 “슬픈 일은 모두 오키나와에서 온다.”고 할 정도로 모든 일은 연결되어 있는 고리임을 적실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옛날 내 담임 선생치고 어느 한 사람 제대로 된 선생이 없었어. 그저 ‘이런 것도 몰라?’하고 벌 주는 것밖에 모르는...”하는 푸념 섞인 어른들의 대화에서 그저 뜨끔하다가도, “선생님이 후유코는 기특하다고 하실 때, 후유코도 힘껏하고 있지만 저도 힘껏 하고 있다고 제 마음 속으로 말한답니다.”하고 편지를 쓰는 도키코의 마음도 나를 가르치는 스승이 되었다.
이 소설을 통해 세계가 연결되는 고리와, 그 고리 속에서 힘없는 컴퍼스로 원을 그리는 나의 모습이 오버랩된다. 어떨 때는 원이 그려지다가, 어떨 때는 원이 그려지지 않는 나의 힘없는 컴퍼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