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로운 마음이 미소를 부른다
툽텐 초드론 지음, 김성 옮김 / 리즈앤북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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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난 어려서부터 기억력이 뛰어났다. 그래서 공부도 아주 잘 했다. 내가 똑똑한 줄 알고 오랜 세월을 살았다.

그런데, 살면서 보니깐, 나는 바보다.

살다 보면 저절로 터득하게 되는 것들을, 나는 책을 통해서 읽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요즘 마음 공부하는 책들을 자주 읽게 되는데, 그러면 그럴 수록 바보란 생각이 커진다.

그렇지만, 또 위안을 받는 것은, 이런 책들을 읽으면서 나보다 조금 더 똑똑한 사람들도 '오직 모를 뿐' 같은 말들을 잘 한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도 그랬고, 부처도 그랬다.

마음 공부를 세상과 떨어지려는 마음을 생각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 혼탁한 세상에서 떨어져 살 수 있는 길이 없다면, 매일 매일이 전쟁 상태인 그대로 마음을 닦을 필요도 있지 않을까...

이 책의 저자는 미국 출신의 티벳불교 수행자이다. 인도와 네팔에서 불교를 공부하고 수행하며 책을 쓴다. 그러다 보니 이 책은 상당 부분 초심자를 위한 불교 강좌 냄새가 난다. 그렇지만, 삶에서 나는 매일 매일 초심자가 아니냐. 어린 시절 어른들은 경험자라는 생각을 했더랬는데, 살아 보니, 매일 매일이 초심자로서의 삶이다. 내 나이 마흔 하나이지만, 마흔 한 살을 살아본 것은 처음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내 나이 여든 한 살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이겠지만...

살생, 도둑질, 어리석은 성적 행위 - 세 가지 잘못된 행동을 수정하고,
거짓말, 분열을 일으키는 단어들, 거친 표현, 어리석은 대화 - 네 가지 험한 말을 조심하고,
살생하는 직업을 버리고, 독을 다루는 직업을 버리고, 사기나 속임수를 버려라.

나쁜 버릇는 길들이고, 좋은 버릇은 기르는 공부가 마음 공부다. 길들이다와 기르다는 비슷하면서도 전혀 다른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작은 씨앗이 큰 나무가 되기 위해서는 길들일 필요와 기를 필요가 있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자신감을 <타인의 칭찬>에서 얻게 된다면 날마다 얼마나 마음의 부침에 시달리겠는가. 스스로 길들이고 기르는 공부가 필요하다.

스스로 길들이고 기르는 생활.

우리가 불평할 때는 스스로 그 상황을 말로 듣고 싶어서 떠드는 일이 많다고 한다. 그럴 땐, '당장 할 수 있는 것이 있는지 생각해 봤는가?'를 질문하라고 한다. 새기고 새길 일이다. 나도 얼마나 그 누군가를 대상으로 불평하는 일이 숱하게 많은가.

자만하지 말고, 스스로를 길들이고 길러서 '친절'에 이르는 길. 아직도 가야할 길이 먼 공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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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06-05-30 1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나 바보 아니시잖아요

글샘 2006-05-31 18: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보 맞아요.ㅠㅠ
 
선방 가는 길 - 선방의 향기 따라, 선객들의 발자국 따라
정찬주 지음 / 열림원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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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간혹 선방에 머물고 싶은 때가 있다. 세상의 모든 근심 초탈하여 나붓이 앉은 모습만을 생각하는 낭만적인 내 기질 탓이다. 여름 방학 같을 때, 한 일주일이라도 선방에 앉아서 나를 찾고, 나를 잊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런데, 이 책을 읽다 보니, 선방은 그런 곳이 아니었다. 막연히 깨달음의 순간을 기다리는 간이역이 아닌, 미완의 수행자들이 자신을 제련하는 <용광로> 같은 곳.

용광로 안에는 뜨거운 열기가 있고, 융화가 있다. 네것 내것의 구분이 없고, 아무런 <상>도 없다. 만약 모든 상이 상 없음을 본다면 곧 여래를 본 것이라고 금강경에서 나투신 말씀이 바로 용광로 안에 들었잖은가.

휴휴의 경지를 배웠다. 앞의 休는 번뇌 망상을 놓아 버리는 것이고, 뒤의 휴는 놓아버렸다는 생각마저 놓아버려 가물거리는 경지.

수행이란 영원한 행복을 얻기 위한 방편이다.
수행이란 '비어있는 지혜'로 다가서는 것이다.
지혜란 삼매에서 나온다.
삼매란 모든 행위를 깨어서 살펴보는 것이다.
인생을 진지하게 궁구하면 삼매가 일어난다.
선이란 자신을 끝없이 향상시키는 것이다.

생명이 있건 없건 삼라만상이 모두 한 몸이므로 결코 '나'를 관형격으로 놓고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도 배운다.

풀잎 한 이파리가 건네는 말에서도 소름이 돋는다.
"당신은 지금 당신 자신을 온 몸으로 드러내며 살고 있습니까?"

어떤 스님은 공부하다 보면 감사한 마음이 끝이 없어서 자꾸만 눈물이 나서 수건을 두 개 걸어 놓고 있다고 한다. 부처님을 얼마나 그리워해야 하는가 하면, 옆엣 사람들이 미쳤다고 손가락질할 정도가 되어야 한단다. 아, 나는 지금 나를 얼마나 드러내며 살고 있는가. 부끄럽다.

이 모든 일도 자기가 좋아서 스스로 했을 때 괴롭지도 힘들지도 않은 법. 아직도 멀었다는 생각만이라도 가르친 고마운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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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이 라마의 공감
펠리치타스 폰 쇤보른 지음, 김희상 옮김 / 작가정신 / 2005년 5월
평점 :
절판


수학여행 가는 가방에 이 책을 넣고 갔었다. 역시 책을 읽을만큼 한가한 시간은 별로 없었다.
둘쨋날은 조금 일찍 들어와서 아이들에게 자유시간을 준 덕에 책도 몇 쪽 읽긴 했지만, 역시 교사에게 수학여행은 힘들다. 아이들은 틈을 노려 술을 사 오거나 담배를 피우려고 하고, 교사들은 숙소 현관을 지키며 피로를 쫓는다. 이십 년 전이나 변함없는 그림이다.

사랑이란 거창한 것이 아니라, 그저 남이 당하고 있는 고통과 어려움을 자기 것처럼 느끼고 받아 들이면 된다는 달라이 라마의 말은 쉽고 간명하지만 정말 쉽지 않은 것 같다.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스스로 공고생이란 자격지심에 시달리고 있다. 그것을 벗어던지라고 말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 아이들의 고통을 내 것으로 느낄 수 있는 섬세한 촉감, 그 <공감>의 촉수가 있어야 하는데... 늘 실패한다.

수학여행가서 우리 숙소에, 서울서 온 모 여고생들이 같이 묵었다. 헐~ 공고생들과 여고생들을 같은 호텔에 묵게 하다니... 엄청나지 않은가? 그래서 우리 반 아이 하나가 물었다. "쌤, 정말 여고생들이 와요?" "야 임마, 그냥 남고도 아니고, 공고생들인데 한 숙소를 쓸 수 있겄냐?" 하고 나는 별 생각없이 말했는데, 인석이 좀 풀이 죽어서 "쌤, 사회에선 공고를 안 좋게 인식하지요?"하고 물어온 것이다. 아이의 마음 속에 들어있는 아픈 상처를 무심결에 건드린 것이다. 아무튼 그날 밤, 서너 대의 버스에 나눠탄 여고생들이 도착했고, 다시 우리반 아이들은 경악했다. 그 여고생들은 60이 넘은 할머니들이었던 거다. 늦깎이 여고생들을 보고 우리 반 아이들은 도망갔다.

이 책은 독일의 쇤보른이란 사람과 달라이 라마의 대화를 자연스럽게 적은 글이다. 글쎄, 도올이 이런 이야기를 펼쳤다가 어색한 내용만 가득하게 채워놓았던 걸 읽은 기억이 난다. 이 책은 도올을 읽을 때의 나와 다르기 때문에 객관적으로 판단할 순 없지만, 달라이 라마의 삶, 그리고 종교에 대해서, 티베트에 대해서 상당히 깊이 다루고 있다는 느낌이다.

달라이 라마가 주방장과 나눈 이야기 중, <일 처리를 하면서 지나치게 자의적이고 제멋대로인 관리가 많다.> 그래서 백성의 지도자는 언제나 평민과 떨어져 있어서는 안 된다. 백성의 고충을 모르고 그 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는 지도자는 자신의 이해관계만을 쫓는 관리나 자문관들에게 쉽게 영향을 받을 수 있다...

아, 이런 구절을 읽으면 삶 자체가 슬퍼진다. 지금의 많은 노조들과 열린우리당의 한계를 보는 것 같아서 말이다. <평민>에서 출발했지만, <평민>과 떨어져 버린 그들의 모습을... 그래서 백성의 고충에 귀기울이지 않는 그들의 모습을 오버랩하게 되는 것은 슬픈 일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연꽃이라는, 옴 마니 밧메 훔(오, 너 연꽃 속에 핀 보석이여) 속에 담긴 사랑과 공감의 정치가 많은 노조들과 정치인들에게서 볼 수 없음은 진정 슬픈 일이다.

여행중 잠시 만난, KAL 조종사 친구의 말이 귓전에 계속 울린다. "노조의 성격은 기본적으로 이기적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 노조가 비겁한 자들이 숨는 공간으로 되는 것도 피할 수 없는 일이다."고 하던 말.

어떤 일을 하든 <사랑과 공감>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달라이 라마의 말씀은 슬프고 혼란스런 마음 속에서도 중심이 되는 말이다.

끊임없는 사념과 감정으로 혼미하기만 한 우리의 불안한 정신을 평정에 이르게 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종교이며 명상이고 참선이 아닐까 한다.  외팅거의 <평온 기도문>의 한 구절. 당분간 명상의 주제로 삼아야겠다.

제가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평정을 허락하시고,
제가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꾸어갈 용기를 주시며,
바꿀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분할 지혜를 내려 주소서.

요즘 학교가 심심치 않게 뉴스거리를 만들어 낸다. 방송국은 즐거워하겠지만, 학교는 피곤하다.
교사가 무릎을 꿇고, 여고생 엉덩이를 각목으로 팬다. 여중생이 교사를 폭행한다.
교사가 무릎꿇는 장면을 방송하는 머저리도 있고,
스승의 날 기념식에 빠진 아이들과 숨겨준 아이들을 패서라도 보복하겠다는 생활지도의 왜곡이 있고,
아이들이 우습게 보는 기간제 교사의 허점이 드러나기도 했다.

결국 학교 안에서 사랑과 존경이 제자리잡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다.
우리의 미래는 청소년에 대한 균형 잡힌 교육에 달려 있다는 칼 포퍼의 말을 인용하는 달라이 라마의 교육관에 캄캄한 밤에 별빛을 본 듯 서늘함을 느낀다.

균형 잡힌 교육. 이 얼마나 요원한 불가능의 명제인가.
세상은 신자유주의 물결이 넘실대는 신제국주의 시대로 이행한다.
일제시대처럼 동족을 짓밟더라도 나만이 살아남는 비정한 시대로 흘러 간다.
학부모는 제 자식만이라도 승리자로 남기를 바라며 비장한 투자를 한다.
학생은 초등학교부터 인생을 위한 투쟁에 모든 싸가지를 소모한다. 결국 싹수가 노랗게 변한다.
교사는 인성교육, 전면교육의 심각성을 느끼지만, 아이들과 학부모는 경쟁에서 승리만을 바란다.
국가는 다시 8차 교육과정 운운하지만, 아이들의 부담을 줄여줄 생각은 언감생심, 내지도 못한다.

내가 초임 시절, 동료 선생님들이 너무 무서워서, 나는 아이들 앞에서 웃고 다니려고 한 적이 있다. 이젠 습관이 되어 복도에서 실실 잘도 웃고 다닌다. 별 생각없이 웃기로 한 거지만, 웃는 일은 인간에게 용기를 주는 것 같다. 이제 좀 생각을 가지고 웃어야 할 나이다. 사랑과 공감을 주는 웃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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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 2006-05-25 2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웃음 한번 제대로 웃는데에도 온 일생이 필요하군요..

글샘 2006-05-26 0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온 일생을 걸려서라도 한 번 제대로 웃는다면야...

몽당연필 2006-05-26 17: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학생과 남학생이 같은 숙소에??? 순간 깜짝 놀랐지만...늦깍이 여고생...ㅋㅋㅋ
그나저나 우리나라의 탁상행정은 언제쯤 나아질까요?
현실을 생각하지도 않고 무조건 새로운 정책만 내놓으면 국민들이 좋아할 거라고 여기니...
그나저나 내년부터 초등 1, 2학년까지 영어교육 확대된다니 벌써 걱정되네요.
사교육을 더 부채질하는 건 아닐지...

글샘 2006-05-29 1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보다 사교육이 더 극성일 수는 없을 겁니다.
지금 견뎌주는 아이들이 눈물나게 고마울 따름이지요.
 
왜 사는가 1 - 무량 스님 수행기
무량 지음, 서원 사진 / 열림원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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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전에 현각 스님이란 벽안의 승려가 쓴 '만행'이란 책을 읽었을 때는, 그가 공부한 철학이 그를 불제자로 이끌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그런데, 무량 스님은 그와는 확연히 다르다. 같은 숭산 스님 시하에서 배웠으면서도, 현각 스님의 철학적 사변에 비해, 무량 스님은 오직 행할 뿐... 에 몰입한다.

그래서, 그는 미국땅의 허허벌판에 태고사란 절을 짓는다. 절을 짓는 과정이 이 책의 대부분이다. 그저 지을 뿐. 짓는 데 몰입한다.

그래선지... 왜 사는가... 하는 거창한 제목에 비해, 읽고난 느낌은 허탈하다.

만물은 하나로 돌아온다. 그 하나가 중요하다. 그러면,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

왜 매일 밥을 먹고?, 왜 하늘은 푸르고?, 설탕은 언제 다냐?... 숭산 스님의 세 가지 질문이란다.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 눈에는 부처만 보이는 법. 난 돼진가 보다. 밥인가 보다. 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급하고도 급하도다... 이런 마음에 그가 절 짓기에 몰두했을는지도 모른다.
나는 교회당을 크게 늘리는 목사들을 사이비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스님처럼 교회당을 크게 늘림에 자기의 믿음을 헌신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는 생각도 든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둘 다 지나친 집착일 수도 있겠단 생각은 변함없다.

높은 예배당에 예수님 계실 리 없고, 크고 성마른 절집에 부처 날 리 없다.

예수님 눈에는 예수님만 보이고, 부처님 눈에는 부처님만 보일 것이기 때문에 집의 크고 작고는 아무런 거칠 것이 없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내 눈엔 큰 것은 뭔가 미욱스러워보인다.

특별히 쓸모가 없어도 계속해서 넓히고 소유하는 것, 이것이 일반적인 미국 사람들의 마음이라고 반성하는 그를 보면서 순진하단 생각이 든다. 인간은 원래 그런 것임에랴... 미국이 좀 더하겠지.

급하고도, 급하도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그렇게 살아야 한다. 명상을 버리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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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06-05-20 08: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명상을 버리지 않고 살기란 참 어려운 것같아요. 늘 마음에 다른 것이 들어차서요 저도 텔레비전에서 무량스님 절짓는 것 보았어요 너무 대단해 보였죠

글샘 2006-05-29 1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설탕은 입 속에서 녹았을 때 달지요. 그 순간에. 그렇게 달콤한 건 순간인데, 내 마음은 늘 영원할 것처럼 그 단맛을 노린다지요.
 
달라이 라마의 마음공부
달라이 라마 지음, 니콜라스 브릴랜드 엮음, 이아무개 (이현주) 옮김 / 해냄 / 2002년 10월
평점 :
절판


이 세상에 이것만 있으면 모두 있고, 이것이 없으면 모두 없다.

그것이 바로 '나'이며, '내 마음'이다.

별 세 개에 반달 하나. 그것이 '마음 심 心'이란 글자다.

사십 년 전에 불현듯 태어나, 꾸물거리며 돌아다니다, 지금 여기에 있는 '나'는 '내가 있음'의 생각에 불과하다.

말씀을 들어서 얻는 이해와, 사유를 통해 얻는 이해와, 명상을 통해 얻는 이해가 있다.
그 과정을 통해, 사유가 <넓어>지고, <깊어>진다.

나는 많이 읽기는 하지만, 사유는 조금 한다. 리뷰를 쓰는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읽으면서, 읽고 나서 사유를 통해 이해하려는 마음. 그렇지만 명상은 많이 부족하다. 읽고 사유하지 않는 명상은 공허할 수 있으나, 나처럼 읽고 사유는 많지만 명상하지 않으면 근기가 부족해질 수 있다.

세상사에 쉽게 지치고, 맥을 놓게 되는 것이다.

자비는 모든 중생이 고통에서 해방되기를 바라는 것이란다.
자애는 모든 중생이 즐겁고 행복하기를 바라는 것이라 하고.
마음을 조심스레 다스리고 뭇 중생의 안녕과 행복에 대한 우리의 관심이 성장하리라는 것을 인내와 끈기로 확신하며 정진 또 정진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말씀이다.

이 책을 읽으며, 내 직업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아이들 앞에서 아이들이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보고 있다.
그들이 행복하지 못하고, 즐겁지 못한 것을 보고 있다.
마음 속으로는 그들에게 행복하라고, 바라 보지만... 인내와 끈기로, 정진 또 정진을 다짐해 보게 하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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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 2006-05-19 1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고 갑니다.

글샘 2006-05-20 0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을수록 모르게 되는 것이... 명상을 못했기 때문인가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