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산책
김수덕 지음 / 한문화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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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새벽에 산책을 나가 본 지가 얼마나 오래 되었던지... 책제목을 만났을 때, 뜨끔했다.

이 책을 읽을 때는 천천히 읽어야 한다. 조금씩.

마음의 허리띠를 느슨하게 풀고, 조용한 곳에 앉아서 과자먹듯이 야금야금 읽어야 좋다.

책이 얇아서 어디든 가지고 다닐 수도 있고, 화장실 같은 데 놓아 두어도 좋을 만한 책이다.

우주의 미래가 내 한 손에 달려 있다는 생각을 한 시도 접지 말되,
내가 하는 일이 대단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 때마다 그걸 비웃어라!

나의 단점을 콕 찔러 보여주는 한 마디가 아닐까. 자신이 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툭 하면 놓쳐버리고 마는 나. 그러면서도, 가끔 내가 하는 일이 잘 안 될때면 스스로 자책감에 빠져버리는 한심한 나. 가끔은 내가 하는 일이 옳다는 독단에 빠져버려 길을 잃어버리기도 하는 나...

나는 가장 중요한 존재이지만, 또 나는 가장 보잘 것 없는 존재임을 늘 깨달아야 한다.

나는 이렇게 한심한 존재이지만 걱정할 필요가 전혀 없음도 가르쳐 준다.

우주의 대생명력의 큰 강줄기 위에 우리 자신을 맡기고 우리는 찰나찰나 항상 기뻐하고 서로 사랑하면 되는 존재. 그래서 그 사랑을 실천해야만 성장할 수 있다는 지극히 평범한 이야기를 조용하게 들려주는 책이다.

一始無始, 一終無終 이것은 시작이 없는 시작이고, 끝 없는 끝이다. <천부경>

내 존재가 그러하고, 내 삶이 그러하고, 내 죽음이 그러하다. 세상의 모든 것이 시무시고 종무종이다. 마음을 비우는 사람만이 볼 수있는 말이다.

우리 삶에 예비되어 있는 보물을 믿지 못하고, 보물 찾기하는 어린이먀냥, '보물이 있긴 있는 거야?'하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것만으로는 깨달음의 즐거움을 얻을 수 없다는 이야기도 재미있다.

텔레비전에서도 무슨 비타민 하면서 웰빙, 건강을 외치는 이 상품의 시대에, 잘 사는 건 좋은데, 그 건강으로 다들 무얼 하고 있나? 하는 질문은 참으로 시의적절한 것이 아닐까?

공부 잘 하는 건 좋은데, 공부 잘 하는 사람들, 다들 무얼 하고 있나?
돈 많은 건 좋은데, 돈 많은 사람들, 다들 무얼 하고 있나?

욕심에 빠지고, 어리석음에 갇혀 허우적 거리며 살고 있잖아...

새벽에 깨어나는 것조차 어려운 나에게... 새벽 산책은 언감생심, 어렵기만 하다.

그렇지만, 해가 뜨기 전, 동틀 녘의 갓밝이를 즐기는 것이 얼마나 흐뭇한 일인지를 나도 아는지라,
멀리 여행가기 전에라도, 고요한 아침을 느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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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이란 무엇인가?
스즈키 다이세쓰 지음, 이목 옮김 / 이론과실천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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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책을 받아들이는 것은 머리가 아니라 마음이다. 머리로 이해하는 것은 처음의 독서이고, 마음이 받아들이는 것이 궁극의 독서다.

이 책을 반 쯤 읽다가 던져 두었던 것이 미안해서, 다시 주말을 이용해서 곰곰 읽어 보았다. 다 읽긴 했지만 역시 오리무중이다.

제목처럼 선이란 무엇인지... 거기 대해서 깨달음까지는 아니더라도 심정적 동조라도 얻고 싶었던 기대치는 차치하고, 스즈키 다이세츠라는 유명한 사람에 대해서까지 불신하게 되는 책이 되고 말았다.

서양 사람들의 불교 이야기를 읽노라면 스즈키 선사에 대한 스승으로서의 존경심이 두드러져 보인다. 그래서 읽었건만, 번역의 문제일지, 내 심보의 문제일지...

서양에게 동양의 존재는 신비스런 것이었다. 고요한 은자들이 사는 곳으로 상상되는 곳이었다.
그들에게 동양의 불교를 알린 것은, 원산지 인도도, 발흥지 중국도, 선불교의 보고 한국도 아닌, 군국주의자들 일본 사람들이었다. 사실 서양이 알고 있는 동양의 역사, 동양의 철학, 동양의 사상은 모두 일본 사람들이 소개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 세기를 번역에 바친 일본인들의 헌신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불교도 마찬가지인 것을 보고 머리가 아찔하다.

한국 불교가 높다는 것이 아니다. 불교의 모습을 제대로 밝히고 선의 정수를 드러내기에는 이 책의 존재가 그를 위해 죽어준 나무에게 미안하다.

글쓴이든, 번역자든, 잘못 읽은 나든, 누군가는 회초리를 맞아야 할 것인데, 나는 회초리를 피하고픈 생각에 몇 자 적는다. 아직 잡스런 생각이 가득할 뿐, 마음이 허허로운 탓이리라... 여기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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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 2006-09-12 17: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을 읽고 실망을 했습니다.
분명히 예전에 본 낡은 책의 제목이 이것이었는데... 하고 말이죠...
근데 다이세츠의 같은 제목을 달리 옮겨놓은 책이 있습니다.
'아홉마당으로 풀어쓴 선'입니다.
이 책은 아마 글샘님의 꼬인 마음의 실타래를 좀 풀어줄 것이라 생각합니다.

글샘 2006-09-13 0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저랑 같은 마음으로 책을 읽으셨다니 좀 위로가 되는군요. ㅎㅎㅎ
다이세츠의 그 책을 찾아봐야겠습니다.^^
 
이 뭐꼬 - 마음에 새겨듣는 성철 큰스님의 말씀
성철 스님 지음 / 김영사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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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성철 큰스님의 법어집이 열 몇 권 된다는데, 그걸 다 읽을 마음을 내진 못하겠고, 법어들중 간략한 구절들을 뽑아 둔 책이 있어 마음을 두고 읽는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라던 말씀으로 유명하신 성철스님.

산을 산으로 볼 줄 알아야 한다. 산을 자연 자원으로 거기서 금을 캐고, 산의 물을 막아 댐을 만들고, 국립공원으로 개발해서 관광단지를 만들면 산은 이미 자연으로서의 산이 아닌 '교환 가치 덩어리'로서의 산이 되어버리고 만다.

한국은 교육부의 이름이 '교육인적자원부'로 바뀐 지 몇해 되었다. 사람을 사람으로 볼 수 있어야 하는데, 사람은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부처라고 했는데, 그 사람을 인적 자원으로 본다는 것은 사람도 교환 가치 없으면 인간으로 보지 않겠다는 뜻인지...

낮은 곳으로, 더러운 곳으로 부처님은 가신다고 한다. 아니, 낮은 곳도 더러운 곳도 없는 중도를 실천하려함은 상없는 진리를 가르치는 것일게다.

불교란 세상과 거꾸로 사는 것이라는 구절이 돋보인다. 세상은 내가 중심이 되어 나를 위해 사는 것인데, 불교는 나를 버리고 세상을 위해서 사는 것이라는 말씀. 무겁게 듣고 무겁게 행할 일이다.

자기 자신이 순금 덩어리이고, 자기가 선 자리가 순금 덩어리임을 잊지 말라는 큰스님 말씀은 자꾸 교환가치로 달아나는 마음을 지긋이 눌러 주신다.

돌덩어리나 금덩어리나 짊어지고 있으면 힘겹긴 마찬가진데, 유별나게 인간은 금덩어리를 분별할 줄 안다. 그래서 만물의 영장이니 척도니 하지만, 사실은 그 분별이 인위를 시작하고 모든 불행을 배태하는 것이다. 분별할 줄 아는 지혜를 놓아 버리고 재물병, 여자병, 이름병에서 놓여나는 길은 내 마음을 끊임없이 다스리는 노력 뿐일게다. 그래야 '봉사는 있어도 구제는 없다'던 큰 스님 말씀대로, 외양에서 놓여나는 길이 뚫릴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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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의 황금시대 - 인간 정신의 위대한 경지를 보여준 禪의 역사와 그 정신
존 C. H. 우 지음, 김연수 옮김 / 한문화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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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용은 이렇게 시작한다.

하늘이 명하는 것이 곧 본성이며,       天命之爲性
이 본성을 따르는 것이 도이고,           率性之爲道
도를 닦는 일이 곧 가르침이다.           修道之爲敎

모든 종교란 곧, 이 마음 둘 곳을 찾는 길이다. 철학도 그러하고, 문학도 그러하다. 거기 붙인 이름이 철학이고, 문학이고, 종교학일 따름이다.

인간의 본성을 따르는 도의 길을 닦는데, 가르침을 앞세우는 것이 교종이라 하고, 곧장 사람의 마음으로 짓쳐들어 가는 방법을 선이라고 한다. 내가 이해하기론 그렇다.

선의 황금시대는 당나라 고승들의 선문답과 수도를 재미있게 쓰고 있는 책이다.

육조 혜능, 마조 등의 이야기는 워낙 여기저기서 많이 듣던 이야기지만, 읽을 때마다 새로운 것이 선 이야기 아닐까? 나처럼 미욱한 눈으로는 그분들의 걸릴 것 없는 목소리들이 당황스럽고 그야말로 똥막대기처럼 낯설지만 거침없는 목청과 주먹질은 삶을 통쾌하게 한다.

모순, 불일치, 기행, 논리를 벗어난 이야기들은, 우리 삶이 곧 이런 모순의 부평초임을 생각하게 한다.

직관에 의한 경험론적 확실성을 추구하는 선은, 나의 존재로부터 진실을 시작한다. 나는 생각하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존재하므로 생각할 수 있단 것이다. 오직 생각만으론 절대로 넘어갈 수 없는 문지방, 거기를 넘어가는 경험들이 이 책에는 가득하다. 낮은 곳의 경험, 더러운 것의 경험, 가난과 병과 죽음의 경험들 말이다.  선은 아무 것도 가르치지 않지만, 곧바로 가리킨다. 선사들의 행동과 몸짓이 울려주는 자명종 소리를 듣고 곧장 '이 무엇'에 도달하라는 것이다.

형체도 색깔도 아무 것도 없는 자유로운 '그 무엇'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구차한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그 뭔가가 있다는 것이다.

공자 왈 : "얘들아, 너희들은 내가 너희들 모르게 뭘 감춰두었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너희들에게는 하나도 감춰둔 게 없다." 그래. 가르친다고 끙끙거릴 일 하나도 없다. 아이들은 다 안다. 어느 선생님이 가르칠 게 있는지, 어느 선생님에게서 배울 것이 없는지...

성 요한 : 아래로, 아래로 몸을 수그려 더 높이, 더 높이 나는 올라가니 바라던 곳에 이르는 방법이로다.

知者不言 言者不知. 아는 이는 말하지 않고, 말하는 이는 알 수 없다. 이 곧 불립문자, 교외별전, 직지인심의 소통법이다.

네 마음을 꺼내 놓아라... 고 외치시는 선 지식들을 책으로나마 만나는 일은 진흙 속에서 연꽃이 흙탕물 한 점 튀기지 않고 피듯이, 오롯이 서 있는 온전한 그 마음을 서늘하게 한다.

한 물건은, 갈고 닦을 게 없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본래 더럽혀질 수 없었던 것이어서 그렇다.

마땅히 어디에도 머무름이 없이         應無所住
그 마음을 살아있게 하라.                    而生其心

금강경의 한 구절이 비오는 아침, 수억의 빗방울에 경배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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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 이후 빨랫감 - 깨달음, 그 뒤의 이야기들
잭 콘필드 지음, 이균형 옮김 / 한문화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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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인 깨달음은 종지형으로 착각되고 있다.

부처가 깨닫고 더는 혼란에 빠지지 않은 듯이 생각하는 것. 완벽한 천국이 도래하는 것처럼 착각하는 데서 오는 미망이다.

부처의 깨달음이 무상무등정각인 이유는, 색즉시공 공즉시색을 보았기 때문이다.
마땅히 마음 잡히는 곳이 없어야 이 곧 벗어남이라 할 수 있는 경지를 보았기 때문이다.

빨랫감으로 보이는 일들이 있다면 아직 깨달음의 경지에 다다른 것이 아니라고 해야겠지.

깨달음이라고 착각되는 엑스타시를 겪었다 치더라도, 늘 그렇지는 않다는 것.

'내려 놓으라, 내려 놓으라, 내려 놓으라.'는 말밖에 되뇔 줄 모르는 지렁이가 되는 것. 이 궁색하기 짝이없는 수행법이 인간이 가진 모든 것이라는 것. 이것을 깨달은 것이 부처님의 법인 것이다.

매 순간 가져다 주는 것이 무엇이든 그 속에서 깨어있고 자유롭게 존재하는 나를 추구하는 공부는 그래서 쉬임없어야 하는 것이리라.

연꽃 속의 보석(옴 마니 밧메 훔)을 발견하기 위하여...
별 셋에 반달(마음 심 心)이 곧 부처되는 하나의 길임을 잊지 않고 성성적적 깨어있기 위하여...

결국 깨달음은 이전도 이후도 없는 것임을, 상 없음을 매 순간 생각하며 살아야함을 되뇌어 반복함이 빨랫감을 사랑하게 되는 길임을 생각하게 하는 책이다.

서양인이 쓴 책이라 그런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자꾸 눈에 보인다. 그래서 별 하나 감점.

아시시의 성인 프란치스코의 평화의 기도

주님,
저를 당신의 도구로 써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신앙을,
그릇됨이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두움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는  자  되게 하소서.

위로받기 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여  주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테레사 수녀님께서 한 번에 한 사람씩 사랑할 수밖에 없다시던 말씀이, 곧 오늘 이 순간에 최선을 다하는 길밖에 다른 수행의 길은 없음을 가르치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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