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나긴 하루
박완서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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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의 글을 읽는 것이 힘들 때가 있다. 전쟁을 겪은 세대는 그렇지 않은 세대와 다를 수밖에 없다. 마음과 육체에 남긴 상흔은 생각과 언어로 나타난다. 작가가 여러 작품에서 반복적으로 쓴 자전적 이야기나, 창조한 인물들에 투사한 생각과 언어는 나의 결과 맞지 않았다. 작가가 지나온 세월도 그렇지만 타고난 기질 때문에 그가 쓰는 언어와 마음에서 퍼내는 솔직한 감정들이 불편했다.

 

이 단편집 역시 그런 지점들이 많았다. 다수의 작품에서 보았던 유년기, 전쟁의 기억, 상실에 마음이 아프기도 했지만, 부정적 감정을 여과 없이 표현하고 있어 마치 가시덤불 사이를 긁히며 걷고 있는 것 같았다.

 

석양을 등에 지고 그림자를 밟다는 다른 여러 작품에서 읽었던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다. 할아버지의 사랑을 받으며 자랐고, 기억에 없는 아버지의 부재를 느낄 수조차 없었지만 아버지의 사진을 들여다보는 것이 청승을 떠는 것처럼 보일까봐 그래서 식구들이 불쌍해할 것 같아서 보지 않았던 최초의 자의식에 대한 기억은 작가의 성품을 엿보게 해준다. 남편과 아들을 연이어 잃는 두 번의 상실, 특별히 아들을 잃은 후, 그녀를 힘들게 했던 감정은 수치심이었다고 한다. 스스로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런 형벌을 받는가라는 질문이 만들어낸 감정이었다. 그 수치심은 자연스럽게 분노로 바뀌었다. 그녀는 부재하는 집에서 헛되게 울릴 전화벨 소리, 쌓여 있는 우편물 생각을 하면 누구에게랄 것 없이 고소한 생각이 드는 것 정도가 즐거움”(36p)인 여행을 떠나고 그 후로도 무감한 상태의 여행은 계속되었다. 이탈리아 여행 중 몸살을 앓으며 버스 안에서 파바로티의 노래를 듣다가 격정에 휩싸인다. 인턴이던 아들의 첫 번째 비행기 여행이 생명유지 장치를 단 임종직전의 환자를 제주의 집까지 데려다주는 임무였다는 기억을 떠올린다. 목 놓아 울고 싶은 감정의 폭발과, 고열로 앓았다. 돌아 온 그녀는 설렘과 볼일도 없는 여행은 다신 안 할 것이라고 결심한다.

 

상실 후 인간이 받아들이는 단계는 비슷할 듯하다. 나도 그런 상황라면 같은 감정에 휩싸일 것 같다. 카프리섬을 향하는 버스에서 행복감일지 슬픔일지 정체 모를 황홀경과 함께 찾아온 누르기 힘든 감정은 내 안에도 파토스를 만들어냈다. 언제 어느 곳에서 무엇에 의해 촉발될지 모르지만, 마음의 둑이 무너지고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받아들이는 비상한 상태를 맞게 되는 순간이 있다.

 


수록된 단편 중 인상적이었던 작품은 빨갱이 바이러스. 친정 부모님께 물려받은 고향집에 가끔 내려오는 주인공 가 폭우 때문에 길이 막힌 날, 버스 정류장에 서있는 세 여자를 만나는 장면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가 세 여자들을 소아마비’ ‘’ ‘보살님이라고 마음속으로 이름을 붙이는데서 나는 불쾌감을 느꼈다. 소설이지만 주인공 '나'의 오만함이 미웠다. 그녀들을 자신의 집에 묵게 하고 식사를 대접한다. ‘가 자신도 모르게 입 밖으로 소아마비하고 부르는 장면에서 경악했다. 더 놀라운 것은 그 호칭에 아무 불쾌한 반응을 보이지 않는 여자의 태도다. 아무렇지 않게 자신은 소아마비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장애를 입게 된 사연과 이 곳에 오게 된 비밀을 털어놓는다. 그리고 이어서 다른 여자들도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상상할 수 없는 삶이었다. 자신에게도 비밀을 털어놓으라는 재촉을 뿌리친 는 생각한다.

 “당신들은 왜 나에게 그런 무섭고 천박한 비밀을 털어놓은 거죠? 날 언제 봤다고, 날더러 어쩌라고?”(80p)

사실 는 그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을 안고 있다. 어릴 적 인민군이었던 삼촌을 아버지가 삽으로 치는 광경을 보았고, 그 삼촌을 삽으로 마당에 묻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살아왔다. 친정집을 물려받으면서 그 비밀까지 떠안았다. 그래서 집을 헐고 새집을 짓지도 못한다. 혹시 유골이 나올까봐. 삼촌이 그날 밤 죽지 않고 북쪽에 살아있을 것이라는 가능성이 더 큰데도 어린 나이에 받은 충격은 그 사건을 깊이 묻어두었다. 어른들에게 물어 볼만도 한데, 단단하게 양회를 바른 마당처럼 그녀도 입도 막아버렸다. 마당과 그녀의 입은 둘 다 폭력을 삼켰다.”(90p)

 

어떤 비밀과 상처는 낯선 이를 만나 떠들고 헤어지면 그만이다. ‘의 것은 꺼낼 수 없는 곳에 있다. “어떤 상처하고 만나도 하나가 될 수 없는 상처를 가진 내 몸이 나는 대책 없이 불쌍하다.”(91p) 고 한 마지막 문장은 작가가 가진 정서의 주조(主調)일까? 누군가의 단단한 마음 안에는 오래된 백골과 같은 숨겨져 있는 무시무시한 상처가 있을 테다. 무서운 시절과 아픈 역사가 바르고 다져놓은 시멘트 안에!

 

왜 나는 박완서의 작품을 편하게 보지 못할까를 다시 생각한다. 가끔 읽다가 덮고 싶을 정도로 작가가 표현하는 증오, 분노, 오만, 비루함, 천박함이 공격적으로 다가올 때가 있다. 이게 문학이야? 하고 날이 선다. 고백하자면 그 추한 감정들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작가의 글을 읽는 것은 냄비에 눌러 붙어 있는 찌든 때를 수세미로 벗겨내는 것 같다


여러 개의 단편에는 후배 작가들의 편지 글이나 소감이 붙여있다.

책장을 열면, 당신의 인물들이 기우뚱한 욕망을 안고 내 쪽으로 절름거리며 다가온다. 나는 이들을 잘 알아본다. 허영이 혀영을 알아보듯, 타락이 타락을 알아채듯 제법 간단히. 어떤 악은 하도 반가워 나도 모르게 큰 소리로 알은체할 뻔하기도 한다.”(257p)

김애란 작가가 덧붙인 글을 읽다가, 나야말로 반가워 큰 소리로 알은체할 뻔했다. 책장을 덮지 않고 끝까지 읽기를 잘했다.

 

요즘, 독서를 하는 나와 현실의 나 사이에 분열된 자아를 종종 보게 된다. 박완서의 소설 속 인물들이 깊은 아픔을 겪었음에도 여전히 성품은 살아서 불쑥불쑥 드러나는 것에 눈물이 날 정도로 깊은 절망감을 느낀다. 절름거리며 다가오는 그들에게서 나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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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2-03-10 18:3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그레이스님 이 리뷰 너무 좋아요! 무엇이 발췌문이고 무엇이 그레이스님의 글인지 헷갈릴 정도로 온통 마음을 뒤흔드네요.🥲

그레이스 2022-03-10 18:37   좋아요 4 | URL
감사합니다^^ ~♡

mini74 2022-03-10 20:03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냄비에 찌든 때를 수세미로 벗겨내는 거 같다는, 절름거리며 다가오는 그들에게서 나를 본다는 그레이스님 글들 너무 와닿아요. 박완서 글을 읽으며 묘한 감정이 그 속에서 나를 봤기 때문인가봐요. 그레이스님 글 👍 두고 두고 읽고 싶습니다 ~

그레이스 2022-03-10 20:04   좋아요 4 | URL
감사합니다.
오늘은 무지하게 감상적이 되네요^^

2022-03-10 22: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3-11 00: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희선 2022-03-11 00:2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누군가한테 말하고 버려도 괜찮을 비밀이 있는가 하면 말하지 못할 것도 있는 것 같아요 비슷한 곳에 있다 해도 저마다 느끼는 것도 다르고... 이건 병원에서 느꼈던 거기도 한데... 동병상련이라 해도 조금 다르기도 하죠


희선

그레이스 2022-03-11 05:16   좋아요 3 | URL
병원!^^
맞아요
거기서도 같은 병실 사람들끼리 온갖 얘기하죠^^
퇴원하면 다신 안보니까^^

2022-03-11 04: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3-11 05: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서니데이 2022-03-12 01:1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박완서 선생님의 책에서는 80-90년대의 서울 중산층이라는 것도 있지만, 과거 전쟁을 겪고, 일제 식민지 시대를 겪었던 사람이 쓸 수 있을 내용도 있었고, 그 기억이 사라지거나 지워지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게 되는 이야기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벌써 10년이 더 지났지만, 한번도 뵙지 못해서인지, 늘 장년기의 흑백사진이 익숙합니다. 잘읽었습니다. 그레이스님,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그레이스 2022-03-12 07:40   좋아요 3 | URL
그렇죠?!
서니데이님도 즐거온 주말 보내세요~^^
 

그날 밤 남편한테 세미한테 듣고 온 그 말도 안 되는 이혼사유를 말해줬더니 그가 말했다. 남자들의 뇌는 결국은 엄마닮은 여자가 마음 편하게 돼 있다더니 맞는 말이구만, 곰처럼무뚝뚝하고 둔한 어미에게 질려서 아들이 여우 같은 여자에게끌렸을 거라고 말할 때는 언제구. 이 집에서 못된 바람은 다나에게로 불어온다. 대답 대신 큰 소리로 하품을 했다. 걷잡을수 없이 잠이 밀려왔다. 자야겠다. 누가 업어가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코 골며, 아 아, 간간이 신음하며, 남편이 관찰한 나의 자는 모습이다. 그러나 그도 나의 꿈속은 들여다보지 못한다. - P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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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땅속에서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면? 실은 내가 더 무서워하는 건 삼촌이 그날 살해되지 않고 북쪽 어딘가에 살아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었다. 삼촌의 성품이나 행적으로봐서 그럴 개연성은 충분했다. 남편이 법조계에 몸담고 승진도 순조로울 때는 세상이 요새보다 훨씬 경직돼 있을 때여서,
처가라도 이북과 연관이 있는 가족이 있으면 승진이나 출세는물론 해외여행에도 지장을 받을 때였다. 남편은 나에게 그런삼촌이 있는 것도 몰랐다. 나는 그 살해 현장을 단지 목격만한 게 아니라 공범자였던 것이다. 나의 시골집 마당은 아직도흙바닥이지만 양회 바닥처럼 단단하다. 내 친구의 어머니 시신까지 하룻밤 사이에 동해바다로 토해낸 폭우도 우리 마당의견고함을 범하진 못했다. 나의 입과 우리 마당은 동일하다. 둘다 폭력을 삼켰다. 폭력을 삼킨 몸은 목석같이 단단한 것 같지만 자주 아프다.
- P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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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2-03-09 17:1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제목은 들어본 책이지만, 잘 몰라서 찾아봤는데, 박완서 선생님 돌아가시고 1년 지나서 나온 책이네요.
생각해보니, 지난해가 벌써 10주기였어요. 시간이 정말 빨리갑니다.
그레이스님, 오늘 휴일 잘 보내고 계신가요. 편안한 하루 보내세요.^^

그레이스 2022-03-09 18:54   좋아요 2 | URL

맞아요
이미 알고 있던 내용도 있구요
여전히 감동인 지점도 있습니다
 

그들의 행운과 모험, 그리고 적어도 각자가 한 번쯤은 경험할 기적같은 시간이, 저 북쪽 사막으로부터 올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더 불분명해지는 이 막막한 우연을 위해, 군인들은 인생의 전성기를 요새에서 소모하고 있었던 것이다.
- P71

드로고는 요새에 남기로 결정했다. 어떤 욕망에 이끌린 결정이었지만 단순히 비장한 마음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 순간 그는 어떤 고귀한일을 해냈다고 믿으며 자신한테 생각지도 못한 선의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란다. 다만 겨우 몇 달만 지나도 지난 시절을 돌이켜보며 요새를 떠나지 못하도록 그의 발목을 붙들던 비참한 것들을 인식하게 될 것이다.
- P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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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remy 2022-03-07 04: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It was from the northern steppe that their fortune would come,
their adventure, the miraculous hour
which once at least falls to each man‘s lot.
Because of this remote possibility which seemed to become
more and more uncertain as time went on,
grown men lived out their lives pointless here in the Fort.

― Dino Buzzati, The Tartar Steppe p. 60

Grace 님이 인용하신 글은 저도 밑줄 좍좍 그어 놓은 문장.
두 번째도 밑줄 그어 놓았지만 길어서 통과.

그레이스 2022-03-07 05:11   좋아요 1 | URL
영문으로 읽고 싶은 마음이 드네요.
감사합니다

레삭매냐 2022-03-07 09: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간 내서 다시 읽어 보고
싶어지네요...
 

드로고는 자신이 앉아 있던 자리에서 총안처럼 생긴 작고 좁은 창문너머로 북쪽 골짜기, 그 슬픈 땅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하지만 그 순간에는 어둠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펜은 종이 위에서 조금 더사각거렸다. 밤이 온 세상을 장악하고 있었지만 보루를 에워싼 방어벽사이로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하며 뜻 모를 메시지를 전해주었다. 보루안에는 짙은 어둠이 밀도를 더했고 공기마저 습하고 불쾌했지만, 조반니 드로고는 ‘모든 면에서 저는 아주 만족하며 잘 지내요‘ 라고 적어내려갔다.
- P59

우리보다 앞서 기다리고있는 놀랍고 환상적인 일들을 미리 맛본다. 아직 그 일들은 보이지 않지만 언젠가 우리가 그것에 다다르리라는 것은 틀림없으며 절대적으로 확실하다.
그것이 멀리 있느냐고? 아니, 저 아래 강을 건너기만 하면 되고, 저푸른 언덕을 넘어가기만 하면 된다. 아니, 어쩌다 벌써 도착한 것은 아닐까? 이 나무들과 초원, 이 하얀 집이 우리가 찾고 있던 게 아닐까? 잠시 그런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거기에 머물기를 바랄 수도 있다. 그러면 이런 말이 들려올 것이다. 가장 좋은 것은 더 멀리 있으니 괴로워 말고 다시 길을 떠나라.
그리하여 신뢰에 찬 기다림 속에서 걸음은 계속된다. 하루하루 날은길고 평온하다. 태양은 다시 하늘에서 높이 빛나고, 결코 석양으로 저물지 않을 것만 같다.
하지만 어떤 시점에서 우리는 거의 본능적으로 뒤를 돌아본다. 그러면 등뒤에, 돌아갈 길이 막힌 채 빗장이 질린 철문이 보인다. 그 순간 무언가 변했음을 느낀다.  - P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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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2-03-06 17: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인용해주신 내용의 두번째 문단 내용이 좋은 것 같아요.
그레이스님, 주말 잘 보내고 계신가요.
편안한 오후 시간 되세요.^^

그레이스 2022-03-07 06:29   좋아요 2 | URL
매일 조금씩 읽어가고 있어요
적은 분량으로 나뉘어 있어 좋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