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풍요로웠고, 지구는 달라졌다
호프 자런 지음, 김은령 옮김 / 김영사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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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평이하다는 느낌으로 읽었다. 왜일까? 그동안 환경에 대한 정보를 너무 많이 접해서였을지 모르겠다. 책에 담겨진 내용들이 나를 각성시키지 못하는 것은 충격적이지 않아서가 아니다. 내가 많이 무뎌졌다는 것은 반증하는 것이다. 사실 환경에 대한 이야기는 새로울 수가 없다. 오래 전에 경고해 왔고, 계속 그 방향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오염, 온난화, 멸종 등을 향한 방향은 바꾸거나 늦추기에 너무 거대한 흐름이 된 것처럼 느껴진다. 이 거대한 쓰나미 경고를 받고 쌓는 둑은 미약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무감각하고 나태해진다. 무력감이 들었다. 혹시 나는 웬만큼 자극적인 내용이 아니어서는 반응을 보이지 않는, 지식만 쌓고 실천이 없는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도서관에서 환경 챙김이라는 주제의 책들을 추천하고 선정하는 포로그램을 추진 중이다. 그 시민 선정위원으로 참가하고 있다. 다른 사람들에게 권하기 위해 읽어야 하는 의무감도 나의 무감함에 한 몫 했지 싶다. 흥미를 일으키는 책을 찾으려는 의도로 읽었기에 자극적 문구가 없는 문장에 담긴 작가의 메시지가 단조롭게 다가왔다.

 

작가의 지구 환경에 대한 경고는 차분하다. 말문을 여는 유년의 기억들은 아름답다. 연구 논문과 통계와 과학적 예상으로 전개해 나가는 논리에 경광등과 같은 자극은 감춰져 있다. 그럼에도 근거자료들 앞에서 던지는 순수하게까지 느껴지는 정직한 질문들은 환경에 나태했던 삶에 대해 돌아보게 한다.

 

급격한 도시화와 식량문제, 집약적 농사법에 따른 비료, 농약, GMO식품으로 인한 문제들, 음식섭취의 빈부격차 등을 다룬 후 질문한다. “정말 이렇게 살고 싶은가?”라고.

 

인류는 어제보다 더 풍요로운 삶을 위해 자원을 사용해왔다. 그 자원은 하늘 땅 바다 그리고 사람이다. 저자는 이 세상의 모든 결핍과 고통, 그와 관련된 모든 문제는 지구가 필요한 만큼을 생산하지 못하는 무능이 아니라 우리가 나누어 쓰지 못하는 무능에서 발생한다”(127p)고 이야기 한다. 덜 소비하고 더 많이 나누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 스스로를 구하는 시작점이 될, “확실하고 유일한 방법”(127p)이다. 에너지 사용량과 관련하여 제시하는 자료들과 비교를 예를 들면 “1970년과 오늘날 사이에 운전의 전체적인 증가로 미국, 중국, 인도 세 나라의 연료 사용량은 스물네 개의 미시시피 강에서 한 시간 동안 흐르는 수량에 맞먹는, 엄청난 양이다.”(140p)라는 것이다. 실감나는 비교였다. 1939년 이후 에너지 고갈과 관련한 주장을 한 과학자들은 양치기 소년이 되어버렸다. 물론 기후와 환경 과학자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모두는 이것이 예측 시간이 뒤로 미뤄질 뿐 반드시 올 것이라는 사실을 예감한다. 그러므로 반드시 대체연료를 찾아내는 일을 미루지 않아야 한다.

 

평균적인 지구 온도 상승을 섭씨 2도보다 훨씬 낮게’(파리협정에서 그대로 따온 표현) 유지하기 위한 권고 사항들은 폭염, 가뭄, 해수면 상승, 해양 산성화, 흉작 등의 모든 재앙을 막기 위함이다. 이런 예측이 맞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의견이 있지만 새로운 연구 결과들은 비관적이다. “이런 두려움에 대해 우리는 더욱 두려워하는 것으로 응답하지만 정작 실재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충분히 두려워하지 않는다”(190p)고 한다. 불과 2세기 전 석탄을 때기 시작했으니 지금부터 200년 후를 상상해본다면 두려운 일이다. 풍요의 이야기가 모든 사람의 이야기가 된다면 400년 만에 지구는 어떻게 달라질지를 예상하는 일은 그리 많은 상상력이 필요하지 않다.

 

자료들은 다양하고 새로운 것이 많았다. 그 자료들이 가리키는 진실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것들이다. 식량, 에너지, 환경, 멸종. 아마도 그래서 새롭거나 자극이 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단조롭게 읽어가던 중 부록을 읽으면서 각성되었다. <당신이 취해야 할 행동>에서 나의 가치관을 살펴보고(Step1), 정보를 모으고(Step2), 가치체계에 합당하게 행동할 수 있을까?(Step3) 자신의 가치관에 합당하게 개인 투자를 할 수 있을까?(Step4)를 단계별로 점검해보라고 한다.

저자가 고등학생이었을 때 스캔들을 일으킨 한 의사이야기는 생각할 지점이 있다. 간과 신장 이식으로 유명한 의사였는데, 인터뷰에서 건강을 위해 붉은 육류를 피할 것을 강조했던 그는 실제로 파파이스 프라이드 치킨 앤드비스킷 매장의 소유주인 것으로 밝혀졌다. “병 주고 약 주는의사였다. 가치체계에 합당하게 행동하지 못하는 예이다.

또한 저자는 햄버거로 인해 아팠던 경험 이후 거대 패스트푸드 업체에 대한 논문을 쓰기도 했다. 그 기업들이 4년 전 돼지저금통까지 탈탈 털어 투자한 곳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에피소드는 자본주의 시대에 가치관에 따라 실천하며 살아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알려준다.

 

이 책의 압권은 저자가 글을 쓰기 위해 찾아낸 사이트와 문헌들을 소개한 마지막 부분이다. 엄청난 양의 출처와 읽을거리들을 분류해서 이야기하듯 소개하고 있다. 그 양이 많은 것도 그렇지만 그 소스에 접근하는 것이 쉽다는 사실에서 더 놀란다. 그리고 무엇을 선택하고 어떤 데이터를 중요하게 다루어야 할지에 대한 선택과 분류의 능력에 대해 감탄했다. 잘못된 자료나 너무 오래된 데이터에 대해서는 update해줄 것을 요청하는 것도 놓치지 않았다. 이 자료들을 보니 앞부분에 서술한 내용들이 그저 평이하고 단조롭게 다가오지 않았다. 다시 앞으로 가서 읽어보며 그렇게 느꼈던 것은 독자인 내게 문제가 있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질문한다. 나는 가치체계에 합당하게 행동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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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라디오 2023-06-02 10: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을 읽으면서 각성이 되지 않고 무력감이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나 하나 쯤이야라는 생각을 버리고 작은 일부터 신청해야겠습니다.

늦었지만 당선축하드려요^^b

그레이스 2023-06-02 11:04   좋아요 1 | URL
ㅎㅎ
고양이라디오님 덕분에 다시 읽었어요.
나태해진 저를 돌아봤구요.;;
감사합니다 ~

고양이라디오 2023-06-02 14:08   좋아요 1 | URL
저도 덕분에 다시 상기했습니다. 감사합니다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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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 시작하면서부터 왜 이런 소재를? 하는 생각이 드는데, 읽어야할 책이라 읽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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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2-05-11 13: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표지가 처음엔 2분할이라 생각했는데 자세히 보니 3분할 같아요^^ 지구밖 우주까지....뭔가 SF적인 소설일까?^^ 상상해봅니다

그레이스 2022-05-11 14:30   좋아요 1 | URL
sf맞아요^^
읽다가 중단 중입니다
 


환경관련 책을 찾다가 작가를 알게 되었다. (지구는 괜찮아 우리가 문제지』). 서재에도 신간 소개가 올라왔다. 다른 많은 작품들과 동영상들을 검색했다. 작가가 출연했던 방송 프로그램 ‘*퀴즈를 통해 그의 경력을 본 감상은 재미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다. 과학에, 글쓰기에 진심이다. 카이스트 조기졸업 공학박사 경력을 소유한 그가 SF소설을 쓰면서 무명작가가 되었다. 전망 없어 보이는 그는 절필하고 싶었다고 한다. 그의 책 중 글쓰기에 관한 책 항상 앞부분만 쓰다가 그만두는 당신을 위한 어떻게든 글쓰기, 삶에 지칠 때 작가가 버티는 법등은 그런 경험과 관련 있는 것 같다. 슬며시 소설을 안 쓰고 살아보려고 했던 그가 다시 글을 쓰게 된 것이 이 소설이다. 뭐든 써보자는 생각으로 시작한 것이 이 소설, 이미영 사장과 김양식 이사라는 사람이 우주를 돌아다니며 이런 저런 돈 되는 일을 하는 이야기다. 그렇게 10년 동안 썼던 연재들을 모아놓은 책이다.

 

우주 은하시대 동업자 미영과 양식이 하는 사업은 은하계 대행사라고 해야 할까? 인간의 개입으로 지적 능력을 소유하게 된 청우와 같은 생명체가 있고, 어떤 것을 보존할 것인가와 관련된 우주의 지적 생명체 보호법시행령과 시행규칙도 있다. 테라포밍 로봇을 이용해서 우주의 행성에 씨앗을 뿌려 식물을 자라게 하고, 사람이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부동산을 소유하는 사람들이 있다. 인간의 소유욕은 그 드넓은 우주에서도 끝을 모른다. 현재 인간의 삶의 틀로 미래를 내다보는 것에 문제제기를 할 수 있으나, 그 상상에는 인간의 본성이라는 문제가 개입되어 있으므로 부인할 수 없다.

 

변호사 마금희는 우주의 지적 생명체 보호법의 시행령과 시행규칙을 다듬어서 보존의 범위를 좁히려 하고, 청우 노앵설 보호협회장은 마금희와 법정다툼을 한다. 우리의 동물보호법의 모방이다. 이렇게 현재 일어나고 있는 여러 가지 분쟁과 사회적인 이슈를 우주시대의 미영과 양식이 의뢰받은 사건들로 재창조해서 서사를 만들어 간다.

 

우주개척 시대에 우수한 세포 수정란을 저장 보존 처리해서 행성에 보내고 적합한 환경의 행성에 도착하게 되면 태아로 키우고 성장하게 하는 것이나, 온 우주에 퍼뜨린 후손들 사이에 열리는 우주미인대회에서 수상하기 위해 유전자 조작을 하는 일들은 황당하기도 하지만 현재 사람들의 욕망을 들여다보건대 그럴 듯하기도 하다. 은하의 많은 부동산을 소유하고 홀로 고독하게 살아가는 우주갑부의 존재도 인간의 이기심이 빚어낸 고독을 보여준다. 우주로 도망친 강아지 로봇을 잡으러 다니는 모습은 유기견 구조에서 아이디어를 얻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들에는 작가의 유머가 스며 있는데 방송에서 본 모습으로 미루어 그의 유머 코드를 짐작하게 했다.

어 이건 너무 심하네요. 심하네, 심하네!”

……

그 말 들으니까 일본 시마네 현에 가서 우동 먹고 싶네(78p)

 

아재 개그에 헛웃음이 난다.

 

안녕하세요! 저는 로봇 변호사 KW820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로봇 변호사의 목소리가 맛집 소개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아니, 이게 정말 전부 19천 원?” 같은 내레이션을 하는 성우 목소리였다. 양식이 약간 당황하는데, 미영은 먼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91p)

 

미래 우주를 꿈꾸고 상상하는 공학자의 SF소설에서 21세기 한국을 사는 아저씨의 문화와 언어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이 웃긴 이중성에 묘하게 빨려 들어가서 당황스러웠다.

 

작가는 두 사람이 사업을 처음 시작할 때 세웠던 목적은 아직까지 공개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은하와 은하를 여행하는 원리에 대해서도 전혀 설명하지 않는다. 어설픈 설명이나 어렵고 디테일한 묘사가 있는 것보다는 이들의 활약에 집중하며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드넓은 우주에서 허황된 짓을 하고 다니며 귀한 삶을 낭비하는 사람을 찾기란 결코 어려운 일은 아니다로 시작하는 마지막 수록 작품은 우주공간을 이동해 다니는 방법에 대한 설명이 없다. 그래서 주인공의 허황된 짓과 삶의 낭비에 주목하게 되는지도 모르겠다. 그가 돌아다는 범위가 지구, 대한민국, 한 도시인 듯 느껴진다. 언제쯤 인류가 그렇게 우주를 누비게 될까?

 

그의 작품을 더 볼 생각이다. 방송에서 봤던 작가의 아재 같은 말솜씨며, 이과 출신다운 시각들, 한국의 전통 괴물을 찾아 연구하는 태도에서 본 열정과 순수함 때문에 끌리는 듯하다. 작품들 제목들도 재미있다. 얼핏 살펴본 바로는 소설 쪽 보다는 과학 관련 책들이 더 재미있을 것 같기도 하다. 어린이날 기념으로 휴가갈땐 주기율표』.고래 233마리 두권을 선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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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4-30 17:0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과학하고 앉아있네에선 마치 스타워즈의 시작 장면같은 그의 넓디넓은 잡학을 들으실수 있습니다 ㅎㅎ 묘한데 빠져드는 개그코드지요 *^^*

그레이스 2022-04-30 17:51   좋아요 4 | URL
맞아요
처음에는 뭐지 이거? 하다가 빠져들어요 ㅋ
과학하고 앉아있네도 재미있을듯요

새파랑 2022-04-30 18:32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 빵 책 쓴 작가님의 다른 작품이군요 ㅋ ㅁㅇㅇㅅ 는 미영 과 양식 이겠네요~ 전 뭘까 하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

그레이스 2022-04-30 18:33   좋아요 4 | URL
예~
맞아요^^

얄라알라 2022-04-30 21:0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심하네, 시마네 ㅋㅋ
저는 일본 지명을 잘 몰라서, 처음에 개그인 줄도 모를 뻔^^

요새 북플의 핫 뉴페이스가 되신 곽재식 작가님, 그레이스 님의 페이퍼가 또 힘을 실어 드렸네요~

그레이스 2022-04-30 21:12   좋아요 3 | URL
일년쯤 전에 유퀴즈 나온 영상 찾아왔는데 굉장히 재밌어요.
그래서 그런지 이 분 책소개 밑에는 직접 인터뷰한 영상이 있네요^^
핫 뉴 페이스 맞는듯요

singri 2022-04-30 23:5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알고싶자나요 궁금하자나요 했던 그 작가님이로군요 ㅋ 재밌겠습니다

그레이스 2022-05-01 09:55   좋아요 2 | URL
예~
맞아요
그분! ㅋㅋ
보셨군요^^
재미있습니다~

희선 2022-05-01 01:5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지구는 괜찮아 우리가 문제지, 이 말 맞는 듯합니다 지구가 아닌 사람이 문제죠 사람이 지구를 망치니... 우주를 다니는 이야기도 지금과 아주 동떨어진 이야기는 아니군요 지금을 생각하게 하는 이야기네요


희선

그레이스 2022-05-01 10:01   좋아요 3 | URL
제목을 참 잘 지은것 같아요
환경 주제 책 검색하다가 알게 된 책이예요. 한 책 읽기 선정 위원회에 추천해야 해서요^^
이런 책은 재밌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선택했어요.
곧 읽어야 해요

scott 2022-05-01 12:5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휴가갈때 주기율표
찜🙌

그레이스 2022-05-01 13:03   좋아요 2 | URL
제가 잠시 봤는데, 재미있어요^^

페크pek0501 2022-05-02 12:0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요즘 SF소설에 관심이 갑니다. 정보라 작가의 저주토끼 때문인지...

그레이스 2022-05-02 13:13   좋아요 3 | URL
저도 그 책 읽어야 하는데...
꾸준한 작가들 덕에 이런 소설들이 가까와졌어요^^

하나의책장 2022-05-03 23: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과학과 글쓰기에 진심이신 분인 것 같아 더 보고 싶어지는걸요^^!

그레이스 2022-05-04 08:20   좋아요 0 | URL
예~
직장얘기 할때는 영혼 1도 없다가, 과학에는 흥분하는 모습이 넘 재미있었어요 ㅋㅋ
궁금하잖아요? 안 궁금해요? 궁금하잖아요?
이 말이 맴돌죠...!
 
욕구들 - 여성은 왜 원하는가
캐럴라인 냅 지음, 정지인 옮김 / 북하우스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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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글과 통찰이 너무 빛이 나서, 그녀가 갇혀 있던 어두움과 짧은 삶이 안타깝다. 만약 이런 예리하고 아름다운 문장이 작가의 삶과 관련된 것이라면, 선택하고 싶지 않은 재능이란 생각을 했다. 고통가운데서도 작가의 감수성으로 자신의 욕망을 글쓰기로 전치하는 그녀의 노력에 감탄하게 된다.

 

거식증과 중독, 자해 등은 어디로부터 비롯된 것인가? 그 안에 담겨 있는 거대한 불안을 들여다본다. 욕구가 커질수록 그것을 억제해야만 한다는 불안도 커지게 되고 비틀린 모습으로 드러난다. 거식증이 시작되었을 때 그것은 식욕과 함께 왔다고 한다. 육체를 가진 한 사람에게 기본적인 기쁨과 충족감을 주는 식욕이 왜 이런 충동으로 바뀔까?

 

식욕은 내 모든 부수적 괴로움을 끌어다 걸어두는 걸이이며(나 자신과 수많은 여자들의) 내면에 흐르는 모든 강이 생겨난 바다다.”(18p)

 

그녀의 식욕이 식사장애와 거식증으로 나타나는 중심에 가족이 있었다고 한다. 가족들의 역학과 그것을 받아들이는 마음의 작용으로 생겨난 기억들은 관계 맺기의 실패와 허함에 대한 감각, 이름 없고 어쩌면 이름 붙일 수 없는 무언가에 대한 갈망의 감각과 관련되어 있다.”(23p)

 

사실 캐럴라인 냅은 그녀의 어머니보다 더 자유롭고 그녀가 꿈도 꿔보지 못했던 문제들을 놓고 고민하는 시대에 살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가 누리는 자유는 그녀에게는 무섭고 억압적이고 심지어 부당한 것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런 자유는 여자로 살아간다는 의미에 관해 그녀가 품고 있던 불분명하지만 뿌리 깊은 일련의 감정들”(25p)과 모순되는 것 같이 느꼈다. 이런 감정들은 사회로부터, 어머니로부터 학습되어진 것이다. 욕망을 실현시킬 수 있는 자유와 권리는 이론적으로 더 많이 보장되었으나, 실제적으로 그것을 학습하고 내면화하게 될 대상인 어머니들에게서는 억압된 욕구와 그에 따른 부정적 감정만을 대물림 받은 것이다.

 

연년세세밝은 밤에서 3, 4대에 걸쳐 대물림되는 여성의 굴레, 침묵을 연상하게 된다. 세상은 바뀌어도 여성을 둘러싼 정신은 끈질기게 막아서고 그녀들은 부당함 가운데서도 침묵하고 있다. 그런 세상에서 상처는 다른 모양 다른 양상을 띄며 대를 잇는다.

 

그렇게 캐럴라인 냅의 식이장애와 거식증은 어머니로부터 받은 여성이란 존재로서의 불명확한 감정들이 자신의 욕망을 억제하는 형태로 나타난 것이다. 또한 신체의 사이즈와 형태에 집중된 주의”, 그것이 여성의 식욕과 관련해서 정체성과 가치와 갖는 관계라는 복잡하고 거대한 문제에서 원인을 찾는다. “여자의 허기는 어쨌든 부적절한 것이며 심지어 그로테스크 한 것일 수도 있다는 관념이 관련되어있다.(28p) 식욕을 억제하고 사이즈와 형태를 얻는 것은 가치 있는 야망이라고 여겨진다. 그러므로 먹지 않는 것은 만족감을 높이고, 먹는 것은 죄의식에 빠지게 하는 이상한 상황에 빠지게 된다. 굶기는 뒤틀린 방법이긴 했으나 불안과 공포를 처리해주었다. 여성에게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자유가 허락된 세계에서 느끼는 낯선 불편함을 해소해준 것이다.

 

마찬가지로 중독, 자해 역시 같은 맥락에서 벌어지는 억제된 욕구의 발현이라고 본다. 술과 쇼핑 등의 중독도 억제된 욕구의 자리를 차지한 것이다. 자해의 경우도 어머니로 받은 여성으로서 불행한 느낌과 달리 행복할 수 없다는 죄의식과 관련 있다고 한다. 인간의 마음 깊숙하게 도사리고 있는 부정적인 감정의 위력에 놀라게 된다.

 

권리와 자격이 본능적이고 영속적이며 실질적인 수준에서 느껴지려면 그것은 자아를 넘어선 영역에 존재해야 하고, 더 폭넓은 차원에서 알려지고 인정되어야 한다.”(79p) 그런 면에서 여성은 불리한 입장이다. 지난 세월 동안 이뤄진 개선에도 여성의 지위는 여전히 불평등하다. 이런 불균형이 욕망 뒤에 자리한 불안이라는 요인을 증폭 시킨다”(80p)고 말한다.

 

저자는 사회와 가족 특히 어머니에게서 그 원인을 찾아내며, 때로는 상담을 통해, 때로는 글쓰기를 통해 자신 안에 억압되어 있는 욕망과 비틀린 욕구들을 직시한다. 그리고 여전히 욕구와 두려움의 대치 상태에 놓일 때가 많음을 고백한다. “항상 음식 생각을 했고, 포르노 더미를 앞에 둔 10대 소년처럼 음식 관련 잡지들과 레스토랑 리뷰를 열심히 읽었고, 색인 카드에 빵과 케이크, 초콜릿 디저트, 더할 나위 없이 풍성하게 속을 채워 넣은 파이들, 내가 갈망하지만 절대 나 자신에게 허용하지 않는 음식들의 조리법을 옮겨 적었다”(102p)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아름다움, 날씬함, 쇼핑 등을 욕망함으로서 욕망의 대상이 되는 여성들은 더 본질적인 욕망은 흐릿하고 불명료한 상태로 뒷전에 밀어둔다. 계속 이러한 부조화의 상태를 이끌어가는 것은 불안이다. 이러한 불안, 죄책감, 자기혐오, 소외, 슬픔과 같은 것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노력은 반복되는 실패를 가져온다. 지리한 과정에서 좌절하지 않으려면 초점을 내면으로 돌릴 것을 제안한다.

 

그녀는 "열쇠는 통찰보다는 기꺼이 해보겠다는 마음이 더 중요하다”(364p)고 한다. 이 글을 쓸 당시 그녀는 변화하고 있지만 여전히 뒷걸음질 치고 부정적 감정에 사로잡히는 자신을 발견한다. 하지만 어떤 흡족함의 순간들, 그녀가 잘 먹여지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순간들”(370p)은 있다. 모든 욕구를 다 이해하고 충족하는 일이란 가능하지 않지만, 그 흡족함의 순간들로 인해 충분하다고 한다.

 

냅이 더 오래 살았다면 그녀의 삶과 글은 어땠을지 생각해본다. 상태가 비교적 괜찮은 날이 더 많았을까? 그녀가 마치 시처럼 써내려간 아름다운 순간들이 삶을 더 많이 채웠을까? 글은 조금 더 안정되고 메시지는 더 강렬해졌을까?

 

마침내 이 삶에서 얻는 가장 좋은 것일지도 모를 순간들이 있다. 섬광처럼 스치는 만족감, 얼핏얼핏 희미하게 반짝이는 희망의 빛과 맛, 파이처럼 깊이 음미하며 완전히 누려야 할, 아주 잠깐의 순간들이.”(371p)


나의 부모가 나에게 심어준 여성으로서의 삶에 대한 정서들이 있다반항하기도 하고 맞서 싸우려고도 했던 때들이 있었지만욕구와 관련 짓는다면그 본질과 대상을 모르고 했던 싸움들이었다는 뒤 늦은 깨달음을 얻기도 한다나의 억압된 욕구들은 무엇이며이유는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된다아이들이 내게서 전달받은 여성으로서 사는 존재의 느낌은 어떤 것인지 궁금하다물어보고 싶은데 용기가 나지 않는다부정적인 대답이 돌아 올까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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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화가 2022-04-25 10:42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왜 아름다움은 날씬함과 굶기로 이어져야 하는지... 한없이 날씬해지고자 하는 욕구와 욕망을 해소하기 위한 사회적 장치들이 반대로 여성들을 끝없는 굴레로 몰아간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레이스 2022-04-25 10:46   좋아요 5 | URL
자본주의와 나란히 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되요. 신화와 가부장 사회의 관념이 자본과 만나 끊을 수 없는 굴레를 만들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ㅠ

mini74 2022-04-25 10:59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게 식욕뿐이었던 중세의 여자들이 투쟁이나 권리의 의미로 거식증을 택하던 때가 생각나네요. 과거나 현재나 여성에 대한 기준과 그에 대한 억압은 ㅠㅠ 전 엄마에게서 싫으면서도 배우고 닮게 되는 것들이 있는 거 같아요. 이 분 책은 명랑한 은둔자 하나 읽었는데 그레이스님 리뷰 읽으니 이 책도 끌립니다 *^^* 그레이스님은 아이들에게 긍정적인 여성의 삶을 보여주고 계실거 같아요 *^^*

그레이스 2022-04-25 11:08   좋아요 5 | URL
중세 여자들의 투쟁으로서의 거식증도 슬픕니다.
긍정적 평가! 감사합니다^^
제발 그랬으면 좋겠어요!

독서괭 2022-04-25 12:48   좋아요 2 | URL
저는 거식증이 투쟁이나 권리의 의미가 될 수 있다고는 전혀 생각을 못했었는데, <무엇이 아름다움을 강요하는가>에서 10대 여자아이들의 거식증에 대해 그렇게 평하는 걸 보고 놀랐었어요. 중세부터 내려온 것이군요!

scott 2022-04-25 11:3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섬광처럼 스치는 만족감, 얼핏얼핏 희미하게 반짝이는 희망의 빛과 맛, 파이처럼 깊이 음미하며 완전히 누려야 할, 아주 잠깐의 순간들]

한 주 동안 되새기고 싶은 구절이네요
넵의 생이 넘 짧았다는게 안타깝습니다 ㅠ.ㅠ

그레이스 2022-04-25 11:50   좋아요 3 | URL

저도 그랬습니다.
에세이라 그런지 반복과 모호함이 있는데 그래서 날선 문장들이 기억에 남는듯요.^^

얄라알라 2022-04-25 11:4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딱 제목으로 떠오르지는 않지만 [욕구들]을 비롯해 책, 그리고 일상의 대화에서 여성들이 현재 겪는 마음의 파동은 어머니의 삶을 가까이서 지켜보고 안타까워해온 것과 연관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자주 듣다보니 어디서 들었는지 읽었는지도 헷갈릴 만큼, 변주되나 지속적인 주제...

그레이스 2022-04-25 11:53   좋아요 3 | URL
그렇죠?!
지속적인 주제라는 것은 어느 한가지 답으로도 완결될 수 없다는 의미!
좀더 아름답고 밝은 변주가 들려질 때도 있겠죠.

새파랑 2022-04-25 12:38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제가 경험해보진 못하겠지만 글을 통해 여성으로서의 삶을 접하기만 해도 상당히 괴롭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ㅜㅜ

그레이스 2022-04-25 12:50   좋아요 5 | URL
새파랑님의 책읽기를 보면 공감능력이 좋으신 분이라는게 느껴져요!👍

독서괭 2022-04-25 12:4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자기 자신을 이렇게 날카롭게 분석할 수 있는 정신은 어떤 것일까요. 불안과 욕구와 힘든 투쟁을 벌이는 중에 이렇게 명징한 분석을 내놓았다는 게 너무 놀랍습니다. 저도 이 책 읽어보고 싶어요!

그레이스 2022-04-25 12:51   좋아요 4 | URL
예~
저도 곳곳에서 감탄했습니다!
밑줄 투성이예요

서니데이 2022-04-25 21:2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부모와의 관계가 좋은 것도 좋은 시작 같아요. 많은 사람들이 화목한 가정에서 살고 있긴 하지만, 사람사이에는 말하지 못하는 갈등이나 어려움이 있을 때도 있긴 하니까요. 거식증이나 폭식증은 심리적인 문제도 있는 것 같아요.
잘읽었습니다. 그레이스님, 이번주는 4월 마지막주입니다. 좋은 일들 가득한 한 주 되세요.^^

그레이스 2022-04-25 21:47   좋아요 3 | URL
예,
그래서 두렵습니다;;;
감사합니다.
서니데이님도 좋은 일 가득하시길요.

희선 2022-04-26 03:0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사람이 부모한테 가장 많이 영향을 받고 다음엔 사회에 영향을 받겠습니다 부모와 잘 지내면 좋겠지만, 그게 쉽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부모는 부모가 처음이어서, 하는 말을 하기도 하니... 어떤 건 죽 이어지기도 하는군요 여성의 삶이랄까 여성이 어때야 한다 그런 거... 그게 잘못됐다고 누군가 생각하면 좋을 텐데... 이렇게 말하지만 저도 많은 걸 그런가 보다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희선

그레이스 2022-04-26 07:34   좋아요 3 | URL
부모도 가정에서 사회로부터 내면화된 부분이 있겠지요
완전히 이겨낼 수는 없겠지만, 아는 것으로부터 한발 한발 시작하는게 중요하겠지요

페크pek0501 2022-04-27 12:1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통찰력 있는 글이 최고죠. 한두 줄에 담긴 저자의 통찰을 보기 위해 책을 읽는 건지도 몰라요.

그레이스 2022-04-27 12:12   좋아요 2 | URL
예. 맞아요~
그 한 두 줄이 인생을 바꾸기도 하니까요!^^

서니데이 2022-04-29 17:4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4월이 거의 다 지나가고, 내일이 말일이네요.
좋은 일들 많은 4월 보내고 계신가요.
그레이스님, 즐거운 주말과 기분 좋은 금요일 되세요.^^

그레이스 2022-04-29 18:07   좋아요 2 | URL
감사해요
서니데이님도 즐거운 주말 되세요


frycar02 2022-05-08 09: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름다운 문장으로 쓰여진 이 책을 읽어보고 싶은 충동이 생기네요.과연 욕구들, 여성들의 욕구는 남성들과 어떻게 다른지..

그레이스 2022-05-08 09:58   좋아요 0 | URL
^^
욕구를 받아들이고 총족시키는 차이에 더 주목하게 됩니다.
 
봄의 제전 - 세계대전과 현대의 탄생 걸작 논픽션 23
모드리스 엑스타인스 지음, 최파일 옮김 / 글항아리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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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봄의 제전'일까? 봄의 제전은 현대를 향하는 20세기 아방가르드 사건이다. 현대 미술사에서도 1차 세계 대전 중 다다이즘으로 이어질 전위적 분위기를 나타내는 사건으로 이 공연을 거론한다. 제전(祭典)은 말 그대로 제사 의식이다. 반복해서 뛰어오르고 한없이 빙글빙글 도는 춤을 추며 제물로 지목된 처녀들이 희생제의에 자신을 바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희생과 봄의 탄생, 파괴와 창조가 함께 공존한다댜길레프의 궁극의 예술을 향한 시도, 스트라빈스키의 음악, 그리고 니진스키의 목신의 오후에서 보여준 고전발레로부터 탈피를 위한 대담성은 1913529일 이 봄의 제전에서 융합되고 예술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기존의 틀을 파괴하고 새로움을 창조하는 것이었다. 파리, 오귀스트 페레의 획기적인 콘크리트 건축물 샹젤리제 극장에서 공연은 큰 기대와 화제를 불러 모았고, 그만큼 평론가들과 지식인들의 저항을 받았다.

 

"봄의 학살"(99p)이라는 오명과 함께, "죽음으로 내달리는 세계의 등불이 되고픈 예언적 소망"(101p)이라는 파리에서의 비평들을 소개하며 저자 모드리스 엑스타인스는 이 봄의 제전에서 다가올 전쟁을 예견한다. 무대의 제의(祭儀)가 암시하는 것일 수도, 그것이 불러일으킨 열광에서 엿보게 된 정신적 불안정의 징후”(101p)를 말하는 것일 수도 있다. 파리와 베를린이 보인 반응의 온도차가 전망하는 것일 수도 있다. 베를린은 니진스키를 환영했다.

 

동유럽과 러시아에 가까웠던 베를린은 러시아의 예술가들과 급진적인 사상이 모여드는 곳이었다. 19세기 후반, 전문 기술과 과학주의에 대한 강조와 함께 경제력을 갖춘 독일은 점차 자신감을 회복하고 있었다. “독일과 러시아가 나폴레옹의 첫 패배 100주년을 기릴 때 프랑스는 자국의 쇠락을 실감했다.”(95p) 파리는 그들이 이룩한 문화를 지키려는 쪽으로 기울고 있었고, 그 경향은 1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까지 이어졌다. 보수와 급진, 불안한 파리와 자신감을 찾아가는 독일의 대치가 그 시대의 불안정성이다. 안정으로 가기위해 폭발을 해야 하는 물질의 상태처럼.

 

“19148월 대부분의 독일인은 자신들이 개입하게 된 무력충돌을 정신적 의미로 이해했다.”(156p) 전쟁은 그들에게 관념이었다. 독일인들은 자신들의 도덕적 우월성” “강한 정신력” “도덕적 정당성”(158p)을 확신했다. 독일군에게서부터 시작되었던, 1914년 영국군-독일군 간의 크리스마스 휴전은 이런 정신을 엿볼 수 있다. 그 후 전쟁은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동상, 류머티즘, 참호족염, 썩어가는 시체들의 잔해와 악취로 가득한 참호전은 수많은 사상자들을 냈다. 전쟁의 제전은 거대한 희생제물을 요구했다. 독일인에게 이 전쟁은 세계를 변화시키기 위한 것이었고, 영국인에게는 세계를 보존하기 위한 것이었다. 독일에게 점점 커지는 전쟁 참화는 미학적 의미의 심화로 받아들여졌다. 전방과 후방에서 전쟁을 바라보는 시각에는 균열이 생겼다. 그들은 분열적 곤경에 빠져 들었다.

 

예술가들의 전쟁에 대한 가장 급진적인 반응은 다다이즘이었다. 그들은 일련의 선언과 공연, 출판을 통해 전쟁과 기존질서를 비판했다. 우연만 남아있는 무의미적 행위에서 의미를 전달했다. 의미의 파괴가 창조해낸 의미들이다. 이들 다다이즘이야말로 전쟁이 만들어낸 예술운동이고, 종전과 함께 다다이즘 역시 의미를 상실한다.

 

전쟁과 함께 과거는 배수구로 쓸려 내려가고 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해졌다.”(357p) 과거의 질서를 지키려는 정신과 그에 도전하는 현대의 사유는 1927년 대서양을 횡단한 린드버그에게 보였던 미국과 유럽의 환호에서 나타났다. “린드버그는 옛 질서가 현대의 도전들에 맞서고 극복하는 데 따라야 할 모범으로 해석되었고 새로운 영웅주의에 열광했다. 한편, 비행이라는 행위자체를 중요하게 여기는 현대적 감수성 역시 흥분했다. “자기 자신을 위해 비행했다는 것이야말로 가장 대담한 행위”(422p)로 받아 들여졌다. 파리의 대중과 독일 정부는 열렬한 환영을 했지만, 그 환영의 동기는 달랐다.

 

지나간 전쟁에 대한 유럽인의 의도적 침묵을 깬 것은 1929년에 발표한 레마르크의 소설 서부전선 이상 없다이다. 전후의 심리 상태, 전쟁을 바라보는 시각을 통해 한 세대의 정서적 불균형을 설명했다. 전쟁은 꿈을 상실한 전후세대를 만들어 냈고, 사회적 탈선의 뿌리였음을 알려 주었다. 대중은 이 책에서 그 자신의 그림자를 보았고, 그들이 처한 개인적인 곤경을 알게 되었다. 1920년대 후반, 레마르크의 소설은 전쟁 붐을 일으켰다. 이 작품에 대해서도 역시 유럽과 독일은 다른 반응을 보였다.

 

패전국인 독일은 과중한 경제적 부담, 경제 공황, 정치적 혼란 가운데서 이상 국가를 내세운 나치즘이 무대에 오른다. 저자는 나치즘이 비합리주의와 기술주의가 만난 모더니즘적인 충동인 또 다른 혼성체의 산물로서 문화적 분출이고 세속적 이상주의의 극치”(507p)라고 한다. 그리고 나치즘에서 나르시시즘, 키치, 니힐리즘, 컬트를 읽는다. “나치즘은 아방가르드의 여러 충동의 대중적 변형이었다.”(520p)고 말한다. 1914, 히틀러는 순수한 이상주의로 충만한 채”(512p) 헌신했던 전쟁에서 이후 꾸준히 영감을 얻는다. 지나간 전쟁을 다른 감상으로 보는 존재가 등장한 것이다. 1933년 독일 수상에 오른 그는 국가사회주의라는 독일을 회복시키는 현상을 만들어낸 공로를 예술에 돌렸다.”(524p) 그가 했던 선언들은 예술행위를 닮았다. 그는 자신을 니체와 바그너가 요구한 사람으로 인식했고, 그의 이상주의는 다시 한 번 유럽을 제전의 무대로 만들었다.

 

디테일한 역사적 사실과 자료의 고증을 따라가다 보면 길을 잃기 쉬운 책이다. 나는 봄의 제전’ ‘크리스마스 휴전’ ‘린드버그’ ‘레마르크’ ‘히틀러로 이어지는 맥락 안에서 작가가 말하려고 하는 메시지를 발견하려고 했다. ‘봄의 제전으로부터 시작해서 히틀러로 이어지는 제시어들은 창조와 파괴의 싹을 담고 있었고, 군중을 가르는 힘이 있었다. 예술은 누군가에게는 창조의 힘으로 누군가에게는 파괴의 에너지로 작용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작가의 처음 질문을 상기한다. "어디서 허구가 끝나고 현실이 시작되는가?" 토마스 만의 소설 베네치아에서의 죽음에 대한 비평에서 하인리히 만은 어느 것이 먼저 오는가? 현실인가 시인가?”(21p)라고 질문을 던진다. 예술은 사람들의 이성에 머문 사유를 마음으로 끌어내려 행동하게도 하고, 현실을 담아내는 틀이 되기도 한다. 예언적 행위가 되기도 하고, 저항을 담은 선언적 행위가 되기도 한다. 우리 시대의 예술은 무엇을 담지하고 있는가? 다른 제전을 가리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예술과 현실이 일치하는 순간 그것은 창조가 될 것인가, 파괴가 될 것인가? 질문해보게 된다.

 

읽는 동안 봄의 제전을 찾아 감상했다. 그리고 이 책에서 소개된 문학과 예술작품들도 찾아보았다. 무엇보다도 가슴을 울린 것은 전쟁 중 참호에 울려 퍼졌다던 헨델의 라르고였다. 총성이 멈춘 전장의 크리스마스, 참호 저편에서 들려오는 바이올린 연주곡을 듣는 병사들의 마음은 어땠을까? 가족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 정도의 감상으로 그려지지 않았다. 죽음이 널려있는 비좁은 참호 안의 병사들과 대조된 비현실 느낌으로 다가왔다. 라르고에 가사를 붙인 옴 브라 마이 푸 Ombra mai fu’는 오페라 세르세 Serse의 아리아다. 전쟁의 왕인 크세르크세스Xerxes가 왕궁 뜰의 플라타너스를 보며 평화를 노래하는 내용이다. 이 아리아의 역설만큼이나 참호에서 울려 퍼진 라르고선율의 비현실적 떨림 때문에 가슴이 먹먹했다.

 

지금도 전쟁의 한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생각한다. 폐허가 된 도시의 건물, 혹은 기차역에서 우연히 듣게 될 음악을 상상해본다. 역설적이고 기이한 슬픔을 지울 수 없다. 예술은 이 전쟁을 어떻게 기억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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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화가 2022-04-19 11:1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깊이있는 리뷰^^ 그레이스님 잘 읽었습니다. 그릇된 이상이 전쟁이라는 제전의 무대가 될 수도 있음을 느끼게 하네요.

그레이스 2022-04-19 11:15   좋아요 4 | URL
감사합니다.
위경련때문에 밤새 고생하면서 썼는데,,, 제정신이 아니어서,,, ^^
부끄러운 글에 대한 핑계중입니다!

거리의화가 2022-04-19 11:19   좋아요 3 | URL
아이고. 위경련이라니~ 위 보호해주는 음식을 많이 드셔야겠어요.
건강 잘 챙기시길!*^^*

그레이스 2022-04-19 11:19   좋아요 3 | URL
감사합니다

레삭매냐 2022-04-19 11:2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역설적이지만 결국 전쟁이 새로운
세상과 질서를 구축하는데 일조한
다는 점이 씁쓸하게 다가오네요.

그레이스 2022-04-19 11:25   좋아요 3 | URL
예!
어수선한 가운데서도 의미를 걷어내느라...^^

프레이야 2022-04-19 11:2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잔인한 봄 잔인한 사월이라는 말이 생각나는 사려 깊은 리뷰에요. 위경련으로 고생하시군요 규칙적으로 드시고 잘 관리하시길 바랍니다 그레이스 님.

그레이스 2022-04-19 11:26   좋아요 3 | URL
감사합니다.
그렇죠.
우리의 4월도 우크라인나인들의 4월도! ㅠ

새파랑 2022-04-19 12:44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이 책이 요새 인기 책이군요~!! 저는 이 책 표지가 좀 무서워서 꺼렸는데... 어렵지만 읽어봐야 할 책인거 같아요~!! 위경련은 이제 그만 있으시길 바랍니다 ^^

그레이스 2022-04-19 12:47   좋아요 5 | URL
저는 다다이즘 공부할때 봄의 제전과 니진스키 발레에 대한 것을 읽어서 관심있어서 샀어요. ^^

서니데이 2022-04-19 18:3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그레이스님, 위경련 있으시군요.
빨리 좋아지시면 좋겠어요.
좋은 하루 되세요.^^

그레이스 2022-04-19 18:40   좋아요 4 | URL
감사합니다 ~
서니데이님도 좋은 하루 되세요.

mini74 2022-04-20 11:3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리뷰 정말 좋아요. 아 ㅠㅠ 이 책을 사고싶은 맘 !! 아이고 그레이스님 위경련으로 공생하시다니 ㅠㅠ 넘 힘드셨겠어요. 얼릉 나으시길~~ 참호 안의 병사들 이야기가 먹먹해지네요. ㅠㅠ

그레이스 2022-04-20 12:39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미니님도 오타!
예 위경련과 공생중입니다!ㅋㅋ
1917이라는 영화와 함께 참호에 대한 오래 기억이 남았어요

mini74 2022-04-20 12:33   좋아요 2 | URL
ㅠㅠㅠ 폰으로 쓰는 게 갈수록 힘들어지네요 ㅠㅠ 공생마시고 얼릉 이별하셔서 위경련에서 해방되시길 ~ 그레이스님

그레이스 2022-04-20 12:38   좋아요 2 | URL
^^
감사합니다 🍊 🍊 🍊

독서괭 2022-04-21 09:2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위경련으로 고생하는 와중에 이렇게 멋진 리뷰를 쓰시다니..!! 감탄합니다. 다른 책과 예술작품들까지 엮어 쓰시니 더 흥미롭네요. 위는 이제 괜찮으신지 모르겠습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그레이스 2022-04-21 15:10   좋아요 3 | URL
감사합니다
하루 버티다가 병원가서 주사맞고 약먹고 많이 나았습니다.
조금 괜찮아지니 커피를 못참고 마시고 있네요. ^^;

희선 2022-04-26 03:1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예술은 그저 예술이면 좋을 텐데, 누군가한테는 창조의 힘이지만 누군가한테는 파괴의 힘을 갖게 하다니... 그건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서네요 과학도 그걸 하는 사람에 따라 좋은 것이 되고 안 좋은 것이 되기도 하잖아요 이건 무엇이든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뭐든 부수는 것보다 좋은 걸로 이어지면 좋겠습니다


희선

그레이스 2022-05-09 07:04   좋아요 0 | URL
희선님 댓글 이제야 답글 다네요
죄송!
정신없이 봤나봐요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