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자들
W. G. 제발트 지음, 이재영 옮김 / 창비 / 2019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책을 읽고 나서, 너무 좋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감상을 바로 글로 정리하지 못할 때가 있다.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감동을 글로 풀어내지 못하는 능력의 한계일 것이다. 라캉이 기표가 기의에 닿지 못하고 계속 미끄러진다고 한 것처럼 그저 텍스트만 읽었을 뿐인 독서를 할 때도 있다. 의미를 찾는 과정이 독서를 끝낸 후에도 계속 이어진다. 이 작품의 경우는 평행하는 여러 인물의 서사가 나에게서 생성되는 의미를 찾는 것이 어려웠다. 한마디로 적용의 문제가 어려웠고, 여전히 생각 중이다.

 

작가는 직접 화자(話者)가 되기도 하고, 또 다른 화자를 등장시키기도 한다. 이들 모두는 영국으로 이주해온 사람들이고, 일부는 유대인이다. “이민자들은 타국에서도 주로 고향사람들과 어울린다.”(84p) 그들에게서 고향에서의 삶과 이주의 역사를 듣는다.

 

헨리 쎌윈 박사를 만나러 가는 화자(話者)를 따라 걸어간다. 머릿속에서 스케치하며, 잔디밭을 지나고 개암나무가 늘어선 통로를 지난다. 통로가 끝나는 지점에는 지금은 돌보지 않아 낡은 테니스장, 마치 젊음의 흔적만 남아있는 한 사람의 삶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몇 번의 만남 뒤에 그들은 자신의 삶을 이야기 한다. 유년시절과 헤어진 사람들, 이주와 이민자의 삶에 대해서. 나는 한 공간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는 듯, 자서전을 써내려가듯 말하는 그 분위기에서 깊은 비애감을 느꼈다. “지난 몇 년 사이에 향수병이 점점 더 심해진다고”(29p) 하던 나이든 이방인은 자살한다. 그리고 오래전 스위스 산악에서 실종되어 그에게 큰 상실감을 안겨줬던 그의 친구는 칠십 이 년 만에 빙하에서 발굴 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사자들은 이렇게 되돌아온다. 때로는 칠십년이 넘는 세월이 흐른 뒤에도 얼음에서 빠져 나와, 반들반들해진 한줌의 뼛조각과 징이 박힌 신발 한 켤레로 빙퇴석 끝에 누워 있는 것이다.”(34p)

 

파울 베라이터 역시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이 소식을 들은 화자(話者)는 파울 베라이터가 자신의 스승이던 S도시에서의 유년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그와의 첫 만남, 견학수업, 클라리넷을 연주하던 모습, 쾌활하고 즐거운 것 같았던 그가 오르간 연주를 듣고 흐느껴 울던 모습, 어떤 생각에 빠져들며 침울해지던 모습을 기억한다. 나중에 알게 된 그 슬픔의 원인은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 때문이었다. 그의 아버지가 반()유대인이었고, 1/4만 아리안의 피가 흐르던 그가 징집에 응하고, 1939년과 1945년에 다시 독일로 돌아간 것은 자신의 정체성을 독일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전쟁터에서 견딜 수 없는 일들을 목격했을 그, 비트겐슈타인, 벤야민, 츠바이크 등 자살한 작가들의 책을 읽고 기록하던 그, 알프스 아래 작은 마을에서 이민자로서 살다 끝을 낸 그에게서 처절한 고독을 본다.

 

화자(話者)의 여행은 그들의 흔적을 찾고 그 땅 어딘가에 뿌리가 있음을 확인하기 위함이었을까? 고향을 떠나 스위스와 프랑스로 그리고 영국으로 이주하는 일가의 역사를 듣고, 정신병원에서 죽어간 아델바르트 할아버지의 비망록에 적혀 있는 아름다운 여행기를 따라 되짚어간다. 그 비망록에 적힌 마지막 종착지였던 예루살렘의 풍경은 폐허와 같았고 병든 사람들만이 눈에 띈다.

 

맨체스터의 공장지대 아뜰리에에서 작업하고 있는 화가 페르버의 말에 가슴이 서늘하다.

“19세기 내내 독일인들과 유대인들이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도시가 바로 맨체스터였지. 그러니 나는 가출한다고 나섰다가 되려 집으로 돌아온 꼴이었네. 우리 시대 공업의 탄생지인 이 도시의 거무칙칙한 건물들 사이에서 사는 날이 길어질수록, 나는 나 역시 흔히 말하는 것처럼 굴뚝 아래에서 일하려고 이리로 오게 되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깨닫게 되었어(that I am here, as they used to say, to serve under the chimney).”(243p)

 

절멸 수용소의 굴뚝(chimney)을 바로 떠올렸다. 의도적으로 이중적 의미를 담기 위해 이 문장을 썼을까? 그리고 육필원고-그의 어머니가 1939년에서 1941년 사이에 슈테른바르트가의 집에서 적어놓은 것-를 건네준다. 그 기록은 한번 읽기 시작하면 멈출 수 없는, 고통스러운 독일 동화 같은, 가슴을 옥죄어오는 탁월한 글이다. 그녀의 어린 시절과 일상 풍경은 아름답기만 하다. 독일을 고향으로 생각하고 동화되어 살았었기에, 호른 연주자와의 사랑과 이별, 프리츠 페르버와의 결혼, 그와 함께 오른 산들, 슈테른바르트가의 집에서 시작한 신혼과 뮌헨 테레지엔비제 광장에 만들어진 스케이트장의 기억은 온 세상이 파란빛으로 가득했던”(279p) 아름다운 기억이다.

 

1991년 루이자 란츠베르크의 기록을 따라 독일로 간 화자는 유대인들의 허물어져가는 공동묘지에서 그 흔적을 찾는다. 남편 프리츠와 루이자는 194111월에 강제 수송된 뒤에 소식이 끊겼다고 적혀 있는 란츠베르크가 묘비를 발견한다. 여행에서 돌아와 폐허가 되어가는 맨체스터에서 페르버의 마지막과 한때는 유명했던 호텔의 퇴락한 모습을 마주한다.

 

어딘가에 속하려했던 인간의 모습. 그러나 배척의 대상이었고, 탈주자이며, 이민자였던 그들은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이주한 곳에서도 번영의 흔적만 남아있는 타자들의 도시에 머문다. 그래서 그들은 더 있을 이유를 찾지 못하고, 스스로 삶을 끝내버린다. 삶의 경계 밖으로 내몰렸던 역사, 여전히 뿌리내릴 곳이 없는 이민자들의 실존적 상황은 처절한 고독으로 다가온다. 우리 안의 누군가는 이런 실존적 상황을 겪고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끝없이 자신의 근원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바로 지금 여기에 그의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끝간 데 없이 하늘로 치솟은 탑 위에서 까마득한 아래쪽을 내려다보는 기분”(185p), 그것이 그들의 실존 느낌일 것이다.

 


댓글(51) 먼댓글(0) 좋아요(5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러블리땡 2022-09-14 23: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레이스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 책탑 멋져요 ㅎㅎ

그레이스 2022-09-15 07:48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야성의 부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0
잭 런던 지음, 권택영 옮김 / 민음사 / 2010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작가의 『강철군화』, 『밑바닥 사람들』과는 다른 작품이었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 보여주고 있는 시선과 글쓰기는 후기 사회주의적 작품의 탄생을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65kg의 대형견 의 야성을 보며 얼마 전 길에서 초등생을 사냥하듯 했던 반려견 뉴스가 자꾸 떠올랐다. 이 소설의 감상 맥락을 그리로 잡아갈 수 없지만, 아예 무시할 수 없는 장면이었다. 머리를 흔들어 지우고 다시 작가가 말하려고 하는 메시지에 집중했다. 여과되고 남은 한 가지 질문은 과연 납치되어 알래스카로 팔려간 것과 이 문명사회에서 태어난 것 중 어떤 것이 사고일까?’였다.

 

“1897년 가을, 클론다이크 골드러시가 온 세상 사람들을 얼어붙은 북극으로 몰아가던 때”(12p) 알래스카의 금광을 향해 몰려드는 사람들을 위한 썰매견들이 부족한 상황, 미국 서부, 전역에서는 대형견들이 사라진다. 산타클라라의 저택 장원에서 장원의 지배자였던 은 납치되어 알래스카로 팔려간다. ‘의 여정이 시작되고 여러 이별과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 야생으로 향한다.

 

정원사의 조수에 의해 유인되어 상자 안에 갇혔다. 영문도 모른 채 기차에 태워지고 이틀 후 내린 항구에서 그를 맞이한 것은 몽둥이를 든 빨간 스웨터의 사내다. 상자에서 나온 은 무턱대고 두들겨 맞는다. 분노로 달려들고 저항하지만 심한 매질에 결국은 쓰러진다. 그들은 이런 방식으로 길들여서 개들을 판다. 인간에게는 길들여진 것으로 보이지만, ‘의 깊은 내면 어딘가에서는 야성이 깨어났다. 그리고 곤봉은 권력으로 각인되었다.

 

그 곤봉은 하나의 계시였다. 그것은 그가 원시법의 세계로 입문하는 첫걸음으로, 그는 이미 반쯤 그 길로 들어섰다. 삶의 실상에는 좀 더 광포한 면이 있다. 그래서 벅은 겁먹지 않고 그런 것에 직면하면서 그의 본성이 각성시킨 온갖 잠재된 재간을 동원해 맞섰다. 시간이 흐르면서 다른 개들이 상자에 갇혀 혹은 밧줄에 끌려, 어떤 개들은 온순하게, 어떤 개들은 벅처럼 분노로 으르렁대며 모여들었다. 그는 하나둘씩 붉은 스웨터 입은 사내의 의식을 통과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잔인한 수행을 하나하나 지켜보는 벅의 뼛속 깊이 교훈이 스며들었다. 곤봉을 든 사내는 입법자였고 반드시 화해할 필요는 없지만 복종해야 할 주인이었다.”(20p)

 

은 알래스카에 도착해 캐나다 정부에 고용된 우편배달부들의 썰매를 끌게 된다. 이 썰매를 끄는 개들 속에 들어가면서 이 집단의 법칙을 통과해야 했다. 도착한 첫 날, 함께 배를 타고 온 개 컬리는 에스키모개에게 물어 뜯겨 죽임을 당한다. 이 개들은 썰매 줄에 묶여 달릴 때는 주인의 말에 복종하고 질서를 지키며 달리지만, 이 썰매 줄에서 풀려나면 야생 질서로 돌아간다. 철저한 서열과 영역을 지키려는 혈투가 일어난다. 사람들은 이 질서를 이용하여 썰매를 끌게 한다. 맨 앞을 달리는 우두머리 개와 그 뒤에 달리는 개들의 집단 내 서열이 서로를 교육하고 훈련하게 하는 방식이다. 머리도 좋고 힘이 있는 은 금방 적응하고 서열 1위인 스피츠를 위협하게 된다. 결국 토끼를 쫓다가 벅과 스피츠는 결전의 순간을 맞이하고, 스피츠는 죽임을 당한다. 이 싸움에서 의 야성은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그는 무리의 선두에서 달렸다. 그는 야생동물을 추적해 살아 있는 고기를 이빨로 물어뜯고 보란 듯이 주둥이를 따스한 핏물에 씻어 내고 싶었다.” (52p)

 

살아있는 먹이를 잡기 위해 달려가는 벅에게 극치에 달하는 환희가 찾아왔다. 그는 시간의 자궁 속으로 되돌아가며 본성의 심오함에서 나오는 울음소리를 냈다.

그는 순수하게 솟구치는 삶과 조수처럼 밀려드는 존재의 파도, 근육과 관절과 심줄 하나하나가 움직일 때 느껴지는 완벽한 기쁨에 압도당했다. 솟구치는 삶은 죽음을 제외한 모든 것이었는데, 맹렬히 불타오르며 움직임 속에서만 자신을 드러냈고 별 아래, 움직이지 않는 죽은 물질의 표면 위로 환호하면서 날았다.”(52p)

 

벅은 결국 스피츠의 자리를 차지하고 맨 앞에서 개들을 이끈다. 개들은 썰매에 묶여 달릴 때 기쁨을 느낀다. 야생의 집단으로 달리던 원시적인 기쁨을 이끌어내는 순간이다. 데이브는 죽음 직전까지도 자신의 자리를 양보하지 않는다. 한 발짝도 걸을 수 없는 상태에서도 끈에 묶이기를 원한다. 그것이 그의 존재 이유라는 듯이. 아마도 집단에서 제외됨은 죽음보다 더한 공포일 것이다.

 

기진한 상태로 다른 이들에게 팔려가고, 더 이상 달릴 수 없을 정도로 에너지가 소진된 상태로 다시 팔려간 이 개들에게 위기가 찾아온다. 골드러시에 합류한 무모한 주인들 때문에 강에 빠져 몰살당한다. 벅은 자신을 이 위기로부터 구해 준 손턴과 생사고락을 함께 한다. 이해츠 족들에 의해 손턴이 죽임을 당한 후, 벅은 늑대들 무리들 속으로 들어간다. 오래 전부터 자신의 원시적 본능을 깨우던 소리의 주인들이었다. 늑대들과 무리 속에서 자유롭게 알래스카의 벌판을 달리는 벅에게서 이전의 모습은 사라졌다.

 

작가 잭 런던은 이 의 여정이 진행되면서, 벅의 본성인 야성이 진전되고, 그의 정체가 되는 순간까지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아마도 그 자신이 알래스카 골드러시에 합류했다가 목격했던 개들의 모습을 소재로 삼았던 것 같다. 함께 수록된 단편에서는 엄청난 추위 앞에 인간의 나약함을 보여주는 이야기를 너무나 실감나게 묘사하고 있다. (여름 독서로 추천!)


다 읽고 난 후, 나는 한 동안 “So what?”하고 마음속으로 물었다. 이 흥미진진한 이야기에 담은 그의 메시지는 무엇인가를 생각했다. 문명과 관습, 제도에 길들여진 삶과 원시적인 상태 중 어떤 것이 더 자신을 기쁘게 하고 자유롭게 할 것인가?로 마무리 하게 된다.

 

알래스카 벌판을 달리는 벅과 산타클라라의 장원에서 도도했던 벅 중 어느 쪽이 더 행복할 것 같은지 아이들에게 물었다. 대부분 아이들은 산타클라라라고 대답한다. 차라리 자신의 정체성을 모르고 사는 쪽이 낫다고 한다. 그 중 한 아이는 알래스카 쪽이라고 대답한다. 다시 물었다. 늑대들과 합류하기 전에 잠시의 환희만 느끼다가 죽었다면 어느 편이 나았을까? 조금 더 생각이 길어진다.

 

산타클라라가 안전을 보장해 줄까? 엄마들이 희미한 웃음으로 대답한다삶은 변수의 연속이고,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 원하지 않는 곳으로 보내진 것처럼. 인생의 예기치 않은 불행은 어쩌면 나를 발견하는 사건이 될 수도 있다.


댓글(32) 먼댓글(0) 좋아요(4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희선 2022-08-08 02: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른 데서 잘 사는 개를 잡아다 팔기도 했군요 이런 모습 보니 아프리카에서 잡히고 노예가 된 사람이 생각나기도 합니다 사람은 사람뿐 아니라 동물도 마음대로 잡고 마음대로 하려고 하는군요 개한테 썰매를 끌게 하려면 사람과 신뢰를 쌓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드는데... 억지로 잡아다 썰매를 끌게 하니 폭력을 쓴 걸지도 모르겠네요 벅이 자기 삶을 찾아 떠나서 다행이다 싶어요 누군가 사람하고 좋은 사이가 되고 머무는 것보다...


희선

그레이스 2022-08-08 06:45   좋아요 4 | URL
노예상과도 같죠
벅도 대부분 신뢰관계가 형성되기도 했는데, 그렇지 못할 때도 있었죠. 그럴때마다 위기가 찾아오구요

Jeremy 2022-08-08 05:5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인용하신
“그는 순수하게 솟구치는 삶과 조수처럼 밀려드는 존재의 파도,
근육과 관절과 심줄 하나하나가 움직일 때 느껴지는
완벽한 기쁨에 압도당했다.
솟구치는 삶은 죽음을 제외한 모든 것이었는데,
맹렬히 불타오르며 움직임 속에서만 자신을 드러냈고 별 아래,
움직이지 않는 죽은 물질의 표면 위로 환호하면서 날았다.”(52p)

>>>“He was mastered by the sheer surging of life,
the tidal wave of being, the perfect joy of each separate muscle, joint,
and sinew in that it was everything that was not death,
that it was aglow and rampant, expressing itself in movement,
flying exultantly under the stars.”
― Jack London, The Call of the Wild

여기에 더하여 제가 좋아하는 부분은
“There is an ecstasy that marks the summit of life,
and beyond which life cannot rise.
And such is the paradox of living,
this ecstasy comes when one is most alive,
and it comes as a complete forgetfulness that one is alive.
This ecstasy, this forgetfulness of living, comes to the artist,
caught up and out of himself in a sheet of flame;
it comes to the soldier, war-mad in a stricken field and refusing quarter;
and it came to Buck, leading the pack, sounding the old wolf-cry,
straining after the food that was alive
and that fled swiftly before him through the moonlight.”
― Jack London, The Call of the Wild

그레이스 2022-08-08 06:43   좋아요 3 | URL
감사합니다.
저도 원문이 궁금했거든요,
제가 인용한 바로 앞부분인 듯 합니다.^^
인용이 너무 길어서 앞부분은 잘랐거든요.
원문으로 보니, 인용해주신 마지막부분은 마치 영화같은데서 늑대인간이 자신의 정체를 감추지 못하고 그 울음을 우는 장면이 생각 납니다.

Jeremy 2022-08-08 07:47   좋아요 2 | URL
제가 어림잡기로는 대략 1920년 이전에 영어로 쓰인 책들은 거의
Public Domain 에서 읽을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레이스님처럼 이미 한국어로 번역된 책을 많이 읽고 가지고 계신 분은
그냥 https://www.gutenberg.org/ 에서 필요한 영어 전자책을 찾으셔서
쭉 비교하며 훑어보시면 될 것 같아요.
그냥 읽을 수 있는 책들을 굳이 원서로 살 필요는 없으니까요.

당연히 Jack London 의 책은 모두 다 Public Domain 에 있답니다.
혹시 Gutenberg.org 의 Format 이 마음에 안 드시면
제가 찾은 다른 Free eBook site 도 알려드릴께요.

Jack London 의 “The Call of the Wild” 와
“White Fang” 은 미국 중학교 정도에서 거의 교과과정처럼 읽기때문에
저도 이 두 책은 종이책으로도 가지고 있긴합니다.

˝The Call of the Wild˝
32,031 words (1 hour 57 minutes) with a reading ease of 77.47 (fairly easy)
#88 in the Modern Library’s 100 Best Novels set.
#35 in the Guardian’s Best 100 Novels in English (2015) set.


그레이스 2022-08-08 08:11   좋아요 2 | URL
우와
감사합니다.
구텐베르그는 했었는데 다른 것도 많이 생겼다고 하더라구요.
감사합니다.
알려주신 것 참고해서 찾아보겠습니다.

초란공 2022-08-08 08:2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프리모 레비의 <주기율표>에서 잭 런던의 <야성의 절규>라는 책을 소개 했는데, 아마 그 책이 <야성의 부름>이 아닌가 싶어요. 개가 주인공인 적자생존의 세계를 그렸다고 했거든요.^^;; 레비는 어떤 상황에서 잭 런던의 소설을 떠올렸을까 궁금하긴 했습니다.~

그레이스 2022-08-08 08:31   좋아요 4 | URL
저는 프리모 레비의 <주기율표>가 궁금해집니다. ^^
찾아봐야겠습니다.

미미 2022-08-08 08:4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아문센과 스콧의 남극점 경쟁에서 수많은 개들,말들의 이야기를 보고 안타까웠던 기억이 납니다. 개들을 그렇게나 훔쳐다가 보내는 줄은 몰랐네요. 말씀하신 것처럼 늘 변수가 작용하겠지만 그래도 야생에서 본능대로 살아가는 것만큼 행복한게 있을까 싶네요. 그레이스님 덕분에 머릿속에 그려가며 재미나게 읽었습니다.^^*

그레이스 2022-08-08 09:09   좋아요 4 | URL
탐험이라는 명분하에 혹사당한 동물들에게는 오히려 그 잔인한 상황을 드러낼 수 없는 업적주의의 현실이 있었겠네요. 미미님 덕분에 시야가 더 넓어집니다.^^

독서괭 2022-08-08 11:1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헉 주인이 있는 개들을 잡아갔다니, 놀랍네요. 잡아먹으려고 잡아가는 것보다는 낫다고 보이긴 합니다만;; 그레이스님이 던지신 질문들이 답하기 어렵네요. 인간과 개의 입장이 다를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알래스카에 사는 견종을 데리고 와서 도시에서 분양하고 키우고, 또 잡아다 다시 알래스카에 팔고 하는 우리 인간들이 미안하네요 ㅜㅜ
이 책 제목은 많이 들어봤는데 그레이스님 덕에 줄거리 제대로 알고 갑니다. 잘 읽었어요^^

그레이스 2022-08-08 11:20   좋아요 2 | URL
사실 저도 어려운 질문이예요.
한 아이가 알래스카의 벅이 더 행복하다는 생각은 하지만 자신의 강아지를 야생으로 보내고 싶지는 않다고!

mini74 2022-08-08 17:01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예전 알래스카에서 전염병?이 돈 아이들을 위해 백신을 구해온 썰매개들이 서커스단에 팔려 학대받다가 구출된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똘망이에게 미안해지네요. 그래서 개껌 하나 줬습니다 그레이스님 ㅠㅠ아이들에게 던지는 물음이 참 좋네요.

그레이스 2022-08-08 17:11   좋아요 3 | URL
그런 이야기 들어본것 같아요.
똘망이, 개껌 ...^^
미니님 댓글에는 유머가 항상 담겨있으세요.

감사합니다 ~

서니데이 2022-08-08 18:4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지나가다가 가끔 알래스카 말라뮤트나 시베리안 허스키를 만날 때가 있어요.
우리나라처럼 여름이 더운 나라에서는 살기는 어렵겠다, 생각했던 적이 있어요.
그 개들은 추운 곳을 좋아하는데, 너무 더우니까요.
잘읽었습니다. 그레이스님, 더운 날씨 조심하시고, 좋은하루 보내세요.^^

그레이스 2022-08-08 19:48   좋아요 3 | URL
여기서 벅은 리트리버와 스피츠에게서 나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쨋든 대형견이 아파트 환경에 맞나 싶기는 해요.^^
비가 많이 오네요
건강하고 안전하게 보내시길...!

새파랑 2022-08-08 22:3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알레스카가 배경이라니 여름에 읽기 딱 제격인 책이네요. 이 책 표지 보고 안읽었는데 이런 내용이었군요~!! 본능에 충실하게 사는 삶이 좋기만 한건지는 생각해볼만한 거 같아요~!!

그레이스 2022-08-08 22:44   좋아요 3 | URL
같이 수록된 단편에서는 공중에 침을 뱉으면 쨍하고 얼어버릴정도로 추운기온을 표현하고 있어요

scott 2022-08-09 00:34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하루키 옹이 잭 런던을 아주 좋아 합니다.

제가 알래스카 출신 멍멍이를 키운 적이 있는데

한 여름에 얼음 덩어리 위에 앉아야
숨을 쉬었던 멍멍이 ^ㅅ^

그레이스 2022-08-09 07:53   좋아요 4 | URL
그렇군요^^
잭 런던 묘사가 탁월하다고 생각합니다.

알래스카견!
ㅠㅠ

Yeagene 2022-08-09 15:3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뒤에 실린 단편까지 재밌게 봤던 작품입니다ㅎㅎ 제가 16년째 말라뮤트들을 길러서인지,주인공 벅에 엄청 감정이입하며 읽었어요.ㅎㅎ우리 곰탱이가 납치되어 알라스카로 팔려간다면 얘는 살아남을 수 있을까?막 이러면서요 ㅎㅎㅎㅎ

그레이스 2022-08-09 14:42   좋아요 3 | URL
^^
함께 토론했던 초등6학년도 그렇게 말하면서 울컥했어요 ㅠ

서니데이 2022-08-09 21:3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그레이스님, 편안한 하루 보내고 계신가요.
오늘도 비가 많이 오고 있어요.
뉴스에서 계속 비소식만 나오고 있습니다.
비피해 없으시면 좋겠어요.
편안한 하루 보내세요.^^

그레이스 2022-08-09 21:40   좋아요 3 | URL
예~
서니데이님도 안전하시길...!
평안한 밤 되시길 바래요!

서니데이 2022-08-10 19:2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그레이스님, 오늘은 서울도 비가 그쳤다고 들었어요.
오늘은 비구름이 남쪽으로 내려가면서 비가 잠시 쉬는 것 같은 하루였어요.
어제 밤에 비가 많이 내렸는데, 괜찮으신가요.
저녁 맛있게 드시고, 좋은 시간 되세요.^^

그레이스 2022-08-10 19:26   좋아요 3 | URL
분리수거 나왔는데 조금씩 비가 내려요
밤사이 또 오려나봐요 ㅠ
해 나길래 빨래 했는데 ㅠ
서니데이님 밤사이 평안하시길 바래요

레삭매냐 2022-08-10 20: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잭 런던의 이러저러한 책들을
사모아 두긴 했는데 막상 닐근
책은 하나도 없네요 ㅠ

우리는 삶이 원하는 방향으로
흐르지 않는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가끔은
불행하다고 느끼는 게 아닐까요.

그레이스 2022-08-10 21:00   좋아요 1 | URL
그렇죠
가끔 불행하다고 느끼긴 하지만, 항상 원하는 방향으로 흐르면 공허할것 같아요^^
우연한 마주침과 사건들이 만들어낸 역동성은 없을거구요.

서니데이 2022-08-11 21:4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레이스님, 편안한 하루 보내고 계신가요.
오늘은 비가 오지 않아도 습도가 높은 날입니다.
건강 조심하시고, 좋은 밤 되세요.^^

그레이스 2022-08-11 21:51   좋아요 2 | URL
창문열고 있어도 시원하네요
서니데이님도 편안히 주무시길..!

서니데이 2022-08-12 23:2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8월이 빠르게 지나가면서, 벌써 다음주 월요일이 광복절입니다.
지난주의 폭염, 그리고 이번주의 비 때문에 더 빠르게 지나가는 것 같아요.
즐거운 광복절 연휴 보내시고, 좋은 주말 되세요.^^

그레이스 2022-08-13 22:53   좋아요 2 | URL

입추가 지나니 밤에는 확실히 시원해진듯요
습도만 빼면...!
서니데이님도 평안하세요~~
 
낙원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11
압둘라자크 구르나 지음, 왕은철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낙원은 이주의 서사를 가진 작가의 실존적 정체성과 그 정서(심리)의 원형을 보여준다.

 

주인공의 이름은 유수프(يوسف 요셉의 아랍어)이다. 성서에서 형들에 의해 대상에게 팔려 고향을 떠나 이집트에서 죽은 사람의 이름이다. 요셉은 꿈꾸는 자라는 별명이 있다. 그 꿈을 통해 위기를 모면하고 동족을 구했다. 유수프 역시 꿈을 꾼다. 요셉은 주인 아내의 유혹을 뿌리치고 옷자락을 벗어두고 도망치고 그로인해 누명을 쓰고 옥에 갇혔다. 유수프 역시 상인의 집에서 같은 일을 겪는다. 작가는 소설 곳곳에서 이주자, 팔려간 자, 망명자의 상징과 서사를 배치하고 있다. 소설의 서사는 작가의 것이 아님에도 그의 삶과 정서가 보인다. 그래서 쿳시가 모든 글은 자서전이라고 했을 것이다.

 

동아프리카의 무슬림 가정의 소년 유스프, 그가 기차역에서 처음 본 두 유럽인, 인도인 신호수는 19세기 동아프리카의 역사와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해안지대의 무슬림들은 내륙의 아프리카인들(토착민)와센지’, 야만인이라고 부른다. 독일인들을 위해 철로를 건설하는 날삯꾼으로 일하는 인도인은 이 무슬림들을 무시한다. 인종으로 인도인, 종교적으로는 무슬림, 지역적으로는 아프리카인이나 그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작가의 정체성을 지시하고 있다.


유수프는 아버지가 아지즈 아저씨에게 진 빚 때문에 볼모로 보내어 진다. 아지즈의 가게에서 일을 익힌 후 그의 대상 행렬에 함께 한다. 아지즈의 내륙여행은 물품과 짐꾼들을 모으고, 무장하고 떠나서 그들이 야만인이라 부르는 내륙의 사람들과 장사를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한 마을에서 장사하며 자신에게 돈을 갚을 수 없는 사람들의 아이들을 볼모로 데려오기도 한다. 유수프, 아지즈의 집과 가게를 관리하는 칼릴, 아지즈의 두 번째 아내가 된 칼릴의 누이가 바로 그런 아이들이다. 아지즈는 철저한 장사꾼이다. 내륙으로 여행 하며 그들은 위험한 상황에 처하기도 한다. 상단이 차투의 나라에서 물건을 빼앗기고 그 대장 모하메드 압달라가 구타를 당하고 대치 상황에 있을 때, 유럽인이 그 지역에 들어오면서 그 문제가 해결된다. 세 자루의 총을 제외한 물건의 일부를 돌려받고 그곳에서 나오는 장면은 앞으로 그들의 땅에서 일어날 일들을 전망하게 한다


이 소설은 마을로 들어온 독일군이 강제로 마을 사람들을 끌고 가는 것을 유수프가 목격하는 것으로 마치고 있다. 독일과 영국이 동아프리카 땅을 두고 대치하던 시대다. (탕가니카(탄자니아 본토) 지역의 경우, 1885~1916년간 독일 보호령 하에 있었으나, 1916년 영국군의 탕가니카 점령 후 1919~1961년간 영국 위임통치를 받았다.)

 

유수프는 독일군들이 행진해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고향을 떠나올 때 기차 안에서 생각했던 비겁을 다시 떠올린다. 유수프는 마을을 방문하는 아지즈아저씨를 동경했었고, 그로부터 10안나 동전받는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했었다. 그런 아지즈아저씨와 함께 기차를 타고 가면서, 기차를 탔다는 신선함이 사라지기 시작했고, 그러자 집을 떠나왔다는 생각을 억누를 길이 없었다.”(30p) 울고 싶어졌다


그가 기차에서 꾼 꿈속에서

어머니가, 예전에 기차 바퀴에 깔려 죽는 것을 본 적이 있는 애꾸눈 개가 되어 있었다. 나중에는 꿈에서 자신의 비겁이 산후(産後)의 점액으로 뒤덮여 달빛에 반짝이는 모습을 보았다. 그것이 자신의 비겁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그늘 속에 서 있는 누군가가 그에게 말해주었기 때문이었다. 그 자신도 그것이 숨 쉬는 것을 보았다.”(33p)

 

산후의 점액으로 뒤덮인 비겁이라는 상징 이미지는 강렬하게 생각을 사로잡는다. 토착민을 야만인이라 지칭하면서, 인도인으로부터 조롱을 받고, 유럽인들을 두려워했던 부모로부터 떨어져 나온 원초적 감정은 비겁이다. 세련된 아지즈 아저씨를 동경했던 죄의식, 부모와 연결된 탯줄이 끊어지는 두려움들이 응집된 감정이었을 것이다. 다시 집으로 돌아올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기차의 소음 때문에 잠을 못이루던 그 밤의 기억은 삶에 큰 영향을 미칠 수 밖에 없다.

 

사람들이 독일군에게 강제노역을 위해 잡혀가는 것을 숨어서 지켜보던 유수프는 다시 한 번 자신의 비겁(cowardice)이 산후(産後)의 점액으로 뒤덮여 달빛에 반짝이는 모습을 본다. 그리고 기차 안에서의 기억을 떠올린다. 그것은 버림받은 것(abandonment)에 대한 첫 번째 두려움의 탄생이었다.”(322p)고 말한다.

 

한편, 비겁은 작가의 전이된 감정으로 읽힌다. 1698년 오만이 지배한 이래 내륙과 함께 이슬람의 지배하에 있었던 잔지바르에서 1948년에 태어난 압둘라자크 구르나는 정복자, 약탈자의 후손이었다. 1964년 혁명이후 인종탄압의 대상이었다. 1968년 탄압을 피해 영국으로 이주했던 20세 이후 그는 이민자이다. 그는 아프리카를 떠나며 아마도 죄의식과 두려움, 비겁이라는 단어를 떠올렸을 것이다. 일제강점기 지식인들의 글에서 보았던 심상-윤동주의 부끄러움과 같은-들이 겹쳐진다.

 

아지즈의 대상 행렬이 차투의 나라로 가는 길에서 사람들은 죽음의 공포로 인해 길안내자를 원망하고 의심한다. 기어코 그 무리의 지휘자 모하메드 압달라는 안내인을 구타한다. 그 폭력을 방관하는 상인 아지즈의 태도는 분노의 제물이 된 희생양을 지켜보는 냉혹함을 연상케 한다. 드디어 숲이 끝나고 있음을 깨달으며 자신들의 경솔함이 당황스러워 고개를 저으며”(202p) 웃는 사람들에게서 수치를 덮는 군중의 부도덕과 무책임을 본다.

 

여행 중 도시를 벗어난 야영지에서 본 경관과 아름다운 킬리만자로 일몰의 초록빛은 '낙원'을 떠올리게 한다. 유수프가 그토록 애착을 가졌던 아지즈의 정원 역시 '낙원'을 지시하는 상징어이다. 담으로 둘려져 있는 사각의 공간에 네 개의 수로와 과실수와 관목들은 천국을 상징하는 이슬람 전통 정원이다.

<충직함의 정원> 바부르의 책, 1593

"이슬람 정원에서는 부정적인 상징은 모두 배제되고 오로지 한 가지 상징만을 위해 모든 요소들이 역할을 한다. 네 개로 구분되는 세계를 상징하는 정형적인 사분원 형태는 직교하는 두 개의 수로가 수반에서 교차하면서 만들어진다. 수반은 세상의 배꼽이며 신이 준 생명의 원천이다. 이 이미지는 낙원이 하나의 샘으로부터 나와 네 갈래로 나뉘어 동서남북 방향으로 흘러 대지를 적신다는 이야기에서 시작된다."(26p,예술의 정원루시아 임펠루소)

 

이 정원에서 독일 군대가 떠나는 것을 지켜보는 유수프의 모습으로 소설은 마치고 있다.

그가 정원에서 문의 빗장이 걸리는 소리를 들었을 때도 여전히 행진하는 행렬이 눈에 보였다. 그는 주변을 빠르게 둘러보고 따끔거리는 눈으로 그 행렬을 뒤쫓았다.” (322p)

 

'문의 빗장이 걸리는 소리'는 아마도 아지즈의 집으로 들어가는 문일 것이다. 이 낙원에서 추방을 알리는 소리이다. 아프리카는 더 이상 그(유수프 또는 작가)에게 낙원이 될 수 없음을 알리는 경고음이다.

 

작가는 유수프의 서사와 그의 시선을 통해 동아프리카의 19세기 상황을 들여다보게 한다. 토착민들, 불법적인 거래로 이익을 취해왔던 연안의 무슬림 정착민들, 군대를 앞세워 점령지를 늘려가는 유럽인들과 그들에게 노동을 파는 인도인들이 뒤섞이고 있는 그 땅의 모습을 담고 있다. 동아프리카의 역사와 과거 이슬람인들과 유럽인들이 그 땅에서 벌였던 수탈과 착취의 역사를 찾아보게 된다. 아마도 그 아프리카를 자신의 땅이라고 강하게 주장할 수 없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선, 작가의 에두른 글 뒤에 숨은 비판의 시선 때문일 것이다. 아프리카의 역사와 대상들의 길, 특히 동아프리카와 인도, 이슬람문화권의 관계에 대해서 새롭게 고찰할 수 있었던 내게는 기억될만한 작품이었다.


 


댓글(34) 먼댓글(0) 좋아요(6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서니데이 2022-07-23 21:10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산후의 점액으로 뒤덮인 비겁” 이라는 표현은 상당히 독특합니다. 책을 읽고 나면 이해할 수 있겠지만, 그 전에는 무슨 말인지 바로 이해가 잘 되지 않아서요.
북아프리카에 무슬림이 많다고 생각했는데, 동아프리카도 그렇군요.
잘읽었습니다. 그레이스님, 시원하고 좋은 하루 보내세요.^^

그레이스 2022-07-23 21:12   좋아요 5 | URL
아라비아해와 인도양으로 이슬람인들이 정착해온 역사가 있더라구요. 그 비유는 오랫동안 뇌리에 남아서 생각을 많이 하게했어요^^

얄라알라 2022-07-28 14:12   좋아요 1 | URL
˝산후postpartum˝연관검색어로 점액을 추가했을 때 과연 어떤 문장이 나올까? 그레이스님 리뷰 읽고

˝비겁이 산후(産後)의 점액으로 뒤덮여 달빛에 반짝이는˝

이 구절이 가장 강렬하게 남네요....

희선 2022-07-24 02:3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오래전 아프리카는 낙원이었을지도 모를 텐데, 이젠 그렇지 않네요 아프리카도 여러 나라로 되어 있던데, 그냥 아프리카라 하는군요 많은 사람이 가고 싶어하는 곳에 아프리카도 들어가는 듯해요 위험한 곳인데도...

잘 모를 때는 좋아 보여도 시간이 가면 안 좋은 게 보이기도 하겠습니다 그게 자라는 거기도 하네요


희선

그레이스 2022-07-24 15:19   좋아요 3 | URL
사람이 없는 자연이 낙원이라는게 의미가 있어요. 서로다른 문화와 언어를 가진 부족들이 한 국가로 묶어버린 것이 비극을 만들고 있죠.

미미 2022-07-24 08:5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도 꼭 읽어봐야겠어요!! 유수프가 요셉을 뜻하는 아랍어군요? 쿳시의 말도 와닿고 죄의식,두려움은 많은 작가들이 천착하는 주제인것 같아요.^^*

그레이스 2022-07-24 15:25   좋아요 3 | URL
성경의 요셉의 이야기랑 계속 겹쳐져서 차용되었다는 생각을 하면서 논제를 만들었죠^^ 팔려간자, 이민자의 상징어라는 생각을 했었구요.
유수프가 요셉의 아랍어라는 것은 동아리 회원들하고 토론하다가 페넬로페님이 말씀하셔서 알게되었어요.
그러고보니 어디선가 읽었던 기억이! 하고 반짝했죠.
이래서 토론을 해야한다고 모두가 공감했었습니다.^^

거리의화가 2022-07-24 09:0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와 그레이스님! 저 이분 작품 뭐 읽을지 계속 고민중인데 낙원은 꼭 읽어봐야겠어요. 시대적 배경을 알고 읽으면 더 재밌을 것 같았는데 그레이스님의 글로 도움 많이 받겠습니다. 그의 이력이 이런 소설을 낳게 한 면이 있는 것 같습이다. 유럽과 인도. 또 무슬림~ 경계에 서 있는 이들의 눈을 통한 세계를 확인할 수 있을 듯해요. 감사합니다.

그레이스 2022-07-24 15:27   좋아요 4 | URL
낙원부터 읽을 것을 권하더라구요
저도 ‘바닷가에서‘까지 읽었는데,,, 낙원부터 읽어야하는게 맞는것 같아요.^^

서니데이 2022-07-24 18:1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그레이스님, 날씨가 많이 덥네요. 주말 잘 보내고 계신가요.
이번주 계속 더울 거라고 합니다.
더운 날씨 건강 조심하시고, 시원하고 좋은 주말 보내세요. ^^

그레이스 2022-07-24 18:22   좋아요 5 | URL
예~
서니데이님도 더위에 몸조심하세요.
남은 주일 저녁 잘 지내세요~~

alummii 2022-07-24 18:1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도 읽으면서 유수프를 요셉이라고 생각했었는데 ! 그레이스님도 그렇게 생각하셨다니 찌찌뽕^^

그레이스 2022-07-24 18:23   좋아요 5 | URL
^^
창세기에서 중요한 사건과 인물이어서 금방 눈치 채죠!^^
아이럼미님도 그러셨군요^^
왠지 반갑네요~♡

새파랑 2022-07-24 19:54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애증의 ‘아지즈‘ 아저씨군요. ‘산후의 점액‘ 이 단어의 원어가 어떤건지도 궁금합니다~! 이 책이 압둘라자크의 1번 책이군요 ^^ ˝모든 글은 자서전˝이다라는 말은 정말 맞는거 같아요. 작가가 경험해보지 않은 이야기는 아무래도 와닿는게 약할거 같아요 ㅋ

그레이스 2022-07-24 20:04   좋아요 4 | URL
his cowardice glimmering in moonlight, covered in the slime of its afterbirth.
같은 의미예요^^
애증의 아지즈 맞네요^^
쿳시의 말은 정말 명언이죠!

얄라알라 2022-07-28 14:13   좋아요 1 | URL
아하!

˝slime of its afterbirth˝

저도 점액을 어찌하나 했는데
새파랑님 덕분에 저도 그레이스님께 배웠네요

scott 2022-07-24 23:3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아라비아해와 인도양을 떠돌았던 용감했던 아랍 상인들의 이야기(전설등등)은 항상 호기심을 자극하는데
영국 땅에 정착하게 된 작가 압둘라자크의 삶, 서구인들의 수탈과 착취의 역사의 희생자 였네요.

영국 ,,,
이제 인도계 출신 수상 나올 수 있는 나라 ㅋㅋㅋ

그레이스 2022-07-24 23:38   좋아요 4 | URL
바닷가에서를 보면 이민자의 삶을 그리고 있어요.
밑바닥이 꺼진채 부유하는 듯한 정체성과 노골적인 배척때문에 고독할듯요.^^

mini74 2022-07-25 09:32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그레이스님 글 읽으니 묘하게 우리정서랑 통하는 느낌입니다. 더 이상 낙원이 아닌 고국, 죄책감과 정체성, 그레이스님 글 읽으니 어머! 이 책은 읽어야해! 하는 느낌이 딱 옵니다 ㅎㅎ 동아프카 역사와 이름과 관련된 이야기에서 쿳시의 말까지. 넘 잘 읽었어요 그레이스님 *^^*

그레이스 2022-07-25 10:02   좋아요 4 | URL
저도 갑신정변, 청일전쟁, 을사늑약... 이런게 생각나더라구요;;
고향은 있으나 고국은 없는(이건 다음 리뷰에서 쓸 말인데^^) 작가의 맘을 알듯 하고...

서니데이 2022-07-25 18:1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레이스님, 주말 잘 보내셨나요. 어제는 습도가 높아서 더웠고, 오늘은 기온이 많이 올라가서 더워요.
이번주 많이 더울 거라고 하는데, 벌써 7월 마지막 주입니다.
좋은 일들 가득한 한 주 되세요.^^

그레이스 2022-07-25 18:14   좋아요 3 | URL
예~
잘 보냈습니다.
오늘은 어제보다 덮네요.
행복하게 하루 잘 마무리하세요~

서니데이 2022-07-26 19:1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레이스님 시작하셔서, 알라딘 서재에 이 책 유행할 것 같아요.
조금 전에 페넬로페님 서재에서도 보고 왔거든요.^^
오늘 날씨가 많이 더운데, 시원한 하루 보내고 계신가요.
더운 날씨 조심하시고, 맛있는 저녁 드세요.^^

그레이스 2022-07-26 19:20   좋아요 4 | URL
^^
페넬로페님과 저는 이 책 동아리에서 함께 읽었어요!
가서 얼른 읽고 와야겠네요.
저 말고 일찍 시작하신분들이 계신걸로 알고 있어요^^
감사합니다 ~
서니데이님도 맛있는 저녁 드세요~~

서니데이 2022-07-27 18:42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두분이 독서모임을 하시는 거군요.
그건 잘 몰랐는데, 요즘 독서모임 하시는 분들이 많다고 들었어요.
알라딘 내에서도 비슷한 책을 읽는 분들이 계시기도 하고요.
오늘도 날씨가 많이 덥습니다.
더운 날씨 조심하시고, 시원하고 맛있는 저녁 드세요.^^

그레이스 2022-07-27 18:51   좋아요 3 | URL
예~~
너무 덮네요.
지치지 않게 건강 조심하세요~~!

yamoo 2022-07-28 12:5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 작품이 서재 이곳 저곳에서 보이는군요. 아프리카 작품들은 저와 잘 안 맞아서 안 챙겨보는데, 계속 회자되니 궁금하긴 합니다.

독서모임...저도 한 8년간 했는데, 이제는 다 귀찮고 걍 혼자 읽어요~
요즘엔 책도 읽지 않고 그림만 그립니다요~~~ㅎㅎㅎ

그레이스 2022-07-28 14:28   좋아요 1 | URL
그림, 야무님 서재에서 봤어요.
좋았습니다.
추상표현주의 공부하고 있는데,,,
좋았어요. 색감도!
그리고 가끔 보이는 풍경화도 좋았어요~♡

서니데이 2022-07-29 20:4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레이스님, 오늘 날씨가 많이 더웠는데, 시원한 하루 보내고 계신가요.
이번주 날씨가 덥더니, 오늘은 진짜 폭염이네요.
주말이 되어도 날씨가 더울 것 같아요.
더운 날씨 조심하시고, 7월 마지막 주말 즐겁게 보내세요.^^

그레이스 2022-07-30 19:08   좋아요 2 | URL

오늘은 밖에 나서면 죽을 것 같았어요;;
건강조심하세오ㅡ
서니데이님

서니데이 2022-07-30 17:4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그레이스님, 더운 토요일 시원하게 보내고 계신가요.
어제는 어제가 제일 더운 날 같았는데, 오늘은 어제보다 더 더운 것 같아요.
7월이 빠르게 지나가고, 마지막 주말이 되었습니다.
좋은 주말 보내시고, 즐거운 하루 되세요.^^

그레이스 2022-07-30 18:06   좋아요 2 | URL

매일 감사해요
서니데이님도 건강한 주말 되세요

서니데이 2022-07-31 16: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레이스님, 주말 잘 보내고 계신가요.
오늘은 비가 자주 오는데, 날씨는 덥습니다.
오늘은 7월 마지막날입니다.
내일부터 시작되는 8월에도 좋은 일들 가득한 시간 되세요.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그레이스 2022-07-31 21:29   좋아요 1 | URL
예~^^
내일은 8월 시작이네요.
서니데이님 굿밤요!
 


루공-마카르 전집을 시작하기 전에 썼던 실험소설과 같은 테레즈 라캥서문에서 에밀 졸라는

테레즈 라캥에서, 나는 사람의 성격이 아니라 기질을 연구하기를 원했다. 이 책 전체는 바로 그것을 담고 있다. 나는 자유의지를 박탈당하고 육체의 필연에 의해 자신의 행위를 이끌어가는, 신경과 피에 극단적으로 지배받는 인물들을 선택했다. 테레즈와 로랑은 인간이라는 동물들이다. 그 이상은 아무것도 없다. 나는 이들의 동물성 속에서 열정의 어렴풋한 작용을, 본능의 충동을, 신경질적인 위기에 뒤따르는 돌발적인 두뇌의 혼란을 조금씩 좇아가려고 노력했다. 나의 두 주인공들에게 있어 사랑은 필요의 만족이다. 살인은 그들이 저지른 간통의 결과이며, 그들은 마치 늑대가 양을 하듯 살인을 한다. 내가 그들의 회환을 촉구해야 했던 부분은, 단순한 생체조직 내의 무질서, 파괴를 지향하는 신경체계의 반란이었던 것이다. 그들에게 영혼은 완벽하게 부재한다.” (테레즈 라캥서문 중, 에밀 졸라)

라고 말했다.

 

나나는 영혼이 부재한 욕망에 의해 움직이는 인물로서 사람들 가운데 던져진 것이다. 그녀로 인해 그 주변 사람들이 어떤 자극을 받고 어떻게 추락하는가를 보여준다. 나나의 생각을 알 수가 없다. 오히려 그녀 주변인들의 생각, 감정, 동기들이 더 자세히 설명되고 있다. 나나와 달리 그 주변인들이 보여준 반응과 삶의 진행 방향은 예측이 가능한 보편성을 띄고 있다.

 

그녀가 파리의 한 극장 19세기 비너스로 등장함으로, 무대 뒤 여배우들의 불행한 삶과 그들을 찾는 파렴치한 귀족들의 모습이 함께 조명된다. 그녀의 소문이 파리 귀족들의 사교계에 퍼져감에 따라 이미 파괴되고 해체된 그 가정의 폐부가 드러난다. 그녀를 좋아했던 스타이너, 라 팔루아즈, 뮈파, 조르주, 필리프, 슈아르, 방되브르 등 남성들은 파산과 불명예를 면치 못한다. 그들의 은밀했던 욕망이 발각되고 노골화 되며, 스스로를 구별했던 사회적 경계가 무너지는 것을 보게 된다. 나나의 주인공은 나나가 아니다.(안나 카레니나의 주인공도 안나 카레니나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스만 대로에 있는 나나의 3층 집 모습-금칠을 한 의자나 탁자 같은 요란스러운 사치품이, 조그만 마호가니 원탁과 피렌체의 청동을 흉내 낸 아연 촛대 등 중고 상점에서 산 중고품들과 극심한 대조-성실했던 첫 남자로부터 너무 일찍 버림받고 수상한 남자들의 손에 넘어간 여자임을 짐작하게 한다. 나나는 출발이 어려워 인생의 첫 단추를 잘못 끼웠고, 신용 추락과 추방 위협으로 발에 족쇄가 채워진 여자”(48p).

나나의 집에 초대되어 온 여인들도 비슷한 삶을 살고 있다. 조르주에게 그 여인들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다그네의 이야기를 읽다보면 그녀들의 삶은 대부분 환경과 사람들에 의해 결정된 것으로 보인다.

 

카롤린 에케는 보르도에서 하급 사무원의 딸로 태어났는데, 그녀의 아버지는 그런 딸을 버렸다가 일 년 동안 생각한 끝에 재산을 보전해주려고 다시 그녀와 함께 살고 있다. ……클라리스 베스뉘는 생토뱅쉬르메르에 살던 어느 부인의 하녀로 일했는데, 그 부인의 남편이 그녀를 이런 길로 진출시켰다. 시몬 카비로슈는 가구 상인의 딸로, 교사가 되고자 생탕투안 교외에서 기숙학교를 다녔다. 마리아 블롱, 루이즈 미올렌, 레아 드오른 등은 모두 파리 거리에 버려진 여자들이었다. 스무 살까지 샹파뉴의 황무지에서 소를 지켰던 타탕 네네도 그런 여자였다.”(131p)

 

여배우의 분장실에 노크도 없이 들이닥쳐 나체나 다름없는 그녀를 바라보는 세 남자(보르드나브, 왕세자, 뮈파 백작)의 파렴치한 시선과 무대 뒤쪽 구멍을 통해서 훔쳐보는 관음증의 시선은 권력이다.

 

백작과 왕세자는 놀라서 서 있었다. 거대한 침묵 속에서 깊은 한숨 소리, 관객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매일 저녁 여신 비너스가 나체로 등장할 때마다 같은 반응이 일어났다. 뮈파 백작은 그 광경을 보고 싶었다. 그래서 휘장의 구멍에 눈을 갖다 댔다. 각광이 무지개처럼 둥글게 눈부시고, 극장 안은 갈색 연기가 가득 찬 것처럼 침침했다. 줄지어 앉은 관객들의 얼굴이 흐릿한 배경을 이루는 가운데, 나나의 흰 몸이 발코니 좌석에서 꼭대기 좌석까지 가리면서 크고 뚜렷하게 솟아났다. 그녀의 등과 팽팽한 허리와 활짝 편 두 팔이 보였다.”(199p)

 

드가의 <스타>라는 작품에서 발레리나가 춤을 추고 있는 무대 막 뒤의 남성을 연상하게 한다.

<The Star, L’Etoille>, 에드가 드가, 파스텔1976년경, 오르세미술관

에투알은 프랑스어로 프리마돈나 또는 프리마 발레리나를 뜻한다. 이 그림에서 눈에 띄는 점은 드가가 정면이 아닌 위에서 발레리나를 내려다보는 듯이 연출했다는 것과 그녀 뒤쪽에 정체 모를 남자의 존재를 그려 넣었다는 것이다. 드가는 파스텔을 써서 몽환적인 분위기를 조성하면서도 당시 타락한 발레계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줌으로써 충격을 배가하는 효과를 만들어냈다. 20세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발레리나들은 최하층 계급 출신이 대부분이었기에 이들은 부유한 후원자와의 은밀한 만남을 통해 생계를 이어나갔다.”(14p, 드가, 이연식, 아르떼)

 

시점과 익명의 남성의 모습으로 이 그림 안에 존재하는 귀족 남성들의 권력을 보여주고 있다. 왕세자와 포주 라 트리콩이 함께 무대 뒤에 들어와 있는 것은 라 트리콩의 저택에 찾아오는 귀족들과 차이가 없다. 극장의 단장 보르드나브는 하필 왕세자가 연극을 보러 온 날, 라 트리콩을 들여보낸 사실에 화를 낸다. 극장의 모든 여배우들과 거래를 하고 있는 라 트리콩과 보르드나브가 하려는 일이 다르지 않다.

 

나나가 파리 근교 퐁데트로 이사 오자, 그곳 저택에 살고 있는 귀부인들은 일종의 강박관념을 표출한다. 화가 났고 저녁때면 마치 동물원에서 도망쳐 나온 짐승이 근처를 배회하고 있는 것처럼 막연한 불안감”(238p)을 느꼈다. 자신들의 경계 안으로 들어온 하위계층 여인에 대한 배타적 감정이다.

 

그녀를 사랑하는 뮈파 백작은 포슈리가 쓴 나나에 대한 악의적인 기사내용을 읽고 괴로워한다. 그럼에도 나나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고 계속 빠져든다. 반대로 자신의 부인의 사생활을 알게 되고 살의를 느낄 정도로 분노하는 것은 그가 이제껏 자신의 정체성으로 여겼던 신앙과 명예 모두가 위선이었음을 보여준다.

 

나나의 사랑을 받고 그녀를 소유하려는 남자들의 시도는 매번 실패한다. 나나의 욕구는 채워도 끝이 없고 예측을 할 수 없다. 이런 사람 앞에서 사람들은 당혹스럽다. 그런데 그녀가 자신의 마음을 밑바닥까지 드러내는 상황은 퐁탕과의 관계에서다. 폭력을 휘두르는 퐁탕에게 매달리고, 그 폭력에서 사랑을 확인하는 왜곡된 단계까지 나아가는 그녀에게서 보편적 고통을 읽게 되는 것은 아이러니다.

 

그는 그녀가 돈을 지불하고 산 악습이 되었고, 따귀를 얻어맞으면서도 떠날 수 없는 필요가 되었다.”(343p)

 

나나를 좋아했던 남자들은 비극적 최후를 맞이한다. 마치 깊은 구렁 속에 세워진”(520p)것 같은 그녀의 저택을 찾아온 무수한 남자들이 바친 재산과 육체와 이름은 흔적 없이 사라졌다. 에밀 졸라는 그것을 모든 사람들 위에서 두려움과 복종심을 불러일으키며 군림하고 있는 준엄한 튀일리 궁전의 심장 한가운데에 질러대는 발길질이라고, 그것이 바로 피를 통해 물려받은 그녀 집안의 무의식적인 원한과 보복심”(564p)이었다고 말한다.

 

갑자기 사라졌던 나나는 천연두에 걸려 돌아왔고, 파리 한 호텔에서 죽는다. 그녀에게서 전염되어 민중을 망쳐놓았던 효소가 그녀 자신에게 옮겨갔고 비너스는 썩었다. 그녀를 주인공으로 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드는 에밀 졸라의 평가다. 단지 사람들의 위선을 드러내는 욕망덩어리, 빌런이라고 한다면 지나친 생각일까? 그녀가 죽어가고 있을 때 거리에서는 군중이 베를린으로! 베를린으로! 베를린으로!”라고 외치며 몰려가고 있다. 보불전쟁이 터졌고 그들은 승리를 장담한다. 그러나 나나에 의해 파헤쳐진 프랑스 제3제정 사회는 전쟁에 의해 다시 한 번 패망으로 나아갈 것이다.

 

에밀 졸라의 작품에는 당대 회화 작품을 연상케 하는 장면들이 많다. 목로주점나나에는 드가의 작품을 떠올리게 하는 장면들이 여러 번 등장한다. 세탁부, 발레리나, 무대 뒤의 남성들, 경주마를 소재로 한 그림들이다. 실제로 에밀 졸라는 목로주점을 쓸 때 그의 세탁부 그림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카페 테라스의 여인들>, ,에드가 드가,1877

경관의 모습이 눈에 띄면 혼비백산하여 군중 사이로 달아나는 겁먹은 여인들의 행렬을 헤치고 얼른 자리를 떴다법률과 경찰의 힘이 하도 공포스러워서 어떤 여자들은 경관이 거리를 쓸다시피 하며 다가와도 정신나간 사람처럼 카페 문 앞에 그냥 붙박여 있었다.”(339p 『나나』)


<목욕통The Tub>, 에드가 드가, 1886, 파스텔, 60×83, 오르세 미술관

"화장대 밑에는 찌그러진 양철 주전자와 더러운 물이 가득 담긴 양동이와 거칠게 만든 노란 도자기 물병들이 놓여 있었다또한 주위에는 금간 대야며 이 빠진 뿔빗을 위시해 뒤틀리고 닳아빠진 값싼 물건들이 너저분하게 널려 있었다아무런 거리낌 없이 재빠르게 옷을 벗어던지고 세수하는 것이 생활화된 두 여자에게는 잠깐 들르기만 하면 되는 그 방의 더러움이 마음에 걸리지 않는 듯 했다."(202p,나나)



수잔 발라동을 모델로 그렸던 르누와르와 로트렉의 그림들도 나나와 주변 여성들의 삶에서 보인다. 수잔 발라동에게서 그녀들의 삶을 보기도 한다. 모델, 세탁부, 발레리나, 여배우. 가난하고 고단했던 19세기 여성들을 바라보는 예술가의 그 시선을 우리 시대의 여성들에게서도 거둘 수가 없다는 생각이다. 더 화려해지고, 위장되고, 은폐된 그녀들의 삶에서.



 

 

 


댓글(31) 먼댓글(0) 좋아요(5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Falstaff 2022-07-04 08:2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쉬잔 발라동....의 손녀들이 21세기 초반까지 몽마르뜨 한 구석에서 분홍색 카페를 열었더랬는데요.
ㅎㅎㅎ <나나>는 읽은지 몇 년 안 됐는데도 별 재미 없이 훅 지나쳐 쓰신 리뷰 읽어도 오, 그랬나? 하는 게 별로 없네요.
전에 로트렉에 관심이 있어 익숙한 쉬잔 발라동 얘기에만 ㅋㅋㅋㅋ (사람이 이러면 안 되는데.....ㅜㅜ)

그레이스 2022-07-04 08:34   좋아요 4 | URL
^^;;
그랬군요
제게도...
로트렉, 수잔 발라동 모두 강한 인상을 주었어요.^^

mini74 2022-07-04 08:3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그레이스님 저도 나나 읽으면서 로트렉의 여자들 떠올랐어요. 드가의 시선보단 로트렉의 시선이 더 따뜻해보여 좋았던 ~ 알고나니 그 예뻐보이던 발레리나가 되려는 아이와 그 옆에 앉은 엄마의 그림이 그냥 모녀사이가 아니라 포주관계 처럼 ㅠㅠ 보였어요 ㅠ

그레이스 2022-07-04 08:51   좋아요 3 | URL
예 맞아요
실제로 아이를 통해 돈을 벌려는 엄마들이였다고...
넘 슬펐어요!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면, 아이를 기생으로 보내거나, 부잣집 첩으로 보낸 일도 많았잖아요!
가난, 돈과 맞바꾸는 대상이 된 여성의 몸에 대한 생각은 변하지 않는듯요.

바람돌이 2022-07-04 09:4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 정말 이 소설 읽기 힘들거같은 느낌이.... 나나라는 여성을 하나의 인간형의 대표 뭐 이런걸로 배치하고 독자가 감정이입하기 힘들게 그린다면 진짜 그녀의 삶의 과정을 보는게 고통스러울거 같은 느낌이에요. 에밀 졸라 책 1권 읽었는데 역시 읽기 쉽지 않았던....

그레이스 2022-07-04 10:04   좋아요 2 | URL
나나는 오히려 쉽게 휙휙 넘어가는 책인데... 다 읽고 나면 돌아가서 새기게 되요.
19, 20세기 파리의 예술계도 막 떠오르고...^^;;

얄라알라 2022-07-04 09:4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미술사를 그토록 진지하게 공부하시는 그레이스님의 <나나>리뷰는 장르를 넘나드네요.정말 재밌게 읽고 갑니다. ‘에투왈‘ 뒤 검은 양복 넓게 다리 벌려 지지하고 선 남자의 의미를 몰랐을 때는, 무대 위에 서는 건 다 행복인줄 알았어요.

에밀 졸라는 플친님들 극찬 리뷰로 간접, 다시 접하는데
그레이스님 옮겨주신 테레즈 라켕 서문 문장, 포스를 풍깁니다.
<나나>를 중딩 때 읽다보니, 완전 껍질만 두드리고 제목만 외우고 지나간 거 같아요
다시 읽어야할 시점이네요

그레이스 2022-07-04 10:08   좋아요 3 | URL
감사합니다
저도 목로주점 넘 오래전에 읽고 다시 읽으니 다른 책을 읽는 느낌이었어요^^;;
독자에게서 의미가 생성된다는 말! 느끼게 되죠?!

저는 무대 뒤에 남자와 서있는 발레리나도 눈길이 가요
선택받은? 프리마돈나 뒤에서 그들이 기다리는 것의 정체! ㅠㅠ

2022-07-04 21: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7-05 11: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새파랑 2022-07-05 12:1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책 제목이 나나인데 나나가 주인공이 아니라는 ㅋ 생각해보니까 루공마카르 총서는 <나나>를 빼고는 제목에 사람 이름이 없는거 같아요 ~!! 나나를 읽을때 뭔가 시각적인게 강하게 느껴졌었는데 이런 이야기가 있었군요 ^^

그레이스 2022-07-05 14:30   좋아요 3 | URL
ㅎㅎ
저는 주변 인물들의 몰락에 더 관심이 가더라구요^^

에밀졸라의 작품은 회화적인 인상이 강해요... 저에게!

서니데이 2022-07-05 15:2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발레리나를 생각하면 예쁜 의상이나 화려한 동작 같은 것도 있지만, 언젠가 보았던 발 사진이 생각나요.
그만큼 고된 직업 같다고 생각했어요.
드가의 그림을 보면 전체적으로 밝지 않아서 발레리나가 더 잘 보이는 것 같습니다.
잘읽었습니다.
그레이스님, 오늘 날씨가 많이 덥습니다.
더운 날씨 건강 조심하시고, 시원한 하루 보내세요.^^

그레이스 2022-07-05 17:1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강수진님 발 사진 유명하죠?
피나는 노력으로 프리마돈나까지 되는 건 감동이죠!
서니데이님도 건강하세요~~

희선 2022-07-06 03:4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나나를 좋아한 남자들은 마지막 이 안 좋군요 나나가 개미지옥... 그건 꼭 나나 때문은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시대나 그 사람들 때문이겠네요 시대가 시대여서 나나는 다르게 살기 어려웠겠습니다


희선

그레이스 2022-07-06 13:06   좋아요 3 | URL
그렇죠?
나나는 귀족이었더라도 그렇게 살지 않았을까 싶긴해요.
나나를 좋아한 남자들과 귀족여성들, 그녀와 비슷한 계층의 사람들의 삶을 그대로 보여준것이 중요하겠죠?

서니데이 2022-07-06 13:1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늘이 어제보다 더 더운 것 같아요.
습도가 높아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요.
그레이스님, 날씨는 많이 덥지만 맛있는 점심 드시고,
시원하고 좋은 오후 보내세요.^^

그레이스 2022-07-06 14:18   좋아요 3 | URL
예~
이 더운데
오전 내내 싱크대 청소하고 에어컨 틀었습니다.^^;;
서니데이님도 시원하게 보내세요~♡

2022-07-08 15: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7-08 17: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mini74 2022-07-08 18:0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그림도 글도 명작 ! ㅎㅎ 축하드려요 그레이스님. 무슨 책 사실건지 궁금합니다. 따라 살려구요 ㅎㅎ

그레이스 2022-07-08 18:37   좋아요 3 | URL
감사합니다^^
제가 미니님 따라 사고 있는걸요!!^^

그레이스 2022-07-08 19:33   좋아요 3 | URL
그른데
이 페이퍼던가요?
7월에 썼는데...?!
저도 뭘로 받았는지 잘 모름 ㅋ

그레이스 2022-07-08 19:35   좋아요 3 | URL
미니님
저 이거 아니고 홀로코스트네요^^
그냥 7월거 미리 찜해주시는걸로?!
ㅋㅋㅋㅋ

mini74 2022-07-08 19:42   좋아요 3 | URL
ㅎㅎㅎ 그레이스님 👍

서니데이 2022-07-10 18:5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레이스님, 주말 잘 보내고 계신가요.
주말 날씨가 많이 덥습니다.
더운 날씨 조심하시고, 시원하고 좋은 주말 보내세요.^^

그레이스 2022-07-10 19:35   좋아요 2 | URL
예~
매번 먼저 안부인사 전해주시는 서니데이님 감사합니다 ~
서니데이님도 건강하세요~

프레이야 2022-07-19 09: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테레즈 라캉의 서문 문장을 영화 박쥐를 보며 떠올렸더랬는데 다시 만나네요. 에트왈의 그림 보기도 그렇고 저 시대의 여성을 바라보는 남성의 시각과 환경을 꼬집은 그림과 소설로 나나를 대표해 보게 되네요. 안나 카레니나도. 그레이스 님 그림 읽기 참 좋습니다^^

그레이스 2022-07-19 12:07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역시 프레이야님은 영화로 연결되시는군요!^^
박쥐 찾아봐야겠어요.~^^

프레이야 2022-07-19 12:35   좋아요 1 | URL
박 감독이 테레즈 라캥에서 모티브를 얻어 만들었대요. ^^

그레이스 2022-07-19 12:37   좋아요 0 | URL
아!
그렇군요.
그렇지 않아도 검색해봤어요.
맘 굳게 먹고 봐야할 영화인듯하여;;; 내용만 읽어보고 있는 중이예요^^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위한 기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91
임레 케르테스 지음, 이상동 옮김 / 민음사 / 2022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말하면서 생각을 정리하는 사람들과 대화를 할 때가 있다. 질문이나 대답이 필요 없다. 그들은 상대방이 듣고 있는지 여부와 상관없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일단 생각의 흐름을 놓치지 않고 이야기하려는 태도 때문에 끼어 들 틈도 없다. 가끔 긴 시간 계속해서 들어주는 것이 에너지가 더 많이 필요하다고 느낄 때가 있다. 이 작품은 그런 느낌을 준다. 연속되는 쉼표(,), 하이픈(-), 콜론(:), 세미콜론(;) 들과 괄호들 때문에 끊기고 돌부리에 걸렸다. 의식의 흐름대로 말하고 있는 작가의 독백을 듣고 있는 것 같다. 여백이 없는 글들은 독자가 사색할 시간을 주지 않는다. 처음에는 문장부호들과 삽입구를 걷어내고 맥락을 읽으려 했다. 차츰 익숙해지면서 그 흐름에 의식을 맡기게 되고, 동시에 작가의 고통과 고독, 회환에 깊이 침잠(沈潛)해 들어갔다.

 

우리의 본능이 우리의 본능에 반하여 작동하는 것이, 말하자면 우리의 반()본능이 우리의 본능을 대신하고, 더욱이 본능인 것처럼 작동하는 것이 이미 아주 자연스러워졌기 때문이다.”(9p) 작가가 반복하는 말이다. 말장난처럼 들리는 이 말이 그에게는 적나라하고 비참한 진실이다.

 

작가는 해명하는 것을 싫어하지만, “아무 할 말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말하지 않으며 안 될 것 같은 어떤 억누를 수 없는 강박에 압도당한 채, 또 내가 우려하는바, 마친 내가 나의 현존을 끊임없이 갈망하기라도 하는 듯, 스스로를 내던질 정도로 과장된 친절함으로 철학자에게 해명한다.”(10p) 이 해명을 촉발한 것은 철학자와의 대화이다. 아이를 갖지 않는 것은 일종의 의무에 대한 태만 행위라고 말하는 철학자에게 아니요!”라고 본능적으로 반박한다. 그의 본능은 반()본능이 대신하고 있다. 다름에 대해서 해명하는 그는, 아이를 원하는 아내에게 처음으로 안 돼!”하고 울부짖었던 때를 기억한다. 아내를 처음 만났을 때도 여러 사람들 앞에서 자신이 겪었던 일들에 대해 격앙된 감정으로 이야기하고 있을 때였다. 그런 자신을 보고 마치 이해하고 도와줄 수 있다고 생각하며 다가오는 아내를 받아들였다. 결코 그 누구도 자신을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 그는 자신이 누군가에게 애정을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 사실을 묵인하고 결혼 생활을 이어갔고, 결국은 두 사람은 헤어진다. 그녀에게 그의 상처와 불임은 넘을 수 없는 벽이었다.

 

그가 아이를 갖지 않으려는 것은 자신과 같은 고통 받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망설임 없이 안 돼!”라고 울부짖었던 때로부터 오랜 세월이 지나고 그의 흐느낌은 서서히 가라앉았지만, 하나의 물음이 되어 형태를 갖추어 가기시작했다. “혹시 네가 검은 눈동자를 가진 딸아이로 태어나지는 않을까? 너의 작은 코 주위에는 주근깨가 엷게 흩어져 있지는 않을까? 아니면 네가 고집 센 아들인 것일까? 너의 눈은 회청색 조약돌처럼 근사하고 힘찰까?”(26p)

 

그는 자기 자신에게 하는 해명과 같은 글쓰기를 시작한다. “의식적인 자기청산의 길고도 긴시작이었고, 그가 계속 반복하는 표현으로 빌자면, 그것은 하늘 높이 파고 있는 나를 위한 무덤을 향한 최초의 삽질”(27p)이었다.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이 그 첫 번째다. 그 정체성의 이미지는 빨간 잠옷을 입고 있는 대머리 여자다. 폴란드 유대인 전통인 셰이틀(유부녀들이 머리를 밀고 쓰는 가발)을 벗고 앉아있는 친척 아주머니를 목격한 후, 그 이미지는 자신을 규정하는 하나의 이미지가 되었다. 사회적 혐오의 분위기와 맞물려 그 모습은 창녀, 마녀의 이미지와 결합 된다. 그것은 자신을 정의한, 필연적이고 유쾌하지 않은, 기이한 이미지였다.

그의 결혼, 양육과 같은 본능에 대한 반()본능은 유대인이라는 정체성과 함께, 부모의 이혼에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의 가정과 학교, 나아가 그 시대를 지배하는 정신인 가부장제에 그 근원을 둔다. 더 나아가 아우슈비츠는, 각각의 삶의 표상이자 행위이며, 그 가부장제 정신의 지배를 받아 온 개인의 모임인 인류가 통째로 꿈을 꾸기 시작한다면”, 매혹적인 살인마와 같은 인물이 반드시 탄생한다. “전부로서의 개별적인 삶, 그 전부가 전개되어 가는 역학”(57p), 학살을 부른 전체주의는 가부장제로 귀착되고, 그는 자신의 부모와 선조가 믿은 신에게서 그 원인을 찾는다.

 

그는 종전 후 그가 아직 수용소에 있던 시기에 그 원형을 체험했다. 화장실에서 세면대를 닦고 있던 독일군과 마주친 기억이다. 독일군 병사가 그를 위해 세면대를 닦고 있었다는 것은 세상의 질서가 바뀌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아무것도 달라진 것은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상징적인 의미에서 독일인들이 언제든지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은 그토록 사실적인 것이다.”(84p) 그는 이것을 자신이 현재 살고 있는 셋방살이와 연결시킨다. 그는 시대를 지배하는 정신에서 멀어지기로 작정했고, 아니 반()본능이 본능이 되었고, 모든 것이 환원되는 자본도 거절한다.

 

소외감, 이름에 들러붙어 있는 불가해한 수치심, 허무……. 이런 감정들이 그를 괴롭혔으나, 그는 부조리함을 비웃으려 한다. 여전히 유대인 혐오가 공공연한 세상에서 그는 말한다.

 

내가 유대인이라는 사실은 결국 나에게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 것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유대인이라는 추상적 관념으로서 그것은 나에게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다. 다만 체험으로서 그것은 나에게 모든 것을 의미 한다; 추상적 관념으로서 그것은: 빨간 잠옷을 입고 거울 앞에 앉아 있는 대머리 여자다, 체험으로서의 그것은: 나의 삶이다, 말하자면 나의 생존, 내가 살고 있는 정신적 실존 약식이며, 정신적 실존 양식으로 보존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나에게는 그것이면 충분하다,”(127p)

 

그는 존재하기 위해 글을 쓴다. 그런데 그것은 하늘 높이 파고 있는, 나를 위한 무덤을 향한 삽질이라고 한다. 죽음과 실존은 뗄 수 없다. 그러기에 실존적 글쓰기는 무덤을 파는 삽질이다. 그리고 그의 글은 모두가 볼 수 있는 것이므로, 땅속이 아닌 하늘에 있다고 한 것이 아닐까?

 

단단하게 사유를 쌓아가던 그도 예상치 못한 작은 사건에 흔들린다. 재혼한 아내가 두 아들을 데리고 와서 아저씨에게 인사 하렴하는 말을 들었을 때, 그 사건은 그를 완전히 뒤흔들어 놓았다. 연약하면서도 완강한 그의 삶을 드러낸다. 그는 기도로 글을 마친다.

오 하느님!

저를 가라앉히소서

영원히

아멘.”

제목에 사용된 카디시(유대인의 기도)와는 반하는 내용이다. 그 격정이 고통스러워 가라앉혀 달라는 호소일 것이다.

 

깊은 상흔은 통증을 기억한다. 통증이 찾아오면 자신을 굳건히 세워왔던 철학도 신념도 신앙도 흔들린다. 그 흔들림과 격정 앞에서 절망하는 것이 인간의 연약함이다.

 

의식의 흐름을 쫒아가기 어려웠고, 다 이해했다고 말할 수 없는 책이다. 작가가 쌓은 사유만큼이나 고통이 헤아려진다. 어려웠다고 작품을 낮게 평가할 수 없다. 가끔은 어려운 문장보다 내 독서력을 탓하며 별 다섯 개를 주게 되는 작품들이 있다.


댓글(14) 먼댓글(0) 좋아요(5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cott 2022-07-02 21:0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임레 작품의 역자들이 다르네요
운명을 번역 하셨던 유진일 교수님이 전부 번역 해주셨어야 하는데 ^^

그레이스 2022-07-02 21:09   좋아요 3 | URL
번역이 별로였던 것은 아니었어요.
느낌을 살리기 위해서 그대로 직역한듯요. 부호나 삽입구를 없애면, 작가의 글을 훼손하게 되는 문장이어서 직역이 옳았다고 봅니다^^

어쨌든 임레 케르테스 털고 갑니다^^
후련하네요
나중에 다른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어요^^
운명 마지막 작품이 기다려집니다

희선 2022-07-03 02:4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의식의 흐름으로 써서 읽기 힘들기도 하군요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는 건 죄 때문이다 하는 말도 있는 것 같은데... 업 때문인가 자신이 겪은 걸 자기 아이한테는 겪게 하고 싶지 않기도 하겠습니다 다른 세상이라 해도 같은 일이 또 일어날지도 모르겠네요


희선

그레이스 2022-07-03 08:22   좋아요 3 | URL
전체주의가 살아나면 그런 비극은 또 일어나겠죠!
스스로를 연약하고 완고하다는 말이 공감됐어요.

Falstaff 2022-07-03 08:1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정진석 번역의 다른우리 출판사 판으로 읽었습니다. 번역에 대해서 불만 없이 잘 읽었습니다.
짧은 작품이지만 정말 집중하지 않으면 읽다가 갑자기 어제 저녁에 먹은 소머릿고기 수육도 생각나고 하필이면 차 유리창에 들러붙은 까치 똥도 얼른 치워야 하는데, 같은 것도 생각나서 몇 번이나 읽다가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읽고 그랬던 기억입니다.
이걸로 케르테스의 3부작을 다 마치셨군요! ㅋㅋㅋ 고생하셨습니다.

그레이스 2022-07-03 08:18   좋아요 3 | URL
ㅋㅋㅋㅋ
소머릿고기....
무슨 말씀하시는지 알겠어요^^
잠시 집중력을 잃으면 흐름을 놓치고 다시 돌아가야 하는!
감사합니다.
그 번역 저희 집에도 있다는데...;;
ㅋㅋ

바람돌이 2022-07-03 14:5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너무 고통스러워서 뭔가를 쏟아부어야먄 할 거 같은 그런 느낌이 전해져오네요. 아 이 책 읽기 힘들거 같아요. 계속 작가의 고통에 같이 파묻혀야 할 거 같은 느낌이 그레이스님 리뷰에서 한껏 전해집니다.

그레이스 2022-07-03 14:59   좋아요 3 | URL
^^;;
힘들긴 했지만 읽길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 책이예요

서니데이 2022-07-03 16:5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그레이스님, 주말 잘 보내고 계신가요.
날씨가 어제보다 더 덥습니다.
폭염이 며칠 계속될 것 같아요.
더운 날씨 조심하시고, 시원하고 좋은 주말 보내세요.^^

그레이스 2022-07-03 17:15   좋아요 4 | URL
^^
그렇네요
너무 덮네요
건강조심하세요

mini74 2022-07-04 08:5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 리뷰 읽는데 눈 앞에 좌절이 쬐려보는 느낌입니다 ㅠㅠ 좌절 읽다 청소하고 딴 짓한 저 ㅠㅠ 태어나지~ 도 그런가요 ㅎㅎ 운명은 몰입해서 읽었는데 전 좌절부터 옆길로 ㅠㅠ

그레이스 2022-07-04 08:53   좋아요 2 | URL
ㅋㅋ
그렇게 눈싸움하시다가 읽어내시겠죠?!

젤소민아 2022-08-08 00: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이‘의 모티프를 구현한 다른 작품들이 일어섭니다~. 도리스 레싱의 ‘다섯째 아이‘, 오에 겐자부로의 ‘개인적 체험‘. 모두 태어난 ‘문제적‘ 아이들을 중심으로 작가의 세계관이 구현되고 있으나 이 소설은 ‘태어나지 않은‘ 아이. 거장들의 ‘다른‘ 시선들이 새삼 궁금해집니다. 모두 다시 읽어봐야겠어요~. 자극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레이스 2022-08-08 10:10   좋아요 0 | URL
저도 말씀해주신 다른 소설들에 자극받습니다.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