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루시 바턴의 주인공은 부모로부터 사랑과 돌봄을 받지 못한 상처를 안고 있다. 그녀가 의지한 것은 오히려 낯선 사람들의 친절이었다고 말한다. 클레어 키건의 두 작품 맡겨진 소녀이처럼 사소한 것들에서 나는 한 사람이 받아야 할 사랑의 결핍을 채워주는 타인의 친절과 돌봄을 읽었다. 또한 그 사람이 타인에게 되돌려주는 사랑을 보았다. 아주 작고 사소할 지라도, 그 발걸음 혹은 달리기는 충만함으로 가득 차 있다.


 

맡겨진 소녀의 주인공 는 엄마의 출산 때문에 방학 동안 친척 집에 맡겨진다. 에드나 아주머니와 킨셀라 아저씨의 농장이다. “먹을 건 엄청나게 축낼 겁니다.(18p)”라고 말하고 서둘러 일어서는 아빠의 모습에서 삶의 고단함과 아이들을 세심하게 양육할 여유 없음이 엿보인다. 어쩌면 가난 때문이 아니라 아빠는 그런 성품의 사람일 것이다. 아이들이 부모를 선택할 수 없고, 모든 부모가 자식에게 다 만족함을 주진 않는다. 아주머니와 아저씨 집에서 맛본 시원하고 깨끗한 우물물의 맛을 아빠가 떠난 맛, 아빠가 온 적도 없는 맛, 아빠가 가고 아무것도 남지 않은 맛(30p)”이라고 하는 아이의 마음은 양가적이다. 부모와 떨어진 슬픔, 무례한 아빠의 부재가 주는 안도감, 가난하고 형제가 많은 집에서는 받아보지 못한 세심한 돌봄이 가져다 준 편안함 등의 감정들이 전해온다. 아이는 이곳이 당분간 내 집이면 좋겠다고 생각한다.(30p)”

 

를 목욕시키는 에드나 아주머니의 손길은 엄마의 것 같다. 그러나 거기엔 또 다른 것,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어서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는 것(24p)”이 있다. 독자도 나중에야 알게 되는 슬픔이다. 아이는 냄새로 맛으로 촉감으로 알아챈다. 집에서의 삶과 아저씨 아주머니 집에서의 삶의 차이, 다른 사람들과 아저씨 아주머니의 차이를 몸으로 느낀다. 그러기에 입 다물기 딱 좋은 기회를 놓쳐서 많은 것을 잃는 사람이 많아(73p)”라고 하는 아저씨의 말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지만 안다.

 

농장의 일상과 밤바다의 풍경과 뜻 모를 우편함까지의 달리기는 아름다운 한 컷 한 컷의 영상이 되어 흘러간다. 헤어질 시간이 되고 의 달리기는 말 없는 인사가 되어 이별의 아쉬움, 다정함에 대한 고마움, 그들의 슬픔을 온몸으로 끌어안는 몸짓이 된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달리기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의 주인공 펄롱은 빈주먹으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미혼모다. 어머니의 가족들은 그녀의 곤경을 외면했으나, 그녀가 가정부로 일하던 집의 주인 미시즈 윌슨은 두 모자를 돌봐 주었다. 펄롱은 아이린을 만나 결혼하고 가정의 성실한 가장으로 살아가면서도 그의 마음속에는 항상 공허와 불안이 자리 잡고 있다. 딸들은 잘 자라고 있는 것인지, 자신의 가족은 괜찮을 것인지 불안해한다. 실업수당을 받으려는 사람들과 전기가 끊긴 추운 집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 빚 때문에 차를 파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혹독한 시기였다. “잠시 멈춰서 생각하고 돌아볼 시간이 있다면 삶이 어떨까(29p)” 하는 생각을 하지만 항상 쉼 없이 다음 단계로 해야 할 일로 넘어가는 고단한 삶을 살고 있다.

 

펄롱은 그가 일하는 석탄 창고에 갇혀 있던 여자아이를 발견하게 되고, 그녀가 근처 시설에 수용되어 있는 미혼모이며 어려움을 겪고 있음을 알게 된다. 시설 책임자인 수녀의 태도나 아일린의 충고에 비추어 이 지역에서 수녀회의 영향력이 크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 권력에 맞서면 일자리도 잃을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아일랜드에는 수녀회 4개 단체가 운영하는 통칭 막달레나 세탁소10곳이 있었다. 1845년 이래 수녀회가 운영하던 그 세탁소는 매춘여성과 미혼모, 불륜 등 당시 성윤리에 어긋난 짓을 저지른 여성들이, 법원과 경찰, 사회복지사, 병원, 의회, 성직자, 더러는 가족에 의해 강제로 수용돼 세탁 노동으로 육신의 죄를 씻고 기도로 마음을 정화하는 것을 목적으로 운영되었다.

 설립 취지나 명분과 달리, 실상은 사뭇 달랐다. 학교 수업을 빼먹은 여학생도, 기차에 무임승차한 여성도, 성당 신부나 가장의 판단에 행실이 단정치 못한, 그래서 남자를 유혹해 타락시킬 우려가 있다고 판단된 여성도 수용됐고, 심지어 강간 피해 여성도 대상이었다. 그들은 입소 직후 수녀회가 부여한 새 이름과 식별 번호로 불리며 감옥과 다름 없는 폐쇄된 공간에서, 머리를 깎고 수용복을 입고 침묵의 계율을 준수하며 대화도 삼가야 했다. 가족 방문도 수녀 입회하에 제한적으로만 허용됐고, 편지도 원칙적으로 금지였다. 그들은 아침 5시에 일어나 미사와 식사를 마친 뒤 주 6일 하루 10~12시간씩 세탁과 다림질, 세탁물 포장, 바느질, 자수 등의 강제노동에 임금 없이 동원됐다. 고객은 기업체와 종교시설, 정부부처와 군대, 병원, 학교, 교도소, 의회 등 다양했다. 만일 통제에 저항하거나 규율을 어기면 굶거나 독방에 감금당했고, 장시간 무릎 꿇기와 삭발 등 처벌 외에 언어폭력과 구타도 빈번했다. 그들은, 10대 소녀들도 아무런 교육을 받지 못했다. 드물게 벽을 넘거나 세탁물 수거차량에 숨어 탈출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경찰에 의해 다시 끌려왔고, 가혹한 처벌을 받은 뒤 수녀회가 운영하는 다른 지역 세탁소로 옮겨졌다.”

(한국일보 철조망 너머, 막달레나 세탁소의 진실2022.10.17 24

https://m.hankookilbo.com/News/Read/A2022101315310004852?did=NA)

 

펄롱은 심란하다. 다시 그 창고에 갇힌 세라를 발견하고 집으로 데려간다. 그녀를 데리고 집으로 가는 길에, 그는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문득 서로 돕지 않는다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나(119p)”하는 생각을 한다. “세상에 맞설 용기를 내보지 않고도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부르고 거울 앞에서 자기 모습을 마주할 수 있나?(119p)” 하고 질문한다. 그가 세상에 맞서는 방식은 친절이다.

 

펄롱은 자신과 어머니를 구해줬던 미시즈 윌슨의 친절과 격려, 사랑을 기억한다. 이 아이를 데려감으로 치르게 될 대가와 고생을 헤아려 본다. 펄롱이 구하고 있는 이가 어머니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은 그가 예상되는 일들에 대해 각오를 할 수 있게 해준다.

 

영화 , 다니엘 블레이크는 영국 현대 사회의 복지 제도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 자본주의가 장악하고 있는 시스템의 부조리를 고발하고 자신의 인간다움과 자존심을 위해 끝까지 싸우는 목수 다니엘의 이야기는 감동적이고 가슴 아프다.

 

나는 다니엘의 갖고 있는 자연스러운 연민과 친절함에 주목했다. 자신도 질병으로 인해 수당을 받아야 하는 어려움에 처해 있음에도 두 아이의 엄마인 케이티의 곤경을 보고 자연스럽게 도움을 주는 그의 태도에 감동했다. 타인이 당하는 부당함에 대한 분노나 자신이 갖고 있는 작은 것으로 돕는 데 있어 그에게는 어떤 장벽도 문턱도 존재하지 않는다. 주저함이 없고 자연스럽다. 사회복지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 사람들이 겪는 수많은 장벽들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국가는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들에게 차가운 얼굴로 수치심만을 안기지만, 가난한 다니엘은 누구보다 부유하고 따뜻한 얼굴로 도움을 준다.


시장경제 논리가 우리의 삶에서 미덕을 몰아내고 있고, 돌봄, 친절, 용서와 같은 것조차 돈으로 지불하는 시대가 되었다. 그럴수록 사람들은 사랑, 배려, 희생과 같은 것에 더욱 감동한다. 이유는 그 희소성이 높아지는 때문이기도 하고, 그 미덕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나도 누군가에게 에드나, 킨셀라, 미시즈 윌슨, 펄롱, 다니엘 블레이크 같은 사람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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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4-01-23 07:2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분량이 짧지만 거기에 많은 걸 넣었더라고요. 잃.시.찾과 대조적인 느낌도 받았어요.

그레이스 2024-01-23 07:35   좋아요 2 | URL

짧지만 압축된 내용이 많았고, 메시지도 그렇죠?!
잃시찾^^
갑자기 언제 정리하나 하는 현실자각 중입니다

새파랑 2024-01-23 11: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요즘 키건의 책이 핫하네요~!! 전 <맡겨진 소녀>가 그렇게 좋지는 않았는데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좀 다를까요?

밑에 영화 포스터를 보니 ‘막시무스‘님이 생각나네요~!!!

그레이스 2024-01-23 11:53   좋아요 1 | URL
^^
취향이 다 다르니까 뭐라 말씀드리기가 그렇긴한데,,, <맡겨진 소녀> 읽고 저는 눈물을 흘렸거든요.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생각하고 토론할 만한 논제들이 보였구요.

이 영화 강추입니다.
정말 좋았어요.
맞아요 막시무스님 프로필 사진이더라구요!^^

레삭매냐 2024-01-23 16: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니엘, 블레이크> 보고서
켄 로치가 켄 로치했구나 싶었습니다.

과연 따듯한 자본주의는 존재하지
않는 그런 시스템인지에 대해 묻게
되더군요.

그레이스 2024-01-23 16:57   좋아요 1 | URL
예~
따뜻한 자본주의는 시스템에 없지 않을까 싶네요. 개인의 의지나 양심, 공동체의 미덕에 맡겨져야 할듯요.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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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포크너의 소설 소리와 분노에서는 퀜틴이 죽기 전 자신의 그림자를 보는 장면들이 등장한다. 그가 보는 자신의 그림자는 일그러지며 그와 분리될 것만 같은 불안감을 전달한다. 그림자는 세계에 존재하고 있다는 증거다. 그리고 그가 그림자를 바라보는 심리는 그가 사는 세계에 발 디딜 곳을 찾지 못하는 존재로서의 불안과 갈등을 보여준다. ‘존재의 과거형보다 슬픈 말을 찾지 못한 그는 존재의 과거형이 된다.

 

소설 도시와 불확실한 벽에서, 현실 세계에서 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그림자를 벗어야 한다. 그곳의 사람들은 그림자가 없다. 그 그림자는 벗겨져 떼어진 채로 도시의 문밖 숲에서 살아가다 힘을 잃고 소멸된다. ‘그림자는 육체일까?, 포크너의 소설에서의 그림자처럼 현실세계에 존재함을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증거일까?’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 이야기의 진전과 함께 이 소설의 그림자는 더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현실세계의 17살 소년 16살 소녀를 만나고, 두 사람은 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에 관해 이야기를 나눈다. 두 사람의 대화를 통해 그 도시는 구축되어간다. 도시는 벽으로 둘러싸여 있고, 숲에는 일각수가 살고, 도시로 통하는 유일한 문에는 문지기가 산다. 현실세계의 그녀는 외롭다. 소년 는 그녀의 삶에 대해 듣고, 자신의 이야기를 했다. 두 사람은 특별한 비밀세계를 만들어내고 함께 나눈다. 그렇게 만들어진 세계가 높은 벽에 둘러싸인 신비로운 도시다. ‘는 이 현실세계에서 그 소녀를 상실한다.

 

40대가 된 는 그 소녀의 실체를 만나기 위해 도시의 문을 넘어 들어갔다. “그림자를 버리고, ‘꿈 읽는 이로서 눈에 상처를 내고, 두 번 다시 그 문을 넘지 않는다는 암묵의 계약을 맺고(68p).” 그림자를 벗어야만 들어갈 수 있는 도시, 그것은 육체로는 들어갈 수 없는 영혼의 세계인 듯 보인다. ‘가 도시를 걷고 탐색하면서 그 도시는 하나의 세계, 형태를 띈 실체로 다가온다.

 

그 도시에 있는 16이란 황동 플레이트가 박혀있는 도서관에서 오래된 꿈을 읽는다. 그곳에는 가 현실세계에서 만났던 그녀와 똑같이 생긴, 그를 알아보지 못하는, 소녀가 일하고 있다. 현실세계의 그녀는, 마지막으로 보내온 편지에서, 자신은 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에 살고 있는 실체가 벗어버린 그림자이고, 곧 죽게 될 것이라고 말했었다. 그럼 이 도서관에서 일하고 있는 소녀가 그녀의 실체일까? 도시의 문지기가 한 말에 비추면, 그림자는 육체이며 그 그림자를 벗어버린 존재, 도시에 살고 있는 존재는 영혼임을 짐작하게 된다.

 

의 그림자는 이 도시에 사는 존재가 그림자이고 바깥세상에 있는 것이 본체라고 말한다. 주인공이 읽어야 할 오래된 꿈은 도시 밖으로 쫓겨난 본체가 남겨 놓은 마음의 잔향이라고 한다. 미처 제거 하지 못한 슬픔, 망설임, 질투, 두려움, 고뇌, 절망, 의심, 미움, 곤혹, 오뇌, 회의, 자기연민…… 그리고 꿈, 사랑(178p)”등의 마음의 씨앗이라고 한다. 로이스 로우리의 기억 전달자 (The Giver)를 생각나게 하는 장면이다. ‘벽으로 둘러싸인 도시가 유지되게 하기 위해서는 누군가 이 오래된 꿈을 읽고 감당해야 할 누군가가 필요하다.

는 숲속 그림자 쉼터에서 죽어가는 자신의 그림자를 찾고, 그들을 막아서는 벽들을 통과해 도시를 빠져나가는 웅덩이 앞에 다다른다. 실체와 그림자, 영혼과 육체가 하나가 되는 것을 막는 살아 움직이는 벽은 무엇일까? 설령 하나를 통과하더라도 그 너머에 다른 벽이 기다리고 있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의식과 마음, 영혼과 육체가 일치를 이루지 못하게 하는, 삶에서 만나는 수많은 장애들이 아닐까? 살아있는 동안 그 둘은 함께 연관되어 영향을 주고받지만 그것이 큰 간격을 두고 벌어질 때, 그 벌어진 곳에는 심연이 남는다. 두 세계 사이에 놓인 웅덩이처럼.

 

의 그림자는 웅덩이에 뛰어들어 현실세계로 간다. 그리고 중년의 는 현실세계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림자에 끌려온 것이라 짐작하는 는 스스로를 현실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고 느끼며 살아간다. 직장을 그만두고 Z** 마을의 도서관 관장에 지원해서 간 이유는 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의 도서관에서 오래된 꿈을 읽던 기억 때문이다. 이 도서관의 반지하 공간에서 만난 사건들은 오컬트적인 분위기를 띄고 있다. 영혼과의 대화가 그렇다.

 

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와 현실세계는 서로 대척점에 있는 두 세계다. 도시는 움직임이 없고 말수 적고, 간소하고 정밀하고, 그리고 완결된 장소다. 사람들이 하는 말은 본래의 의미만을 지니고, 모든 것이 각자 고유의 장소에, 혹은 눈길이 닿는 그 주변에 흔들림이 없이 머물러(53p)” 있는 곳이다. ‘의 현실세계는 많은 말들이 오가고, 너무도 많은 의미가 만들어져 흘러넘치는(52p)” 곳이다. 누군가는 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에 어울리고, 다른 누군가는 현실세계에 더 잘 어울릴 것이다. 그러나 어느 세계가 벽으로 둘러싸인 곳일까? 독자로서 나는 ‘2에서 현실에서 사람들과 관계하고 새로운 사람들을 알아가고 있는 의 삶에 편안함을 느낀다.

 

전임관장 고야스씨의 영혼이 성경을 빌어 말했듯, 인간이 덧없는 존재고 살면서 영위하는 나날이 지나가는 그림자에 불과하다고 하더라도, 사람은 영혼과 몸이 분리된 듯 살아갈 수는 없다. 살아가는 동안, 서로 다른 세계에 속하는 듯 보이는 육체와 영혼이 혹은 육체와 마음이 일치하는 순간을 맛볼 수 있다. 도시의 가 현실세계의 와 하나가 되듯. 고야스씨가 말한 것처럼 본체와 그림자는 원래 표리일체이고, 상황에 따라 역할을 맞바꾸기도 한다. 인생의 어느 순간에는 깊이 침잠해서 육체를 잊은 듯 영혼의 숨만 쉬는 시기가 있을 수도, 육체가 활발한 활동을 해야만 하는 순간이 있을 수도 있다. 때로 그 영혼을 잊은 듯, 육체를 잊은 듯, 한 쪽에 치우쳐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에는 자신이 치우쳐 있는 세계에서 역경을 뛰어넘기 위해 다른 영역의 일에 몰두하는 시기를 만나기도 한다. 어쨌든 두 세계를 살아가는 존재는 모두 나 자신인 것이다.

 

공간의 왜곡과 축소, 시간의 역행, 그리고 토끼라는 상징적인 이미지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떠올리게 한다. 앨리스가 토끼를 따라 들어간 꿈의 세계는 재밌고 흥미진진한 곳만은 아니었다. 위험해보이고 집으로 안전하게 돌아가게 되기를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소원하게 되는 그런 곳이었다. 마찬가지로 소녀를 만나기 위해 들어갔던 그 도시 역시 추위 때문에 일각수들이 죽어가고, 동물들이 먹을 수 없는 사과만 많이 열리는 곳, 유채기름으로 죽은 사체를 태우는 곳, 시계에 바늘이 필요 없는 단조로운 삶이 이어지는, 많은 말을 건넬 필요 없는 그런 곳이다. <노란 잠수함>의 이상향 페퍼랜드가 누구에게나 행복하고 편안한 곳이 아니듯, 꿈과 낙원은 각자의 마음에 있다.

 

그 도시로 갈 수 있는 문을 발견한 소년은 이 현실세계에서 살아갈 수 없는 육체의 일을 잊은 자다. 어쩌면 그런 존재도 필요하지 않을까? 누군가를 대신해 영혼의 영역에 머무는 존재를 의미한다.

 

소년이 그 도시에서 만난 는 누구일까? 그림자에 이끌려 나온 줄 알았던 의 실체가 여전히 거기에 존재하고 있었다면, 현실세계의 에게 생긴 그림자는 무엇일까? 소설은 명쾌한 답을 주는 공식을 갖고 있지 않다. 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와 현실 세계, 본체와 분신, 실체와 그림자 등은 플라톤의 이데아, 이원론, 마음과 꿈, 평행 세계 등 무엇이 될 수도 있고, 또 무엇이라 규정하기엔 모호한 부분이 존재한다.

 

그 강줄기가 복잡한 미로가 되어 암흑의 땅속 깊은 곳을 흐르는 것(223p)”처럼 우리의 현실 또한 우리의 내부에서 몇 갈래 길로 나뉘어 나아간다. 현실과 선택지가 얽혀 우리가 인지하는 현실이 완성된다. 그러기에 인생의 깊숙한 강을 흐르는 불가지성을 해결할 수 없을지 모른다. 소설의 모호함도 그대로 둘 수밖에.

 

보이지 않고 알 수 없는 그 이면을 보려는 사람이 있고, “현실은 이것 하나뿐이고 다른 건 없다(223p)”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사람들은 태반 눈을 감은 채로 인생을 보낸다. 그러나 원래대로 돌아가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오른쪽 얼굴(101p)”을 보는 사람은 있다. 노인이 그런 것은 보는 게 아니었다고 후회하는 말로 비추어, 한 사람의 감춰진 이면의 세계는 드러난 왼쪽 얼굴처럼 그리 아름다운 것은 아니라는 의미로 읽혔다. 낙하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그 심연을 들여다본다.

 

그 심연을 보고 읽으려는 자는 작가가 아닐까? 인간의 마음 깊은 곳을 향한 문에 들어섰다가 다시 돌아오는 길을 찾지 못하는 작가의 마음과 의식 사이에 생긴 골을 짐작해본다. 실제 삶에서는 겪지 않을 감정을 향한 문이 열리고 그 문을 닫지 못해 심리적 고통을 겪었다는, 사형수를 연기했던 한 영화배우의 고백을 떠올린다. 그럼에도 그들은 다시 벽으로 둘러싸인 그 도시의 문을 연다. 작가는 글쓰기를 위해, 독자는 읽는 행위를 통해 인간의 영혼과 마음에 감춰진 심연을 탐험하기 위해 뛰어든다. 끝없는 낙하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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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4-01-02 02: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벽으로 둘러싸인 곳에 있는 사람은 그림자가 없을까 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습니다 그림자도 사람한테는 중요할 것 같기도 합니다 그림자를 두고 가야 하는 세계... 몸은 두고 영혼만 가는 걸지...

책을 보다 보면 여기가 아닌 어딘가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네요 그곳에서 자신은 다른 모습으로 살아갈지도 모를... 좀 더 잘 살면 좋을 텐데 싶기도 합니다

그레이스 님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늘 건강 잘 챙기시고 책 즐겁게 만나세요


희선

그레이스 2024-01-02 09:34   좋아요 1 | URL
빛을 향하면 내 그림자가 보이지 않고,
빛을 등지고 있으면 내 그림자가 보이죠.
또 다른 상징으로서 그림자를 생각해봅니다.

희선님
2023년에는 제가 많이 소원했네요.
새해 건강하시고 좋은 시와 글들 기대합니다.

페넬로페 2024-01-02 21: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완독하고 글 쓰려고 몇 번이나 시도했는데 실패했어요 ㅠㅠ
뭔 말을 하려는지 이해는 되는데
그 맥락이 연결되지 않더라고요
그레이스님!
1등 예약입니다
저에게 약간의 콩고물을~~ㅎㅎ

그레이스 2024-01-02 22:00   좋아요 1 | URL
저도 힘들게 썼습니다^^
아직도 이해 안되는 부분이...
포기할뻔 했는데... 감기때문에 스케쥴 취소하고 여유가 생긴바람에 겨우 썼습니다.

캐모마일 2024-01-02 22: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낙하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그 심연을 들여다본다.˝ 그래서 옐로 서브마린 소년은 떨어져도 확신을 가지란 희망을 주었군요.

그레이스 2024-01-02 22:15   좋아요 1 | URL
저는 그렇게 읽었습니다^^
다양한 의미로 해석이 가능해서 다양한 적용이 나올듯요^^

레삭매냐 2024-01-11 09: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예전에는 춘수 샘 책 나올 때마다
팬이 아니라고 하면서고 꾸역꾸역
사서 읽곤 했는데... 이번엔 패스하
게 되었네요.

뭐랄까 사그러져 가는 옛 영광의
잔영이라고나 할까요.

그레이스 2024-01-11 10:00   좋아요 1 | URL
ㅎㅎ
춘수 샘!
저도 그렇긴 해요
 
상황과 이야기 - 에세이와 회고록, 자전적 글쓰기에 관하여
비비언 고닉 지음, 이영아 옮김 / 마농지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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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기에 대한 열정을 지피는 책도 많지만 그때 뿐이다. 쓰기법을 가르치는 책도 많지만 어렵다. 고닉은 열정과 함께 방법을 전달한다. 포기하지 않게 길을 안내한다. 쓰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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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오 2023-09-12 21:3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역시 좋은가봐요!! >_< 저도 빨리 읽어보겠습니다!

그레이스 2023-09-12 21:32   좋아요 1 | URL

좋아요~^^

잠자냥 2023-09-12 21:35   좋아요 2 | URL
쟤도 빨리 읽는대요.

그레이스 2023-09-12 21:46   좋아요 0 | URL
^^

얄라알라 2023-10-18 02: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정말 알라딘 서재에서 너무도 뜨거운 이 책....그레이스님의 100자평 또한 좋고도 별이 다섯개이니, 읽어야한다는 압박감이 스멀스멀 다시!

그레이스 2023-10-18 09:36   좋아요 0 | URL
^^
요즘 서재를 못들어오고 있는데, (이렇게 댓글만 읽고 있어요) 이 책이 핫하다니 반갑네요.
좋아요.
 

이 책을 갖고 있었습니다. ㅋ
한글판도 있었는데,,, 찾아봐야겠네요
애들 읽으라고 사다놨었는데,,, 결국 제가 읽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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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3-09-04 16:1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영어 공부하라고 엄청 원서 사줬는데, 그 책들하고 cd 그냥 놔둘 걸 그랬어요.

그레이스 2023-09-04 16:23   좋아요 3 | URL
저도 많이 정리했습니다^^;;
그래도 혹시 찾아보니 있네요

미미 2023-09-04 17:2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그레이스님 이 책 재밌어요ㅋㅋㅋㅋ
어제는 이집트 신화 이야기 읽었는데요
오시리스와 세트. 세트가 관 뚜껑 닫어버리는ㅜ.ㅜ
두 분이 생각났네요.(제게 고대 신화=그레이스님과 페넬로페님,미니님)

그레이스 2023-09-04 17:26   좋아요 2 | URL
ㅎㅎ
미미님 올려주신 mp3도 다운받았습니다.ㅋㅋ

미미 2023-09-04 17:27   좋아요 0 | URL
👍👍

레삭매냐 2023-09-04 18:5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는 엄두도 내지 못할 영어
원서 읽기, 격렬하게 응원하는
바입니다.

그레이스 2023-09-04 19:58   좋아요 2 | URL
레삭매냐님 이 책 쉬워요
아이들을 위한거라.

독서괭 2023-09-04 19: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 그레이스님 책장은 보물창고? 찾으면 나오는군요!! ^^

그레이스 2023-09-04 19:58   좋아요 1 | URL
ㅎㅎ

책읽는나무 2023-09-04 20: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회원이 한 명 더 등록되었습니다.ㅋㅋㅋ

그레이스 2023-09-04 21:48   좋아요 1 | URL
~♡

yamoo 2023-09-06 09: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음...아동용 영어읽기 책인가 보네요..
예전에 옥스퍼드 북원 시리즈 엄청 사서 읽은 적 있는데...ㅎㅎ 의외로 재밌더라구요...창작 픽션들이...
레벨6까진가...읽고 더이상 못읽고 있어요..ㅎㅎ

이런 책 외국출판사별로 많이 갖고 있는데...위의 책은 첨 보는 거네요..^^;;

그레이스 2023-09-22 21:57   좋아요 0 | URL
이제야 댓글을 읽습니다. 답글이 늦어 죄송해요.

5권으로 이루어져있구요. 아이들 읽으루 있게 역사를 재밌게 써놨어요.
집에 번역본이 여전히 있네요 ㅋㅋ
처분한줄 알았는데...
 
개인적인 체험 을유세계문학전집 22
오에 겐자부로 지음, 서은혜 옮김 / 을유문화사 / 2009년 7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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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인간을 통해 오에 겐자부로의 작품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만엔 원년의 풋볼, 아름다운 에너벨리 싸늘하게 죽다를 이어서 읽었지만, 이 작품들의 메시지를 내 것으로 하기가 어려웠다. 일본의 역사, 지역 공동체나 가계 또는 개인의 서사라는 프레임 안에서 메시지를 찾기에는 뭔가 부족한 점이 있었다. 특별히 그의 작품 곳곳에서 자주 등장하는 성행위 장면은 어떻게 소화해야 할지 난감했다. 그것은 섹슈얼리티라기 보다는 오히려 비참하고 그로테스크한 욕구영상이라면 눈을 질끈 감게 되는로 다가온다. 개인적인 체험에서 그려지는 성행위 장면 역시 불편했다. 그러나 다른 작품에 비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는 조금 더 선명하다.

 

그는 소설의 방법에서 문학표현과 낯설게 하기라는 소제목으로 구조화에 대해 설명한다. 말과 단어, 문장과 분절화된 문단들은 중립상태로 있을 수 없다. 소설 안에서 문장은 문체화된 전략적인 문장이 되어 그 문장이 표현하는 사람의 상황을 다 끌어들인다. 그 문장이 그 사람이 갖는 정황, 태도를 표현한다. 그렇게 문장은 낯설게 되고 상황들과 관계를 맺고 여러 의미의 층위를 형성한다.

 

문학표현의 말은, 말과 단어의 수준에서 벌써 이 사회가 세계 나아가서는 우주적인 것으로 넓혀 가는 구조적인 양상에 대하여 그 쓰는 사람이 어떠한 태도로 실재하고 있는가를 보여 주는 힘을 갖고 있다.(소설의 방법오에 겐자부로 28p)”

 

작가는 굳이 구조주의를 언급하지 않겠다고 하지만, 그가 말한 구조화라는 것은 구조주의적 해석과 관련이 있다는 생각이다. 자연스럽고 친근하던 표현들이 그의 작품 안에서는 낯설게 느껴지는 이유다.

 

진열장 안의 아프리카 지도를 들여다보며 한숨을 내쉬고 있는 버드는 병원에서 출산 중인 아내를 두고 있다. 처음부터 낯설다. 도대체 태어날 아이를 기다리는 남자가 왜 이런 곳에서 아프리카 지도를 바라보고 있을까? “아프리카 대륙은 고개를 수그린 남자의 두개골 모양과 닮았다(8p)”고 한 문장은, 이 소설의 1/3 정도를 읽고 나면, 주인공 버드가 특수아실 유리 너머로 아들의 기형적인 머리를 보며 구토를 일으키는 장면, 진열장과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몸을 보고 수치심을 느끼는 장면을 지시하는 상징적인 이미지임을 알게 된다.

 

사실 결혼 후, 나는 그 감옥 안에 있는 것이지만 아직 감옥의 뚜껑이 열려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태어날 아이가 그 뚜껑을 꽝 하고 내리덮어 버릴 것이다. (14p)”

 

태어날 아이를 기다리는 그의 심정을 그리는 이 글에서 감옥 문이라고 하지 않고 감옥 뚜껑이라고 한다. 관 뚜껑과 죽음을 연상케 한다. 그에게 아이의 탄생이 어떤 의미와 중압감을 주고 있는지를 알려준다. 이런 불만과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 그에게 뇌헤르니아라는 질병으로 기형의 외형을 지닌 아기는 더 깊이 있던 부정적 감정들을 드러내게 한다.

 

원장의 겐부츠(現物)라고 하는 단어가 버드에게 가이부츠(怪物)’라는 단어를 연상시켰다. 그리고 그 괴물이라는 단어에 들러붙은 가시가 버드의 가슴에 온통 할퀸 자국을 냈다. 버드가 자기를 소개하고, 내가 아버집니다, 했을 때 의사들이 동요했던 것은 그들의 귀에 그것이 이런 식으로 울렸기 때문이 아닐까? ‘내가 괴물의 아버집니다.(37p)”

 

그는 아들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욕망을 느낀다. 곧 죽을 것이란 의사의 말을 듣고 안도감과 죄의식을 느낀다. 어차피 식물아기이고 곧 죽을 것이라는 자기합리화의 방어기제도 작동한다. 아기가 죽기를 바랐던 그는 자신의 에고이즘에 수치심을 느낀다. 그의 수치심은 타인의 시선으로부터도 온다. 아기가 쇠약사 하기를 기다리는 동안, 이런 복합적인 감정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그는 대학 친구 히미코를 찾는다. 그녀는 그의 섹스 엑스퍼트가 되어준다. 이 지점에서 나는 독자로서 주인공의 심리를 쫓아가는데 실패할 뻔 했다. 그런데, 지나가듯 말한 이 두 사람의 공감대를 인지하면서 겨우 그 끈을 놓치지 않을 수 있었다. 히미코는 남편의 자살 후 여러 남자들과 가벼운 관계만을 이어가고 있다. 어릴 적 아버지에게 사람은 죽으면 어디로 가냐는 질문을 했다가 뺨을 맞은, 그것이 아버지와의 마지막 기억인, 버드, 그의 자기 몸에 대한 혐오감과 수치심은 거기에 근원을 두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는 대학원에 적응하지 못하고 그만둔 후 2년 동안 만취 상태로 살았었다. 그는 술에 취함으로 도피하려 했던 절망적인 자포자기로 몰아가는 근원적인 불만이(17p)” 자신에게 있음을 깨닫고 술을 끊었다. 이 근원적인 불만이 무엇인지 여전히 알지 못한 채, 어쩌면 그것과 연결되어 있는, 더 심각한 상황을 맞이하고 있다.

 

그의 근원적인 불만과 함께 그의 수치심에서 몸에 대한 사회의 근대적 시선을 발견하게 된다. 장애에 대한 혐오는 자신의 몸을 근대적 시선 안에 가두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몸에 대한 혐오를 갖고 있는 그가 장애를 가진 아들을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 않음은 당연한 것이다. 작가는 이 몸에 대한 근대적 사유를 주인공을 통해 부각시키고 낯설게 함으로 고통을 들여다보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의 고통과 대비되는 아름다운 풍경을 그리는 문장들이 인상적이다. 그가 처한 비극과 대비되지 않았다면 그 문장들이 그렇게 비수처럼 아름답게 느껴졌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건물 안의 상냥한 밤의 자취에 취해 있던 버드의 동공에, 젖어 있는 길 표면과 더없이 무성한 가로수가 반사하는 아침빛이 서릿발처럼 선열하게 닥쳐온다. 그 빛을 거슬러 페달을 밟으며 달려 나가려던 버드는 마치 도약대 위에 서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42p)”

 

도약대라는 단어가 주는 이미지 때문에 희망조차 느끼게 하는 풍경으로 읽힐 수도 있다. 그러나 그가 의사를 만나 아들에 대한 설명을 듣고 큰 병원으로 옮기기 위한 준비를 하기 위해 집으로 향하는 길이라는 것을 알기에, 이 글은 비극적 상황에 낀 낯선 문장이 되어버린다.

 

병원 2층의 창이란 창 모두, 거기다 발코니까지를 가득 채우고, 자리에서 일어나 막 세수를 마친 듯 하얀 맨얼굴을 아침 햇살에 드러낸 임산부들이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특히 발코니에 나와 있는 임산부들은 복숭아뼈까지 닿는 기다란 잠옷을 미풍에 나부끼고 있어 하늘을 날고 있는 천사들의 무리 같았다. 버드는 그녀들의 표정에서 불안과 기대, 그리고 기쁨까지를 발견하고 눈을 내리깔았다.(45p)”

 

아기와 함께 앰뷸런스에 올라타서 창밖을 내다본 순간에 버드의 눈에 들어온 이 광경은, 이런 상황이 아니라 아들을 맞이해서 기쁜 한 남자가 보는 것이라면, 축복하며 배웅하는 거룩하기까지 한 장면이다. 그러나 그녀들의 불안과 기대, 기쁨이 무엇인지 알고 있기에, 독자(讀者)인 나는 그의 격렬한 몸서리침에 공감한다.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라는 의사의 말과 달리 상태가 호전되고 있는 아기 때문에 버드는 당황하고, 수치심과 죄의식으로 괴로워한다. 그는 수술을 거부하고 아기를 쇠약사할 때까지 한 개인 병원에 맡기기로 한다. 그러나 약속된 병원에 가는 길에, 우묵배미를 맴돌며 같은 자리로 돌아오는, 그는 내면의 극심한 갈등이 있음을 보여준다. 차에 함께 타고 있는 히미코와 그는 긴장감 때문에 침묵만을 지키고 있다. 이 갈등의 고조 상태에서 작품이 끝났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작가의 말을 읽다보니, 한 아버지로서 쓸 수밖에 없었던 결말이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작가에게 이 글은 과정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고통을 받아들이는 과정. 그의 말처럼 그때는 젊은 시절이었고, 자신의 고통을 글로 쓰는 것에도 넘어설 수 없는 한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작가이지만 그 한계를 넘을 수 없었던, 한 아버지의 아픔이 보였다.

 

첫아이가 머리에 기형을 지닌 채 탄생하면서 그는 일찍이 없던 동요를 경험하게 되었다.(아사히 신문1994)“고 한다. 그는 거기서 회복되어 가기 위해 이 개인적인 체험을 썼다고 한다. 그의 다른 작품들에도 아들 히카리와 관련된 소재들이 등장한다. 만엔 원년의 풋볼에서는 아기가 죽은 것으로 그려지고 있다. 그에게 있어 이 고통은 작품에서 함께 갈 수밖에 없는 것으로 보인다. 남은 인생을 아들과 동행했듯이. 음반을 낸 아들 오에 히카리의 음악 안에서 슬픔의 덩어리를 보는 아버지 오에 겐자부로, 그의 말에서 그 이야기를 되풀이해 쓰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다시 오에 히카리라고 표현된 슬픔의 덩어리는 이전부터 그의 내부에 있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러나 처음 CD가 만들어지고 그것을 스스로 되풀이해 듣는 것을 포함한 교육으로, 그는 이 덩어리를 비로소 대상화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처럼 슬픈 마음을 되풀이하여 표현하고 그렇게 하여 인생은 깊어진다. 그 슬픔, 혹은 괴로움과의 만남은 비참한 것만은 아니지 않은가 하는 소리를 역시 나는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표현에는 그 자체를 만드는 손을 치유하고 회복시키는 힘이 있다고 나는 경험으로써 알고 있다. (소설의 방법오에 겐자부로, 23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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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3-09-04 13:4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와, 진짜 개인적인 체험이네요?? 오에 겐자부로 말만 많이 듣고 한권도 안 읽었는데 갑자기 관심이 생깁니다. ‘여기서 끝냈으면 좋았을‘ 그 뒤에 어떻게 진행되는지도 궁금해요. 읽기 쉽지 않을 것 같긴 합니다만..

그레이스 2023-09-04 13:53   좋아요 4 | URL
가독성은 좋습니다. 다른 작품에 비해서도 잘 읽혀지구요, 무엇보다 난데없이 아름다운 표현들에 감탄하게 되죠. 어떻게 여기서 이런 문장이! 하면서. 오에 겐자부로의 책을 처음 읽으신다면 이 책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미미 2023-09-04 13:5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오...저도 이 책을 읽어보고 싶네요! 그레이스님 만큼 읽어낼 자신은 없지만 몹시 궁금해지는 리뷰입니다.
말, 단어에 대해 그레이스님이 설명하신 부분과 오에 겐자부로의 글 둘다 인상적이에요.

그레이스 2023-09-04 14:04   좋아요 4 | URL
오에의 경험적 내용이어서 그런지 단어 하나하나에 힘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자신이 느끼는 부정적인 요소들을 두드러지게 해서, 말과 심상이 낯설게 하는, 그렇게 독자로 하여금 생각하게 하는 작가의 탁월함이 보이는 작품이라 생각됩니다.
미미님은 저보다 더 잘 읽어내시겠죠!

서곡 2023-09-04 16:4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개인적체험 저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저는 을유 번역 전에 나온 고려미디어오에겐자부로전집 걸로 읽었죠 말씀대로 오에의 딴 작품에 비해 술술 잘 읽히고요 영화로 만들면 좋겠다는 상상을 해본 기억도 나네요

그레이스 2023-09-04 16:54   좋아요 2 | URL
저도 고려원에서 나온 책 갖고 있다가 을유책 새로 샀습니다. 오에 겐자부로 옛날 책들 읽지도 않고 있다가 새로 나온 책들로 바꿨어요.
<일상생활의 모험>은 절판인데, 다시 나오려나 싶네요
조금 충격이어서

서곡 2023-09-04 16: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고려미디어가 아니라 고려원이네요 ㅎㅎ 특유의 집요함이 읽다 보면 질리기도 하다가 때때로 생각나는 성실한 작가입니다 9월 잘 보내시기 바랍니다!

그레이스 2023-09-04 16:57   좋아요 1 | URL
예~
서곡님도 행복한 9월 한달 되세요
감사합니다

새파랑 2023-09-05 09: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오에 겐자부로 안읽어봤는데 이 책을 읽어봐야겠네요 ㅋ
요새는 어려운책 못읽겠더라구요 ㅜㅜ

그레이스 2023-09-05 09:43   좋아요 1 | URL
새파랑님 요즘 바쁘신가봐요.
하루키하고도 비슷한 부분이 있어서 좋아하실거란 생각이 드네요.

새파랑 2023-09-05 09:41   좋아요 1 | URL
8월에 바빴는데 9월부터는 안바빠서 책읽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

yamoo 2023-09-06 09: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겐자부로 소설 두 권 읽다가 말았어요. 전 되게 재미가 없더라구요. 매우 지루해서 한 내년이나 다시금 읽어보려구요. 그땐 다르겠죠..ㅎㅎ 겐자부로 책은 하도 평이 좋아서 일단 모셔둬요..ㅎㅎ

그레이스 2023-09-06 12:27   좋아요 0 | URL
ㅎㅎ
그럴 수 있죠.
저도 처음엔 힘들더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