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에 겐자부로의 별세 소식을 이제야 보고, 펼쳐든 이 책의 첫페이지에 ˝책을 쓴 작가는 죽습니다˝ ˝저도 그런 시기가 코앞으로 다가온 노작가 입니다˝라는 문장이 들어온다.

읽어야할 책이 쌓여있지만 오늘은 이 책이 읽고 싶다.








저의 책 《책이여, 안녕!>의 제목은 러시아의 소설가 나보코프가 발표한 대표작 《선물》에서 인용한 구절입니다. 책 속 주인공은 영원히 살지만(작중에서는 죽는다고 해도), 책을 쓴 작가는 죽습니다. 죽기 전 자기가 쓴 책에게 이별을 고하게 되지요.
저도 그런 시기가 코앞으로 다가온 노작가입니다. 게다가 저처럼독서가 인생의 절반을 차지하는 인간은 제가 읽어온 책에게도 마음을 다해 "안녕"이라고 말하고 싶은 기분이 듭니다. 그래서 여러분께 이야기하는 형식으로, ‘제 인생의 책‘이라 할 만한 이런저런 책들과 이별하는, 그러면서 가능하면 여러분께 그 책을 건네드리는 그런 의식을 치러보고자 합니다.  - P9

우리는 예술을 통해 시공을 초월하고 상실을 상대화하여 살아남고자 합니다(제 경우는 문학 혹은 소설을 통해서라고 구체적으로 말할 수 있겠죠).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이미 지나간 것을 회복하기 어렵다는 그 괴롭고 무거운 의미에 대해서도 늘 인식하고 있습니다. 특히 노년에 이르러 소설을 구상하고, 젊은 동료로부터 악의가 뻔히들여다보이는 조롱을 받으면서, 그래도 초고를 써나가는 제 옆에는이미 상실하기 시작한 것들과, 과거가 되어가는 것들의 참으로 강렬한 찰나적 실재감이 있어요. 그리고 그것은 세상을 떠난 동시대예술가, 사상가, 아울러 더 가까운 친구들, 그리고 거의 끝나가는 저의 시대를, ‘과거의 파토스‘로서 진중하고 깊이 있게 와 닿도록 하는것이기도 합니다. - P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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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3-03-28 01:4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오에 겐자부로는 어머니가 준 마크 트웨인 책 《허클베리핀》을 읽고 또 읽었다는 말이 여기에 있어요 아홉살에 그 책을 보고 자신이 어떻게 살지 생각하다니, 정말 그때 마음대로 살지 않았나 싶기도 합니다 잘 아는 건 아니지만 그런 생각이 듭니다 오에 겐자부로 책은 이 책 한권만 본 것 같네요


희선

그레이스 2023-03-28 06:39   좋아요 1 | URL
우연히도 마크 트웨인 재독 중이었습니다.^^

서곡 2023-03-28 09: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뇌의 이상을 갖고 태어난 큰아이...염려와 격려하는 마음을 안고 눈 감으셨겠지요. 명복을 빕니다.

그레이스 2023-03-28 09:51   좋아요 1 | URL
ㅠㅠ
작가가 남겨놓은 책을 읽는 것으로 추모를 대신합니다.

베터라이프 2023-04-06 18:1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일본 제국주의가 저지른 참혹한 역사에 대해서 아주 명확한 입장을 갖고 있었던 분이 오에 겐자부로였습니다. 그래서 속으로 정상인이 별로 없는 일본 지성사회에서 저런 분이 다 있구나 싶었죠. 그나저나 그레이스님의 이 글을 보니 문득 구해 읽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는데 들어가보니 절판된 모양이네요 ㅜㅜ

그레이스 2023-04-06 18:34   좋아요 2 | URL

그렇더라구요.
가끔 중고 책방에 올라오긴 하던데요.
 
마크 트웨인의 유쾌하게 사는 법
마크 트웨인 지음, 린 살라모 외 엮음, 유슬기 옮김 / 막내집게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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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비틀어 보기의 장인, 해학과 풍자의 대가다. 유머작가로서 자부심도 느껴진다. 이 책을 읽고 나면, 그의 미시시피 모험 소설들이 더욱 예사로 읽혀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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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라디오 2023-04-06 13: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읽고싶은 책이네요. 품절ㅠ

그레이스 2023-04-06 13:54   좋아요 1 | URL
ㅎㅎ
품절이더라구요 ㅠ
 
짝 없는 여자와 도시 비비언 고닉 선집 2
비비언 고닉 지음, 박경선 옮김 / 글항아리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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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마주쳤다. 한 아파트에 살고 있으면서도 2년 동안 안부를 몰랐다는 당황스러움을 감추려 나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톤이 높아진다. “어떻게 지냈어요?” 얼굴에 피곤한 기색이 가득한 그녀는 그냥 그렇죠.”라고 어색하게 웃으며 말한다. 우리는 아파트 주차장에 조금 더 머물며 좀 더 자세한 안부를 물었다. 당시 힘들었던 문제가 어느 정도는 해결된 듯하나, 누군가를 원망하던 마음이 냉랭하게 얼어붙어 있다. 이내 그녀의 표정과 목소리는 마지막 만남을 떠올리게 했다. 맞다. 그 기억 때문에 문득 생각이 나도, 먼저 연락해보지 못했던 것 같다. 그녀는 당시 자신의 문제를 말하면서 화를 내고 있었고, 그 분노가 나를 향하는 것이 아님에도 나의 마음은 움츠러들고 뒷걸음질 쳤다. 콘크리트 벽처럼 냉랭해진 마음 앞에 절망감을 느끼면서, 조만간 만나 차라도 한 잔 하자며 헤어졌다. “심리적으로 조금이라도 불편한 건 절대 참아줄 수 없다는 이유로 그토록 많은 사람이 우연적 타자 취급을 받은 적도 역사상 없었다(25p)”는 작가의 말을 기억하면서.

 

사나운 애착에서 작가 비비언 고닉의 어머니는 타인의 문제에 개입하고 도움을 주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작가가 살던 브롱크스는 게토였다. 그들 스스로가 만든, 보이지 않는 높은 담장 안의 공동체다. 그 안에서 사람들은 이웃 부부의 성생활까지 알 정도로 울타리가 없는 삶을 살았다. 이웃의 가정사에조차 조정자로서 군림하는 어머니에게 작가는 경외심과 부끄러움, 분노 등이 뒤섞인 감정을 갖고 있었다. 어린 시절의 작가에게서 타인들과 분리되지 않은 생활로 인한 애증과 환멸을 읽는다.

 

이제 그녀는 뉴욕 시내에서 살고 있다. 그곳에서 그녀는 낯선 이의 눈에 되비치는 자아를 찾아(13p)” 거리를 걷는다. 걷다가 브롱크스 시절의 사람들과 우연히 만난다. 그 만남은 그녀에게 과거의 기억들을 가져다준다. 자신의 존재를 관통하는 엄마의 애착은 여전히 그녀에게 어려운 주제다. 서로를 참을 수 없어 싸우고 생채기를 내며 엄마와 걸었던 길들을 홀로, 때로는 둘이서 걷는다. 친구와, 때로는 엄마와.

 

그녀는 기억 속에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엄마에게 청해 듣는다. “엄마 그 얘기 좀 해봐.”하고. 노인들의 반복되는 이야기를 듣는 것이 즐거운 일은 아니다. 작가는 글의 소재를 생각하며 듣고 있을 것이다. “가끔 이렇게 한발 떨어져서 보는 순간에 우리 인생도 하나의 이야기가 되는 건 아닐까?(사나운 애착93p)” 그렇게 자신을 바라보면, “영락없는 엄마의 딸이다. 사람들의 잘못을 똑 부러지게 지적해야 하고, 사랑의 성배를 찾았던, “엄마가 원판이면 그녀는 현상본(70p)”이었다.

 

어릴 적 기억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스스로 제조해낸 울분을 붙들고 있었던 어리석음을 깨우친 순간, 그녀는 이 나이를 먹고도 이렇게 아는 게 없어.(122p)”라고 엄마의 말을 조용히 중얼거린다. 그렇게 그녀는 길을 걸으며 기억하고, 엄마인 자신과 화해하고, 엄마와 화해하는 길을 걷고 있다. 어린 시절의 상처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미완의 과제임을 받아들이면서.

 

그녀가 갈수록 사회 변두리로 향하는 자신을 발견할 때, 응어리진 쓰린 가슴을 달래기 위해 도시를 가로지르는 산책(20p)”은 습관이 되고, 자신과 타인을 읽는 응시가 되고, 글이 되었다. 그녀는 매일 집을 나설 때마다 더 조용하고 깨끗하고 널찍한 동쪽을 걷겠다고 다짐하지만, 어느새 번잡스럽고 지저분하고 어수선한 서쪽에 와있는(120)” 자신을 발견한다. 그곳에는 삶이라는 것에 주체가 있다는 느낌(120p)”이 든다. 군중의 물결 속에서 사람들의 표정과 행동을 보며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그 거리에는 폭언과 무례함, 폭력의 위험도 존재한다. 동네 약국 대기석은 낯선 남자를 큰소리로 웃게 하는 넉살 좋은 수다를 떠는 장소다. 한 겨울 꽁꽁 언 빙판 길은, 손을 내미는 작은 친절을 통해, “난감한 상황에선 누구나 타인에게 도움을 요청할 권리가 있고, 그 광경을 보았다면 누구라도 손을 내밀 의무가 있다는 평범한 인식(41p)”을 상기시키는 곳이다. 그렇게 거리에서 삶의 통찰이 이루어진다. 산책에서 돌아온 그녀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리고, 그들의 몸짓이 보이도록 생기를 불어 넣는다. 그들은 그녀의 동행, 근사한 동행이 된다. 그녀에겐 사랑과 우정으로 이어진 한 시절의 동행들, 친구와 애인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아는 사람들보다 함께 하느니 차라리 익명의 사람들과 함께 하는 밤을 선택한다. 홀로 외로움을 즐기며 글을 쓰는 편을 선택하겠다는 의미이다. 그녀에겐 그녀를 아주 잘 아는 친구 레너드 한 사람과의 통화면 족하다.

 

이제 더 이상 블롱크스와 같은 장소는 그녀의 도시에도 나의 도시에도 없다. 도시는 변했고 과거의 장소는 사라졌다. 그곳으로 이어진 다리는 현재의 산책길처럼 걸어서 건널 수 없다. 개인의 삶에 밀고 들어오는 타인의 침범은 우리를 화들짝 놀라게 한다. “외로움은 우리에게 고통을 안겨 주지만 불가해하게도 우리는 그 외로움을 포기하길 망설인다.(105p)” 아마도 자신의 몸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순간에 이르면 블롱크스와 같은 장소에 머물게 될지 모르겠다. 앨리스의 요양원처럼. 거기서 다른 종류의 외로움을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암담하고 쓸쓸한 이야기인 듯하나, 많은 지인들이 앨리스를 찾아가서 말벗이 되어준 것을 그녀가 죽은 후에야 알게 된 것처럼, 생각보다 세상엔 사랑이 넘치고(89p)”, “다들 마음을 쓴다(90p)”.

 

거리를 두고 서로를 바라보며 마음을 쓰는 것, 도시에서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방법이라는 생각이다. 어려운 일이다. 어쩌면 자신을 그렇게 바라보는 것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작가는 이 일을 길 위에서 했다. 익명의 군중들과 동행하고 있는 그녀의 걷기를 상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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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곡 2023-03-18 07: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제가 아는 이 도시를 자주 산책해야겠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주말잘보내십시오 ~

그레이스 2023-03-18 09:03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
서곡님 잘 아시는 도시가 궁금하네요^^
주말 잘 보내세요~~

서곡 2023-03-18 09: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모르는 도시도 기회 닿는 대로 그리고 기회를 만들어 가 봐야겠습니다 ㅎㅎ 네 감사합니다!

책읽는나무 2023-03-18 16:5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와...역시 그레이스님!👍
다들 리뷰가 한 편의 에세이로 읽힙니다^^

그레이스 2023-03-18 23:11   좋아요 2 | URL
저도 이 리뷰 쓰고 다른 분들거 하나씩 읽고 있는데 다들 너무 잘 쓰셔서.. 전 명함도 못내밀겠어요ㅠ

책읽는나무 2023-03-18 17:11   좋아요 2 | URL
아니에요!
그레이스님의 글도 넘 좋습니다.
잘 쓰셨습니다^^
다들 잘 쓰시긴 했는데, 다들 막상막하라...누가 뽑힐지? 저도 기대가 큽니다.

제가 꼭 무슨 심사위원이 된 마냥~ 읽고 있네요?ㅋㅋㅋ
 


허먼의 온 가족은 전번제(全燔祭)의 제물로 멸족을 당했다.(사랑의 이야기16p)” 그가 누구인지 강렬하게 알려주는 문장이다. 모든 것을 태우는 전번제로 그가 당한 인류의 비극적 역사를 환유한다. 번제(burt offering), 제물(祭物)을 모두 태우는 것, '()'은 그들이 당한 비극의 참혹함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

 

싱어의 소설 주인공 아론(쇼샤) 허먼(사랑의 이야기) 주위에는 항상 여인들이 존재한다. 적어도 3. 그 사이에서 주인공은 갈등하고 안주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인다. 유대인의 관습에 의해 맺어진 여성, 욕망의 대상인 여성, 자신을 위해 목숨을 건 여성, 이념 때문에 그를 떠난 여성 등. 그녀들 사이에 있는 주인공의 갈등을 현대적인 시각으로 바라본다면(꼭 페미니스트적 시각으로 볼 필요도 없이) 비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다른 의미들로 볼 필요가 있다. 그녀들은 그와 신앙, 관습, 이념, 자본, 도의 등으로 묶여 있고, 그것들을 상징한다. 그가 떠나지 못하던 유럽 유대인 공동체, 그에게 구원이 되지 못하는 이념이나 자본, 저버리고 떠나면 배덕을 저지르는 게 되는 지켜야 할 도의, 육체의 욕망을 상징하고 있다. 무너져 가는 공동체, 고립, 전쟁, 수용소, 그리고 이주의 서사를 가진 주인공의 불안과 공포와 정체 상실을 읽는다.

 

쇼샤에서 당시 전쟁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진 유럽의 상황과 부패하고 고립되어가고 있는 폴란드의 유대인 공동체를 보여주고 있다. 아론은 항상 금지된 것을 배우고 지키며 살아야 했던 정통 유대인 가정에서 자란 희곡 작가다. 이디시어로 작품을 쓰는 그는 신문에 글을 기고함으로 그의 공동체에 어느 정도 알려져 있다. 그의 재능을 알아본 유대인 철학자 모리스 파이텔존의 위선적인 모습에서 정통이라고 주장하는 유대인들조차 모순을 안고 살아가고 있음을 눈치 채게 된다.

 

그에게 미국 배우 베티, 어릴 적 좋아했던 쇼샤가 등장한다. 결혼을 종교적 광신주의의 흔적”이라고 말하는 도라와 육체적 관계만을 맺고 있었다. 베티와 샘 드라이만의 호의에 의해 미국에서 올릴 희곡을 쓰지만, 그의 작품은 흥행과 자본이 목적인 제작사를 설득하지 못한다. 히틀러의 점령이 가까워지는 상황에서 미국으로 가는 것을 포기하고 쇼샤와 결혼함으로 폴란드에 남는다. 쇼샤의 순수함을 사랑했다기 보다 그가 남아있어야 할 이유를 그녀에게서 만들었다는 생각이다. 그가 미국으로 가지 않은 이유는 그곳에서 작가로서의 미래가 보이지 않는 게 첫 번째 이유였을 것이다. 또한 당시 많은 유대인들처럼 그 전쟁의 성격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1918년에 끝난 전쟁에서도 살아남았으니까. 자신의 뿌리를 떠나는 것은 누구에게나 어려운 일이다.

 

그 순수성을 지키려는 열렬함과 부패가 이율배반적으로 공존하는 민족, 그들을 고립시키는 전쟁의 공포에 휩싸인 유럽, 자신을 오라고 손짓하는 미국, 그 사이에서 갈등하던 아론은 약하고 여린 쇼샤와 결혼하는 것으로 공동체를 선택한다. 그는 과연 선택한 것일까? 당시 유럽의 많은 유대인들의 혼란과 어떤 선택도 할 수 없었던 막막함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고 생각한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여전히 그 혼란과 막막함은 지속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사랑의 이야기의 주인공 허먼은 폴란드 농가의 헛간에 숨어서 살아남았다. 그를 목숨 걸고 숨겨준 야드비가는 그의 부모의 집에서 일하던 하녀였다. 전쟁이 끝나고 뉴욕에서 함께 살고 있다. 그녀는 여전히 그에게 헌신적이다. 미국에 와서 알게 된 마샤와는 육체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마샤와 그녀의 어머니 시프라 푸아 역시 유대인으로 수용소에서 살아남았다. 러시아에서 죽었다고 생각한 그의 전처 타마라도 그를 찾아온다. 허먼 역시 이 세 여인들 사이에서 어떤 선택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된다. 그는 모두에게 배덕자이며 계명을 어긴 배교자다.

 

그가 하고 있는 일은 랍비에게서 돈을 받고 글을 대필하는 것이다. 그가 속한 유대인 사회는 유럽의 그것을 그대로 옮겨온 듯하다. 여전히 하시디즘을 고수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자본에 잠식당하고 은밀히 부정에 가담하고 이익을 취하는 사람들이 있다.

 

야드비가, 마샤, 타마라 세 여인에 둘러싸인 허먼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그 사이에서 질식해 가고 있는 그는 유대인 공동체에도 미국이라는 새로운 사회에도 속할 수 없는 길을 잃은 존재다. 살아있으나 살아 있는 게 아니다. 쇼샤의 아론이 쇼샤를 선택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붙들려고 했던 것과 달리 전쟁 후 사랑의 이야기의 허먼은 사라져버린다. 어느 다락방에서 여전히 자신을 찾고 있는 적에 대한 공포로 인해 악몽을 꾸고 있을 것이다.

 

두 개의 소설에서 싱어는 유대인 사회의 전쟁 전과 후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전후(戰後), 살아남은 자들의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함, ? 라는 질문에 아무 답도 얻을 수 없는 공허를 본다.

고통에 대한 답은 어디에도 없죠. 특히 고통을 당하는 자들에게는요.(쇼샤396p)

인생에는 무엇을 할 수 없는 때가 있다.


피에 젖은 땅을 읽고 있다.


<『쇼샤사랑의 이야기는 이전 출판된 오래된 책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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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3-03-03 05:5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싱어의 신작 <노예>는 안 읽으셨기 바랍니다. 저는 곧 개봉할 독후감에 작가 싱어한테 대고 푸짐하게 욕설을 퍼부어놨습니다.

그레이스 2023-03-03 08:21   좋아요 1 | URL
ㅎㅎ
집에 없어서 읽지 않았습니다. ^^
비판하는 리뷰 보면 이유가 궁금해지는데, 골드문트님 리뷰는 골라서 읽지 않는데 도움이 되요^^
기다리겠습니다.^^

레삭매냐 2023-03-03 09:0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문득 오래 전에 만난 아트 슈피겔만
의 <마우스> 생각이 나네요.

혹독한 수용소에서 살아 남았지만,
결국 더 살 수가 없어서 극단적 선
택을 했던.

<쇼샤>는 구판으로 구해 두었는데
어디에 가 있는지 모르겠네요 그래.

그레이스 2023-03-03 09:04   좋아요 2 | URL
저는 슈피겔만의 쥐 어디다 뒀는지 찾고 있는데,,, ㅎㅎ
쇼샤 새로 출간된 책 부분부분 비교해봤는데, 더 좋은 것 같아요.^^

서곡 2023-03-03 13: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적 그리고 사랑 이야기를 영화로(만) 봤는데 꽤 재미있었습니다~ 여성들의 연기가 대단했던 기억이...헤르만이 왜소하고 불쌍해보일 지경으로요 3월 초 잘 보내시기 바랍니다!

그레이스 2023-03-03 13:55   좋아요 1 | URL
아!
영화 봐야겠네요.
소설에서도 허먼(헤르만)이 불쌍해 보이긴 했어요.;;

페넬로페 2023-03-03 23: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유대인 공동체에 대한 내용이네요.
피해자로서가 아니라 그들 내부의 이야기인 것 같네요^^

그레이스 2023-03-03 23:49   좋아요 1 | URL

정통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 자본과 영합한 자들 모두 혼란을 겪고 있던 모습들을 보여줍니다.
전후에도 역시 비슷한 현상들을 보여주고 있죠.^^

페크pek0501 2023-03-10 14: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피에 젖은 땅을 읽고 있으시다니 제가 사 놓은 책, 바오 닌의 <전쟁의 슬픔>이 생각납니다. 아직 못 읽음.ㅋㅋ
왜 책은 그때그때 읽지 못하고 한참 후에나 읽게 되는지 모르겠어요... 한꺼번에 많이 구매해서 그런가 봐요.
욕심을 줄여야 할 것 같아요.ㅋㅋ

그레이스 2023-03-10 14:38   좋아요 1 | URL
저도 그래요
피에 젖은 땅도 사놓은지 1년이 넘었는데 이제야 펼쳤습니다.
지금은 중단 사태 ㅠㅠ

페크pek0501 2023-03-10 14:51   좋아요 1 | URL
나 웃겨 죽는 줄 알았어요...ㅋㅋ 1년이 넘어 펼치셨다니...
아마 저도 1년이 넘어야 펼칠 모양입니다.ㅋㅋ

그레이스 2023-03-10 14:52   좋아요 1 | URL
ㅎㅎ
그냥 일상입니다.^^

2023-03-19 00: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3-19 06: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80일간의 세계일주 쥘 베른 베스트 컬렉션
쥘 베른 지음, 김석희 옮김 / 열림원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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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말, 세계의 모습을 보여주는 소설이다. 철도가 건설되고 운하가 완공되는 등 세계열강은 경쟁적으로 길을 만드느라 분주한 모습이었다. 누구를 위한, 무엇을 얻기 위한, 길이었는가는 제국주의 국가들 또는 침략자들이 만들었다는 사실이 시사한다. 1869년에 미국의 대륙횡단철도가 완공되고, 같은 해 수에즈운하가 개통되고, 1870년에 인도내륙관통철도가 개통된 시기가 배경이다. <모닝 크로니클>지에는 세계일주 하는데 80일이면 된다는 기사가 실린다.

 

혁신클럽에서 포그는 80일간 세계일주 할 수 있는가에 관한 논쟁하고, 2만 파운드가 걸린 내기를 한다. 포그와 그의 집사 파스파르투는 1872102일 수요일 오후 845분에 기차를 타고 런던을 출발한다. 브린디시를 경유하여 수에즈와 아라비아 해를 지나고 봄베이에 도착, 거기서 인도를 가로질러 이동한다. 캘커타에서 홍콩, 홍콩에서 상하이를 거쳐 요코하마, 요코하마에서 샌프란시스코로, 샌프란시스코에서 뉴욕으로, 뉴욕에서 다시 런던으로 돌아오는 여행을 한다.

 

필리어스 포그는 영국 신사의 전형적인 모습을 조금 지나쳐 독특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 그는 런던의 신사라면 들어야 할 왕립연구원, 러셀협회, 학술협회 등 여러 단체 어느 곳에도 가입되어 있지 않았다. 오로지 혁신 클럽 회원이다. 수학적 정확성, 경제적인 걸음과 동작, 냉정하고 이성적인 태도, 사회적 관계로부터 자유로움 등으로 그를 특징 짓는다.

필리어스 포그는 11시 반에 새빌로의 집을 나와, 오른발을 왼발 앞으로 575번 내딛고 왼발을 오른발 앞으로 576번 내디뎌 혁신 클럽에 도착했다.(24p)”

 

반면, 필리어스 포그의 집사인 파리 출신의 파스파르투는 정반대의 인간형이다. 정직하고, 호감형이며, 정열적이고, 친절하고 다정하다. 체격은 크고 늠름하며 힘이 장사다. 포그가 아폴론이라면 젊은 파스파르투는 디오니소스다.

 

누가 주인공일까? 이 여행을 계획하고 착수한 사람은 영국 신사 필리어스 포그지만 모험은 파스파르투의 몫이다. 그는 자신을 고용한 포그의 여행이 성공하도록 도우려고 최선을 다하고, 그의 인품에 감동하고 진정한 사랑을 보낸다. 그러느라 위험가운데 던져지기도 하고 걸식과 서커스를 하기도 한다. 독자는 포그의 마음은 알 수 없지만, 파스파르투의 마음은 매순간 읽을 수 있다. 결정적으로 그들이 약속된 시간 안에 런던에 도착했다는 소식은 파스파르투가 들고 온다. 작가는 행동하는 파스파르투에게 무게를 두고 있는 듯이 보인다.

 

작가가 프랑스 사람이라는 것을 상기하게 된다. 그의 모험 소설에는 포그와 같은 인물이 등장한다고 한다. 작가가 당시 의도했는지는 모르지만, 지금의 눈으로 보면, 영국 신사인 포그를 풍자적으로 읽게 된다. 프랑스인의 눈에 비친 신사의 모습이 아니었을까?

 

그들이 지난 수에즈는 프랑스인 레셉스에 의해 건설된 운하다. 영국의 방해공작에도 불구하고 수에즈가 완공되었다는 표현은 프랑스인 쥘 베른의 시선을 엿보게 한다. 인도에서는 서티라는 관습의 희생될 뻔 한 아우다 부인을 구하고 그녀는 이 여행의 새 멤버가 된다. ‘서티는 지방 토후들이 죽었을 경우 아내들을 함께 화장하는 제도다. 홍콩의 마약 소굴 묘사는 아편전쟁이란 역사적 사건을 상기시킨다. 홍콩과 함께 작가가 그리는 중국, 일본의 풍경은 오리엔탈리즘을 생각하게 한다.

 

미국의 대륙횡단열차는 1863년 센트럴 퍼시픽 회사와 유니온 퍼시픽 회사가 각각 서와 동에서 출발하여 경쟁적으로 시공한 철로 위를 달린다. 이 철도를 놓는 길이에 따라 정부로부터 재정과 주변 땅을 받기로 약속되어 있어서, 두 회사는 경쟁적으로 공사를 했다. 이 과정에서 센트럴 퍼시픽 지역은 중국인들이 동원되었고, 유니온 퍼시픽은 인디언들의 지역을 지나게 되어 많은 희생이 있었다. 이 사업은 1869년 완공되었다. 이들 포그 일행이 열차여행을 하던 중 인디언의 공격을 받고, 다시 파스트루트는 인디언들의 포로가 되었다가 포그에 의해 구해진다.

 

이들의 여행 중 홍콩까지는 영국령이라는 표현에서 19세기말 영국의 제국주의 상황을 보게 된다. 포그 일행이 여행한 곳 대부분이 태양이 지지 않는 제국의 영토이거나 한때 식민지였던 곳이었다. 그들이 놓은 길은 식민 수탈과 착취, 자국의 번영을 위한 것이었다. 쥘 베른은 이 부분에 각성이 없었던 듯하다. 독자의 비판적 읽기가 필요한 부분이다.

 

어린 시절 읽었을 때는 그들을 은행 강도로 오해하고 쫓으며 발목을 잡는 형사 픽스 때문에 마음을 졸였었다. 결말의 반전 때문에 날짜변경선을 알게 되었고 절대 잊을 수 없도록 각인되었다. 역시 이번에 재독하면서 다른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수에즈를 두고 벌였던 영국과 프랑스와 오스만 투르크의 각축, 문화다원주의와 인권의 문제, 아메리카 원주민, 이민자들의 삶, 유럽의 시선으로 본 아시아의 모습 등을 생각해본다. 19세기 제국주의가 갖고 있는 20세기의 전쟁으로 갈 수밖에 없는 그 욕망을 지나칠 수 없다.

 

여행은 아름답게 끝이 난다. 예상치 못한 장애들을 해결하느라 쓴 경비들 때문에 포그는 금전적인 이익을 얻지는 못했다. 하지만 명예와 사랑을 얻었다. “사실 우리는 그보다 훨씬 하찮은 것을 위해서라도 세계 일주를 하지 않을까? (366p)”

 

나는 무엇을 위해 여행할까? 낯선 장소에서 나는 어떤 사람인가? 지나온 여행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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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3-02-08 02:5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쥘 베른 모험 소설을 쓰고 그게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군요 쥘 베른 소설 예전에 봤는데, 달하고 땅속을 가는 거 봤던가 다른 책에서 나온 해저 2만리도 생각나네요 그런 데도 다시 봐야 할 게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지금도 잘 모르고 지나갈 것 같지만, 예전엔 더 몰랐을 것 같기도 합니다


희선

그레이스 2023-02-08 07:04   좋아요 2 | URL
예!
다시 보이는게 많아요^^
해저 2만리도 봐야할 듯요
열림원에서 나온 쥘베른 모험소설 전집 살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서니데이 2023-02-08 22:2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책은 김석희 번역이네요. 그러면 번역은 괜찮을 것 같은 기분이.^^;
외서는 번역자도 중요한 것 같아요.
잘읽었습니다. 그레이스님, 따뜻한 하루 보내세요.^^

그레이스 2023-02-08 22:25   좋아요 2 | URL
예~
번역은 좋아요^^

서니데이 2023-02-11 17:2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레이스님, 주말 잘 보내고 계신가요.
날씨가 많이 춥지 않고, 나쁘지 않은 것 같아요.
편안한 주말 보내시고, 좋은 오후 되세요.^^

그레이스 2023-02-11 20:10   좋아요 1 | URL
예~
서니데이님도 건강하고 좋은 주말 되세요

페크pek0501 2023-02-12 17: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멋진 책을 읽으셨습니다. 유명한 책인데 못 읽었어요.

그레이스 2023-02-12 18:59   좋아요 0 | URL
예~
저도 어렸을때 읽었지만 읽었다고 할 수 없었죠.
이런 책의 맹점인 것 같아요~^^

han22598 2023-02-14 03: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엇, 흥미로운 책이네요. 읽어보고 싶어졌어요 ^^
리뷰 올려주셔서 감사해요!

그레이스 2023-02-14 05:15   좋아요 0 | URL
예~~
감사합니다 ~

레삭매냐 2023-02-15 14: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문득 여행을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행을 즐기던 시절, 왜
여행길에 나섰는지 궁금
하네요.

그레이스 2023-02-15 14:02   좋아요 1 | URL
19세기는 모험소설이 한참 인기 있던 때였다고 하네요^^
탐험이 트렌드였던 시대!

희선 2023-03-09 01: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레이스 님 축하합니다 지금은 세계 일주 하려면 얼마나 걸릴지... 가기 어려운 곳도 있어서 세계 한바퀴 돌기 어려울지도 모르겠네요


희선

그레이스 2023-03-09 21:54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희선님~

서니데이 2023-03-13 17: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그레이스 2023-03-14 10:08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