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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작가의 오후 열린책들 세계문학 122
페터 한트케 지음, 홍성광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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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터 한트케의 소설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이나 『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 등에서 생각의 흐름은 공간의 이동과 평행을 이루고 있다. 낯선 장소로 여행하며 불안이라든가 아니면 과거에 대한 회상과 관련된 생각의 흐름을 읽게 된다. 이 작품 역시 이러한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작가인 주인공은 산책을 하며 작품에 관한 생각들과 그 글로 인한 두려움, 망상, 현실과 환상의 혼동을 경험한다.
아마도 작가 자신이 이러한 산책이나 여행길에서 경험한 것이리라 생각된다.

언젠가 거의 1년 동안 언어를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며 살았던 이래로 작가에게는 자신이 과거에 썼고, 앞으로 쓸 수 있다고 느낀 문장 모두가 하나의 사건이 되었다. 말로 표현되지 않고 글로 쓰이면서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모든 언어가 그로 하여금 깊이 숨을 쉬게 했고, 그를 세계와 새롭게 맺어 주었다.
11p

그자신의 실상을 밝혀 주고 생동감 있게 해준 몇 줄의 도움으로 그날 하루도 잘 지나간 것 같았다.작가는 저녁나절을 순조롭게 보낼 수 있으리라는 기분으로 자신의 책상에서 일어섰다.
13p

집을 나서던 작가는

정원으로 통하는 문으로 가는 도중에 작가는 갑자기 발걸음을 돌렸다. 그는 다시 집 안으로 들어가, 후닥닥 서재로 올라가서는 거기서 어떤 단어를 다른 단어로 바꾸었다. 그제야 비로소 그는 방에서 땀 냄새를 맡았고 유리창에 증기가 낀 것을 보았다.
21p

밖에서 들려오는 소음을 들으며 글을 쓰던 작가는 목욕을 하고 옷을 입고 신발을 고쳐 신고 하는 동작을 통해 밖으로 나가는 산책을 준비하며, 오랜 시간을 집안에 머문다. 머뭇거리듯 밖으로 나가기 전 긴 준비를 하고 나가다가 다시 집안으로 들어와 단어를 고치고, 그제야 다른 감각이 돌아온다. 준비 시간이 긴 것은 자신이 작업하고 있던 글의 세계에서 빠져나오기 위한 시간을 갖기 위함이었던 것 같다. 외부로 향하는 감각이 돌아오게 하는.
그리고 산책길에서

걸을수록 일에서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일이 자신을 따라다니는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그는 서재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여전히 작품 활동을 하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40p

그의 작품에 대한 생각을 이 소설의 주인공의 생각을 빌어 표현한다.

<작품>이란 무엇을 뜻하는가? 그는 재료란 거의 중요하지 않고 구조가 무척 중요한 것, 즉 특별한 속도 조절용 바퀴 없이 정지 상태에서 움직이는 어떤 것이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모든 요소들의 자유로운 상태로 열려 있는 것, 누구나 접근 가능할 뿐 아니라 사용한다 해서 낡아 떨어지지 않는 것이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40p

길게 이어진 골목- 출구라곤 도무지 보이지 않고 다만 굽은 길로 접어들 뿐인- 은 높은 집들의 지붕이 드리워져 이미 어둑어둑해진 반면, 길게 이어진 하늘은 골목의 잔상이 어린 듯 아직 밝았다. …… 집들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길이 좁아지는 곳에서 한 무리의 젊은이들이 그를 쳐다보았다. 그 눈빛이 담고 있는 것은 그에 대한 인정(認定)이 아니라 이해불능, 심지어는 적의였다. 그는 그들이 어떤 문학 텍스트의 의미나 의도, 배경을 지정해야한 하는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일 것이라고 상상했다.
57p

작가가 매일 다니던 산책길, 일상적인 것들이 갑자기 낯설고 오히려 적의까지 느껴지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단어 하나도 떠오르지 않고 이제까지 써오던 문장들이 낯설고 의미를 상실한 순간들일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렇게 작가는 저녁 산책길에서 무수한 얼굴들과 풍경들 그리고 환상을 통해 글쓰기를 상징한다. 의미와 상징을 읽어내지 못하면 이 소설을 읽는 독자는 길을 잃게 된다. 나 역시 앞으로 돌아가 다시 읽어오는 작업을 반복했다.

그가 악몽을 꾸는 경우는 오로지 글을 쓸 때뿐이었다. 꿈속에서는 어떠한 사건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밤새도록 늘 똑같은 판결이 되풀이되었다. 무의미한 것이 아닐지라도 그래서도 안 되지만- 글을 쓴다는 것은 죄가 되는 일이었다. 예술 작품, 즉 책의 월권행위는 다른 어떤 죄악을 저질렀을 때보다 더한 영겁의 벌을 받게 되는 가장 고약한 죄악이었다. 그는 하루 일과가 끝나 버린 지금 이때에, 멀쩡한 정신으로 용서받을 수 없는 죄악을 저질러 세상에서 영원히 추방된 자가 된 듯한 감정을 체험했다.
95p

산책길에서 다시 서재로 돌아오는 그는 <작가로서의 나> 일까? <나로서의 작가>일까? 수많은 환상과 열려진 의미와 상징 속에서 독자도 무엇이 실재인지 의심하게 된다. 그리고 그 하나하나가 작가로서 보고 있는 세상일까? 하는 생각이 든다. 작품 속에 빠져있어 현실과 자신이 만들어 낸 환상을 구분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 있는 작가. 작품을 쓰기 위해 그가 잃어야할, 잃을 수밖에 없는 것들. 그것을 잃고 그는 작품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자신을 적대하는 세상 속으로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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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폴 한센은 몬트리올 교도소의 ‘콘도’라는 감방에 수용된다. 함께 지내는 죄수의 이름은 패트릭 호턴. 살인과 암살 사건으로 유명해진 바이커 갱단의 일원이다. 가까이서 보는 그의 모습은 무례하지만 가끔씩 자신의 무지를 부끄러워하며 겁이 많다. 처음에는 ‘슬기로운 감빵생활’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읽어갈수록 주인공이 왜 이 교도소에 오게 되었는지 궁금하다. 주인공은 전혀 이 장소와는 어울릴 것 같지 않는데 말이다.

「갇혀 있으면 날이 길어지고, 밤이 느슨해지며, 시時가 늘어지면서 시간에 끈적끈적하고 약간 역한 질감이 생긴다. 저마다 빽빽한 진창 속에서 철벅대는 기분이 든다. 여기서 자기 혐오에 매몰되지 않으려면 한걸음 한걸음 악착같이 발을 빼내고 옮겨야 한다. 감옥은 우리를 산 채로 묻었다. 형량이 가벼운 자는 뭐라도 바랄 수 있다. 그러지 못한 자들은 이미 공동 묘혈에 들어앉았다. 행여 운 좋게 가석방이 된다 해도, 그들은 잠시 바깥 공기를 마시러 나갔다가 여기, 세상에서 배척당한 자들의 집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들을 성姓으로 부르고 농장의 가축처럼 취급하는 이곳으로.」

그는 이 감방으로 오기까지의 삶을 회상한다. 그의 교도소의 일상과 회상이 평행을 이루며 전개된다.
그는 1955년 덴마크인 아버지와 프랑스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프랑스에 살았지만 아버지는 절대 프랑스인이 될 수 없었고, 어머니는 아버지의 삶을 이해할 수 없었다. 결국 이혼 후 아버지 한센은 캐나다로 이주를 하는데 주인공은 아버지를 따라 퀘벡으로 간다. 거기서 아버지의 죽음 후 아헌트식으로 와서 ‘렉셀시오르’콘도의 관리인이 된다. 26년간 ….
주인공이 갇혀 있는 교도소는 그 아헌트식에서 1킬로미터도 떨어져 있지 않다.

‘렉셀시오르’는 68가구로 이루어진 콘도이다. 입주민은 모두 자가 소유자로서 수목과 화단이 잘 가꾸어진 정원, 소금으로 정화하고 따뜻하게 데운 물이 공급되는 23만 리터 용량의 수영장, 세차장이 구비된 얼룩 하나 없는 지하주차장, 스포츠실, 현관에 면해 있는 대기실과 접객실, ‘포룸’이라고 불리는 회의실, 스물 네 대의 감시카메라와 대형 승강기 세대를 갖춘 건물이다. 이 건물이 정상적으로 돌아가게 관리하는 것이 그의 일이다. 뿐만 아니라 아파트의 노후화와 함께 늙어가는 입주자들의 세세한 부분까지 도와주었다. 두 번의 장례식에도 참석하고 104번의 계절을 겪었다.

그 거대한 집에서 오랜 세월을 보내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이 돌봤던 과부들과 노인들이 그에게 각별했다고, 어떤 면에서 그들을 사랑했다고 깨닫는다.
그 곳에서 사랑하는 여인 위노나도 만났다. 그녀는 캐나다 인디언의 후손, 비행기 조종사이다. 그들은 첫 만남에 사랑에 빠지고 함께 부부로 산다.
함께 캐나다의 숲과 호수를 여행하며 사랑을 나누는 장면은 숨막히게 아름다웠다.

전임 입주자 대표가 죽고 새로운 대표가 세워지면서 빌라는 새로운 흐름 아래 놓이게 된다. 자본과 그 원리의 기계적 적용에 따른 비인간적인 모습. 불신이 전반적으로 자리를 잡고, 서로를 감시하며, 비생산적인 지출을 잡아내는데 혈안이 되었다. 그는 총회에서 이러이러한 지출은 어떤 이유에서 발생했는지, 왜 그 공급업자를 선택했는지, 외주업체 청구서가 왜 그렇게 나왔는지 설명을 해야 했다. 뉴스를 달궜던 아파트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한 사람의 악영향은 이리도 빨리 퍼져갈수 있을까 생각했다.

주인공은 위노나와 반려견 누크와 함께 캐나다 숲을 비행하는 것이 이런 일로부터의 탈주였다. 부침 많고 서러운 일을 견딜 수 있는 용기와 행복이 충전되는 시간이었다.

「다행히도 위노나와 누크는 나를 너무 오래 갇혀 지낸 이 우주에서 이따금 빼내주었다. ……나무와 물, 땅과 동물을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그 공중 산책을 수 백년 동안 계속하라고 해도 나는 싫증 내지 않고 즐겼을 것 같다. 가없는 세상, 아름다움의 카탈로그가 무한히 펼쳐지는 세상을 내려다보고 사는 기분이랄까. 하늘, 물, 숲 모든 것이 광대했다. 우리는 인터폰이 설치된 여섯층짜리 아파트, 아무도 물을 마실 수 없는 조그만 인공 호수가 딸린 공동주택에서 살겠다고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야생의 삶이 우글댈 그 세상을 떠났을 것이다. 우리는 인공 호수 곁에서 살아가고 산책하며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는다. 기껏해야 디지털 출입보안장치 문자판에나 지문을 남길까. 」 226p

비행기 사고로 사랑하는 아내 위노나를 잃고 슬픔에 빠져있는 주인공에게 비인격적인 태도로 그만둘 것을 통보하는 입주자 대표에게 상해를 입힌다. 그는 재판을 받게 되고 이 형무소로 오게 된다. 감형을 위해 반성하는 태도조차 보이지 않는다.

거대한 자본주의 비인격적이 흐름 아래 적응하지 못하는 한 사람의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왜 이렇게 까지 되었을까? 부모의 이혼과 아버지의 죽음으로부터 경험한 상실은 노인들의 죽음과 위노나의 죽음에 이르러 극단에 이른다. 세상이 뒤바뀌어도 누군가 함께 하는 것이 이길 힘이 되는 것. 그것이 위노나의 존재였는데. 그녀를 상실하는 것은 그가 그 파도를 버티고 설 힘을 잃게 하는 것이었으리라.

결국 아버지의 고향인 덴마크로 돌아가는 그의 오딧세이는 불친절하고 낯선 바다의 섬들 사이를 부유하는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그나마 열정적으로 사랑했던 위노나에 대한 추억이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형무소에서 패트릭 호턴을 지켜보며, 자신의 삶을 회상한다.
‘모두가 세상을 똑같이 살지는 않습니다’는 아버지가 마지막 설교단에서 쓰러지기 전 한 말이다. 이혼, 파산, 파면 등 실패라는 인생의 결과 앞에서 아버지가 청중에게 전한 메시지이다. 모두가 똑같은 삶을 살지는 않는다. 패트릭 호턴의 삶을 보며 이 말을 떠올렸고, 예상치 못한 인생의 전개 앞에 아버지의 이 말을 기억했다.

안타깝지만 그래도 희미한 웃음이 새어나게 하는 폴의 복수와 귀향은 희망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두가 세상을 똑같이 살지는 않는다’라는 말에는 아버지가 청중을 향해 이해해달라는 요청의 메시지였다. 살아보니 이런 결과가 나오더라는…. 더불어 주인공을 향한 메시지로도 읽힌다. 아버지의 삶과 죽음에 대해 당시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이제 자신의 삶을 반추해 보니 이해하게 된 것을 의미하는 것이리라. 내가 이만큼 살아온 지금에서야 나의 부모를 이해하는 것처럼…. 그러니까 아버지의 고향으로 가서 아버지의 삶에 대하여 친척들에게 전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겠지. ‘모두가 똑같이 살지 않는 것처럼 아버지도 아버지의 삶을 살았다’라고….

가끔 이해할 수 없는 어떤 삶이 있긴 하다. 그 삶이 그렇게 흘러갈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는 새삼스러운 생각을 하게 되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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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세가 된 폴 블릭은 손자 루이의 얼굴에서 어릴 때 보았던 형의 표정을 본다. 그리고 폴이 8살이던 해에 10살이던 형 뱅상의 죽음을 떠올린다. 침착하고 확신에 차 있으며 사랑받던 형. 빨리 형보다 더 강해지고 싶었던 폴은 유년의 한 복판에서 상실을 경험한다. 그와 함께 자신의 내면 깊은 곳에 숨어있던 독점에 대한 욕망이 숨길 수 없이 모습을 드러낸 경험으로 상처를 입는다. 형의 물건 사륜마차 모형을 훔치는 것. 그것이 형과 함께 무덤 속에 들어가게 될까봐. 아버지는 형의 카메라 브라우니 플래시 코닥을 건네주었다.

그의 기억은 1958년 TV로 축구시합을 보며 프랑스를 응원했던 형과 보낸 마지막 여름의 기억으로부터 시작한다.
그의 사적인 사건들은 1958년부터 시작하여 프랑스의 현대사와 함께 씨실과 날실로 쉬지 않고 직조된다. 드골, 퐁피두, 데스탱, 미테랑, 시라크 대통령의 시대와 함께 사춘기, 사랑, 결혼, 자녀, 일, 사별, 상실, 파산 등의 폴 개인의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 유년시절, 드골을 비판하고 옹호하는 두 파로 나뉘어 토론을 벌이던 친척들의 식사자리를 기억한다. 그리고 아버지 와 형제들에 대해서 당시 프랑스와 닮았다고 이야기 한다.

「그 시대 우리 가족은 이러했다. 불쾌감을 주고 고루하고 반동적이고 너무나 슬픈 모습이었다. 한마디로 프랑스라는 나라와 닮아 있었다. 수치와 가난을 극복했기 때문에 여전히 살아 있음을 행복하게 생각하는 나라. 농무를 경멸하여 그들을 노동자로 만들고, 그 노동자들에게 기능적이지만 추한 건물로 꼭 들어찬 괴상한 도시를 건설하게 하여 지금은 아주 부자가 된 이 나라와 닮아 있었다. 그와 동시에 자동차의 기어 박스는 삼단에서 사단으로 바뀌었다. 나라 전체가 가동 증속창치로 변속된 속력으로 작동되기 시작했다고 할만 했다.
이러한 프랑스라는 나라에서 성장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통령 샤를 드골과 총리 퐁피두 사이에 끼어 있는 소심한 청소년의 경우엔 특히 더 그랬다.…」 32P

사랑, 섹스, 결혼, 외도. 그리고 극치의 순간에서 불구와 같은 감정의 상태를 토로하는 이야기를 반복하는 것을 읽으며, 불편함과 소설의 방향에 대한 의구심이 들었다. 계속 이런 이야기만 하고 끝내려나? 하고. 자전적 소설 같은데 은밀하고 사적인 부분을 너무 세세하게 다루고 있어 당혹스럽기도 했다. 읽어가면서 그가 항상 부딪치는 벽은 어쩌면 형의 죽음 앞에서 형의 물건에 대한 욕망이 폭로되었던 기억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이 그것에 놀라고 상처 입었을 것이라는 사실. 이러한 경험은 그의 욕망을 억압하고, 무심하고 고립되어, 기이한 모습의 편력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닐까? 프로이트의 무의식을 떠올리게 한다.

사회주의 성향의 가정에서 자란 폴이 애덤 스미스 신봉자를 자처하는 철저한 자본주의자 안나와 결혼한다. 변화하는 정치적 상황, 국제정세는 그의 아내와 처가의 사업을 흥하게도 쇠하게도 하고, 생태와 숲에 대한 세계적 관심은 자신의 사진가로서의 작업에 성공을 가져다주기도 한다. 미테랑 신봉자였던 어머니와 지극히 자본주의적인 삶을 사는 아내의 집안 사이에서 무심하고 개인적이고 고독한 삶을 산다. 한 번도 투표를 해본 적이 없는 것이 보여주듯 어느 쪽에도 소속되고 참여하지 않는다. 아내가 자신의 사업에 고용되어있는 노동자들을 해고함으로 경제적 위기를 넘기려고 하자 다시 생각해보라는 조언을 하기도 한다. 완강한 안나앞에서 더 이상 관여하지 않는다. 철저히 자유롭게 자신이 가진 신념대로 살려고 하는 것일까? 하지만 그의 결혼과 성공이 그렇게 살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어느 곳에도 구속되지 않고 행동하지 않는 것이 그를 자유롭게 할까?

「“폴, 나는 이 세상을 더 이상 이해하지 못하겠어. 누군가 우리에게 미리 알려주지도 않고 게임의 규칙을 바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375p

딸을 잃고 사업도 잃은 장인의 말이다.
세상은 대통령이 바뀌고, 파업과 혁명과 전쟁이 일어나고, 정치·경제·문화 모든 것이 변화한다. 나도 몰래 규칙을 바꾼 것처럼…. 내게 친절한 것 같다가도 거센 파도가 되어 내가 탄 배를 후려치기도 한다.

폴이 프랑스라는 사회로부터 그리고 사람들로부터 차단하며 살았지만 결국 그도 그 영향을 벗어날 수 없듯이 개인은 역사와 사유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사르트르의 앙가주망의 의미가 생각난다. 선택을 하고 함께 해야 하는 필요에 대해서….

아내의 죽음과 파산 후 그는 여전히 사람을 상대하지 않는 정원 일로 돈을 번다.
딸을 정신병원에 입원시키고 찾아가며 마음을 열려고 해보지만 반응이 없는 상황 앞에 절망 한다. 어느날 정원 일을 하다가 그는 문뜩 딸이 갇힌 그 광기와 자신을 가둔 그 세계가 다르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이따금 나는 마음 약하게도 마리와 나 사이에, 그러니까 그녀의 광기와 나 사이에 어떤 세계가 있다고 믿었다. 또 어떤 때에는 내 삶의 과정을 객관적으로 생각했을 때, 이제껏 딸과 결코 가까이 있은 적이 없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나의 이런 느낌은 11월 어느 날 저녁에 난처하게 확인되었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오랫동안 뜨거운 물로 샤워를 했다. 그리고 조금씩 나를 가두고 있는 불순물을 상징적으로 벗으려고 애를 썼다.」 385p

그는 자신이 놓치며 산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된다. 사람!
그는 왜 카메라 앵글 안에 자신의 가족을 넣지 못했을까? 사물, 나무, 곤충들이 아닌 사람을 대상으로 셔텨를 누르지 못했을까? 그가 달아났던 카메라 앵글과 암실, 그리고 정원은 자신을 가두는 병동이었다.
폴은 딸 마리를 데리고 행복했던 추억이 있는 피레네 산맥의 어느 정상을 오른다. 그리고 그 정상에서 딸을 끌어안는다.

나의 무심함에 대해 생각해본다. 나와 타인이 자유롭고 존중되기 위해서는 적당히 무심하고 거리를 두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쩌면 그것이 감정이 다치는 것을 두려워하고 들키지 않고 숨기기 위해 나를 가두는 습관은 아닌지?
가족이나 주위의 많은 사람이 내가 필요한 순간에 나에게 도움이나 위안이 되지 못할 수 있다. 그럼에도 그들에게 무엇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 인생이다.






우리는 오래 걸어서 그곳에 도착했다.
내 딸을 두 팔로 안았다. 죽은 나무를 얼싸안는 느낌이었다. 그녀는자기 앞을 똑바로 응시했다. 우리는 세상 꼭대기에서 겨우 균형을 잡고,
허무의 끝에 서 있었다.
내 가족 모두를 생각했다. 그 의혹의 순간에, 그토록 많은 사람이 나와 함께 있다고 생각했던 그 순간에, 그들은 나에게 어떤 도움이나 위안도 되지 못했다. 그렇다고 해서 놀라지도 않았다. 인생은 우리를 다른사람과 묶어놓고서 우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한 존재의 시간에, 우리가아무 것도 아니라기보다는 차라리 단지 그 무엇이라는 것을 믿게 하는보일 듯 말 듯한 가는 줄에 지나지 않으니까.
- P3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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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률에는 한계가 있다. 현행 교통법으로는 자신의 사랑하는 남편을 죽게한 여자를 처벌할 방법이 없어 같은 방법으로 보복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던진다.
이 상황은 법률이 그녀에게 아군이 되게 하는 것일까?

삶을 살면서 우리는 타자에게 의도치 않은 해를 입힌다. 어쩌면 함께 사는 공동체 안에서 매 순간 일어나는 일이 아닌가 싶다. 이것이 가장 극단적으로 드러나는 곳이 도로 위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무심코 창밖으로 던진 커피캔이 뒤따르는 차에 탄 사람을 실명하게 하고, 무단횡단이 급브레이크를 밟게 해서 운전자를 사망에 이르게 하고 ...

살아가면서 나의 어떤 선택과 태도와 방식이 다른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를 생각하며 조심하는 태도는 도로 위 주행과 관련지어 생각되었다. 차 안이라는 장소는 개인적인 공간인 것 같지만 다른사람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치는 자리이다. 음식을 먹기도 하고, 화장을 고치기도 하고, 두사람이 언성을 높이기도 하는 등 개인적인 행위와 사건이 일어난다. 하지만 그로 인해 같은 도로를 주행하는 차들은 주춤거리기도 하고, 급브레이크를 밟기도하고, 내 뒤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 차들의 행렬 끄트머리에서는 연쇄추돌도 일어날 수 있다. 그러므로 다른 차를 배려하는가는 준법정신를 넘어서 그 사람의 평소 윤리의식을 평가하는 잣대가 아닐까? 평소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삶의 태도와 별개의 것이 아니란 생각이 든다.

우리가 이런 의식으로 살아간다면 아야코처럼 자신의 몸을 던져 과연 법이 내편인지 아닌지를 가늠해보는 절망적인 상황에 내몰리는 일이 사라질까? 줄어는 들겠지.


세라는 아야코의 얼굴을 떠올렸다. 법률은 조금만 어긋나면 때로는 적이 되기도 하고 아군이 되기도 한다. 그녀는 자신의 몸을 내던져서 법률의 분리대를 넘은 것이다.
- P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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