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학교 | 섹스 - 섹스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해보는 법 인생학교 1
알랭 드 보통 지음, 정미나 옮김 / 쌤앤파커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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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스'라는 단어를 올리는 것은 여전히 인식의 저항을 불러일으킨다. 혼자 '섹스'라는 단어를 올리는 것은 부담이 없지만 누군가 있는 자리에서 단어를 언급하거나 이처럼 글로 단어를 언급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섹스'라고 하면 거의 모든 사람이 - 혹시 나만?? - 남녀간의 관계를 떠올린다. 남성과 여성의 차이를 지칭하기도 하지만 이 단어를 쓰는 언어권 나라에서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우리나라에서는 무조건 저절로 연상이 된다.

 

가장 왕성한 호기심을 보이는 사춘기 시절에 거의 대부분 사람들이 첫 경험(?)을 하게 된다. 예전에는 빨간책이라고 불리고 이제는 야동이라고 불리는 매개체를 말이다. 첫 경험은 다들 이러한 매개체를 통해서가 아닐까 한다. 아니면, 남자에 국한해서. 문학작품도 마찬가지로 이 범주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고 할 수 있는데 고전 명작도 어느정도 묘사가 나온 작품들이 많다. 과거에는 따로 편집(??)된 작품(??)이 없으니 문학작품에서 그러한 장면만 찾아 보는 사춘기 소년,소녀가 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고등학생 시절에 분명히 문학작품으로 교과서에도 언급된 '고금소총'을 읽게 되었다. 조선 시대에 양반을 풍자하고 해학으로 가득찬 내용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어찌 하다보니 그 책을 읽고 깜짝놀랐다. 해학이 너무 넘쳐 음담패설이 주를 이뤘기 때문이였다. 조선시대에 사는 사람들의 다양한 방법(?)마저 소개되고 있었다. 좋았던 것은 모르는 사람은 이런 책을 들고 다녀도 전혀 모른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들고 다니면서 읽었다는 것은 아니고 그랬을 정도로 일반인들이 생각하지 못했던 내용이였다.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말로 남녀가 엄격히 구별했던 조선시대에도 남녀상열지사라는 단어가 있었던 것처럼 '섹스'라는 것은 양지보다는 음지에서 숙떡숙떡 몰래 떠드는 주제이다. 더구나, 꼭 그래야만 더 재미있고 감질나는 주제이기도 하다. 

 

점점, 성이 개방되고 꺼릴낄 것이 없어지면서 '섹스'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는 것은 예전처럼 난감하고 얼굴 붉혀지는 일이 아니다. 다른 단어로 '야동'이니 '관계'라는 조금은 위트있거나 고상한 단어로 언급을 하지만 '섹스'라는 단어와 그와 관련된 이야기가 금지된 것은 아니고 보다 공개석상에서 이야기되는 주제가 되었다.

 

'섹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어딘지 모르게 자신의 모든 것을 공개하는 것과 같이 가장 은밀하고 내면적인 일이다. 어지간히 친한 사람과도 쉽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어릴 때부터 자라온 친구하고도 쉽지 않다. 심지어는 평생을 함께 살아갈 부부끼리도 행위(??)가 아닌 말로써는 표현하지 않는다. 

 

 

한편으로는 쉽게 이야기하지 않는 단어이면서도 생판 모르는 사람과도 '섹스'라는 것을 한다. 본능이 이성을 이긴 결과이다. 인간이 이성만 갖고 있다면 우리 세계는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에서 살고 있을 것이다. 이성이 대체적으로 본능을 억제하지만 가끔 자신도 모르게 이성의 틈을 비집고 본능이 나와 이성을 감싸안고 본능으로만 행동을 한다. 이럴 때 뜻하지 않은 일들이 생기고 많은 문제들이 도출되지만 역사를 돌아보고 훗날 이로 인해 생각하지도 못한 새로운 역사가 창출되는 경우가 한 두번이 아니다.

 

'섹스'라는 것은 이성보다는 본능에 가까운 행동이고 사고이다. 이성만으로는 절대로 남녀가 만나 사랑을 나눌 수 없다. 본능에 보다 충실해야 남녀가 만날 수 있다. 남녀관계는 친구가 될 수 없다고 한다.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한 듯 하다. 모든 남자가 모든 여자에게 사랑에 빠지는 것도 아니고 모든 여자가 모든 남자에게 끌리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상황이라는 것에 의해 남녀는 자신도 모르게 이성이 본능 앞에 무릎굻는 일이 생긴다. 특히, 남자같은 경우에는 아무리 이성으로 본능을 억누르려고 해도 자신도 모르게 본능이 앞서게 된다. 이럴 때 상대방의 조건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 대체적으로 본능에 굴복하고 순간 미쳐서 행동을 하는 경우가 바로 이런 경우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오로지 한가지에만 집중한다. 모든 것을 줄 것 같은 행동과 다짐으로 한가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노력에 집중한다. 이런 달성 후에는 후회가 뒤따르지만 말이다.

 

진화 생물학적 관점에서 보면 우리 인간들이 남녀간에 섹스에 대해 바라보는 관점과 행동은 전부 명쾌하게 설명이 된다. 그런데, 무척이나 재미가 없다. 설명을 들어보면 그럴 수 있다고 여기지만 남녀간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미묘한 화학작용과 그로 인한 '섹스'는 이론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영역 이상의 무엇이 있다.

 

고등학교 때 선생중에 한 명이 수업중에 '너희들 섹스에 대해 이야기를 많이 하고 궁금해 하는데 그거 별거 아니다'하면서 학생들의 관심과 호기심을 유도했지만 결국 그 선생은 아주 아주 일반적인 이야기와 무미건조한 이야기로 학생들의 시선을 단순간에 차갑게 식어 버렸다. 이와 같이 '섹스'에 대해 이론적으로 학문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실제와 달리 무척이나 고리타분한 분야로 만들어 버린다. 실제 상황에서는 불타오르는 전의를 불태우는 면이 있는데도 말이다.

 

쓰다보니 조심스럽고 위험하다. 개인의 내면이 '섹스'와 연결되어 보여지는 것은 아직까지는 한국사회에서는 좋지 못하다. 향후에도 그럴 가능성이 크고. '인생학교: 섹스'는 섹스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일반적인 남녀의 차이인 성이 아니라 남녀간의 행위인 섹스로 설명을 하고 다양한 방법과 그에 따른 에너지 소모에 대해 설명을 해준 후에 섹스로 가기 전 단계인 남녀간의 감정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렇게 감정이 이뤄지고 '섹스'가 이뤄진 후에 남녀간의 저간의 사정에 대해서도 말한다.

 

'섹스'는 단순히 종족을 보존하고 번식하기 위한 방법은 뛰어 넘은지 오래다. 쾌락이자 오락이기도 한 실정이고 점점 성에 대해 개방적인 사회로 변모하고 있지만 교묘하고 미묘한 경계선을 잘 타지 않으면 한 순간에 몰락할 수 있는 분야이다. '섹스'라는 부분에 대해 다루고 있어 집중하고 있어 도덕적인 부분보다는 그 자체에 좀 더 이야기를 많이 한다.

 

도덕을 떠난다면 '섹스'는 그저 종족 본능과 번식과 재미난 오락과 유홍거리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감정을 가진 인간에게는 그 이상의 무엇이 있어야만 '섹스'라는 것을 하게 된다. 생판 모르는 남녀가 보자마자 마음에 든다고 그 즉시 하는 경우는 없다. 바로 그 지점이 인간이 본능보다는 이성이 앞 서 있다는 뜻이 되고 인류가 지금까지 존재한 이유중에 하나라 본다.

 

이거 이거 쓰다보니 아직은 겉다르고 속다른 나로써는 상당히 민감하다. 그만 써야겠다. '인생학교: 섹스'의 저자나 소새글을 쓴 사람들은 그래도 꽤 고급스럽고 약간은 우회적으로 쓰기도 했는데 - 알랑드 보통은 과감히 표현하고 묘사했다만 - 계속 쓸수록 좀 더 과감하게 묘사가 들어갈 듯 하여 스스로 진정하면서 끝을 맺어야 겠다. 쓰다보니 할 말은 많은 장점이 있는 게 '섹스'인 듯 하다. 누구나 다 그렇지 않을까 한다.

 

그리고, 이거 괜히 쑥쓰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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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 인터넷이 우리의 뇌 구조를 바꾸고 있다
니콜라스 카 지음, 최지향 옮김 / 청림출판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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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와 내용은 참 좋은데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제목에 충실하려고 했는지 몰라도 너무 말이 길고 비슷한 말을 반복해서 하는 점이 아쉽다. 아무리 좋은 이야기라도 무한 반복되는 주입은 머지않아 질리고 다른 것을 찾게 만들고 싶은 것처럼 책의 내용이 단 하나의 주제를 위해 엄청나게 다양한 이야기를 하지만 결국에는 같은 말을 이리저리 반복한다는 느낌이 들어 읽으면서 좀 힘들었다. 계속 집중하며 정독으로 읽어야 하는지 조금은 속도를 높혀 중간 중간은 건너뛰어야 할지에 대해서 말이다. 그리 하여 100% 정독으로 읽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90%이상은 정독으로 읽었다.

 

갈수록 정보의 대량화에 많은 사람들이 어떤 정보가 자기에게 올바른 정보이고 도움이 될 것인지 힘들어 지고 있다. 단어 하나를 쳐도 수 많은 정보가 쏟아지고 알고리즘에 의해 평소 내가 자주 검색하고 관심있는 정보와 연결성을 갖고 보여주기도 하지만 검색업체의 이익에 부합되는 정보가 먼저 등장하기도 한다.

 

예전에는 참 신기했다. 도대체 왜 사람들이 물어보는지 몰랐다. 물어보기 전에 검색을 하면 금방 원하는 정보를 찾을 수 있는데 말이다. 그러면서 지식이라는 것이 정보를 얼마나 더 확실하게 찾을 수 있는가에 대한 부분이라고 생각마저 들었다. 어떤 궁금증이 있으면 그와 관련된 힌트를 갖고 검색을 통해 원하는 정보를 찾았으나 많은 사람들이 전혀 힌트를 갖지 못하고 찾지 못하는 것에 대해 그렇게 착각을 했었다. 지금은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지도와 시계가 얼마나 많은 영향을 인류에게 미쳤는지에 대해 말하면서 정작 그다지 많은 부분을 할애해서 알려주지는 않는다. 오히려, 아니 당연히 문자와 인쇄부분에 대해서는 많은 부분을 할애해서 설명하고 있다. 너무 당연하다는 생각도 들지만 실제로 이 부분에 대해서는 소크라테스까지 거슬러 올라가 말한다. 소크라테스는 오히려 인쇄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그것은 문자가 되어 읽게 되면 우리의 사고를 방해하기 때문이란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면 또 틀린 말은 아닌듯 하다. 문자로 되어 읽어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되는 긍정적인 측면은 있지만 구전되어 우리가 외우고 두고 두고 생각이 난다는 점에서는 떨어졌으니 말이다.

 

인터넷은 온갖 정보를 우리에게 제공하고 한 명의 똑똑한 개인이 아니라 다수의 개인들이 모여 엄청난 지식을 만들어 가는 것을 보여주지만 정작 각 개인들은 갈수록 생각하지 않고 말초적인 상황과 감각에 의지하게 된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 행동을 생각해보니 나도 책은 거의 대부분 정독으로 이해가 되지 않아도 읽는 편이지만 인터넷에 올라온 글들은 쓰으윽~~ 하고 읽을 때가 많다. 책을 읽는 것과 같은 집중과 몰입도로 읽지 않는 경우가 많다.

 

여러 사람들의 글을 블로그나 카페를 통해 읽지만 그 사람이 쓴 글을 자세하게 읽는 것이 아니라 통으로 전체적인 관점에서 보게된다. 이렇게 되면 우리가 '죄와 벌'이라는 작품을 읽어 본 적은 없지만 그 책에 대해서 아는 체를 하는 것과 같은 결과가 나오는 오류가 생긴다. 정작 내 생각은 갖고 있지 않으면서 알고 있다고 착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경우가 상당히 많아 지고 있다. 생각해보니 그나마 책을 정독하고 인터넷에서 글을 읽다보니 인터넷 글을 쓰으윽~~하고 읽어도 중심을 잡고 있는 것이라는 판단이 들었다.

 

그러면서 내가 쓰고 있는 글이나 타인의 글을 읽는 버릇을 보니 사람들이 블로그등에서 글이 많은 포스트보다는 그림이 많은 포스트들이 더 많은 인기를 끌고 사람들이 많이 읽고 댓글도 많이 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실제로 어떤 글은 많은 사진과 글이 있는데 거의 대부분 본인의 생각은 없다. 간단하게 글을 읽고 사진보고 다시 글을 읽고 사진을 본다. 이런 글들이 인기도 좋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귀찮아서 그렇기는 못하지만 결국에는 이런 것들이 바로 저자가 말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마디로 진득하게 앉아서 읽고 있는 것보다는 대강 보려면 그렇게 긴 글보다는 짧게 짧게 사진과 함께 있는 글들이 더 잘 읽히고 - 이건 뭐 당연하지만 - 지금 사람들에게 잘 맞는 것이다. 이러다보니 깊게 생각하고 한 개인의 제대로 된 생각을 읽고 감탄하고 부러워하기 보다는 즉각적으로 반응할 수 있는 것에만 보고 읽으면서 생각한다고 하짐나 정작 생각을 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생각을 하며 살고 있다고 믿지만 실제로 생각이라는 것을 하며 살고 있는 사람은 드물다. 이런 것을 우연히 떠올랐다. 생각을 한다면 도저히 저지르지 않을 행동을 한다. 생각이라는 것에도 다양한 구분이 있겠지만 여기서 말하는 생각은 어떻게 보면 삶에 대한 인생에 대한 세상에 대한 철학과 맞닿아 있다. 돈을 벌기 위한 고민이나 점심에 무엇을 먹을까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다.

 

갈수록 사람들은 똑똑해지고 아는 것이 많아지고 있지만 정작 생각을 하며 사는 사람들은 예전이나 다를 바가 없거나 더 적어지고 있다. 실제로 딱히 생각을 하지 않으면서 산다고 어려운 점은 없다. 나도 안하고 너도 안하니 별 무리가 없는 것이다. 과연, 우리가 조선시대 사람들에 비해 아는 것이 많다고 그들에 비해 지혜롭고 똑같은 상황을 잘 헤쳐나갈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든다.

 

여러 연구에서도 컴퓨터를 통해 도움을 얻으면서 과제를 수행한 팀과 아무런 힌트도 없이 과제를 수행한 팀을 비교하면 초기에는 힌트를 얻는 팀이 앞서가지만 서서히 그 차이는 좁혀지고 결국에는 힌트를 얻지 못한 팀이 이긴다고 한다. 특히 이 팀을 며칠 후에 다른 과제를 똑같이 수행하게 했을 때 힌트도 없이 했던 팀이 훨씬 더 훌륭한 결과를 보여줬다고 한다. 공원에서 산책을 한 팀과 복잡한 도시의 도로를 걷게 한 팀이 수행한 결과에서도 전자가 훨씬 뛰어났다고 한다.

 

인터넷을 통해 사람들이 똑똑해지고 있으나 오히려 생각하지 않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는데 그러다 보니 우습지도 않게 상당히 많은 부분에서 책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한다. 그러면서 인터넷을 멀리하라는 이야기보다는 책을 많이 읽으라고 하는 느낌이 들었다. 어차피 현실에서 인터넷을 제외하고 살아갈 수 있는 시대는 아니다. 그렇다면 그 대안으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중에 가장 좋은 것은 책을 읽는것이라 본다. 인터넷에 비해 상대적으로 볼 때 더 집중하고 몰입해서 볼 수 있는 매체(?)가 바로 책이다.

 

나라고 별 수는 없다. 인터넷을 통해 똑똑해 지고 있는지는 몰라도 전혀 생각하지 않고 남의 생각을 내 생각이라며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전혀 알지 못하면서 알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 있는지도 모른다. 읽지도 않았으면서 읽은 것처럼 행동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도 착각하고 살지만 상대방도 눈치채지 못하는 세상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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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2012년 12월 21일 이후를 예언하다
장세계 지음 / 물병자리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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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라는 장르는 현재 예술적인 영역과 오락적인 영역으로 나눠 볼 수 있지만 영화 자체는 오락적인 부분으로 출발을 했다. 영화가 어느 순간부터 예술로 승화가 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영화가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이나 살아갈 모습, 살아가고 싶은 모습등을 그려내며 점점 보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갈수록 우리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예술의 경지까지 이르게 되었다고 본다.

 

여전히 보고 즐기는 것을 그치는 영화도 있지만 단순히 수동적으로 보여지는 화면을 보며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화를 통해 숨겨진 의미를 찾아내고 감독이 정말로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것을 찾으려 하게 되었다.

 

특히, 영화는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감독이 보여주고 싶은 화면만 볼 수 있는 장르다. 대부분의 예술이 그렇다. 현실과 다른 것이 바로 현실은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볼 수도 있고 보고 싶지 않아도 어쩔 수 없이 보게 되지만 영화는 다른 화면을 보고 싶다고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감독이 보여주는 화면을 통해 그 의미나 재미를 추구하게 된다. 

 

이러한 이유로 여러 철학자들도 영화를 통해 자신의 철학에 대한 주장을 펼치거나 심리학자도 그렇고 다양한 사람들이 영화를 통해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빗대어 말한다. 그 어떤 장르보다 영화는 사람들이 보기에 편하고 쉽게 구성 되어 있기 때문이다.  단 2시간이라는 시간동안 보여지는 화면을 통해 모든 것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저자는 그러한 영화를 통해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한다. 단순하게 본인이 하고 싶은 주장을 저술했다면 조금은 심심하고 집중하기 힘들었을텐데 우리가 이름만 들으면 알 수 있는 영화를 통해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전달하니 꽤 어려운 내용인 듯 싶은데도 머리속에 잘 들어온다.

 

'인셉션'이라는 영화로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들고 인류의 종말에 대해 그린 여러 영화를 소개하며 인류의 미래에 대해 걱정을 한 후에 '매트릭스'를 통해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을 초월하여 각자 자신이 하나의 우주로써 살아가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이런 이야기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은 영화를 기본 골격으로 한 후에 철학, 종교, 물리, 자연등 우리 인간이 살아가며 의문을 품게 되는 다양한 문제에 대해 설명을 한다. 당연히 정답이 없는 소개이고 주장이지만 저자의 이야기는 상당히 흥미를 준다.

 

현실을 살고 있는 우리가 실제로는 꿈속에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인셉션'에서 킥이라는 기술을 통해 현실로 돌아가는 것처럼 우리들도 죽음이라는 '킥'을 통해 진정한 현실로 돌아 갈 수 있다는 것이다. 1차원 세계는 2차원 세계사람이 꾸는 꿈이고 이런 식으로 10차원까지 갈 때 여러 차원은 '킥'이라는 기술을 통해 벗어날 수 있고 뫼비우스의 띠처럼 무한반복된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여러 종교와 물리학과 철학에서 설명하는 내용을 저자만의 방법을 통해 전개한다. 사실, 이와 비슷한 허영만의 만화도 있는 것으로 기억하는데 제목은 기억나지 않는다. 결국 모든 철학과 종교의 주제중에 하나는 바로 '인간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이다.

 

이러한 주제에 대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고 - 나는 이 부류이다 - 극히 일부의 사람들은 생각을 통해 이 부분을 해결하거나 체념하거나 포기하거나 적응하여 살아간다. 이러한 주제는 발전과 발전을 거듭하여 최근에는 설계자라는 개념이 등장하여 이 땅을 설계한 존재가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그리하여 최근에는 '프로메타우스'라는 영화에서도 이 설계자가 등장하기에 이른다. 당연히 이 개념은 '매트릭스'에서 이미 나와 있다.

 

책을 읽으며 어떤 부분에서는 '뭐라고 하니?'하고 읽은 부분도 있고 어떤 부분은 저자가 참 이런 저런 고민과 철학을 많이 했다는 느낌도 든다. 그런 한편으로는 주제가 주제이다 보니 범 세계적이고 우주적으로 이야기를 하는 와중에 한국인으로써의 민족적이고 국가적인 이야기를 하는 부분에서는 좀 의아하게 생각하기도 했다.

 

이 책을 굳이 따지자면 인간에 대한 탐구를 하는 철학책으로 볼 수 있는데 다행히도 영화와 관련되어 이야기를 하기 때문에 부담이 들하다. 철학적인 이야기만 한다면 지루하게 흐를 수 있는데 이미 익숙하고 잘 알려져 있는 영화에 나오는 내용과 그 의미를 갖고 철학적인 탐구를 하다보니 저절로 집중도와 몰입도가 높아지는 것을 느낀다.

 

철학책의 가장 큰 단점(??)은 잘 읽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글을 읽으면서도 소화가 안 되고 분명히 한글인데도 영어라고 느껴지는 경우가 많은데 이 책은 쉽게 읽을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다. 그렇다고 내용이 부실하지는 않다. 부담없이 가볍게 읽을 수 있을 정도는 아니라도 역설적으로 부담없이 읽을 수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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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모든 행복
레오 보만스 엮음, 노지양 옮김, 서은국 감수 / 흐름출판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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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아마도 현대 사회가 발전하면서 더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게 되었고 많은 철학자들과 지식층에서 연구하는 주제가 아닐까 한다. 심지어 정부 단체에서도 이 주제에 대해서 연구한다고 알고 있다. 그만큼 현대 사회는 행복이라는 보이지 않은 신기루(???)를 쫓고 있다.

 

행복에 대해서는 각자 갖고 있는 생각들이 조금씩 다 다르다고 보인다. 각자 자신이 갖고 있는 경험과 철학에 따라서 자신에 생각하는 행복이 다르고 '행복하다고 느끼는 환경이나 상태'가 다양하다. 획일적으로 이러한 상태가 바로 행복이라고 정의를 내린다면 그것 자체가 불행이라고 할 수 있다. 동일한 감정을 공유하면서 똑같이 행복한 순간이라고 추억할 수 있지만 누군가에는 그 순간이 결코 그렇게 추억되지 않을 수도 있다.

 

행복이라는 것은 또한 무척이나 상대적이다. 많은 사람들이 행복해 하고 싶다고 이야기를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행복한 것은 아니다. 행복을 추구하지만 행동은 전혀 모순되게 하는 경우도 많다. 이처럼 행복이라는 감정 내지 순간 내지 상황은 뜬구름과도 같은 실체다.

 

개인적으로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행복은 상대적으로 보인다. 대부분 사람들에게 행복은 자신 스스로에게 집중을 하는 것보다는 타인과의 비교를 통해 오는 경우가 많아 보인다. 유명한 사람이 엄청난 돈을 벌었다고 그들을 부러워하며 나와 비교하고 슬퍼하거나 불행해 하지는 않지만 내가 지금 만나고 있는 아주 평범한 주변 사람들과의 비교에서 행복과 불행을 느낀다.

 

회사에서 만나 동료가 이번주에 제주도 여행을 연인과 다녀온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을 때 그 동료와 비교를 통해 불행하다고 느낀다. 많은 심리학자들이 연구를 통해 300만원의 월급을 받는 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같이 근무하고 있는 동료의 월급과 비교하고 주변에 만나는 지인이나 친구들과의 비교를 통해 받고 있는 월급의 만족도가 달라진다고 한다.

 

내가 아무리 1,000만원의 월급을 받고 있어도 우연히 만나 친구가 사업을 통해 월 5,000만원을 벌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면 순간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하는 자괴감에서 출발해서 부럽다는 생각과 순간 자신이 초라하다는 느낌을 갖게 되는 것이 바로 우리다.

 

'세상 모든 행복'에서는 금전적 문제는 행복을 재는 중요한 수단은 되지 못한다고 한다. 일정 수준까지는 돈이 행복을 판단하는 중요한 수단이지만 일정 수준을 넘어가면 그때부터는 돈이라 불리우는 경제적 자유는 행복에 있어 중요하지 않다고 한다. 최소한의 먹고 살 정도의 금전을 이야기하는 것이라 본다. 실제로 여행을 가고 무엇인가 취미생활을 하는 것은 자기 삶의 여유가 없어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이지 실제로 돈이 없어 못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 아닌것 처럼 말이다.

 

문제는 이러한 남과의 비교를 통한 행복은 너무 힘들다는 것이다. 행복해지고자 나보다 못한 사람과 늘 비교를 하게 되면 그 순간 행복할 수는 있지만 조금씩 조금씩 자신의 영혼을 갉아먹을 수 있다고 본다. 그렇다고 나보다 잘하는 사람과의 비교는 늘 열등한 자기비하를 통해 불행하다고 여기며 힘든 삶을 살 수가 있다.

 

이러한 행복이 결코 혼자 생기지 않는다. 아무도 살지 않는 무인도에서 살고 있다면 남과의 비교는 생기지 않을테니 자신만의 행복을 만들기 위해 노력을 하겠지만 그러한 행복은 지속되지 못하고 행복이라기 보다는 생존을 위한 투쟁에 더 가깝지 않을까 싶다. 실제로 행복은 타인과의 - 가족도 타인이다 - 교류와 연합같은 더불어 사는 삶에서 온다.

 

행복이란 대단하고 거창한 곳에서 오지 않는다. 소소한 일상에서 순간 순간 느끼는 감정을 통해서 올 때도 있고 사랑하는 사람과의 공통된 경험을 통해서도 온다. 대부분 미혼보다는 기혼이 더 행복에 대한 만족감이 크다고 한다. 서로 웬수라고 다투기도 하지만 역시 무엇인가 함께 공유하는 식구가 있다는 것은 그만큼 행복한 일임에는 틀림이 없다.

 

유감스럽게도 내성적인 사람보다는 외향적인 사람이, 부정적인 생각은 하는 사람보다는 긍정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이 보다 행복한 삶을 살고 있고, 더 유감스럽게도 어느정도는 이러한 것들이 유전적인 요소에 근거한다고 하지만 이 내용을 쓴 사람도 자신은 내성적인 사람이지만 너무 행복하다는 표현을 한다. 그만큼 행복은 본인의 의지와 삶에 대한 태도가 더 중요하다.

 

책은 무려 100명이나 되는 각 국가의 행복학에 대해 연구하는 석학이 각자 자신의 나라와 자신이 느끼고 연구한 행복에 대해 설명을 해 준다. 어떤 의견은 약간 동의를 하기 힘든 것도 있었고 각 국가에 따라 정의하는 행복는 아주 약간은 다르다는 것도 보이지만 어느 나라, 어느 민족이든 - 우리에게는 친숙하지 않은 아프리카인이나 이슬람 사람들을 포함하여 - 그들이 느끼는 행복은 거의 비슷하다는 것을 알게된다.

 

물론, 그렇다고 절대적인 행복은 또한 없다. 어떤 상황이나 감정에도 변하지 않을 절대적인 행복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행복이 더 소중한 것이다. 늘 행복하다면 그 사람은 이상한것이다. 힘든 시간도 있고 괴로운 시간도 있고 불행한 사건도 겪으면서 행복의 소중함을 더 느끼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한다.

 

행복지고 싶어 경제적 자유를 갈구한다는 것은 틀린 말은 아니고 자본주의 사회를 사는 사람으로 어쩌면 당연한 일이지만 우리가 지금 이 시간, 이 순간에만 경험할 수 있는 소중한 시간들이 있다. 내가 나이 20살 일때만 경험할 수 있는 것들이 있고, 두 아이의 부모로써 그 아이들이 2살이라면 2살, 10살이라면 10살에 경험할 수 있는 시간들이 있는데 그런 것들을 오로지 돈을 벌면 해결된다는 마음으로 많은 것을 희생하는 것은 행복도 아니고 행복을 위해 가는 당연한 과정이 아니라 잘못된 길에 들어선 것이다.

 

절박한 심정으로 모든 것보다 우선순위로 두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그것 자체가 행복이기에 무엇이라 할 수 없지만 그렇지 않은 - 말로만 절박하다고 하는 - 대다수의 사람들은 조화를 이뤄야만 하지 않을까 한다. 당연히 그러기 위해서는 건강해야 한다. 행복해지기 위해서 건강해야 하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 적당한 운동을 해야만 한다. 실제로 많은 연구결과에서 운동을 할 때 나오는 호르몬이 우리를 행복으로 이끌어준다고 한다.

 

아마도, 이 책은 햇살이 내리쬐는 어느 한적한 오솔길 옆에 있는 숲 속 오두막이나 벤치에서 느긋하게 모든 기계를 없애고 오로지 이 책 달랑 한 권만 들고 앉거나 누워서 찬찬히 페이지를 한 장씩 한 장씩 넘기며 읽게 된다면 거창하지는 않아도 아주 소소한 일상에서 맛 볼수 있는 행복을 만끽하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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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살 것인가 - 삶의 철학자 몽테뉴에게 인생을 묻다
사라 베이크웰 지음, 김유신 옮김 / 책읽는수요일 / 2012년 1월
평점 :
품절


고백하자면 아마도 내가 유일하게 다 읽지 않고 리뷰를 올리는 책 목록에 올라가게 될 것으로 보인다. 향후에도 이런 일이 또 벌어질 것인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거의 드물것이라 본다. 3월 중순에 욕심을 부려 한 번에 3개의 도서관에서 한도까지 다 빌린 것은 괜찮았는데 빌린 책들의 두께나 내용이 만만치 않아 쉽지 않아 보였지만 그래도 도전한다는 생각에 했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책에 집중할 수 있는 여건이 아니기도 했고 여러가지로 신경 써야 할 것이 있다 보니 책을 집중하지 못하고 하다보니 그만 500페이지 되는 책에서 400페이지 정도까지만 읽게 되었다. 그럼에도 대여한 책이라 반납할 수 밖에 없었다. 내 성격상 연체 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어 후일을 기약하며 반납하기로 했다.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보는 최대의 장점이자 단점이 바로 이렇게 기한이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내 의지로 얼마든지 기간을 변경할 수 있지만 - 연체를 통해 - 그것은 말이 안된다. 더구나, 이 책의 제목은 '어떻게 살 것인가'이다. 누구도 지켜보지 않고 관심도 두지 않을테지만 스스로 세운 원칙을 지키며 살아 갈 것인가, 나만 편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내 맘대로 생활하며 원칙 따위는 없다는 생활을 할 것인가는 내가 택할 수 있는 내 고유의 영역이다. 누구도 함부로 간섭내지 충고는 할 수 있어도 침입할 수도 통제할 수도 없다.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과연 몇 명이나 될까라는 의구심이 든다. 100명 중에 10명이 될까? 아니면 다들 개똥철학이라는 것을 통해 자신만의 방법에 대해 이야기할 것인지도 궁금하다. 스스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질문에 대답을 할 수 없다는 것을 밝힌다. 아직까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답을 갖고 있지 않다. 아니, 평생을 못할 것 같다.

 

너무 어려운 문제이고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이다. 잘못하면 스스로 함정에 빠질 수 있는 질문이다. 나는 이렇게 살 것이라고 이야기를 하고 그 대답과는 전혀 상관없는 삶을 살게 된다면 스스로 엄청난 자괴감에 빠져 허우적 거릴테고 어떻게 살 겠다고 다짐을 하고 살아가다가 늘 반대되는 태도나 철학이나 가치관이 왔을 때 혼돈에 빠져 허우적 걸릴 것 같다.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자신만의 나름대로 답이 있다면 그 사람은 어느 정도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자신만의 원칙과 중심이 잡혀 있는 인물이라 칭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한다. 어떤 선택의 질문에 봉착했을 때 평소 이러한 질문을 갖고 고민을 한 사람에게 그 선택은 평소 자신의 고민에 대한 답이 되는 과정이 될 수 있다. 평생을 살면서 끊임없는 선택이라는 기로에 서 있을 때마다 우리는 올바른 판단을 내리고자 고민하고 또 고민한다.

 

나중에 후회를 할 수도 있고, 잘했다 칭찬할 수 도 있는 결정을 내리겠지만 그런 선택에는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 그런 일관성이 나라는 사람을 만들고 나라는 사람의 인격체가 형성되고 도와주고 사람들부터 나라는 인물에 대한 이미지를 심어준다. 최소한 사람들에게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평판은 들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주위 사람들과 상관없이 나라는 인물에만 초점을 맞춰 잘 살면 그만이겠지만 초원에서 혼자 살고 있는 것도 아니고 복잡다단한 사회에서 나 혼자의 삶은 무의미하고 있을 수도 없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로부터의 믿을 수 있다는 평판은 내가 눈을 감고 이 세상에서 숨을 쉬고 있는 나라는 존재가 사라질 때 그나마 뿌듯하지 않을까 한다.

 

어느 책인가 영화에서 나온 대사라고 하는데 사람은 그 사람의 선택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한다. 이 선택은 내가 어떻게 살 것인가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내가 어떻게 살 것인지는 내가 하는 선택에 의해 사람들에게 보여지고 내 자신이 알게 된다. 물론, 여기서 선택이라는 표현을 썼다고 흑백논리에 빠지면 안된다. 이것은 내 편이 아니면 적이라는 말과 상통될 수 있기 때문에 그나마 현명한 선택을 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나름 대략적으로라도 생각을 하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책이 어떤 책인지에 대한 아무런 정보도 갖고 있지 않았다. 책 제목이 너무 훌륭해서 갖고 다니면 뽐나고 어디 지하철에서도 '나 이런 책 읽는다~~'라고 사람들에게 보일 수 있는 제목과 표지라는 점도 어느 정도 솔직하게 작용을 했고 책 내부를 얼핏 보니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다양한 철학자들의 생각을 소개하는 책으로 보았다. 쉽게 빨리 읽기는 힘들겠지만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최근에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문제에 나도 모르게 고민을 하고 있던게 원인이 될지도 모르겠다.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과는 다르지 않겠지만 이제부터 어떤 삶을 이 세상에서 살아 갈 것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과 당장 현실에 닥친 여러가지 산적한 문제들이 더욱 이 책을 선택하게 된 이유가 될 듯 하다.

 

몽테뉴라는 인물에 대해선 알고 있는 것은 없다. 그저 그가 철학자라는 사실이나 몇 가지 표피적이고 원론적으로 교과서에나 나오는 소개 정도만 알고 있었다. '어떻게 살 것인가'는 몽테뉴의 삶과 사고와 철학에 대해 소개를 하며 당시를 살던 사람들의 사고를 몽테뉴적인 관점에서 설명하고 그 이후 사상가들이 몽테뉴를 어떤 식으로 바라보고 승계내지 배척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소개되는 책이였다.

 

한마디로 고상한 철학책이라 할 수 있는데 의외로 재미가 있었다. 아무리 훌륭한 책이라고 해도 내가 교과서를 통해 입시를 보는 것도 아닌데 억지로 읽어야 할 이유는 없기 때문에 - 일단 읽기로 선택한 책은 무슨 일이 있어도 끝까지 읽어야 한다는 내 원칙이 있기는 하지만 - 재미가 없다면 중간에 포기할 수도 있지만 책이 쉽게 읽히지 않고 페이지를 마구 마구 넘기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책이지만 한 페이지 한 페이지 넘기는 재미가 그래도 솔찮았다.

 

우리가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몽테뉴라는 한 인물의 사상을 통해 이야기를 해 주지만 몽테뉴 역시 많은 사람들과 교류를 통해 본인이 받아 들인것과 거부한 것과 보태서 생각한 것을 포함하여 이 책의 저자가 쓴 몽테뉴라는 외피를 입어 자신의 생각을 함께 버무려 이야기한다. 솔직히 내가 생각하는 그 많은 것들이 온전하게 내 생각이라 여길 수 있을까한다. 내가 바라보는 시선들도 온전히 전적으로 내 스스로 생각하고 깨달아 보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주입한 사람들의 많은 사상들이 나도 모르게 내 머리속에 자리잡고 내 스스로 내것이라 착각하고 바라보는 것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한 부분들을 걸러 보는 것도 좋겠지만 꼭 그럴 필요는 또한 없을 것이다. 내 머리속에 있는 다양한 사상들은 나만 받아들이고 갖고 있고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다양한 구성원들이 같이 함께 공유하고 인지하고 승낙한 것들이라 그런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이 편하기 때문이다. 무임승차만큼 편하고 좋은 것은 없는 것처럼 굳이 혼자 잘 나거나 세상을 다르게 바라본다고 특별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다만, 너무 자신의 시선 없이 타인이 주입한 시선만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면 극단적으로 이야기해서 우리가 인터넷 게임에서 조정하는 캐릭터이자 아바타와 다를바 없는 존재가 되기 때문에 그정도를 벗어나기 위한 자신만의 시선을 갖고 있을 필요가 있지 않을까한다.

 

어차피 이런 종류의 책은 책의 내용이 어떻고 책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무엇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 책을 통해 내가 얻고자 하는 것이나 책을 통해 내가 깨닫거나 알게 된 사실에 대해 고민하고 또 고민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이렇게 거창하게 썼지만 이 책을 통해 딱히 더 많이 알게 되거나 깨닫게 되거나 얻게된 새로운 시선은 없다고 스스로 생각한다. 이유는 없다. 몽테뉴라는 인물이 이후 사람들에게 많은 영향력을 끼치고 인간에 대해 다시 생각하고 인간이 인간인 이유에 대해 고민하게 만들고 그에 대한 사상에 반론을 하고 칭송을 하게 만든 그의 '에세'라는 책이 결론적으로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읽기는 했어도 지금 현재를 살고 있는 나는 워낙 다양한 인문주의 사상에 물 들어 있고 또는 배척하고 살아가고 있어 어떤 영향을 이 책을 통해 받았는지 모르겠다.

 

철학책을 읽고 리뷰를 써서 그런지 내용이 무척이나 현학적인 듯 싶기도 하고 무슨 말을 이리 열심히 주저리 주저리 떠들었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해 스스로 결정을 완벽하게 내리지 못했고 평생 내리지 못하겠지만 책 초반에 나온 내용은 내가 살아가려고 한 것과 비슷하다. '느리게 살고 망각하고 사는 것' 이것이 바로 내가 추구하는 삶과 조금은 비슷하다. 잠도 못잘 정도로 열심히 작업내지 무엇인가에 골돌히 골몰해서 살아보기 싶기도 하지만 그런 적이 없었고 그런 일을 만날 수 있는 날을 알게 모르게 기다리는지도 모르겠지만 대체적으로 내 삶의 스타일은 느리게이다. 나 자신은 상당히 빠르고 민첩한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망각이라는 것은 삶을 편하게 만든다. 내가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하고 불리한 것은 망각할 수 있다면 말이다. 그리하여 책 초반에 나온 '느리게 살고 망각하고 살기'라는 표현이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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