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 최강의 철학 입문 - 최강의 진리를 향한 철학 격투
야무차 지음, 한태준 옮김 / 동녘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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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은 쉽지는 않다. 어렵다. 한편으로 철학이 뜬금없이 세상에 나온 것이 결코 아니다. 다 이유가 있어 해당 사상이 세상에 나왔다. 무엇이든지 과거의 것을 계승하고 발전한다. 그도 아니면 부정하고 혁파한다. 이런 과정을 거쳐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알고 있다. 솔직히 철학이 어려운 것이 아닌 관심이 없는거다. 과거에 나왔던 철학 대부분을 막상 보면 전혀 모르는 개념이 아니다. 다 알고 있다. 우리가 살아가며 전부 현대에서는 익숙한 개념이다.


그런 것들이 철학이라는 걸 깨닫지 못하고 살아갈 뿐이다. 그만큼 철학은 우리 삶에 녹아있다. 그 모든 것들이 나타나고 깨부셔지고 다시 재 탄생하며 우리가 살아가는 일부가 이미 되어있다. 그런 면에서 어떻게 보면 굳이 해당 철학자가 쓴 원문을 읽을 필요가 없다. 보다 깊숙한 이해와 깨달음을 얻기위해 필요하겠지만 쓸데없는 것 까지 알기보다는 핵심만 알아도 된다. 이미 그런 개념은 시대를 지나며 낡은 것이 되기도 했다.


이런 말을 할 정도로 철학을 모르기에 조심스럽기는 하다. 그런 면에서 특정 철학자에 대한 사상과 개념을 물고 늘어지기보다는 전체적으로 어떻게 시대에 따라 철학자가 나타났고 사상을 펼쳤는지 아는 것이 더 좋다. 시대에 따라 계속 이전 시대에 나온 철학에 영향받은 철학자와 개념을 저절로 배우게 된다. 모든 것들이 뜬금없이 세상에 나온 것은 아니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표현은 그래서 유효하다. 현대에 와서 새로운 철학 개념이 드문 이유가 아닐까도 한다.


인문이라는 개념이 다소 웃긴다. 인문을 알아야 한다고 하지만 반대로 볼 때 나라는 사람을 제대로 알아도 충분히 인문에 대해 깨닫게 된다. 인문이란 인간에 대해 알아가는 것이다. 나는 개인으로 존재하지만 사회 구성원으로도 존재한다. 뿐만 아니라 어느 곳에 있고, 어떤 위치에 있느냐에 따라, 달리 불려진다. 거창하게 인문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이 오히려 인간을 잘 모를 수도 있다. 그가 말하는 인간은 현실에 없는 인간이 아닌 이상사회에 속한 인간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최근에 이렇게 인문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나오는 사람이 많다. 그들 대부분은 실제로 옆 집 아줌마, 아저씨보다 오히려 인간에 대해 더 모르면서 인문이라는 단어를 쓰는 경우가 많다. 인문은 그저 우리가 살아가는 지극히 평범한 삶이다. 굳이 무게잡고 힘을 줄 필요가 없다. 내가 생각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이 다 철학적이다. 이를 생각없이 했느냐, 의미를 부여하고 사람들에게 알리느냐 차이다. 너무 힘을 주고 있는 듯해서 좀 안타까울 때도 있다.

하도 많이 들어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리스 등은 잘 안다. 대부분 여기까지가 자신이 잘 알고 있는 철학자라 여긴다. 여기서 최근에 각광받고 있는 니체가 유명하다. 정작 니체가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 자세히 알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그건 니체가 이야기한 초인이 되라는 한 가지만 알아도 무방하기 때문이다. 이 책 <사상최강의 철학입문>은 시대순에 따라 철학이야기를 들려준다. 꼭 시대순은 아니라더라도 이런 방법이 좋다.


모든 것을 전부 하나씩 다 익히고 배우기는 힘들다. 이럴 때 이 책처럼 철학 전체적인 걸 알려주는 걸 보는 것이 도움된다. 간략하게 각 철학자가 어떤 주장을 했는지 배운다. 무엇때문에 그런 주장을 했는지 알면 해당 철학에 대한 개념을 이해하는데 편하다. 거기에 그 전에 어떤 철학자가 무슨 주장을 했는지 알면 더욱 이해가 높아진다. 그전 철학자의 철학의 계승했거나 부정했기 때문이다. 이를 알고 그 다음 철학이 나온 배경이 자연스럽게 터득된다.


깊게 알지는 못하겠지만 이런 식으로도 전반적인 철학의 변천사를 알면 이해도가 높아진다. 여러 철학 중에 최근에는 언어학이 가장 흥미가 생긴다. 책에 나온 개념으로 설명하면 돌이 있다. 여러 종류의 돌이 있다. 우리는 굳이 구분하지 않고 돌이라고 부른다. 각자 다른 형태에 따라 달리 부를 수 있지만 의미 없기 때문이다. 누군가 그 중에 하나에게 이름을 정해주고 아껴준다면 그건 의미가 되고 돌이지만 다른 존재가 된다.


반면에 과일은 다양한 이름을 갖고 있다. 사과, 배, 수박 등으로 불린다. 이건 그만큼 우리에게 필요한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차이는 우리가 대상을 바라보는 것에 따라 다른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각자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여기기에 모든 사람은 각자 이름이 있고 존재가 부여된다. 누군가 우리를 살육하려는 외계인이 있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심지어 동물과의 구분도 필요없이 그저 생물체로 불릴 수 있다.


국가마다 발달한 단어가 있다. 우리에게 있는 단어가 외국에는 없는 단어도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환경에서 그만큼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고 다양한 목적으로 쓰임새가 있기에 다양한 이름이 있다. 다른 국가에서 해당 물건은 별 소용이 없으니 단어 자체가 없을 가능성이 크다. 한국에서 삼겹살 등이 많이 쓰이지만 외국은 중요도가 예전에는 떨어졌던 것처럼 말이다. 어떤 부위는 외국에서 쓰지 않아 한국인에게 공짜로 주기도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철학은 어렵지만 무엇때문에 그런 철학이 나왔는지 알게 되면 의외로 재미있다. 갑자기 뚝하고 어느 날 나온 것이 아니다. 인간은 그런 철학과 함께 사상적으로 성장했다. 계속 변화하며 인간에 대해, 인류에 대해, 세상에 대해 고민하면서 지금까지 발전했다. 지금은 철학은 과학으로 대신하고 있다. 증명하지 않으면 안 되는 쪽으로 말이다. 그 뿌리인 철학은 그런 의미에서 깊게는 몰라도 이런 책으로 아는 것도 의미가 있다.


까칠한 핑크팬더의 한 마디 : 더 많은 철학자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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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논쟁! 철학배틀 - 토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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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논쟁! 철학 배틀
하타케야마 소우 지음, 이와모토 다쓰로 그림, 김경원 옮김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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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은 재미없다고 생각했다. 무엇인가 고리타분하고 어딘지 낡은 것이라는 느낌이 강했다. 철학이라는 단어와 함께 현대보다는 과거가 자연스럽게 떠오르며 그렇게 된다. 시간이 좀 더 굳이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다양한 철학 사조를 읽게 되었다. 제대로 공부 차원에서 읽은 적은 없지만 이런 저런 책을 읽다보니 조금씩 어떤 것인지 정도는 알게 되었다. 워낙 다양한 철학사조가 있는데 이 부분도 잘 보면 결국에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


특정 철학은 해당 시기에 굳이 이야기하면 유행했다. 역사에 따라 인간은 계속 진화했다. 그에 따라 생각하는 범위가 달라지고 폭도 더 넓어졌다. 어제에 알았던 내용을 오늘은 부정하기도 한다. 그건 부정이라기보다는 새로운 시대에 걸맞는 사상이 나타나며 이에 따라 변화한 것이라는 표현이 맞다. 현대에 들어와 철학은 내 느낌으로 새로운 것은 없다. 지금은 철학이라는 큰 줄기는 여전하지만 이를 들어가는 방법이 철학이 아닌듯하다.


오히려 과학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모든 걸 전부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는 없지만 될 수 있는 과학적인 논증을 중요하게 여긴다. 여기에 뇌과학이나 심리학등이 자리를 대신한다. 이 부분은 단순히 과거에 머리로만 생각하고 한 단계 더 나아가 수학적으로 증명하는 정도였다. 이제는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과학과 접목되어 인간에 대한 탐구를 하고 세상과 세계에 대한 시선을 얻는 것으로 보인다. 철학은 그런 면에서 꼭 고리타분한 것은 아니다.


여전히 어렵고 힘들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실생활과 잘 접목하면 무척 재미있다. 이게 정답이 없는 경우가 많다. 어떤 논제가 던져진다고 해서 그에 대한 정답을 찾는 과정은 분명히 아니다. 각자 위대한 사상가들은 자신의 사상에 따른 정답을 내리겠지만 현대에 들어와 보면 그건 아니다. 각자 생각의 차이다. 더구나 한 쪽면만 바라보는 것이 아닌 다양한 면을 바라볼 수 있다는 측면에서 철학이 재미있다. 똑같은 사건을 두고 어떤 식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다양한 의견이 도출된다는 점이 특히 그렇다.


이 책인 <대논쟁! 철학배틀>은 처음에 얼핏 보고서는 무슨 대학생들의 어떤 논쟁으로 알았다. 막상 책을 펼쳐 놓고 보니 다양한 철학자들이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신의 사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보여준다. 정답은 없겠지만 읽으면서 이런 면도 볼 수 있고, 저런 면도 생각할 수 있는 꺼리를 던져준다. 화두 자체가 흥미롭고 재미있다. 어차피 정답 자체가 나올 수 없는 걸 갖고 이야기를 하니 더 흥미롭게 느껴지기도 했다.

여러 철학자들이 등장해서 자신의 주장을 펼치는데 이에 대한 질문이 무척 논쟁적이며 정답이 없다. '빈부격차는 어디까지 허용될까' 살인은 절대악일까' 등이다. 살인은 무조건 절대 악일 수는 없다. 다양한 사례에 따라 살인이 정당화 될 수도 있다. 살인 자체는 분명히 절대악일 수 있을까에 대한 질문은 흥미롭다. 게다가 한 가지 더 생각하면 살인한 사람은 정말로 심적으로 힘들어할까. 여러 문학작품등에서 나온 것처럼 말이다. 개인적으로 꼭 그렇진 않다고 생각된다.


우리가 어떤 사건을 경험했을 때 이에 대한 트라우마로 힘들어 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저 작은 생채기라 여기고 넘기는 사람도 있다. 마음 먹은대로 된다는 이야기는 고리타분하지만 다소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사람마다 케이스 바이 케이스긴 하겠지만. 인간은 개인이지만 사회 구성원 중 한 명이다. 개인에 대한 자유는 기본이겠지만 이는 사회 구성원으로 살아가는 데 있어 어느 정도까지 제약을 하느냐도 정답은 없다. 이 부분은 각자 살아온 삶이나 사상에 따라 달라진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도 과연 진실이고 사실인가 부분도 있다. 책에 나온 1+1=2라는 것은 진리일까. 또는 이걸 우리는 선천적으로 알고 있던 것일까. 후천적으로 배워 알게 된 것일까 .저게 정답이라는 사실은 과연 진실일까. 왜 꼭 1+1=2여야 하는 것일까. 다른 숫자가 나올 수는 없는 것일까. 이런 식으로 끝없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질문은 정답은 없지만 내 생각의 확장을 불러일으킨다. 생각의 확장은 생각의 유연성을 길러준다. 특정 사상에 함몰되지 않게 해 준다.


책에는 수많은 철학자가 등장한다. 이들은 각자 자신의 철학을 갖고 특정 주제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런 것은 저자가 해당 철학을 정확히 알고 있어야 가능한 방법이 아닐까한다. 책 내용 자체가 어렵지도 않다. 쉽게 설명해준다. 이런 부분에 있어 저자가 얼마나 해당 철학에 대해 잘 알고 있는지 보여준다. 덕분에 책 내용을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었다. 물론 다양한 용어가 나와 익숙치 않을 때도 있지만 읽는데 불편함은 없었다.


차마 여러 철학자들이 직접 쓴 책을 읽을 엄두는 도저히 나지 않지만 이런 책을 읽으면 재미있다. 그만큼 깊이는 없다고 해야겠지만. 그럼에도 현대에 들어 꼭 해당 철학자들의 책을 통해 해당 철학을 익혀야 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그들이 주장하는 핵심적인 것만 잘 알아도 가능하다. 이런 것들을 통해 내가 생각하느냐가 오히려 핵심이 아닐까한다. 덕분에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을 한다면 그것만으로도 족한 것이 아닐까한다. 덕분에 여러 생각을 하며 읽었던 시간이었다.


까칠한 핑크팬더의 한 마디 : 뭐 이리 여백이 많아.

친절한 핑크팬더의 한 마디 : 다양한 사상의 논쟁


함께 읽을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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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콘서트 - 어렵기도 쉽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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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만장자의 마지막 질문 - 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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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살 것인가 - 미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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곁에 두고 읽는 장자 곁에 두고 읽는 시리즈 2
김태관 지음 / 홍익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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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공자와 맹자는 주구장창 들먹이는 인물이다.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유명하고 다양한 사례와 어록이 회자된다. 장자는 '내가 나비인가, 나비가 나인가'라는 말이 유명한데 그 외에는 그다지 많이 알려지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다. 의외로 장자도 우리 주변에 늘 그 개념과 사고가 우리 주변에 가깝게 있다. 공자를 특정 특에 가둘 수 없는 것처럼 장자도 그럴 수 없다. 워낙 다양한 이야기를 했고 공자보다 더 유연한(?) 사고의 소유자다.


장자의 정확하고도 확실한 삶과 기록을 직접 읽어보지 않아 자신할 수 없지만 장자는 굳이 가지려 하지 않았다는 점이 가장 큰 사유가 아닐까한다. 공자가 직접 현실 정치에 참여해서 자신의 뜻을 펼치려 노력했지만 장자는 오히려 현실 정치를 멀리했다. 장자를 모시려 했지만 끝까지 수락은 커녕 면박을 줄 정도로 정치를 할 마음 자체를 품지 않았다. 이게 쉽지 않다. 누군가 나를 알아주고 함께 하고자 한다. 그것도 왕이. 거절도 거절이지만 자신도 모르게 뜻을 펼칠 수 있는 기회다.


지금까지 내 경우에 누군가 나에게 무엇인가 요청했을 때 거절한 적이 거의 없다. 내가 대단한 사람도 아닌데 기껏 생각해서 요청했는데 거절하는 것은 너무 우습다  생각해서. 물론 그 요청이라는 것이 거의 대부분 강의처럼 대단할 것은 없는 것이기는 했다. 그 외에 다른 요청을 받아 본 경험은 많지 않다. 어떤 자리를 맡아달라고 할 때 내가 아니다 싶으면 깔끔히 거절을 했다. 거절이 힘들어 일을 맡은 기간동안 일처리 한 후에는 미련없이 던져 버렸다.


<곁에 두고 읽는 장자>를 읽어보니 공자, 맹자를 비롯한 다양한 위인중에 장자가 나와 가장 맞는 인물이었다. 굳이 무엇을 얻으려하거나 가지려 하지 않는 편을 볼 때 그렇다. 내 경우에도 욕심이 있지만 억지로 무엇을 소유하려 노력하지는 않는다. 라고 나는 생각하지만 나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면 내가 나 자신을 잘 못 알고 있는 것이라 본다. 그 부분도 그렇지만 어떤 틀에 갇히려 하기 보다는 자유롭기를 원하는 점도 비슷하다.


규칙적으로 생활하는 편이다. 공무원 스타일이라고 이야기해도 될 정도인데 어디까지나 내가 정한 규칙이다. 남이 나에게 정해주는 규칙은 질색한다. 내가 이렇게 하고자 마음먹으면 그 안에서 정한 루틴으로 행동을 하지만 누군가 나에게 강요를 하면 나는 지키려 노력하지만 싫어한다. 고등학생 때 회사원이 되기 싫은 이유 중 하나가 양복입고 넥타이를 입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규율이 싫어서. 막상 넥타이와 양복을 입으니 오히려 신경 쓸 것이 없어 편했다는 점을 깨닫기도 했지만.

우물 안 개구리에게는 바다를 이야기할 수 없다. 한 곳에 갇혀 살기 때문이다. 여름 벌레에게는 얼음을 이야기할 수 없다. 시간의 제약을 받고 살기 때문이다. 마음이 굽은 선비에게는 도를 이야기할 수 없다. 한가지 가르침에 얽매여 살기 때문이다.

아무리 이야기해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전부라고 믿는 사람들도 있다.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고 더이상 알려하지 않는다. 우물 안 개구리가 아무리 하늘을 봐도 우물 밖에 펼쳐지는 세상을 알지 못한다. 여름 벌레가 깨닫고 알고 있는 것은 여름뿐이다. 실생활에서 이런 사람을 아주 많이 만난다. 경험해 보지 못하고 경험한 것처럼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다. 이들은 자신의 부족함을 전혀 모른다.


질그릇을 걸고 활쏘기 내기를 한다면, 질그릇은 흔한 물건이기 때문에 잘 맞힐 수 있다. 하지만 허리띠 고리를 걸고 내기를 하면, 귀한 것이기 때문에 맞치지 못할까 봐 마음이 켕긴다. 더구나 황금을 내기에 걸면, 눈이 침침해지고 손이 덜덜 떨린다. 활쏘기 기술은 똑같지만, 내기에 걸린 물건에 마음이 쏠렸기 때문이다. 밖의 물건에 마음이 기울면, 그 사람의 속은 졸렬해지게 마련이다.

평정심은 인간에게는 불가능하다. 아무리 노력하고 노력해도 결코 이룰 수 없는 경지다. 평소에 마음을 다스려야 하는 이유다. 특별한 경우에도 평소처럼 똑같이 행동할 때 우리는 그들을 존경하고 대단하게 바라본다. 스포츠 경기에서 큰 경기에서 위닝멘탈로 위기순간에도 침착하게 경기하는 선수를 큰 경기에 강하다고 한다. 처음 경험한 경기에서 그런 강심장 선수도 있고 자주 경험해서 이제 익숙한 선수도 있다. 어떤 경우든 보이는 현상이 아닌 내 내면을 다스리는 것이 스포츠를 비롯한 모든 상황에서 반드시 필요하다.


들보나 기둥은 성벽을 무너뜨리는 데는 유용하지만, 구멍을 막는 데는 소용이 없다. 쓰임이 다르기 때문이다. 천리마는 하루에 천 리를 달릴 수 있지만, 쥐를 잡는 데는 살쾡이만 못하다. 재주가 다르기 때문이다. 올빼미는 밤에 벼룩을 잡고 털끝까지도 헤아릴 수 있지만 낮에는 눈을 뜨고도 큰 산조차 보지 못한다. 본성이 다르기 때문이다.

밖에서 능력을 갖고 있는 남편이 집에서는 빨래도 설겆이도 청소도 도와주지 않고 가벼운 망차질도 못한다. 이런 남편은 아내에게 좋은 남편이 되지 못한다. 방법은 있다. 많은 돈을 벌어 집 안일을 전부 맡기면 된다. 아무리 하찮은 것일지라도 다 쓸모가 있다. 마찬가지로 쓸모없는 경험따위는 없다. 이런 경험이 무슨 도움이 될것인가라고 하지만 지나고나면 그 모든 경험은 전부 내것이 되어 자양분으로 역할하며 반드시 도움이 된다. 실패경험도 그걸 사장시키지 않고 다른 일을 할 때 반드시 도움이 된다. 모든 경험을 내가 어떻게 쓸모있게 만드느냐가 중요하다. 


<곁에 두고 읽는 장자>는 <보이는 것만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다> 개정판이라 조금 망설여졌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책 내용이 좋으니 개정판을 펴 냈을 것이다. 굳이 다시 개정판을 만들정도면 출판사에서도 내용이 좋은데 아쉽다고 느낀 것이라 본다. 차분하게 자기계발 서적으로 동기부여책을 읽는 것보다 이 책을 읽는 것이 더 좋을 수 있다. 단어는 정정해야겠다. 동기부여는 안 될 수 있다. 그보다는 방향을 설정하는 도움이 될 수 있다.



까칠한 핑크팬더의 한 마디 : 아무 편부터 읽어도 된다.

친절한 핑크팬더의 한 마디 : 장자는 옆에 있었다.



함께 읽을 책

http://blog.naver.com/ljb1202/2201859054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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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용 中庸 - 공존과 소통 그리고 인성을 세우는 진리
자사 원작, 심범섭 지음 / 평단(평단문화사)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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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려가 현실이 되었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읽고 있는 책의 대다수가 서양쪽에서 넘어왔다. 번역물은 거의 대부분 미국이나 유럽에서 넘어온 책이다. 일본이나 중국에서 넘어 와 번역된 책은 잘 읽지 않는다. 편견 아닌 편견이라 할 수 있는데 이상하게 책의 내용이나 정서와 가치관등이 나와 잘 맞지 않다는 판단이 들었다. 엄청나게 많은 책을 펴내는 일본은 우리와 정서도 비슷한데 소설류는 재미있게 읽어도 경제, 경영 서적들은 별로 공감이 되지 않았다. 중국에서 넘어온 책들은 아직은 수준미달로 느껴졌고.

 

자연스럽게 서양에서 넘어온 책 위주로 읽게 되었다. 전 세계적으로 보더라도 경제, 경영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모든 저자들은 미국을 위시하기도 하지만 엄청나게 방대한 조사력등에서는 미국 저자들의 수준을 따라잡기 힘들정도라고 느낄 정도이기도 하다. 이들은 책 한 권을 펴 내기 위해서 10년 이라는 기간동안 연구한 결과물을 책으로 펴내기도 하니 어쩔 수 없이 그들의 책을 많이 읽게 된다.

 

어릴 때는 분명히 서양보다는 동양적인 관점의 공부를 배웠다. 한문을 통해 고사성어를 알고 익힌 것을 보면 분명히 그렇다. 한자가 무척 어려웠고 점수도 안 좋았던 반작용이 커서 작동했는지도 모르겠다. 합리와 이성이라는 관점으로 전 세계의 사상과 물질을 지배하고 있는 서양적인 가치관과 세계관에 경도된 측면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동양에서 태어나고 체득한 사상을 바탕으로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이다 보니 동양이나 서양이나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어줍찮은 판단도 한 몫했다.

 

동양은 - 우리가 인도와 이슬람까지 포함하기에는 너무 멀고 - 사서삼경이 핵심이다. 이걸 알고 있지만 정작 공부는 하지 않았고 관련 책을 많이 읽지도 않았다. 늘 마음속에는 언젠가는...이라는 생각만 갖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결국에는 좋은 말씀인 경우가 많다는거. 또 한편으로는 한문과 함께 자신이 이야기하고 싶은 바를 빗대어 이야기하면 어딘지 모르게 상당히 유식해 보이고 똑똑해 보인다는 측면도 있다. 그렇게 동양 사상은 계속 머리속에만 머물고 있었다.

 

그래도 머리속에 오래도록 남아 있고 가장 나를 지배하고 있는 정신은 '중용'이다. 별의별 정신을 대표하는 한자가 많지만 그 중에서도 나에게는 '중용'이 으뜸이다. 중용은 좌로도 우로도 치우치지 않고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것을 이야기한다. 이렇게 쓰고 보니 내가 평소에 블로그 모토이자 삶의 모토로 하고 있는 '천천히 꾸준히'와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많아 보인다. 이거 억지로 갖다 붙히것처럼 보여도 내가 볼 때는 그렇다.

 

학생 시절에도 '중용'은 상당히 중요하게 선생님이 가르쳐 주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성인이 되면서 중용은 점점 무가치한 개념이 되어버렸다. 현대인에게 중용은 이도 저도 아닌 변절자나 애매한 특성을 지니게 된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다는 것은 현대인에게는 무색무취의 쓸모없는 사람으로 취급받을 가능성이 있다. 무엇인가 하자면 화끈하게 해야 하는데 그런 것도 아니고 내편이 되어야 하는데 그런 것도 아닌것 같고 말이다.

한국인은 화끈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대표적으로 거론되는 것이 2002년 월드컵 당시의 뜨거운 열기를 이야기한다. 하지만, 잊는 것도 화끈하다. 엄청나게 잊지 못할 사건을 겪고도 얼마 지나지 않아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잊고 지낸다. 그러고 나서는 또 다시 반복한다며 탄식을 한다. 큰 사건이 나면 한 동안 언론이 도배를 하지만 정작 심층 취재는 없고 모든 시간과 지면을 반복되는 말로 점차적으로 자신에게 유리한 교언영색을 한다.(한자라 좀 어려운 단어를 쓰는 듯)

 

중심을 잡아야 하는데 그때마다 불같이 타올라 누군가 한 명에게 모든 것을 뒤집어 씌우고 모든 것을 덮으며 끝낸다. 희생양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다시는 그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개선해야 하는데 개선은 뒷짐지고 한 명을 패서 끝장 내버린 후에 가슴 후련하면 모든 것이 끝이다. 그런 후에 다시 반복되는 사건 사고에 왜 이러냐고 한다. 우리는 어쩌면 '중용'의 자세가 필요한 것이 아닐까 한다.

 

이도 저도 아닌 어정쩡한 자세가 아니라 누구의 눈치도 누구의 이익도 손해도 봐주지 않고 중심을 잡고 올곧게 가는 정신 말이다. 아쉽게도 '중용'은 의외로 힘들다. 이쪽도 저쪽도 아닌 사람으로 남는 것은 막상 실천하려면 너무 힘든 포지션이다. 누군가의 편에 서야만 마음과 몸이 편하다. 흑백정신이 투철한 한국인은 '중용'은 회색분자로 여긴다. 상황에 따라 이쪽도 저쪽도 될 수 있는데 우리는 한 번 이쪽이면 잘못해도 이쪽 편을 해야 한다. 이것 큰 잘못이다.

 

책의 서두가 '중용'에 대한 개념과 정의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에 있어 집중을 못했더니 - 이거 핑계다 - 좀 어려웠다. 정확하게 개념이 들어오지 않다보니 동양 사상은 역시나 어려운 것이 아닐까 싶었는데 초반이 넘어가고 나서는 어렵다고 할 수는 없었다. 대부분 초반  50페이지까지는 어떤 책이든 적응하는 과정을 거치게 마련인데 그렇게 따지면 이 책도 그런 것이 아닐까싶기도 하다. 그래도 책을 끝까지 읽은 것을 보면 모든 것을 습득하고 체화하는 것은 어차피 무리이니 그런대로 아주 조금이라도 내게 남은 것이 있지 않을까 싶다.

 

먼저 사서삼경에 대한 오해 내지 편견이 있는 것은 이런 것을 해석하는 책들이 대부분 한자를 보여주고 이에 대한 해례를 해 주는데 너무 직독직역으로 하다보니 고리타분한 측면이 컸고 최근에 그나마 쉽게 풀어주는 책들이 나왔지만 얼핏 읽어보면 한자와 이에 대한 번역이 다소 뻔한 좋은 말인듯 싶어 꺼려졌다. 너무 쉽거나 너무 어렵거나 둘 중에 하나라고도 볼 수 있는데 이런 면에서 계속 관련 책을 뒤로 미뤘던 영향도 있었다.

 

이 책인 '중용'에서 계속해서 나오는 개념은 '인의예지'이다. 굳이 중용이 아니더라도 사서삼경에서 지속적으로 반복되어 나오는 개념이자 인간이 반드시 행해야 할 원리로 보면 된다. 이것만 지킨다면 인간사에서 어려움을 겪거나 힘들어질 가능성은 줄어든다. 그만큼 지키기 어렵고 힘들다. '인의예지'에 '신'까지 지키면 뭐 완벽하다고 할 수 있다고 하는데 모르겠다. 여전히 나는 동양에서 태어났지만 서양적인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편인지라 말이다.

 

예전에는 유교라는 표현을 했다. 이건 잘못된 표현이다. 유학이지 유교가 될 수는 없다. 아마도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풍습때문에 유교라고 하지 않았을까 싶은데 유교는 종교로써 우리가 따라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마땅히 지켜야 할 본으로 봐야 할 것이다. 그 중에서 '중용'은 어쩌면 가장 어렵고 힘든 개념이고 지키기 무척이나 곤란할 상황에 처하는 경우가 많은 단어가 아닐까 한다. 그런데, 우리에게 벌어지는 대부분은 '중용'만 지키면 무난하고 원한히 해결되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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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만장자의 마지막 질문 - 故 이병철 회장이 묻고 철학자 김용규가 답하는 신과 인간에 관한 근본적 통찰
김용규 지음 / 휴머니스트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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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만장자라는 단어는 이미 너무 친숙하고 익숙해서 부자라는 느낌조차도 들지 않을 수 있지만 부자의 단계로 들어섰다는 이야기를 들으려면 백만장자가 객관적으로 주관적으로 인정할 수 있는 금액이 아닐까한다. 백만장자는 많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삼성그룹을 만든 이병철이라고 하면 우리나라에서는 더이상 적수가 없다. 이병철이 무엇인가 묻고 그에 대한 답변을 책의 저자가 한다는 구성인데 제목에 백만장자라는 문구가 있어 호기심이 갖고 철학자가 이를 답변한다는 것에 또 다시 흥미가 동했다.

 

책을 얼핏 볼 때마다 - 꽤 오래도록 도서관에서 잡았다 놨다를 반복한 나날이 1년 정도 - 철학적인 내용을 풀었다는 느낌은 있었고 죽음이나 종교적인 내용이 포함되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백만장자의 질문이라 당연히 금전적이고 부자의 관점에 대한 문답이 이뤄질 것이라 예측했다. 비록 선문답의 내용이 이어질지라도 어느정도는 나올것이라 예상한 내 판단은 완전히 틀렸다. 이 책은 이병철 회장이 말년에 천주교의 신부에게 전달한 24개의 질문이 차동엽신부에 의해 밝혀졌고 이에 대한 답변을 책의 저자인 김용규가 하는 것인데 중복되는 질문을 제외한 총 22개의 질문에 답변을 하는 내용이다.

 

예전부터 '서양문명을 읽는 코드, 신'이라는 책이 항상 눈에 들어왔는데 바로 그 책의 저자다. 이 책의 내용은 정확하게 신과 종교에 대한 물음을 답변하는 형식이다. 종교와 신은 호불호가 갈리는 형상과 존재가 되었다. 과거에 종교와 신은 절대적인 권력과 충성심을 보이는 대상이었지만 인간이 신의 속박으로부터 탈출한 후에는 종교와 신에게서 자유로운 사상을 갖게 되었다. 이제 신은 없다는 지경에 이르렀다. 아직까지, 신이 있는지 없는지의 여부는 증명되지 않았고 아마도 앞으로도 증명되지 못할 것으로 본다.

 

유신론자와 무신론자의 이야기를 책은 함께 담고 있다. 이병철회장의 질문 자체가 신은 있느냐 신이 있다면 세상은 왜 그런가와 같은 종교와 신의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을 통한 - 유교는 종교는 아니지만 이병철회장은 논어를 인생의 모토로 삼았다 - 질문을 종교인에게 물었고 철학자는 답변을 철학적으로 풀어 사람들에게 알려주는데 신이 있다는 입장과 신은 없다는 입장을 나란히 배치해서 독자들에게 읽으면서 가치판단을 하도록 했다.

 

책에서 중요하게 언급되는 대상은 하나님, 예수, 교황, 주교, 신부, 아우구스티누스, 아퀴나스를 비롯한 신이 있다는 편과 '이기적 유전자'로 유명한 리처드 도킨스, 해리스, '우주에는 신이 없다'의 데이비드 밀스를 비롯한 무신론자편과 진화론을 이야기했지만 신을 믿고 있는 다윈과 같은 파로 나눌 수 있다. 이 책은 다 읽고 리뷰를 쓰고 있지만 각 질문의 답을 읽고 리뷰를 쓰는 것이 훨씬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되고 풍부하게 제대로 해체식의 리뷰를 쓸 수 있었으리라 판단되지만 귀찮아서 이렇게 몰아서 쓰게 되는데 그렇게 할 것이라는 약간의 아쉬움도 있다.

 

고백하자면 나는 인간의 탄생은 창조론을 믿고 탄생 후는 진화론을 믿는다. 신이 있다고 믿고 있지만 지구의 역사를 볼 때 진화를 부정할 수는 없다는 것이 사실이다. 절충안이라 생각하지만 책을 읽어보면 꼭 그렇게 볼 수도 없다. 책은 철학자가 쓴 신에 대한 이야기다. 무신론자가 쓴 책이 아니다. 무신론자가 이병철 회자의 질문에 답했다면 어떤 답을 했을지에 대해 저자는 리처드 도킨스를 비롯한 무신론자들의 책을 통해 답변을 하고 있고 유신론자들의 답변은 마찬가지로 그들의 책과 성경을 통해 알려준다.

 

유신론자의 답변에서 가장 중요하고 중시해서 탐구하고 알려주는 인물은 아우구스티누스이다. 그의 고백론을 포함한 저사를 통해 신에 대한 이야기를 해 준다. 반면에 가장 유명한 리처드 도킨스보다는 우주에는 신이 없다의 데이비드 밀스를 가장 많이 언급하고 그들의 주장을 알려준다. 재미있게도 과학자로 알려져있고 실제로도 과학자인 리처드 도킨스는 자신이 작가로 불리기 원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참으로 재미있는 리처드 도킨스의 꿈이다. 그렇다면, 자신이 주장한 바가 과학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의미로 들려서 말이다. 이 책이 아닌 다른 인터넷 기사에서 읽은 내용이다.

책을 읽다 문득 든 생각이 분명히 저자는 신이 있다는 유신론자의 입장이라는 것이다. 끊임없이 유신론과 무신론의 입장을 대변하는 이야기를 해 주지만 뉘앙스나 설명하는 부분에서 신이 있다는 쪽의 주장에 비해 무신론자의 주장은 잘못된 논조와 판단을 내렸다는 입장이다. 무엇보다 다음과 같은 이야기로 그들의 주장이 잘 못되었다고한다. 

 

"오늘날 도킨스와 밀스와 스텐저 같은 과학자들이 자연과학적 근거를 동원해 우주에는 신이 없다고 외치며 기독교를 미신으로 몰아가는 것은 이른바 허수아비 논증의 오류(fallacy of straw man)를 범하는 것이 된다. 허수아비 논증이란 상대방의 주장을 자신이 공격하가 쉽게 자의적으로 단순화하거나 왜곡해서 허수아비를 세운 다음 그것을 공격해 허물어뜨리는 방식의 논증인데, 그 내용을 불문하고 논리적 오류에 속한다."

 

잠시 생각을 해보니 철학자들은 지금까지 많은 인간의 사상에 대해 밝히고 알려주고 논쟁을 거듭했는데 신이 있다는 주장을 하는 것이 맞는 듯 했다. 신이 없다고 주장한 철학자들도 있지만 철학자의 입장에서는 과학은 그들이 탐구할 대상이 아니고 인간이 탐구할 대상인데 인간이 갖고 있는 생각과 행동을 예전에는 철학자들이 이를 밝혀 알려줬다. 과학적으로 밝힐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 철학자의 입장에서는 유신론으로 입장을 서는 것이 더 흥미롭고 생각할꺼리를 많이 던져준다는 판단이 들었다.

 

무엇보다도 저자의 입장은 무신론자들이 유신론자들의 주장을 반박하고 업신여기며 까는 것은 그들이 제대로 기독교(천주교,개신교)를 공부하고 알려진 사실을 바탕으로 자신들의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원하는 것만 쏙쏙 빼서 주장을 하다보니 의도적으로 잘못된 주장을 하는 것이 많다는 것이다. 신과 종교에 대한 반박과 잘못된 점을 지적하는 것은 올바르지만 그 대상이 잘못되었고 손가락으로 가르친 지점이 아닌 손가락을 비판한다는 것이다.

 

그럴수밖에 없는 것이 과학은 증명을 해야 하는데 과학은 신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지 못했다. 또는 없다는 것을 증명하지 못했다. 신이 있다는 유신론자들의 주장이 비과학적이 것과 마찬가지로 신이 없다는 무신론자들의 주장도 과학적으로 풀지 못한 것은 마찬가지다. 지구의 탄생을 빅뱅과 여러 우주가 있다는 식으로 설명하면서 정작 탄생 배경은 우연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신이 있다는 것과 다를바가 없다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인류 역사에서 종교가 발전을 시킨 많은 측면이 있다는 긍정적인 것도 있지만 반대로 인류를 제노사이드할 정도로 부정적인 측면도 강하다는 것도 인정된다. 그런데, 종교의 잘못된 점은 종교가 갖고 있는 잘못이 아니라 정확하게는 종교를 앞세운 이데올로기의 문제다. 종교가 아니라도 정치, 민족, 사상등으로 문제가 된 적이 많은데 이런 것들이 전부 정치가 문제가 아니라 편향된 이데올로기가 문제다.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위해서는 지극히 편협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정작 자신이 믿고 있는 종교를 위해서 한다는 대의명분을 앞세우는 것이 문제일뿐 종교 자체가 문제이고 신이 문제는 아니라는 입장이다.

 

나는 기독교인이고 그중에서도 정확하게 개신교이다. 개독교라는 표현을 듣는 바로 그 종교이다. 흥미롭게도 신학적이지 않고 기독교를 권하지 않는 철학적인 '백만장자의 마지막 질문'이 그 어떤 종교서적보다도 더 객관적으로 신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더욱 기독교적인 관점으로 읽힌다. 믿음이라는 대상에 대해 무조건 믿으라며 이야기하는 것보다도 무신론자들의 과학적인 이야기를 철학적인 관점에서 이야기하고 과학이라 이야기하지만 그마저도 - 물리학 분야에 속하는데 이 역시도 과학이로되 과학은 아닌 학문이 되어버린다 - 애매한 무신론자들의 이야기를 반박하는 이야기를 듣다보니 자연스럽게 된다.

 

여기서 개인적인 오류에 빠질 수 있다는 점을 고백한다. 이 책을 무신론자들이나 기독교가 아닌 타 종교를 믿고 있는 사람이 읽었을 때 어떤 관점으로 책을 읽게 되고 알게되는지 여부까지는 알 수없다. 이미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성장하며 믿게된 하나님과 예수님의 사상과 믿음에 길들여져 있어 책에서 나오는 논점이 더더욱 내가 믿고 싶은 쪽으로 편향될 수 있다는 점을 부인할수는 없다. 저자가 정확하게 원한 바와는 다른 방향으로 책을 읽었을 수 있다. 아무리 읽어도 저자는 신이 있다는 편이지만. 그렇다고 기독교인으로 이 책을 썼다고 볼 수는 분명히 없다.

 

이병철 회장은 종교와 신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했는데 책을 읽어보면 정확하게 신을 믿고 그에 따른 종교라는 매개체로 연결되는 것인데 종교와 신이라는 이데올로기를 통해 온갖 잘못된 현상과 편향과 편집적인 아집이 생겨 그 점이 문제일뿐이다. 그렇다면, 신이 있는지 없는지의 여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무신론자들도 신이 있다 없다의 여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신이 있다고 믿는 이들의 잘못된 행동을 비난하는 것이니 말이다. 신의 존재를 부정하면 해결될 것이라 믿기에 그런 주장을 한다고 할 수 있다.

 

쉽게 책을 집어들어 읽을 수는 없지만 책이 아주 흥미롭고 재미(?)있다. 머리속에서 끊임없이 무엇인가 움직이고 움직이며 저절로 생각이라는 것을 다양하게 할 수 있었다. 신을 믿는 입장이든 믿지 않는 입장이든 인류에게 신이라는 존재에 대해 한번정도는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김용규라는 저자를 알게 되었다는 것도 있다. 이 정도의 지적수준을 갖고 있는 사람이 쉽게 자신이 갖고 있는 방대한 지식을 풀어내는 능력이 참으로 탁월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런 쪽 분야의 저자들을 많이 알지 못하지만 쓸데없이 어렵게 지적 허영만 글로 풀어내는 저자들이 많은데 아주 괜찮은 저자이다.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을 펴 내는 저자가 아니라 저자의 책을 자주 읽을 수는 없을 것 같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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