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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한 거짓말 ㅣ 창비청소년문학 22
김려령 지음 / 창비 / 2009년 11월
평점 :
완득이의 작가 김려령. 완득이란 단 한 작품으로 너무도 강렬한 자기만의 각인을 새겨버린 작가의 작품이라 관심이 갔지만, 리뷰에 올라오는 청소년 자살이란 문제는 이 책을 한동안 바라보지 못하게 만들었다.
작년, 학생 부장을 맡아 몸으로 때우고 있던 어느 날, 학교에서 한 학생이 투신하였고, 그 날 이후로 2009년의 내 시간은 블랙홀로 휘말려 들고 말았다. 학부모는 온갖 시비를 걸어 학교를 피곤하게 하였고, 결국 결론은 더러운 합의금 요구로 귀결되었다. 아이의 죽음에 대한 아쉬움이라든가 애잔함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 결국 아이가 스스로 삶을 접게 한 그 지겨움이 어디서 연유한 것인지를 깊게 생각하게 한 1년이었다.
모든 자살은 <사회적 타살>이다. 스스로 삶을 저버린다는 것은, 사회에서 그 개인을 포용하지 못했다는 증명이기도 한 것이다. 스스로 존재를 부정함으로써 존재하였음을 증명하게 되는 역설적 상황이랄까.
청소년 자살이 세계적으로 많은 나라.
그것은 이 나라의 청소년들이 살고있는 모습을 보면 금세 알 수 있다. 아니, 오히려 자살률이 그닥 높지만도 않다는 생각이 다 들 지경이다.
'공교육'이라고는 없는 나라. 차라리 독재 정권 시절에는 '권력의 이데올로기'라는 공교육이라도 학교에서 시행되었지만, 독재 정권의 공교육이 쫓겨나간 빈자리에는 <신분 상승>을 위한 욕망만이 들어앉았고, 그것은 곧 공교육의 이름을 버린 것이었다.
공교육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온갖 사교육은 '개인의 영달'만을 목표로 하는 것이었으며, 아이들의 온몸을 내던지는 저항도 '개인의 영달' 앞에서는 실패한 자의 허랑한 메아리에 불과한 것이었다.
천지는, 내일을 준비하던 천지는 허망하게 세상을 버린다.
얼핏 천지를 왕따의 피해자라고 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 소설은 왕따 소설이 아니다.
화연이도 천지를 왕따시키기만 한 아이는 아니었고, 화연이 역시 시대가 왕따시킨 개인에 불과했다.
사고로 죽은 천지의 아버지도 사회에서 소외당한 인물이고, 마트의 두부 판촉원인 천지엄마도 소외계층이다.
천지가 실패 속에 용서의 메시지를 남기는 것으로 퍼즐 조각 맞추기는 점차 완성되는데, 비극적인 소재를 마치 스릴러 읽듯 긴장감넘치게 만드는 것이 김려령의 필력이겠지만, 실패 속에 남긴 천지의 메시지는 왠지 천지를 천지답지 못하게 만든 느낌이 들었다.
천지는 중학교 1학년일 뿐이지만, 세상의 온갖 고뇌를 혼자서 안고 사는 듯한 아이다. 아직 초경도 맞지 않은 어린 몸이지만, 마음의 상처는 여러 성상을 거친 노인의 그것과 같다. 천지에게 얽히고 설킨 어린 시절의 악재들은 천지가 어디에도 풀어내지 못하는 '옹이'를 만들게 만들었고, 결국 천지가 즐겨 하던 실뜨개질과 반대로 풀리지 않는 매듭을 만들어 버리고 말았다.
풀리지 않는 매듭으로 가득한 삶. 결국 실패(왜 자꾸 실꾸러미인 실패가 失敗로 읽히는 것인지)에 유서를 다섯 장이나 남기고 세상을 버리는 천지의 삶.
우발적으로 일어난 듯한 아이들의 죽음 저 편에는 이렇게 풀리지 않는 매듭들과, 풀려고 하면 할수록 꼬이는 실꾸러미들이 결국 인생은 자신이 뜨개질하는 죽음으로 가는 승차장처럼 느끼게 만드는 다종다양한 사건들의 집합체가 반영되어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한국 사회처럼 우아한 거짓말로 넘쳐나는 곳이 또 있을까?
지금, 봄방학 중이지만 나는 학교에 나와서 아이들 '자습 감독'을 하고 있다.
우리 학교는 순전히 자율적인 학습인 셈이어서 20명 가량의 학생이 자습을 하고, 나는 시간에 맞춰 청소도 시키고, 공부 시작도 시키는 좀 단순한 감독인 셈이지만, 다른 학교들은 3학년 담임들이 모두 나와서 '자율적이지 않은 자율학습'을 '감독'하고 있다. 아직 3월 1일자 발령이 나지도 않은 담임들로 말이다. 미친 짓이다. 교사도 쉬어야 에너지가 고갈되지 않는다.
대학 가면 뭔가 될 것처럼 거짓뿌렁 투성이로 학교에서 아이들을 몰아대지만, 사실 대학 가면 '동혁이형' 말처럼 '신용 불량자'를 양산할 뿐인 경우가 숱하지 않은가? 정말 대학 등록금 모아서 5천만원 정도 자본으로 조그만 가게나 쇼핑몰을 해보는 것이 오히려 큰 공부가 아닐까?
금메달이 아니어도 훌륭하다는 입에발린 말과 달리 금메달만 칭송하는 더러운 방송과,
가난한 학생도 배울 기회를 주겠다는 아름다운 말과 달리 초등학생 무상 급식조차 반대하는 더러운 정치가들과,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과,
그래서 나를 술 푸게 하는 세상에 대한 슬픈 단상들이 가득한 <우아한 거짓말의 사회>
그 슬픈 사회를 정말 <쌈빡한 대화>로 읽어내는 것이 김려령의 '우아한 거짓말'이다.
엄마와 딸 사이에 이렇게 시원한 대화를 할 수 있는 가정이라면, 내가 보기엔 천지는 죽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자살의 개연성이 더욱 높은 아이는 화연이 같은 가정과 조건의 아이가 아닐까. 자살하는 학생들의 가정 형편보다는 부모의 무관심이 상관 관계가 높다는 것이 내 심증이기 때문이다.
만지와 오여사(천지 엄마)의 대화가 통하는 세상이라면, 아마도 자살하는 아이 따위는 없을 것이란 게 내 생각인데, 김려령씨, 당신 생각은 어떠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