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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마법과 쿠페 빵
모리 에토 지음, 박미옥 옮김 / 휴먼앤북스(Human&Books) / 2006년 8월
평점 :
절판
한국 여성들의 성장 소설의 이면에는... 슬픔과 소외감이 가득하다. 박완서의 소설이 그렇고 신경숙의 소설이 그렇고 은희경도 그렇다. 그런 소설들을 읽고 나면, 가슴이 먹먹해지고, 소설읽는 일에 염증을 느끼게 되기도 했다.
원래 영원의 출구,란 제목의 이 소설은 일본 작가 모리 에토가 쓴 성장소설이다.
초등학교 어린 시절부터 고등학교 시절까지를 그린 여자 아이의 성장 소설인데, 밝지만은 않지만 요즘 아이들의 미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들에 한발짝 다가설 수 있는 소설이 아닌가 싶다.
검은 마법과 쿠페 빵, 이란 제목이 영원의 출구보다는 친근해 보이지만, 초등학교 고학년에서 중학생 정도에게 어울릴 이 소설이 그닥 유명하지 않은 것 같아 좀 아쉽다. 특히 여학생들의 이야기를 그려서 주목받은 <아즈망가 대왕>은 한국에서도 여학생들의 관심을 받았던 걸 보면, 아직 한국에선 여학생들의 삶에 주목하는 성장 소설이 부족하단 느낌을 많이 받는다.
'소녀'란 이름의 여자 청소년들은, 한편 깜찍한 외모를 가지고 있지만, 그 마음 속에는 구렁이 할머니 저리가라 할 정도의 정신 세계를 갖고 살아가게 마련인데, 일반적으로 '청순가련'으로 덮어버리는 경향이 많다. 겨울동환지 뭔지에서 최지우나 소나기의 여자아이나, 뭐 요즘 유행한다는 일본 만화 꽃남의 금잔디도 마찬가지다. 일단 서민이라도 얼굴이 청순가련이라야 한다.
여자 아이들의 마음을 이해해 주는 여자 아이들 성장 소설이 더 많이 나왔으면... 한다. 한국처럼 이성 교제가 어정쩡한 국가에선 '소녀' 이미지에 대한 동경이 더욱 심하다. 그래서 원조 교제가 인기인지도 모르겠다.
노래라고 만드는 것도, 지지지지지..베이베... 지지배가 상품화된 것들뿐이고...
남자 아이들에게건, 여자 아이들에게건 서로의 생각을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하게 해줄 수 있는 소설들이 앞으론 필요하다.
청소년들을 마치 '성적 폭발 직전의 핵폭탄' 취급하는 몽정기 류의 영화들은 정말 짜증난다.
실제로 성적인 것에 관심이 많기도 하지만, 영화처럼 저질스런 표현들로 일관하는 것은 실제 청소년들의 삶은 아니기 때문이다. 요즘처럼 벗은 몸을 보기 쉬운 인터넷 환경에서는 아이들이 오히려 변태스런 '의도된 기획'을 정상이라고 착각하기 쉽기 때문에 더욱 많은 성교육과 매체들을 접하게 하는 일이 필요하단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노리코랑 키스하고 싶었어'
헤어진 남자친구가 이런 말을 한다.
'나는 키스보다 결혼하고 싶었어'
이게 노리코의 대답이다.
어린 아이들이라도 이렇게 남녀는 다르다.
남자 아이들은 손을 잡고 싶고, 키스하고 싶고... 진도가 나가고 싶은 '문제 해결형'인 반면, 여자 아이들은 안정적인 정서의 공감을 원하는 편인 것이다.
가르칠 일이 많은데 방기하고 있는 게 얼마나 많으냐...
태양의 스무 배나 밝은 별, 시리우스는 너무 크고 너무 빛나기 때문에 수명은 5억년이다.
태양은 50억년 뒤에 백색 왜성으로 흩어질 거라는데...
산다는 것에 대해서 이렇게 거시적 입장으로 바라보는 일도 성장 소설에서 읽을 수 있는 아름다움이다. 성장한다는 것은 늘 자신의 좌표가 불안정한 것에 대한 불안감을 가진 개체의 이야기지만, 그 불안정한 개체가 점차 안정감을 찾아나가는 이야기이니깐... 그렇지만, 길게 본다면 안정된 삶이란 세상에 하나도 없다는 걸 읽게 되는 일은 소중한 것이란 생각이다.
머리가 뭔가로 맞은 것처럼 흔들렸고, 손가락 끝이 싸늘해졌다. (303)
이런 묘사도 실감난다. 정말 충격받으면 손가락 끝이 싸늘해 질 때 있잖은가.
요즘 너무 적나라한 노래 가사처럼, '총 맞은 것처럼'이라든가, '내가 미쳤어, 정말 미쳤어'같은 용어들을 쓰지 않고도 아린 마음을 잘 드러낼 수 있을 듯 싶은데...
우주는 매일 팽창하고 있어서, 지구와 달은 매년 3센티미터 쯤 멀어지고 있다는데...
우리들도 내년이면 분명히 어딘가에 있을 거야.
지금은 아무것도 안 정해도,
아무리 싫어도 어딘가 멀리 있게 될 테니까.(338)
그래. 산다는 건 그런 거다.
어려선 왜 그리 하루 햇살이 지루한지, 나른한 오후를 보냈던 기억을 가지고 살다가,
나이 들면 하루하루가 뭣이 그리 허무한지,
나이 들어 보면, 어린 시절 꿈꾸던 것보다는 훨씬 다른 먼먼 곳에 둥지를 틀고 불안정하게 살고있는 아직도 '어리(석으)ㄴ' 나를 바라보게 된다는 것을...
작가는 에필로그에서 담담하게 적어내고 있다.
다음 주면, 새학기가 시작된다.
누구도 싫어한다는 이유로 새학기에는 학생부장을 맡게 되었다.
누군가는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야기도 하지만, 뭐, 학생부장이 별건가.
학생들과 함께 하면 되는 거라 생각하고 1년을 설계한다.
아이들과 머리 '털'이나 '담배' 연기로 실랑이하기보다는, 아이들의 진로에 관하여 도움을 줄 수 있는 학생부장 생활이 되길 나름 기대하고 있다. 동창회 활동과 선후배를 연계하는 상담 활동 같은 것도 '꿈이 없고 미래가 없는' 요즘 아이들에게 필요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도 하고, 마음은 바쁘고 몸은 더 바쁜 2월이다.
아직은 냉랭한 봄빗속에 매화가 튼실하게 이미 피었다.
아이들은 같은 열일곱 나이래도 이미 스물 이상의 구렁이가 들어앉은 넘부터 아직 은초딩 부럽잖은 정신세계를 유지하는 아기도 있는 법이다.
한국에도 이런 기억에 오래 남을 '성장 소설'이 자꾸 많아졌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