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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대 위의 까치 - 진중권의 독창적인 그림읽기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09년 10월
평점 :
푼크툼, 스투디움, 도상학, 도상해석학, 알레고리...
이런 개념들은 미리 좀 설명을 해 줬어야 하는데...
저자의 말에서 먼저 말을 쓰고 프롤로그에서 설명해 줘도 뭔가 불만스럽다.
독자에게 조금 더 친절한 글쓰기가 필요하다.
독자는 진중권, 당신처럼 똑똑한 사람만 있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미학이란 과목은 좀처럼 친해지기 어려운 딱딱한 과목이라서, 어려운 말 몇 개를 알고 모르고가 책의 이해를 좌우하는 관건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푼크툼은 예술 작품의 일반적 해석과 상관없이 오직 보는 이가 느끼는 개별적인 효과를 일컫는다. (롤랑 바르트, 19)
스투디움은 사회적으로 널리 공유되는 일반적 해석의 틀이다.
푼크툼을 내세운 것은, 이 책의 독해가 <미학자 진중권의 개별적 해석>일 수 있음을 겸손하게 내세운 말이겠지만,
스투디움 중심의 해석 풍토에 '해석을 반대한다'는 수전 손탁의 의견처럼 나름의 독법도 충분히 의미있음을 강조하는 의도겠다.
알레고리는 알로스(다른)와 아고레위에인(말하다)의 합성어로, '다른 이야기'의 뜻을 지닌단다.
다른 이야기를 통하여 유사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도록 쓰이는 기법이다.
회화 작품을 이해하려면 모티프가 무엇인가를 인식하는 일과 주제가 무엇인가를 인식하는 일, 이 두 단계가 필요한데 모티프 이해에는 일상적 경험만이 동원되지만, 주제의 인식에는 화면의 모티프만으로는 인식하기 어려운 것이 있다.
그를 위하여 어떤 문화, 문명에 대한 다양한 지식이 필요한데, 그 단계를 파노프스키는 '도상학'이라고 부른다.
예술 작품 속에서 한 시대나 사회의 정신적 풍토까지 파악하려는 시도를 '도상 해석학'이라고 부르는데,
프루스트의 소설 자체가 '인상'에서 비롯되는 인간의 파편적인 삶을 늘어놓은 것 같지만,
다양한 예술 작품에 대한 알레고리를 통하여 그 시대나 사회의 정신적 풍토까지 읽을 수 있는 장치를 감추고 있고,
이 책은 충분히 그 도상학적 해석에 충실한 답을 제시하고 있어 보인다. <내가 쓴 '프루스트의 화가들' 리뷰에서>
어려운 미학을 일반 독자에게 술술 풀어낸 사람은 '유홍준'이 처음이었던 것 같다.
그 이후에 최순우의 글도 제법 읽곤 했지만, 유홍준의 말발은 정말 대단했다.
진중권은 워낙 많은 이야기를 해서 간혹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그의 자유로운 영혼을 옭죄려는 어떤 시도도 진중권을 얽어매지는 못한다.
그는 마음 속 경비행기를 타고 더러운 먹구름을 뚫고 자유비행을 하곤 하는데...
이 이야기들도 중앙대에서 강의로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담은 것이다.
촛불집회에서 컬러티비 리포터로 뛰면서 상당히 공감을 얻어냈던 진중권을 견제하는 차원에서,
대학 강단에서 몰아내 버린 치졸한 일이 어쩌면 이 책을 낳게 했던 것이다.
그의 자유로운 미술품 감상이 좁은 강의실을 벗어난 일은 불우한 일이지만,
그 불행이 독자에게 훌륭한 책을 한 권 선사했으니 전화위복이 된 셈이다.
중앙대 고별 강연이 <사라진 주체>란 제목으로 실려있다.
강연에서 화면을 띄우고 수업을 했을 것이므로 다른 글에 비하여 화면이 많이 제공되어있다.
이 꼭지에선 진중권의 이런 말이 울리는 것 같다.
"중앙대가 나를 잘랐다고? 그래, 나는 사라지겠지만, 과연 너희는 나를 자른 것일까? 중앙대의 실체는 뭐고, 진중권의 실체는 뭐야? 세상에 주체란 게 있기나 한 건 줄 알고???"
중앙대가 잘라버린 것은 진중권의 '중앙대 겸임교수'란 우스운 자리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것은 진중권의 '실체'가 아니었던 것이다.(겸임교수란 자리는 ㅋㅋ 교수가 아니라 알바 비슷한 건데...)
그렇지만 국가의 억압은 중앙대로 하여금 진중권의 '복제', '원본없는 복제', '시뮬라크르'라도 정리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씁쓸한 이야기지만...
결국 '자기 자신'은 '남들이 그린 자신'에 불과하다고 라캉의 '거울단계' 이야기까지 끌어들인다.
꽤나 비장한 내용으로 시니컬한 강의를 구상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게 되는 꼭지였다.
나에게 가장 깊은 느낌을 준, 특이한 푼크툼으로 다가온 꼭지는 <뒤집어진 그림>이다.
트롱프뢰유와 바니타스 정물이 주는 느낌.
트롱프뢰유는 정교하게 묘사한 정물인데, 사실주의와는 다르다. 사실주의 작품은 현실과 착각하게 만들진 않기 때문이다.
바니타스는 시계, 해골, 낡은 종이 등을 그린 정물인데, 이 정물이 주는 메시지는 '인간, 누구나 죽는다. 다 지나간다.' 이런 '주제'다.
정물화란 것은 있는 세상을 그대로 표현하는 것으로 볼 수 있지만,
이 트롱프뢰유의 재미는 '자기 자신을 탐구하는 반성적 성격'을 띠라는 것이란다.
기스브레히츠의 작품들과 잭슨 폴록의 작품은 미적 감성을 건드리는 것은 아니지만, 충분히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세상 살면서, 자기 자신을 탐구하는, 그리고 세상에 반성적 시선을 들이대는 일 없다면, 참 지루하지 않겠어? 이런 이야기가 내 맘에 가까이 다가온 것이리라.
어떤 일로 나를 돌로 치려느냐... 예수님의 말씀처럼 쉽게 남을 돌로 치는 인간이 바라보는 것은 과연 어떤 세상인지...
그림을 읽어주는 책으로 들고 읽었지만, 오히려 그림에 대해선 잘 모르게 되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 책이다.
'돌팔매형'이란 무서운 형벌이 있는 동네도 있단다. 무서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