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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만큼 왔니, 사랑아 - 한 예술가의 뒤란
이일호 글.조각 / 생각의나무 / 2009년 11월
평점 :
품절
이일호의 작품과
글을 담은 책이다.
가벼이 읽어볼 요량으로 펴들었던 이 책을 몇 장 넘기지 않아,
자세를 가다듬게 된다.
생각처럼 말랑하지 않다.
아니, 충분히 말랑한 예술혼 앞에서... 기쁘게 그의 생각과 교감하도록 더듬이를 촉촉하게 만들어 받아들일 준비를 한다.
격물치지...사물을 따져보아 앎에 이르다...
동양에서 학문하는 자세로 따지라고 만든 말이다.
조소과... 돌을 깎아내면 조각이고, 뭔가 들이부어 빚어내면 소조가 된다. 합하여 조소라 일컫는다.
돌을 깎거나 뭘 들이 붓거나,
그 양감과 질감에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일조차 쉬운 일은 아닌데,
거기서 '생각'을 빚어내는 일은 그야말로 '예술'의 경지에 올라야 할 일이다.
이일호 작품들의 주제는 <인생>이다.
삶에서 만나게 되는 사랑스럽고, 자랑스럽고, 곤란하고, 당혹스러운 순간들을 포착하는 눈은 일품을 넘어,
그야말로 명품이다.
그런 안목은 그저 나오는 것이 아님은 그의 글을 읽어보면 알게 된다.
얼마나 깊은 독서와 사유가 있어야 이런 쉽고도 풍부한 글이 나오게 되는 것일까?
인간의 욕망의 이면을 이처럼 잘 보여주는 작품을 만나기도 힘들 거 같다.
죽으면 다 똑같이 썩어질 육신이면서,
멋모르고 추구하는 이면은, 종잇장 한 장 뒤적이면 튀어나올 '육체'와 '자본'에 대한 탐닉이라니...
그러니 무조건 욕망을 버리라고 닦달할 게 아니라
어느 정도 욕망을 발산한 다음 욕망을 약화시켜서 다른 이에게 떠넘기는 것이 욕망의 지혜일 터이다.
욕망은 결국 나누어진다.(107)
육감적이고 섹시한,
어쩌면 너무 적나라한 여체의 자궁 위치에
<반가 사유>의 자세로 한쪽 가부좌를 튼 작품은...
인간의 삶의 시원(始源)의 본질을 한 작품으로 보여준다.
생명을 잉태하고 세속의 환희를 꽃 피우는 여자의 성황당 터는
세속과 성스러움이 교차되는 세상의 장터이다.
모두가 여기에서 태어났고 특히 남정네는 여기에다 소원을 빈다.(219)
자연은 어눌하면서도 치밀하다. 치밀함을 어눌하게 감춰서 자연이라 부른다.
그 무방비한 전략을 아는 생물들은 극소수인데 이 미천한 생물들이야말로
자연의 전략을 너무나 소상히 꿰뚫어서 허접하게 보인다.
하잘것없고 불편하게 보이는 거미, 개미, 지렁이, 파리, 모기, 이런 종류의 것들이
완벽한 자연의 일척 계보이다.
그들은 인간처럼 치사하게 존재의 근원을 물으며 버둥대지 않고 순하게 태어나서 순하게 적응하며 죽는다.
그들은 선악과 미추를 가리지 않고 그저 좋아서 살기에 그들 하루의 삶은 인간의 십 년과도 비교될 수 없다.
그들은 우리가 모르는 곳에서 삽시간에 적멸하고 별안간에 태어난다.(91)
거울은 사실인가, 거울은 볼 때만 사실이 된다.
나는 사실인가, 나는 거울 속의 나를 볼 때만 사실같다.
그러니 나는 거의 사실이 아니다.(62)
사람은 평생 자기만 들여다보며 산다.
온종일 이사람 저사람 세상 풍경 다 보고 나서도
결국엔 이사람 저사람 세상 풍경을 보고 온
나를 내가 보며 살아간다.
라깡인가 하는 사람은
인간이 어린 시절,
거울을 들여다보면서 세상을 배워간다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거울을 바라보는 눈은 내 시선이 아니라,
그건 바로 <타자>의 시선이며, <타자의 욕망>이 물든 시선이다.
어린 아이가 엄마한테 인정받고 싶어하면서 그걸 자기의 욕망이라 착각하듯,
인간은 타자의 욕망을 자기 관점이라고 착각하며 <자신의 욕망>을 억누르며 산다.
이일호의 작품들은 <욕망>을 억누르지 않는다.
그래서 한편 보는 이를 당황스럽게 만들고,
일반적인 착한 사람의 도덕적인 시선을 부끄럽게 만든다.
그렇지만, 그의 사유를 곰곰 읽어보면,
인간이, 내가, 얼마나 허위에 휘둘려 살아가고 있는 건지... 깨닫게 된다.
내 욕망이 잘못된 것이 아님을 알고, 안심하게 된다.
그의 예술에 대한 성찰들은 생각이 깊어서 읽어둘 만한 것들이 많다.
언어 사용도 예술이다.
마치 바람타고 흐르는 선율처럼 형체가 보이지 않으면서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예술과 인간 존재에 대한 그의 생각들 몇 토막...
혼자 있으면 말들은 안으로 굽어든다.
밖으로 튀지 못한 말들은 뇌로 갔다가 귀로 갔다가 이명으로 와글거린다.
누군가를 만나 말문을 열면 내용없는 소리만 왁자하게 떠들다가 나중에는 혼자 궁벽해진다.
몇 번 그러고 나면 말은 함부로 할 게 못 되어 말이 다시 안으로 쌓인다.(10)
내 마음을 믿고 내 몸에 의지하여 사는 길만이 내 삶의 유일한 항로표지이다.
나의 예술은 시큼하게 홀로 숙성할 수밖에 없을 모양이다.(15)
생명을 한없이 잘게 쪼개면 한 톨의 먼지보다 작은, 미시화된 원자가 된다.
한 톨의 입자들이 켜켜이 쌓여 사람이 되고 그 안에 사유하는 이미지가 들어선다.
어디쯤에서 정신이 물질이 되고 물질이 정신이 되는지 나는 이것이 늘 궁금하다.(17)
바람 부는 저 허허한 공간에 말을 풀어 놓으면, 말들은 바람에 불려가 숲을 이루고,
산에서 계곡으로 흘러 바다가 되고, 거기서 다시 구름이 된다.
말들이 비바람에 씻기고, 흐르는 강물의 조약돌에 갈리고 다시 바람에 실려 구름을 타고 흘러서, 곱게 저문 노을 속으로 스며들 때,
나는 말을 몰라서 말할 수 없는 빈곤함으로 가슴이 멘다.(28)
사람은 여섯 개의 구멍으로 세상과 소통한다.
보고 듣고 마시고 숨 쉬고 배설하여 세상을 저어간다.
그렇게 많이 보고 듣고 먹고 마셔도 남는 건 하나도 없다.
나는 시간이 스쳐가는 통로이다.(43)
나는 예술을 한답시고 인생을 너무 심오하고 칙칙하게 살았다.
좋은 미술에 감동할 때 “재밌다”라고 표현하듯 한 번뿐인 인생.
재밌으면 됐지 애써 훌륭해지려거나 위대해질 필요가 있을까...
죽거나 떠나기 전에 지금 처한 자리에서 재밌게 살아야 한다.
돈을 벌어도 재밌게, 섹스를 해도 재밌게, 예술도 재밌게,
지금 내 말이 좀 언짢더라도 같이 한번 따라해봐~ “재밌다~”(47)
우주는 파동과 입자가 서로 부비고 핥고 충돌하고 밀어냈다가
다시 엉기어 별이 되고 은하군이 되었다가도
블랙홀에 껴당겨 흔적도 없어지거나 암흑 물질이 되는 것이다.
사람의 영혼이 우주의 기와 동일함을 깨달을 때 비로소 초월자가 된다.(55)
떡갈나무는 우리더러 ‘떡갈나무’라고 불러달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자작나무, 때죽나무, 소나무, 참나무, 밤나무, 모두가 그랬다.
우리가 괜히 친근한 척 그들을 불러서 패고 쪼개고 썰며 끝장을 낸다.
나무들의 이름을 모르는 채 숲속에 있지만 나는 전혀 부끄럽지 않다.
몰라야 한다. 알면 서로 괴롭힌다.(76)
나는 나의 불우한 삶에 열등감을 갖는 만큼 거듭날 것이다.(109)
시간이라는 것이 과연 존재하는 것인가?
가만히 있으면 시간은 연못처럼 고요하게 모인다.
고요한 시간들이 가득 쌓이면 쇳덩어리보다 더 무겁게 짓누른다.
이 시간들은 못 참아서 바쁜 척 시간을 흐트러뜨린다.
바쁘게 보낸 시간은 흔적도 없고 고요히 모여드는 시간은 무겁고 무섭다.(87)
얼마나 좋냐, 예술이라는 것, 백수인데도 거의 신적인 기분으로 살 수 있는 게 예술 아닌가.
“제 작품 어때요?”
작품은 작가의 창조적 자존심을 십분 고려해야 한다.
그래서 결코 싫다라는 말은 할 수 없게 되어있다.
안 그랬다가는 고흐처럼 귀라도 자르면 어찌할 건가.
이럴 땐 “재밌는데?”하면서 ‘데’라는 말끝을 치켜 올려 물음표 식으로 발음한다.(134)
그의 예술은 <마디와 꼭지>에서 맺히고, 도드라진다.
밋밋한 흐름보다는 어딘가에서 생각이 맺히는 멋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톡 튀어나온 '임팩트'가 예술의 화룡점정이다.
그런 걸 '마디와 꼭지'라고 말할 줄 아는 예술가도 드물다.
아득한 사유의 지평선에 <가공할 전환>을 불러일으키는 순간, 예술이 된다.
그걸 '마디와 꼭지'라 부르다니...
가공(可恐)할 만 하다. ^^
세상에서 가장 두렵고 신기한 것이 순환과 전환 사이의 간격에서 잇대어지는 '마디와 꼭지'이다.
다윈은 순환과 전환 사이의 꼭지와 마디를 더듬어서 예수를 넘어섰다.
이 꼭지와 마디가 없다면 세상은 영원했을 것이다.
그러나 꼭지와 마디가 있어 세상은 혼돈이다.
하나씩 마디 지워 꼭지가 되어 멸하고 다시 생하는 게 세상의 소통방식이고 자연과학이 말하는 아득한 사건 지평선이다.
삶 속에 끼인 잠은 삶과 삶의 마디로서 순환이고, 죽음은 삶의 마지막 꼭지로서 전환이다.
오, 이 가공할 전환. (85)
예술가는 외로운 법.
속으로 속으로 침잠하는 그 역시 에필로그에서 '좋은 벗'을 찾는다.
좋은 벗을 찾아,
그 좋은 벗과 도란도란... 지혜를 풀어내고...(사람 욕하는 친구는... ㅎㅎ 친구가 아닌 모양... 하긴... 이해된다.)
이 적막한 현세를 위로받을 친구를 목마르게 그린다.
고요하게 만나 서로 뜻 맞아 신명나고 도타워지는 그런 친구 없을까?
사람 욕하지 말고 개울물 흐르듯 도란도란 자연과 현자들의 숨은 지혜를 풀어내고
또 우리의 생각을 융숭한 언어로 포개어 이 적막한 현세를 위로받을
그런 지혜로운 사람이 목마르게 그립다.(266)
고요하게 만나 서로 뜻 맞아 신명나고 도타워지는 그런 친구...
그런 친구는 '일기일회'의 친구 아닐까?
내 일생 단 한번...
일본어로 읽으면 '이치고 이치에'가 되는 이 말은,
다도에서,
차를 한 잔 대접할 '손님'같은 자세로 '한 평생 단 한 번' 만나게 될 귀한 인연에 감사하며,
상대방을 소중하게 대하는 깍듯한 자세를 일컫는 말이다.
이치고 이치에를 만날 수 있는 삶은 흔하지 않은 일이겠지만,
만나고도 어리석어서 그 일기일회의 행운을 제발로 차버리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아무튼, 적막한 현세...
위로받을 지혜로운 친구에 목말라하는 그를 만남으로서 위안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인데,
이 책을 선물해준 친구에게서 난 삶의 큰 위안을 받고 있는 중이어서,
이 책은 그렇게 더 소중하고 귀한 책이 되었고, 저 말이 마음에 새로이 새겨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