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방을 찾아서
신영복 지음 / 돌베개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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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인가, 김지하가 '중심의 무거움'이란 시를 썼다.

그때부터 김지하는 읽지 않았다.

시인이 중심에 놓이는 순간, 그는 '시의 가슴'을 잃는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소설가는 좀 다르다.

소설가는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고자 하는데,

그 이야기가 상업적으로 성공할 수 있는 기회를 잡으면 성공할 수도 있다.

공지영의 '우행시'와 '도가니'가 그런 예다.

그의 다른 책들에 비해 이 두 책은 서사도 치밀하고, 영화도 괜찮았다.

 

신영복이야말로 변방의 지식인이다.

변방이 그를 지식인으로 기른 셈이다.

20년의 감옥생활이 없었다면, 그가 그토록 글을 치밀하게 쓰고, 읽지 못했을 수도 있다.

감옥은 그에게 또 하나의 대학이었다.

 

신영복의 글씨는 변방의 글씨다.

주류의 글씨가 중국의 '전예해행초'를 답습하는 반면,

그의 글씨는 자유로운 행보를 보인다.

물론 기본적 운필은 한자의 필법을 무시하지 않고 있지만, 민중체라고 불릴 만한 힘이 가득한 필체가 유려하다.

 

그의 글들이 놓인 곳을 찾아가는 길을 적은 책이다.

책은 얇고 가볍다.

그렇지만, 이 책에서 읽어낼 수 있는 사유는 결코 가볍지 않다.

이 책의 중심은 '글자'라고 생각하여 예술 서적으로 읽었지만,

그 안엔 철학도, 역사도 다 들어 있다.

 

지금... 한국 사회가 가고 있는 곳은, 지옥이 아니라, 현실에서 지옥을 완성시키려는 잠재태인 것처럼 보인다.

부모들은 자식들을 고통으로 몰아넣으면서 그걸 사랑이라 착각하고,

가정은 파괴되어 모두 아프나, 누구도 아프지 않은 체 한다.

술집과 모텔은 짝짓기에 혈안이 된 짐승들로 넘쳐나는데, 이렇게 아프지 않을 수 있는 세상이 웃긴다.

대학은 누구나 나와야 한다는데, 대학생들은 실제로 공부를 하지 않고 취업 준비만 한다.

뭔가, 온갖 비명이 다 존재하는 곳...

정치권도, 종교적 집단도, 학교도, 돈벌이의 세상도, 가정마저도...

모두 피비린내와 돈냄새를 향한 똥냄새로 아비규환을 이루고 있다.

 

<지옥도>를 현실에서 가능하게 할 수 있음을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 학계가 모두 힘을 합쳐,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난 사람들이 똘똘 뭉쳐 <잠재태>를 <가능태>로 바꾸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 <지옥도>를 가까운 미래에서 <현재완료>로 진행시키기 위한 정치가 목하 진행중이다.

진보진영은 까발리고, 추잡하게 욕보인다.

이명박 무리의 추잡함은 검찰에서 무죄로 떠든다.

친박의 무리는 무조건 입다물고 조용히 있는다.

지옥도의 완성은 멀지 않아 보인다.

 

신영복의 글자가 있는 곳, 땅끝 마을의 도서관, 고 노무현 대통령 묘소, 박달재, 서울시청, 홍벽초 문학비...

사연은 달콤하고, 애리고, 서글프고, 눈물겹다...

모두, 변방 아닌 곳 없다.

 

서울 시장실의 글씨를 찾으러 가니, 박원순 시장이 '변방이 중심부로 진입하는 과정'이 역사란 말을 한다. 따뜻하다.

다행이다. 시장이 다섯 살 훈이였으면... 재수 없을 뻔 하지 않았나.

 

변방은 과연, '낙후되고 소멸해가는 주변부로서가 아니라 새로운 가능성의 전위'로 기능할 수 있을 것인지...

이성적으로 비관되더라도, 의지로 낙관하여야 한다는 그람시의 말을 힘으로 삼아 본다.

 

스테판 에셀의 <분노하라>에서 나온다는 말.

저항이야말로 창조이며, 창조야말로 저항이다... 변방에게 들려줄 좋은 말이다.

 

허균, 허난설헌의 기념관에 가서, 매화를 보고는

한고를 겪고 청향을 발하는 매화, 그것도 변방의 창조성으로 읽는다.

 

유감스럽게도 세상엔 지혜로운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이 있다.

지혜로운 사람은 세상에 자기를 맞추고, 어리석은 사람은 자기에게 세상을 맞추려 한다.

어리석게도 세상을 인간적으로 바꾸려고 노력한다는 것.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처럼 우직한 어리석은 사람들에 의해 세상은 조금씩 새롭게 바뀌어져 왔다는 사실...(57)

 

이런 것이 변방을 찾는 의미다.

상원사 표지석을 쓰면서 '分과 析이 아닌 圓融이 세계의 본모습'임을 생각하며 한 돌에 쓴다. 좋은 말이다.

상원사 동종을 치는 구절도 일품이다.

 

엄청난 충격이 전신을 강타했다.

단정하고 겸손한 모습과 달리 종소리는 높은 파도가 되어 온몸을 덮쳤다.

깨달음이란 우선 이처럼 자신이 깨뜨려지는 충격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옳다.

종소리는 나를 깨뜨리고 멀리 오대산 전체를 품에 안았다.

나는 나를 남겨 두고 종소리를 따라가고 있었다.

오대산 1만 문수보살의 조용한 기립이 감은 눈에 보이는 듯하다.

종소리는 긴 여운을 이끌고 가다가 이윽고 정적이다.

소리가 없는 것을 靜이라 하고 움직임이 없는 것을 寂이라 한다.

1만 문수보살은 다시 산천으로 돌아가고 세상은 적멸이다.(100)

 

이 책을 쓴 이유는 이것이다.

 

중심부에 대한 환상과 콤플렉스가 청산되지 않는한 변방은 결코 새로운 창조 공간이 될 수 없다.

중심부보다 더욱 완고한 아류로 낙후하게 될 뿐이다.

 

신영복 선생이 더욱 건강하여 변방의 축성에 많은 돌을 놓아 주시기를 바란다.

 

 

 

이 책을 읽으며 새로 느낀 말 : 순애보(殉愛譜) 따라 죽는 사랑의 기록... 난 대략 순정한 사랑(純愛譜)으로 생각했는데,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사랑을 위해 목숨거는 일을 일컫는다. 한자에 따라 뜻이 달라진다.

 

41쪽. 미황사의 금강스님... 도서관 글씨를 부탁한 장본인이다.... 장본인...은 사고친 넘을 일컬을 때 쓰는 말이다. 좋은 의도일 땐 '주인공'이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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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rk182s 2012-06-13 14: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왕,, 신교수님 책이 나왔군요,,

글샘 2012-06-14 10:47   좋아요 0 | URL
꼭지가 오래 진행이 못돼서 책이 얇은 아쉬움은 있지만, 내용은 알찹니다.
명불허전이에요.
 
역사의 미술관 - 그림, 한눈에 역사를 통찰하다 이주헌 미술관 시리즈
이주헌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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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마신 술이 덜 깼나보다.

리뷰를 쓰려고 얼핏 본 표지에 '그림, 역사와 동침하다'란 야한 문구가 눈에 뜨인다.

다시 잡고 바로 보니, '그림, 한눈에 역사를 통찰하다'다.

음... 그럼 그렇지. ㅋ

손철주도 아니고 이주헌인데...

 

위대한 행동은 우연과 행운이 만들어낸 작품이 아니라,

철저한 전략과 천재성에서 나온다.

위대한 인물이 가장 위험한 시도를 할 때 실패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들은 항상 성공한다.

그들이 행운을 타고났기 때문에 그렇게 위대한 인물이 된 것일까?

아니다. 자신의 행운을 통제할 수 있었기 때문에 위대한 것이다.

 

그림... 속에는 인간이 바라는 바가 담긴다.

인간은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자기애를 느끼는 나르시시즘을 갖고 있는데,

그 그림 속에 위대한 인물의 위대한 순간, 역사적 순간들이 가득 담기는 것은 그림의 속성상 당연한 바이다.

 

전략적 직관은 두뇌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던 지식이나 경험이

순식간에 조합되어 가장 확실한 문제 해결책으로 거듭나게 하는 능력이다.

전략적 직관이 뛰어난 사람은 이런 심리적인 작용 반작용의 관계를 명료히 통찰해

자신에게 유리한 방법을 순식간에 찾아내는 사람.

 

나폴레옹을 들먹이며 적은 이 문구는 참 멋지다.

그래서 독서 경험, 많은 여행 경험이 필요한 일인데...

컴퓨터 앞에서 디아블로랑 투쟁하는 요즘 아이들을 보면 아쉬운 마음이 많다.

 

스탈린의 열정적인 모습을 남긴 사회주의 리얼리즘,

퐁파두르 부인의 아릅답고 매혹적인 모습을 남긴 프랑스 궁정. 그녀는 루이 15세의 애인이었다.

전쟁에 패배한 프랑스를 걱정하는 왕에게 그녀가 한 말은 시원하다.

 

"그만 걱정하고 쉬세요. 우리 죽은 뒤에 대홍수가 난들 그게 무슨 대숩니까?"

 

내가 다 위안이 된다.

키르히너의 거리의 여자들은 당당하다.

 

창부들은 비록 사회로부터 지탄받는 행위를 해서 돈을 벌고 있지만,

누구를 속이거나 갈취하는 일은 없다.

하지만 사회의 지도층 가운데는 부와 명예를 얻고 지키기 위해 온갖 비열하고 악랄한 수법을 마다하지 않는 이들이 있다.

최소한 창부들은 정직하다.

자신이 어떤 일을 하는지 결코 숨기지 않는다.

그리고 그로 인해 발생한 비판을 묵묵히 감내한다.

하지만 사회의 거악들은 부정한 행위를 하고 있음에도 천연덕스럽게 이를 숨기고

그에 대한 비판도 피해간다. 그들이야말로 '공공의 적'들이다.

 

슈바베의 '무덤파는 이의 죽음'이다.

설명도 멋지다.

 

그녀의 오른손에 들린 작은 불빛은 노인의 영혼이다.

노인의 영혼이 그녀의 손아귀에 든 이상 그도 이 상황을 어찌할 도리가 없다.

죽음은 이렇게 모두에게 평등하다.

그리고 그것은 전혀 예고되어 있지 않다.

이런 죽음의 자로 삶을 재는 자가 지혜로운 자라고 이 그림은 말한다.

 

'카리스마'란 말은 교회에서 '은총의 선물'로 쓰이던 말이었단다.

근데 막스 베버가 '뛰어난 지도자의 능력'으로 재창조 시킨 말이라고...

 

Vanitas vanitatun, et omnia vanitas.

헛되고 헛되다 세상만사 헛되다... 여기서 바니타스 정물이 나왔단다.

 

읽을거리가 많아 유익한 책인데, 좀 재미가 더했으면 더 좋았을 거 같다.

 

--------------

 

1차 대전과 2차 대전은 일어났던 두번의 큰 전쟁을 일컫는 말로, '한국 전쟁'과 같은 고유명사다.

그걸 서수로 쳐서 <제1차>, <제2차>로 부르는 건 <제3차>를 기다리는 재수없는 소리가 된다.

이주헌은 잘 쓰고 있는데, 덧붙인 역사 이야기에선 <제1차>처럼 써서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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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현민의 멘션s
탁현민 지음 / 미래를소유한사람들(MSD미디어)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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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로 살고 싶다... 당신은 당신으로 살고 싶지 않은가...

 

요즘 나의 화두다.

 

인간은 모두 단독자이며 개별자이다.

그런데 환경에 얽매인 인간은 왜소해지고 규정되곤 한다.

거기서 벗어나는 인간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탁현민의 '자유'를 위한 외침과 발버둥이 이 책에 조금 드러나있다.

이 책은 뭐, 책도 아니다.

작가가 저술한 것이 아니니 책이라 보기 힘들다.

제목이 멘션s인 이유도 그렇다.

 

그렇지만, 책보다 많은 생각들을 만날 수 있어 좋다.

꼭 책이 아니어도,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다면 행복한 거 아닌가?

 

기획에 대한 그의 멘션 :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기획이 아니라 기적이다. 기획은 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 일하는 사람이 자기 일에 이정도 소신은 있어야지.

 

지식인과 예술가는 조금 더 빨리, 조금 더 멀리, 조금 더 부지런해져야한다. 그래서 뒤에 오는 사람들에게 여기까지는 괜찮다고 알려줘야 한다... 한국의 지식인과 예술가가 2% 선에 머물러 부족한 점이 이 지점이다.

 

늦었을 때는 이미 늦었다. 조급한 마음으로 그 늦은 것을 되돌릴 길이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그러니, 그대여, 늦었다고 생각하고 천천히 가자. 사랑하는 사이라면 그대를 기다려줄 것이다. 여유를 가져야 괴물한테 지지 않을 수 있다.

 

트위터의 140자 제한은 그만큼 쓰라는 게 아니라, 그 전에 끝내라는 의미다. 관점의 신선함...

하루키도, 존 레논도 젊은 시절, '어디로 가야할지, 또 여기, 거기가 어디도 아닌 곳'에 있다고 느꼈었다는 사실로 청춘들이 위로받기를 바란다... 그래... 역시 여유다. 그리고... 생각하는 자만이 이길 수 있다. 견딜 수 있고...

 

언젠가 가수 김C가 어떤 행사에서 마지막 곡을 소개하며 이렇게 말했다.

"다음 노랜 사랑 노래예요."

관객들은 대부분 뭐 '그게 어쨌다고, 가수들의 노래는 대부분 사랑노래잖아?'하는 표정으로 바라본다.

그러자 김C가 말했다.

"왜 사랑 노래냐구요? 그게 뭐 대수냐구요? 맞아요, 근데요, 결국엔 '사랑' 인 거 같아요. 그게 뭐든. 어떤 일이든."...

삶은 사랑이 목적이고 의미다. 그게 없으면 살 수도, 살 의미도 없다.

김씨가 하고자 했던말이 그래서 탁씨를 쑤신 거다.

 

사랑은 때가 되면 찾아온다. 그러나 노력이 그것을 조금 일찍 다가오게 할 수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사실 사랑은 너를 좋아하는 나의 마음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지만,

사랑의 완성은 내가 어쩌지 못하는 너의 마음이 내게로 오는 것 아니겠는가?

그러니 그것은 온전히 나의 노력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고, 그럴 리도 없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것을 준비하는 자세는 필요하다. 특히나 사랑의 경운 더욱 그러하다.

나의 마음을 열어 놓는 노력과, 그대를 기다리는 노력, 그리고 서로 참아주는 노력,

이런 노력이 결국은 그것을 완성시켜주는 것이다.

... 이런 말도 멋지다.

 

모자라는 사람이 훌륭해지기 위해서는 빨리 인정하고, 빨리 사과하고, 천천히 결정하면 된다...

못난 사람이 되기는 참 쉽다. 인정 안 하고 버티며, 절대로 사과 안 하고,... 속단, 독단으로 밀어붙이면 된다. ㅎㅎ

 

그가 찾는 곳을 뽑은 꼭지는 말랑한 글들이 많다.

 

급한 마음이야 충분히 이해하지만, 발효의 시간을 거치지 않은 빵에는 쫄깃함이 없다.

그 빵은 금세 딱딱해져 먹을 수 없게 되는 법이다.

그러니 청춘들아, 오늘 마흔 근처의 그 남자도 쫄깃한 빵을 씹으며 여태 발효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러니 안심해라. 아직 늦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 필요한 것은 잠시라도 온전한 '발효의 시간'을 가져야 할 때일지 모를 일...(152)

 

그의 상담 멘트들은, 절정이다.

그가 얼마나 열리고 깨인 사람인지 보여준다.

답답할 때, 읽어볼 만 하다.

 

시기, 질투, 부러움을 자격지심, 열등감이 아닌 자극제로 삼은 방법이요~ㅎ

컴플렉스를 극복하는 유일한 방법은 컴플렉스를 인정하는 것.

 

이런 글들로 그득하다.

 

노무현의 죽음에 대한 부채 의식 역시 나와  비슷하다.

 

특정 부분이 정치적 이해나 평가는 박할 수도 있죠.

그러나 그것과 상관없이 그의 죽음이 갖고 있는 비극적 의미는

외면하기가 어려워요.

그리고 그것들에 대해 일종의 채무의식이 있죠.

5,18에 대한 채무 의식이 있는 것과 약간 비슷하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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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피는 삶에 홀리다 - 손철주 에세이
손철주 지음 / 생각의나무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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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손철주가 그림, 한시 등에 얽힌 이야기를 쓴 에세이 모음.

손철주는 가끔, 환장하게 아름다운 우리말을 구사하곤 하는데,

그런 맛에 그를 찾아읽게 되지만, 또 대부분의 글은 심심하기도 하고...

하긴, 뭐, 친구랑 술마시는 대부분의 날이 심심하지 않던가.

심심하게 앉아서 수작을 하는 술맛이 또 술맛중엔 최고인 법이고.

그 친구가 가끔 신이 나서 떠들면, 그날 술맛은 더 제격인 거고 말이다.

 

구름가고 구름와도 산은 다투지 않는데

봄이 오고 봄이 가면 삶은 이운다.(이운다 : 시든다)

짧아서 황홀하다, 말하고 싶다.

 

인생 무상보다 얼마나 말이 이쁜가.

오늘, 나는 짧아서 황홀한 삶, 사랑하여야겠다.

 

삶이 잘못이라면, 삶이 가엾다는 것, 아름답다는 것, 한번 뿐이라는 것.

 

그래, 한번 뿐인 삶, 사랑하여야겠다. 내 앞에 있는 사람을 말이다.

 

한국 문방제우시문보를 펼쳐보면,

흡사 오래된 한지에서 풍기는 습습한 내음과 희부윰한 기색이 피어나오는 듯하다.

문방구를 정인처럼... 여기고,

벼루바닥에 떡하니 버티고 앉은 청개구리 그림은 청초한 문방 생활의 애물마냥 사랑옵다.

 

한지에서 풍기는 습습한 내음, 희부윰한 기색의 한지,

정인(애인)같은 문방구와 청초한 문방 생활의 애물마냥 사랑옵다는... 벼루...

어쩜 그렇게 같은 애옥살이하는 한세상인데, 이쁜 말을 골라 잘 쓰는지...

험한 말 한마디라도 자꾸 내뱉아 버릇하는 이 입을 좀 묶어둬야 쓸는지...

 

예술은 선생이 필요없다. 자기 혼자서 배우는 것(전혁림)

세상은 진작부터 외롭고 쓸쓸하였다.(박경리)

 

훌륭한 말은 어렵지 않다.

그렇지만, 삶에 도움이 되고 빛을 준다.

이런 말을 만나는 일에 홀려 읽고 또 읽는 모양이다.

 

 

 

카스파 다비트 프리드리히, <해변의 수도사>

이 그림을 만나니... 가슴이 콱 막히고, 속이 한편 시원하다.

이런 그림 한 장 남기고 싶다.

 

 

 

 

 

사석원의 그림들은 색부터 균형감까지... 어린아이의 그것을 닮았다.

아름답다.

 

몸집 작지만 고집 세고 성질 급한 자신같은 당나귀에게 그는 꽃을 가득 선물한다.

 

김경의 '뷰티풀 몬스터'를 읽으면서, 요즘 사람들이 밝히는 건 뷰티풀이 아닌 노블티라는데... 과연 그럴까?

 

이 책은 술술 읽히다가,

가끔, 한 꼭지씩은 수도꼭지를 잠그듯,

잠시 멈춰 그림도 보고, 시도 읽어야 한다.

 

삶도 그렇게 살아야 할 것이다.

되는대로 살다가도,

가끔, 한 번씩은 수도꼭지를 잠그고,

물방울 똑똑 떨어지는 소리도 멈출 시간까지... 기다리며 자신을 돌아봐야 한다.

그래야 다시 사는 힘을 얻을 수 있다.

 

굳이 바람이 분다,

에 삶의 이유를 붙일 거 까지야 뭐 있겠는가.

삶은 어차피 계속 이어지고 있거늘,

잠시, 멈추는 일, 그리고 돌아보는 일이 더 소중한 것이고,

그래서 읽는 일이 소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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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하정우, 느낌 있다
하정우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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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알아는 듣지만 사용하지 않는 말도 알고 있다.

'잔돈은 됐어요.' 이런 말들... ㅋ

뭐, 어떤 네가지 없는 여고생은 4만원짜리 피자를 시키고 10만원짜리 수표를 내밀고는,

저런 언어를 구사했단다. 음... 역시... 나는 사용할 수 없는 말임에야...

 

군대를 갔다온 남자 동물들이나 쓸 수 있는 말이 있다.

~하지 말입니다... 이런 말이다.

고참에게 절대로 ~인데요, 같은 말이나 사투리로, ~인데예, ~라고라~ 했다가는 혼나기 십상이다.

군대 용어는 격식체를 갖춰 써야 하므로 '~다, ~까'로 마쳐야 하는 것은 어법에도 맞다.

그렇지만 예전 언어가 시골틱했을 때, 툭하면 사투리 표현이 나왔을 거고, 그래서 줘터지는 일은 흔했다.

그래서 나온 용어,

30대 성인 남자이지 말입니다...

이 어휘를 구사하는 하정우에게 괜히 소주를 한잔 사고 싶다.

말띠 띠동갑이니 뭐, 내가 한잔 산다고 그가 뭐라하진 않을 성 싶다.

 

하정우의 배우로서의 매력은 이 책에서 주가 아니다.

그의 힘들던 시절, 아버지 김용건의 캐릭터는 뭐, 무지 잘나가는 스타도 아니고, 그렇다고 무명도 아닌,

딱, 전원일기 김회장댁 장남의 이미지로 굳어진, 그런 것이었는데,

서울의 달에서 춤선생으로 등장했을 때, 왠지 좀 어색한 그런 느낌도 나는 인물이었다.

그 아들이라고는 하지만, 하정우의 캐릭터는 '추격자의 지영민'으로 굳어졌다.

국가대표의 스키선수나 황해의 조선족, 범죄와의 전쟁의 깡패와는 다른 배우로서의 탁월함을 보여줬던 것 같다.

 

지영민의 캐릭터에 딱 어울리는 짓을 하정우는 하고 있었다.

혼자서 몰두할 수 있는 일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

혼자 있는 시간에 고독하다고 몸부림치기보다는, 그 혼자의 시간을 가득 채울 줄 아는 사람.

그런 사람이 나이에 상관없이 멋진 사람이고, 그래서 그런 사람과는 왠지 소주라도 한 잔 나누고 싶어지는 거다.

 

그의 그림은 그의 마음을 잘 드러내고 있다.

예술과 광대에 대한 생각들과 자유분방한 사고 방식,

고리타분한 세계에 대한 저항과 일탈 대신, 예술로의 승화.

그래서 그의 인물들은 미녀나 몸짱은 거부하고, 자유로운 영혼을 나타낼 수 있는 자유로운 필선과 색으로 채워진다.

그의 그림은 그의 것이므로, 자유다.

 

파란 색은 조금 답답해보인다. 지나치게 조심스러워보인다.

노란색은 왠지 모르게 정상이 아닌 것 같은 느낌.

이런 파란색과 노란색을 함께 쓰면 서로를 다스리면서 재미있는 느낌을 만들어낸다.

'조심스러운 파란색'이 '미친 노란색'을 만나면 정직한 척하면서도 자유로운 느낌이다.

격식차려 꼭 맞는 슈트를 입고 있는데도 더할 나위없이 편안한 사람을 보는 듯...

 

빨간색은 영 불편하다.

이런 빨간색도 검은 색을 만나면 고급스러워진다.

검은색은 무표정한 얼굴처럼 힘이 세다. 화난 사람의 얼굴보다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의 표정이 더 두려움을 준다.

빨간색은 검은색 옆에서 한결 차분해지고 고상해진다.

다 드러내려는 빨강이 속을 완전히 감춘 검정을 만나 균형을 이루게 된다.

 

그러므로 정말 중요한 것은 어떤 색을 사용할지 결정하는 일이 아니라,

어떤 색과 <함께> 사용할지 결정하는 일이다.

'조합'을 거쳐서 각각의 색깔이 가진 부족한 점들이 보완되기도 하고

기대 이상의 시너지 효과를 만들어내기도 한다.(64)

 

화가나 배우가 적은 글 치고는 상당히 멋진 통찰이 잘 드러나 있다.

그가 오래 그림을 그려온 느낌이 잘 살아난다.

캔버스에 유화 등으로 표현하는 그림이 많아 색이 잘 어울리지 않으면,

수채화나 수묵화의 번짐이나 투명한 느낌을 주기 힘든 그림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이 색상론은 인생론이나 사랑론에까지 번져 써도 어울리지 않겠나 싶다.

사람은 그 사람의 인격이나 개성보다,

그 사람이 누구와 함께 어울려 번지고 물들어가는지를 보고 판단하는 일이 흔하니 말이다.

 

대부와 러브어페어를 이야기하다가, 인생론에까지 번진다.

 

물이 끓을 때 불을 줄이면 금방 가라앉는다.

그렇다고 물이 차가워진 것은 아니다.

슬픔 역시 삼킨다고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말런 브랜도는 절제된 감정 표현이 더 격렬한 슬픔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멋지게 연기한다.

 

슬픔에 대한 고뇌는 배우라면 깊이 하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인데,

삶에 대한 고뇌, 고독에 몸서리치는 삶에 대한 체험은 겪어보지 못한 자가 허투루 소화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슬픔과 끓는 물의 비유를 보면, 얼마나 많은 생각을 하고 쓰는 글인지, 느낄 수 있다.

 

훌륭하신 분들이 선거 전에 마구 내놓는 자서전들에서는 멋진 구절들이 많다.

대필 작가들이 훌륭하기 때문이다.

하정우의 글들은 문체가 거칠다. 그게 그의 글이 멋진 이유다.

문체는 아마추어의 그것이지만, 인생은 프로인 것이 멋진 자서전의 조건이다.

프로의 문체를 빌려서 쓰는 윤색된 돈많은 인생들의 인생이 결국 아마추어처럼 초라한 것도 그러한 이유고.

 

그의 사랑 이야기는 건강하다.

결혼 정보 회사를 비꼬면서 하는 그의 사랑 이야기...

 

내 손가락이 저 사람의 손가락에 살짝 닿았으면 좋겠다.

내 손으로 그사람의 손을 꽉 잡아 놓치고 싶지 않다.

그 사람을 내 쪽으로 당겨서 깊숙하게 끌어안고 싶다...

 

진짜 사랑은 오가닉한 것이다.

몸과 마음을 열고 느끼는 것이다. 다른 외부 조건들을 잊고 서로에게 빠져드는 것이다...

이렇게 사랑은 쉽게 빠져드는 감정인 동시에 어렵게 쌓아가는 관계이기도 하다.(213)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연기와 연출을 보면서 이렇게 적는다.

 

꿈을 빨리 이루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그 꿈이 충분히 익을 때를 아는 것이다.

 

이것은 그의 배우로서, 화가로서, 인간으로서 가지고 있는 철학이겠지만,

특히 이 책과 관련지어 화가로서, 무르익어가려는 그의 태도에 박수를 보낸다.

 

인간의 과거는 모두 미로처럼 엉켜있다.

그 시간은 지날수록 희미해지고, 엉켜있는 실타래는 끄집어내려 할수록 더 헝클어지고 만다.

그 기억의 실마리는 여간해서 솔솔 풀려나오지 않는 법인데,

하정우의 그림그리기는 그런 면에서 과거를 기억하는 가장 좋은 기억법 중 하나가 아닐까 한다.

그런 면에서 그의 대본 공부하기, 습작 데생 들도 삶에 대한 애정을 가장 적극적으로 보여준 페이지들이었다.

 

사람에 대한 사랑은 결국 삶에 대한 사랑에서 우러나는 카페인 같은 것이다.

그 카페인에 중독되어 삶이 더 황폐해지기도 하지만,

그 카페인이 사람을 더 활력있게 만들기도 하는 법이니...

 

결국, 삶의 화두는 사람과 사랑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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