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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남들의 세계사 - 2014년 제47회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작 ㅣ 죄 3부작
이기호 지음 / 민음사 / 2014년 7월
평점 :
김승옥의 '염소는 힘이 세다'에서 배운 걸까?
이 책은 '들어 보아라' 같은 구절을 맨 앞에 배치하고 한 권의 소설을 끌고 간다.
아무튼,
들어본 결과,
'범죄와 폭력의 느와르'의 대명사 '그분'으로 시작되는 이야기인데,
이 소설은 말도 안 되는 개그로 일관하는 코믹한 소설이지만,
또 이 소설이 담고 있는 배경 이야기는 말도 안 되던 시절이 있었던 '검은 noir' 어둡던 시절의 이야기다.
광주의 폭동을 진압한 전두환 가카의 취임과 미국의 움직임에 반하여 부산에서 미문화원에 방화가 일어난다.
방화를 일으큰 자들이 기댄 곳은 지학순 주교가 있던 원주 교구의 한 성당.
이런 이야기를 배경으로 삼아,
재미있는 곁가지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데,
그 재미 속에는 당시의 말도 안 되는 폭력적 고문의 야만이 그대로 묻어 있다.
21세기의 대한민국에 드리워진 그림자는 참 여러 겹을 가지고 있다.
아직도 극복되지 못한 <양반 - 상놈>의 구도는 여전히 '자네 본관은 어디인가?'라는 질문을 하게 하고,
심지어 그것을 뿌리찾기 교육이랍시고 학교에서 행한다.
그 <양반>들이 일제 강점기의 <친일>을 하고, 해방 후에도 <권력>을 독점했다.
거기에 <독재>와 <재벌>의 세력이 지배 구도를 유지하고 있어서,
그 이권 다툼 속에서 특이하게 '교육열'이 발생하였고,
속도와 양을 중시하지 방향이나 질에는 관심없는 상황이 이어졌다.
그래서 온갖 조사에서 질적으로 최하위권이고, 양적으로만 부풀어보이는 저질 국가에 살고 있다.
미래는 암울한데,
사람들은 '편견'을 '상식이나 통념'이라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고,
불합리한 양반식 가정 구도를 미풍양속이라 착각하여
고부갈등이 특이하게 불거지는 그런 나라가 되었다.
성적으로 문란하면서도 여성에게 처녀성을 요구하는 변태성욕자가 그득하고,
퀴어 축제에는 기독교를 참칭하는 아줌마들이 북을 두드리며 나타나는 현실이다.
그 밑바탕에 이 소설의 '검은' 스토리가 잠겨 있다.
내가 많이 미안하고 미안합니다.
내가 지금 쓸 수 있는 말은 이게 전부입니다.(130)
보통 이런 말의 포인트는 '미안'에 놓이지만,
이기호는 '쓸 수 있는'을 볼 줄 아는 사람이다.
성석제를 뛰어넘을 수 있는 작가를 만난 기분이랄까?
성석제는 시대를 의식하지 않으려는 작가라면,
이기호는 시대를 온몸으로 끌어안으려는 작가여서 더 애정이 간다.
온몸에선 땀이,
마치 모든 땀구멍이 한꺼번에 열리기라도 한 듯,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러면 동시에 죄가,
없던 죄마저도, 기어이 생겨버리고 마는 것이었다.(140)
아~
내가 중학교 때 수업료 밀린다고 얻어 맞고,
고등학교 때 이런 저런 이유로 얻어 맞고,(단추가 떨어졌거나, 배지가 떨어졌거나, 조금 지각을 하거나 간에)
군대 가서도 기가 눌려 얻어 맞던 기억이 난다.
대학 시절도 경찰서 잡혀가면 무던히 많이 맞았다.
그것은 없던 죄를 만드는 기제였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린 모두 형제들이고,
이 세상은 두려운 한 명의 형과(카인)
두려움에 떠는 수만은 동생들로, 차남들로(아벨) 이뤄진 것이라고,
그것이 바로 신의 뜻이라는 말씀.
더 큰 문제는 우리 차남들 스스로가 형을 두려워하다가
숭배마저 하게 된 상황,
신보다 형을 더 믿게 된 현실을 개탄(279)
이 부분에 가서야 소설의 제목에 대해서 이해하게 되었다.
왜 '차남'이 아니라 '차남들'이어야 했는지,
그리고 '세계'가 아니라 '세계사'여야 했는지...
어찌하여 독재자는 국민을 두려움에 떨게 하고,
국민은 독재자를 숭배하게 되었는지를 생각하게 된다.
기형도의 '홀린 사람'이 떠오른다.
나복만은 홀린 사람들 틈에서 스러져간 한 인물인 것이다.
사회자가 외쳤다.
여기 일생 동안 이웃을 위해 산 분이 계시다.
이웃의 슬픔은 이분의 슬픔이었고
이분의 슬픔은 이글거리는 빛이었다.
사회자는 하늘을 걸고 맹세했다.
이분은 자신을 위해 푸성귀 하나 심지 않았다.
눈물 한 방울도 자신을 위해 흘리지 않았다.
사회자는 흐느꼈다.
보라, 이분은 당신들을 위해 청춘을 버렸다.
당신들을 위해 죽을 수도 있다.
그분은 일어서서 흐느끼는 사회자를 제지했다.
군중들은 일제히 그분에게 박수를 쳤다.
사내들은 울먹였고 감동한 여인들은 실신했다.
그때 누군가 그분에게 물었다, 당신은 신인가
그분은 목소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당신은 유령인가, 목소리가 물었다.
저 미치광이를 끌어내, 사회자가 소리쳤다.
사내들은 달려갔고 분노한 여인들은 날뛰었다.
그분은 성난 사회자를 제지했다.
군중들은 일제히 그분에게 박수를 쳤다.
사내들은 울먹였고 감동한 여인들은 실신했다.
그분의 답변은 군중들의 아우성 때문에 들리지 않았다.(기형도, 홀린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