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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랍어 시간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1월
평점 :
아이를 위해 1층 집으로 이사를 간 여자가 있었다.
거실에서 줄넘기 연습을 해도 된다고 그녀가 말하자 아이는 물었다.
"지렁이랑 달팽이들이 시끄러워하지 않을까?"(22)
법원에서 아이를 빼앗기고 양배추만 먹는 엄마를 본 아이,
그러다 엄마 토끼 되겠다.
온 몸이 초록색 되겠어.
그런데 왜 토끼는 초록색이 되지 않는다니?
풀만 먹는데,
그거야, 토끼는 당근도 먹으니까.(155)
이런 아이를 잃고, 여자는 언어를 잃는다.
이 소설은 '언어'가 가진 오묘함을 섬세하게 찾아보는 이야기이다.
전체적인 줄거리와 상관없이,
희랍어 선생은 시각을 잃어 가고,
주인공 여자는 언어를 잃는다.
그 두 가지가 우리에게 얼마나 소중하고 섬세한 표현의 도구인데,
우리는 그것들에 대해 얼마나 아무 생각없이 쓰고 있는 것인지...
셀 수 없는 혀와 펜 들로
수천 년 동안 너덜너덜해진 언어.
그녀 자신의 혀와 펜으로 평생 동안 너덜너덜 하게 만든 언어.
하나의 문장을 시작하려 할 때마다 늙은 심장이 느껴졌다.
누덕누덕 기워진, 바싹 마른, 무표정한 심장.
그럴수록 더 힘껏 단어들을 움켜쥐었다.
한 순간 손아귀가 헐거워졌다.
무딘 파편들이 발등에 떨어졌다.
팽팽하게 맞물려 돌던 톱니바퀴가 멈췄다.
끈덕지게 마모된 한 자리가 살점처럼, 숟가락으로 떠낸 두부처럼 움푹 떨어져 나갔다.(165)
그래서 그는 지나간 언어 '희랍어'를 배우러 간다.
그녀는 공간을 차지하는 것을 싫어했다.
누구나 꼭 자신의 몸의 부피만큼 물리적인 공간을 점유할 수 있지만,
목서리는 훨씬 넓게 퍼진다.
그녀는 자신의 존재를 넓게 퍼뜨리고 싶지 않았다.(51)
말소리가 울리는 것에 깜짝 놀란 나이가 있었다.
그렇게 남들과 나 사이에 언어가 끼이는 일이 서먹한 시절.
아주 가파르고 거센 억양을 쓰는 아이들 사이에서 나는 친구가 없었다.
아니, 친구를 만들 수 없었다.
문학을 가르치다 언어를 놓쳐버린 그녀처럼,
나 역시 문학의 언어는 나의 말이 아닌 셈이다.
가장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은 그녀를 이해한다는 그의 말이었다.
그것이 진실이 아니라는 것을 그녀는 담담하게 알았다.(55)
이해한다는 말은 이해할 수 없다.
아름다운 사물들은 믿으면서
아름다움 자체를 믿지 않는 사람은 꿈을 꾸는 상태에 있는 거라고 플라톤은 생각했고,
그걸 누구에게든 설득해낼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오히려 꿈에서 깨어난 상태에 있다고 믿었습니다.(93)
희랍어와 플라톤을 통해,
이데아적인 세계와
현실 세계의 이해 불가능에 대하여 생각하게 하는 참한 소설이다.
명쾌한 세상과
흐릿한 세상에 대해 고민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