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혼
고은 지음 / 창비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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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산히 부서진 이름이어!

허공중에 헤어진 이름이어!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어!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어!

 

심중에 남아 있는 말 한 마디는

끝끝내 마저 하지 못하였구나.

사랑하던 그 사람이어!

사랑하던 그 사람이어!

 

붉은 해는 서산 마루에 걸리었다.

사슴의 무리도 슬피 운다.

떨어져 나가 앉은 산 위에서

나는 그대의 이름을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부르는 소리는 비껴 가지만

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멀구나.

 

선 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어도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어!

사랑하던 그 사람이어!

사랑하던 그 사람이어!(김소월, 초혼)

 

사실인즉 이 초혼이 저 관동대지진으로

왜인에게 죽어간 조선 동포 원혼들을 부른 넋두리라 하거니와(221)

 

이것이 고은의 초혼곡이 이어지는 까닭이다.

 

한국의 현대사는 그야말로 비극의 역사이고,

그래서 한국의 서정시는 초혼의 시여야만 했을 것이나,

그러나,

초혼하는 이의 행위 역시 제한을 받았으니...

 

아니 그제

아니 어제

남녘 바다 세월호

꽃 같은 내 딸

잎 같은 내 남편

다 죽어도 아직껏 펄펄한 목숨 원한

어린 신위들

얼니 신위 더불은 신위들

그 얼마나 노여무랴(240)

 

근대의 역사와 함께

한국의 현대사는 슬픔의 기록이 연속된 것이었다.

광주에서, 거창에서, 일본 오키나와에서, 만주에서...

 

역사는 그칠 줄 모르는 폭력의 난무에 눈감았습니다.

아니

역사는 자주 폭력의 실체였습니다

나의 피리소리는

끝내 저주받았습니다

나의 노래는 끝내 추락하는 축복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러나'는 기어이 불멸입니다(176)

 

슬픈 역사에 기대어

'그러나'의 노래를 써야하는 슬픈 시인의 운명...

 

생이나

시나

그런 한토막도

심한 군더더기(단언, 부분)

 

이제 여든이 넘어 아흔을 바라보는 '망구'의 시인이

자신의 삶은 군더더기 같다 여기면서도

자신이 불러야 할 노래를 부른다.

그 노래는 초혼일 뿐.

 

죽은 사람이 너무 많은 나라에서

나는 살았다(두메에서, 25)

 

그래서 그는 초혼을 부른다.

초혼곡은 망자를 위한 노래이기도 하지만,

살아남은 자들에게도 필요한 노래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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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코의 미소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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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하다 보니 올해는 한국 소설을 많이 읽게 되었다.

출퇴근 시간에 팟캐스트로 '라디오 독서실'을 들은 덕도 있다. 

아마도... 그 중의 최고작이 아닌가 싶다.

 

표지가 내용을 잘 함축한 듯한 느낌이다.

여느 에스 라인 모델에 비하면

좀 처져내린 어깨에 다듬지 않은 머리를 한 여자 아이의 측후방 뒷모습.

조금 서럽고

툭 건드리면 눈물이 주르르 흐를 듯 싶다.

 

인간이 그 알량한 권력 때문에 무고한 사람에게 누명을 씌워 죽일 수도 있는 존재라는 것은 차마 상상조차 못했던 여자애였다.(언니, 나의 작은 순애 언니, 106)

 

아무도 우리를 죽일 수 없어.(언니, 121)

 

사형은 대법원 판결 열여덟 시간 만에 집행되었다.

세상은 사람에 대한 사람의 사랑을,

제 목숨을 몇 번이고 팔아서라도 사람을 살려내고 싶다는 그 간절한 마음을 도리어 비웃었다.

사람에 대한 사랑 따위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그러니 너희 힘없는 인간들은 언제나 조심하고 사는 것이 좋을 거라고.(108)

 

저희 고향에서는요... 군인들이 전쟁 막바지에 동네 여자들과 아이들을 모두 부역자로 몰아 총살했어요.

학교 운동장에 모이라고 한 다음에 줄을 세워 다 죽여버렸대요.(111)

 

구역질이 나는 역사다.

이 사법살인의 결과를 그 딸년이 부정했다가 곤란을 겪기도 했다.

국가는 사죄해야 한다.

일본에게 뭐라고 하기 전에, 자신들의 과오부터 사죄해야 한다.

그것은 '신짜오'의 베트남에도 마찬가지다.

 

, 그것은 허영심, 공명심, 인정욕구, 복수심 같은 더러운 마음들을 뒤집어쓴 얼룩덜룩한 허울에 불과했다.(쇼코의 미소, 35)

 

새벽에 눈을 뜨면

사람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심지어 우리가 밟고 있는 이 단단한 땅도 결국 흘러가는 맨틀 위에 불완전하게 떠 있는 판자같은 것이니까.

그런 불확실함에 두 발을 내딛고 있는 주제에,

그런 사람인 주제에 미래를 계획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니.(쇼코, 57)

 

젊음이라는 것은 그저 황홀한 것만은 아니다.

아직 불안한 삶이 막막하게 펼쳐진 광야에 불과하다.

더군다나 꿈, 이나 미래, 를 생각하면 더 그렇다.

앞만 보고 달리는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세계.

프로작을 먹어야 하는 사람들의 세계뿐 아니라, 좀 돌아보며 살아야 한다.

 

네가 다시는 그렇게 고통받지 않았으면 좋겠다.

네가 인생을 너무 심각하게 살지 않았으면 좋겠어.

마음대로 되는 일이 아니라고 해도,

적어도 네가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잊지 않았으면.(먼 곳에서 온 노래, 205)

 

학번이 벼슬입니까?

민주주의 사랑한다고 하셨어요?

이 작은 집단에서도 자기보다 약한 사람 위에 서야 후련한 사람이 무슨 민주주의운운이에요.

인간이 평등하다는 개념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잖아요.(먼 노래 199)

 

5월 광주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우리가 사는 사회가 얼마나 병들었는지

대학에 와서야 토론할 수 있게 된 스물, 스물 하나의 아이들이 그게 너무 아프고 괴로워 노래를 불렀어.

나는 우리 노래가 스스로에 대한 다짐이었다고 생각해.

나만은 어둠을 따라 살지 말자는 다짐.(201)

 

괴물과 싸우는 자 괴물이 되기 십상이다.

이 땅의 민주투사들은 이미 괴물이 되어가고 있다.

 

페미니즘의 이름으로 서로 권위를 내세우고,

남녀의 알량한 경험으로 서로 싸운다.

 

그 경험들이 '다짐'이 되지 못하는 한,

추억만으로 학번이라는 기득권의 벼슬을 휘두르는 꼰대에 불과한 자들도 많다.

겸손하게 다짐해야 한다.

우리 노래들이 담아내려 했던, 그 다짐들을 잊지 않으려 해야한다.

84년 생인 작가가, 이런 세계를 그려낸다는 일이 그저 신비롭기만 하다.

 

어떤 연애는 우정 같고, 어떤 우정은 연애 같다.(쇼코, 24)

 

내게 이 소설 읽기는, 연애같기도 했고,

또한 이 소설들을 통해 우정을 나누거나 감격을 느끼기도 했다.

 

오래살아가는 일이란,

사랑하는 사람들을 먼저 보내고 오래도록 남겨지는 일이니까.

그런 일들을 겪고도 다시 일어나 밥을 먹고 홀로 길을 걸어나가야 하는 일이니까.(미카엘라, 239)

 

중국으로 멀리멀리 선생님을 떠난

지민이 부디부디

잘 지내고 있기를 빈다.

 

간절히 빈다.

 

이제 첫 소설집이지만,

앞으로 그의 건투를 빌면서,

태그에 이름을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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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고 쓸모없기를 문학동네 시인선 84
김민정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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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제목이 그럴싸 해서

또 김민정은 들어본 적도 있어서 샀다.

 

그가 '아름답고 쓸모없기를' 바랐는데,

둘 중의 하나는 맞고 하나는 아닌 듯.

 

돌의 쓰임을 두고 머리를 맞대던 순간이

그리고 보면 사랑이었다.(아름답고 쓸모없기를, 부분)

 

좀 시시하다.

'시시하다'란 시읽은 느낌을 쓴 '진은영'의 책도 읽었는데,

역시 시시했다.

 

요즘은 대세가 소설인가?

이명박근혜의 시대를 살아가면서 다시 서사의 시대로 회귀하는건지...

 

언어를 벼리고 절차탁마해야하는 시인에게,

 

나주곰탕집에서

뚝배기에 담았다 쏟았다

추렴하여 모은 국물은...

 

이렇게 틀리게 적는 한 단어는 치명적이란 걸, 알까?

 

추렴은 돈을 나눠 거두는 '갹출'이고,

저런 행위는 '토렴'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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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피
김언수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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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는 씨발 정신이 없다.

니는 너무 멋있으려고 한다. 건달은 멋으로 사는 거 아니다. 의리? 좆까지 마라. 인간이란 게 그리 훌륭하지 않다. 별로 훌륭하지 않은 게 훌륭하게 살려니까 인생이 이리 고달픈 거다. 니가 진짜 동생들이 걱정되면 손에 현찰을 쥐여줘라. 우리처럼 가진 게 없는 놈들은 씨발 정신이 있어야 한다. 세상은 멋있는 놈이 이기는 게 아니고 씨발놈이 이기는 거다. 그래야 입에 풀칠이라도 한단 말이다.(305)

 

부산이 배경인 소설.

'짜달시리' 같은 말은 경상도 사람 아니면 이해하기 힘든 말일 듯.

송도 앞바다(암남동)를 '구암'이란 지명으로 만들었고,

아미동, 완월동 등의 이름 속에서 건달들의 삶과 검은 세계가 펼쳐진다.

황정은의 '씨발됨' 이후에, '씨발 정신'까지 등장한다.

 

나는 내가 안 부끄럽다. 나는 내 주어진 조건 속에서 열심히 살았다. 그럼 뭘 팔아서 그 어린 나이에 일곱이나 되는 동생을 먹여 살리는데?(326)

 

문씨 아저씨가 공구로 철근을 구부리고 망치로 때려서 장미 문양을 만들었다.

가시가 너무 뽀족해서 도둑이 다치겠는데요?

창살은 원래 그러라고 만드는 거다.

그럼 장미 문양은 왜 넣는데요?

, 도둑만 사는 세상은 아니니까.(297)

 

이런 정신이 씨발 정신일까?

 

건달의 삶이란 결국 열심히 죽을 쑤어 개 좋은 일을 하는 거(257)

 

막 던지다 보면 말들은 엉키는 법.

인숙도 희수도 그런 엉킴에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런 것들에 신경을 쓰기에는 삶이 너무 고단했고 지저분했고 복잡했다.(184)

 

양동에게 건달은 가오였다.

건달은 가오가 상하면 그날로 건달짓 그만둬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102)

 

희수라는 주인공 건달은 가오의 표상이다.

멋진 건달이다. 양아치와 구별되려 무지 애쓴다.

하지만, 그 가오는 언제고 구겨지게 되어있고,

뜨거운 피는 식는 날이 오게 마련이다. 

 

달콤하고 쉬운 것에는 모두 독이 있는 법이다.

돼지를 배불리 먹이는 것이 돼지가 예뻐서가 아니듯.(93)

생활이란 이상한 것이다. 빚이 빚을 부르고 빚이 굴러서 더 큰 빚을 부른다.(361)  

건달에게 큰돈이 생긴다는 것은 그만큼 삶이 더 위험해졌다는 뜻.(365)  

달달하고 맛있는 것에는 항상 독이 들어 있다.(413)

 

삶은 이렇게 팍팍하다.

힘든 생활, 가난은 대물림되기 쉽다.

그 고리를 끊으려면 특별한 노력 내지는 운이 있어야 한다.

  

햇빛에 반사된 물고기 비늘이 사금처럼 반짝거렸다.

살아보겠다고, 그저 한번 살아보겠다고 펄떡펄떡 뛰는 것들은 언제나 저렇게 싱싱하고 반짝거린다.(96)

 

예쁜 문장들도 있고,

'후까시' 잡는 건달들도 멋진데, 그 삶은 참 구질구질하다.

 

욕은 정배가 듣고, 원한은 희수에게 오고, 돈은 노인들에게 간다.

예전에는 그런 게 보이지 않았는데 마흔이 넘으니까 그런 게 보인다.

예전에는 이 일이고 저 일이고 힘든 줄도 모르고 했는데 막상 보이기 시작하니까 힘들어진다.(341)

 

아랫사람들이 보기에는 저런 쓰레기가 어떻게 승승장구하는지 궁금하겠지만 윗사람들이 보기에는 얄밉고 치사한 일들을 처리해주는 정배처럼 귀여운 놈도 없다.(342)

정배는 진정한 개자슥이지, 그러니까 어디 쓸데가 있을 거다.(586)

 

재미있는 소설이고, 흥미진진 책을 잡고 뒹굴게 만드는 소설이다.

다만, 요즘 깡패들 이야기가 너무 많아서,

그들의 세계가 대한민궁의 표준인듯 싶어 좀 씁쓸하긴 하다.

깡패 영화 말고는 재밌는 영화가 별로 없으니...

가끔 반공 영화는 짜증나고, 친일파 영화는 더 열받느니...

 

아버지란 좆같은 것이다. 원래부터 좆같았거나 아님 아버지가 되면서 서서히 좆같아졌거나. 문밖에는 칼바람이 불고 무서운 승냥이 떼가 돌아다닌다. 아버지는 힘이 하나도 없는데, 애기들은 계속 앵앵거린다. (576)

 

사업은 원래 구질구질한 거다. 인생도 마찬가지고. 원래 구질구질한 것은 구질구질하게 처리해야지 그걸 깔끔하게 하려고 하면 다 돈으로 처발라야 한다.(401)

 

삶이 슬프다는 것을 마흔이 넘으면 알게 된다.

불혹은 어쩌면,

어떤 것에도 재미가 없어지는, 부록같은 나이인지도 모른다.

 

비가 내리면 빗소리 들으면서

그렇다고 축축하고 꿉꿉한 분위기 마르도록 고기라도 구워서

한잔 하면서 한 가을 또 넘길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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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프리쿠키 2016-09-28 1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에 놀래서 들어왔어요ㅎㅎ불혹에 대한 내용 심히 공감합니다^^;
 
분홍 리본의 시절
권여선 지음 / 창비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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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에서 '리즈 시절'이란 말이 있다.

한창때...라는 이야기인데, 권여선은 '주정뱅이'가 된 시점에서 '분홍 리본의 시절'을 돌아본다.

 

내가 저분을 입으로 빨아서 그려...(86)

 

이렇게 외설스러운 말의 재미가 이 책엔 조금 있다.

 

선배님, 어떤 여자한테 배우신 거예요?(196)

 

분홍 시절...

객지에서 지냈던 나의 분홍 시절,

그 친구들이 서른 해가 넘어서 만나더니,

다들 <기죽어 지낸> 그 시절,

왜 그렇게 주눅들어 지냈는지 모른다며 소식을 전한다.

 

모든 좋은 날들은 흘러가는 것
잃어버린 주홍 머리핀처럼
물러서는 저녁 바다처럼.

좋은 날들은 손가락 사이로
모래알처럼 새나가지
덧없다는 말처럼 덧없이,
속절없다는 말처럼이나 속절없이.

수염은 희끗해지고
짓궂은 시간은
눈가에 내려앉아 잡아당기지.

어느덧 모든 유리창엔
먼지가 앉지
흐릿해지지.

어디서 끈을 놓친 것일까.
아무도 우리를 맞당겨주지 않지
어느날부터.
누구도 빛나는 눈으로 바라봐주지 않지.

눈멀고 귀먹은 시간이 곧 오리니
겨울 숲처럼 더는 아무 것도
애닯지 않은 시간이 다가오리니

잘 가렴 눈물겨운 날들아.
작은 우산 속 어깨를 겯고
꽃장화 탕탕 물장난 치며
슬픔 없는 나라로 너희는 가서
철모르는 오누인 듯 살아가거라.
아무도 모르게 살아가거라.(김사인, 화양연화)

 

 

나와 비슷한 시절에 대학을 다녔을 그는

나와 다른 기억으로 가득한 모양이다.

 

이 책에서 역시 음주 장면은 많이 등장하지만,

'약콩이 끓는 시간'에서
분홍 리본의 시절은 처참하다.

 

꽃다운 나이...란 뜻의 화양연화는,

언제 꽃필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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