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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트 사자의 서
허일범 외 / 불교춘추사(불교영상회보사) / 1998년 8월
평점 :
품절
가와므라 아쯔노리(河邑厚德)와 하야시 유카리(林由香里)가 서양에 '티베트 사자의 서'가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 그리고 실제 티베트에는 갈 수 없었지만, 그 전통이 유구히 이어지는 라다크에서 '사자의 서'가 어떻게 활용되고 있는지를 잘 적은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며, 태어남과 죽음은 각각 인생이란 선분의 한 끝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내 생각이 많이 틀렸다고 느낀다. 태어남은 없던 선분이 갑자기 생겨난 것도 아니고, 죽음이 갑작스런 선분의 소멸도 아닌 것이다. 원래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연관되어 있었고, 그리하여 내가 생긴 것이고, 내 육신이 수명이 다하면 다시 세계로 이어지는 것이 나의 존재인 것이다. 이것이 <空>이다.
공이란 것이 이렇게 뇌리에서는 그럴 듯하게 그려지다가도, 주위 사람들의 죽음을 접하고 나면 막상 머릿속의 사념은 '말짱 황'이 되어 버리곤 한다.
티베트에 대한 책들을 읽다 보면, 1959년 중국의 티베트 침략의 야만성이 잘 드러난다. 무서운 일이다. 그런데도 달라이 라마는 중국인을 용서한다니... 대단한 일이기도 하다.
<죽음의 책>이란 '사자의 서'는 죽음 이후의 세계(발도)에 대한 이야기다 부처님께서는 연옥같은 거 없다고 하셨지만, 티베트 밀교에서는 죽음 이후의 세계를 그림으로써,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 벗어난다.
사자의 머리맡에서 <육신의 죽음 이후에 계속 진행되는 일>을 지키며 49일 동안 사자의 서를 읽어 준다. 이런 것들을 보면서 자란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서 덜 두려워하고 자연스럽게 <호스피스>에 익숙해지는 환경이 될 법도 하다.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죽음>을 관념적으로 이겨낸 슬기가 담긴 책이라 하겠다. 이 책은 오래 전에 지어진 책이라서 제본 상태가 조잡하다. 그래서 페이지를 넘기고 책을 꽉 잡고 있기가 상당히 힘들었다. 요즘 나온 책들로 읽었다면 훨씬 부드럽게 읽혔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 책을 읽으며, 우리나라의 <죽음>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정말 별스러운 죽음에 대한 관념과 의식에 대해서... 예전엔 사람이 죽으면 우선 동네 사람들이 모여서 '축제' 준비를 하고, 피붙이들이 다 모이면 <염>을 한다. 그리고 입관하여 삼일이나 오일이 지난 뒤(박통은 구일장을 지냈다, 죽고나서도 끈질긴 집착...) 선산으로 모셔 하관하고 토장을 한다. <好喪(호상)>의 경우 정말 동네 축제가 될 만도 하다.
그러나, 요즘의 <죽음>은 정말 번잡하기 그지없다. 오죽하면 황동규는 <풍장>을 하고 싶다고 했을까... 일단 죽고 나면 병원의 <영안실>을 잡기 위해 모든 인맥이 동원된다. 핵가족으로 생활 양태는 바뀌었는데도 관념적인 문화가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 사례라 할 것이다. 그래서 영안실을 잡고 나면, 영안실 옆의 식당에 음식을 주문해야 한다. 그리고 또 손님 접대할 젊은이들을 섭외해야하고... 장지를 잡아야 된다. 선산이 있더라도 거리가 멀면 상당한 부담이 되고, 공동묘지를 잡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다. 그래서 노인네들이 성당에 다닌다는 이야기가 있다던가... 저녁이 되고, 문상객들이 오면 상주는 절을 받고, 곡을 하고, 술상을 차리게 한다. 이 일이 이틀 계속 되면 상주는 그야말로 탈진하게 된다. 마지막 발인날은 아침 일찍부터 선도차, 장지와 연락을 취해야 하고... 시간에 맞춰서 장지 도착해서 방위 잡고, 포크레인 진도 맞춰 매장하고... 떡이되어 돌아온다...
내가 죽었는데, 사람들이 모여서 장례지낼 걱정하고, 그 숱한 절차들을 거치고... 그 비싼 땅에 묻어 놓고, 아내와 자식 죽고 나면 공동묘지 인부들이나 간혹 와서 벌초할 그런 죽음을 맞고 싶지는 않다. 공병우 박사님이 그러 하셨듯이, 내 죽고 나면 이왕 풍장 해주지 못할 바에야, 그저 기증할 수 있는 거 있으면 모두 기증하고, 대학병원에 줄 수 있는 것 있으면 다 주고, 그러고 나중에 나중에 쓸모가 정히 없어질 무렵에는 고이 모아서 화장하고 이 작고 푸른 별 어딘가에 훌훌 뿌려버리면 내 죽은 육신이야 어차피 쓸모 없는 것을... 가벼이나 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난 정말 간단하게 죽고 싶다. 내 죽고 나서 울어줄 사람이 없다고 아쉬워한다는 것 자체가 집착이고, 소유에 대한 불쾌한 욕망이 아닐는지... 우리 산하를 뒤덮은 고봉밥과 같은 반원형 무덤떼를 보면, 이천 년 불교 국가였던 나라치곤 희한하게 육신에 집착하는 우리를 발견하고, 죽은 자가 산 자의 땅을 그렇게 차지하고 앉은 걸 보면 소유욕의 삐뚤어진 발현을 보는 듯 불편하다. 하긴 요즘은 장례예식장과 납골당을 만든다고들 하긴 하지만, 그 또한 <장삿속>의 놀음에 지나지 않아 보여 죽음에 대해 얽매인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아, 그렇네. 살아 있을 때, 그야말로 삶은 맘껏 누리고, 죽고 난 뒤에는 그야말로 가벼이 휘~~~이~~~ 떠나가면 그만이리. 티베트 사자의 서를 읽고 나니, 황동규의 <풍장1>이 새삼 반갑고, 동지를 만난 듯 읽힌다.
풍장 1
황 동 규
내 세상 뜨면 풍장시켜 다오
섭섭하지 않게
옷은 입은 채로 전자 시계는 가는 채로
손목에 달아 놓고
아주 춥지는 않게
가죽 가방에 넣어 전세 택시에
싣고
군산(群山)에 가서
검색이 심하면
곰소쯤에 가서
통통배에 옮겨 실어 다오
가방 속에서 다리 오그리고
그러나 편안히 누워 있다가
선유도 지나 무인도 지나 통통 소리 지나
배가 육지에 허리 대는 기척에
잠시 정신을 잃고
가방 벗기우고
옷 벗기우고
무인도의 늦가을 차가운 햇빛 속에
구두와 양말도 벗기우고
손목시계 부서질 때
남몰래 시간을
떨어트리고
바람 속에 익은 붉은 열매에서 툭툭 튕기는 씨들을
무연히 안 보이듯 바라보며
살을 말리게 해 다오
어금니에 박혀 녹스는 백금(白金) 조각도
바람 속에 빛나게 해 다오
바람 이불처럼 덮고
화장(化粧)도 해탈(解脫)도 없이
이불 여미듯 바람을 여미고
마지막으로 몸의 피가 다 마를 때까지
바람과 놀게 해 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