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엔 부처도 갈 수 없다 - 깨달음으로 가는 외길
대우 지음 / 현암사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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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그 곳엔 부처도 갈 수 없다. 그 곳은 없다. 부처도 없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대우 스님의 법강을 적어 놓았다.

지난 번 읽은 선으로 읽는 금강경이 <너무 쉽게> 풀이되어 있어서, 참 고마웠는데, 이 책에는 그 책보다 좀 어려운 말들이 많이 튀어 나왔다. 과학에 비유를 든 것도 많고... 한자어도 어려운 것이 많고... 선문답도, 게송도 낯설고 어렵다.

그렇지만 요지는 하나다. 선 지식이란 것은 채워나가는 것이 아니라, 비워나가는 것이라는 하나. 그리고 그 하나를 깨닫지 못하고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바라봐서는 안 된다는 사실. 이 둘이 하나라는 사실.

어리석게도 이런 책을 읽으면, 뭔가 알아간다는 착각이 들고, 나를 비우고 있다는 망상을 한다.

어리석고 또 어리석도다.

오늘은 적게 먹으려고 노력했다. 적게 먹으려고. 적게 먹으면 어떻게 되어서가 아니라, 그저 적게 먹으려고 노력했다. 천천히 꼭꼭 씹어 먹었다. 고혈압에는 체중 감량이 필수라는데...

살을 빼려고라기 보다, 체지방이라도 자꾸 뭔가를 가지는 건 미운 거란 생각이 들었다.

자꾸 뭔가 생각을 한다.

오늘은 교사의 일기 검사가 사생활 침해일 수 있다는 판단이 나왔다. 사람들이 왈가왈부가 많다.

난 찬성도 반대도 아니다. 아들이 1,4학년 때, 선생님께서 일기를 열심히 읽어 주시고 아들을 인정해 주자 아들의 문장력은 엄청 자랐다. 내가 불러준 것도 많았지만, 선생님께 잘 보이려고 좋은 문장들을 많이 만들어 적었다. 선생님이 관심을 가져 주신다면 일기 검사는 프라이버시 침해 보다는 훌륭한 의사 소통 공간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아들이 2,3,5,6학년때 선생님은 싸인만 해서 돌려 준다. 아이들은 이럴 경우 일기 쓰기가 노가다라고 생각한다. 우리 아들은 그나마 엄마, 아빠가 제 일기 읽는 낙으로 사는 줄 잘 알기 때문에 잘 쓴다. 그러나, 우리에게 보여주는 일기가 제 본심의 모두는 아닐 것이다.

누군가는 교육적으로 일기 쓰기 검사가 효과적이라고 생각해서 권장했을 것이다. 그러나, 일부 선생님들은 정말 일기를 효과적으로 교육에 활용했다. 그치만 대부분의 게으른 교사들은 일기 검사를 핑계로 자습을 시키고, 대-충(요즘 세간에 이 말이 유행이다. 까잇거, 대충하면 되지, 뭐.) 읽어 보고 싸인만 해 버리는, 아 며칠마다 한 번씩 검사하고 말더라. 아무리 멋진 일기를 써도, 아무리 솔직한 일기를 써도 칭찬 한 마디 안 내비치는 교사들. 천지로 많다.

우리 교육의 문제점. 좋은 거라면 발전 시킬 생각은 하나도 안 하고, 일방적으로 지시한다.

선생님들, 일기 검사 하세요.
선생님들, 수행 평가 하세요.
선생님들, 청소 감독 하세요.
선생님들, 싸움 못 하게 하세요.

일기 검사가 학급 운영과 학습 단계에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교사는 하고, 나머지 교사는 안 할 수 있는 자율성이 있어야 한다.

정말 걱정되는 건, 이제 학교장들은, 그 어리석고 힘없는, 용심으로 가득한 자들은

선생님들, 일기 검사 하지 마세요.

라고 지시할까봐 두렵다.

학교마다 자율성은 있어야 한다. 학생들과 학부모들의 반대 의견이 좀 있다 한들, 학교가 하겠다는 고집도 좀 있어야 한다. 자율성과 강제성은 다르다. 자율성에는 토론과 합의, 그리고 책임과 권리가 따르는 것이고, 강제성은 일방적 지시와 의무만 따르는 것이다.

학생들의 머리를 교사가 잘라버리는 것은 강제성에 가깝다. 그렇지만 토론과 합의, 책임과 권리를 지킬 수 있는 규칙을 만들고, 이것을 실행에 옮기는 자율성은 인정해야 한다.

무엇이 옳다, 옳지 않다는 것. 무엇을 해야 하고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 이것들에는 반드시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끼어든다. 어리석게도 나에게 이익이 될 것 같으면 옳다고 한다. 나에게 이익이 되지 않으면 성을 낸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은 욕심을 부리고, 하지 말아야 할 것에도 어리석게도 팔을 뻗친다.

옳다는 말도 없음을, 물처럼 흐르면서 흐르지 않고, 시간이 흐르면서도 정지된 학교라는 프레임 속에서 나는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에 얽매여, 하루하루 중생으로 살아간다.

마음에 종이 나면 여러 법이 생기고, 마음에 종이 사라지면 여러 법이 사라진다는데... 심생종 종법생 심멸종 종법멸...

그래도 따스한 햇살 가득 받은 화안한 벚꽃나무 아래서 싱그럽게 뛰어다니는 황금기들을 바라보는 곳에 산다는 한 가지 만으로도 이 중생은 행복하다. 아, 다시 교사라서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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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원 2009-01-07 0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그곳엔 부처도 갈 수 없다'의 저자'대우거사'와 '선으로 읽는 금강경'의 '대우스님'을 혼동하셨네요...
각기 다른 저자이신데요...
게다가 저는 이책을 아무리 읽어도 중생살이를 행복하게 잘꾸려나가는법을 일러주고 계시지는 않던데요. 오히려 모든 판단이나 사고 생각자체를 멈추고 곧바로 그 생각의 당처로 직입하여 본래의 자신을 알라하시더군요...
한번 더 읽어보시면 어떨까요?
 
덕분에
아이다미쓰오 지음, 오경순 옮김 / 리수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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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아이다 미쓰오란 일본인이 잡지에 붓글씨와 함께 간단한 수필을 적어서 인기를 끌었다. 그 작품들을 모은 글이다. 글들은 삶의 팍팍함을 녹여주는 봄비와 같은 내용들로, 다양한 주제를 품고 있다.

이 책은 주례사를 준비하려는 사람, 처세술을 배우고 싶은 사람, 명상을 익히고 있는 사람, 그런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고 싶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만한 책이다.



 

이 작품은 내가 가장 맘에 들었던 것이다. 글씨도 이 책에서 가장 정제된 것이 아닐까 한다. 지금, 여기를 썼을 뿐인데, 여유와 진실함이 글씨에서도 묻어난다.

 

글씨를 예술 작품으로 승화시킨 동양의 삼국, 우리 나라엔 붓글씨와 수필을 접목시킨 책들, 동양화나 수채화와 간명한 삶의 지혜를 실어 나르는 책들도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 법한데...

 

서로 빼앗으면 부족, 서로 나누면 풍족, 서로 빼앗으면 싸움, 서로 나누면 평온

서로 빼앗으면 미움, 서로 나누면 기쁨, 서로 빼앗으면 불만, 서로 나누면 감사

서로 빼앗으면 전쟁, 서로 나누면 평화, 서로 빼앗으면 지옥, 서로 나누면 극락 <서로 나누면>

 

비오는 날은 비 속을 바람 부는 날은 바람 속을

(雨の日には 雨の中を 風の日には 風の中を。。。)

그렇게까지 했는데 '했는데'하는 말투가 되면 푸념이 나오게 마련.

(んなにしてやったのに 「のに 」がつくとぐちがでる)

마음*기술=작품(9*1=9 실패, 5*5=25 최고, 1*9=9 실패), 기술과 마음의 균형이 잘 조화.

실패하기 마련인 인생에서, 유도의 기본은 낙법이며, 낙법이란 넘어지는 연습, 지는 연습 이고, 사람들 앞에서 창피 당하는 연습이라는 것이 공감을 얻는 듯 하다. 그의 평생 감동, 평생 청춘의 모토는 고령화 사회로 접어드는 일본인들에게 힘디 되어 주었을 것이고...

지금, 여기, 나 자신의 삼위 일체가 현대인의 불안감을 잠재울 수 있는 요소가 되어 주었겠지... 이십 여년 전에 유행했다는 책이지만, 칠전팔기, 오로지 넘어져도 끈질기게 일어나는 오뚝이 근성이 아니라, 필전팔도, 일곱번 넘어지고 여덟번 자빠지는 고난 속에서도 지금, 여기, 나의 소중함을 깨닫게 해주는 불교의 진리를 만날 수 있는 이 책 <덕분에> 힘든 나날을 하루하루 이겨낼 수 있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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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영혼 행복한 미소
마더 데레사 지음, 김순현 옮김 / 오늘의책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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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ving Jesus가 이 책의 원 제목이다.

이 책은 정말 읽을 것이 없었다. 테레사 수녀님께서 말씀하시는 한 마디 한 마디가 모두 예수님의 말씀이고, 진리이기 때문이다. 위대한 진리는 말할 것이 없다는, 말로 하는 것은 진리가 아니라는 노자의 말대로 책이 술술 읽히는 만큼, 어려울 것이라곤 하나도 없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것없는 한 사람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 <마태오 25:40>

이 마음을 그대로 실천한 분이 수녀님이고, 그 분의 이런 생각들을 적은 것들이 한 권의 책이 된 것이다. 사랑의 선교회를 이끌고, 순결, 자발적인 가난, 온전한 복종을 모토로, 가난한 사람 중에서도 가장 가난한 사람들을 마음을 다해 기꺼이 섬기겠다는 일념으로 일을 하시는 수녀님들의 성스러운 마음이 잘 묻어나는 글들이다.

원수를 위해 기도할 수 있어야 한다는데, 가까운 가정에서부터 사랑을 회복하는 것이 예수님의 뜻이라는 이야기다.

우리는 나에게 도움이 될 것 같은 사람, 나보다 뭔가를 더 가진 사람, 내가 잘 보여서 나중에 어떤 것이라도 이득을 얻을 것 같은 사람에게 마음이 이끌린다. 우리가 아니라, 나는 그렇다. 그렇지만, 그게 아니라는 이야기다. 지극히 보잘것없는 한 사람. 그가 예수님이고, 그가 부처님임을 깨닫는 것, 그리고 행동에 옮길 것.

소중한 인연을 걷어차지 말고, 가까이 다가오신 예수님, 부처님을 사랑의 마음으로 감싸안을 일이다.

잔디밭에 내려앉는 따스한 햇살을 바라보면 하느님의 공평한 사랑이 잔디 하나하나에도 미침을 생각하고 파르르 날아가는 참새에게서 불현듯 존재를 느낀다. 존재감의 중량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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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으로 읽는 금강경
김태완 지음 / 고요아침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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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일주일을 이 책 하나에 푹 빠져 살았다. 칠백 페이지짜리 책이니깐, 읽기로 들자면 2,3일이면 다 읽을 법도 하지만, 속도를 내는 것만이 독서는 아닌 법이다. 내 맘이 천천히 가라고 시켜서 천천히 읽었을 따름이다.

도서실에서 빌려올 때만 해도, 맘 단단히 먹고, 경전 공부라고 생각했는데, 사실 책을 펴 보니깐, 이건 경전 공부가 아니었다. 금강경 이야기이긴 한데, 강의를 글로 적어 놓은 것이라서 어려울 것이 하나도 없었다.

요즘 아이들이 만화로 고전을 만나는 것만 부러워하던 나로서는, 이런 책을 만나게 된 현대에 살게 된 것이 고맙기만 하다. 예전 불친절하던 스님들에 비하면, 이런 말랑말랑한 책을 만난 건 큰 행운이 아닌가 말이다. 불친절하던 스님들의 '자, 똥막대기다."하던 가르침에 비하면...

그러나, 난 예전의 방식이 그리울 때가 간혹 있다. "이런, 호랑말코 같은 놈들..."하면서 눈을 부라리시던 선생님들 앞에서 덩치 커다란 70명의 머시매들은 기가 푹 죽어서, 거짓말이라도 선생님이 말씀하시면 곧이곧대론 믿던 그 순수의 시절 말이다. 물론 그 폭력과 험악하던 분위기는 증오하지만...

책을 읽는 동안, 계속 들리고, 경험되는 모든 것을 따라 다니지 마라, 말과 생각을 따라 다니지 마라... 는 이야기를 듣고 있었지만, 내가 살아온 지난 사십 년은 말과 생각을 따라 다녔던 세월이 아니었던가. 남들이 좋다는 것, 남들이 다 바라는 것을 얻기 위해 살았던 삶. 그것이 한 움큼의 가치도 없을지라도, 아둥바둥 아침형 인간이 살아남는다는 생존의 법칙에 얽매인 중생의 삶을...

공부를 바로 하면 금강경을 버려야 한다. 부처님이 계시고 중생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있고 남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곧 남이고, 내가 곧 부처이기 때문에,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금강경을 만나면 금강경을 죽여야 한다.

뗏목은 강을 건너는 방편일 뿐이지, 삶의 목적은 아니듯이, 부처님을 만나는 것이 우리 삶의 목적이 아니라 그것은 방편일 따름이다. 금강경은 그런 역설의 경전이다. 오로지 진실을 받아들여 <참된 나>를 발견하기 위한 수행의 길을 제시하는 이 경전에서는 달을 가리키는 부처님의 손가락만 쳐다보아서는 달을 알 수 없음을 깨우치기 위해 계속 반복된 역설을 제시한다.

몰록의 순간, 계합이 일어나는 돈오(頓悟)를 경험하고 나면 보림(保任)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하는데, 나같이 흐리멍텅한 정신으로 하루 하루를 겨우 넘기는 중생으로선 감히 넘볼 수 없는 경지다.

그러나, 머리로 받아들이지 말고, 날마다 날마다 듣고 받아들이려고 한다면, 그 순간이 온다는 저자의 말을 믿고 그저, 하루하루 살아 보자...

나를 버려야 나를 만나는 길에서, 참된 나를 만나고자 하는 발걸음을 놓치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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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05-03-28 1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 적고 보니, 이 책으로 사백 권의 리뷰를 적었다.
숫자에 집착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지만,
8월이 다 가기 전에 오백 권 리뷰를 적는 걸 작은 목표로 적어 본다.
백오십 일 간, 백 권을 읽는 것은,
그 만큼 정신을 놓고 보내는 날을 경계하기 위함이다.

혜덕화 2005-03-28 1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지난주엔 금강경을 읽으며 보냈는데......
머무는바 없이 마음을 내라는 말씀을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풀이했는지, 시간나면 이 책도 읽어보고 싶네요.

파란여우 2005-03-28 2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백권..저에겐 상상할 수 없는 피안의 이국땅의 기찬 이야깁니다.^^

글샘 2005-03-29 0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혜덕화님... 같이 같은 책을 읽으셨다니 고맙습니다. 그저...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는 것. 한 번 읽어 보세요. 좋은 책입이다. 저는 금강경을 처음 만났지만, 이 책을 만난 것을 감사드립니다.
여우님... 오백권... 그 말에 붙잡히시면 안 되는 거 아닌가요? 저는 그저 오백권이라고 썼는데요... 그저 오백권일 뿐이란 건, 전에 혜덕화님께서 그저 삼천배라고 하신 말씀의 표절일 따릅입니다. ^^
 
폰더 씨의 위대한 하루 폰더씨 시리즈 4
앤디 앤드루스 지음, 이종인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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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아주 유명한 책이고, 베스트 셀러에도 많이 들어 있었던 책 같은데... 아이들도 독후감으로 잘 적어내는 책인데... 어찌 내 눈에 얻어걸리지 못했다가, 우연히 도서관에서 발견했다. 이 책의 원제목은 여행자의 선물이다. (The traveler's Gift)

이야기는 아주 평면적이다. 실직과 가난, 딸의 질병으로 고통받던 폰더가 꿈을 꾸는 세계로 들어가서, 인연으로 맺어진 사람들을 일곱 만나서 교훈을 듣고 온다. 미래의 자기 모습은 <왕 유명한 사람>이다. 폰더씨는 갑자기(?) 의욕적인 인간으로 변신한다는 황탄한 이야기다.

이 책이 독자를 사로잡을 수 있는 것은 각 장의 말미에 실린 격려 편지들일게다. 확실히 선동가적 기질이 있는 작가의 <부흥회> 수준의 편지들이다. 그저 놓쳐버리기엔 아쉬울 정도로...

그런데, 이 책을 읽고 푹 빠질 수 없는 것은... 너무 치즈 냄새가 풀풀 날린다. 이차대전을 평화롭게 끝내려고 원자 폭탄을 고뇌속에 터트린 트루먼 대통령, 북부의 공업지대에 필요한 노예를 공급하기 위해 남부의 노예를 해방시킨 링컨 대통령, 게티스버그의 선동가 체임벌린, 평화로운 고요한 서쪽의 대륙 어메리카의 주인 인디언들에게 철천지 원수일 콜롬부스, 유태인의 세종대왕 솔로몬, 핍박받던 유태인의 화신 안네 프랑크, 그리고 그들의 대천사 가브리엘까지... 그리고, 폰더씨의 미래에 그려진 <명성, 부, 칭찬, 존경...>. 이 모든 것들은 너무도 미국적인, 미국인들에게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이해될 법하지만, 삐딱한 내가 보기엔 왠지 자연스럽지 못하고, 그들만의 좁은 안목에 갇힌 미국적인 우화라고나 할까...

이렇게 쓴다면 어떨까, 아이엠에프로 실직 당하고, 저당잡힌 집도 날리고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져 노숙자로 떠도는 가장이 어느 날 꿈을 꾼다. 한국적 민주주의(=폭력적 독재를 통한 국가독점 자본주의)의 토착화로 공이 큰 박통과, 조선시대 성군으로 칭송이 자자한 세종대왕과, 용맹함과 총명함으로 세계 해전사에 길이 남을 이순신 장군, 올림픽과 월드컵, 컬러 티비 방송, 프로야구 등으로 3S 정책으로 유명하고 장세동과의 의리로 유명한 29만원 대통령, 유명한 스님들, 조선의 철학자들 이이, 이황, 실학의 대가 다산, 연암, 추사... 이런 이들이 나와서 같은 논조로, 공은 여기서 멈춘다(가난을 종식시킨 박통), 나는 지혜를 찾아 나선다.(세종), 나는 행동을 선택하는 사람이다.(충무공), 내 운명은 내가 개척한다.(전통), 오늘 나는 행복한 사람이 되기를 선택하였다(성철), 나는 매일 용서하는 마음으로 살겠다(이황), 나에겐 믿음이 있다(실학)... 뭐, 이런 줄거리로 쓴들 크게 거슬리지 않을 듯 싶을 거라는 생각을 만들 정도다. 이 가장의 마지막은 어떤 것이 되어야 할까... <참된 나>를 깨닫고 미망에서 벗어나는 것이 최선이 아닐까? 자기 이름이 달린 빌딩, 거리... 이런 황탄한 것 보다는...

미국의 기준이 세계에 통용될 듯하지만, 그들의 물질 문명이 극도에 달한 지금, 대천사 가브리엘의 멸망에 대한 예언이 <나>를 향한 것이란 깨달음까지 가지는 못하고, 폰더씨의 화려한 복귀로 해피엔딩이라 착각하는 소설에 환호하는 사람들의 마음들은 얼마나 팍팍하고 죽지못해 사는 것인지... 읽는 내가 다 팍팍할 지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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