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인박명의 숙명속에서 피어난 아름다운 사랑이야기
낙랑공주와 호동왕자

황원갑...소설가, 서울경제신문 문화부장

 
우리 역사에는 두 사람의 낙랑공주가 있었다. 한 사람은 호동왕자를 지극히 사랑했기에 목숨까지 바친 비련의 주인공 낙랑공주요, 또 한사람은 고려태조 왕건의 맏딸로서 신라의 마지막 임금 경순왕에게 시집간 낙랑공주이다.
후자의 낙랑공주는 왕건의 셋째 왕비인 유씨 부인의 소생인데, 경순왕이 나라를 들어 고려에 항복하자 태조가 그에게 시집보낸 여인이다. 이처럼 낙랑공주는 두 명이 있었지만 두 사람 모두 전제 왕권시대에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정략결혼의 희생자였다.


이번 이야기의 주인공 낙랑공주는 지금으로부터 거의 2천년 전, 지금의 대동강 유역에 있던 낙랑국의 임금 최리(崔理)의 딸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민족적 주체성을 망각한 식민주의 사학자들은 이 낙랑국을 이른바 한사군(韓四郡)의 하나인 낙랑군과 혼동하고 있으며, 이러한 잘못된 역사가 아직도 고쳐지지 않고 있는 것이 우리 사학자들의 연구 결과 한사구의 낙랑군은 지그므이 중국 북경 근처인 난하 동부 유역에 있었고, 최씨 낙랑국은 대동강 유역에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으니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

<북한 남포시 수산리 벽화에 등장하는 해모양의 북. 고대 한반도에서 북은 하늘의 소리를 전하는 종교적 신성물이었다. -사진제공 조법종 교수>

어쨌든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의 비극적이면서도 우리 고대사를 한 줄기 풍류의 멋으로 장식한 일대 사건이 벌어진 것은 서기 32년, 고구려 대무신왕 15년 음력 4월이라고 <삼국사기>는 전한다.

대무신왕에게는 두 명의 왕자가 있었으니 첫째는 제1왕비와의 사이에서 낳은 해우요, 둘째는 갈사왕의 손녀인 제2왕비와의 사이에서 낳은 호동이었다. 호동이란 이름이 말해주듯 그는 태어날때부터 용모가 빼어나게 아름다웠으며 자라면서는 성품 또한 착한 데다가 고구려 사내라면 누구나 갖춰야 할 미더깅 무예와 담력까지 뛰어나 임금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하지만 제1왕비와 그의 소생인 이복 형 해우는 호동왕자의 수려한 자태와 비상한 자질을 시기하고 미워했다. 호동에 대한 부와의 사랑이 변함없다 보면 장차 해우가 왕위를 이어받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호동왕자는 늘 수심에 잠겨 지내야만 했고, 자주 대궐을 벗어나 사냥으로 시름을 잊으려고 했다. 그날도 호동은 도성을 벗어났다. 그런데 이번에는 군사 수십명을 거느린 특별한 사냥길이었다. 사실 이번 길은 사냥만이 목적은 아니었다. 호동은 대궐을 떠나기 전에 부왕께 이렇게 말씀드려 쾌히 승낙을 받았던 것이다.

"아바마마. 이번 사냥길에는 남쪽 변경까지 내려가 보고 오겠나이다. 전에 요하서쪽에 있던 낙랑·대방·옥저 같은 소국들이 우리 나라의 남쪽으로 이동해 자리를 잡은 뒤부터 그곳이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다고 하옵니다. 이에 소자가 적들의 동정을 살펴보고 오고자 하나이다."

그렇게 도성을 떠난 호동왕자와 부하들은 압록수를 건너 사냥을 하며 계속해서 남쪽으로 내려가 살수를 건너고 옥저를 지나 어느덧 패수 부근의 낙랑 땅으로 접어 들었다.

그러던 어느날. 호동은 군사들을 거느리고 순시하던 낙랑국왕을 만나게 되었다.

"혹시 그대는 북쪽 나라 고구려의 호동 왕자가 아니오?"
"아니, 어찌 처음 만난 저를 알아보십니까? 공은 누구신지요?"
"나는 낙랑왕 최리라고 하오. 왕자의 풍모가 소문에 듣던 바와 같이 수려하니 어찌 몰라 보리오. 하지만 무슨 까닭에 아무통보도 없이 이곳에 온 거요?"
"미리 양해도 없이 이렇게 국경을 넘은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사냥도 겸해 유람삼아 나섰는데, 산천경개가 너무나 아름다워 저도 모르는 사이에 그만 귀국 땅까지 넘어오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이만 돌아가고자 합니다."

그러자 낙랑왕은 이렇게 만류했다.

"아니오! 이대로 돌아가면 섭섭해서 안되지! 누추하지만 우리 성으로 모실 터이니 좀 쉬었다가 가오. 귀국과는 이미 오랫동안 우호 관계를 유지하고 있지 않소?"

그렇게 해서 호동왕자는 낙랑왕의 초대를 받아들였다.
궁궐로 돌아온 낙랑왕은 곧바로 호동왕자를 위해 푸짐한 잔치를 베풀었다. 그리고 자신의 귀여운 외동딸을 호동에거 소개했다.

이렇게 해서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의 운명적 첫 만남은 이루어졌는데, 이 두 아름다운 젊은이는 처음 보는 순간 그람 서로에게 홀딱 반해 버리고 말았다. 호동왕자는 결국 낙랑공주와 결혼을 하게 되었다.

대무신왕은 오래 전부터 낙랑궁 정복을 계획해 오고 있었기에 어느날 낙랑공주를 데리고 도성인 국내성으로 돌아온 호동을 몰래 불러 이렇게 일렀다.

"얘야. 우리 대고구려가 더욱 강성해지기 위해서는 주변국들을 무력으로 복속시킬 수밖에 없구나. 이제 우리남쪽 국경이 살수까지 이르렀지만, 그 아래 패수의 낙랑과 한수 이남의 백제와 신라의 힘이 갈수록 커지니 걱정이다. 내 먼저 낙랑을 쳐서 아우르고자 하나, 듣건대 그 나라에 두가지 신기(神器)가 있다니 어찌 했으면 좋겠는고?"

"낙랑국의 두가지 신기라면 적군이 쳐들어오면 저절로 운다는 북과 나팔을 가리킴이 아니옵니까?" "그렇다! 대체로 군사를 움직여적을 치는 데에는 방비할 틈을 주지 않고 급습하는 것이 승리의 지름길이니라. 따라서 우리가 낙랑국을 고격하기 전에 너는 반드시 구 북과 나팔을 없애야 하느니라!"

부왕의 명령을 받은 호동왕자는 어쩔수 없이 낙랑공주를 설득할 수밖에 없었다. 고구려와 낙랑공주를 설득할 수 밖에 없었다. 고구려와 낙랑이 한 나라가 되어야만 우리 부부가 오래도록 행복하게 살 수 있는데 당신 부인은 결사적으로 반대하고 있지 않은가. 결국 전쟁을 할 수 밖에 없는데. 그러자면 당신 나라의 두 가지 보물을 없애야만 내가 죽지 않게 된다고 거의 협박을 했던 것이다.

꼼짝없이 사랑의 덫에 걸린 공주가 마침내 눈물을 흘리며 수락했다. 호동왕자와 작별한 공주는 그 길로 시집인 고구려를 떠나 친정인 낙랑국으로 돌아갔는데, 사랑하는 낭군 호동왕자와는 그것이 마지막 이별이 될 줄이야 어찌 알았으랴.

낙랑국으로 돌아간 공주는 왕자와 약조한 날 밤 대궐의 보물창고로 모래 들어가 오직 낙랑국에만 있는 희귀한 보물인 자명고와 자명각을 영영 못쓰게 찢어 버렸다.

그 이튼날, 이미 국경을 몰래 넘어온 고구려의 대군이 도성을 포위하고 맹공을 퍼붓기 시작했다. 낙랑왕은 나라의 존망이 경각에 이른 가운데서도 자명고와 자명각이 울지 않은 까닭이 궁금하여 군사들을 시켜 알아보게 했다. 북과 나팔이 찍어져 망가졌으며, 범인은 바로 자신의 딸이라는 사실을 알자 낙랑왕은 노발대발했다. 이런 천하에 못된 년이 있나. 사랑에 눈멀어 나라를 망치다니! 분노에 못 이긴 나머지 최리는 손수 공주를 찔러 죽이고 성문을 나와 항복하고 말았다.

군사들을 거느리고 대궐로 달려간 호동왕자가 공주를 찾았을 때에 사랑하던 아내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호동왕자를 사랑했기에 낙랑공주는 나라를 배신했고, 사랑이란 이름이로 그 배신을 사주한 호동은 공주를 영영 잃어버렸던 것이다.

호동왕자가 자결로 이승살이의 막을 내리고 먼저 간 공주의 뒤를 따른 것은 그로부터 반년쯤이 지난 그해 11월. 이미 오래전부터 해칠 기회만 UT보던 제1왕비가 부왕에게 끈질기게 모함을 해댄 탓이었다. 그것도 호동이 자기를 겁탈하려 한다는 터무니없는 무고를 했던 것이다. 대무신왕은 처음에 이를 믿지 않았으나 하도 끈질기게 졸라대는 바람에 결국은 넘어가고 말았다. 예나 이제나 베갯머리 송사에는 당할 장사가 없다고 하지 않던가.

주위 사람들이 왜 억울함을 스스로 밝히지 않느냐고 묻자 호동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기록은 전한다.

"비록 낳아준 어머니는 아니지만 그래도 어머니인데 내가 사실을 밝히면 어머니의 허물이 드러나고 아버지가 걱정을 할 터이니 어찌 그런 불효를 저지르랴." 하고는 칼위에 엎어져 죽고 말았다고 한다.

가인박명의 숙명에서 벗어나지 못한 낙랑공주와 비운의 사나이 호동왕자의 구슬프면서도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는 2천년의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도 변함없이 우리의 심금을 울려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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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갯머리 송사

`베갯머리 송사`라는 속담이 있다.
잠자리에서 아내가 남편에게 바라는 바를 속삭이며 청한다는 뜻이다.
이 속담은 원래 침변교처(枕邊敎妻)에서 유래 되었다.
`아내를 가르치는 데는 베개를 베고 함이 좋다'는 뜻으로, 너무 딱딱하게 가르치면 그 효과가 적으니 누운 자리에서 함이 오히려 좋다는 말이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남편을 설득하는데 눈물보다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되어 원래의 뜻과는 다르게 변하였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베갯머리 송사'의 원조는 고구려의 호동왕자이다.
낙랑공주와 호동왕자의 이야기는 우리 선조의 대표적인 러브스토리이다.
건장한 젊은이 호동왕자와 아름다운 낙랑공주는 운명적 첫 만남에서부터 서로에게 홀딱 반하여 결혼을 하게 되었다.
호동왕자의 아버지인 대무신왕은 오래 전부터 낙랑국 정복을 계획해 오고 있었다.
어느날 낙랑공주를 데리고 도성인 국내성으로 돌아온 호동왕자는 자명고와 자명각을 반드시 없애라는 명령을 받게 된다.
부왕의 명령을 받은 호동왕자는 낙랑공주를 설득할 수밖에 없었다.
( 이 사건은 우리나라 역사상 `베갯머리 송사'의 시초가 된다)
사랑의 덫에 걸린 낙랑공주는 눈물을 흘리며 자명고를 찢었고 결국 낙랑국은 멸망하였다. 또 공주는 아버지에게 죽임을 당한다.
그뒤에 시름에 빠져 있던 호동왕자는 제1왕비가 대무신왕에게 터무니 없는 끈질긴 모함을 하여 자결하게 된다.

예나 이제나 베갯머리 송사에는 당할 장사가 없다고 하지 않던가?.
2천년의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도 변함없이 우리의 심금을 울리는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의 비극은 `베갯머리 송사'에서 시작되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호동왕자는 `베갯머리 송사'의 가해자이면서 피해자가 되어 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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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는 한국인물열전  - 온달 편 -
 

 이번 편은 여러분 모두 좋아하시는 고구려의 영웅 온달(溫達)이다. 이 얘기 다 아시겠지? 근데 이

 

얘긴 <삼국사기>권 45 열전 5 <온달>에만 나온다.

 

다른 기록엔 '온달'이란 이름조차 없다. 자료가 달랑 하나니 정말 좋다. 이런저런 자료랑 비교 안

 

해도 되니 말이다(그거 열나 시간든다. 함 해바바). 아, 그리고 이번 글의 목적은 누구를 씹는게

 

아니라 띄워주려는 것이다. 사실 불쌍한 온달 쪼아댈 게 뭐 있나. 팍팍 밀어줘도 시원찮다.

일단, 시작하기 전에 지난번에도 그랬듯이 미리 토 몇 개 달자.
⑴ 이 글은 '바보 온달' 얘기를 위인전이나 동화책, 인형극 등을 통해서 알고 계신 분들을 대상으로 쓴 거다. 그 이상 수준의 분들은 안 읽으셔도 된다. 읽는 거 막을 순 없지만, 읽고나서 '뻔히 다 아는 얘기 뭐하러 했냐'는 말씀 하지 마시란 뜻이다.
⑵ '원문'이나 '본문' 대신 '텍스트'라고 쓰겠다. 이 연재의 성격을 보여주는 데는 차라리 이 말이 나을 거 같아서다. 거부감 드셔도 참아주셔야겠다.     
⑶ 학계에선 온달은 실존 인물로 본다. 하지만 텍스트 내용의 진위 여부(어디가 진짜고 어디는 가짠가 가려내는...)는 여기서 안 다룬다. 문학성이나 상징성 같은 거도 내 알 바 아니다. 난 그저 이 얘기를 텍스트 그대로 믿고 따져보련다(그러니 이 글에서 학술적인 내용 기대하지 마시라).
⑷ '바보'라는 말에 상처 받을 분이 계실까 걱정된다. 우리 주변에는 선천적이든 후천적이든 지능이 모자란 분들이 적지 않다. 그 분들이 직접 이 글을 읽진 않겠지만, 혹시라도 주변 분들이 불쾌하게 느낄 수 있겠다. 이 점 양해 바란다.
⑸ 윈도우에서 지원되지 않는 한자의 경우, 붉은 색 글씨로 표시했다. X표로 남겨놓는 것보다는 가능한 한도 내에서 표시해 보려 노력했으니 참고하시기 바란다. 

   '평강공주'란 이름은 텍스트에 없다

우선 이거부터 따져보자. 보통 '평강공주'라 부르는데 그런 이름 텍스트에 없다. '평강왕의 어린 딸【平岡王少女兒】'과 '공주'만 나올 뿐이다. 누가 언제부터 '평강공주'라 불렀는진 모른다. 뻔한 말이지만, '평강공주'는 '평강왕의 공주'란 뜻이지 공주의 이름이 '평강'은 아니다. 또 '평강왕'은 왕이 죽은 다음에 붙여진 시호(諡號)니까 그가 살았을 땐 공주도 '평강왕의 공주'라 불렸을 리 없다.
그치만 이름이 안나오니 어쩌겠나. 그냥 글케라도 불러야지. 글고 평강왕(재위 559~590)은 '평원왕(平原王)' 또는 '평국왕(平國王)'으로도 불렸다니, 김부식이 '온달은 고구려 평강왕 때 사람이다【溫達 高句麗平岡王時人也】'하지 않고 '평원왕' 또는 '평국왕'이라 했으면 우린 꼼짝없이 '평원공주' 또는 '평국공주'라 불러야 했을 거다.
대무신왕이나 소수림왕, 광개토왕의 딸 아닌 게 그나마 다행이다. 광개토공주라... 흐흐.

    아바마마, 나중에 두고 봅시다

우리의 평강공주, 잘 아다시피 어려서부터 울보였다. 그 때마다 평강왕은 '네가 늘 내 귀를 시끄럽게 하니, 앞으로 반드시 사대부의 아내는 되지 못할테고, 바보 온달에게나 시집가야 마땅하겠다'며 놀려댔다.

아이의 울음을 멈추는 방법은 '착하지?'하고 달래는 유형과 '맞을래?'하고 꾸짖는 유형, '.....' 하고 냅두는 유형 등이 있겠다. 근데 평강왕은 이도저도 아니다. 울 때마다 늘 놀려댄 것이다【王戱曰 … 大王常語 …】. 우는 입장에선 이게 젤 서럽다. 이런 설움이 세월을 두고 쌓이다 보면 오기가 솟는다. '그래요 아바바마, 나중에 두고봅시다' 같은 거 말이다. 암튼 우리의 온달, 평강왕도 알고 있을 정도면 그 때 이미 고구려의 바보계를 평정한 국가대표급 바보였나보다.

세월은 흐르고 흘러 어느덧 공주는 이팔청춘 16세, 혼인적령기로 접어든다. 이 때쯤이면 사춘기 아닌가. 한창 개길 때다. 이 때 평강왕이 상부고씨(上部高氏)에게 시집보내려 하자 공주가 이렇게 삐댄다.

공주 : 대왕께서는 '너는 반드시 온달의 아내가 될 것이다'라고 늘 말씀하셨는데, 무슨 까닭으로 이제 와서 앞서 하셨던 말씀을 바꾸십니까. 필부(匹夫)라도 식언(食言)을 하지 않는데 하물며 지존(至尊)께서야 말할 나위도 없지요. 그런 까닭에 '왕은 농담을 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지금 대왕이 명은 잘못된 것이니, 저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대왕 : 네가 내 명을 따르지 않으니 결코 내 딸이 될 수 없다. 어찌 같이 살겠는가. 너 가고 싶은 곳으로 가는 것이 마땅하겠다.

"이 니욘, 내 말 안들으려면 궁에서 나갓!"
"흥, 나가라면 못나갈 줄 아세욧?"

등등의 고성이 오갔으리라. 귀쌰대기도 미뤄 짐작할 수 있다. 암튼 이 싸움은 공주의 퇴출로 싱겁게 끝난다.

공주가 첨부터 쫒겨날 걸 각오하고 개긴 건지, 그건 아녔는데 아버지가 빡세게 나와 떨려난 건지 텍스트만 갖곤 알 수 없다. 반대로 평강왕은 정말 공주를 쫒아내려 한 건지, 아님 정신 차리라고 함 핏대낸 건데 공주가 글켄 못하져 하며 튕겨나간 건지 모호하다.
암튼 궁에서 나온 공주는 온달을 찾아나선다. 그 이유는? 아버지에게 분풀이 하려는 거다. '그래, 온달 함 인물 맹글어서 울 아부지 쩍팔리게 해드리자'는 심뽀 아닌가. 어딘지 섬찟하다. 온달에 대해 아는 정보라야 바보라는 거밖에 없다. 근데도 사랑 없이 한풀이를 위해 하려는 결혼, 결국 온달은 공주의 한풀이를 위한 '잘했어 라이코스'로 이용된 거 아니겠나. 그치만 이용된들 어떠랴. 백번이라도 좋으니 나도 좀 이용해주라
 

    평강공주가 보따리 하나 달랑 안고 쫒겨났다?

위인전이나 동화책 보면, 요 대목에서 공주가 훌쩍대며 보따리 하나 달랑 안고 걸어가는 장면이 나온다(물론 패물 챙겨 나왔다고 씌여진 것도 있다). 보신 적들 있는가. 나도 어릴 때 이 장면에서 가슴 짠했던 기억이 새록하다. 하지만 걱정 마시라. 우리 공주, 맨손으로 허접스레 쫒겨날 만큼 어리버리하지 않다.
이에 공주는 보물팔찌 수십개를 팔꿈치에 건 뒤 왕궁에서 나와 홀로 갔다【於是公主以寶釧數十枚繫주(月+寸)後 出宮獨行】.

평강공주 이 여자, 볼수록 맘에 들지 않는가? 야무지기 짝이 없다. 보물팔찌 수십개를 팔꿈치에 거는 방법은 내 알 바 아니다. 아무튼 공주, 길에서 만난 사람에게 온달의 집을 물어 그 집을 찾아간다. (놀랍다! 딱 한 사람 만나서【路遇一人】물었더니 즉빵으로 일러주더란 거다. 무슨 말인가? 온달의 집은 이 때 이미 누구나 다 아는 고구려의 '명소(名所)' 반열에 올라 있었단 뜻이다)
근데 집에는 온달의 눈먼 노모(老母)만 있었다. 공주는 노모에게 다가가 절한 뒤 온달이 간 곳을 물었다. 그랬더니 노모는 이렇게 말한다.

내 아들은 가난하고 비루해서 귀인(貴人)이 가까이 할 바가 아니오. 지금 그대의 냄새를 맡으니 향기가 이상하고, 손를 만지니 부드럽기가 솜(綿)과 같으니 천하의 귀인(貴人)이 틀림 없구려. 누구의 속임수에 빠져 여기에 오게 되었소. 내 자식은 굶주림을 참지 못하여 산으로 느릅나무 껍질을 벗기러 간 지 오래인데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오【吾子貧且陋 非貴人之所可近 今聞子之臭 芬馥異常 接子之手 柔滑如綿 必天下之貴人也 因誰之주(人+舟)以至於此乎 惟我息不忍饑 取楡皮於山林】.

원래 어느 한쪽 감각이 기능을 잃으면 다른 감각들이 발달한단다. 노모(자꾸... 노모 히데오가...)는 예민한 후각과 촉각으로 공주가 귀인임을 퍼뜩 알아챈다. 뭔가 수상쩍긴 하지만 아들이 간 곳을 일러준다.

    '바보 온달전'에는 '바보 온달'이 없다

이제 오늘의 주인공 온달에 대해 살펴볼 차례다. 흔히 그를 '바보 온달'이라 부르는데, 텍스트에 두 번 나오는 '우온달(愚溫達)'이란 부분을 글케 번역한 거다. 근데 아무리 디벼봐도 온달이 왜 바본지 보여주는 대목이 없다. 국가대표급 바보라면 독자들의 이해를 위해 뭔가 허걱스런 바보짓 사례 한 두 개쯤 나와줘야 하지 않나. 글치만 김부식은 '따지지 말고 바보라면 바본줄 알아 쨔샤' 거의 이런 분위기다. 젠장, 온달의 몰골이 어땠는지나 알아보자.

얼굴이 핼쓱하고 우습게 생겼지만 마음은 밝았다. 집이 찢어지게 가난해서 늘 빌어먹으며 어머니를 봉양했다. 떨어진 옷을 입고 해어진 신고 시정간(市井間)을 오고가니, 그 때 사람들이 그를 일러 '바보 온달'이라 했다【容貌龍鐘可笑 中心則 행(日+幸)(행, 恐作曄)然 家甚貧 常乞食以養母 破衫弊履 往來於市井間 時人目之爲愚溫達】.

'마음이 밝았다'는 건 늘 실실 웃고 다녔다는 뜻 같다('명랑했다'로 번역하기도 한다. 불만 없이 매사에 긍정적이었단 뜻일게다). 생긴 것도 웃긴 놈이 늘 실실 쪼개고 다니니 볼만 했겠다. 게다가 하고 다니는 꼬라지를 보면 영락없이 거지다(분명히 하자. 온달은 거지였다). 근데도 그는 여기저기서 밥을 빌어 노모를 모셨단다. 지극한 효자다. <바보 + 거지 + 효자> 이거 나름대로 '위인'아닌가? 인간극장 주인공으로 손색이 없다. 아이들한텐 이 점 강조해줘야 한다. < 천재 + 부자 + 불효자> 이거보단 훨 낫다. 게다가 나중에 성공해서 용장(勇將)에 충신까지 되니, 누가 온달을 미워하겠는가.

    왕실대표 울보와 국가대표 바보, 드뎌 만나다

다시 아까 장면으로 돌아간다. 노모의 말을 듣고 집에서 나온 공주가 산 밑에 이르니 누가 저만치서 내려온다. 척 보니 알겠다. 온달이다. 왕실대표 울보와 국가대표 바보는 이렇게 만난다. 순간? 내가 정말 저 화상을 뎃구 살아야 하나? 하는 생각이 왜 안들었겠나. 그치만 맘을 가다듬고 지가 여기 온 까닭을 밝힌다. 보자마자 청혼한 거다. 그러자 버엉~찐 온달, 벌컥 화를 내며【悖然】소리친다.

이는 어린 여자가 할 만한 짓이 아니다. 너는 틀림없이 사람이 아니라 여우나 귀신이다. 내게 다가오지 마! 그리고는 돌아보지도 않고 가버렸다【此非幼女子所宜行 必非人也 狐鬼也 勿迫我也 遂行不顧】.

보시라. 대체 어디를 봐서 온달이 바보냐. 우리보다 훨씬 맑은 정신 아닌가. 오히려 온달한테 공주가 정신 나간 사람처럼 보였을 거다. 귀티가 줄줄 흐르는 데다 얼굴 또한 이쁘지 않았겠는가 (이뻤다는 거... 증거 없다. 걍 공주니 이뻤겠지 해서 썼다가 와이프한테 쫑코 먹었다. 왜 공주면 다 이쁘다 생각하냐고. 트퍼... 맞는 말이지만... 딴 여자 이쁘단 꼴을 못본다). 게다가 팔꿈치에는 보물팔찌가 주렁주렁 … 근데 이런 여자가 지한테 청혼을 하니 어찌 이상하지 않겠는가.

온달이 공주를 만난 곳은 산 속이 아닌 산 밑이었다【公主出行 至山下 見溫達】. 비교적 덜 무서운 곳이란 뜻이다. 여자로 변신한 여우나 귀신이 나올 가능성도 그만큼 적다. 따라서 여느 사람이면 꼴딱 넘어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우리의 온달, 전혀 흔들리지 않고 오히려 공주를 준엄하게 꾸짖는다. 늘 히죽대기만 하던 온달이 말이다. 그리곤 거들떠보지도 않고 가버린다.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말이다.

   '온달족'의 기원을 열다  

하지만 돌아갈 곳도 물러설 데도 없는 공주, 온달의 집으로 돌아와 사립문 아래에서 자고 이튿날 아침 다시 집으로 들어와 온달과 노모를 설득한다.  그런데 온달, 어제의 단호했던 태도와는 달리 결정을 못내리고 우물쭈물한다【依違未決】. 왜냐고? 뻔하지 뭐.

⑴ 가만히 뜯어보니 여우나 귀신은 아닌 것 같다.
⑵ 여자다!
⑶ 팔꿈치에 금팔찌가 주렁주렁 열려 있다!!

갈등 때리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만약 여기서도 온달이 단호히 물리쳤다면 '성인(聖人)'이다 (그런 인물이라면 느끼해서 아예 여기서 다루지도 않는다).
근데 노모는 아직도 망설인다. '우리 아들은 너무 비루해서 귀인의 짝이 될 수 없고, 우리 집은 너무 가난해서 귀인이 살 수 없다'고 말이다(맹인이라 보물팔찌를 못봐서 그럴게다). 그러자 공주, 일케 대꾸한다.

옛 사람의 말에, 한 말 곡식도 방아찧을 수 있고, 한자 베도 꿰멜 수 있다고 했습니다. 마음만 맞는다면, 어찌 반드시 부귀해진 다음에야만 같이 살 수 있겠습니까【古人言 一斗粟猶可용(찧을 용) 一尺布猶可縫 則苟爲同心 何必富貴然後可共乎】

아! 정말 감동적인 말이다. 맘만 맞는다면 빈천(貧賤)도 문제될 거 없다는 거다(지가 언제부터 온달을 알고 지냈다고 맘이 맞는지 아나. 억지로라도 맞추겠다는 거다). 근데 일케 공자님 같은 말씀을 마치신 우리 공주님, 다음 행동을 보시라.
이에 금팔찌를 팔아 전지(田宅)·노비(奴婢)·우마(牛馬)·기물(器物) 등을 사니 필요한 것들이 모두 갖추어졌다【乃賣金釧 買得田宅奴婢牛馬器物 資用完具】.
이런... 대체 이게... 무슨 경우란 말인가. 빈천은 별 문제 아니란 말이 끝나기 무섭게 금팔찌(앞에선 '보물팔찌'라 했는데 여기선 '금팔찌'로 나온다. 뭐 보물이나 금이나...)를 팔아 살림살이를 모조리 사들이다니. 그냥 한번 폼잡으려 해본 소리였구나! 하긴, 정말 글케 살거라면 뭐땜시 팔꿈치에 금팔찌를 수십개나 달고 왔겠는가(여담인데 팔꿈치와 금팔찌, 연속으로 치면 자꾸 오타난다. 한번들 해보시라).

공주의 목적은 '잘사는 게 복수다' 수준이 아녔다. 온달을 보란 듯이 성공시켜 아버지에게 멋지게 한방 날리고 싶었던 거다. 그러기 위해선 당장 훈련에 들어가야지 이런저런 허접스런 일에 매달릴 여유가 없었다. 뭐 밥짓고 빨래하고... 솔직히 이런 거 하기도 싫었겠지. 해본 적도 없을테고. 그래서 풀셋트로 완벽히 갖춰놓고 곧바로 조련에 들어간 거다. 이쯤 되면 온달과 노모가 공주를 물리칠 이유는 아무데도 없어진다. 와이프 잘만나 인생 꽃피는, 이른바 '온달족'의 기원이 열리는 순간이다.
(얼마 전 인터넷에서 '바보 온달' 관련 삽화를 본 적이 있는데, 공주가 밭에서 괭이질을 하며 땀흘리는 모습이었다. 텍스트를 괄시하니 이런 현상이 빚어진다)

여기서 잠깐 머리도 식힐 겸 이 커플의 나이차를 따져보자. 공주가 울보라 불린 때를 대략 5살 정도로 잡아보자. 그럼 그 때 온달은 몇 살? 뭐  근거야 없지만, 한 나라의 바보계를 대표하려면 적어도 15세 이상은 되지 않았을까? 또 온달이 산 밑에서 16살짜리 공주를 만났을 때 '어린 여자【幼女子】'라 불렀다. 16살이 어려? 지는 훨 나이 먹었다는 거 아닌가. 적어도 10년 차는 넉넉히 날 거 같다. 공주에 금팔찌에 한참 연하라... 쩝.

   말(馬) 고르는 노하우, 주몽에서 온달까지

공주가 온달에게 내린 첫 지시는 시장에 가서 말을 사오라는 거였다. 그러면서 일케 당부한다.

시장 상인이 파는 말은 절대 사지 말고, 반드시 병들어서 (팔러) 내놓은 국마(國馬)를 사오세요【愼勿買市人馬 須擇國馬病유(앓을 유)而見放者 而後換之】.

우리의 라이코스, 시키는 대로 말을 사오고, 공주는 그 말을 잘 길러 명마(名馬)로 만든다. 근데 이거 <삼국사기>권 13 고구려본기 1 <시조 동명성왕>에도 나오는 얘기다. 부여 금와왕의 아들들이 주몽을 시기하자 왕은 주몽에게 말 기르는 한직을 맡겼다. 그랬더니 주몽이 좋은 말은 안먹여 야위게 만들고, 나쁜 말은 잘먹여 살지게 만들었다가 나중에 야윈 말을 지가 챙긴 뒤 잘먹여 준마로 만들었다는 그 얘기 말이다 (이것도 애들 보는 위인전 보면 주몽의 '지혜'라고 나온다. '슬기'와 '잔꾀'는 다르다. 비록 한직이긴 했지만 그것도 공직 아닌가).

이 부분 첨 읽으며 약간 삐리리~한 기분이 들었다. 뭔가 상징성이 엿보여서다. '국마(國馬)', 즉 나라에서 기르던 말 중 병들고 야위어서 내놓은 것을 사가지고 잘 길러 명마를 만들었다? 왠지 그 말(馬)이 온달을 상징하는 거 같지 않은가? 볼품 하나 없는 바보이자 거지인 온달을 잘 '키워' 명장(名將)으로 만든다... 안 비슷한가? 그래, 그건 글타 쳐두 말은 품종이라도 좋은 '국마'였는데 온달은 그게 아녔쟎냐고? 음... 머 온달도 어쨌든 국가대표급... 아닌가.

   이 사람은 내 사위라!

텍스트를 보면 수련과정은 완전히 생략된 채 뜽금없이 파워업된 온달이 나타난다. 처음 데뷔무대는 매년 3월 3일 열리는 사냥대회. 평강왕도 참관한 이 대회에서 온달은 늘 남보다 앞서 말을 달리며 가장 많은 짐승을 잡았다. 왕이 불러 이름을 물었는데, 이름을 들은 왕은 깜짝 놀라면서 이상히 여겼단다【驚且異之】. "어? 이 놈이 그 유명한 온달이야?(驚) 근데 바보라는 놈이 왜 일케 화끈해?(異)" 아마 이랬을거다.
그럼 평강왕은 공주가 온달과 결혼한 걸 몰랐을까? 그럴 리 있나. 국가대표급 바보 온달의 결혼, 아무나 잡고 물어도 척 하고 집을 알려줄 정도 명사(名士)의 결혼을 고구려 사람들이 몰랐을 리 없다. 게다가 신부가 어디 보통 퀸칸가. 고구려 사람들이 다 아는 정보라면 왕도 뻔히 안다. 더구나 지 딸이 온달한테 시집간다고 나갔는데, 아무렴 소식을 몰랐겠는가. 그치만 아직은 모른 채 한다. 사위로 인정하기 싫다는 거다. 왜? 아직은 기껏해야 말 잘 타며 짐승 잘 잡는 사냥꾼 수준이기 때문이다.
얼마 뒤 후주(後周)의 무제(武帝)가 쳐들어오자 온달은 고구려군의 선봉장이 되어 적 수십명을 베니 이에 군사들의 사기가 치솟아 크게 이겼단다. 공을 따지니 온달이 단연 으뜸이었다. 그제서야 평강왕은 선언한다.

   "이 사람은 내 사위라!【是吾女壻也】"

이젠 온달을 사위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바보에서 영웅으로 인생역전한 온달, 사냥꾼이 아닌 위풍당당한 장군이자 왕의 사위가 된 거다. 왕은 예를 갖추어 그를 맞이하고 작위를 주어 대형(大兄)을 삼았다. 이왕 밀어주기로 한거 팍팍 쏜거다.

    여보... 나 죽었어... 어케해?

평강왕이 죽고 큰아들 영양왕이 즉위하자 온달은 신라에게 빼앗긴 한강 북쪽의 땅을 되찾아 오겠다고 말한다(땅이란 참 재밌다. 지가 빼앗았다는 사람은 없고 남한테 빼앗겼다는 사람만 있으니...). 왕의 허락을 얻은 뒤 출정에 앞서 그는 맹세한다. 땅을 되찾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겠다고 말이다. 그리곤 아단성(阿旦城 : 지금의 아차산, 즉 쉐라톤워커힐 부근) 전투에서 싸우다 그만 화살에 맞아 죽는다. 그래서 장례를 치루려는데 관이 움직이지 않는다. 이걸 어쩌나. 할 수 없이 공주를 부른다. 공주는 와서 관을 어루만지며 말한다.

"
죽고 사는 것이 결정되었으니, 아아~ (이제 그만) 돌아갑시다【死生決矣 於乎歸矣】." 폼나게 번역했지만 뜻인 즉 '죽은 주제에 더 개기지 말고 언능 가자'다. 그러자 마침내 관이 들렸단다【遂擧而폄(하관할 폄)】.

대체 왜 첨에 온달의 관은 움직이지 않았을까. 떠날 때 한 맹세 때문이다. 신라로부터 땅을 되찾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겠다고 하지 않았나. '빼앗긴' 땅을 되찾지 못했다는 자책 때문에, '몸은 비록 죽었으나 나라 위해 눈을 못감고(심수봉,「무궁화」중에서)' 있었던 거다. 그는 죽어서도 어쩔줄 몰랐다. '여보 … 나 죽었어 … 어케해? 가야 돼 말아야 돼?' 이 번민과 여한의 불꽃을 잠재워 줄 사람은 공주뿐이었다. 그래서 공주가 관을 어루만지며 한마디 하니 움쩍 않던 관이 뽈딱 들린 것이다. 온달은 이제 가벼운 마음으로 저 세상으로 갈 수 있었다.

나의 작은 가슴에 타오르는 불꽃은 님의 손길이 아니고서는 끄는 수가 없습니다(한용운,「님의 손길」중에서)

    온달은 '바보'가 아니었다?

이건 재미로 함 해보는 거다. '재미'라니 또 언짢으실 분 계시겠지만, 매사에 심각할 필요는 없쟎나. 우리 모두 좋아하는 온달에게서 '바보'란 굴레를 잠시 벗겨보자.

⑴ '우온달(愚溫達)'의 해석을 바꿔보자
앞서 말했듯이 온달을 바보로 보는 근거는 텍스트에 두 번 나오는 '우온달(愚溫達)' 뿐이다. 따라서 '우(愚)'의 뜻만 살짝 바꿔주면 된다. '우(愚)'에는 '바보' 말고 '우둔하다' '우직하다' '무식하다' 등의 뜻도 있다. 이 중에서 '우직(愚直)'으로 볼 순 없을까? '우직한 온달'로 말이다.
'우직',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어리석고 고지식하다'로 나온다. '고지식'은 '성질이 외곬으로 곧아 융통성이 없음'이란다.
하긴 이거 요새 국어사전에서 찾은 거니 그대로 믿긴 좀 그렇다. 고전에서 이런 용례를 찾아보면,『논어(論語)』「先進」편에 '柴也愚'라는 대목이 나오는데, 여기서 '우'의 뜻은〔集解〕를 보면 '何晏曰, 愚, 愚直之愚也'로 풀었다. 즉 여기서 '우'는 '우직'을 뜻한다는 거다. 그러니 텍스트에 나오는 '우'도 여러 가지 해석 중 '우직', 즉 '어리석고 고지식하다' 또는 '어리석을 정도로 고지식하다' 정도로 풀어도 괜찮지 않을까 한다(글케는 절대 못하쥐... 하시는 분은 이하 안 읽으셔도 된다). 어리석은 거하고 바보라는 거하고는 다르다는 건 굳이 설명 안해도 아시리라 믿는다.

⑵ 바보짓 한 사례는 나오지 않지만
우직한 짓 사례는 여럿이다
이미 말했다. 국가대표급 바보라면서 무슨 바보짓을 했는지 텍스트에는 나오지 않는다. 그럼 우직한 짓은 나오나? 나온다.
① 거지꼴을 하고 늘 히죽대며 밥을 빌어 노모를 봉양하는 거, 바보일 수도 있지만 우직일 수도 있다. 거지가 곧 바보는 아니쟎은가. 난 이게 온달을 전국적인 명사로 만든 요인으로 본다. 바보라서가 아니라, 비록 거지지만 우직하게 노모를 봉양하는 게 사람들 보기에 기특했던 거다. 물론 거지이자 바보면서 노모를 봉양했다면 더 화제가 됐겠지만, 꼭 바보가 아녔더라도 남의 이목을 끄는 데는 지장이 없었을 거다.
근데 공주가 울 때마다 평강왕이 '나중에 온달한테 시집보낸다'고 놀려댄 건, 고구려 여성들이 기피하는 신랑감 0순위가 온달같은 스타일였음을 보여준다.
'우직한 거지', 이거 영원한 평생 거지다 ('교활한 거지', 이건 약간 희망 있다). 게다가 '우직한 효자', 여자들이 좋아하는 줄 아나. '우직한 효자 거지', 이것만으로도 최악의 조건은 충분히 성립된다. "저 사람 참 훌륭하구나" 감동하는 것과 "저런 사람한테 시집가야지" 생각하는 건 별개의 문제다.

② 온달이 공주를 첨 만났을 때 얄짤없이 안면깐 거, 이거 우직이다. 중딩 땐가, 담임 쉐임이 청소당번들 벌 세워놓고서 깜빡 잊고 칼퇴근하셨다. 어리버리한 몇 놈들, 늦게까지 교실 바닥에 꿇어앉아 있었네. 딴반 쉐임이 그냥 가라 해도, 한 녀석은 우리 쉐임 말씀이 아니라며 개겼다(찐빠 먹고 곧 가긴 했지만). 이거... 우직이다. 바보랑 다르다. 온달은, 산에서 어떤 여자가 꼬시면 그건 여우 아니면 귀신이라고 평소 교육받은 거 아녔겠나. 우직하게 그 말을 따랐을 뿐이다.

③ 공주는 온달에게 말 고르는 요령을 갈쳐주며 심부름을 시킨다. 왜 공주 지가 직접 안갔을까. 온달을 믿었기 때문이다. 잔머리 굴리지 않고 시키면 시키는 대로 따르니까. 이건 우직이지 바보가 아니다. 바보였다면 슈퍼에서 컵라면 사오는 것도 아닌데 혼자 보냈을 리 없다.

④ 앞서 말했다. 아단성 전투에서 죽었을 때 온달의 관이 움직이지 않은 건 지가 했던 맹세 때문였다고. 신라로부터 땅을 빼앗기 전엔 돌아오지 않겠다고 한 그 맹세 말이다. 약속을 못지켰으니 시신조차 돌아가는 게 맘에 걸렸던 거다. 이거 정말 우직의 진수다.

⑶ 그래, 이런 거뜰 바보도 다 하는 짓이라 치자. 근데 온달이 보통 바본가. 왕실에서도 인정한 국가대표급 바보 아닌가? 이 정도 양호한 상태의 바보가 국가대표급이라면, 고구려 사람들의 평균 지능은 대체 어느 정도란 말인가.

⑷ 노모 입에서 아들이 바보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공주를 첨 만났을 때 노모는 일케 말한다. '내 아들은 가난하고 비루해서 귀인(貴人)이 가까이 할 바가 아니오.' 담 만났을 때도 똑같이 말한다. 분수를 지킬 줄 아는 노모, 비록 앞은 못보지만 훌륭하신 분이다. 그 아들이 우직한 것도 다 이런 노모의 훈계 때문 아녔겠나. 암튼 그 때 노모가 정말 공주를 물리칠 거였으면 "내 아들 바본데?" 하고 한 큐 날렸을텐데 그런 말이 없다. 물론, 어느 부모인들 남한테 자기 자식이 바보라 하고 싶겠는가.
"얘가 머린 좋은데 노력을..."
"친구 잘못 사귀어서...."
일케 둘러대겠지. 그래도 정말 공주를 쫒아내려 했다면, 그 이유가 자기들의 분수를 지킬 줄 알아서든, 군식구 하나 더 늘어나는 걸 막기 위해서든(보물팔찌를 아직 못봤을 때) "내 아들 바보요" 하지 않았을까. 아들이 좀 어리버리하긴 하지만 적어도 바보는 아니니 이 말을 하지 않은거 아닐까.

⑸ 온달은 바보가 아니고 우직했다고 봐야 갑자기 방방 뜨게 되는 반전(反轉)이 좀더 부드럽게 설명될 수 있지 않을까. '바보 → 명장' 보다는 '우직이 → 명장'이 좀 설득력 있지 않나 하는 말이다. 이 경우 극적인 효과는 줄겠지만...  

   온달은 정말 행복했을까?

이런 추리가 그럴듯한지 아닌지는 독자 여러분이 판단할 몫이다. 다시 온달을 바보로 돌려놓고 잠시 오버 좀 해보자.
우리 친척 중에 지능이 아주 낮은 형님이 한 분 계신다. 물론 아직도 장가 못가셨다. 뵌 지도 한참 된다. 옛날에 그 형님을 뵈면, 동생인 내게 넙죽 절을 하시며 존대말을 쓰신다. 그리고 언제나 해맑게 웃으신다. 정말 행복해 보인다. 근데 주위 사람들은 전부 그 형님이 불행하단다. 그 형님을 보고 측은지심을 갖는 건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는 그 분들은 정말 그 형님보다 행복할까.
그 형님, 정말 불행한가? 아니다. 그 형님보다 배운 거 많고 가진 거 많으면서도 맨날 푸념만 하며 만족할 줄 모르며 사는 내가, 무슨 근거로 그 형님보다 행복하다 말할 수 있을까. 그 형님은 정말로 행복한 거다. 가끔 이런 생각도 해본다. 사람의 지능지수와 행복지수는 반비례하는 거 아닌가 하고 말이다.

중견 연극배우 김아무개씨가 어느 잡지에 쓴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젊었을 때 산동네에서 어떤 남자랑 동거했단다. 추운 겨울밤 수도가에 나와 설거지를 했단다. 시린 손을 호호 녹여가며 찬물로 말이다. 그러다 문득 밤하늘을 쳐다봤단다. 별들이 초롱초롱 빛나더란다. 그 순간, 너무나 행복해서 울고 말았단다. 행복이란 그런거다. 지들이 행복하다는데 왜 남들이 이러쿵저러쿵 하는가.

난 온달은 정말 행복했다고 믿는다(공주도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공주의 말이라면 꼼짝 못했고, 공주 없이는 스스로 판단하거나 행동할 줄 몰랐다 해도, 공주를 정말 사랑해서 복종한 것이라면 그건 행복이다. 바보였든 우직했든 관계없이 말이다.
여러분은 그런 시절 없었나? 난..... 있었는데...(과거형임에 유의하자).

딴지 역사부 / 돗자리 (e-rigby@hanmail.net

- 딴지일보 106호(2003.4.13)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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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 온달과 평강공주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온달은 지혜로운 여자를 만나 출세를 한 사람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능력있는 여자를 만나 출세하고자 하는 심리적 지향을 일러 '온달 콤플렉스'라고 한다.
그런데 온달이 단지 이런 식으로 각인된 것이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구비로 전승되는 온달 이야기는 대부분 온달의 바보스러움과 공주의 뛰어난 품성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삼국사기' 열전에 실린 이 이야기에는 온달의 바보스러운 면모는 찾아볼 수 없고, 다만 가난하지만 노모를 모시고 사는 평범한 서민으로 형상화되어 있다. 오히려 후반부에 가서는 탁월한 능력을 지닌 영웅적인 인물로 등장하고 있다.

온달은 고구려 평강완 때의 사람으로 그 용모가 기이하게 생겨 우스우나 마음만은 착하였다. 그는 집이 몹시 가난하므로 항상 걸식을 하여 어머니를 봉양하였고, 다 떨어진 옷과 낡은 신발을 신고 시정으로 왕래하였으므로 모든 사람들은 그를 보고 바보 온달이라고 하였다.

이 때 평강왕의 어린 공주가 울기를 잘 하므로 왕은 희롱하는 말로,
너는 늘 울기만 하여 나의 귀를 요란스럽게 하니 커서도 반드시 사대부의 아내가 될 수는 없으리라. 꼭 바보 온달에게나 시집보내겠다."
하였다.
평강 공주가 자라 16세가 되었을 때, 왕은 그를 상부의 고씨에게 시집보내려 하였는데 공주는 대답하기를,
대왕께서는 항상 말씀하시기를 '너는 꼭 온달에게 시집보내겠다'고 하옵더니, 지금 무슨 까닭으로 먼저 하신 말씀을 고치나이까? 필부도 오히려 식언을 하려고 아니하옵는데, 항차 지존이신 분의 말씀으로 어찌 그러할 수 있사오리까? 그런 까닭으로 '왕자는 희롱하는 날이 없다' 하옵니다. 지금 대왕의 명하심은 잘못된 것이므로 소녀는 감히 그 명령을 받들지 못하겠나이다."
하니 왕은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너는 나의 말을 듣지 않으니 곧 나의 딸이 될 수 없다. 어찌 함께 살 수 있겠느냐? 마땅히 너의 가고 싶은 데로 가라."
고 하였다.
이에 공주는 귀중한 가락지 10개를 팔꿈치에 맨 뒤에 궁궐을 나와 홀로 걸어가다가 길에서 한 사람을 만나 온달의 집을 물으니 그 집에 이르러 눈먼 노모를 보고 그 앞에 나가 절하며 그 아들이 있는 곳을 물으니, 노모는 대답하기를,
"내 아들은 가난하고 또한 누추하므로, 귀인이 가까이 할 바가 못 됩니다. 지금 그대의 냄새를 맡고 말소리를 들으니, 그 냄새가 이상히도 향기롭고, 그대의 손을 만져보니 마치 솜과 같이 부드러우니 천하의 귀인 같은데, 누구의 댁에서 이곳으로 오셨는지요? 내 아들은 주림을 찾지 못하여 느릅나무 껍질을 벗기려 산으로 간 지 오래되었으나, 아직도 돌아오지 아니하였습니다."
하였다.
공주는 곧 그를 찾아 나가 산 밑에 이르러 온달이 느릅나무 껍질을 벗겨 가지고 오는 것을 보고는 곧 그에게 속에 품고 있는 말을 하니, 온달은 성난 모양으로 얼굴빛을 바꾸며 말하기를,
"이곳은 어린 여자가 다닐 곳이 아니다. 반드시 사람이 아니고 여우나 귀신일 것이다. 나에게 가까이 오지 마라."
하고, 드디어는 돌아보지도 않고 가 버리므로 공주는 홀로 뒤따라와서 싸리문 밑에서 자고 그 다음날 아침에 다시 집 안으로 들어가서 그 모자에게 자세한 이야기를 하였으나, 온달은 여전히 의심하고 뜻을 결정짓지 못하고 있을 때 그 어머니가 말하기를,
"나의 아들은 어리석으므로 귀인의 배필이 되기에 부족하고, 우리 집은 누추하므로 귀인의 거처할 곳으로는 마땅하지 않습니다."
하였다. 공주가 대답하기를,
"옛사람의 말에 '한 말의곡식이라도 찧을 수 있으면 오히려 족하고, 한 자의 베라도 꿰맬 수 있으면 오히려 족하다'하였으니, 진실로 한 마음 한 뜻이라면 부귀를 누려야만 같이 살 수 있으리오?"
하고, 곧 금가락지를 팔아서 밭과 집, 노비와 우마, 기물을 사들여 소용되는 기구를 모두 마련하였다.
처음에 말을 사올 때 공주는 온달에게 말하기를,
"삼갈 것은 시정에서 일반 장사꾼의 말은 사지 말고, 국마(國馬)로 병이나 야위어 놓아 버리는 것이 보이면 이를 가려 사고, 그런 것이 없으면 좋은 말을 샀다가 뒤에 그런 말과 바꿔 오시오."
하니, 온달은 그 말대로 말을 사왔는데, 공주는 이 말을 아주 정성껏  길렀으므로 말은 날마다 살찌고 건장하여졌다.
고구려는 해마다 3월 3일에는 낙랑의 산언덕에 모여 사냥을 하여 잡은 돼지와 사슴 등으로써 하늘 및 산천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그날이 되면 왕도 사냥을 나갔는데, 군신들과 5부의 군사들도 모두 왕을 따라 나섰다.
이때 온달은 집에서 기른 말을 타고 수행하였는데, 그는 남보다 앞에서 달려갔고, 또한 사냥하여 잡은 짐승도 제일 많아 다른 사람으로서 그를 따르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왕은 그를 불러오게 하여 성명을 묻고는 놀라며 또한 이를 특별히 칭찬하였다.
이때 후주의 무제가 군사를 일으켜 요동으로 쳐들어오므로, 왕은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 배산의 들에서 적을 맞아 싸웠는데, 온달은 선봉이 되어 날래게 싸워 적 수십 명을 베어 죽이니 모든 군사들은 이 이긴 틈을 타서 달려들어 힘써 적을 무찔러 크게 승리하였다. 개선하여 전공을 의논할 때 모두 온달을 제일로 내세우지 않는 사람이 없으므로, 왕은 크게 기뻐하며 감탄하기를,
"이 사람은 곧 나의 사위다."
하고 마침내는 예를 갖추어 그를 맞아들이고, 벼슬을 주어 대형을 삼고 이로부터 총애함이 더욱 두터우니 그 위엄과 권세가 날로 성하였다.
양강왕이 즉위함에 이르러 온달은 왕에게 이르기를,
"신라는 우리 한강 이북의 땅을 빼앗아 군 현으로 만들었으므로 백성들은 원통함에 젖어 언제나 부모의 나라를 잊어 버리지 않고 있사오니, 원컨대 대왕께서 신을 어리석고 불초하다 마시고 군사를 내주시면 한번 나가서 싸워 우리의 땅을 회복하겠나이다."
하니, 왕은 이를 허락하였다.
온달은 군사를 거느리고 떠날 때 맹세하기를,
"내 계립현(문경)과 죽령의 서쪽 땅을 우리 땅으로 돌리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하고 드디어는 신라군과 아차성(서울 부근 광장리 산성)밑에서 싸우다가 적의 화살에 맞아 전사하였다. 이에 그를 장사지내려 하였는데, 영구가 땅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공주가 와서 관을 어루만지며 말하기를,
"죽고 사는 것은 이미 결판이 났사오니 마음놓고 돌아갑시다."
하자 비로소 관이 움직여서 장사를 지냈는데, 왕은 이 말을 듣고 크게 슬퍼하며 통곡하였다.

● 온달은 역사적 인물이다?
역사적 인물 온발은 590년 전사했는데 민간에서 이를 설화화하여 전승시켰다. 그것이 삼국사기에 수록된 듯한데, 이 글의 원문은 삼국사기에서도 명문으로 꼽히는 글이다. 이 글에서 당시 민중들의 애국심, 충성심, 무용 등이 잘 나타나 있다. 미천한 출신인 주인공이 시련을 겪은 후 숭고한 인물로 변한다는 이야기는 지금도 흔히 볼 수 있는데 설화에 잘 드러나 있다. 백제의 <무왕 설화>도 같은 계열의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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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삼성 시조신화

 

 "삼성신화는 제주도의 인간 기원을 알려주는 시조신화이다. 이 신화에는 인류의 기원과 목축과 혼인 집단생활 등이 나타나 있다. 그러나 이 신화는 본래 무가(巫歌)로 전해지던 것이며 삼을나는 비실재인으로 세 집안이 모시던 씨족의 수호신(뱀 토템)이었을 것이다."

 

   아득한 옛날이었다.
   한반도 남쪽 끝에서 뚝 떨어진 바다 가운데 탐라라고 하는 섬이 있었다. 망망한 바다 가운데 아무도 손 닿지 않은 섬이었다. 그저 메마른 바위와 흙만이 바닷물에 씻겨 내렸을 뿐이었다. 섬 한 가운데는 한라산이 높이 솟아 있는데 늘 구름에 둘러싸여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처럼 늘 구름에 싸여있는 한라산이 마침내 웅장한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하늘에 있는 상제가 한라산에 감돌고 있는 구름을 하늘로 끌어 올렸기 때문이었다.
   바로 이 날, 한라산 북쪽 들에서 이상한 기운이 돌더니 세 사람이 땅에서 솟아나왔다. 그들은 온 몸에서 광채가 나고 늠름하게 생긴 장정들로 이름은 각각 양을나, 고을나, 부을나였다. 그들은 숲이 우거진 섬을 휘젓고 다니며 사냥으로 날을 보냈다. 사냥해서 잡은 짐승의 가죽은 옷을 해입고 고기는 먹이로 삼았다. 섬에 사람이라고는 이들 세 사람 밖에 없기 때문에 먹고 사는데는 조금도 걱정이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세월이 흘러가면서 뭔가 외로움 같은 것을 느꼈다. 그것은 막연하게나마 이성이 그리운 것이었다. 하루는 바닷가에 나가 고기를 잡고 있었다. 이 날따라 웬일인지 고기가 잡히지 않아 짜증스럽게 바위에서 쉬고 있었다. 그 때 누군가 소리를 질렀다.
   "저것을 보게나. 저게 무엇이기에 이쪽으로 떠내려오지."
   세 사람의 시선은 모두 한 곳으로 집중됐다. 무엇인가 실은 배가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그들은 배가 오고 있는 쪽으로 달려갔다. 배 위에는 자색의 목함이 있었는데 이것을 열어 보니 안에 또 석함이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붉은 띠를 두르고 자색옷을 입은 사내가 한 사람 있었다. 그는 일본국에서 온 사신이었다.
   그는 세 사람에게 큰 절을 하였다.
   "저는 일본의 사신으로 공주 세 분을 모시고 왔습니다. 공주 세 분은 모두 하늘이 정해주신 것이니 앞으로 나라를 세우고 자손 만대에 번영하시기 바랍니다."
   일본에서 온 사신은 이렇게 말을 하고 세 사람의 이야기를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이 하늘로 높이 솟구치더니 구름을 타고 어디로인가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세 사람은 석함을 열어 보았다. 아름다운 향기와 함께 그들에게 나타난 것은 푸른 옷을 입은 처녀 세 사람이었다. 그들은 아름다운 자태로 얌전하게 앉아 있었다.
   '아, 하늘이 우리에게 내린 선녀구나.'
   세 사람은 얼떨결에 이렇게 말했다. 꼭 꿈만 같았다. 그리고 이처럼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이렇게 먼 길을 오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우리들은 세 공주를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세 사람이 이렇게 말하자 공주들도 다소곳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저희들은 일본 나라의 공주들입니다. 부왕께서 이르기를 탐라국에는 땅에서 신인(神人) 세 사람이 솟아나와서 장차 나라를 세우려는데 도와줄 배필이 없으니 가서 짝이 되어 도와주라는 분부를 받고 왔습니다."
   세 사람은 공주들이 하는 말을 듣고 아주 만족했다. 그들은 나이 순서대로 각각 공주를 택하여 짝을 짓고 행복한 생활을 시작했다.
   이렇게 생활을 시작하고 나니 그전처럼 셋이 함께 살기는 불편했다. 세 사람은 의논 끝에 활을 쏘아 샘물이 달고 땅이 기름진 곳을 가려서 땅을 나누어 갖게 되었다. 양을나가 살 곳은 제1도, 고을나가 살 곳은 제2도, 부을나가 살 곳은 제3도였다.
   세 공주는 각기 자기 남편을 도와 밭에 나가 알하고, 바다에 나가 미역을 땄다. 그들은 부지런히 일을 하였다. 그들의 이런 노력은 헛되지 않아 탐라국은 날로 번창해갔다.
   이들이 나온
세 구멍은 삼성혈(三聖穴)이라 하는데, 이들은 각기 고(高)씨, 양(梁)씨, 부(夫)씨의 시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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