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시보(南時甫)에 답함                     -이황-

학문은 오로지 벗 사이에서 갈고 닦는 힘에 의지하는 것인데, 우리 마을의 선비로서 뜻있는 사람들은 대개가 다른 일 때문에 이 일에 전심(專心)하지 못하여, 경계되고 유익됨이 자못 적습니다. 산중에 홀로 앉아 있으려니까 날로 무디어지고 침체되는 것 같아 걱정입니다. 전날 서울에서 함께 만나 즐기던 즐거움을 매양 생각하지만, 또 다시 바른 사람을 만나지 못함은, 나의 경우 역시 주신 편지에 말한 것과 같습니다.

특히 이제까지 강학(講學)한 것은 거의가 망연(茫然)하고 한만(汗漫)한 지경에 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요즈음 회암(晦菴)의 글을 읽으며 친절한 뜻을 엿보고서야, 비로소 전날의 그것이 잘못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대체로 이(理)는 일상 생활 속 어디에나 있는 것입니다. 동작 중에도, 쉬는 중에도 있고, 말하거나 묵묵히 있거나, 이륜(彛倫)에 따라 응접(應接)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평범하고 실제적이며, 명백하게 있습니다. 세미(細微)한 곡절(曲折)의 경우에도,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그렇지 않은 게 없습니다. 눈 앞에 드러나 있으면서, 또한 아무 조짐(兆朕)도 없는 데로 묘하게 들어갑니다. 처음 배우는 사람들은 이것을 버리고 성급히 고원(高遠) 심대(深大)한 것을 일삼아, 지름길에서 재빨리 손쉽게 얻으려 하지만, 이는 자공(子貢)도 하지 못한 것인데 우리가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한갖 수고로움만 있을 뿐 실행하는 데 있어서는 망연히 의거할 실속이 없습니다. 연평(延平)이 “이 도리는 순전히 일상 생활 속에 있다.”고 하였는데, 뜻 깊은 말입니다.

    # 남시보(南時甫) : 남언경. 서경덕의 문인

    # 강학(講學) : 학문을 강구(講究)함

    # 망연(茫然) : 멀고 아득함

    # 한만(汗漫) : 등한시 함

    # 회암(晦菴) : 중국 송(宋)나라의 철학을 집대성한 유학자 주희(朱熹;1130∼1200)의 호. 후대 사람들이 주자(朱子)라 존칭하면서 그의 학문을 주자학이라고 함.

    # 이(理): ① 사물 현상이 존재하는 불변의 법칙. ② 중국 철학에서 우주의 본체. 만물을 형성 하는 정신적 시원.'기(氣)'의 상대 개념.

    # 이륜(彛倫) : 인륜. 떳떳이 지켜 나가는 인간의 도리

    # 응접(應接) : 어떤 사물에 접촉함

    # 세미(細微) : 매우 가늘고 작은

    # 곡절(曲折) : 자세한 사연이나 까닭

    # 자공(子貢) : 위나라의 유가(儒家)로 성은 단목(端木) 이름은 사(賜), 공자의 제자로 십철(十哲)의 한 사람

    # 연평(延平) : 중국 송의 이동(李洞)의 호. 주희의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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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충렬전(兪忠烈傳)                   -  미 상 -

명나라 때 개국공신이었던 유심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가 늦도록 자식이 없어 한탄하다가 부인 장씨와 더불어 남악 형산에 가서 아들을 얻기 위하여 칠일 기도를 드렸다. 그 날부터 태기가 있어 귀한 아들을 낳았는데, 충렬이라 이름짓고 잘 키우게 된다.

충렬은 어릴 때부터 영웅의 기상을 보였다. 충렬이 7세 되던 해에, 조정의 신하들 중에 역심을 품은 정한담과 최일귀 등이 정적인 유심을 모함하여 귀양보내고, 충렬의 영웅성을 알고 그들마저 죽이려 하였으나, 장 부인이 한 꿈을 얻어 미리 도망한다.

천우신조로 살아난 충렬과 장씨 부인은 그 이후로 많은 고난을 겪게 되는데, 회수 가에서 수적을 만나 수적들이 충렬을 물에 던지고 장부인은 데려간다. 도둑의 대장이 아내로 삼으려 하나 장부인은 무사히 탈출한다. 여러 번 고난을 겪으나 남해 용왕의 도움으로 금릉 활인동이 이인학이라는 사람 집에서 은거하게 된다. 회수에서 죽을 뻔한 충렬은 장사치들의 배에 의해 구출되어 영릉 지방의 승상 강희주의 도움을 입어 의탁하는데, 강승상은 유심의 오래 된 친구이기도 하다. 충렬은 여기에서 강승상의 딸과 결혼을 한다.

강승상은 유심을 귀양보낸 것이 부당하다는 상소를 올리는데, 오히려 정한담의 모함을 받아 그마저 귀양하게 되고, 강희주의 가족들은 난을 피하여 모두가 흩어진다. 충렬은 아내와 작별하고 백룡사에서 노승을 만나 무예를 배우며 때를 기다린다. 강승상의 부인과 딸도 여러 가지 고통을 겪는다.

이때 조정에서는 정한담과 옥관 도사가 천자 되기를 도모할 즈음에 호국이 침입해 온다. 정한담은 호왕과 은밀히 내통하여 대군을 끌고 나갔다가 다시 황성을 친다. 천자는 금산성으로 피신하지만 위기에 빠진다. 정한담에게 여러 번 패한 천자가 항복하려 할 즈음에, 백룡사에서 수학하던 충렬은 도승의 지시를 받고 갑옷과 칼과 명마를 얻어서 순식간에 금산성에 도착하여 천자를 구해낸다. 이렇듯 유충렬은 거의 단신으로 반란군을 쳐부수어 정한담을 사로잡고, 호왕에게 잡혀간 황후, 태후, 태자도 구출한다. 충렬은 또한 부친이 계신 적소로 가서 부친을 구해내고, 장인 강희주도 구하여 개선한다. 그러나 유충렬은 어머니와 아내 생각에 마음이 무겁던 중 영릉 땅에 이르러 아내와 어머니를 찾아 함께 입성한다. 천자를 비롯하여 문무백관의 영접을 받은 그는 높은 벼슬에 올라 부귀영화를 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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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우치전(田禹治傳)                   -  미 상 -

 

 줄거리   

 

조선 초 송경(송도)의 숭인문 안에 전우치라는 신묘한 재주를 가진 선비가 있었다. 자신의 자취를 잘 감추는 특기를 가진 자였다. 이 때, 남방에는 해적들이 횡행하는 데다 흉년이 계속되어 비참했다. 전우치는 공중으로부터 조정에 나타나, 하늘에서 태화궁을 지으려 황금 들보를 하나씩 구하니 만들어 달라고 하여 이를 가지고 가 빈민을 구제한다. 뒷날 속임을 당한 국왕이 대노하여 전우치를 엄벌하려고 전국에다 체포령을 내렸다. 전우치는 자기를 잡으러 온 포도청 병사들을 도술로써 물리친다. 그러나 국왕의 명을 어길 수 없어 병 속에 들어가 국왕 앞에 나타나니 전우치를 죽이려고 여러 방법을 썼으나 실패했다. 그리하여 정중히 나타나면 죄를 사하고 벼슬을 주겠다고 했으나 전우치는 나타나지 않았다.

전우치는 주로 구름을 타고 사방으로 다니며 더욱 어진 일을 행하였다. 가다가 억울한 사람마다 그 소원을 풀어 주고 원한도 풀어 주었다. 어느 날은 한자경이란 자가 부친상을 당하여 장사 지낼 여력이 없고, 노모를 봉양할 길이 없어 슬피 우는지라. 전우치가 족자 하나를 주고 잘 사용하라 했건만, 그가 너무 욕심을 내어 화를 당하였다.

뒤늦게 조정에 들어가 선전관이 된 전우치는 자기를 얕보는 사람은 도술로써 곯려 주었다. 함경도 가달산 도적의 괴수 엄준을 잡아오니 왕이 크게 기뻐하기도 하였다. 이때 서호지방의 역모들을 잡아다가 문초하니 전우치를 시기하는 간신들이 그들을 매수하여 거짓으로 전우치의 음모라고 하게 하였다. 왕이 격노하여 전우치를 극형에 처하라고 했다. 전우치는 소원을 말해 왕 앞에서 그린 그림의 말을 타고 도망해 버렸다.

도망쳐 나온 전우치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족자 속의 미인을 불러 술과 안주를 가지고 오게 해서 재생들을 대접하기도 했다. 그 중에 족자를 사고자 하는 사람이 있어 고가로 팔았는데, 그는 그 족자를 가지고 재미를 보려다가 도리어 봉변을 당하였다.

전우치는 서화담이 도학이 높다는 말을 듣고 찾아갔다. 그는 화담의 도술에 걸려 곤욕을 당하고는 화담의 제자가 되었다. 이후 그는 태백산으로 들어가 계속 선도를 닦았다.

  감상 및 해설  

 

작자 연대 미상의 조선조 국문소설이다. 실재 인물인 전우치에게서 취한 것으로 의협심이 잘 나타난 작품이다. 전우치는 조선시대 실재했던 인물로서 전라도 담양 사람이었다고 한다. 지방에서 선비로 행세하다가 나중에 고려의 도읍지인 송도에 가서 숨어 버렸다는 설이 있다. <전우치전>은 그의 생애를 소재로 하여 쓴 전기체 소설이다.

실재인물을 주인공으로 하여 쓴 소설이긴 하나 그의 도술 행각을 그린 내용은 다분히 비현실적이다. 그러나 작자는 당시의 부패한 정치와 당쟁을 풍자하여 그것을 독자들에게 효과적으로 영합시키기 위하여 불가피했는지도 모른다. 그 내용이 <홍길동전>의 내용과 매우 흡사한 데가 있어, <홍길동전>과 동일 작자가 아닌가 하는 견해도 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전우치는 의협심을 발휘하여 지방정치의 부패성을 시정하고, 양민의 곤궁한 생활을 구제코자 종횡무진으로 활동한다. 물론 도술을 이용한다는 점에서 시비가 없지 않으나, 다분히 사회혁명 사상을 고취시키려고 쓴 것이 분명하다. 내용에 있어서 연대와 인물의 등장에 약간의 통일성을 잃고 있으나, 전우치의 신묘한 도술과 통쾌무비한 거사는 작자의 상상력이 대단했던 것으로 이해된다. 다만 한가지, 문장의 졸렬함을 지적할 수 있는데 어떤 곳은 소설의 줄거리를 읽는 느낌마저 들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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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계자가 (勿稽子歌)

 

 신라 내해이사금(奈解尼師今) 때 물계자가 지은 노래.

서정적인 내용의 거문고곡으로, 나라의 노래가 아닌 개인의 노래로는 첫 작품이다. 악기를 연주하면서 노래를 불렀지만, 가사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 '물계자가'라고 한 듯하다. 가사는 전하지 않으나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노래에 얽힌 이야기가 나와 있다.

  

[배경설화]

 제10대 내해왕(奈解王)이 즉위한 지 17년 임진에 보라국, 고자국(지금의 고성), 사물국(지금의 사천) 등 여덟 나라가 합세하여 변경을 침범해 왔다. 물계자가 포상, 갈화 싸움에 전공이 컸으나 태자에게 미움을 받아 포상이 되지 않았다. 누가 물계자에게
"이번 싸움의 공은 오직 당신 뿐인데, 상은 당신에게 미치지 않았으니 태자가 당신을 미워함을 그대는 원망하시오."
하고 물으니, 물계자는 대답하여
"나라의 임금이 위에 계신데, 인신(人臣)인 태자를 어찌 원망하겠소."하였다. 그 사람이
"그렇다면 이 일을 왕에게 아뢰는 것이 좋지 않겠소."하니 그는 말하길,
"공을 자랑하고 이름을 다투며 자기를 나타내고 남을 가리는 것은 지사(志士)의 할 바가 아니요. 힘써 때를 기다릴 뿐이요."하였다.

20년 골포국(지금의 합포) 등 세 나라의 왕이 각기 군사를 이끌고 와서 갈화(지금의 울주)를 쳤다. 왕이 친히 군사를 거느려 이를 막으니 세 나라가 모두 패했다. 물계자가 죽인 적병이 수십 급이었으나 사람들은 그의 공을 말하지 않았다. 물계자는 그 아내에게 말했다.

"내 들으니 임금을 섬기는 도리는 위태로움을 보고는 목숨을 바치고, 환란을 당해서는 몸을 잊어버리며, 절의를 지켜 사생을 돌보지 않음을 충(忠)이라 하였소. 보라(지금의 나주)와 갈화의 싸움은 진실로 나라의 환란이었고, 임금의 위태로움이었소. 그러나 나는 일찍이 자기 몸을 잊고 목숨을 바치는 용맹이 없었으니 이것은 불충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요. 이미 불충으로써 임금을 섬겨 그 누(累)가 아버님께 미쳤으니, 가히 효라고 할 수 있겠소. 이미 충과 효를 잃었으니 무슨 낯으로 다시 조정과 시정에 설 수 있겠소."
이에 머리를 풀어헤치고 거문고를 메고서 산에 들어갔다. 그리고는 대나무의 곧은 성벽을 슬퍼하고, 그것을 비유하여 노래를 짓고, 졸졸 흐르는 시냇물 소리에 비겨서 거문고를 타고 곡조를 짓고 하였다. 그곳에 숨어 살며 다시는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 <삼국유사> 피은(避隱) 제8 '물계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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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어사'라는 절 이름의 유래를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금정산은 동래현의 북쪽 20리에 있다. 금정산 산마루에 세 길 정도 높이의 돌이 있는데 그 위에 우물이 있다. 그 둘레는 10여 척이며 깊이는 7촌쯤 된다. 물이 항상 가득 차 있어서 가뭄에도 마르지 않으며 그 빛은 황금색이다.

세상에 전하는 바에 의하면 한 마리의 금빛 나는 물고기가 오색 구름을 타고 하늘(梵天)에서 내려와 그 속에서 놀았다고 하여 '금샘(金井)'이라는 산 이름과 '하늘 나라의 고기(梵魚)'라고 하는 절 이름을 지었다."

 



범어사의 창건 연대는 약간의 이설이 있으나 가장 합리적이고 정확한 것은 신라 문무왕 18년(서기 678년) 의상(義湘)대사에 의해서다. 문무왕 10년(670년) 의상대사가 당나라로부터 공부를 마치고 귀국하여 우리나라 국민들을 화엄사상(華嚴思想)으로 교화하기 위하여 전국에 세운 화엄십대 사찰중의 하나로서 문무왕 18년에 창건된 것이다.

옛 기록에 의한 창건의 연기(緣起)는 이러하다:

일찍이 바다 동쪽 왜인(矮人)들이 10만의 병선(兵船)을 거느리고 동쪽에 이르러 신라를 침략하고자 했다. 대왕이 근심과 걱정으로 나날을 보내고 있었는데, 문득 꿈속에 신인(神人)이 나타나 외쳐 부르는 것이었다. 신인이 말하기를, "정성스러운 대왕이시여, 근심하지 마십시오. 태백산 산중에 의상이라고 하는 큰스님이 계시는데 진실로 금산보개여래(金山寶蓋如來)의 제7후신(第七後身)입니다. 항상 성스러운 대중 1천명, 범부 대중 1천명과 신중(神衆) 1천명, 모두 3천명의 대중을 거느리고 화엄의리(華嚴義理) 법문을 연설하며, 화엄신중과 사십법체(四十法體) 그리고 여러 신과 천왕이 항상 떠나지 않고 수행합니다. 또 동쪽 해변에 금정산이 있고 그 산정에 높이 50여 척이나 되는 바위가 우뚝 솟아 있는데 그 바위 위에 우물이 있고 그 우물은 항상 금빛이며 사시사철 언제나 가득 차서 마르지 않고 그 우물에는 범천으로부터 오색 구름을 타고 온 금빛 고기가 헤엄치며 놀고 있습니다. 대왕께서는 의상스님을 맞이하여 함께 그 산의 금정암 아래로 가셔서 칠일 칠야 동안 화엄 신중을 독송하면 그 정성에 따라 미륵여래가 금색신(金色身)으로 화현(化現)하고 사방의 천왕이 각각 병기를 가지고 몸을 나타내어 보현보살, 문수보살, 향화동자, 40법체(四十法體)등 여러 신과 천왕들을 거느리고 동해에 가서 제압하여 왜병들이 자연히 물러갈 것입니다. 그러나 후대에 한 법사가 계속해서 이어가지 않는다면 왜적들이 사방에서 일어나 병사가 바위에서 또한 울고 있을 것입니다. 만약 화엄 정진을 한다면 자손이 끊어지지 않고 전쟁이 영원히 없을 것입니다."라 하고 신인은 곧 사라졌다.







 

 



왕은 놀라 깨어났고, 아침이 되자 여러 신하들을 모아 놓고 꿈 이야기를 했다. 이에 사신을 보내어 의상스님을 맞아오게 하였다. 왕은 의상스님과 함께 친히 금정산으로 가서 칠일칠야를 일심으로 독경했다. 이에 땅이 크게 진동하면서 홀연히 여러 부처님과 천왕과 신중 그리고 문수동자 등이 각각 현신(現身)하여 모두 병기를 가지고서 동해에 가서 왜적들을 토벌하니 혹은 활을 쏘고 혹은 창을 휘두르며 혹은 모래와 돌이 비 오듯이 휘날렸다. 또한 바람을 주관하는 신은 부채로 흑풍(黑風)을 일으키니 병화(兵火)가 하늘에 넘치고 파도가 땅을 뒤흔들었다. 그러자 왜적들의 배는 서로 공격하여 모든 병사가 빠져죽고 살아남은 자가 없었다. 대승을 거두고 돌아온 왕은 크게 기뻐하여 드디어 의상스님을 예공대사(銳公大師)로 봉하고 금정산 아래에 큰절을 세웠으니 이것이 범어사를 창건한 유래이다.

이와 같이 신인의 현몽(現夢)에 의하여 창건된 신라 당시의 범어사 규모는 대단히 컸던 것으로서, 미륵전(彌勒殿), 대장전(大藏殿), 비로전(毘盧殿), 천왕신전(天王神殿), 유성전(流星殿), 종루(鐘樓), 식당(食堂), 강전(講殿), 목욕원(沐浴院), 철당(鐵幢) 등이 별처럼 늘어지고 요사(寮舍) 360방이 양쪽 계곡에 늘어섰으며, 사원의 토지가 360결이고 소속된 노비가 100여 호로서 명실상부한 국가의 대 명찰이 되었다.

사적기(事蹟記)에서는 당시의 규모를 이와 같이 전하고 있다.

"금정산 아래에 이중전을 창건하였고 그곳에 미륵석상과 좌우보처와 사천왕이 각각 병기를 가지고 있는 모습을 조각해 모셨으니 그것이 곧 미륵전이다. 또 미륵전 서쪽에 3간의 비로전을 세우고 그 곳에는 비로자나불과 문수보살, 보현보살 그리고 병기를 든 향화동자상을 모셨다. 미륵전 동쪽에는 3간의 대장전을 세우고 팔만대장경 3본(三本)의 화엄경3장(三丈)의 석가여래상을 모셨다. 도량의 상층과 중간층에 별처럼 늘어섰으니 그 밖의 전각들은 이루 다 기록하지 않는다. 당시의 지관(地官)은 의상스님이고, 공사를 총감독한 이는 당시의 대왕이며, 기와일을 감독한 사람은 평장사(平章事) 유춘우(柳春雨)였고, 터를 닦고 재목을 운반한 사람은 담순귀(曇順鬼)등이었다.

상층의 길이는 220척이고 높이는 10척이었다. 그리고 다리의 층계는 19층이었다. 미륵전(彌勒殿)은 석휘(釋暉) 화상과 정오(正悟) 화상이 화주가 되어 세운 바이고 천왕신전(天王神殿)과 주불전(主佛殿)은 지연(智衍) 화상과 연철(然鐵) 화상이 화주가 되어 창건하였다. 불상에 금을 입히고 대장전(大藏殿)을 조성하였으며 대목의 일을 관장한 사람은 광숭(廣崇) 화상이었다. 그리고 혜등(蕙燈) 화상은 대장전의 시주자의 이름을 기록하였다.

강전(講殿) 3간을 세우고 주불 석상에 금을 입힌 것은 동국(東國) 왜인(倭人)이었다. 남협당과 좌우의 향화방 5간과 시간을 알리는 계명방 5간을 동쪽 언덕에 세웠다. 절의 계단은 길이가 310척이고 높이가 13척이었다. 다리의 층계는 23층이었다. 그리고 절 아래층에 5간과 위층의 3간에다 40법체제신과 사천왕이 병사를 거느리고 진압하는 모습의 소상을 만들어 세웠다.

좌우에 종루가 각각 2층이며 그 주위 좌우에 행랑이 세워졌는데 서쪽으로 9간, 북쪽으로 9간, 식당 9간 등은 범능(梵能) 스님이 창건한 것이다. 삼당은 석존(釋存) 스님 혼자 힘으로 창건한 것이고, 불상과 대당(大堂), 이협당(二俠堂)의 그림은 참연(參連) 화상이 이룩한 것이다.

3간 계단의 돌을 다듬은 사람은 혜초(惠超) 화상이다. 삼당(三堂)의 유성(流星), 천성탑(天星塔) 등은 억생(億生) 화상이 주무를 맡았다. 목욕원 3간과 석조(石槽) 절 밖의 철당(鐵幢) 33층과 그 표면의 33천을 조성하고 절 이름을 범어사라고 하였다. 또 전답에 관한 문서는 김생(金生)이 기록한 것이다. 그리고 이 전답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또한 문서에 모두 기록되어 있는데 사원의 전답은 총 360결이고 노비는 100호가 늘 360방에 거처했었다.
항상 화엄의 의리(義理)를 공부하고 또 화엄신중을 염송하여 왜인들을 진압하였다."


지금으로서는 사적의 기록을 일일이 증거할 길이 없으나 아무튼 창건 당시의 사찰의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를 대강 짐작하게 하고 있다. 그러나 범어사가 화엄십찰의 하나로서 화엄의 의리(義理)를 공부하고 화엄신중을 염송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사찰의 구도와 건물 배치 등은 반드시 화엄의 사상을 기저(基底)로 하여 화엄경의 이상향인 화장세계(華藏世界)를 지상에 실현해 본 것이 틀림없으리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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