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개츠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5
F.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김욱동 옮김 / 민음사 / 2010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피츠제럴드의 명성은 익히 들어왔지만 정작 그의 작품은 그닥 아는 게 없었다.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흐른다-를 읽었는데, 내게는 원작보다 영화가 훨씬 좋았기 때문에 위대한 개츠비에 대한 갈증이 그리 크지 않았다. 이번에도 영화 개봉을 앞두고 부랴부랴 책을 읽었는데 초반에 몰입이 되지 않아 힘들었다. 이번에도 내게는 영화 쪽이 더 선명하고 좋았다. 개인적으로 바즈 루어만을 좋아하고,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도 좋아하니 시너지 효과가 있기도 했을 것이다. 또한 1920년대 미국 사회에 대한 정보도 없는 관계로, 혼탁하고 무질서했던 당시의 사회상을 영화는 영상과 음악으로 함께 보여주니 훨씬 이해도 쉽고 몰입도도 좋았을 것이다. 그래도 이런 영화가 나올 수 있었던 건 분명 원작이 훌륭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 않고는 이토록 오랜 시간 동안 사랑받을 수는 없을 것이다.

 

소설 속에서는 왜 '위대한' 개츠비가 되는지 잘 이해가 가지 않았는데 영화는 그 부분도 아주 쉽게 설명했다. 그걸 '위대'하다고 말할 수 있는 건지는 의문이지만, 적어도 작중 화자의 입장에서는 그럴 수 있다는 걸 이해했다.

 

작품을 보면서 개츠비에 대해 연민도 느끼고 부러움도 느꼈다. 그가 일생을 건 여자는 그럴 만한 가치가 없다는 걸 몰랐다는 데에 연민을 느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몸을 던져 사랑할 대상을 갖고 있다는 것에는 하염없는 부러움이 일어버린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그렇게 절절한 사랑도 한번은 해봐야 하는 게 아닌가 싶어서.

 

작품이 1920년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우리가 강을 사이에 두고 강북 강남 나눠 있듯이 미국 동부의 도시에서도 이스트에그와 웨스트에그로 나뉘어서 서로를 디스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흥청망청 부어라 마시고, 또 윤리와 도덕이 실종된 시절을 살다가 벼락처럼 경제대공황을 맞게 되는 거겠지. 필연적인 결과로 보인다. 그리고 그 폐해는 전 세계가 함께 겪어야 했다. 참, 안타까운 역사였다.

 

민음사 버전의 위대한 개츠비는 내 입장에서 번역이 크게 좋지 않았다. 말끝마다 "형씨"라고 붙였는데, 영화에서는 "친구"라고 번역했다. 뉘앙스를 생각할 때 영화 쪽이 더 어울리게 들린다. 그밖에도 심혈을 기울였다는 역자의 말에도 불구하고 나는 다소 만족스럽지 않았다. 해서 시간이 좀 더 흐른 다음에 다시 위대한 개츠비를 읽고 싶어졌을 때는 타 출판사 번역으로 접해 보고 싶다. 시간이 오래 지나면 단순 비교가 힘들겠지만, 그보다는 다르게 다가올 위대한 개츠비가 궁금한 거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고령화 가족
천명관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타고난 이야기꾼이라고 했다. 작가 천명관에 대해서 들은 말이다. 몇 쪽 읽어보지도 않고 그말을 수긍했다. 책장이 파라라락 넘어간다. 좀처럼 책을 빨리 읽지 못하는 나도 빨리 읽는다고 착각할 정도로 책장이 넘어갔다. 재미있었다. 심각한 이야기가 나와도 재미 있었다. 무엇보다도 유머 감각이 대단했다. 이 놀라운 말빨! 그러니까 대세는 유머일까? 박민규도 떠오르고 성석제도 떠올랐다. 요즘처럼 복잡한 세상에서 무겁기만 한 책은 재미 없을 것 같다. 부담스러울 수 있다. 심각한 이야기를 진중하게 던질 때에도 가끔은 웃어줄 곳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 그런 쉼표를 만들 줄 아는 작가들이 인기를 얻는 것 같다. 꼭 그래야 한다는 건 아니지만, 그런 작가분들께 고마움을 느낀다. 쉬어갈 짬을 만들어 주어서......

 

작품의 화자는 둘째 아들 인모다. 십이 년 전에 만든 영화가 대박으로 망하면서 빚더미에 올랐고 신용불량자로 전락했으며, 아내와는 이혼했고 보증금 다 까먹고 월세마저도 밀려서 사면초가에 몰렸던 그를 구원해낸 것은 엄마의 전화 한통이었다. 닭죽 해놓았으니 먹으러 오라고 한 그 말은 인모를 사정없이 끌어당겼다. 그리고 그렇게 엄마 집에 발을 들여놓으면서 인모는 눌러앉아버렸다. 이미 그 집에는 앞서 엄마한테 얹혀 살고 있는 쉰두 살의 큰형 한모가 있었지만, 마흔 여덟의 인모도 물러날 데가 없었다. 둘이 합해서 둘로 나눠도 벌써 평균 나이 오십이다. 거기에 칠순이 넘은 엄마가 계시고, 마흔 다섯의 막내 여동생 미연이 열여섯 딸을 데리고 집에 들어앉았다. 두번째 결혼마저도 깨뜨릴 위기 순간에 말이다.

 

그러니 이미 '고령화 가족'이라는 제목은 설명되었다. 평균 나이 49세. 십년 전 사고로 돌아가신 아버지의 보상금으로 마련한 낡은 빌라 24평 집에 이렇게 다섯 식구가 북적이며 살게 되었다. 서로 으르렁거리고 할퀴며 버럭버럭 성도 내지만, 그런 자식들을 엄마는 매일 같이 고기를 먹이며 거둬주셨다. 뿐인가? 엄마는 오히려 자식들이 모두 들어와 살고부터 얼굴에서 더 빛이 났다. 자식들을 챙겨주는 데에서 삶의 보람을 느끼는 것처럼. 마치 결기라도 보이듯 매 끼니마다 고기를 삶고 굽는 엄마만이 이 집에서 유일하게 웃는 낯이다.

 

이 집에서 가장 많이 배웠고, 또 가장 공부도 잘했다던 영화감독 출신 인모는 그런 엄마가 수상했다. 혹시 잘 먹이다가 마지막에는 고기에 청산가리를 넣고 다 함께 죽자는 의미는 아닐까 의심마저 하면서. 그런 상상이 될만큼 지금 그들의 처지는 기구하고 황량하고 짜증이 났던 것이다. 인생 다 망쳤다고 여기는 인모만 기구했던 게 아니었다. 큰형 한모는 전과 5범이다. 그 중에는 강간미수까지 있으니 죄질이 아주 불량하다. 120kg이나 나가는 거구의 이 사내를 인모는 미워했다. 한심해서 미워했고 미안해서 미워했다. 그가 뭐가 미안해서 미워하게 되었는 지에 대해서는 작품 후반부에 가서야 나온다. 그리고 그 대목은 이 책에서 가장 울컥했던 부분 중 하나였다. 그래, 우리는 이런 감정들로 살아가지. 그렇게 나를 속이고, 세상을 속이고, 변명하며 아무렇지도 않은 척 살아가지만 사실은 그 죄책감으로 더 스스로를 갉아먹고는 하지. 그게 우리 모습이었어......

 

여동생은 두번의 이혼도 모자라 세번째 남편감을 데리고 왔다. 할머니로부터 삼촌들에 엄마까지, 하나같이 콩가루인 이 집안에서 가출을 결행하는 미연의 딸 민경. 그 과정에서 폭발해버린 미연의 절규가 또 한번 독자의 마음을 울렸다.

 

아마 다들 눈치 채고 있었을 거야. 근데 왜들 모른 척했어? 그때 누군가 따귀라도 갈기면서 욕이라도 하지 그랬어. 아니면 머리라도 깎아서 집에 들어앉히든가. 그런데 나한테 뭐라고 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어. 씨발, 무슨 가족이 그래? -132쪽

그러니까 나는 이 대목에서 기시감을 느꼈던 것이다. 비단 우리집뿐 아니라 내가 아는 누군가의 집에서도 보았던 어떤 모습을 확인한 것이다. 그 순간 어찌나 얼굴이 홧홧하던지... 여기서만 그랬던 게 아니다. 앞서 말했던 미안한 마음을 미움으로 바꿔버렸던 인모에게서, 원죄를 끌어안고 속죄하듯 살았던 이들 삼남매의 엄마에게서 한줌씩은 우리 가족의 모습을, 내가 가졌던 마음의 짐을 확인했던 것이다. 바로 이 콩가루 집안 이야기에서.

 

나는 평범한 사람들이 그런 행복을 얻기 위해서 무슨 짓을 하는지 궁금했다. 그것은 그저 위선에 가득 찬 역할극에 지나지 않는 걸까? 그래서 실은 그것이 드라마에서나 가능할 뿐, 현실에선 영원히 실현될 수 없는 허망한 판타지일까?
집에 들어와 함께 살기 전까지 나는 가족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것은 생각할 때마다 가슴을 답답하게 하고 힘이 쭉 빠지게 만드는, 평생 달고 사는 오래된 지병 같은 거였다. 평생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변두리만을 떠돌며 낭떠러지를 걷듯 살아온 천애의 삶, 아무리 똥줄 타게 뛰어다녀봤자 입에 풀칠하는 것조차 버거웠던 무능과 무지, 숱한 수모와 상처, 불명예와 오명의 역사...... 도대체 내가 어떻게 가족에 대해 자부심과 애정을 가질 수 있단 말인가! -141쪽

 

그랬다. 인모는 이 가족에 대해서 자부심과 애정을 가질래야 가질 수가 없었다. 부끄럽고 화딱지가 났다. 그런데, 그 인모가 이 집에서는 가장 우대받으며 산 인생이었다. 본인은 몰랐지만, 알았어도 인정하지 않고, 알려들지 않았지만 사실이 그랬다. 가장 많은 배려를 받고 자랐기 때문에 가장 이기적이었던 것이 인모 자신이었다. 인모는 그것을 모든 것을 다 잃고, 가족 외에는 가진 게 아무 것도 남지 않았을 때에야 깨달았다. 나이 오십이 다 되어서야.

 

어찌 보면 이 책은 나이 오십줄의 중년 남자의 '성장 소설'일지도 모른다. 지극히 자기 중심적이고 자기 기만적이었던 이 사내는 반세기 가까이 살고나서야 자신이 가족에 대해서 아는 게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엄마가 뭘 좋아하는지 몰랐고, 엄마가 무엇에 희열을 느끼는지 당연히 몰랐다. 형 한모가 자신을 얼마나 자랑스럽게 여기는지 알지 못했고, 동생 미연이 무엇에 가장 서러워하는지 알지 못했다. 조카딸은, 사실 얼굴도 몰랐고 이름은 당연히 몰랐다. 그랬던 그가 변해갔다. 엄마의 인생을, 엄마의 사랑을 이해해 가기 시작했고, 형에게 빚을 갚고 싶어했고, 여동생과 조카에게도 신세를 갚고 싶어했다. 그러기 위해서 지금껏 추켜세웠던 알량한 자존심도 포기했다. 내려놓을 무언가를 가졌을 때에야 그는 제 안에 가진 게 남아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렇게 비워내고 나서야 채워지는 제 마음의 그릇을!

 

그리고 사랑을 믿지 않고, 따라서 사랑을 제대로 해보지 못했던 그가, 뒤늦게야 사랑의 충만함을 깨닫기 시작한다. 그 은총의 세례를 입고 감격의 눈물을 흘릴 줄 알게 된다. 세상으로부터 버림 받고, 신으로부터 추방당한 것만 같던 그의 인생에 여명이 들기 시작했다. 그 출발점은 바로 그의 콩가루 가족에서부터였다. 거기가 시작이었다.

 

작품을 재밌게 읽었다. 다음 날 영화를 보기로 약속을 잡아 놓았기 때문에 다 읽고서 자고 싶었다. 다행히 연휴의 시작이었고, 새벽 3시까지 부담없이 읽을 수 있었다. 중간에 딴짓을 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들지 않을 만큼 빠져들었다. 많이 웃었고 꽤 뭉클했으며 마음에 묵직한 것들도 여럿 새겨넣었다. 좋은 작품이다. 영화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원작이 훨씬 좋다. 영화는, 그냥 마음을 비우고 봐야 한다. 연기 잘하는 배우들만 데려다 놓는다고 좋은 영화가 되는 건 아니니까...;;;;

 

여기서 나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헤밍웨이가 아기였을 때, 완벽한 문장으로 처음 한 말은 ‘나는 버팔로 빌을 몰라요’였다고 한다. 작가 그레이엄 그린이 처음 한 말은 ‘개가 불쌍해’였다고 알려져 있다. 역시 비범한 작가들은 뭔가 달라도 처음부터 다른 모양이다. 그렇다면 내가 완벽한 문장으로 처음 한 말은 뭐였을까? 그것을 말해줄 사람은 이제 이 세상에 없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이었는지는 나도 알고 당신도 알고 우리 모두가 안다. 그것은 틀림없이 다음과 같은 말이었을 것이다.
맘마. -287쪽

 

덧글) 오타 발견했다.

 

257쪽

언덕을 높고 가팔랐다. >>> 언덕은 높고 가팔랐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무개 2013-05-20 08: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작가 참 말빨 죽인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영화에서는 소설의 그 말빨들을 제대로 살리지 못했나 보네요.
좋은 배우들이 좋은 영화를 보증해주는건 역시 아니였군요.좀 기대하고 있었는데 아쉽군요.

마노아 2013-05-20 23:33   좋아요 0 | URL
소설에 비해서 배우들이 너무 젊었어요. 소설만큼 망가지지도 않구요. 그런 부분에서 좀 아쉽더라구요.
그리고 작품엠서 인모가 헤밍웨이를 읽으면서 생각하고 나누는 것들이 영화에는 나오지 않으니까 마지막에 좀 생뚱맞은 선언이 되어버리기도 하구요. 결정적으로 결말이 달라요. 영화는 좀 신파로 흘렀어요...;;;;

프레이야 2013-05-20 1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노아님, 저는 영화를 먼저 보고 책을 읽었어요. 책이 좀 늦은 감이 있지요.ㅎㅎ
영화 속 대사를 거의 원작의 글에서 그대로 쓴 부분이 많더군요. 저는 천명관이 이 소설로 처음이에요.
작은딸이 먼저 읽고는 좀 저속한 것 같아,라고 말해서 웃었어요. 아인 영화는 안 봤구요.
욕설이나 뭐 비속어가 하도 많이 나오니 그런 것 같아요.
삶의 너절한 뒷골목을 이해하긴 어린 나이이지요.ㅎㅎ 그렇게 대답해줬어요.
저는 이제 '고래'를 찾아서 읽어볼 생각입니다^^ 영화에선 윤제문이 멋졌어요.^^

마노아 2013-05-20 23:34   좋아요 0 | URL
책 먼저 보고 싶어서 개봉하고도 한참 있다가 영화를 보게 되었어요.
대사는 거의 비슷한데 짧은 시간안에 소설의 내용을 다 옮기기에는 무리가 있었지요.
저는 영화 속 인물들이 더 망가졌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도 충분히 소화하고 빛내줄 배우들인데 감독님이 너무 몸사리지 않았나 싶더라구요.
저도 뒤늦게야 고래를 읽어야겠어요. 고래 소개 받은지도 정말 한참 전인데 말이지요.
윤제문은 늘 멋져요. 배우들은 하나같이 다 좋았건만 원작의 함량에는 아쉽더라구요. ^^;;;
 
월플라워 - 삶의 가장자리에 서 있으면, 특별한 것들을 볼 수 있어
스티븐 크보스키 지음, 권혁 옮김 / 돋을새김 / 2012년 12월
평점 :
절판


일기를 쓰듯 블로그에 글을 올릴 때가 있다. 나의 사적인 공간이지만 어느 정도는 공개된 곳이고, 그래서 쓰고 나서 후회하거나 얼굴이 붉어질 때도 많았다. 그럼에도 그런 글쓰기가 필요했던 것은 내 이야기를 털어놓으면서 내 짐을 덜어내고 싶은 바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책의 찰리가 그랬다.

 

찰리는 자신이 알지도 못하는 상대에게 편지를 쓴다. 우연히 편지의 수신인이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이해도 잘해준다는 말을 듣고는 송신인 주소도 남기지 않은 채 일방적인 편지를 보내는 것이다. 이제 막 고등학교 생활을 시작하게 된 찰리는 두려움이 컸다. 친한 친구가 지난 봄에 자살을 했고, 지속적으로 우울증 치료를 받고 있는 찰리에게는 숨겨진 이야기가 많았다. 그 이야기들은 일년에 걸쳐 편지글을 통해 소개된다. 무척이나 아프고, 또 동시에 무척이나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찰리의 두 친구도 소개해야겠다. 남매인 샘과 패트릭은 올해 졸업반이다. 셋은 우연히 친구가 되었고 찰리는 샘에게 푹 빠져버렸다. 그렇지만 샘은 사귀는 남자가 있었고 찰리는 그저 샘이 행복하기만을 바란다. 그야말로 제목처럼 '월 플라워'다. 월 플라워란 파티에서 파트너가 없어서 아무도 상대해주지 않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일반적으로는 '집단에서 따돌림을 당하는 사람'을 가리킬 때 쓰인다. 각별히 감수성도 뛰어나고 문학적 재능도 출중한 찰리이지만 또래 친구들 사이에서는 잘 섞이지 못했었다.

 

그랬던 찰리가 친구들과 잘 어울리며 여러 추억들을 쌓을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샘과 패트릭 덕분이었다. 그러나 본인은 인식하지 못하지만 심연 깊이 자리한 트라우마는 아무리 노력을 해도 결정적인 순간에 뛰쳐나와 찰리를 무너지게 만들었다. 평범한 중산층 가정에 사랑 많은 가족들 사이에서 자란 공부 잘하는 막내 아들 찰리. 그런 찰리에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걱정하는 일이 무척 힘들었다. 아이의 큰 상처 하나가 드러나고 나서도 아직 꺼내지 못한 이야기 하나가 계속 마음에 걸려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야 등장하는 진짜 이유를 만날 때까지 초조해야만 했다. 게다가 이 책에는 섹스, 약물중독, 흡연, 동성애, 근친애까지... 찰리의 주변 아이들도 벅차게 겪는 성장통이 무척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어서 또 다른 아이가 자살을 하지나 않을까, 무슨 사고를 치는 것은 아닐까 역시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보게 되었다. 그런 소재 때문에 이 책을 금기시하는 분위기도 있었다지만, 이미 현실이 그러할진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있을까. 오히려 이 책은 적극적으로 미국의 90년대 청소년들을 드러내고 그들이 성장통을 진하게 겪으며 어른이 되어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하나하나의 인물들이 어찌나 애틋하고 절절하게 만들던지......

 

할아버지는 울고 계셨어. 남들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조용히 울고 계셨어. 나만이 알아차릴 수 있었지. 엄마가 어렸을 때, 성적표를 한 손에 들고 다시는 이런 점수를 받아오면 안 된다며 엄마를 때리셨던 할아버지를 생각했어. 할아버지는 형과 누나 그리고 나에게 당신의 뜻을 전하고 싶었던 거야. 방앗간에서 일하는 사람은 당신만으로 충분하다는 걸 분명하게 말씀하시고 싶었던 거지. 그런 생각이 옳은 것인지 잘 모르겠어. 그리고 자식들을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 대학을 포기하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인지도 잘 모르겠어. 딸들과 마음을 나누며 지내는 대신 자기보다 더 나은 삶을 살도록 만드는 것이 더 훌륭한 일인 건지도 잘 모르겠어. 아무 판단도 할 수 없어. 그래서 난 가만히 앉아 할아버지를 바라봤어. -101쪽

 

가난한 가족들을 위해 헌신했지만 그 가족들에게 정서적으로는 결핍을 주셨던 외할아버지. 그리고 지금은 유색 인종을 차별하는 발언을 하는 꼬장꼬장한 노인이 되어 계신 이 할아버지가 낯설지가 않다. 우리 나라에서 걸핏하면 가스통 들고 나와 목청 돋우는 자칭 보수인 극우파 할아버지들 말이다. 그분들의 헌신과 나라 사랑하는 마음을 부정하지는 못하겠지만 왜곡된 방향으로 기운 그 마음들이 안쓰럽고 불편하다. 찰리의 가족들은 다행히 이 할아버지를 가족 내에서 수습(?)하지만 우리야 어디 그렇던가...

 

찰리에게 책을 선물해 주며 방과후 학습을 시켰던 빌 선생님도 참 근사했다. 선생님은 찰리에게 지금 필요한 책들을 소개해 주었고, 그 책을 읽은 다음에는 에세이를 써 보게 하셨다. 아이는 책을 두번씩 읽는 습관이 있는데, 어떨 때는 울고 싶지 않아서 읽었던 책을 읽고 또 읽고, 자고 일어나서 또 읽는 일마저도 벌어졌다. 천 년 동안 잠들고 싶은 때가 있다고 말하는 이 열다섯 소년에게 마찬가지로 폭풍 성장통을 겪고 있는 소설 속 인물들을 소개해주며 스폰지가 아니라 필터가 되라고 조언해주는 좋은 선생님. 아이에게 '특별함'을 스스로 깨닫게 해주는 고마우신 분이다. 찰리에게 고마운 인물들은 이 밖에도 많이 등장한다.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서로의 시크릿 산타가 되어 상대 모르게 선물을 전해줄 때 패트릭이라는 친구가 참으로 마음에 들었다. 누가 보아도 선물을 보낸 이가 찰리라는 걸 알 수 있는데도 몰랐다는 표정을 지어주는 이 아이. 자신이 사랑하는 동성애 친구가 자신의 사진을 의심 받지 않고 지닐 수 있게 잡지에 사진을 싣는 배려를 할 줄 아는 아이다. 매번 샘과 패트릭은 찰리에게 산타 같은 존재였다. 데이트 상대에게 큰 실수를 저지른 찰리에게 꼭 필요한 조언을 해주었고, 제대로 사과하는 법을 알려준 남매였다. 글 쓰는 찰리에게 타자기를 선물하며 꼭 쓰고 싶은 글을 쓰라고도 했다. 먼저 졸업하는 아이들이 떠나고 난 뒤의 찰리가 겪을 심적 부담을 독자도 같이 걱정해야 했다.

 

그러나 어떤 상처는 꺼내야만 치유가 가능하기도 했다. 아무리 꼭꼭 숨겨놓아도 어떤 계기가 생기면 반드시 수면 위로 떠오를 수밖에 없는 것들이 있다. 찰리가 그랬다. 이 아이가 겪은 상처는 단순한 기억 봉인만으로는 감당이 되지 않는 수준이었다. 가여운 이 아이가 곁에 있다면 꼭 안아주고 싶다. 자주 눈물을 터트리는 이 아이의 옆에서 등을 토닥여 주고 싶다. 그리고 괜찮다고, 더 괜찮아질 거라고 말해주고 싶다. 네 탓이 아니라는 것도 꼭 전해줄 것이다. 그게 진실이니까.

 

우리와 무척 다른 문화 차이를 읽는 것도 재밌었다. 외국어 영화라서 자막으로 영화를 처음 보았다는 구절에서도 움찔했고, 데이트 상대가 생기자 콘돔 사용을 강조하는 아버지의 조언도 인상 깊었다. 우리나라에서 열다섯, 열여섯 학생과 아버지의 상황이라면.... 음....;;;;

 

“네가 이야기도 잘 들어주고 또 누군가에게 기댈 어깨가 돼준다는 건 훌륭한 일이야. 하지만 기댈 어깨가 필요한 게 아니라 어깨를 둘러줄 팔이 필요할 때는 어떻게 할 건데? 구석에 가만히 앉아 너의 인생보다 다른 사람의 인생을 앞세우고 그것을 사랑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돼. 그렇게 해선 안 된다구. 너도 어떤 행동을 해야 해.” -315쪽

 

“난 누군가의 짝사랑 상대가 되고 싶지 않았을 뿐이야. 만약 누군가가 나를 좋아한다면 그가 생각하는 내 모습이 아닌 진정한 내 모습을 사랑해주길 원해. 또 그가 마음 속으로만 사랑하기를 바라지 않아. 그걸 내게 보여주고 그래서 내가 그 사랑을 느낄 수 있게 되기를 원하거든. 그가 나와 함께 하고 싶어하는 일이 어떤 것이든 모두 다 할 수 있기를 원해. 그리고 만약 내가 싫어하는 일을 하게 되면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할 거야.” -317쪽

 

수동적인 모습을 보여온 찰리에게 샘이 지적해 준 부분은 나에게도 무척 뜨끔한 부분이었다. 소개된 책 '마천루'를 언급하면서 나온 “난 너를 위해 죽을 수  있지만 너를 위해 살지 않을 거야.”도 같은 맥락에서 마음에 남는다. 주체적으로 사는 인생, 내가 결정하고 내가 행동하고, 내가 책임지는 내 인생을 그려본다. 이미 오래 전부터 했어야 할 일들이다.

 

이 책은 친구에게 선물 받았다. 126쪽을 읽다가 내 생각이 났다며... 126쪽이 궁금했지만 먼저 들춰보지 않았다. 그러면 안 되는 거였으니까. 천천히 읽으면서 궁금했던 부분을 만났다.

 

조지 베일리는 마을에서 아주 중요한 사람이었어. 그 덕분에 마을의 모든 사람들이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 그가 마을을 구했어.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자 마을을 구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그밖에 없었던 거야. 모험에 가득 찬 삶을 살고 싶었지만 마을의 발전을 위해 꿈을 포기하고 남았던 거야. 하지만 그 결과가 비참하게 나타났을 때, 그는 자살하기로 결심했어. 그런데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와 만약 그가 이 땅에 태어나지 않았다면 사람들이 어떻게 살게 되었을 지를 보여줬어. 그 마을 전체가 겪었을 고통스러운 삶을 보여준 거야. 또 그의 아내가 어떻게 ‘나이 많은 하녀’로 살아가는지도 보여줬어. -126쪽

 

언젠가 내가 했던 말이 떠올라서 내 생각이 났다는 것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지난 사흘은 개인적인 이유로 좀 힘든 시간을 보내었는데, 그 시간들을 보상해 준 느낌, 상처난 마음을 어루만져 준 기분이었다. 찰리에게 샘과 패트릭이 그런 존재가 되어준 것처럼 내게도 멋진 친구가 있었다. 새삼스럽게 고맙고 또 고맙다.

 

이 책에서 만날 수 있는 다양한 문화 코드도 반갑다.

 

:

앵무새 죽이기 - 하퍼 리
천국의 이쪽 - F.스콧 피츠제럴드
피터 팬 - 제임스 매튜 베리
위대한 개츠비 - F.스콧 피츠제럴드
단독강화 - 존 놀스
호밀밭의 파수꾼 - J.D.샐린저
길 위에서 - 잭 케루악
네이키드 런치 - 윌리엄 S. 버로우즈
월든 - 헨리 데이비드 소로
햄릿 - 윌리엄 셰익스피어
이방인 - 알베르 카뮈
마천루 - 아인 랜드
카스트로 스트리트의 시장 - 랜디 쉴츠

영화 :

록키 호러 픽쳐 쇼 - 짐 샤만
졸업 - 마이크 니콜스
해럴드와 모드 - 할 애쉬비
개 같은 내 인생 - 라세 할스트롬
죽은 시인의 사회 - 피터 위어
믿을 수 없는 진실 - 할 하틀리
아름다운 인생 - 프랭크 캐프라
레즈 - 워렌 비티
더 프로듀서 - 멜 브룩스
매쉬 - 로버트 알트만

음악 :
Asleep - 더 스미스
Vapour Trail - 라이드
Scarborough Fair - 사이먼 앤 가펑클
A Whiter Shade of Pale - 프로콜 할럼
Dear Prudence - 비틀즈
Gypsy - 수잔 베가
Nights in White Stain - 무디 블루스
Daydream - 스매싱 펌킨스
Dusk - 제네시스
MLK - U2
Blackbird - 비틀즈
Landslide - 플리트우드 맥
Smells Like Teen Sprits - 너바나
Another Brick in the Wall Pt.II - 핑크 플로이드
Something - 비틀즈

 

다음 주면 개봉하는 이 책을 원작으로 한 영화에는 엠마 왓슨, 로건 레먼, 에즈라 밀러가 주연으로 등장한다. 배우의 이미지로도 이미 싱크로율이 200%다. 영상으로 만나는 이 작품에서는 저 위의 저 노래들이 배경음악으로 적절히 등장할 테지. 음악과 영상과 연기가 모두 기대된다. 책을 통해서 만난 감동과 전율을 다시 한번 스크린 위에서 조우하고 싶다. 오랜만에 만난 먹먹한 성장소설이다. 아름답고 아프다.

 

덧글) 수정되었으면 하는 부분이다.

267

18번 홀으로 이어지는 >>> 홀로

283

점심을 먹을 동안 줄곧 재즈를 들었지. >>> 먹는

308

잠도 자지 않았고 패트릭과 샘이 부모님과 함께 특별한 저녁 식사를 하기로 했기 때문에 지난밤에 그들을 만나지 못해서 오늘은 전혀 달랐어. >>> 뭔 소린지...


댓글(4) 먼댓글(1) 좋아요(2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2013년 4월에 본 영화들
    from 그대가, 그대를 2013-06-02 21:09 
    접힌 부분 펼치기 ▼ 25. 콰르텟 음악 영화는 늘 절반 이상 먹고 들어간다는 생각을 갖고 있어서 보게 된 영화다. 이날 직장에서 엄청 스트레스를 받고 나름 영화로 치유의 시간을 보내자며 선택했는데, 애석하게도 많이 졸았다. 영화가 졸려서가 아니라 많이 울고 난 뒤라서 피곤해서 꾸벅 졸고 말았다. 앞부분은 거의 졸고 뒷부분만 보았는데, 그 부분만 보고서도 영화는 충분히 좋았다. 과거 사랑의 상처를 가슴에 묻고 살아가는 테너 레지, 분위기 메이커 호
 
 
다락방 2013-04-01 1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위에 308페이지요 두세번 반복해서 읽다보면 뭔말인지 어렴풋이 감이 잡히긴 해요. ㅎㅎㅎㅎㅎ 아, 웃었네요.

리뷰 좋아요, 마노아님. 아침에 지하철에서 스맛폰으로 읽는데, 이 책을 다시 한번 천천히 읽는 그런 기분이었어요. 저도 315쪽과 317쪽의 샘이 무척 좋았어요. 그런 샘 때문에 어쩌면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기억들이 수면 위로 떠오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마노아 2013-04-01 12:12   좋아요 0 | URL
찰리 입장에서 곱씹으며 읽으면 말이 되긴 하는데 자연스럽지가 않잖아요. 저 문장은 아주 불친절해요. ㅎㅎㅎㅎ

아, 되게 잘 쓰고 싶었는데 욕심만 내고 잘 안 됐어요. 원래 북다트로 표시해둔 곳은 굉장히 많았는데 그걸 다 집어넣기가 힘들더라구요. 할 말이 많은데 입에서 정리되어 잘 안 나오는 느낌이지 뭐예요. 샘은 축복이에요. 아, 정말 좋은 친구. 이름도 멋져요. 남자 이름으로 생각했는데 여자 아이라서 그것도 반가운 것 있죠.^^

2013-04-04 18: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4-04 21: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별을 스치는 바람 2
이정명 지음 / 은행나무 / 2012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간밤에 이 책을 다 읽고 고민을 했다. 이어서 이 감동을 얼른 적어놓고 싶었는데 옆에서 잠들어 있는 언니가 걸렸다. 키보드 치는 탁탁 소리에 깰 것 같아서 말이다. 책을 다 읽었으니 오늘 출근길에 읽을 새책을 꺼내야 하는데, 새책을 시작해 버리면 이 뭉클한 감동을 한쪽에 밀어넣어야 할 것 같아서 그것마저도 주저했다. 이번 달에는 드물게 소설을 많이 읽었는데 가장 나를 따뜻하게 위로해준 작품이었다. 소설은, 참으로 아름답고도 기특한 친구로구나!

 

1권에서 스기야마의 죽음을 추적하는 와타나베 유이치의 활약이 그려졌다. 그 과정에서 스기야마가 어떤 인물인지에 대한 서로 다른 견해들이 충돌했다. 인간백정이라고 증오의 눈빛을 보이던 죄수들이 있었고, 섬세한 사람이었다고 말한 피아노를 치는 간호사가 있었고, 그가 사실은 '시인'이었다고 고백한 윤동주가 있었다. 세 가지 모습을 모두 갖춘 스기야마였지만, 여전히 그의 죽음은 안개에 싸여 있었다. 유이치가 처음 찾아낸 용의자 최치수에게서 자신이 스기야마를 죽였다는 자백도 받아냈지만, 그의 죽음에는 보다 깊은 사정과 사연이 있을 것만 같았다. 그 깊은 속사정은 2권의 전반에 걸쳐 조금씩 조금씩 흘러 나온다.

 

1권에서 스기야마는 피아노를 조율하면서 미도리 간호사와 인연을 갖게 되었다. 스기야마는 그녀가 추진하려는 합창대회를 적극적으로 밀어주었다. 감옥이라는 공간에서 참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합창 대회. 죄수들은 노역의 부담에서 해방되기 위해서 열심히 참가했다. 초반에는 소리가 아닌 소음의 결합체였으나, 점차 그 소음들은 소리가 되었고 마침내 음악이 되었다. 자신들이 이만큼 해낼 수 있을 거라 감히 생각지 못한 죄수들도 놀랐고, 그 노래를 듣고 있는 또 다른 죄수들도 감화되었다. 그 한줌의 노래를 듣게 하기 위해서 유이치가 보여준 온정이 먹먹했다. 영화 '쉰들러 리스트'에서 수송 중인 유태인들의 갈증을 해결해 주기 위해서 마치 놀이인 것처럼 가장해서 물을 뿌렸던 쉰들러처럼 말이다.

 

주인공이 시인인 만큼 '문학'을 매개로 한 유이치와 윤동주의 교감도 아름다웠다. 문맹이었던 스기야마가 시인으로 거듭나는 과정만큼이나 절절한 부분이 있었다. 군대에 오기 전까지 유이치는 집에서 하는 헌책방에서 일했다. 쌓여 있는 책더미 속에서 유이치는 자유로웠고 평온했다. 먼지 가득한 허름한 책방이었지만 그곳에는 그가 사랑했던 시인과 작가들과 화가들이 있었다. 전쟁터만큼은 아니었어도 참혹한 것에는 큰 차이가 없는 이곳 형무소에서 유이치는 모처럼 영혼의 안식을 느꼈을 것이다.

 

“고흐 화집이 들어오면 연락해 주게.”

나는 그 일을 어머니에게 말씀드리지 않았다. 어두운 서가 틈에서 몰래 고흐의 화집을 펼칠 때마다 가책이 책갈피를 뛰쳐나왔다. 입영 영장을 받은 날 나는 모서리가 닳은 그의 명함을 주머니에서 꺼냈다. 그리고 희미하게 닳은 주소를 찾아가 그에게 내 영혼의 일부를 건네주었다. 그날 밤 나는 밀거래 식료품들로 차린 밥상을 앞에 두고 울었다. 잃어버린 내 영혼의 조각이 슬퍼서였다. 기름진 밥을 넘기지 못하고 자꾸만 내 그릇에 덜어 주시던 어머니.

“고흐는 별의 화가였어. 별을 사랑했고 별을 즐겨 그렸지. 그는 동생 테오에게 보내는 편지에도 별에 대해 썼어. 들어 봐!” -149쪽

 

유이치가 아꼈던 책이 어느새 조선인 청년의 품속에 들어갔고, 그 책은 그가 감옥에 오면서 압수품이 되어버렸고, 다시 검열관이 된 유이치에게로 돌아왔다. 책은 그렇게 보이지 않는 것뿐 아니라, 보이는 형태로도 살아 숨쉬며 이들에게 찾아왔다. 고흐 화집에 대한 추억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눈물 뿌리며 보내었던 화집에 대한 기억을 윤동주가 불러왔다. 별을 사랑했던 시인이 마찬가지로 별을 사랑한 화가의 이야기를 전했다. 그의 영혼의 동반자였던 동생 테오에게 전한 편지글을 얘기해 주면서...

 

이들만 이렇게 아름다운 문학 시간을 나눈 것은 아니었다. 조선인 죄수들은 아주 잠깐씩만 주어졌던 휴식 시간에 삼삼오오 모여서 수다를 떨기 바빴다. 쉬어도 부족한 시간을 대체 무슨 얘기를 하느라고 에너지를 쏟았던 것일까. 숨겨진 이야기가 마침내 드러나자 전율이 일었다. 갇힌 몸, 갇힌 영혼을 하고서도 끊임없이 추구하게 된 인간 본연의 창조성을 보았달까. 하나의 감방이 한 권의 책이 되고, 한 사람 한 사람의 죄수가 하나의 이야기, 하나의 장면을 완성하는 아름다운 순간은 작가가 상상할 수 있는 최고의 선물로 보였다.

 

이 책의 주인공이 당연히 윤동주일 거라고 짐작했는데, 일본인 간수 두명도 그 중심에 합류해야 마땅할 것이다. 둘은 많이 달랐지만 같은 길을 걸었다. 하나는 문맹이었고, 하나는 문학도였지만 둘 모두 시를 사랑했고, 또 시인을 아꼈다. 그런 그들의 속내를 꺼내게 하고, 그들의 가난한 영혼이 쉼을 얻게 해준 이는 모두 윤동주였다. 순결한 시인, 끝나지 않을 노래를 부를 아름다운 조선인 청년 윤동주. 그는 야수에 불과했던 스기야마에게 그가 인간임을 알게 해주었고, 죄책감에 사로잡힌 유이치에게 "네 탓이 아니야!"라고 말해 주었으며, 살고 싶지 않은 이들에게 살아야 하는 당위성을 깨닫게 해주었다. 잊어버리는 것 또한 능력이라고, 그래야 좋지 않은 기억을 잊음으로써 온전히 존재할 수 있다고도 했다. 이런 사람을 곁에서 지켜보게 된다면, 누구라도 이렇게 감화되지 않을까 싶다. 그의 육신이 무너져내리는 것을 막아줄 수 없지만, 그의 노역을 좀 더 온기있는 곳에서 감당하도록 작업 장소를 바꿔주는 일, 몇 마디 시어를 벽에 적는 그 떨림을 다른 간수장들 눈에 띄지 않게 굳건히 서서 등으로 가려주는 일, 고작 그 정도의 일이라도 말이다. 이들은 국경을 뛰어넘고, 전쟁과 식민 지배라는 폭력을 뛰어넘어 인간으로서 서로 교감했다. 그리고 그 떨리는 순간을 독자도 함께 했다. 구원 같은 우정, 해방 같은 영혼의 안식이었다. 그러니 그런 그를 잃는 것을 분해한 유이치의 절망에 독자 역시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그를 잃어야 하는 것이 분했다. 그를 잃어야 할 사람은 나만이 아니라 우리들 모두였다. 나는 친구를 잃어야 하겠지만 조선인 죄수들은 현명한 동료를, 간수장은 용서를 빌 대상을, 간수들은 온화한 모범수를 잃을 것이다. 태어나지 않은 조선인들은 위대한 스승을 잃을 것이고, 태어나지 않은 일본인들은 부끄러운 과거를 증언할 지식인을 잃을 것이다. 우리 모두는 지금까지 가지지 못했고 앞으로도 영원히 가지지 못할 순결한 시인을 잃어야 할 것이다. -240쪽

 

생체실험의 후유증으로 점점 기억을 잃어가는 윤동주 대신, 검열관이자 간수인 일본인 유이치가 그의 시를 기억해 주었다. 그의 시를 지켜내기 위해 무한히 애를 썼다. 스기야마가 죽기 전까지 그랬던 것처럼. 그리하여 마침내 윤동주가 그 자신의 시를 떠올리지 못할 때에 유이치는 이 별을 사랑한 시인에게 별의 노래를 들려 주었다. 1권의 마지막에서 그랬던 것처럼 가장 절묘한 등장이었다.

 

별 헤는 밤 - 윤동주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 합니다
 
가슴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 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佩), 경(鏡), 옥(玉) 이런 이국(異國)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애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랜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스라히 멀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습니다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볕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게외다          -238쪽

 

작품에는 스기야마나 유이치 같은 인간애가 있는 간수만 등장하지는 않았다. 형무소의 소장과 병원의 원장 같은 탐욕에 찌든 인간의 탈을 쓴 악마들도 대조적으로 등장했다. 그들이 사악하고 나쁠수록 스기야마와 유이치가 빛났고, 윤동주와 그의 시가 더 순결하게 보였다. 이야기도 매력적이지만 그것을 운반해 내는 캐릭터들 역시 매우 역동적이었다.

 

문장들도 아름다웠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문장들은, 한번씩 밑으로 떨어지다가 다시 솟구쳐 올랐다. 그 파도를 같이 타고 있자니 마치 노래가락을 듣듯이 리듬감마저 느껴졌다.

 

어두컴컴한 무대 뒤에 나는 있었다. 견고한 목소리는 약간의 슬픔을 담고 있었다. 소리들은 일제히 나의 어깨를 밀치며 달려들었다. 그것은 단순히 귀로 들리는 소리가 아니었다. 향기로, 움직임으로, 떨림으로 눈과 귀와 코와 모든 감각기관을 향해 날아들었다. 그것이 꽃이라면 나는 그 향기에 숨이 막혔을 것이고, 술이었다면 엉망으로 취했을 것이고, 마약이었다면 파멸해도 좋았을 것이다. 음악은 아름답고도 슬펐다. 내가 그것을 향유할 자격이 있는지 망설여질 만큼. 모든 선의가 빛을 잃고 강렬한 사랑에도 냉담해질 만큼. 그 순간 나는 인간이라는 아름다움, 삶이라는 기쁨을 발견했다.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 나의 삶이 지속되고 있다는 사실에 나의 심장은 풀무처럼 헐떡거렸다. 나는 나를 달래야 했다. -200쪽

 

마침내 막이 오른 합창대회를 목격한 유이치의 고백이다. 얼마만큼 그 음악에 취했는지, 얼마만큼 감동을 했는지, 그 떨리는 숨결이 독자에게도 잘 전달되었다. 때마침 오늘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을 들을 기회가 있었는데 기막힌 우연에 독자는 또 감동 먹고 말았다.

 

 

나는 달아나듯 원장실을 뛰쳐나왔다. 그는 왜 내게 연구동의 가장 은밀한 비밀을 말했을까? 더 이상 이곳저곳 들쑤시고 다니지 않기를 바랐을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그의 생각대로 된 것이다. 엄청난 비밀에 압도당한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으니까. 비밀을 말하고 싶었지만 말할 사람이 없었다. 말한다 해도 믿어 줄 사람은 없을 것이다. 믿는다 해도 분노할 사람은 더더욱 없을 것이다. 설사 분노한다 해도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결국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인간에 지나지 않을까? -282쪽

 

왜 아무도 말하지 않고, 드러나길 원하지 않는 일에 대해 집필했습니까?

누군가는 그것들을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보고 들은 것들을 절대 망각 속에 사라지게 할 수 없습니다. 기록되지 않은 역사는 무, 심지어는 거짓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과거의 잘못을 다시 곱씹을 것이 아니라 미래를 향해 새 출발 하자고 말하는 이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잊지 않아야 돌이켜 볼 수 있고, 돌이켜 보아야 과오를 찾을 수 있고, 과오를 찾아야 잘못을 인정할 수 있고, 잘못을 인정해야 용서를 빌 수 있으며, 용서를 빌어야 용서받을 수 있고, 용서받아야 새롭게 출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287쪽

 

앞의 문장으로만 끝났다면 좌절과 분노와 패배감에서 멈추었을 것이다. 그러나 유이치는 뒤에서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어서 괴로웠던 사나이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찾아내었고, 마침내 해내었고, 그리고 후회하지 않았다. 이런 사람이 있다면... 그러니까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고, 새롭게 출발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역사는 반드시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우리 사는 세상에 희망이라는 이름의 꽃이 꿋꿋하게 피어날 테니까.

 

1권에서 소제목이 예쁘다고 했는데 2권도 못지 않게 좋다. 아쉬우니 역시 옮겨 본다.

 

2부
절망은 어떻게 노래가 되는가 · 9
위생검열 · 18
책벌레의 사생활 · 37
사라진 책들의 노래 · 48
진실은 발자국을 남기지 않는다 · 66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 · 71
끝없이 침전하는 프로메테우스 · 96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 115
우리들의 사랑은 한낱 벙어리였다 · 133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프랜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케… · 154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 · 179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 · 192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나 · 205
무서운 시간 · 227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 242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 246
미친 개들의 나날 · 259
또 한 줄의 참회록 · 283

에필로그┃후쿠오카 전범 수용소 전범 용의자 심문 기록 · 285
미 공군 B29 비행사 생체실험 관련 일본인 전범 처리에 관한 비밀문서 요지 · 292
윤동주 연표 · 294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꿈꾸는섬 2013-02-21 15: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 이런 소설이 있었군요. 찜해둬야겠어요.^^

마노아 2013-02-21 19:22   좋아요 0 | URL
소리내어 읽어주고 싶은 그런 책이에요. 꿈섬님도 재밌게 보실 거예요.^^
 
별을 스치는 바람 1
이정명 지음 / 은행나무 / 2012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우와, 일단 감탄부터 해보자. 이 작품, 대단하다. 아직 1권밖에 읽질 못해서 단언하긴 이르지만, 현재로서는 무척 좋다. 이정명 작가의 이전 소설들도 재밌었다. 뿌리깊은 나무, 바람의 화원, 악의 추억까지 모두 재미있었다. 그런데 뒷심이 늘 부족했다. 무척 반짝이는 창의력을 가졌고, 흥미롭게 전개되었지만, 마지막 마무리에서 매번 아쉬움이 남곤 했다. 재미와 감동의 경계에서 조금 주저한 느낌. 그래서 이 작품을 시작할 때도 그렇게 기대는 하지 않고 시작했다. 그런데, 지금 1권만 읽은 시점에서 기대치가 무척 높아져 있다. 지금, 감동 받았다는 얘기다.

 

1945년 8월 15일. 전쟁이 끝났다. 후쿠오카 형무소에는 전쟁 기간 동안 갇혀 있던 사람이 풀려났고, 그들을 감시했던 간수가 대신 갇혀 있다. 포로 학대로 기소된 하급 전범 와타나베가 이 책의 화자다. 그는 두 사람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한 사람은 시인, 한 사람은 그 시인을 감시했던 검열관이다. 그는 이곳 형무소에서 악마를 보았고, 동시에 희망도 보았다. 바로 저 두 사람을 통해서 말이다.

 

추리 소설을 자주 쓰곤 했던 그 실력을 십분 발휘해, 이 작품 역시 미스테리하게 시작했다. 작품 첫머리에서 벌써 시체가 하나 나왔던 것이다. 이 책의 화자는 고작 열일곱 살의 간수다. 우리 기준에 열일곱은 소년에 가깝지만, 전시에 열일곱은 군인의 나이다. 그는 근무하던 형무소를 옮긴지 한달 만에 살인 사건을 파헤치라는 임무를 맡았다. 그리고 그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두 사람을 만난다. 하나는 이미 죽은 검열관 스기야마이고, 하나는 그의 죽음에 몹시 관계가 있을 거라고 추정되는 조선인 시인 히라누마, 조선명 윤동주다.

 

와타나베가 추적한 스기야마는 인간 백정이었다. 조선인은 물론이요, 일본인 간수들조차 그의 죽음을 가여워하기는커녕 그럴 줄 알았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에게 따라붙는 소문들은 그가 얼마나 무시무시한 인간이었는지, 악마에 가까웠는지를 증명했다. 그런데 그의 삶을 추적해 따라가 보니, 또 다른 평가가 따라온다. 피아노를 조율했던 그를 향해 한 간호사는 스기야마 도잔이 섬세한 남자라고 했다. 그를 죽인 건 미친 시대였다고. 더 많은 피를 원하는 시대. 더 많은 증오와 더 많은 죽음을 원하는 이 시대 말이다. 그는 전쟁이라는 철창 속에서 군복이라는 독방에 갇혀 죽었다고 했다. 과연 그는 섬세한 사람이었던가? 작가는 스기야마의 과거로 돌아가 그의 영혼이 섬세한 음률 위에서 춤을 추었던 시절로 독자를 데리고 간다. 그가 상처받기 쉬운 가여운 영혼이었다는 것을, 그 섬세함으로 인해 더 힘들었다는 것을, 독자도 공감한다.

 

이제 와타나베는 또 다른 증언자를 찾는다. 윤동주. 창씨명 히라누마라는 이름을 가진 시인. 죽은 스기야마는 호주머니에 시가 적힌 종이를 보관하고 있었다. 그의 유품에도 윤동주의 시가 있었다. 바로 그 시를 지은 시인이 고백했다. 스기야마는 시인이었다고. 내가 아는 가장 훌륭한 시인이었다고...

 

'인간 백정' 소리를 듣던 잔인한 검열관이 섬세한 사람이었다고, 게다가 시인이었다는 이 불합리한 고백. 여기서 독자는 심장이 떨렸다. '시인'이라는 말을 아무에게나 못붙일 것 같다. 도대체 윤동주와 이 검열관 사이에 어떤 공감이 있었던 것일까. 그 죽음에 밝혀진 사연 말고도 또 다른 게 있었던 건 아닐까, 몹시 궁금해졌다.

 

스기야마는 '시'의 힘을 믿지 않았다. 아니 '언어' 따위 믿지 않았다. 문맹이었던 그는 모두가 회피하는 검열관의 직책을 수행하기 위해 딱 필요한 만큼만 글을 깨우쳤다. 형무소 안에서 조선어는 쓸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었다. 그는 일본어로 전달되는 편지와 책들을 검열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언어의 힘을, 시의 무서운 힘을 깨달았다.

 

스기야마는 주먹을 부르르 떨며 분명히 인식했다. 자신이 변했다는 것을. 다시는 변하기 전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그는 변해 버린 자신이 두려웠다. 어떤 책을 읽은 사람은 그 책을 읽기 전의 사람이 아니다. 문장은 한 인간을 송두리째 변화시키는 불치의 병이다. 단어와 구두점들은 몸 여기저기에 세균과 바이러스처럼 스멀스멀 기어 다닌다. 문장들은 뼈에 새겨지고 세포 속에 스며들고 자음과 모음은 혈관을 타고 흐른다. 수많은 상징과 비유는 뇌세포를 물들이고 영혼을 재구성한다. 그는 다시는 과거로 돌아갈 수 없으며 돌아가서도 안 된다. -220쪽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면 모를까, 이미 시의 세계에 푹 빠져버린 스기야마는 돌이갈 수가 없었다. 오히려 그는 이 병약한 시인을 지켜야 했다. 자신만의 방법으로.

 

이후 시인과 검열관 사이에서 오고 간 말들과 온정은 무척 뜨거웠다. 그의 애정이 몽둥이 찜질로 나타난다 할지라도, 그가 살리고자 했던 순수한 시와 그 시가 해낼 희망의 역할들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었다. 사이사이 소개되는 시들과, 이들에게 상징처럼 등장한 '연'의 역할이 가슴을 벅차게 했다.

 

모국어가 금지된 형무소의 갇힌 시간. 식민지 조국의 서러움을 온 몸에 품고 살았을 윤동주를 떠올려 본다. 창씨개명하지 않을 수 없었던 그의 선택과 그로 인해 치렀을 마음의 감옥도 상상해 본다. 그리고 끝내 조국의 해방을 보지 못한 비참한 죽음도 기억해 본다. 그 조국에 현재 어떤 역사의 왜곡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비참하게 되새겨 본다. 마음이 아프다.

 

시인과 시를 다루는 만큼 소제목도 예쁘다.

 

1부
방랑자로 왔으니 다시 방랑자로 떠나네 · 15
가슴에 맺혔다 주르륵 흘러내리는 것들 · 39
어느 운석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 · 52
심문 · 68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 79
소년은 어떻게 군인이 되는가 · 90
음모 · 102
죽음의 재구성 · 115
한 대의 피아노와 그 적들 · 136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 159
문장은 어떻게 영혼을 구원하는가 · 186
고통이여! 너는 사랑하는 여인보다 다정하다 · 206
바람이 어디로부터 불어와 어디로 불려 가는 것일까 · 224
가자 가자 쫓기우는 사람처럼 가자 · 244
별 헤는 밤 · 279

 

특히나 1부의 마무리를 '별 헤는 밤'으로 끝냈는데, 정말 이 시가 쓰여졌을 것 같은 언덕 위에서 꼭 같은 그리움을 품은 채 시를 읊게 하니, 이 시를 읽으며 가슴 떨려 했던 여고 시절로 어느새 돌아가고 말았다. 설레고, 먹먹하고, 그리웠다.

 

오랜만에 좋은 책을 만난 듯하다. 2권을 같이 사지 않은 게 내 실수다. 얼른 장만해서 마저 읽어야지.

 


댓글(3)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순오기 2013-02-17 1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영화화되면 괜찮을 거 같아요.
윤동주라는 이름만으로도 엄청난 관객이 몰려올 거 같지 않나요?
사실과 진실의 간극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소설이죠!
마노아님 선물로 잘 읽은 책~ 윤동주를 사랑하는 독서회원들이 돌려보고 있어요.^^

2013-02-17 11: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노아 2013-02-17 13:48   좋아요 0 | URL
책 정말 괜찮지요? 영화로 만들어지면 더 재밌을 것 같아요.
이제껏 읽은 이정명 작가님 책 중에서 만족도가 가장 높아요.
2권은 아직 읽고 있지만요.
사실 이 리뷰는 1권 읽은 1월 초에 써놓은 걸 이제사 올린 거라서 그뒤 바로 2권 샀어요.
중고 기다리다가 마음이 바빠서 새책으로요.^^ㅎㅎㅎ
그 사이 리뷰대회 참가하느라 못 읽었는데 이제 언능 2권 읽으려고요. 뒷 이야기 아주 궁금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