밍크코트 - Jesus Hospit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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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순은 우유배달을 하며 억척스럽게 살아가고 있는 여자입니다. 친정 식구들은 모두 독실한 기독교 신자들로 교회 건축 헌금에 동참하라고 재촉하지만, 가난한 현순은 제 이름은 빼라며 자신은 다른 개척 교회를 다니고 있노라고 이야기를 종료시킵니다. 늙은 어머니는 어서 빨리 하늘나라에 가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하시더니, 정말 두달 뒤 쓰러지셔서 벌써 6개월째 병원에서 산소 호흡기에 의지하고 있습니다.

 

병원비는 전혀 보태지 못하지만 어머니의 침상을 지키며 무거운 몸을 일으키는 현순에게 언니와 남동생이 존엄사를 제안합니다. 의사 역시 생존 확률이 1%도 되지 않는다며 이 또한 환자를 위한 하나의 방법일 수 있다고 얘기합니다. 현순은 불같이 화를 내며 가족들과 의사를 병실에서 쫓아내고 그 곁을 철저히 지킵니다. 현순은 기도 중에 분명히 어머니가 살아나신다는 메시지를 받았고, 그것을 철저히 믿고 있었습니다. 이런 현순을 가족들은 불편하게 바라봅니다. 병원비를 내고 있는 것은 자신들인데, 한 푼 보태지 않는 현순이 홀로 효녀인 척 행세한다고 여기기도 하지요. 또한 그녀가 보여주는 행태들이 혹여 이단 종교에 빠진 것은 아닐까 의심하고 있습니다. 현순은 이런 형제들에게 더 세게 나갑니다. 언니에게는 그렇게 돈돈돈 하다가 형부 불덩이 받을거라며 조심하라고 했고, 남동생에게는 네가 무슨 짓 하고 있는지 다 알고 있으니 원래대로 돌려놓으라고 큰소리를 칩니다. 언니와 남동생은 내색은 하지 않지만 뭔가 섬뜩한 느낌을 받고 맙니다. 현순이, 정말 무언가를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으니까요.

 

이제 오늘이 지나면 의사 선생님은 해외에 세미나 나가시고 한 달 뒤에나 돌아온다고 합니다. 병원비를 부담하고 있는 언니와 며느리는 애가 탑니다. 남편 눈치도 보이고 애들 과외비도 이만 저만 걱정이 아니거든요. 하여, 이들은 현순을 어머니 곁에서 떼어낼 방법을 모색합니다. 좀 더 지켜보기로 결정했다고 안심시킨 뒤, 현순의 딸 수진을 불러내어 엄마를 집에 몇 시간 붙들어 두게 하는 게 이들의 계획이었지요.

 

현순의 딸 수진은 현재 만삭입니다. 두어달 뒤면 아이가 세상에 나올 것입니다. 수진은 날카롭고 냉소적인 여자였습니다. 남편은 그런 수진 앞에서 쩔쩔 매었지요. 수진은 삼촌의 계획에 동참하는 것이 껄끄러웠지만, 엄마의 확신처럼 할머니가 살아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고, 자신이 어떤 결정을 내려야할지 혼란스럽습니다. 일단 엄마를 붙잡아두고 있던 수진은, 엄마의 옷장에서 할머니가 주신 밍크 코트가 사라졌다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밍크코트는 이모가 할머니에게 사준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할머니는 우유배달을 하며 가난하게 살고 있는 딸 현순에게 밍크코트를 내주었고, 현순은 미용실을 차리면서 급전이 필요했던 딸 수진을 위해서 코트를 팔았습니다. 자신이 언제 밍크 코트 팔아 그 돈 해달랐냐며 수진은 오열을 합니다. 결국엔 자기가 원인이 되었다는 것을 알지만, 치미는 화는 이성을 제어하지 못합니다. 엄마가 원망스럽고, 종국엔 자신이 원망스럽고 용서하기가 힘듭니다. 수진은 차에 시동을 걸었습니다. 이대로 할머니를 돌아가시게 할 수는 없었던 겁니다. 밤중에 급하게 병원으로 불려와 존엄사를 추진하려던 의사는 오전에는 현순에 의해, 그리고 지금 이 시간에는 그녀의 딸 수진에 의해 일을 방해받고 화딱지가 나서 돌아가 버립니다.

 

하룻동안에 벌어진 이 소동으로 가족들은 격렬한 싸움에 돌입합니다. 그동안 가슴 속에 쌓였던 원망과 분노가 한꺼번에 폭발합니다. 그리고 신실한 믿음의 소유자라고 자부하고 살았지만, 자신 안에 있는 위선과 탐욕과 추잡한 욕망과 마주하게 됩니다.

 

영화 속에서 '밍크코트'가 은유하는 바는 매우 날카롭습니다. 큰딸이 노모에게 선물한 효도의 상징이기도 했지만, 형편이 어려운 딸을 위해 할머니가 기꺼이 내준 사랑의 선물이기도 했고, 현순이 딸을 위해 안타깝게 팔아버린 애증의 물건이기도 합니다. 누구도 가질 수 있지만 사실은 아무나 가질 수 없는 밍크코트는 그렇게 한 가족 안에서 사랑의 상징이자 부의 상징, 또 욕망을 대변합니다. 큰 딸 명순과 며느리가 시종일관 입고 나온 이 밍크코트는 자식의 과외비를 걱정하며 어머니의 존엄사를 요구하고, 또 그를 위해 계략을 꾸미는 이 시대 비틀어진 어머니들의 세태를 여과 없이 보여줍니다. 또 그 밍크코트를 만들기 위해서 희생된 동물의 목숨값도 당연히 생각하게 되겠지요.

 

2011 부산국제영화제에서 2개 부분에서 수상하고, 2011 서울독립영화제 대상을 차지한 이 웰메이드 영화는 어려운 주제 속에서 다양한 이야기들을 솜씨 좋게 녹여놓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산다고 하면서 사실은 하나님의 뜻을 가장 거슬리며 사는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경종을 울리고, 신의 뜻을 제멋대로 해석한 채 원망만 앞세우는 인간의 나약한 모습도 고발합니다. 또한 가족은 어떻습니까? 가장 가까이에 있고, 가장 의지할 대상이지만 사실은 가장 시험에 들게 하고, 나를 핍박하는 애증의 대상입니다. 그렇다고 버릴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또 고약하게도, 그리고 다행히도, 가족은 바로 그 가족의 이름으로 가장 아름다운 선물을 주기도 합니다.

 

 

연극배우 출신의 황정민의 연기는 소름이 끼칠 정도로 현순 역에 몰입시켰습니다. 노메이크업으로 출연해서 영화의 맨 얼굴도 낱낱이 공개합니다. 종교와 신의 뜻, 그리고 용서라는 부분에서 영화 '밀양'을 떠올리지만, 그보다 더 완성된, 그리고 더 겸손한 결말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존엄사의 문제라고 한다면 '밀리언 달러 베이비'와 영화 '청원'도 함께 본다면 더 좋겠습니다.

 

이 영화에 대한 트위터 멘션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구절은 이것입니다. '인간이 신에게 온전히 나약함을 드러내는 순간.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기도뿐이다.'

 

밍크코트, 따뜻하지만 잔인한 이름이지요. 가족 또한 그렇습니다. 종교 역시 그렇습니다. 그 이름들을 '잔인함' 대신 '따뜻함'으로 취하게 하는 것은, 결국 인간의 몫으로 보입니다. 내가 인정하지 못했던 나의 속얼굴을 직면한 순간, 부끄러움이 온 얼굴을 덮고 내 가슴을 덮쳐 분노와 설움과 당혹스러움에 몸둘 바를 모를 때, 기꺼이 무릎 꿇고 내 자신을 내려놓을 필요가 있습니다. 신 앞에 겸손해지는 것이 나약한 것은 아닐 겁니다. 당신 안에 신이 없다면, 진심 앞에 두 손을 드시길 바랍니다. 그것이 당신의 마음에 자유를 줄 테니까요.

 

 

덧)영화의 촬영 장소가 우리 집 근처입니다. 심지어 등장하는 아파트 두 개 중에 하나는 울 언니가 살고 있는 아파트라지요. 하하하, 자막 올라갈 때 웃었습니다.

 

토요일 밤, 영화관 안에 홀로 앉아서 이 영화를 보았습니다. 결과적으로, 영화관의 그날 마지막 손님이기도 했습니다. 한 사람의 손님 때문에 필름을 돌리고 퇴근하지 못하고 문앞을 지킨 직원과, 문을 닫지 못해서 역시 마무리를 하지 못한 관리실 기사님까지 모두, 참 송구했습니다. 그래도 이런 좋은 영화를 찾아주는 관객이 있고, 상영해주는 영화관이 있다는 것이 참 고마운 일입니다. 웰메이드 독립영화, 포레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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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2-01-24 00: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많은 걸 생각하게 하는 영화군요.
그러잖아도 찜해두고 있는데 마노아님 리뷰로 어서 보고 싶어져요^^

마노아 2012-01-24 00:49   좋아요 1 | URL
아직 1월이지만 '올해의 영화'로 손색이 없는 영화였어요.
좋은 영화가 많아서 참 좋아요.^^

차트랑 2012-01-25 02: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목에 이끌려 방문하게되었습니다.
안녕하세요
영화 문외한이지만 상징성을 읽어내도록 장치한 영화인 듯 합니다.
독립영화는 영.화.만이 가지는 그 특성들을
잘 살리려 노력하는 흔적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소재, 캐릭터, 언어 그리고 영상과 음악,
그 모두를 아직은 잘 활용하고 살려내려 노력하는 그 흔적들 말입니다.

어쩌면 기존의 영화 관련자들이 초심을 되돌아 볼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수 도 있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좋은 페이퍼에 감사드립니다

마노아 2012-01-25 13:58   좋아요 1 | URL
안녕하세요, 차트랑공님.
영화 제목은 예고편을 보다가 따왔어요. 밍크코트도 그렇지만 영화 속에서 보여준 많은 상징들이 제목에 모두 포함된다고 생각되어서요.
실력있고 감 좋고 메시지까지 있는 좋은 독립영화가 많이 나오고 있어요.
그 영화들이 무사히 관객들에게 전달될 수 있기를 소망해요.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히어 앤 데어 - Here and There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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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음반을 낸 적도 있었던 섹소폰 연주자 로버트는 현재 살던 월세집에서도 쫓겨나는 실업자 신세입니다. 애지중지 간직한 섹소폰을 만져도 보지만 좀처럼 다시 연주가 되지 않는 그는 길거리에서 자신을 반갑게 마주한 친구조차도 불편하여 밀어내고 싶을 만큼 삶에 의욕이 없습니다.

 

 

집에서 쫓겨나던 날 이삿짐을 날라준 세르비아 출신의 청년 브랑코는 자신이 전화를 받아놓고는 극구 사장님이었다며, 본인은 직원인 척 행세를 합니다. 목소리로 같은 사람임을 알아본 것은 아무래도 로버트가 음악을 하는 사람인지라 더 예민했던 걸지도요. 아마도 옛 여친이었을 여자네 집에서 하룻밤을 기대보지만 여지 없이 불청객 신세였던 그는 그 집에서도 곧 쫓겨납니다. 시간당 10달러 짜리 이삿짐 알바도 해보았지만 팁 없이 2시간 일하고 받은 20달러에 그는 망연자실합니다. 일은 힘들고 돈은 되지 않고, 여간 신경질 나는 게 아니지요.

 

한편 브랑코는 로버트가 결혼을 하지 않은, 그래서 현재 솔로라는 것에 집중합니다. 돈이 필요한 로버트에게 그가 제안을 했던 것이지요. 세르비아에 있는 자신의 여자친구와 위장 결혼을 해서 미국으로 데리고 와준다면 돈을 주겠다고요. 당치도 않은 일이라고 여겼지만, 결국 로버트는 이 제안을 수락합니다. 세르비아에 도착해서 5천 달러를 꽂아주면 바로 결혼식을 올리고 돌아오는 것으로요.

 

세르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에 도착한 로버트. 브랑코의 여자 친구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대기 중인 택시에는 그녀의 오빠가 운전대를 잡았지요. 공항에는 변화의 땅 세르비아라고 당당히 적혀 있지만 운전수는 냉소만 던질 뿐입니다. 일자리도 없고 돈도 없는 땅이라는 것이지요. 이곳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은 로버트에게 집중합니다. 뉴욕에서 온 이 미국 시민은 식료품 가게 여자처럼 당장이라도 가방을 들고 함께 떠나고 싶은 사람이 되기도 하고 그저 주저리 주저리 이야기를 나누며 금세 친해지고픈 사람이 되기도 합니다. 그가 뉴욕에서 최빈민층 생활을 했고, 때문에 지금 위장 결혼을 하려고 계획 중이라는 것도 그들은 알지 못하니까요.

 

초반의 로버트는 의욕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모든 게 귀찮았고 희망을 찾을 수 없었으니까요. 브랑코의 어머니가 자신의 더러워진 옷을 세탁해 놓은 것에 대해서 먼저 의견을 묻지 않았다고 버럭 성을 내었고, 빨리 돈을 부치지 않는 브랑코에 대해서 신경질적인 반응만을 보였지요. 거리에서 팔짱을 끼우는 위장 결혼의 상대 팔을 툭 쳐버리는 그런 사내였던 겁니다. 그런 로버트가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합니다. 바로 브랑코의 엄마 올가 덕분에요.

 

그녀가 준비해 준 잠옷을 입고 편안하게 잠들었다가 깨어난 아침, 테라스에서 화분에 물을 주며 노래하는 그녀를 발견합니다. 멋쩍게 굿모닝!이라고 인사를 해보지요. 딱히 이곳 베오그라드에서 할 일이 없었던 로버트는 그녀와 시장도 같이 갑니다.

 

 

바가지를 쓴 것처럼 보이지만 아무튼 소년의 강매에 장미 꽃도 사서 올가에게 선물했고 무거운 장바구니는 대신 들어줍니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현실감각이 남아 있어서 브랑코의 여자 친구와 돈없이 결혼부터 할 수는 없다고 못을 박지요.

 

돈이 바로 오지 않은 것에는 사연이 있었습니다. 미국에서 여전히 이삿짐 나르기로 돈을 열심히 벌던 브랑코에게 사단이 났으니까요. 눈 감으면 코 베어가는 잔혹한 세상에서 치열하게 살아가는 브랑코에게 그 도시는 너무 거대하고 야멸찹니다. 시간당 19달러짜리 벽보 위에 자신의 15달러짜리 벽보를 붙이고, 로버트에게는 시간당 10달러를 주었던 그의 억척스러움은 이 도시에서 이용당하기 아주 쉬웠습니다. 척봐도 이주 노동자이고, 어딘가 약점이 있을 것만 같은 이 청년을 여기저기서 등을 처먹습니다. 그 절박함을 절대적으로 이용해 먹는 것이지요.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 살벌한 도시에서 살아가기 위해 청년은 사력을 다합니다. 여기서 밀려나면 세상 밖으로 밀려날 것만 같은 공포를 느끼면서 말이지요. 여자 친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미국에 가기 위해서라면 위장 결혼도 마다하지 않았고, 이곳 세르비아는 당장에 떠나고픈, 떠나야 마땅한 도시일 뿐이었습니다. 이 부분에서는 자본주의의 허상과, 미국이라는 나라의 실상이 대한민국의 현실과 겹쳐집니다. 장밋빛 미래를 꿈꾸며 이 나라로 몰려드는 다른 나라의 노동자들도 마찬가지고요.

 

 

다시 영화로 돌아가보지요. 모두가 가고 싶어하는 뉴욕에서 베오그라드로 온 로버트는 달라집니다. 그는 느릿한 걸음으로 산책을 즐길 수 있게 되었고, 좀처럼 잡을 수 없었던 섹소폰을 들어 아픈 식물을 위해 연주를 합니다. 미소라고는 없던 그의 표정이 부드럽게 변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하고 대인 관계도 넓어집니다. 물론, 이런 변화의 중심에는 올가가 있었지요.

 

 

시장을 갈 때도, 레스토랑에서 외식을 할 때도, 그밖의 모든 외출복은 저 낡은 트렌치코트가 전부인 올가. 그녀의 낡은 아파트 만큼이나 그녀의 주머니 사정도 넉넉하지는 않을 겁니다. 하지만 그녀는 이 회색빛 도시에서 꽃을 가꾸고, 노래를 부르고, 정성을 담은 빨래에서는 향기가 나게 하는 그런 여자였지요.

 

영화는 속도감 없이 참으로 차분하게 진행됩니다. 심지어 대사도 많지가 않지요. 느릿하게 진행되지만 그 안에서 절박한 청년의 분노와 세상에 희망이라곤 없던 남자에게 찾아온 따뜻한 사랑이 충분히 설득력 있게 교차합니다. 하지만 쉰 두살에 어렵게 찾아온 사랑은 현실이라는 장벽 앞에서 큰 위기를 맞습니다. 로버트는 이 위기를 어찌 극복해 낼까요. 그에게 찾아올 것 같던 평온한 사랑을 그는 끝내 놓치고 말까요.

 

여기에는 'Vidimose(비디모세이)'라는 인사말로 대신해야 할 것 같습니다. 또 봐요!라는 뜻이라고 하는군요. 영화의 제목을 참 잘 지었습니다. Here And There! 당신과 나의, 우리 모두의 사랑이 모두 안녕한지 묻고 싶습니다. 그곳에서도, 이곳에서도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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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night 2012-01-09 14: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저도 어제 이 영화 봤어요. 마노아님의 훌륭한 리뷰를 읽으며 그랬었지. 하고 끄덕끄덕하고 있어요. ^^
비디모세이. 이루어질까요?

마노아 2012-01-09 16:29   좋아요 0 | URL
영화 좋지요? 비디모세이! 아주 적절한 인삿말이에요. 꼭 이루어졌음 좋겠어요. 우리들도요.^^
 
래빗 홀 - Rabbit Ho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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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카와 하위는 금슬도 좋았고 서로 살뜰히 사랑하는 아름다운 커플이었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는 네살 난 아들이 있었지요. 동네에서 가장 크다는 집에서 안락하게 살고 있었고, 안정적인 일을 하는 남편과 요리 잘 하는 부인으로 부족함이란 없어 보였습니다. 그런 그들 가정에 비극적인 일이 벌어졌습니다. 아들이 사고로 죽고 만 것입니다. 벌써 8개월 전의 일이지요. 아들을 잃고 난 지난 8개월의 시간은 두 부부에게 끔찍했습니다. 사고의 충격에서 헤어나기 위해서 무진 애를 썼지만 상처는 쉬이 회복되지 않았지요. 더구나 그렇게 어린 아들을 잃었는데 어찌 상처가 쉽게 아물겠습니까. 이웃의 부인은 저녁 식사에 초대하려고 하지만 베카는 좀처럼 응하지 않습니다. 함께 어울리며 웃고 얘기를 나누는 것 자체가 부담스럽습니다. 그런 마음의 여유가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남편은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 서로의 상처를 보듬는 모임에 나가자고 아내를 재촉합니다. 그곳에서 만난 개비와 그녀의 남편은 벌써 8년째 이 모임에 나오고 있다고 합니다. 덕분에 많이 좋아졌다고 얘기하지만, 바꿔말하면 8년이 지났어도 이런 모임이 필요할 만큼 힘들다는 얘기일 겁니다. 어느 부부는 하나님이 아이를 사랑하셔서 데려갔다고, 그 아이는 분명 천사가 되었을 거라고 스스로를 위로합니다. 그런 말들이 베카는 견딜 수가 없습니다. 신이라는 그 위대한 자가 왜 하필 내 아이를 데려갔는지, 천사가 필요하면 직접 만들면 될 것을! 베카는 그런 식의 자기 위안이 위선이라고 여깁니다. 누군가에게는 그런 식의 위안도 필요하다는 것을, 그게 도움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인정하기에는 베카의 상처가 아직 너무 깊습니다.

 

 

아내와 남편은 서로 다른 방법으로 아이의 상실을 극복하려고 애를 씁니다. 아내는 아이가 만든 그림 장식을 냉장고에서 떼어 창고에 갖다 놓고, 아이의 죽음에 도화선이 된 키우던 개를 친정 어머니 집에 맡겨버립니다. 아이의 옷을 모두 세탁해서 갓 임신한 여동생에게 들이밀기도 하지만, 아직 아들인지 딸인지도 모를 아이가 입기에는 너무 크지요. 게다가 죽은 아이의 옷이라고 생각하니 임신 중인 여동생은 달갑지가 않습니다. 결국 이 옷들은 모두 재활용 상자로 들어가 버립니다.

 

반면 남편 하위는 다른 방법으로 상처를 극복해내려고 애씁니다. 날마다 아들의 동영상을 핸드폰으로 재생시키며 눈물을 짓고, 장모님께 맡겼던 개를 되찾아와서 함께 뛰놀았던 아이의 향기를 느껴보려고 합니다. 아내는 차안에 있는 카시트를 치우라고 하지만 남편은 그렇게라도 아이의 자취와 함께 하고 싶습니다. 둘째 아이를 가져보자고 제안하는 남편을 아내는 못견뎌 합니다. 나아가 집도 팔아버리고 이사하자고 합니다.

 

두 사람은 계속 부딪혔고 힘들어 합니다. 서로 사랑하고, 어떻게든 이겨내려고 애는 쓰지만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결국 두 사람은 서로에게 밝히지 않은 채 다른 방법들을 시도합니다. 말할 수 없고, 말하기도 싫지만, 그럼에도 건너고 마는 그들만의 길이 있었습니다.

 

영화의 제목인 '래빗 홀'은 토끼 구멍입니다. 다른 세계로 통하는 문이라고 할까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떠올리면 될 겁니다. 영화 속에서 등장한 '평행이론'이란 책에 관심이 갑니다. 이 드넓은 우주 저 너머에는 나와 똑같은 모습을 한 누군가가, 나와는 다른 삶을 살며 존재하고 있을까요? 지금 이렇게 불행하고 힘이 드는 부부와 또 다른 삶을 가진 자신이 우주 저 너머 어딘가에는 있을까요. 

 

 

영화 속에는 자식을 잃은 많은 부부가 등장했습니다. 심지어 베카의 어머니도 아들을, 베카의 오빠를 잃은 적이 있습니다. 오빠는 서른살에 헤로인 과용으로 죽었으니 베카가 자신의 아들의 죽음과 비교당하면 노여워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엄마에게는 그런 아들 역시 소중한 자식이었습니다. 그러니 엄마의 상처가 자신보다는 작을 거라고 여겨서는 곤란하지요. 아직 그것을 인정하기에는 베카의 마음에 지나치게 여유가 없지만요.

 

자식을 잃은 부부는 헤어지는 잃이 많다고 합니다. 영화 속에서도 그런 사례가 나왔고, 책에서도 쉽게 마주칠 수 있습니다. '한나의 선물'이란 책에서도 그런 예를 보았지요. '누구 때문에'라는 원망은 그래서 치명적입니다. 당신이 문을 열어두었기 때문에, 당신이 전화를 받다가 아이를 놓쳐서, 하필 그때 개가 뛰쳐나가서, 하필 그때 차가 들어서서... 많은 경우의 수가 있었고 그 모든 것들이 중첩되어서 결국 비극적인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괴롭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진정 이 아이와의 연이 거기까지였음을 수긍하는 일은 얼마나 서러운가요. 되돌릴 수 없는 일에 누구 때문이었다는 원망은 감정만 피폐하게 할 뿐 서로의 회복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들은 힘없는 인간, 상처로 온 가슴이 무너져 내렸는데 그런 말들이 어디 머리에 들어올까요.

 

결국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상처가 조금은 작아지기를, 그리움이 조금은 옅어지기를, 원망이 조금은 사그라들기를 말입니다.

 

 

언젠가는 지인들을 불러다 바베큐 파티를 열 수도 있고, 내 아이 또래의 아이들을 안아주며 예쁘게 미소지어줄 수도 있을 테지요. 그들이 떠나고 나면 그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지었던 미소를 거두고, 다시 또 어둡고 쓸쓸한 얼굴로 되돌아갈지라도, 그래도 시간이 흐르면 그런 불가능한 것들이 가능해지는 때가 반드시 올 겁니다. 그렇게 믿고 일어나야하지요. 서로를 위해서, 그리고 당신 자신을 위해서 말입니다.

 

영화는 무척 잔잔하지만 또 은근히 섬세했습니다. 그 섬세하고 예민한 연기를 니콜 키드먼은 몹시 잘 해냅니다. 만약 한국 영화였다면 염정아가 어울리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동명의 연극을 영화로 옮겼는데, 연극에서는 웃음의 코드도 있었나 보지만 영화에서는 그런 과잉 없이 슬픔을 올곧이 정면으로 보여줍니다. 헤드윅으로 유명한 존 캐머런 밋첼은 극적인 연출 없이도 시간 순서의 적절한 배열을 통해서 영화의 기승전결을 잘 이끌어 냅니다.

 

주말 내내 뉴스를 뒤덮었던 대구 중학생의 자살 사건이 떠올랐습니다. 아이의 죽음이 기막혔고, 그 부모는 이제 어떻게 살 수 있을까 또 기가 막혔고, 가해 학생과 그 부모들은 진정으로 참회하고 있을지, 일말의 반성과 책임감을 느끼는지 분노가 일었습니다. 래빗 홀의 두 부부보다 더 가혹한 이별에 주변 사람들은 그들을 어떻게 위로하고 슬픔에 동참하고 있을지 갑갑합니다. 이런 갑갑한 한숨이 점점 많아지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에 또 가슴이 묵직해집니다.

 

영화 '트리 오브 라이프'에서도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부부가 나옵니다. 그들이 상처를 이겨내려고 애쓰는 모습은 보다 경건하고 종교적이었지요. 보다 인간적인 '래빗 홀'과 비교해서 보면 좋겠습니다.

 

아픔을 잊을 수 있는 또 다른 공간인 래빗 홀, 그것은 우주 저 끝에 있을지도 모르고, 당신 옆에 있는 당신의 가족이 되어줄 수도 있고, 그저 시간이 주는 치유의 힘이 될 수도 있습니다. 어느 것이든, 포기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시련은 가혹하지만 분명 지나갈 겁니다. 조금은 편안해질 수 있는 시간이 당신에게도 꼭 올 것입니다. 그 끈을 놓치지는 마세요. 당신에겐 분명 그럴 힘이 있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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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1-12-27 0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이런 영화는 꼭 봐야할 것 같아요. 니콜 키드먼이니까~~~~

마노아 2011-12-27 10:39   좋아요 0 | URL
니콜 키드만 공동 제작이기도 해요. 작품에 푹 빠져 보였어요. 무비꼴라쥬 영화는 늘 실망시키지 않아요.

다락방 2011-12-27 1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퓰리처상 수상 원작이군요. 저는 오히려 원작을 읽어보고 싶어졌어요. 찾아봐야겠어요.

마노아 2011-12-27 10:39   좋아요 0 | URL
저는 연극이 퓰리처상을 받았다고 생각했는데 원작 소설이 있겠군요. 찾아보니 외서로만 있네요. 어이쿠...

다락방 2011-12-27 12:38   좋아요 0 | URL
저도 외서로만 있어서 절망한채 돌아섰어요. -_-

마노아 2011-12-27 13:17   좋아요 0 | URL
이 쓸쓸한 그림자...크흑...-_-;;;;;

무스탕 2011-12-27 14: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만으로도 영화를 본 느낌이에요.
근데 직접 보면 영화의 무게에 눌려 차분히 못 볼것 같아요.
영화를 아직 안 봤어도 마노아님의 리뷰가 훨씬 좋아요.

마노아 2011-12-27 22:06   좋아요 0 | URL
생각만큼 버겁게 무겁지는 않아요. 배우들의 연기가 그런 면에선 어느 정도 절제가 있었던 것 같아요.
최근에 액션영화들 아주 재밌게 보았는데 이렇게 잔잔한 영화도 참 좋아요.^^

2011-12-27 19: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2-27 22: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특수본 - SIU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이야기의 전개 구조도, 등장인물들의 반응도, 심지어 반전과 부상 정도까지도 모두 예측 가능하다. 지나치게 식상해서 무어라 보탤 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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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jy 2011-12-05 1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런, 모두 예측 가능하다니-_-; 뭐, 액션영화가 다 그렇긴하지만요~ㅋ 엄포스냐 톰아저씨냐 고민되네요^^;

마노아 2011-12-06 00:39   좋아요 0 | URL
뭐랄까, 캐스팅이 너무 전형적이에요. 배우 색깔에서 내용이 짐작이 되더라구요. 다들 해봤던 역할들을 또 하는 것이어서 신선하지가 않았어요. 주원은 아직 연기가 설익었구요.^^;;;

2011-12-06 04: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2-07 00: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2-07 16: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2-07 19: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2-08 00: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2-08 00: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2-08 01: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hnine 2011-12-08 14: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야~ (`와~`도 아니고) 대문 사진 너무 멋지잖아요! 앞머리가 벌써 저만큼 자랐어요?

마노아 2011-12-09 00:57   좋아요 0 | URL
헤헷, 제가 앞머리에만 물을 줬나봐요. 쑥쑥 자라서 눈을 막 찌르지 않겠어요? 삔으로 과감히 정리했어요. 제가 만든 머리핀으로 말이지요.ㅎㅎㅎ
 
청원 - Guzaarish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최고의 마술사에게 주어지는 호칭 '멀린'이라 불리던 사내가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이튼. 불의의 사고로 최고의 마술사 자리에서 사지마비 환자로 떨어진지 어느덧 14년이 흘렀습니다. 그의 곁에는 지난 12년 동안 단 하루의 휴가도 없이 헌신적으로 곁을 지켜준 간호사 소피아가 있습니다. 그녀는 이튼을 씻겨주고 약을 먹여주고, 식사를 챙겨주고, 욕창이 덧나지 않게 몸을 돌려줍니다. 뿐입니까. 그가 진행하고 있는 라디오 DJ 방송의 음향기사 역할도 해주지요. 소피아 없는 이튼은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각별했던 그녀는 기사를 통해서 충격적인 소식을 듣습니다. 이튼이 자신의 안락사를 허용해달라고 법원에 청원서를 제출한 것입니다.  

안락사가 법으로 금지되어 있는 인도의 법원에 청원서를 제출한 것은 이튼의 친구인 변호사 데비아니입니다. 수많은 여론들이 일제히 들고 일어나 이튼을 비난하기 시작합니다. 그가 이제껏 제시해 주었던 희망은 모두 거짓이었냐는 거지요. 또 다른 사지마비 환자들이 그에게 전화를 걸어 힘을 내라고 격려를 합니다. 종교 단체에서는 안락사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또 반기를 들었지요. 누구 하나 그에게 지지를 보내주지 않습니다. 소피아 역시 데비아니에게 화를 내지요. 하지만 데비아니는 누구보다도 이튼이 원하는 것을 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참 우정이라고 믿고 있지요.  

누구라도 당신의 가족이, 혹은 친구가 육신의 장애가 힘이 겨워 자신을 죽여달라고 청원한다면 일단 그 사람을 말리고 볼 겁니다. 그가 이 세상에서 아직도 빛나는 존재임을 강조할 것이고, 그가 받고 있는 사랑의 크기를 앞다투어 보여주려 들 겁니다. 무엇보다도, 그가 떠남으로 인해 주위 사람이 받게 될 상처를 말하겠지요. 하지만, 살아있음으로 해서 그가 받고 있는 거대한 고통의 크기에 대해서 우리는 대개 무감각합니다. 이해하고 공감하고 안타깝게 여길 수는 있어도 그 고통을 실제로 감당해내며 사는 것은 우리의 몫이 아니니까요.   

영화는 계속해서 관객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당신이 붙잡고 있는 그 끈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를 말이지요. 진정 가엾은 그 사람을 위한 것인지, 혹은 상처받기 싫고 괴롭기 싫은 나를 위한 것인지 말입니다. 한동안 '행복전도사'라 불리던 여성의 자살로 시끄러웠던 때가 있습니다. 그가 늘 '행복'을 전도하며 사람들에게 희망을 심어주었지만, 정작 자신의 고통 속에 함몰되어 스스로 목숨을 버렸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가 위선을 떨었다 하며 입방아를 찧었습니다. 과연, 그런 걸까요. 그가 제시한 희망이 그 자신을 구원해주지 못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주려고 했던 희망의 메시지가 거짓이었을까요. 오죽하면 스스로 생을 버렸을까 되짚어 이해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요.  

위안부 할머니들에 관한 책을 읽다가 그런 내용을 보았습니다.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것조차도 사실은 그분들 입장에선 '저항'이라고 말이지요. 이튼은 지금 존엄한 죽음을 원하고 있습니다. 스스로는 손가락 하나도 움직일 수 없고, 천장이 새서 빗방울이 밤새도록 얼굴 위로 쏟아져도 몸을 틀 수조차 없는 그입니다. 그가 살아내고 있는 세상은 이토록 거대하고 이토록 역동적이고 이토록 아름답건만, 그 안에서 그는 반경 1cm도 움직일 수 없습니다. 소피아와 같은 도움의 손길이 없다면 말입니다.

 

항소심 때문에 법원에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들른 바닷가에서 자유를 만끽하는 이튼의 얼굴입니다. 14년 만의 외출이었습니다. 법원은 그에게 자신을 설명할 단 2분의 기회도 주지 않았지만, 이제 주변 사람들과 그의 재판을 지켜보는 수많은 사람들은 그가 원하는 죽음의 의미에 동조하기 시작합니다. 그가 인간답게 살고 싶은 것처럼 인간답게 죽고 싶어하는 그 마음을 존중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과연 그 사회가, '법'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죽음을 인정하고, 거기에 대한 책임을 지고 싶어할까요? 인도 아니라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안락사와 마찬가지로 낙태에 관해서도 더불어 생각하게 합니다. 생명의 존엄함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지만, 그 드높인 목소리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지는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영화 속에서는 각기 다른 사람들의 사랑하는 모습들이 보입니다. 이튼의 어머니와 간호사 소피아, 변호사 친구 데비아니와 의사 친구 나야크, 또 이튼의 집에서 일을 해주는 고용인과 그의 제자 오마르가 그랬습니다. 이튼의 청원은 그들의 가치관과 결심, 그리고 사랑을 바꿔줍니다. 진정 누구를 위한 사랑인지를 돌이켜보게 했으니까요. 그의 첫번째 마술이 엄마를 웃게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의 마지막 마술은 사람들을 웃게 합니다. 그는 진정 '멀린'이었던 겁니다. 

영화는 또 '용서'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합니다. 자신을 배신하지 않는 용서,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지 않는 용서가 우리에겐 필요합니다. 세상엔 용서받지 못할 죄라는 것도 분명 있으니까요.

영화는 빼어난 영상미와 음악성을 자랑합니다. 사지가 마비된 이튼의 현실과 그가 마술사로 화려한 명성을 쌓을 때의 대조적인 모습이 환상적인 영상 속에서 재현되었습니다. 특히 이튼이 유연하게 춤을 추는 모습은 우아한 발레리노의 춤사위를 보는 듯했는데, 이렇게 이기적인 몸매를 지닌 배우가 사지를 못 쓰는 역을 맡으니 거기서 오는 부조화가 나름의 옥의 티라면 티일까요. 김명민처럼 멀쩡한 몸을 그렇게 말려놓는 것도 바람직하다고 여기진 않지만 말이지요.  

 

매력적인 간호사 소피아는 내내 긴 치마를 입고 있었지만 관능적인 라인을 자랑했고, 진한 화장과 화려한 악세사리 등은 이튼뿐 아니라 관객에게조차도 생기를 줄 것 같았습니다. 클럽에서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는 장면은 또 얼마나 신이 나던지요. 볼수록 매력적인 인물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마지막에 그녀가 내린 결정과 헌신은 가슴을 오래오래 울렸습니다. 옆자리에 나란히 앉은 여고생 세 명이 영화 중반부터 끝까지 한 시간이 넘도록 훌쩍이는데, 휴지가 있었다면 내주었을 겁니다. 본인들은 또 얼마나 갑갑했을까요. 

올드 팝과 인도 고유의 음악이 잘 어우러진 것도 큰 재미였습니다. 놀랍게도 영화를 만든 감독이 음악 감독도 같이 했다고 하네요. 재주가 많은 사람입니다. 감독의 전작 '블랙'도 꼭 챙겨보고 싶습니다.  

드라마로서도 훌륭한 영화이지만, 존엄사에 대해서 스스로를 돌아볼 기회를 가질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생명'과 '인권'이라는 고결한 이름을 앞세워서 혹시 간절한 외침을 외면하는 것은 아닌지, 단지 내 손에 찝찝한 무엇을 묻히지 않으려는 것은 아닌지 묻고 또 물어야 했습니다.  

영화의 원제는 Guzaarish, 소원이라고 합니다. 그의 간절한 소원에 귀를 한 번 귀울여 보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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