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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 오스카 와일드 ㅣ 펭귄클래식 7
오스카 와일드 지음, 김진석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8년 10월
평점 :
행복한 왕자와 거인의 정원으로만 만났던 오스카 와일드. 내가 읽은 그의 가장 긴 이야기가 되겠다.
책장에 꽂힌 지는 오래였는데 표지가 비호감이라 오래오래 먼지만 덮였던 이 책을 뮤지컬을 보기 위해서 먼저 꺼내들었다.
성남 아트센터에서 '도리안 그레이'를 공연했는데, 인간적으로 너무 멀었다. 주말표는 매진이었고, 평일에 다녀오면 새벽 귀가를 감수해야 하는 그곳을 '김준수' 이름 하나였다면 가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박은태'가 있었으니까 가야 마땅했다.
세상에 없을 것 같은 아름다움을 지닌 청년 도리언 그레이. 그는 유미주의자 헨리 경으로 인해 자신의 아름다움에 눈을 떴다. 이제껏 특별히 인식하지 못했던 그 아름다움이 청년을 애달프게 했다. 이 아름다움이 사라져가는 걸 지켜볼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강렬한 바람 때문이었을까. 청년의 시간이 멈춰버렸다. 아름다웠던 젊음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채 늙지 않았다. 대신 그를 그린 초상화가 시간을 먹었다. 도리언이 죄를 지을수록, 추악한 마음을 먹을수록 초상화가 흉칙하게 변해갔다. 누구에게도 보여줄 수 없는 초상화로...
흥미로운 소재였다. 어느 정도 결말이 예상되기도 했지만 그걸 지켜보는 재미가 못지 않았다. 아름다움은 인류고 오랫동안 집착해왔던 소재가 아닌가. 늘어나는 주름과 흰머리가 애석하지 않기란 쉽지 않다. 돈을 좀 쓰면 시간을 되돌리거나 지연시킬 수 있는 방법도 계속 늘고 있다. 이건 얼마나 어마어마한 유혹인가. 그래서 얼굴에 손대지 않는 배우들이 더 멋져보이긴 하다.
다시 잠시 뮤지컬 이야기를 해보자면, '아름다운' 청년 역할에 김준수는 탁월한 캐스팅이었다. 티켓파워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다른 배우를 쉽게 연상시키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런 자리에 비쥬얼 아이돌은 제격이다. 이미 이런 찬사에는 충분히 익숙해져 있을 테니 어색하거나 뻘쭘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18세 소년과 청년의 경계를 연기하기엔 다소 연기력이 부족했다는 건 인정해야 할 것이다. 부러 내는 어린 목소리가 많이 불편했다. 1막은 박은태의 열연이 아니었으면 망칠 뻔...
그러나 역시 아이돌은 아이돌이었던 게, 격렬한 '춤'을 선보이자 배우의 매력이 몇 곱절이나 뛰었다. 흔히 성공한 소설이나 만화 등을 영화로 다시 옮길 때 단지 베끼기만 하면 실패할 확률이 높았었다. 매체가 달라질 때는 또 다른 '창조'가 따라와야 하는 법. 이번 뮤지컬은 그걸 잘 해냈다. 무려 체코까지 가서 촬영해온 영상과 현지 싱크를 100%로 맞추어서 갑절의 효과를 주었고, 적절한 배역의 변신도 시도했다. 돌아오는 길의 삽질을 포함해서 새벽 2시에 귀가하는 피곤함을 감수할 만한 작품이었다고 얘기할 수 있다.
다시 책으로 가보자.
내가 늦으면 그이가 노발대발할 게 분명한데, 이 모자를 쓰고서 난리를 피울 수는 없죠. 모자가 너무 약하거든요. 모진 말만 들어도 망가질 거예요. -102쪽
땀흘려 수고해서 일할 필요 없는 사람의 말장난이지만, 나름은 사랑스러웠다. 그리고 매너로 철저하게 무장한 헨리 경의 입발린 소리는 또 얼마나 달콤한가.
"공작부인과의 약속이라면 누구와의 약속도 뿌리치겠습니다."
여자를 추켜세울 줄은 알지만 마음으로부터 존중은 하지 않는 이 남자의 다른 반응들도 지켜보자.
"결혼이란 걸 아예 하지 말게, 도리언. 남자가 결혼하는 이유는 피곤하기 때문이지. 여자가 결혼하는 건 호기심 때문이라네. 피차 실망할 뿐이지." -109쪽
"여보게, 친구, 여성 중에는 천재가 없네. 여성은 장식적인 존재라네. 그들은 결코 중요하게 할 말이 없으면서 그래도 매력적으로 말을 하지. 여성은 물질이 정신을 이긴다는 걸 보여주는 존재라네. 도덕보다 정신이 우위에 있다는 걸 남성이 보여 주듯이." -109쪽
오늘날 이렇게 소설을 쓰면 돌 맞겠지만, 아직도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을 테지. 이런 사람들도 똑같이 소중한 한표를 행사할 테지만...
"일생에 단 한 번만 사랑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진정 천박한 사람들이라네. 그들이 헌신이라든지 정절이라고 부르는 것을, 난 무기력한 습관이나 상상력의 부족이라 부른다네. 감정적인 삶에서 충실함이란 지적인 삶에서의 일관성과 같다네. 그건 단지 실패를 자백하는 거소가 마찬가지일세." -112쪽
매력은 있지만 많이 오만하고 게다가 편협한 사고를 가진 19세기의 남자를 21세기 뮤지컬에선 잘 포장해서 바꿔주어서 다행이다. 그렇지만 그의 말들에 귀 기울이게 될 때도 분명히 있다.
"사람이 사랑에 빠지면 처음에는 늘 자신을 속이는 것에서 출발하지. 그리고 맨 마지막엔 다른 사람을 속이게 된다네. 그게 바로 세상에서 낭만이라 일컫는 것일세." -116쪽
누군과와 사랑에 빠질 때, 누군가의 매력에 풍덩 빠질 때는 장점만 보였다. 만나서 즐겁고 광대가 터질 것처럼 신나게 웃고 두고두고 생각이 났다. 관계가 좀 더 진전되면 다른 면들이 보인다. 잘 안 맞는 부분도 생기고 싫어지는 부분도 당연히 생긴다. 관계에 위기가 발생한다. 애석하게도 여기서 관계가 끝날 수도 있지만, 그 갈등을 시간의 도움을 받아서 인정(해결은 힘들 것이다)하고 나면 다시 평안함이 찾아올 것이다. 나는 이 관계가 나를 속이고 당신을 속이는 관계가 되지 않길 바란다. 그러기엔 추억이 많다.
늙지 않고 유지되는 아름다움이 큰 기쁨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자기 대신 추악하게 변해가는 초상화는 큰 스트레스가 되었을 것이다. 초상화를 골방에 가둬놓고 그림을 보지 않는다고 잊혀지진 않는다. 그러기엔 양심은 지나치게 정직하고 우리의 기억력은 쓸만하다. 내 내면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초상화라니...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는 능력이라든가, 내 마음을 남에게 보여줄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의 사람들 이야기를 종종 하게 되지만, 내 마음을 내가 들여다볼 수 있다는 건 그야말로 빼박도 못하는 자기검열이지 않은가.
트와일라잇의 에드워드는 불멸의 생을 사는 자신을 저주받은 존재라고 여겼다. 반지의 제왕에서 아르웬의 아버지는 인간을 사랑한 딸을 용납하지 못한다. 에드워드는 평생의 반려를 자기와 같은 족속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해피엔딩이 가능했다. 아르웬은 아라곤이 생을 마감한 이후의 길고도 긴 일생을 그리움으로 보내야 한다. 인간 아닌 그들의 삶과 그들의 특별한 능력이 분명 부럽기는 하지만, 삶은 뭐든 자연스러운 게 최고라고... 가지 못한, 갈 수 없는 길의 아쉬움을 달래 본다.
죄를 지었으면 속죄를 해야 하고 응당 벌을 받아야 한다. 자격이 없으면 자리에 있으면 안 된다. 배터리도 5%밖에 안 남아 있으면 갈아 끼우는 게 순리인 것처럼. 그 순리가 누군가에게도 좀 전달됐으면 한다. 도리언 그레이의 비극적 결말을 떠올리면서...
헨리 경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그는 원칙적으로 항상 늦었는데, 시간을 엄수하는 것을 시간을 도둑맞는 것으로 여기는 때문이었다. -105쪽
대부분의 사람들은 산문과도 같은 인생에 지나치게 많이 투자해서 결국 망하지. 시에 자신을 투자해서 망한다면 그건 영광일 거야. -117쪽
도리언은 그 책의 후반부를 읽을 때면 잔인함에 가까운 기쁨을 느꼈는데, (아마도 모든 기쁨이란 것에는 모든 쾌락과 마찬가지로 잔인한 데가 있다.) 다른 사람들에게서 그리고 세상 속에서 자신이 가장 소중한 가치로 여기던 것을 잃어버리게 된 사람의 슬픔과 절망이, 다소 과장되었다고는 해도, 정말로 비극적으로 서술되어 있던 까닭이었다. -2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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