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역사가 말하다 - 전우용의 역사이야기 300
전우용 지음 / 투비북스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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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긋고 싶은 내용이 너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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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14-09-24 1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근에 쓴 카테고리가 디폴트 값으로 되는구나. 북플에서 보면 책 표지가 꽉 차게 나오는데 그게 아주 예쁘다. 냄비받침 받았을 때처럼 가슴이 왈랑거렸다. 사진의 여백을 자를 수 있는 기능이 있거나 글자 부분만 인식해 주면 좋겠다.
사진 위에 펜으로 글씨 쓰듯 낙서하는 기능은 많이 어려우려나?

마노아 2014-09-24 1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밑줄긋기니까 페이지 적는 칸도 필요하겠다. 인상깊은 구절 적는 칸에...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 문학과지성 시인선 442
나희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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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등장한 '말'이 그 말이었구나. 

'모두 다 예쁜 말들'이 떠오른다.

어떤 나무의 말

제 마른 가지 끝은
가늘어질 대로 가늘어졌습니다.
더는 쪼개질 수 없도록.

제게 입김을 불어넣지 마십시오.
당신 옷깃만 스쳐도
저는 피어날까 두렵습니다.
곧 무거워질 잎사귀일랑 주지 마십시오.

나부끼는 황홀 대신
스스로의 棺이 되도록 허락해주십시오.

부디 저를 다시 꽃 피우지는 마십시오.
-9쪽

뿌리로부터


한때 나는 뿌리의 신도였지만
이제는 뿌리보다 줄기를 믿는 편이다

줄기보다는 가지를,
가지보다는 가지에 매달린 잎을,
잎보다는 하염없이 지는 꽃을 믿는 편이다

희박해진다는 것
언제라도 흩날릴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

뿌리로부터 멀어질수록
가지 끝의 이파리가 위태롭게 파닥이고
당신에게로 가는 길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

당신은 뿌리로부터 달아나는 데 얼마나 걸렸는지?

뿌리로부터 달아나려는 정신의 행방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허공의 손을 잡고 어딘가를 향해 가고 있다

뿌리 대신 뿔이라는 말은 어떤가

가늘고 뾰족해지는 감각의 촉수를 밀어올리면
감히 바람을 찢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무소의 뿔처럼 가벼워질 수 있을 것 같은데

우리는 뿌리로부터 온 존재들,
그러나 뿌리로부터 부단히 도망치는 발걸음들

오늘의 일용할 잎과 꽃이
천천히 시들고 마침내 입을 다무는 시간

한때 나는 뿌리의 신도였지만
이미 허공에서 길을 잃어버린 지 오래된 사람
-10쪽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


말들이 돌아오고 있다
물방울을 흩뿌리며 모래알을 일으키며
바다 저편에서 세계 저편에서

흰 갈기와 검은 발굽이
시간의 등을 후려치는 채찍처럼
밀려오고 부서지고 밀려오고 부서지고 밀려오고

나는 물거품 속으로 들어간다

이 해변에 이르러서야
히히히히힝, 내 안에서 말 한 마리 풀려나온다

말의 눈동자,
나를 잠시 바라보더니 파도 속으로 사라진다

가라, 가서 돌아오지 마라
이 비좁은 몸으로는

지금은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
수만의 말들이 돌아와 한 마리 말이 되어 사라지는 시간
흰 물거품으로 허공에 흩어지는 시간
-18쪽

호모 루아


호모 파베르이기 전에
호모 루아*, 입김을 가진 인간

라스코 동굴이 폐쇄된 것은
사람들이 내뿜은 입김 때문이었다고 해요
부드러운 입김 속에
얼마나 많은 미생물과 세균과 독소가 들어 있는지
거대한 석벽도 버텨낼 수 없었지요

오래전 모산 동굴에서 밤을 지낸 적이 있어요
우리는 하얀 입김을 피워 올리며
밤새 노래를 불렀지요
노래의 투명성을 믿던 시절이었어요
노래의 온기가
곰팡이를 피우리라고는 생각 못했어요
몸이 투명한 동굴옆새우들이
우리가 흘린 쌀뜨물에 죽었을지 모르겠어요

입김을 가진 자로서 입김으로 할 수 있는 일들
허공에 대한 예의 같은 것

얼어붙은 손을 녹일 수도
유리창의 성에를 흘러내리게 할 수도
후욱, 촛불을 끌 수도 있지만
목숨 하나 끄는 것도 입김으로 가능해요
참을 수 없는 악취
몇 마디 말로
영혼을 만신창이로 만들 수 있지요

분노가 고인 침으로
쥐 80마리를 죽일 수 있다니,
신의 입김으로 지어진 존재답게 힘이 세군요
그러니 날숨을 조심하세요
입김이 닿는 순간 부패는 시작되니까요

———
* Homo Ruah. 'Ruah'는 히브리말로 ‘숨결’ ‘입김’을 뜻함
-24쪽

아홉번째 파도

오늘 또 한 사람의 죽음이 여기에 닿았다
바다 저편에서 밀려온 유리병 편지

2012년 12월 31일
유리병 편지는 계속되는波高를 이렇게 전한다

42피트···쌍용자동차
75피트···현대자동차
462피트··영남대의료원
593피트··.유성
1545피트··YTN
2161피트···콜트-콜텍
2870피트···코오롱유화

부서진 돛대 끝에 매달려 보낸
수많은 낮과 밤, 그리고 계절들에 대하여
망루에서, 광장에서, 천막에서, 송전탑에서 나부끼는 손에 대하여
떠난 자는 다시 공장으로, 공장으로,
남은 자는 다시 광장으로, 광장으로, 떠밀려가는 등에 대하여
밀려나고 밀려나 더 물러설 곳이 없는 발에 대하여
15만 4000볼트의 전기가 흐르는電線 또는 戰線에 대하여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 불빛에 대하여

사나운 짐승의 아가리처럼
끝없이 다른 파도를 몰고 오는 파도에 대하여
결국 산 자와 죽은 자로 두동강 내는
아홉번째 파도에 대하여

파도가 휩쓸고 간 자리에 남겨진
젖은 종이, 부서진 문장들,
그들의 표류 앞에 나의 유랑은 덧없고
그들의 환멸 앞에 나의 환영은 부끄럽기만 한 것

더이상 번개를 통과시킬 수 없는
낡은 피뢰침 하나가 해변에 우두커니 서 있다
-74쪽

잉여의 시간

이곳에서 나는 남아돈다
너의 시간 속에 더 이상 내가 살지 않기에

오후 네 시의 빛이
무너진 집터에 한 살림 차리고 있듯
빛이 남아돌고 날아다니는 민들레 씨앗이 남아돌고
여기저기 돋아나는 풀이 남아돈다

벽 대신 벽이 있던 자리에
천장 대신 천장이 있던 자리에
바닥 대신 바닥이 있던 자리에
지붕 대신 지붕이 있던 자리에
알 수 없는 감정의 살림살이가 늘어간다

잉여의 시간 속으로
예고 없이 흘러드는 기억의 강물 또한 남아돈다

기억으로도 한 채의 집을 이룰 수 있음을
가뭇없이 물 위에 떠다니는 물새 둥지가 말해준다

너무도 많은 내가 강물 위로 떠오르고
두고 온 집이 떠오르고
너의 시간 속에 있던 내가 떠오르는데

이 남아도는 나를 어찌해야 할까
더 이상 너의 시간 속에 살지 않게 된 나를

마흔일곱, 오후 네 시,
주문하지 않았으나 오늘 내게로 배달된 이 시간을
-10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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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29 03: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노아 2014-07-29 21:45   좋아요 0 | URL
예! 꼭 필요해요. 4.16 특별법!!!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문학과지성 시인선 13
이성복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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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책방 카페에는 이동진이 직접 고르고 한줄 평을 쓴 책들이 꽂혀 있다. 제일 먼저 내 눈을 사로잡은 것이 이 책이었는데, 나를 흠뻑 빠지게 한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은'이란 표현은 시인의 것이었다. 그래서 따옴표가 있었던 거구나!

마침 내 가방 속에는 이 시집이 있었다. 


시에 한자가 포함되어 있는 게 좋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게 됐다. 그 덕분에 천천히 읽을 수 있었다.

너무 쉬운 한글로만 쓰여 있었다면 휙휙 지나쳤을 문장들을 조금 더 음미하면서 다가갈 수 있었다. 

좋았다는 말 외에는 달리 더 무엇을 보태기 어려운 게 바로 시집이다. 

그래도 역시 좋았다는 말은 남겨 본다. 


덧글) 의도하지 않았는데, 좋다고 표시해둔 시 세 편이 모두 '그'로 시작하는구나. 하하핫!

그 날


그날 아버지는 일곱시 기차를 타고 금촌으로 떠났고
여동생은 아홉시에 학교로 갔다 그날 어머니의 낡은
다리는 퉁퉁 부어올랐고 나는 신문사로 가서 하루 종일
노닥거렸다 前方은 무사했고 세상은 완벽했다 없는 것이
없었다 그날 驛前에는 대낮부터 창녀들이 서성거렸고
몇 년 후에 창녀가 될 애들은 집일을 도우거나 어린
동생을 돌보았다 그날 아버지는 未收金 회수 관계로
사장과 다투었고 여동생은 愛人과 함께 음악회에 갔다
그날 퇴근길에 나는 부츠 신은 멋진 여자를 보았고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면 죽일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날 태연한 나무들 위로 날아 오르는 것은 다 새가
아니었다 나는 보았다 잔디밭 잡초 뽑는 여인들이 자기
삶까지 솎아내는 것을, 집 허무는 사내들이 자기 하늘까지
무너뜨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새占 치는 노인과 便桶의
다정함을 그날 몇 건의 교통사고로 몇 사람이
죽었고 그날 市內 술집과 여관은 여전히 붐볐지만
아무도 그날의 신음 소리를 듣지 못했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63쪽

그해 가을

그해 가을 나는 아무에게도 편지 보내지 않았지만
늙어 군인 간 친구의 편지 몇 통을 받았다 세상 나무들은
어김없이 동시에 물들었고 풀빛을 지우며 집들은 언덕을
뻗어나가 하늘에 이르렀다 그해 가을 제주산 5년생 말은
제 주인에게 대드는 자가용 운전사를 물어뜯었고 어느
유명 작가는 남미기행문을 연재했다
아버지, 아버지가 여기 계실 줄 몰랐어요
그해 가을 소꿉장난은 국산영화보다 시들했으며 길게
하품하는 입은 더 깊고 울창했다 깃발을 올리거나 내릴
때마다 말뚝처럼 사람들은 든든하게 박혔지만 햄머
휘두르는 소리, 들리지 않았다 그해 가을 모래내 앞
샛강에 젊은 뱀장어가 떠오를 때 파헤쳐진 샛강도 둥둥
떠올랐고 고가도로 공사장의 한 사내는 새 깃털과 같은
속도로 떨어져내렸다 그해 가을 개들이 털갈이할 때
지난 여름 번데기 사 먹고 죽은 아이들의 어머니는 후미진
골목길을 서성이고 실성한 늙은이와 천부의 백치는
인골로 만든 피리를 불며 밀교승이 되어 돌아왔고 내가
만날 시간을 정하려 할 때 그 여자는 침을 뱉고 돌아섰다
아버지, 새벽에 나가 꿈 속에 돌아오던 아버지,
여기 묻혀 있을 줄이야

그해 가을 나는 세상에서 재미 못 봤다는 투의 말버릇은
버리기로 결심했지만 이 결심도 농담 이상의 것은
아니었다 떨어진 은행잎이나 나둥그러진 매미를 주워
성냥갑 속에 모아두고 나도 누이도 방문을 안으로
잠갔다 그해 가을 나는 어떤 가을도 그해의 것이
아님을 알았으며 아무것도 미화시키지 않기 위해서는
비하시키지도 않는 법을 배워야 했다
아버지, 아버지! 내가 네 아버지냐
그해 가을 나는 살아 온 날들과 살아 갈 날들을 다 살아
버렸지만 벽에 맺힌 물방울 같은 또 한 여자를 만났다
그 여자가 흩어지기 전까지 세상 모든 눈들이 감기지
않을 것을 나는 알았고 그래서 그레고르 잠자의 가족들이
이장을 끝내고 소풍 갈 준비를 하는 것을 이해했다
아버지, 아버지…… 씹새끼, 너는 입이 열이라도 말 못해
그해 가을. 가면 뒤의 얼굴은 가면이었다

-66쪽

그러나 어느날 우연히/ 이성복



어느날 갑자기 망치는 못을 박지 못하고 어느날 갑자기 벼는 잠들지
못한다 어느날 갑자기 재벌의 아들과 高官의 딸이 결혼하고 내 아버지는
예고 없이 해고된다 어느날 갑자기 새는 갓낳은 제 새끼를 쪼아먹고
카바레에서 춤추던 有婦女들 얼굴 가린 채 줄줄이 끌려나오고 어느날
갑자기 내 친구들은 考試에 합격하거나 文壇에 데뷔하거나 美國으로
발령을 받는다 어느날 갑자기 벽돌을 나르던 조랑말이 왼쪽 뒷다리를
삐고 과로한 운전수는 달리는 버스 핸들 앞에서 졸도한다

어느날 갑자기 미류나무는 뿌리채 뽑히고 선생은 생선이 되고 아이들은
발랑까지고 어떤 노래는 금지되고 어떤 사람은 수상해지고 고양이 새끼는
이빨을 드러낸다 어느날 갑자기 꽃잎은 발톱으로 변하고 처녀는 養老院으로
가고 엽기 살인범은 불심 검문에서 체포되고 어느날 갑자기 괘종시계는
멎고 내 아버지는 오른팔을 못 쓰고 수도꼭지는 헛돈다


어느날 갑자기 여드름 투성이 소년은 풀 먹인 군복을 입고 돌아오고
조울증의 사내는 종적을 감추고 어느날 갑자기 일흔이 넘은 노파의 배에서
돌덩이 같은 胎兒가 꺼내지고 죽은 줄만 알았던 삼촌이 사할린에서 편지를
보내 온다 어느날 갑자기, 갑자기 옆집 아이가 트럭에 깔리고 축대와 뚝에
금이 가고 月給이 오르고 바짓단이 튿어지고 연꽃이 피고 갑자기,
한약방 주인은 國會議員이 된다 어느날 갑자기, 갑자기 장님이 눈을 뜨고
앉은뱅이가 걷고 갑자기, X이 서지 않는다

어느날 갑자기 주민증을 잃고 주소와 생년월일을까먹고 갑자기,
왜 사는지 도무지 알 수 없고

그러나 어느날 우연히 풀섶 아래 돌쩌귀를 들치면 얼마나 많은 불개미들이
꼬물거리며 죽은 지렁이를 갉아 먹고 얼마나 많은 하얀 개미 알들이 꿈꾸며
흙 한점 묻지 않고 가지런히 놓여 있는지 -7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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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4-07-23 0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래된 시집인데 갖고 있군요~
이성복 시는 가슴에 콕콕 박히면서 아파요.ㅜ

마노아 2014-07-23 08:23   좋아요 0 | URL
한글자 한글자 콕콕 박으면서 읽게 되더라구요. 좋은 시들이었어요. 제가 좋아하는 시들은 아픈 시들이 많은 것 같아요.^^;;
 
간절하게 참 철없이 - 2009 제11회 백석문학상 수상작 창비시선 283
안도현 지음 / 창비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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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소원

적막의 포로가 되는 것

궁금한 게 없이 게을러지는 것

아무 이유 없이 걷는 것

햇볕이 슬어놓은 나락 냄새 맡는 것

마른풀처럼 더 이상 뻗지 않는 것

가끔 소낙비 흠씬 맞는 것

혼자 우는 것

울다가 잠자리처럼 임종하는 것

초록을 그리워하지 않는 것
-11쪽

월식

젊은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달을 따주겠다고 했겠지요

달의 테두리를 오려 술잔을 만들고 자전거 바퀴를 만들고 달의 속을 파내 복숭아 통졸미을 만들어 먹여주겠노라 했겠지요

오래전 아버지 혼자 사다리를 타고 지붕에 올라간 밤이 있었지요 사춘기의 풀벌레가 몹시 삐걱거리며 울던 그 밤,

그런데 누군가 달의 이마에다 천근이나 되는 못을 이미 박아놓았던 거예요 그 못에다 후줄근한 작업복 바지를 걸어놓은 것은 달빛이었고요

세월이 가도 늙지 못한 아버지는 포충망으로 밤마다 쓰라리게 우는 별들의 울음소리 같은 것을 끌어모았을 거예요

아버지 그림자가 달을 가린 줄도 모르고 어머니, 그리하여 평생 캄캄한 이슬의 눈을 뜨고 살았겠지요
-14쪽

빗소리

저녁 먹기 직전인데 마당이 왁자지껄하다

문 열어보니 빗줄기가 백만대군을 이끌고 와서 진을 치고 있다

둥근 투구를 쓴 군사들의 발소리가 마치 빗소리 같다

부엌에서 밥 끓는 냄새가 툇마루로 기어올라온다

왜 빗소리는 와서 저녁을 이리도 걸게 한상 차렸는가

나는 빗소리가 섭섭하지 않게 마당 쪽으로 오래 귀를 열어둔다

그리고 낮에 본 무릎 꺾인 어린 방아깨비의 안부를 궁금해한다
-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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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고 푸른 사다리
공지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13년 10월
구판절판


수도자는 순명(順命)해야 하고 수도자는 겸손해야 합니다. 인간(humanitas), 흙(humus), 겸손(humilitas)은 모두 같은 라틴 어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24쪽

안젤로는 초콜릿을 노수사님들의 입에 넣어주고는 노수사님들의 식판에 담긴 밥을 자신의 입에도 넣었다.
“예수님이 당신이 십자가를 지고 가는 고통을 받았다고 해서 우리가 꼭 같이 고통받기를 정말 바라실까요? 토마스 수사님, 정말 그렇게 생각하시는 거예요? 우리 엄마는 병실에서 자기는 아파서 물도 삼키지 못하면서 제가 친척들이 사 온 주스며 빵을 먹고 있는 걸 보기를 그리 좋아하셨는데요.”
-37쪽

할머니는 나를 사랑했고 아버지도 나를 사랑했으며 어머니도 나를 사랑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내가 행복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모두 제각기 떨어져 불화했으며, 나는 그들이 나에 대해 퍼붓는 사랑에서보다 그들의 불화에서 나오는, 그들끼리의 관계 속에서 흘러나오는 불행에 더 깊이 영향받았다.
-47쪽

“가난한 자들을 돌보라 역설하면서 가난한 자들이 왜 가난하게 되었는지 도무지 살펴보려고 하지 않는 교회, 낙태하지 말라고 경고하면서 왜 젊은 엄마들이 배 속에 든 자신의 아이를 죽일 지경까지 이르렀는지 조금도 알고 싶어 하지 않는 교회, 수백 명의 인명을 살상하려는 강대국의 무기 판매에 아무 경고도 하지 못하는 교회! 이혼은 죄라고 하면서 이혼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만큼 불행하게 사는지 보이는데도 모른 척하는 교회! 동성애가 무슨 취향인 줄 아는 교회! 그 교회가 나를, 여자들과 성적인 문제를 일으키고 수도원의 형제들이 노동한 대가인 그 돈을 떼어먹고 도망간 수사들과 같은 수위로 처벌하려 하는군. ‘부자가 재산을 자랑할 때 약탈과 착취가 묵인되고, 군지휘관이 승전보를 알릴 때 대량 학살이 묵인되고, 고관대작이 권력을 뽐낼 때 폭력이 묵인되어 있는 것이 분명함에도 이것들이 그들 눈에 보이지 않는다면 자신도 그 부류 속에 있음을 의심하라!’하고 톨스토이가 말했던가......”
-67쪽

“긴 인생에서 겨우 한 해 늦추어졌을 뿐 아무것도 달라진 건 없잖아요. 우리 수련수사 때 수련장 신부님 말씀하신 거 전 가끔 생각해요. 나가는 것도 좋다. 길을 바꾸는 것도 나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중요한 결정은 반드시 평화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69쪽

“미카엘이 제일 걱정이에요. 단식을 하고 계명을 지키고 계율을 지키는 거 너무 중요하지요. 중요하지만 가끔 미카엘은 매사에 너무 열심히라서 나는 그게 걱정이에요. 하느님 나라는 공부하듯 승진하듯 고시 보듯 내 힘으로 가는 데가 아니거든요. 속세에서 1등 하듯 여기서 단식 지키고 속세에서 근무 열심히 하듯이 여기서 기도 많이 하는 건 속세의 방식이지요. 하느님 나라는 그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기쁘게 살아내는 거예요. 복음은 지키는 것이 아니고 사는 거거든요.”
-107쪽

“힘들지요. 하느님, 이 늙은이를 빨리 데려가시지 않고 이렇게 내버려두어서 무얼 얻으시려는 건지 궁금하지요. 그러나 내가 물어도 늘 그렇듯 대답이 없으세요. 80년이 넘도록 물어도 대답 없는 양반이니 말이지요. 다만 내가 알게 된 게 있다면 내가 평화 가운데 있다는 거예요. 젊었을 때 나는 평화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인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이제 겨우 하나 알게 되었어요. 평화는 고통 가운데서, 혼란 가운데서, 병과 늙음 그리고 죽음 한가운데서 하느님을 붙들고 있는 거라는 걸.”
-108쪽

“미카엘 수사님, 요한 수사님. 서품을 받고 신부가 된다는 것은 참 좋은 일입니다. 물론 그렇게 되지 않는 것도 또 좋은 일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지어내고 좋아하셨지 뭐가 되고 나서 좋아하시지는 않았지요. 그런데 너무 혼자 힘으로 모든 걸 하려고 하면 넘어집니다. 우리는 작고 가난합니다. 우리는 그저 그분께 모든 걸 맡기고 겸손하게 기다릴 뿐이지요. 우리가 해야 하고 오직 하나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우리의 먹을 것, 우리의 입을 것, 우리의 시간과 선의를 그것이 모자라는 이웃과 나누는 거지요. 예수님은 교회 건물을 세우지도 않았고 시위를 주동하지도 않았으며 학교를 창립하지도 않았으며 한 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전쟁터에 가시지도 않았잖아요.”
-108쪽

“나는 사랑에 대해 말하려고 했던 거야. 작고 가난한 형제에 대한 사랑...... 나는 예수가 승천하기 전에 주고 갔던 평화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했던 거야. 그런데 내 말투에는 사랑이 없었고 내 편지의 내용에는 평화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어. 왜 토마스 수사님을 간호하는데, 그 터무니없이 눈이 맑고 명랑한, 지금은 어린아이보다 못하게 되어 대소변조차 혼자 보지 못하고 넣어주는 음식의 반을 흘리는 늙은 수사님을 보면서 나는 그걸 깨닫게 되었을까? 그분이 하도 잔잔하셔서 내 얼굴이 비추어졌는데, 나는 거기서 사랑을 빙자한 증오로 가득하고 평화를 빙자하여 전쟁을 불사하는 가증스러운 한 영혼을 보게 된 거라구.”
-113쪽

태어나기 전에 인간에게 최소한 열 달을 준비하게 하는 신은 죽을 때는 아무 준비도 시키지 않는다. 그래서 삶 전체가 죽음에 대한 준비라고 성인들이 일찍이 말했던가. 어떻게 죽을 것인가 생각하는 인간은 분명 어떻게 살 것인가를 안다. 죽음이 삶을 결정하고 거꾸로 삶의 과정이 죽음을 평가하게 한다면 내 삶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나는 하는 수 없이 그런 질문에도 직면하게 되었는데, 그때는 그저 이 모든 것을 신에 대한 원망으로 돌리고 싶었다. 그것이 훨씬 수월한 일이니까. 문제는 그렇게 책임을 신에게 돌려버림으로써 실은 나는 성장할 기회를 놓치고 있었다. 아빠스님이 이야기했던 “이 고통 속에서 신이 내게 물으시는 것”을 나는 알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인간은 고통을 겪을 때 실은 내가 이 고통 때문에 뜻밖에도 잃어버리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한다는 말이 떠오르기도 한다.
-165쪽

“안젤로 수사님은 정말 친척이 아무도 없었어요. ‘전 여기서 나가면 아무도 없어요’ 그러기에 농담인 줄 알았는데 정말이었나 봐요. 이 세상에 사고무친인 사람이 그렇게 날마다 방실방실 웃고 다녔다는 걸 믿을 수가 없어요. 언제나 내게도 상냥하고 친절했지요. ‘문지기 수사님이 문을 지켜주시니 저는 정말 좋아요. 날마다 오갈 때마다 여기서 뵐 수 있으니 참 기뻐요.’ 아무것도 아닌 제게 그렇게 말해주는 사람은 이 세상에 그 사람 하나밖에 없었어요. 순간 내가 뭐 예쁜 여자도 아니고 저게 정말일까 의심하기도 했지요. 그런데 신기하게도 정말 안젤로 수사님이 ‘수사님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이에요’ 하고 이 문을 오갈 때면 저는 제가 누군가에게 참 기쁜 사람이 된다는 생각에 저절로 환해졌답니다. 가끔 그 젊은 수사님이 햇빛 속에 서 있을 때는 같은 남자가 보아도 얼굴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꼭 늠름한 해바라기 같았고, 그냥 지상에 뚝 떨어진, 정말 안젤로라는 이름 그대로 천사였나 싶었어요.”
-166쪽

여자는 내가 내미는 포도주를 한잔 마시고 겨우 입을 열다가 다시 울었다. 나도 모르게 그녀의 어깨로 손이 갔다. 그렇게 위로의 손길을 뻗으면서 나는 내가 가진 지극한 슬픔도 그보다 더 지극히 슬픈 사람을 위로하면 덜어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짧은 순간 나는 나의 고통을 잠시 잊었고 그녀의 고통에 깊이 감화되었다. 뭐랄까, 아래로만 치닫던 슬픔이 나의 아픔에만 집중되던 고통이 다른 이를 향해만 가던 분노가 평화와 위로와 나눔으로 반전되는 순간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후에도 나는 마음이 아플 때는 다른 이들을 위해 나를 쏟는 것으로 나의 고통을 달래곤 했다. 어쩌면 치유는 위로받는 자에게가 아니라 위로하는 자에게 일어나는지 모르니까. 아니, 위로받는 자와 위로하는 자 두 사람 모두에게 새로운 화학적 변화가 일어나는지도 모른다. 고통받는다고 느낄 때야말로 우리는 어쩌면 가장 이기적이 될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168쪽

이상하다. 이 지상을 떠난 사람의 자취는 그가 남긴 사물에서가 아니라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발견된다. 죽어서 삶이 더 선명해지는 사람이 있다. 죽어서야 비로소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살아나는 사람이 있다. 살아 있었으면 그저 그렇게 내 곁을 스쳐 지나갔을 평범하고 시시한 한 사람의 생이 죽어서야 모든 이의 삶 속에 선명해지는 것. 아마 대표적인 이가 예수였겠지. 죽은 몸이 벌떡 일어나지 않아도 그것이 어쩌면 부활이 아닐까.
-170쪽

“우리 안젤로가...... 우리 안젤로 수사가......”
그는 눈물로 범벅이 된 주름진 얼굴로 겨우 그렇게 말했다. 그의 거무튀튀한 입술에서 나오는 우리, 라는 말이 나를 무너뜨리고 말았다. 나는 그 자리에서 눈물을 터뜨렸다. 노수사님이 다가와 나를 안았다. 나는 그의 품에 안겨 어린아이처럼 큰 소리로 그리고 오래 울었다.
-175쪽

“하느님, 참 늙고 병들어 쓸모없는 나를 데려가시지, 왜 그들을...... 왜 그들을.”
나는 그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닦으면서 내가 왜 그를 사랑하는지 알 것 같았다. “이것도 하느님의 뜻”이라거나 “여기서 뜻을 찾아야 한다”고 했다면 마음속에서 일어났을 폭풍 같은 냉소가 그에게는 일지 않았다. 그는 약한 우리의 믿음으로 인한 고통을 이해했고 공감해주었다. 나는 그 후로도 가끔 생각했는데, 결국 진정하고 강한 믿음을 가진 이만이 약하고 흔들리는 이들을 공감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211쪽

“요한 수사님, 악은 수많은 얼굴로 다가옵니다. 사실 사람인 우리가 그것을 식별하는 것은 은총에 의지할 뿐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도 있어요. 우리가 사랑하려고 할 때 그 모든 사랑을 무의미하게 느껴지게 만드는 모든 폭력, 모든 설득, 모든 수사는 악입니다. 너 한 사람이 무슨 소용이야, 네가 좀 애쓴다고 누가 바뀌겠어, 네가 사랑한들 아는 사람 하나도 없어...... 속삭이는 모든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어쩌면 옥사덕이나 남미 로메로의 피살이나 유신 혹은 광주 학살 같은 것은 아직 난이도가 높은 것은 아닐지도 모르죠. 이제 악은 다른 얼굴로 우리에게 달려듭니다. 소리 없는 풀 모기처럼 우리를 각개격파하러 옵니다. 그들이 우리에게 원하는 것은 단 한 가지입니다, 그것은 무의미입니다.”
-239쪽

“그런데 요한 수사 그거 아나? 이 세상에 참나무란 건 없다는 거 말이야. 참나무란 참나무 속에 속하는 여러 나무들의 공통 명칭이라는 것을. 자료를 좀 찾아보니까 수피를 잘라내어서 굴피집의 지붕으로 썼다는 굴참나무-우리 수도원에서 순교자를 여럿 냈던 옥사덕의 지붕 자재도 아마 이 굴참나무였을 거야-, 떡을 상하지 않게 감싸주었다는 떡갈나무, 예전에 신발 깔창으로 대기 좋았다는 신갈나무, 묵을 쑤어 먹으면 제일 맛있는 열매를 맺는다는 졸참나무, 거기서 열린 도토리로 임금님 수라상에 올릴 도토리묵을 쑤었다는 상수리나무...... 한마디로 도토리가 열리는 나무가 다 참나무라는 거야.”
-313쪽

“참나무는 20년은 되어야 비로소 열매를 맺기 시작한다고 하네. 물론 그 전에 그 수많은 도토리 중에서 싹을 틔우는 것도 몇 개 되지 않고 말이야. 그렇게 싹이 났다고 해도 열매를 맺지 못할 뿐 아니라 죽는 일도 비일비재. 여러 해충에 약하고...... 요즘 같은 세상에 20년이 지나야 열매를 맺다니...... 그때 생각했어. 이렇게 약하고 어찌 보면 느린 나무에게 참이라는 이름을 붙인 우리 조상들을 말이야. 심지어 평균 수명도 짧았을 그 시기에 자신이 심었다 해도 살아서는 그 혜택을 보지 못할 그 나무에게 세상에서 가장 좋은 참이라는 말을 붙여주다니......
나는 어쩌면 우리 수도자들이 참나무 등속과 닮은 건 아닌가 생각해보았네...... 우리도 참이라는 하나의 카테고리 속에 다 모여 있는 건지도 모른다고 말이야. 우리를 모두 수도자라고 부르지만, 모양도 다 다르고 쓰임새도 다 다르고 심지어 제복들도 다르고....... 그렇지만 우리는 수도자,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는 거...... 닮았다고....... 그렇게 20년을 잘 참아내면 참나무는 수백 년을 살기도 하네. 풍성한 그늘과 열매를 주고 퇴비가 되는 잎을 주기도 하며 숯을 만들게 하고-통일신라 시대에 경주에서 피웠다는 연기 안 나는 사치스러운 숯이 이것이라네-표고버섯의 토양이 되기도 하지.”
-314쪽

‘압니다. 할 수 없는 이유 9999가지를요. 그러나 합시다. 이건 생명의 문제입니다. 이건 흥정의 대상도 고려의 대상도 아닙니다.’
-334쪽

영하 20도의 눈보라 치는 항구를 떠나 사흘 만에 도착한 그 나라의 남쪽 항구는 영상 1도. 생명과도 같이 보드라운 바람이 불고 있었습니다. 더욱 놀라웠던 것은 거제도의 주민들이 우리 배가 도착한다는 소식을 듣고 일제히 주먹밥을 준비해 부두에 나와 있었다는 것입니다. 맑고 신선한 이 나라의 물도 함께 말입니다. 우리 선원들은 그 광경을 보았습니다. 저는 생각했지요. 예수라는 이름도 없고 교회도 없고 심지어 십자가도 없는 이곳에서 진정한 크리스마스가 펼쳐지고 있다고 말이지요.
-341쪽

‘메리 크리스마스! 메리 크리스마스, 여러분’
-342쪽

두 사람이 죽었다는 말과 동시에 마리너스 수사님의 입에서 강한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는 마치 죽음의 소식이라고는 세상에서 처음 들은 사람처럼 깊게 탄식했다. 순간 그보다 내가 더 놀라고 있었다. 나는 그가 전쟁을 겪은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가 본 죽음은 내가 살아서 본 사람의 수보다 많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스쳐갔다. 그런데 그는 나보다 더 깊이 탄식하고 있었다. 문득 그가 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너무도 당연하지만 어떤 죽음도 상투적이지 않다. 수십 억의 사람이 태어난다 해도 어떤 태어남도 진부하지 않듯이 말이다. 나는 그에게 온전히 나의 슬픔을 이해받고 있는 듯했다. 그런 느낌은 처음이었다. 나는 미카엘과 안젤로가 죽은 후 처음으로 위로받고 치유받는 것 같았다.
-354쪽

더 열심히 쓰겠습니다. 더 깊이 절망하겠습니다. 더 높이 희망하기 위해서.
-37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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