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한 고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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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승범 주연의 영화는 언제나 극과 극을 갔던 것 같다. 아주 나쁜 놈이거나, 아주 웃긴 놈이거나. 아마도 꽤나 강렬한 인상 덕분에 그런 게 아닐까 싶다. 이 영화에서는 나빴고, 웃기기도 하지만, 또 좋은 놈이기도 한... 그런 역할이다.  

보험 챔피언도 먹었었던 영업사원 배병우는 스카웃 제의를 받았다. 연봉 10억을 받지 못하면 짐승 새끼라는 다짐을 날마다 새기며 일어나는 그는 이직을 일생 최대의 기회로 여긴다. 여자 친구는 10억 씩이나 벌어야 행복할 수 있는 거냐고 묻지만 당시의 그는 소박한 행복의 맛도 멋도 알지 못한다. 오로지 앞으로만 달려갈 뿐.  

그런 그에게 적신호가 떨어졌다. 그의 고객이 그의 충고와 정보를 바탕으로 자살을 해버린 것이다. 유족은 자살 방조 혐의로 고소를 했고 그는 억울하다고 항변하지만 여자 친구는 몹시 실망해서 떠나버린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2년 전에 가입시켰던 불량고객이 떠올랐다. 과거에 자살 시도 경력이 있었던 그들은 이제 보험금을 노리고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른다. 배병우는 그들 수상스런 고객 네 명을 쫓아다니며 생명보험을 해지하고 연금보험으로 전환할 것을 설득한다. 하지만 작정하고 보험을 들었던 그들을 설득하는 것은 만만치 않다. 

 

윤하는 영화에서 사채업자에게 쫓기며 어린 동생을 부양하는 가장으로 나온다. 자신의 꿈과 생계를 함께 책임져줄 최적의 직업으로 가수가 되고 싶지만 현실의 벽은 결코 녹록치 않다. 내가 사랑하는 이승환은 윤하를 몹시 좋게 보고 있어서 공연의 게스트로 곧잘 초대하곤 했다. 그래서 윤하의 노래는 라이브로도 종종 들어봤지만, 난 그녀의 노래를 그닥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부른 그녀의 노래들은 모두 좋았다. 내가 싫었던 것은 단지 그녀의 노래였구나. 다른 노래를 부르니 이렇게 좋은 것을....;;; 첫 연기인지는 모르겠지만, 초보 티나지 않게 잘 소화해냈다.  

 

정선경은 무려 네 아이의 엄마로 나오는데 남편을 잃고 혼자 어렵게 아이들을 부양하고 있었다. 좁은 집의 디테일한 풍경이다. 저런 형편에서는 깔맞춤 가구란 나올 수가 없는 법! 크기와 색깔이 제각각인 서랍장들이 빈궁한 살림을 잘 보여준다. 그래도 어린아이들이있는 집인지라 몇 권의 동화책과 귀여운 스티커들도 붙어 있다.   



질풍노도의 청소년기를 보내고 있는 장녀와 달리, 아직은 마냥 해맒기만 한 세 동생들. 엄마를 돕고 싶다는 갸륵한 마음으로 길목에서 나물을 팔아보려고 하지만 장사가 될 리가 없다. 저 모습을 목격한 엄마의 마음이 무너지는 것은 당연하다. 반항하고 스스로를 갉아먹는 자존심만 내세우는 큰 딸이 답답했는데, 아이가 갖고 있던 배신감의 무게를 들었을 때는 연민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영화는 2/3 지점이 넘어가서야 슬퍼지지만 그 전까지는 꽤 코믹하게 진행된다. 

이 집에 도착하기까지의 과정도 깨알같은 재미를 주었다.

 

잠깐 출연했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긴 김수미. 잔돈은 절대 내주지 않는 실력을 선보이신다. 아마도 손님의 상태(?)를 보아가며 그런 결정을 내리시는 듯. 그나저나 영화 보면서 맥스봉이 참 먹고 싶었다. 후후훗! 

 

윤하의 동생으로 나오는 정성하. 누군지 몰랐는데 나중에 기타 치는 것을 보고서야 유튜브에서 화제를 모았던 소년임을 떠올렸다. 정말, 윤하의 기를 팍팍 죽이는 솜씨였다. 찾아보니 아직 중학생이다. 어휴!    

정성하 연주

하루종일 아무와도 얘기하지 못했다면서 낯설고 수상한 아저씨를 붙잡는 아이. 학교도 가지 못하는 가난한 아이가 내민 그 손이 무척 아팠다. 강풀의 '그대를 사랑합니다'에서 치매에 걸린 할머니는 하루종일 집에 갇혀 있다가 남편이 돌아오면 얘기를 해달라고 졸라댄다. 얼마나 사람이 그리울까. 그런 노인과 이런 아이들이 얼마나 많을까.

 

대사가 딱히 많았던 것도 아니고 큰 액션을 요구하지도 않는 배역이었지만, 그냥 배우라고 해도 믿을 만큼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무대에서 가장 빛났던 것은 두말 하면 잔소리! 

 

야구장 씬도 무척 재밌고 멋졌다. 대가는 썼지만, 일생의 여인을 만났으니 그대에게는 행운!  

처음엔 자신의 앞길을 막게 될까 봐 가입자들을 쫓아다니던 배병우는 어느덧 그들의 인생에 깊이 개입되어 그들의 '삶'이 끝나지 않게 잡아주는 역할을 하게 된다. 몽블랑을 목표로 했을 때는 갖지 못했던 마음들이다.

내 죽음으로 나오는 보험료를 가족에게 남기고 싶은 마음을 먹었다면, 그 마음을 먹기까지의 과정이 얼마나 힘들었을 지는 말할 필요도 없다. 누군가는 10억 연봉을 목표로 발에 땀이 나도록 달리지만, 누군가는 자식들 입에 풀칠이라도 시키려고 새벽 바람을 맞으며 쓰레기 봉투를 치운다. 그 극단적 대비는 지극히 현실적이기에 더 불편하다.  

틱 장애를 갖고 있으며 노숙자 생활로 하루하루를 근근히 버티는 청년은 하루에 세 가지씩 감사할 거리를 적는다. 인위적인 설정인 것일까. 누군가는 그렇게 냉소를 날릴 수도 있겠지만, 어쩐지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런 사람도 있을 거라는 안도와 한숨을 같이 품어 본다.  

그들의 삶을 그토록 버겁게 만드는 것은 가족이면서 동시에 그들을 끝까지 살아남게 만드는 동아줄도 가족이 되어버린다. 그것은 분명 사실이다. 가난해서 아프고, 가난해서 더 서러운 그들에게 가족마저도 없다면 어떻게 이 무서운 세상을 살아갈까. 하지만 그들처럼 늘 힘이 되어주는 가족만 있는 것은 아니니, 버리고 싶은 가족도 분명 있는 법이니까.... 그들에게 희망을 주는 게 가족이기만 해서는 곤란하다. 사실은 이 사회가 제도적으로 그들을 벼랑 끝까지는 밀지 않아야 하는 것인데, 그들을 절벽에서 밀어버리는 것은 사회의 불합리한 시스템이곤 하니까.  

그래서 모순을 느끼면서도, 고객님의 행복이 곧 저의 행복입니다!라는 멘트에 희망을 걸어 본다. 노동자의 행복이 자본가의 행복이라고 믿고 실천하는 기업가가 있다면, 학생의 행복이 곧 교사의 행복이라고 믿는 학교가 있다면, 이웃의 행복이 곧 나의 행복이라고 모두가 믿는다면, 그 세상은 정말 행복한 세상이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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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1-04-24 0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내용이군요~~~~ 류승범 영화는 본 것이 별로 없네요.
이웃의 행복이 내 행복이 되면~~~~~ 모두가 살만한 세상이겠죠.

마노아 2011-04-24 01:37   좋아요 0 | URL
작년에는 용서는 없다와 부당거래를 보았어요.
이 영화까지 모두 한 해에 다 찍은 건지 모르겠네요.
여기서 엄청 뛰어다녀서 체력적으로 힘들어 보였어요.
서로의 이웃이 모두 행복하다면 결국 나도 행복한 이웃이 되는 건데요.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어요.^^

순오기 2011-04-24 12:39   좋아요 0 | URL
용서는 없다는 못 봤지만, 부당거래는 봤어요.

마노아 2011-04-24 14:57   좋아요 0 | URL
부당거래 보고 나서 혈압이 쫙 상승했던 기억이 나요.
그때가 허수아비춤을 읽고 난 뒤여서 더 그랬어요.
어휴, 다시 생각해도 심장이 듀근듀근...;;;

양철나무꾼 2011-04-24 0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성하, 우리 아들이 왕 부러워하잖아요~
수상한 고객들, 바로 접수합니다~^^

마노아 2011-04-24 10:34   좋아요 0 | URL
청소년들은 더 부러울 것 같아요. 또래 아이가 저런 실력을 갖고 있다니, 눈물이 날지도 몰라요.^^;;;
영화 보고 오시면 후기 꼭 부탁해요.^^

차좋아 2011-04-24 1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름이 생각안나지만, (늘근도둑아저씨)
그 분은 페이퍼에 안 담겨있네요. 마노아님도 별로였던거죠?ㅋㅋ 난 그 아저씨의 연기는 연극 같아서 어색했어요.
김수미 좋았고 류승범은 악당 같은 놈이라생가하는데 연기를 잘해 인정할 수 밖에없었고, 윤하와 동생 때문에 귀가 즐거웠고,ㅎㅎㅎ 좋은 영화였어요.

마노아 2011-04-24 13:38   좋아요 0 | URL
박철민 씨 얘기하는 거죠? 사실 저기에 임주환 얘기도 거의 안 적었네요. 임주환 연기는 참 좋았는데 말이에요. 맞아요. 윤하와 그 동생 때문에 귀가 아주 즐거웠어요. ^^

귀를기울이면 2011-04-24 17: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 볼 시간도 없는데, 덕분에 영화 한 편 잘 보고 갑니다^^ 근데 혼자 나쁘고, 웃기고, 좋은 놈이면 어찌보면 평범한 인물이군요. 저처럼ㅋㅋ

마노아 2011-04-24 22:07   좋아요 0 | URL
우리의 모습이 다 들어있는 캐릭터예요.^^ㅎㅎㅎ
미워할 수 없는 인물이지요.^^

버벌 2011-04-25 04: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정말 제대로 한편을 본 느낌이네요.

마노아 2011-04-25 09:54   좋아요 0 | URL
너무 자세히 얘기했나요? 그래도 실제로 보면 하지 않은 이야기도 많아요.^^

버벌 2011-04-25 11:48   좋아요 0 | URL
아뇨~ 좋았다는 거였어요. ^^

마노아 2011-04-25 12:15   좋아요 0 | URL
헤헷, 알지만 혹시 걱정 되어서요.^^;;;;

카스피 2011-04-25 1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노아님 리뷰를 보면 상당히 괜찮은 영화같은데 왜 류승범은 시사회장에서 시큰둥 했는지 궁금하네요^^

마노아 2011-04-25 11:45   좋아요 0 | URL
류승범이 그랬어요? 저야 뭐 알 수 없죠.^^

꿈꾸는섬 2011-04-25 1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재밌게 봤어요.^^ 별 네개...저도요.^^

마노아 2011-04-25 13:32   좋아요 0 | URL
헤헷, 꿈섬님의 글을 보고 제가 이 영화를 보기로 결심을 했다지요.^^
 
줄리아의 눈 - Julia's Ey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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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자가 더 유명한 영화 줄리아의 눈. 아직 길예르모 델 토로의 작품을 보지 못했다. 그의 영화도 이 영화처럼 심장을 쥐락펴락 한다면 앞으로도 못 볼 것 같지만 제작과 감독은 분명 별개일 테지? 

사라와 줄리아는 쌍둥이다. 선천성 시력 장애를 앓고 있는 두 사람은 벌써 6개월 동안 서로 연락이 없었다. 이미 1년 전에 시력을 완전히 잃었던 언니 사라가 어느 날 스스로 목을 메고 자살을 한다. 방안에는 그녀가 싫어하는 음악이 틀어져 있고 그녀는 그 음악을 끄라고 얘기한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보란 듯이 목을 메지만, 상대는 그녀가 올라선 의자를 넘어뜨리면서 그녀가 죽어가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다. 

 

같은 시각, 천문학자로 보이는 동생 줄리아는 천체를 관측하다가 목이 졸리는 느낌을 받으며 바닥에 쓰러진다. 직감적으로 언니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 거라고 여긴 그녀는 남편과 함께 사라의 집을 방문한다.  

경찰은 그녀가 절망에 빠져서 자살한 거라고 단정짓지만 줄리아는 그 말에 동의하기가 힘들었다. 사건 당시에는 정전 상태였는데 이윽고 전기가 들어왔을 때 울려온 언니가 싫어하는 음악도 그런 의심에 부채질을 했다. 시력을 잃었지만 기증자가 나타나면 시력을 되찾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스스로 죽을 리가 없다는 게 줄리아의 생각이다. 하지만 남편은 그녀의 예민함을 지적하며 빨리 일을 마무리 짓고 돌아가기를 바랐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그녀의 시력도 금세 퇴화하기 때문에 그의 걱정은 일견 당연한 듯 보인다.  

줄리아는 사라의 이웃집 맹인 할머니의 집을 방문했다가 언니가 맹인 센터에서 다른 젊은 여성들과 교류가 있었다는 것을 알고는 그곳까지 찾아간다. 탈의실에서 그녀들이 나누는 대화를 듣고는 언니에게 남자 친구가 있다는 사실도 알아차린다. 그리고 그때, 시력을 잃은 그녀들로 인해 자신을 따라온 또 다른 그림자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추적한다. 막다른 길목에 다다른 사내는 그녀를 향해 카메라 플래쉬를 터트리고 도망친다.  그리고 그 와중에 잠시간 눈이 보이지 않는 것을 경험한 줄리아. 

 

이 장면을 보면서 줄리아 역을 맡은 배우가 엄청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다. 쌍둥이니까 1인 2역을 소화한 것인데 분위기가 확 다르다.  

남편은 사라가 얼마 전에 수술을 받았고 수술이 실패했음을 줄리아에게 알려준다. 하지만 그럼에도 줄리아의 의문은 사라지지 않았다.  남편과 여행을 원한다면서 줄리아는 언니가 남자친구와 함께 했던 여행지의 같은 호텔에 숙박한다. 그리고 거기서 의문점을 갖게 된다. 언니는 분명 남자 친구와 함께 여행을 했는데도 카운터에서도 식당에서도 사람들은 그 남자를 기억해내지 못했다. 식당에서 근무하는 한 할아버지만이 그녀에게 단서를 제공한다. 존재감이 전혀 없는 그림자 같은 그 남자가 주차장의 CCTV에 찍혔을 거라고. 남편은 이 사건에 지독히 집착하는 줄리아에게 화를 내면서 테잎을 복사하러 들어가지만 그 후 돌아오지 않는다. 남편마저 실종되고, 복사를 뜨던 장소에서 증거물은 사라지고, 자신에게 단서를 제공한 노인마저 사고사로 위장된 감전사로 죽어버리자 줄리아는 한계에 부딪히고 만다.  

급격히 시력이 떨어진 줄리아는 수술을 받았고, 2주 간의 치료를 집에서 받겠다고 우긴다. 병원에서 만류하자 가까운 언니네 집에서 하겠다고 타협을 보고 병원에서는 간병인을 붙여 주었다. 이제부터가 본격적인 공포의 시작이겠건만, 사실 나는 영화가 시작된 순간부터 지독히 무서웠다. 음악 때문이었다. 심장 박동을 자꾸 빠르게 만들어주는 음향 효과가 아직 아무 사건도 벌어지지 않았고 드러나지 않았음에도 지나치게 두려움을 느끼게 했다. 사실 눈이라는 게 모든 장기가 다 소중하지만 유독 그 중요성이 부각되는 부위가 아니던가. 청소년기에 나는 시력을 잃게 될까 봐 까닭없이 두려워 악몽을 꾸기도 했다. 꿈 속에서 나는 시력을 잃어 아무 것도 볼 수가 없어 절망에 빠졌더랬다. 안경을 오래 끼기는 했지만 줄리아나 사라처럼 선천성 시력 퇴화도 없었는데 말이다. 물론, 다행히 오래지 않아 그런 두려움은 사라졌다. 십수 년 지나서는 라섹 수술을 거뜬히 받을 만큼 공포도 잊었다. 하지만 주인공처럼 서서히 눈을 잃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그 공포는 매우 클 수밖에 없다. 언니 사라의 죽음에는 그런 절망감이 매우 컸을 것 같다. 맹인 센터의 여자들은 사라에 대해서 평이 좋지 않았다. 이제 눈을 잃은지 1년이 된 사라는 그녀들과 잘 섞이지 않았을 것 같다. 자신은 곧 시력을 찾을 수 있으니 우린 서로 다르다고 선을 그었을 지도 모르겠다.  

 

간병인은 그녀의 곁을 열흘 간 지키지만 그때까지 얼굴이 등장하지 않는다. 그의 등과 손, 움직임을 보여주지만 얼굴이 나오지 않으니 관객들은 더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다. 필연적으로 위험한 인물이 나왔는데 줄리아가 너무 신임을 해서 안타까울 지경이다.  

공포와 스릴러의 입장에서 영화는 매우 훌륭했다. 이 영화를 다 보고 나서는 너무 긴장을 한 나머지 다리도 후달거렸고 심신이 피폐해져서 빨리 쉬어야겠다는 생각만 간절했다. 헌데 캐릭터의 측면에서는 아쉬운 부분들이 있었다. 이웃집 소녀의 갑작스런 등장과 퇴장이 그랬고, 줄리아의 무책임한 똥고집과 위험에 대한 무감각증도 갑갑했다. 무엇보다도 살인자의 심리가 확 와닿지를 않았다.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향수에서 주인공은 냄새가 없는 인물이었다. 냄새가 없는 그는 존재감이 없었고 사람들은 그를 인식하지 못했다. 결국 그는 인위적인 향을 제작해서 제 몸에 뿌린다. 이 영화의 살인자도 그와 동질감을 주긴 했으나 좀 약했다는 느낌이다.  

그나저나, 당신의 눈 속에 우주가 있다는 말을 해주는 로맨틱한 남자를 사하라 사막에서 만나는 행운이란, 줄리아처럼 아름다워야 가능한 것일까? 65년생이니 올해 47세라는 소리인데, 같은 여자가 보기에도 매혹적인 몸매에 감탄 또 감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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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1-04-05 14: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마노아님의 이 리뷰 읽기 전까지 (미치겠다) 1인2역인줄 몰랐어요. 그걸 모르고 계속 사라도 줄리아도 몸매가 너무 예쁘다, 그 나라 여자들(멕시코나 스페인으로 혼자 추측)은 다들 그렇게 몸매가 뛰어난가, 종아리가 어쩜 그렇게 둘다 예쁘냐 이러고 다녔는데 동일인물이었군요! 아, 저의 안면인식장애를 대체 어쩌면 좋습니까!

마노아 2011-04-05 14:30   좋아요 0 | URL
저도 얼굴로는 같은 배우인줄 몰랐는데 쌍둥이니까 1인2역일 것 같아서 검색해 봤어요. 배역에 이름 두 개 같이 나오더라구요. 그래놓고 사라의 저 사진을 보니 확실히 줄리아의 몸이에요.^^
저의 안면인식장애도 만만치 않아서... 길치는 사람 얼굴도 잘 못 찾는 걸까요?

프레이야 2011-04-05 14: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급 보고 싶어져요.
'고백'이 지금 젤 보고 싶은데 이 영화까지 보고나면 공포감에 기진맥진할 거 같아요.

마노아 2011-04-05 14:30   좋아요 0 | URL
저도 지금 고백 보고 싶어요. 고백은 다행히 소설을 읽어서 이 영화처럼 겁내면서 보지 않을 수 있을 듯해요.^^ㅎㅎㅎ

다락방 2011-04-05 14: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리고 이웃집소녀의 갑작스런 등장과 퇴장에 대해서는 저는 오히려 더 좋았어요. '보이지 않는다'는 설정은 남자와 같은데 둘이 세상을 보는 방식이 다르잖아요. 소녀는 다다다다 안보이게 뛰어 다니면서 줄리아를 돕고, 남자는 줄리아를 해치려 하죠.
그리고 '보이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서는요, 제 경우엔 그는 '존재감 자체가 약한' 그러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보고 싶은것만 보려고 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런 의미에서 눈에 띄지 않는 인물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향수에서의 그는 향수를 뿌려야 하지만, 이 영화속에서의 그는 그러지 않아도 눈에 띄지 않는 인물이죠. 영화속에서 간병인의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건 줄리아가 그의 얼굴을 보지 못하는 상황이기 때문에 그러는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줄리아가 되어야 그 간병인을 의지하고 사랑을 느낄 수 있게 될테니까요.

목욕탕에서 언니에 대해 엿듣는 씬은 정말 압권이었죠. 누군가 냄새로 다른 사람이 왔다는 걸 알잖아요. 그리고 남자도 있다고 했을 때 소름이 쫙 돋았어요. 어휴. 무서운 영화 ㅜㅜ

마노아 2011-04-05 15:00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의 얘기가 몹시 마음에 들어요. 똑같이 안 보이게 뛰어다니지만 세상을 보는 방식이 다르다는 것!
그 남자의 엄마도 다른 사람들처럼 그 남자를 보이지 않는 것처럼 행동해 왔다는 게 소름 돋았어요. 그의 망가진 인생에 엄마의 책임도 있겠구나 싶었어요.
이 영화 보면서 닭이 될 뻔 했어요. 소름이 어찌나 돋던지요. 어휴...ㅜ.ㅜ

다락방 2011-04-05 15:03   좋아요 0 | URL
이렇게 무서운 얘기를 이렇게 웃기게 하면 어떡해요! 닭이 될 뻔 하다니! 풋-

마노아 2011-04-05 15:29   좋아요 0 | URL
손발이 오그라들지 않고도 닭이 될 수 있었던 신선한 경험이었어요.^^;;;;

후애(厚愛) 2011-04-05 17: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포영화는 패스입니다.^^;; 무서운건 질색이라;;;

마노아 2011-04-05 18:03   좋아요 0 | URL
후애님께는 결코 추천할 수 없는 영화예요.^^;;;
 
파수꾼 - Bleak N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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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고등학생이 스스로 목숨을 버렸습니다. 이유는 모르지만 엄마가 없던 아이였으니 이제 집에 남은 것은 아빠 뿐이지요. 아버지는 슬프고 답답합니다. 아이가 왜 그렇게 가버렸는지 이유를 알 수 없으니까요. 아이의 방에서 친구들과 함께 찍은 사진을 발견합니다. 한 눈에 보기에도 절친한 친구가 두 명 눈에 들어옵니다. 그 친구들을 만나려고 해보니 한 명은 사고가 있기 일주일 전 쯤에 전학을 갔고, 다른 한 명은 학교를 그만 두고 통 보이질 않고 있습니다. 전학 간 친구는 장례식에는 나타났더랬지요. 그 친구의 이름은 희준. 고등학교에 들어와서 아들 기태와 친구가 되었고, 기태가 중학교 시절부터 친했던 친구는 동윤이란 아이인데 이 아이는 왜 갑자기 사라졌을까요. 기태의 죽음에 무언가 관련이 있는 걸까요. 아버지는 어떡해서든 실마리를 찾기 위해서 분주하고, 이제는 연 끊어졌다고 생각하고 살았지만 옛 정을 무시 못해 그 연결고리가 되어주는 희준이가 동윤이를 찾아냅니다. 

 

왼쪽부터 학교 짱인 기태, 중학교 시절부터 친구였던 동윤(짱까지는 아니어도 제법 싸움 좀 하는 녀석 같았습니다.), 그리고 많이 소심한 희준이까지. 

영화는 현재와 과거를 자꾸 오가면서 그들 사이의 이야기를 파고듭니다. 그 장면 전환이 몹시 자연스러워서 하나로 이어지는 것만 같습니다.  

친구네 집에서 밤을 지새우며 놀기도 하고, 여자 친구들과 함께 합동 데이트도 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겨버렸습니다. 사랑의 작대기가 서로에게 통한 게 아니었거든요. 희준이가 좋아한 건 오른쪽 끝에서 두번째 여학생이었는데 이 여자애는 기태에게 마음이 있네요. 기태는 여자 아이의 고백을 거절하고 희준이랑 연결시켜 주려고 나름 애를 쓰지만 희준이는 마음이 불편하기만 합니다.  

남학생들이기에 그렇기도 하거니와 서로의 마음을 표현하는 능력이 거기까지 밖에 되질 못해서 기태와 희준이는 자꾸 삐걱이며 엇나갑니다.      

-이러지 말자.
-뭘?
-미안해.
-뭐가 미안한데?
-이제 그만하자고.
-뭘 그만해?

기태는 미안하다고 말을 하면서 풀어보려고 하지만 희준은 좀처럼 굳어진 얼굴을 펴지 못하고, 그렇게 몇 마디를 주고 받으면 기태는 울컥해서 주먹부터 날립니다. 이러니, 두 사람의 화해는 쉬운 일이 아니지요. 결국 기태를 따르는 친구들과 더불어 집단으로 린치를 가하고 희준은 전학 수속을 밟습니다. 기태는 다시 희준의 마음을 돌이켜보려고, 그들의 우정이 이렇게 끝날 리 없다고 허무한 노력들을 해봅니다. 하지만 희준이 그 마음을 받아줄 리가 없지요. 그동안 쌓였던 악감정들이 한꺼번에 분출되면서 지난 2년 간 쌓아온 우정이라는 이름을 한 순간에 날려버립니다. 기태는 꽤 충격을 받습니다.   

이번엔 동윤이 얘기를 해보지요. 동윤이가 기태와 어긋나기 시작하게 된 것도 여학생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사실 둘 사이에선 상당한 오해가 있었을 거라고 짐작됩니다. 오해였을 것 같지만, 상황이 그렇게 믿어지게 만들었고, 분노는 앞뒤를 모두 잘라내고 중학교 시절부터 누적되어온 우정을 한 순간에 엎어버립니다.  

 

희준이 때와 똑같습니다. 분명 기태가 잘못을 했고, 사과를 했지만 상대방은 풀어지지 못합니다. 극한으로 치달은 감정은 해서는 안 될 말까지 쏟아내게 하고 학교 짱으로 군림하며 주먹과 폭언을 일삼아 온 기태라는 인물을 뒤흔듭니다. 아마 몰랐을 겁니다. 기태라는 아이는 보기와 달리 많이 외롭고 예민하고 섬세한 친구였습니다. 자기보다 안정적인 집과 부모님을 가진 친구들과 달리 위태위태로운 아이였지요. 짱 행세를 하며 친구들과 우루루 몰려다니며 어른들 싫어하는 행동들도 제법 하고 다니는 녀석이지만 그 행동들의 근본에는 언제나 결핍이 자리했습니다. 그렇게라도 자기를 인정해주고 알아봐주고 함께 해주는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우정은 일방적인 게 아니고, 친구라는 것도 결코 폭력 위에서 성립될 수는 없는 것이었지요. 기태는 자신의 진심을 알아차리는 것에 미숙했고, 진심을 표현하는 것은 더 부실했습니다. 키만큼 주먹만큼 성장하지 못한 그 속의 어린아이는 제 생명의 중함과 남겨질 아버지의 슬픔과, 평생 돌덩어리를 짊어지고 살아야 할 친구들의 마음 따위는 읽히지 않았겠지요. 십대 청소년의 예민하고 섬세한 상처와 성장은 어쩐지 여학생의 느낌이 강하건만, 감독은 선입견을 뒤집고 남학생 위에 그 분위기를 씌웠습니다. 더구나 폭력에 길들여져 있는 아이를 내세워서 말이지요. 영화를 보면서 '수컷'이란 단어를 떠올렸습니다. 저렇게 힘으로 제 영역을 표시하고, 그 힘에 복종하고, 그 힘에 기대어서 사는 종족을 말입니다. 동물적 본능과 감정을 잠시 눌러두고 차분히 서로의 말에 귀기울이는 법을 아이들은 배우지 못했습니다. 깨우치지도 못했습니다. 성장 과정과 사회화를 통해서 자연스레 체득되었어야 했는데, 이 아이들에게는 그 기회가 오기도 전에 시련이 너무 빨리 찾아와버렸군요.  

 

배우들이 연기를 참 잘했습니다. 기태 역을 맡은 배우는 28세인데 18세 청소년의 느낌을 잘 잡아냈어요. 영화를 보는 내내 김수현과도 무척 겹쳤는데 프로필을 보니 일일드라마 '세자매'에서 조안의 동생 역을 했던 그 친구군요. 그 순둥이에서 눈빛으로 사람 죽이는 짱 역할을 해내다니 역시 배우의 얼굴은 극과 극을 달리는 신기를 보여줍니다. 오른쪽의 동윤이는 자꾸 안재환을 떠올리게 해서 좀 착잡했습니다.  

기태의 아버지 역할은 조성하 씨였어요. 출연하는지 몰랐는데 첫 장면에서 나와서 무척 흥분이 되었지요. 이 영화는 평이 좋다는 것만 알았지 줄거리는 전혀 몰랐기 때문에 조성하 씨 나온다고 반가워한 게 금방 무색해졌습니다. 내용이 많이 아팠기 때문이지요. 

 

그늘진 아버지의 모습에 이보다 더 어울릴 얼굴이 있을까 싶었습니다. 그래서 사실은 다음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새로운 모습을 보고 싶기도 합니다. 이순재 씨가 야동 순재로 분했을 때의 파격미 같은 것 말이지요. 

다시 아이들 얘기로 돌아가볼까요. 누구나 겪는 성장통이라지만, 누군가에게는 몹시 호된 기억으로 남을 수가 있습니다. 그것조차도 스스로 수습하고 헤쳐 나가야 함을 깨달으며 그 아이들이 어른으로 변해가겠지요. 저도 저만할 때에 친구 때문에 참 힘들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오해 받은 게 억울했고, 진심이 전달되지 않아서 서러웠고, 기대어 위로받을 데가 없어서 또 힘들었습니다. 그래도 시간이 해결해 주는 것이 반이었고, 스스로 이겨내는 게 반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청소년들도 그럴 수 있는지 걱정이 됩니다. 점점 더 이 사회가 각박해져 가고 아이들 안에서도 자본주의와 권력이 금을 그어놓고 있으니까요. 단순 비교로는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졌지만 정서적으로는 훨씬 메말라 있는 이 아이들은 대체 누가 지킬 수 있는 걸까요. 스스로를 지켜낼 수 있는 파수꾼이 될 수 있을까요? 이 아이들이...  

그런 아이들이 점점 많아지는데, 그런 아이들을 점점 방치하는 어른들만 많아지는 것 같아서, 그런 어른에 자꾸 합류해가는 것 같아서 부끄럽고 불편하고 마음이 아픕니다. 참으로, 모두에게 위로가 필요한 세상입니다. 눈물이 더 많아진 세상입니다. 그럼에도 열심히 살아가야 하는, 지켜야 할 게 많은 세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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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건축학개론-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첫사랑이었다.
    from 그대가, 그대를 2012-03-26 23:44 
    서른 다섯 승민은 야근과 밤샘을 밥먹듯하는 건축 사무실에 근무한다. 여전히 밤을 새서 피곤에 찌들어 있던 어느 날, 미모의 여성이 자신을 찾아와 말을 건다. 누구...세요? 하고 묻는 그에게 그녀는 왜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냐는 얼굴로 자신을 소개한다. 스무살 대학 새내기 시절 첫사랑 그녀와 다시 만난 순간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아나운서 시험에 몇 차례 떨어지고 의사 남편 만나서 결혼을 했다던 그녀가 제주도의 고향 집에 집을 짓고 싶다고 건축을 의뢰한다
 
 
후애(厚愛) 2011-03-12 1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 보고싶어요.^^
즐거운 주말 되세요~

마노아 2011-03-12 11:17   좋아요 0 | URL
요즘 괜찮은 독립영화가 많이 나와서 참 즐거워요.
후애 님도 주말 즐겁고 따뜻하게 보내셔요.^^

2011-03-12 11: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3-12 14: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녀고양이 2011-03-12 14: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두에게 위로가 필요한 세상이라는 점 공감합니다.
영화 참 쓸쓸하니 이쁘네요. 독립 영화라서 일산에서 개봉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싶은게 아쉽군요. ㅠㅠ

마노아님은 참 좋은 영화 많이 보셔여. 부럽당~

마노아 2011-03-13 01:05   좋아요 0 | URL
일산이 문화특수가 좋은 동네이긴 한데 상업적으로 치우쳤나봐요. 몹시 아쉬운 부분이에요.
울 동네 정말 외졌는데 다행히 독립영화관이 있어요. 다행이에요.^^;;;

hnine 2011-03-12 16: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난 이런 영화를 보면 어쩔줄을 모르겠어요. 너무 오래가서 보기도 겁날 정도...
여기 대전에선 큰 극장에선 안하고 예술영화만 상영하는 소극장에서 하더군요. 집에서 한시간 걸려 가야하는...ㅠㅠ

마노아 2011-03-13 01:06   좋아요 0 | URL
청소년 이야기에 관심이 많으신 hnine님이라면 잔상이 더 오래갈 것 같아요.
어휴, 그렇게 멀리까지 가야하군요...ㅜ.ㅜ

Mephistopheles 2011-03-13 0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봐야지봐야지 하고 벼르고 있었던 영화...더불어 에니멀 타운도 봐야지 봐야지 하고 있는 영화.

마노아 2011-03-13 16:39   좋아요 0 | URL
아, 그 영화는 소재가 너무 무거워서 쉽게 도전이 되질 않네요..ㅜ.ㅜ

순오기 2011-03-15 14: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수꾼이 이런 영화였군요~ 우리 동네 영화관에 걸리려나??

마노아 2011-03-15 14:33   좋아요 0 | URL
알라딘 입소문으로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영화 참 괜찮았어요.^^

꿈꾸는섬 2011-03-15 2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수꾼, 얘긴 들었는데 내용은 전혀 몰랐거든요. 마노아님 글 읽고나니 마음이 짠하네요.
독립영화라 우리 동네 상영관에선 볼 수 없겠어요.ㅜㅜ

마노아 2011-03-15 23:38   좋아요 0 | URL
독립영화 중에는 꽤 대중적인 느낌으로 만들었는데 다양한 곳에서 상영이 되질 않아서 안타까워요.
여러모로 짠한 우리 아이들이에요...
 
블랙 스완 - Black Swan
영화
평점 :
상영종료


 며칠 전에 종영된 드라마 '드림 하이'에서 송삼동은 그런 얘기를 한다. 최고의 자리에 서는 것은 멋진 일이지만 그만큼 외로운 일일 거라고. 아마도 많은 사람이 동의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또 동의할 것이다. 그 외로움을 감수하고서라도 최고가 되고 싶다고... 

  

여기, 그 최고의 자리에 서고 싶어하는 인물이 있다. 성실한 발레리나인 니나.  그녀는 하루종일 발레만 생각하고 발레 꿈을 꾸고, 발레를 중심으로 모든 것이 돌아간다. 동료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 수다를 떨 때도 니나는 늘 혼자였다. 몸을 풀어주고 어떻게 하면 더 춤을 잘 출 것인지만 고민한다. 소심하고 순종적이고 착해보이는 니나는, 그래서 새로 올릴 무대 백조의 호수에서 '백조'의 역할엔 어울리지만 '흑조'의 역할을 함께 소화해내기는 무리로 보였다. 단장 역시 그런 사실을 알아차리고 니나를 배역에서 떨어뜨리지만 어느 순간 니나가 보인 배역에 대한 집착과 그로 인한 공격성에 흑조로서의 가능성을 기대하며 주인공 자리에 발탁한다.

 

니나는 신이 났다. 최고로 행복했다. 그 행복한 순간을 엄마와 함께 나눴다. 엄마 역시 발레리나였었고, 니나를 임신하면서 발레를 그만두기는 했지만 발레에 대한 열정은 아직 식지 않았다. 딸의 아침부터 저녁까지를 돌봐주고 몸 상태를 체크하고 힘이 들때 용기를 북돋아주는 그런 멋진 엄마였다.  

주인공 자리를 거머쥐었지만 니나의 고민은 사라지지 않는다. 늘 순종적인 모습만을 보여왔던 니나로서는 거칠고 반항적인, 압도적인 카리스마를 뿜어내는 흑조의 연기가 나오질 않았던 것이다. 경험해 보지 못했고 상상해 보지 못했던 그 세계는 니나의 현실에서 지극히 멀었다.  

 

왕년의 프리마돈나로서 이제는 은퇴의 길을 걷게 된 선배 베스의 모습은 니나를 더 불안하게 만든다. 한때 청춘스타의 대명사였던 위노나 라이더를 영화를 보는 동안은 알아보지 못했다. 뒤늦게 자막으로 확인한 뒤 그게 위노나였단 말인가! 충격 한 방. 위노나 라이더는 배역에 딱 어울리는 모습으로 분했다. 훌륭한 배우라면 자신을 통해서 퇴락한 스타의 이미지라도 제대로 보여줘야 했겠지. 그것이 현실처럼 아플지라도... 

불안과 초조에 휩싸인 니나는 자꾸 제 몸에 상처를 낸다. 그리고는 그 상처가 자신에 의해서 발생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동료 릴리는 자유분방한 여자로 니나와는 정반대의 성격. 자신의 대타 배역을 맡고 있는 그녀가 제 자리를 빼앗아갈 것 같아 니나는 극도의 스트레스와 공포에 휩싸인다.   

연출이 훌륭했던 것은 순간순간 니나에게 엄습해 오는 검은 그림자의 모습을 니나의 모습으로 투영했다는 것이다. 백조이면서 흑조의 역할을 동시에 감당해야 하는 니나에게 극복해야 할 또 다른 인물은 바로 자기 자신!

영화가 스릴러라는 것을 알고 보았지만, 이 영화는 스릴러라고만 부르기엔 부족하고, 거의 호러 수준의 공포감을 보여준다. 우아하고 아름답기만 하던 클래식 선율도 어느 순간 숨을 죄어오는 압박으로 변신하고 백조와 흑조의 완벽한 일체감을 보여준 나탈리 포트만의 신들린 연기도 관객에게 어마어마한 긴장감을 선사한다. 영화를 다 보고 일어설 때는 목이 뻣뻣해져 있을 정도로...

 

워낙에 왜소한 체구에 말라깽이긴 했지만 발레리나로 분하기 위해서 무지막지한 연습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 대역을 쓰긴 쓴 것인가 싶을 만큼 발레 연기가 자연스러웠는데 내가 발끝으로 서 있다고 착각할 만큼 아찔함을 많이 느꼈다. 이 영화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도 거머쥐고 연기 인생의 큰 획을 그은 것은 분명해 보이는데 사실 조금 걱정스러웠다. 이렇게 강렬한 배역을 소화하고 나면 정신과 치료를 같이 받아줘야 하는 것은 아닐까 싶어서 말이다. 이은주가 죽었을 때 그녀가 맡았던 심상찮던 배역들에 대한 얘기가 많았었다. 알아서 잘 하겠지만, 이런 우려가 들만큼 작품의 배역이 흡인력 있고 그 이상으로 무서웠다.  

이런 종류의 스트레스를 감당해 내고서 최고의 자리에 우뚝 서게 되는 걸 테지만, 혹 그로 인해 피폐해지는 영혼으로 천재들이 단명해 왔던 것은 아닐까 상상해봤다. 악마와 거래를 해서라도 성취하고 싶은 예술적 열망과 광기는 이해가 되기도 하지만 그 이상으로 무섭게 다가온다. 평범한 사람의 상식 선에서는 버거운 금단의 열매다. 

영화 속에서 니나의 엄마가 참 인상적이었다. 처음에는 아주 따스하고 힘이 되어주는 엄마였었는데 어느 순간 그 엄마가 무섭게 보이기 시작했다. 엄마에게는 두 가지 마음이 존재하지 않았을까. 자신이 도달하지 못한 꿈의 경지에 딸이 대신 서주길 바라는 대리 심리와, 자신이 가지 못했던 그 정상의 자리에 딸이 서는 것에 대한 두려움 말이다.  

권정생 선생님의 '한티재 하늘'에서 보면 아들을 낳지 못했던 엄마가 딸이 아들을 낳자 부럽다 못해 몹시 배아파 하는 장면이 나온다. 니나의 엄마는 나이를 먹고 아기를 가지면서 발레를 그만두었지만, 어쩌면 그걸 핑계삼아 자신의 한계를 감췄을지도 모르겠다. 너 때문에 내가 희생되었다. 너를 위해 나는 헌신해왔다!라는 주문으로 딸을 압박해오지 않았을까? 의도했든, 그렇지 않든 간에 말이다. 점점 망가져가는 니나를 걱정하는 마음도 진심이고, 니나가 무대에 서는 것을 막고 싶은 마음도 진심이 아니었을까. 배우의 이름은 모르겠지만 엄마 역을 맡은 분의 연기도 탁월하게 훌륭했다. 정말, 무서웠다.

단장 역을 맡은 뱅상 카셀도 훌륭했다. 모니카 벨루치가 겹쳐보이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주어진 배역의 얼굴에 딱 맞는 옷을 입었더랬다. 적당히 느끼하고, 탐욕스럽고, 그러나 사람 보는 눈은 정확한, 그래서 더 밉고 고약한 단장 역할 말이다. 

나의 공주님 소리를 듣는 순간 힘이 빠졌다. 완벽을 재현해 보였고, 완벽함을 온 몸으로 느꼈지만 그래서 진정 행복해졌을지... 

포스터도 훌륭하다. 강렬한 눈빛과 균열이 가버린 얼굴에서 쪼개진 니나의 영혼이 보인다. 백조와 흑조의 완벽한 일치. 나탈리 포트만, 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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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1-03-03 08: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니나가 처음 백조에만 어울릴 수 있었던 건 전 엄마의 영향이 크다고 생각했어요. 엄마는 수시로 니나에게 '착한 딸' 이라고 하잖아요. 그 말은 니나에게 압박이 되었을거에요. 나는 착한 사람이다, 착한 딸이다, 착한 여자다, 착하게 행동해야 한다, 는 식으로 말이죠. 만약 예쁜 딸이라고 했다면 니나의 흑조는 조금더 빨리 세상으로 나타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도 했어요. 어릴때부터 그렇게 키워져서 니나는 자신 안에 갇혀있었고 또 엄마 안에 갇혀있었죠. 저는 그래서 부모의 역할이란게 참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또 그래서, 잘 해내기가 결코 쉽지 않으리라고도 생각하구요.

마노아 2011-03-03 13:16   좋아요 0 | URL
맞아요. 부모의 역할이 참 커요. 게다가 니나는 극 속에서 아빠가 등장하질 않아서 엄마의 절대적 영향 하에 컸을 거라고 짐작해요. 치명적으로 아름답고 치명적으로 무서운 영화였어요. 흑조의 피날레 무대에서 그림자의 무시무시한 날개도 압도적이었고요.
저 간밤에 다락방님 꿈 꿨어요.
다락방님이 따라쟁이님 만나러 프랑스에 갔는데 저도 그 다음주에 프랑스로 만나러 가겠다고 꿈에서 그랬어요.ㅎㅎㅎ

다락방 2011-03-03 14:11   좋아요 0 | URL
하하하하 마노아님. 내가 예전부터 말하고 싶었는데요, 마노아님 내 꿈 너무 자주 꾸는거 아니에요? 응? 좀 자제해봐요! 하하하하하

마노아 2011-03-03 22:05   좋아요 0 | URL
그러게 말예요. 다락방님이 내 안에 있어요.ㅋㅋㅋ

따라쟁이 2011-03-03 1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오늘! 봅니다. 물론 이렇게 멋진 리뷰를 쓸 자신은 없지만.

마노아 2011-03-03 13:17   좋아요 0 | URL
재밌게 보고 오셔요~ 좀 무섭지만 잘 만든 영화라고 생각해요.
간밤 꿈에 따라쟁이님이 나타났어요. 무려 프랑스에 가 계시더만요! ^^ㅎㅎㅎ

따라쟁이 2011-03-04 09:25   좋아요 0 | URL
저는 무려. 마노아님의 꿈에 간거죠 ㅎㅎㅎ

마노아 2011-03-04 10:13   좋아요 0 | URL
그렇습니다. 게다가 부지런히 프랑스도 가 계셨습니다.ㅎㅎㅎ

무스탕 2011-03-03 2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내일! 봅니다. 물론 이렇게 멋진 리뷰를 쓸 자신은 없지만.

재밌게 보고 올게요~ 좀 무섭다 하셨지만 잘 만든 영화라 믿습니다.
간밤 꿈에 전 나타지 않았던가요? 저도 무려 프랑스에 가 있었으면.. ^^ㅎㅎㅎ

마노아 2011-03-03 22:05   좋아요 0 | URL
헤헷, 무스탕님표 리뷰도 기다릴게요~
제가 꿈에서라도 무스탕님을 유럽 여행을 보내드려야 할 텐데요. 노력해 보겠음돠!!ㅎㅎㅎ

토토랑 2011-03-04 18: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 보고 싶군요 >.< 리뷰보고나니 완전 땡기네요

마노아 2011-03-04 23:21   좋아요 0 | URL
헤헷, 보고 오셔요~ 괜찮은 영화였어요.^^

순오기 2011-03-06 0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도 이거 봤어요~ 한번 더 보고 싶을만큼 혹했어요.

마노아 2011-03-06 15:02   좋아요 0 | URL
스릴러 좋아하시는 순오기님의 레이더를 피해갈 수 없어요. 무섭진 않았나요? ^^

순오기 2011-03-06 19:55   좋아요 0 | URL
마지막 릴리와의 한판 승부는 정말 무섭던걸요~~~~~ 결국 자기 자신이었지만...

마노아 2011-03-07 00:40   좋아요 0 | URL
엄마도 순간순간 무섭고, 나탈리가 분한 도발적인 흑조도 무섭고, 어휴... 좋았는데 두번 볼 자신이 없어요.^^ㅎㅎㅎ
 
만추 - Late Autumn
영화
평점 :
상영종료


내내 기다리던 전화를 받았는데 결과가 좋지 않았습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었지만 그럼에도 울적했습니다. 뭔가를 해야할 것만 같았어요. 그래서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영화 한 편 보자고. 귀차니즘의 절정 속에서 일주일에 하루만 외출하고, 그 날에 모든 걸 한꺼번에 해결하곤 했던 친구는 나오기 싫어 갖은 애를 쓰다가, 결국 나와 함께 이 영화를 봤습니다.  

안개가 자욱한 배경에 어찌 보면 내용도 가라앉는 편인 이 영화는 우울한 날에 보기에 적당하지 않을 지도 몰랐습니다. 더 가라앉으면 어떡하지 고민도 했는데, 뜻밖에 영화를 다 보고 나서는 어쩐지 위로가 되는 기분이었습니다. 애나와 훈 덕분이었지요. 

 

애나는 살인죄로 7년을 감옥에서 형을 살다가 어머니의 죽음으로 3일 간의 짧은 외출을 하게 됩니다. 시애틀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그 남자, 훈을 만납니다. 사랑을 파는 남자 훈은 고객의 남편으로부터 쫓기는 형편이었지요. 버스비가 부족했던 그는 동양인 애나에게 버스비 30달러를 빌립니다. 갚지 않아도 된다는 그녀에게 굳이 시계를 맡기며 전화번호도 남기지요. 꼭 갚겠다면서요. 하지만 애나에겐 이 남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오랜만에 마주친 세상은 어렵고 막막하고 먹먹합니다. 가족들도 마찬가지였어요. 우르르 몰려왔다가 우르르 사라져버리는 가족들. 그들도 어떤 말을 해야할지 알지 못합니다. 집밖에서는 한때 목숨도 내줄 수 있을 것 같던 옛 연인과 마주칩니다. 그때도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모릅니다. 그 역시 마찬가지지요. 해야 할 말들을 서로 하지 못하고 듣지도 못했습니다.  

애나는 다시 거리를 걷습니다. 쇼핑도 했지요. 절대 속을 보이지 않을 것처럼 온몸을 덮었던 코트를 벗어버리고 여성스러운 옷을 걸쳐봅니다. 오래도록 사용하지 않아서 막혀버렸을 귀에 억지로 귀걸이를 끼우고, 창백한 얼굴과 다크 써클을 덮는 하얀 분칠에 붉은 입술로 마지막을 장식하지요. 하지만 잠깐의 변신은 금세 막을 내려버립니다. 수시로 체크하는 교도소의 호출. 수감번호와 현재 위치로 모든 것이 설명되어지는 현실세계로 다시 돌아온 거지요. 부질없음에 다시 입었던 옷으로 갈아입은 애나는 어머니의 장례식도 치르지 않고 돌아갈까 고민합니다. 표를 살까 말까 괜히 공회전하는 발걸음이 안타깝습니다. 그렇게 거리를 서성이던 애나가 다시금 훈과 마주칩니다.  

사랑을 파는 남자 훈은, 직업 정신을 발휘해 애나에게 즐거운 하루를 선사해 주고자 애씁니다. 고객이 만족할 때까지의 무한 서비스지요.  

 

영화 속에선 보지 못했던 것 같은데 아마도 입에 문 저것은 오리 꽥꽥!의 정체가 아닐까 싶군요. 저 버스 안에서만큼은 남의 눈치 볼 것 없이 즐겁게 구경도 하고 감탄도 하고 어리광도 부릴 수 있을 것만 같았지요. 공사중이라 문닫힌 놀이공원에서도 훈은 애나를 즐겁게 만들어주었어요. 입을 떼기까지 시간이 걸렸지만 마침내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를 꺼낼 수 있었으니까요. 훈이 아는 중국어는 '하오' 하나였지요. 좋다는 뜻이에요. 그리고 애나에게 좋지 않다라는 뜻의 '화이'라는 말도 배웁니다. 애나는 자신의 과거를 중국어로 얘기합니다. 훈은 알아들을 수 없지만 적당히 하오/화이로 추임새를 넣지요. 어이 없는 곳에서 화이가 나오고 엉뚱하게 하오가 나오기도 하지만 애나는 한결 편안해집니다. 창백한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서립니다. 그리고 그녀는 이제 엄마에게 갈 수 있게 됩니다.  

 

엄마 앞에서 그녀의 표정은 전에 없이 밝고 순수해집니다. 일어날 수 없고 대답할 수 없는 엄마이기에 무슨 말이든 할 수 있고 그편이 지금의 애나에겐 더 편할 것도 같습니다. 조금만 디테일에 더 신경을 써주었으면 했던 아쉬운 실수가 이 장면에서 나오지만 그 정도는 슬쩍 눈감아줘도 될 것 같습니다. 지금은 애나의 감정을 따라가는 게 더 중요하니까요.  

다음날, 엄마의 장례식이 진행됩니다. 애나가 돌아가야 하는 날이기도 하지요. 장례식장에 뜻밖에 훈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화제의 '포크' 장면이 나오지요. 대사만 생각하면 사실 웃음이 터져나옵니다. 센스 있는 한 마디 대응이 몰고 온 파장은 그러나 매우 컸습니다. 억눌려 있던 애나의 가슴을 열어주었으니까요. 자연스럽게 관객들은 웃음을 뱉지만 애나의 감정을 못 느끼는 것은 아닐 겁니다. 웃지만 애잔한 마음으로 그 떨림을 지켜보게 됩니다. 그 곁에 훈이 있어서 참 다행이란 생각과 함께 말이지요. 어느 곳에선, 언제든... '미안해'라는 한 마디는 참 중요해 보입니다. 짧은 그 한마디가 해줄 수 있는, 해낼 수 있는 역할이 참으로 크건만, 해야 할 때 하지 못하는 미안해는 더 큰 미안함과 설움을 불러오곤 하지요.  

 

현빈은 인터뷰에서 훈은 몸을 파는 남자가 아니라고 분명히 말을 합니다. 극중 훈은 아마도 그런 마음으로 일을 하는 듯 보입니다. 그는 자신의 고객들에게 최선을 다해 서비스를 제공했습니다. 이야기를 들어주고, 에스코트를 해주고, 따스함을 나누지요. 물론 거기에는 물질적 대가가 따라오기 때문에 그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의 생업을 순수하게 인정해주는 이는 드물 겁니다. 당연히 위험 부담도 크겠지요. 자신의 앞날도 예측할 수 없는 그가, 그럼에도 위험한 약속을 합니다. 지킬 수 있을지 누구도 장담하지 못하지만 그 보장 없는 약속 한 마디가 한 여인에게 줄 수 있는 힘을 알고 있던 거지요. 애나도 마찬가지입니다. 영화가 시작하면서 울렸던 그 사이렌 소리를 돌이켜 볼 때, 그녀는 이미 어떤 전조를 읽었을 겁니다. 그럼에도 희망과 기대를 품어보는 약속은 그녀에게 생기를 제공해 줍니다.  

마지막에 그녀 앞에 놓인 커피와 스콘은 이제까지의 분위기에 비해서 밝고 달콤한 선택이었지요. 비록 한입도 대지 못했지만 입을 떼었을 때 그녀에게서 나온 말은 그녀에 대한 관객의 걱정을 덜어줍니다.  

 

현빈의 연기가 모자랐던 것은 아니지만 영화는 철저히 애나의 감정선을 중심으로 진행됩니다. 그래서 아무리 빛나는 비쥬얼의 현빈이라 할지라도 탕웨이가 더 빛나보입니다. 무심하고 건조한 표정의 그녀이건만 오히려 응축된 에너지와 삶의 기둥이 느껴집니다. 작품 속 탕웨이는 정려원과 이요원을 섞은 듯한 얼굴인데 주변에서 동의해 주는 사람이 없네요. 나만 그렇게 보이는 걸까요? ^^ 

벌써 네번째 리메이크고 원본 필름도 사라진 상황이지만 이국을 배경으로 서로 다른 국적의 두 사람을 주인공으로 쓴 건 감독의 현명한 선택으로 보입니다. 이렇게 괜찮은 영화를, 그것도 제목이 무려 '만추'이건만 부산 국제 영화제 직후 상영관을 구하지 못해 개봉일이 늦춰졌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결과적으로 시크릿 가든의 성공으로 관객 몰이를 더 하게 된 것은 또 다른 아이러니이기도 하지만요.  

여백이 많은 영화였는데 그렇다고 말을 아낀 영화도 아니었습니다. 아마도 자욱하게 깔린 안개와 온몸으로 스며들 것 같은 물기가 영화의 분위기를 잡고 있어서 그리 느낀 것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칫 무거울 법도 하건만 무겁지 않게, 또 지나치게 경박하지도 않게 중심을 잡아준 배우들과 감독의 힘에 박수를 보냅니다. 맥락도 없이 위로받은 느낌을 갖게 한 것도 고맙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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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쟁이 2011-02-25 16: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제목이 무려 '만추'였는데 말이죠.
저는 빗소리랑 구둣소리가 참 좋았어요. ^^

마노아 2011-02-25 17:36   좋아요 0 | URL
영상도 음악도 배우들도 참 좋았어요. 여운이 오래 남아요.^^

다락방 2011-02-26 0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난 보조개 들어가는 수술 하고 싶어졌어요. ㅜㅜ

마노아 2011-02-26 01:17   좋아요 0 | URL
보조개는 안면근육 운동으로 안 만들어지는 거겠죠?
문득 보조개는 왜 생기는지 궁금해졌어요.(>_<)

... 2011-02-26 01:25   좋아요 0 | URL
보조개는 진정 조물주의 근사한 선물임을 깨닫게 되더군요.

안면근육운동 ㅠㅠㅠㅠㅠㅠㅠㅠㅠ

마노아 2011-02-26 01:44   좋아요 0 | URL
오오, 조물주의 선물이란 말입니까?
저 어깨 으쓱하면 누군가 웁니까? ㅎㅎㅎ

마녀고양이 2011-02-26 1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상하게 이 영화 보고 싶지 않았거든요, 하두 매스컴에서 떠들어서 그랬나봐요.
그런데 리뷰들을 하나둘씩 보다가, 결국 마노아님 리뷰에서 털썩 넘어갑니다. ^^
다음주 코알라 개학 후에 보러 가야겠어요. 만추랑, 당신을 사랑합니다랑, 블랙 스완이랑..
어느걸 먼저 봐야할지 고민되네요.

마노아님, 다음주에는 기쁜 소식 가득하리라 생각합니다. 쪼옥~

마노아 2011-02-27 10:27   좋아요 0 | URL
저는 언론보다 알라디너 별점이 더 신경쓰였어요.^^ㅎㅎ
그대를 사랑합니다는 원작을 보는 걸 더 추천해요. 아무래도 원작의 감동을 못 따라가더라구요.
원작을 보지 않았다면 영화도 그럭저럭 괜찮지만요.^^
저도 이번주에는 블랙 스완을 봐야겠어요. 신들린 연기를 만나지 싶어요.
기쁜 소식 들려오면 꼭 전하겠습니다. 감사해요~^^

송도둘리 2011-02-26 1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가장 재밌게 본 영화 중에 하나네요. 만추. '탕웨이는 정려원과 이요원을 섞은 듯한 얼굴.' 저는 동의합니다. 그런데 정려원이나 이요원씨보다 훨씬 매력적인 것같아요. 탕웨이라는 배우는.^^; '이렇게 괜찮은 영화를, 그것도 제목이 무려 '만추'이건만 부산 국제 영화제 직후 상영관을 구하지 못해 개봉일이 늦춰졌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이건 처음 알게 된 사실이네요. 정말 우째 이런일이!!

마노아 2011-02-27 10:28   좋아요 0 | URL
맞아요. 저도 탕웨이가 더 매력적으로 다가오네요.
상영관 소식은 같이 영화 본 친구가 얘기해줬는데 저도 깜놀했어요.
세상에나, 네상에나....!!

비로그인 2011-02-26 2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를 보고나서는 느슨하고 헐렁한, 봄과 가을에 입을 수 있는 니트 카디건을 샀어요. 그런 걸 입고 안개 자욱한 길을 걷고 싶었습니다. 옆에 사랑하는 남자 손을 잡고.

마노아 2011-02-27 10:28   좋아요 0 | URL
어울려요! 그 분위기를 옆에서 훔쳐보고 싶어요. 지금 이 사진처럼 슬쩍만이라도 보여줬음 좋겠어요.^^

순오기 2011-02-27 05: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현빈이 대세인가요?^^
김혜자, 정동환 주연의 만추와 비교해보는 것도 좋을 듯한데... 심야로 봐야겠어요.^^

마노아 2011-02-27 10:29   좋아요 0 | URL
울엄니는 60년대 오리지널을 보셨다고 해요.
김혜자씨가 찍었을 때 이미 마흔을 넘긴 나이였던데 어떤 분위기로 나왔을지 궁금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