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장각 각신들의 나날 1
정은궐 지음 / 파란(파란미디어)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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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을 발칵 뒤집어 놓았던 반궁의 잘금 4인방이 나란히 과거에 급제했다. 동생의 이름을 빌려 활동하던 윤희로서는 외관직을 원했지만 임금은 그들 4인을 모두 규장각에 붙들어두고 싶었다. 하지만 신하들의 반대가 만만치 않다. 규장각의 존재 자체도 껄끄러워 하는 그들이기에 당색을 초월한 4인을 그것도 한꺼번에 넷 씩이나 들이는 것을 찬성할 리가 없다. 반대가 만만치 않을 것을 아는 임금이 선수를 친다. 그들이 통과할 수 없을 만큼 어려운 신참례를 열라는 것이다. 말인즉슨, 무시무시한 신참례를 통과한다면 두말 않고 받아들이라는 얘기다. 게다가 하나를 내치려면 넷 모두를 다 버리라고 하니 이선준 같은 인물을 눈독 들이는 관청에서는 울며 겨자먹기로 4인 모두를 접수해야 했다.  

신참례 얘기가 가장 길게 나왔기에 먼저 언급하긴 했지만 다섯 꼭지의 소제목 중 네번째 주제였다. 시작은 윤희와 이선준의 혼례일부터 시작한다. 드라마에서는 무려 이선준의 아비가 직접 윤희를 불러 아들을 부탁하는 장면이 연출되었지만 언감생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선준은 아버지에게 윤희가 곧 윤식임을 알리지 못했고, 신혼 초야는 용하와 재신의 깜짝 방문으로 치르지 못했다. 게다가 꼭꼭 숨겨두었던 동생 윤식의 얼굴까지 노출되었으니 윤희의 걱정은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들이 자신이 이미 여자라는 것을 안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지난 이야기에서는 '김윤식' 이름 세 글자의 주인공이면서도 지나가는 행인 정도의 비중만 보였던 윤식이 규장각 각신들의 나날에서는 제법 대사가 늘었다. 건강도 많이 좋아져서 누이의 알바 행렬에 동참도 하고 로맨스도 싹틀 모양이다. 반갑다.  

한편 재신은 도둑장가를 간다. 본의 아니게 아버지 때문에 후다닥 치른 혼사였는데 그 신부라는 게 열네 살 어린아이였다. 반다운이라는 이름을 가진 새신부는 열살 남짓으로 보이는 인상으로 너무 작아 '반토막'으로 불린다. 가슴 속엔 윤희를 품은 재신이 장가를 갔으니 그 속이 오죽 끓었을까. 장가간 다음 날 처음 마주친 반다운을 일하는 어린 종으로 본 그가 다운에게 보여준 선심은 참 예뻤다. 거친 야생마에 입도 저렴하기 그지 없지만 그 속의 사내 재신은 참 따스하다. 그와 판박이인 아버지는 재미날 게 없는데 형님을 잃은 충격으로 정신줄을 어느 정도 놓은 재신의 어머니 캐릭터는 참 재밌었다. 느릿한 말투에 상대를 무장해제시키는 언어기술도 갖고 있다. 너무 어린 신부를 데려다 놓은 것에 뒤늦게 재신과 아버지가 반발하자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열......네 살이었구나. 그래, 열네 살이었어. 어여쁠 때지. 어린애가 아니야. 나도 열네 살에 시집왔는 걸."
"대신 그때 아버지는 열세 살이었잖아요. 전 스물네 살이라고요!"
"음......, 스물다섯 살 처녀는 구할 수 없단다, 얘야."                             -195쪽

으하하하핫! 어머니 완전 멋지시다. 재신이 당할 수가 없다.

새로운 여인도 등장했다. 윤희의 글쓰는 속도가 엄청 빠르다는 얘기는 앞서서도 나왔는데 그 필체도 아름답다는 게 자주 강조된다. 그리하여 글씨에 유독 집착하는 남인 황판교의 눈에 뜨였다. 황판교의 여식 황서영은 제법 당당하고 우아한 양반댁 규수로 보인다. 자신의 궁핍한 처지를 내세워 중매를 거절하는 윤희에게 그녀의 답이 현명하다. 

"사람이 궁핍한 것보다는 처지가 궁핍한 것이 더 낫지 않겠습니까?"   -253쪽 

임금의 모험도 즐거웠다. 신참례 때 궐을 내질러 가야 하는 4인방을 위해 직접 버선발로 길안내도 하고 담을 넘어야 하는 재신에게 어깨도 빌려준다. 그러나 그런 그도 윤희를 보는 속내가 곱지 않다. 여인을 믿지 못하는 본심이 안타깝지만, 그것이 주인공 윤희를 향한 것이라고 생각하니 안타깝다. 결국엔 왕조차도 그녀의 진가를 인정하고 말리라는 것을 의심치는 않지만... 

4인방의 캐릭터들도 여전히 뚜렷했다. 똥냄새 나는 거름더미 곁에서 백성을 생각하며 묵묵히 밥을 먹자고 얘기하는 선준의 마음가짐도 좋고, 아무리 긴박한 상황이라도 제가 대신 위험해지겠다고는 결코 말하지 않는 구용하의 캐릭터도 한결같아서 좋다. 약삭빠른 인물이지만 그 빠르게 돌아가는 머리를 제때에 활용할 줄 아는 것도 반갑다. 모두가 자신의 성격을 잘 살려서 매력을 두배로 발산시키고 있다.  

직접적으로 내세우진 않았지만 은연중 문체반정과 호락논쟁까지도 등장했다. 작가의 이야기 얽고 엮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이야깃거리가 많은 시대 배경이지만 주인공들로 인해 그 시대가 더 빛나 보인다.  

자, 다음 편에서는 홍벽서를 까무러치게 만든 청벽서의 활약을 좀 더 지켜봐야겠다. 어떤 인물일지 몹시 궁금하다. 소문으로는 청나라 사신 이야기를 쓰고 있다던데 정말인지 모르겠다. 이번 이야기에서 청 사신이 4인방에게 몹시 호감을 가져버렸으니 청나라 사신으로 간다고 해도 이야기에 전혀 무리가 없겠다. 이래저래 기대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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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쟁이 2011-03-08 16: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고스란히 꽃혀 있으나, 잘 안읽혀요.. 한번 읽어볼까요? ㅎㅎㅎ

마노아 2011-03-08 20:14   좋아요 0 | URL
저는 두번 읽을 것 같진 않은데 그래도 읽는 동안은 무척 즐거웠어요.
특히 2권 읽을 때는 수영장에서도 내내 생각이 나서 빨리 읽고 싶어 혼났답니다.^^
 
1월 0일
바르트 무이아르트 지음, 한경희 옮김 / 낭기열라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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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독특했어요. 12월 32일은 (노래로) 들어봤는데 1월 0일은 처음이었거든요. 원제는 '맨손'이래요. 그러고 보니 표지의 하얀 빛은 바로 맨손이었군요. 다시금 바라봅니다. 1월 0일이라고도 불린 맨손을요. 

두 소년이 나옵니다. 바르트(작가의 이름이기도 하군요!)와 베니. 두 아이는 쫓기고 있습니다. 때는 새해를 코앞에 둔 12월의 마지막 날. 게다가 해도 저물었어요. 춥고 두렵고 위험합니다. 쫓아오는 어른은 베트예만. 그는 한쪽 팔이 플라스틱으로 되어 있는 무지막지한 어른으로 묘사되어요. 아이들은 대체 왜 쫓기고 있는 걸까요. 누가 아이들을 해하려는 건지, 아님 아이들이 무슨 잘못을 저지른 건지 처음엔 알 수가 없습니다.  

동물도 나옵니다. 오리와 개. 오리는 아이의 손에서, 그리고 개는 어른의 손에서 죽습니다. 서로에게 소중한 존재가 상대방에 의해 죽어버린 거지요. 그래서 지금 아이들은 쫓기고 있고, 한 어른은 쫓고 있는 겁니다. 당장 내일은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는데, 이들은 한 해의 마무리를 이렇게 무시무시하게 치르고 있었어요. 대체... 누구 잘못일까요? 

작품의 시간적 배경은 앞서 말했듯이 12월의 마지막 날입니다. 한적한 시골 마을인 것은 알겠는데 날짜 외에는 어느 시간대인지 모르겠어요. 성냥불을 그어서 렌지에 불을 붙인다고 나오니 아주 옛날도 아니지만 요즘도 아닌 것 같아요. 느낌 상으론 우리네 석유곤로 피우던 그런 배경이랄까요? 아무튼 해는 이미 저물었고, 날은 춥고, 아이들은 지쳐 있고, 게다가 상처 받았습니다.  

아이들은 처음부터 베트예만 아저씨의 오리를 상하게 할 생각은 없었다고 했어요. 그런데, 정말 그런 생각이 없었을까요? 오리를 높이 던져버렸는데... 날지 못하는 오리를 높다랗게 던져서 떨어뜨렸는 걸요. 받아줄 생각이었다지만, 애초에 오리를 던지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을요. 아이들은 왜 죄없는 오리에게 화풀이를 했을까요? 거기엔 또 다른 사연이 숨어 있었습니다. 일주일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크리스마스 날 밤의 저녁 식사 말입니다.  

어떤 사건의 원인을, 까닭을 짚어나가다 보면 거기에 해당되는 어떤 이유들이 분명히 존재합니다. 아이가 화가 난 이유, 아저씨가 화풀이를 한 이유, 아이가 미워하는 이유가 모두 말입니다. 하지만, 하지만 말이죠. 화가 난다고 해서 아이를 손찌검 하면 안 되는 것처럼, 화가 난다고 해서 남의 집 오리를 던져서는 안 되었어요.  자기집 오리라고 해도 마찬가지죠. 내 오리가 죽었으니까 너의 소중한 개를 죽이는 것도 당연히 안 되는 일이었어요. 당신이 아이이든 어른이든, 당신이 상처를 받았든, 오래오래 외로운 사람이었든... 그것은 이유가 되지 못하는 겁니다.  

또 네가 아무리 어리다고 해도, 네가 싫어하는 사람이라는 이유로 장애를 가진 사람에게 또 다시 같은 비극이 일어나서 하나밖에 남지 않은 팔마저도 못 쓰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해서는 안 되는 거였어요. 철없는 아이의 즉흥적인 생각이라도 그런 건 생각도 하지 말고 입밖에 내서는 더 안 되었어요. 어리고 무지하다는 게 언제나 모든 일의 방패가 되어주지는 않아요. 좀 더 자라서 자신이 내지른 행보의 의미를 깨달을 때가 되면 더 많이 부끄러워질 거예요. 돌이킬 수 없기 때문에 더 아파질 겁니다. 세상에는 그렇게 어떤 일의 절대적 이유가 될 수 없는 일들이 분명히 있는 법이거든요. 

한 명은 칼로, 한 명은 맨손으로 공통의 원수를 손봐주기로 아이들은 결심합니다. 살려주는 대신 '벌'은 주어야 한다나요. 맙소사. 이 아이들을 어쩌면 좋을까요. 게다가 그 명분을 죽은 개 엘머를 위해서라고 갖다 붙입니다. 폭력은 필연적으로 비겁함을 동반하지요.  

확실히 사랑하는 개 엘머를 잃은 바르트는 좀 더 주저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이쪽이 베트예만 아저씨와의 은원이 직접적으로 쌓여 있으니 동기도 더 가깝지만 그래서 냉정해질 수 없습니다. 아이의 외투 속에는 차갑게 식은 엘머가 품에 갇혀 있고, 아이는 충분히 지쳐 있습니다. 신발의 한 켤레 같은 단짝 친구지만 베니의 장단을 제 속도로 맞춰줄 수가 없어요. 반면 베니는 좀 더 그 시간에 몰입되어 있습니다. 혹시 이것을 하나의 '모험'으로 생각하는 걸까요? 아님 사냥? 

베니는 자신에게 울타리가 있다는 것을 압니다. 베니의 어머니죠. 따뜻하고 현명한, 무엇보다도 어른스러운 엄마예요. 오늘은 한 해의 마지막 날이고, 내일은 새해이니까 지금 이래서는 안 된다고 차분히 말해줄 줄 아는 분이었어요. 아무리 잘못한 게 있어도 아이들에게 폭력을 휘둘러서는 안 된다고 엄하게 말씀해 주시는 분이었죠. 뿐아니라 자기들과 같은 그런 가족 울타리가 없는 베트예만 아저씨의 외로움도 이해하시는 분입니다. 나쁜 버릇을 고쳐야 한다고 말해주는 이도 없고, 고쳐야 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하고 살아온 사람에 대한 연민을 지닌 분이에요. 그렇게 따뜻한 엄마의 보호를 받는 베니는, 그래서 아이러니하게도 좀 더 버릇도 없고 무책임하고 철도 없습니다. 슬픔을 달래고, 잘못을 반성하고 복된 새해를 맞이하려는 결심 같은 것은 찾아볼 수가 없어요. 너의 그 치기 어린 행동은 우정이 아니라 '독'이라는 것을, 아이도 언젠가는 알게 될까요?  

작품은 길지 않습니다. 142쪽이 끝이에요. 하루도 아닌 반나절 정도의 시간을 배경으로 한, 등장인물도 몇 되지 않고, 사건도 단 하나일 수 있는 그런 이야기이지요. 그렇지만 짧은 이야기 끝에 깊은 생각을 낳게 됩니다. 그들 사이에 오고 간 폭력에 대해서... 그들의 미움과 설움에 대해서...  인간의 도리로 넘지 말아야 할 선에 대해서... 그리고 몸이 아닌 마음의 성장, 참 어른됨에 대해서 말입니다.  

문장도 참 좋았습니다. 허세와 허영이 전혀 들어가 있지 않은 솔직한 문장들이었어요. 동시에 해당 인물의 실제 목소리로 들렸다는 게 더욱 좋았습니다. 번역의 힘도 들어가 있을 거예요.  

   
  딴 생각을 해봐. 아무거나 말이야. 그래도 훌쩍거리지는 마. 네가 울면 이 모든 게 네 잘못이라고, 네가 후회하고 있다고 말하는 거랑 똑같은 게 되니까. 어차피 베트예만은 네 말을 들어주지 않을 거라고. 베트예만은 네가 미안해하든 말든 널 때릴 거야." -33쪽  
   

양파 껍질을 하나씩 하나씩 벗기듯 조금씩 드러나는 진실을 지켜보는 것도 몹시 흥미 있었습니다. 하지만 진실이 드러났다고 해서 책임 소재가 분명해지는 것은 아니었어요. 그들은 서로에게 잘못했고, 똑같이 나빴어요. 그걸 알아차리는 것은 시간 차가 조금 있겠지만요.  

베니의 엄마가 그랬지요. 새해가 괜히 있는 게 아니라고... 모든 게 새롭게 시작되어야 한다고... 동의합니다. 마침 글밖 세상의 시간도 새해를 출발한지 얼마 되지 않아요. 1월 1일이 되면 몸도 마음도 새출발 하는 게 좋습니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하루 차이밖에 나지 않지만 마음가짐은 훨씬 다르지요. 그렇게 조금씩 성장해 가는 게 옳아요. 그게 반듯한 겁니다.  

아직은 1월 0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 하지만 늦은 것도 아니에요. 정신을 차려봐요. 일단은 슬퍼하는 게 맞습니다. 소중한 누군가가 영영 이별을 고했으니까요. 게다가 당신의 책임이 제일 크니까요. 하지만 당신이 슬픈 만큰 저 사람의 슬픔도 인정해 주어야 합니다. 누가 먼저 잘못을 했건, 누가 먼저 상처를 주었건,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같이 상처를 치유하는 게 중요합니다. 되풀이 하지 않아야 하고요. 무엇보다도... 미안하다고 해야 합니다. 당신이 힘든 걸 알아요. 모두가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을 어려워 합니다. 그래도 해야 해요. 그래야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으니까요.  

당신만큼 아픈 저 사람의 상처가 눈에 들어온다면, 그 울림과 떨림이 느껴진다면 1월 1일은 보다 가까워진 겁니다. 새출발 할 수 있어요. 지금, 듣고 있어요? 이건 폭력과 상처에 대한 이야기에요. 그리고, 당신과 나의... 우리의 이야기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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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1-01-25 1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정말 너무나 근사한 리뷰에요. 굉장히 식상한 표현이지만 저는 '책 보다 마노아님의 리뷰가 더 좋네요.' 게다가 문장 하나하나 다 제가 동의할 수 밖에 없는 문장들이에요.

폭력은 필연적으로 비겁함을 동반하지요, 라는 문장은 특히 더요.
아이들은 아저씨의 오리한테 그러면 안되는 거였어요. 아저씨도 아이들의 개한테 그러면 안되는 거였지만요.

마노아님의 이 리뷰가 정말 무척 좋아요!

마노아 2011-01-25 12:47   좋아요 0 | URL
헤엣... 다락방 님이 좋아해 주시니까 막 우쭐해져요. 뿌듯하고요. 어깨 쫙 펴고 머리 좀 쓰다듬어야겠어요. 베시시^^;;

다락방 님의 40자 평도 좋았어요. 등장 인물들에게 연민을 느껴요. 오리와 개에게도요. 아이들 불러다가 때쮜! 해주고 싶었어요.(>_<) 이 책은 내용도 좋았지만 짧아서 더 좋았어요.^^
 
이누가미 일족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
요코미조 세이시 지음, 정명원 옮김 / 시공사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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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가 기괴하니 섬뜩하다. 차분히 골랐다면 표지가 무서워서 한 번은 더 고민했을 이 책에 나한테 있는 것은 알라딘 물류센터 투어 때문이었다. 그때 중고책 공정을 견학하면서 중고책 값으로 구매할 수 있는 기회가 왔는데 온라인과 동시에 진행되다 보니 내가 집어드는 책마다 모두 품절인 것이다. 책은 눈앞에 있건만 이미 품절되어 살 수 없는 무수한 책들. 으, 그때 참 아까웠다. 그래서 네 다섯 번만에야 품절되지 않은 책을 찾을 수 있었는데 그게 이 책이었다. 아마 그 무렵에 이 책에 대한 평판을 들었을 것이다. 재밌다는데 함 보는 거야! 그때가 2009년 5월이었고, 그로부터 1년 반이 더 지나서야 드디어 읽었다.  

작가 요코미조 세이시는 1902년에 태어난 인물로 이 작품도 집필된지 반세기 이상이 지난 작품이다. 작품의 배경도 전쟁 직후의 일본이다. 연대가 '쇼와 2x년'이라고 나와 있어서 1928년인가? 하며 헷갈려 했다. 작품의 분위기로 봐서는 미얀마 전선도 나오는 것이 1946년 정도로 보이는데 말이다. 아무래도 저 x자가 '10'을 의미하는 것일까?  

암튼, 그 시절에 일본의 거대 기업 이누가미 일족에게 벌어진 비극을 다루고 있다. 이누가미 기업을 일으킨 사헤 옹은 사후 1년 뒤에 개봉하라며 이상한 유언장을 남겼는데, 유언장의 내용은 너무 기괴해서 가족이 가족을 미워하고 서로를 죽이고 싶게끔 만드는 이상한 구조를 갖고 있었다. 그리고 마치 그러길 바랐다는 듯이 정말로 일가의 사람들이 죽어나간다. 요코미조 세이시의 추리 소설에 단골로 등장한다는 명탐정 긴다이치 코스케에게 사건을 의뢰했던 변호사의 죽음부터 시작해서 세 사람이 더 죽고나서야 모든 사건의 진실이 드러난다.  

처음에 사헤 옹의 유언장이 공개되었을 때, 가장 큰 혜택을 입는 것은 사헤 옹의 은인이었던 노노미야 노리코였고, 그녀에게 불어닥친 위기와 이후 그녀의 행보가 의심스러워서 그녀를 범인으로 의심했다. 관련된 사람으로 세 명을 지목하고 있었는데 하나는 맞췄지만 다른 것들은 모두 엇나갔다. 맞추지는 못했지만, 맞췄다면 더 섭섭했을 것이다. 미스테리 추리 소설의 큰 재미이기도 하니까. 

중요한 단서를 밝히지 않고 줄거리를 쓰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므로 이쯤해 두자.  

작가가 옛 사람이어서 그런 건지, 일본 문학의 번역이 그런 스타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읽으면서 소세키의 '도련님'이 떠올랐다. 그 작품은 이 작품보다도 훨씬 오래된 작품인데 읽으면서 그 투박함에 무척 놀라했다. 말하자면 정말 '구식'이었다. 작품의 재미와 가치는 둘째 치고, 오래되어서 어쩔 수 없는 세련미의 결함 같은 것이 뚝뚝 떨어졌던 것이다. 이 책을 처음 읽기 시작했을 때도 바로 그런 느낌을 받았다. 그러니까 일종의 스타일? 문장을 다듬고 세련된 문구나 서술이 따라오지 않는... 그저 뚜벅뚜벅 한 걸음씩 걸으며 묵묵히 진행해가는 그런 느낌 말이다. 그게 나쁜 건 아니고 그저 시간의 변화가 느껴져서 조금 웃었다. 지금 6,70년대에 대유행했던 드라마를 시청한다면 아마 손발이 오그라드는 느낌이 들 것이다. 그러면서도 나름의 재미와 복고적 흥미를 돋울 것이고 다소 신파적이라고 느낄 테지만 역시 고전은 힘이 있어!라고 말하지 않을까? 이 책이 꼭 그렇다.  

진짜 범인이 밝혀졌을 때, 그들에게 닥쳤던 우연의 연속과 비켜갈 수 없었던 운명과 마주쳤을 때, 나름의 속죄를 하려고 애쓰고 노력하는 모습을 목격했을 때 약간의 쩌릿한 전율을 느꼈다. 짐작할 수 있는 수순의 정리였음에도 그게 최선이라고 믿게 만드는 자연스런 서술의 힘! 

일본에서는 영화나 드라마로 리메이크가 많이 되었던 작품이라고 한다. 하나하나 사람이 죽어나가고, 가문과 연결된 국화, 거문고, 도끼의 상징적 의미가 드러날 때 시청자들은 얼마나 흥분이 되었을까. 표지의 국화와 거문고, 도끼와 하얀 가면도 기괴한데 그걸 3차원 영상으로 보면 더 섬뜩할 것이다.  

나처럼 겁많은 독자를 위해서 미리 얘기하자면, 그렇다고 이 책이 공포스럽지는 않다. 밤에 화장실 갈 때 생각나서 너무 무서워 참을까 말까를 고민할 수준은 결코 아니라는 거다. 그저 원한과 복수, 분노와 욕심 등이 인과응보의 바퀴 안에서 자연스레 돌아가는 것을 목격할 수 있을 뿐이다. 그 속에서도 어찌할 수 없는 인간의 모습이 충분히 녹아 있다.  

덧글) 몇몇 오타가 눈에 띈다. 

112쪽에 1리(약 3,9km)라고 나온다. 10리가 4km니까 1리는 400미터 아닐까? 설마 우리랑 일본이랑 기준이 다르진 않겠지??? 

202쪽 수수깨끼>>>수수께끼 

206쪽 후지사키 감식과원>>>감식관이나 감식관원이 아닐까? 

403쪽 스케타케 군와 다마요 씨는>>>스케타케 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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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애(厚愛) 2011-01-22 1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즐거운 주말 되세요^0^

마노아 2011-01-22 11:29   좋아요 0 | URL
후애 님도요! 따뜻하고 가슴 왈랑거리는 주말 시간 보내셔용~
 
벚꽃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
우타노 쇼고 지음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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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 소설을 잘 모르지만 그래도 좋다는 소문은 익히 들어서 내 책장에 꽂힌 지 몇 해는 지난 책이었다. 순정만화의 표지 같은 그림과 서정적인 제목이 '추리 소설'이라는 장르에 어울리지 않다고 느꼈었다. 사실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게다가 기막힌 반전이 있다는 소문도 들었기 때문에 어떤 마음의 준비까지 하고 읽었건만 당연하다는 듯 최대 반전에 걸리고 말았다. 세상에... 작가가 천재 아닐까?  

사실 무엇이 함정인지 알고 읽는다면 아주 평이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 그게 또 함정이다. 대단치 않은 반전인데도 불구하고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갖고 있는 편견과 선입관이 무섭고 부끄러웠다. 이건 흡사 2058제너시스를 읽을 때의 충격과 흡사하지 않은가! 

주인공 나루세는 경비 일과 컴퓨터 강사, 그리고 액스트라 배우 일을 하면서 살아가는 프리터다. 어느날 우연히 지하철에서 자살을 시도한 사쿠라라는 여자를 도와주면서 기막힌 인연이 시작된다. 고등학교 졸업 직전 잠깐 몸담았던 탐정 일이 사실은 천직이었던 듯, 그는 고등학교 후배가 좋아하는 여자 집안의 뺑소니 사고 원인을 파헤치는 일을 맡게 된다.  

교통사고로 위장 당해 죽은 할아버지는 호라이 클럽이라는 악덕 회사에 속아 가짜 건강상품을 5천만 엔 이상을 구입했다. 게다가 여기에는 보험 사기까지 연루되어 있어서 무척 복잡한 사건이 되어버렸는데 집안에 먹칠을 할까 봐 경찰 의뢰도 하지 못하고 탐정 일을 해봤다는 나루세에게 일이 맡겨진 것이다. 이후로 나루세는 자기의 일을 하면서, 호라이 클럽의 정체를 파헤치는 일에 전력을 다한다. 그러면서 그가 꿈결에 자꾸 마주치는 한 장면이 발목을 잡는다. 땅을 파고 있는 모습. 입김을 쏟아내지만 땀을 비오듯 흘리며 땅을 파는 인물은 누구일까. 그는 무엇을 묻고 있었던 것일까? 

또 한편으로 호라이 클럽에 속아 인생을 완전히 망쳐버린 후루야 세쓰코라는 여인이 나온다. 분위기에 휩쓸려 물건을 사길 좋아하는 그녀는 호라이 클럽의 아주 손쉬운 봉이 되어버렸다. 결국 어마어마한 빚더미에 앉은 그녀는 또 다른 호라이의 봉을 꼬이기 위한 미끼 역할을 한다. 그녀 자신도 이용 당하기는 했지만 그녀로 인해 누군가가 죽음의 덫을 밟고 있다는 것을 모를 정도의 철면피는 아니었다. 그리고... 그게 문제였다. 헤어나지도 못하고, 책임지지도 못하는 진공의 상태라는 것. 

작품은 여러 개의 시간 축이 흘러간다. 현재를 살아가는 나루세와 사쿠라의 이야기, 나루세가 한때 몸담았던 야쿠자의 세계, 컴퓨터 강사를 하면서 알게 된 노인 안도 시로, 그리고 죽음의 그림자가 되어버린 후루야 세쓰코까지. 그 모든 이야기들이 교차되어 진행될 때 과연 어디서 이야기 축이 만날 것인지 몹시 궁금했다. 그리고 마침내 반전의 정체가 드러나는 순간 모든 씨실과 날실이 정확하게 맞아 떨어진다. 이럴 수가!! 

작가는 교묘하게 함정을 파놓고 독자를 기다렸다. 간혹 이런 오지랖이 먹히는 것은 일본 사회의 특수성인가? 하며 의아하게 여긴 구석들이 있긴 했지만 크게 의심하지 않고 지나갔다. 그런데 그렇게 어색하게 느꼈던 것들이 다 이유가 있었다. 그들이 왜 그렇게 우호적인지, 쉽게 입을 열었는지도 함께... 

왜 좋고 멋지고 아름다운 것들은 모두 특정 계층의 사람들에게만 허락되었다고 착각하고 있었을까. 딱히 인식하지 않았지만 사실은 그렇게 믿고 있었으니 당연하게 속아 넘어가는 거였다. 그것을 알아차리는 순간 민망하고 부끄러웠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을 때에도, 단풍이 지고 있을 때에도 벚꽃은 벚꽃 그대로인 것을... 

아주 당연하고 간단한 진리를 작가는 먼 길을 돌아 독자들에게 일러준다.  

이 책은, 결코 영화로는 그 맛을 살려낼 수 없는 비밀을 담고 있다. 종이 매체의 글이 주는 완벽하고도 아름다운 트릭이었다. 

멋드러지게 속아 넘어갔지만 그 기분이 싫지 않다. 기분 좋은 한 방이었다.  

작가의 이름을 깊이 새기게 되는 책을 만났다. 더 찾아 읽고 싶은 그의 작품이 더 있다는 사실이 기쁘다. 

누구에게든 이 책을 내밀고 당신도 한 번 당해봐... 라며 회심의 미소를 지어도 좋겠다. 나처럼 당할 그 사람도, 아마 기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반전이 주는 효과가 제일 크긴 했지만, 이야기의 힘도 무시 못한다.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사연에 귀를 기울이는 것도 좋았다. 그것이 이 사회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더 관심을 쏟을 수밖에 없다. 그들의 이야기는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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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1-01-06 0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정말 뒤통수 제대로 때리지요? 으으... 머라 할 수 없는 그 한방.

마노아 2011-01-06 15:22   좋아요 0 | URL
작가님 글 쓰면서 엄청 키득거렸을 것 같아요.
니들 다 나한테 속고 있어!! 이러면서요.^^;;

레와 2011-01-06 16: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책 첫 문장부터 혹! 했어요. ^^;

마노아 2011-01-06 17:54   좋아요 0 | URL
첫문장 엄청 셌어요!ㅋㅋㅋ 그 장면 때문에 청소년한테 추천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이 되던 걸요. ㅎㅎㅎ

같은하늘 2011-01-07 01:09   좋아요 0 | URL
첫 문장이 뭐였을까요? 궁금~~~

마노아 2011-01-07 01:18   좋아요 0 | URL
아하핫, 공개 댓글로 달기엔 살짝 거시기 합니다.
미리 보기 기능이 되어 있으니 책 정보에서 확인해 보세요. 한 페이지만 읽어보시면 되어요.^^ㅎㅎㅎ
 
비즈니스
박범신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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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사회의 병폐를 꼬집는 책을 읽으면서 속이 시원하기는 힘들 것이다. 허수아비 춤을 읽고서 묵직해서 내려가지 않는 체기를 오래오래 느꼈다. 그 책에서 대한민국 최상위 꼭대기에서 돈놀음 하는 인물들을 그려냈다면, 이 책의 인물들은 자본주의의 피라미드 구조 속에서 하위층에 분포되어 있는 소시민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물론, 그 소시민층 안에서도 일렬 종대 줄세우기는 여전하지만... 

서해안에 위치한 ㅁ시는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로 구분되어 있다. 방조제 건설이 완공되면서 신시가지는 새로운 세상이 되어버렸고, 신시가지의 뒷바라지는 모두 구시가지의 몫이 되었다. 원래부터 그곳을 지키며 살았던 사람들은 자본으로부터 환경으로부터 모두 버림받게 되었고, 21세기형 노예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ㅁ시의 시장은 자신을 '비즈니스맨'이라고 부르며 신시가지를 더 화려하게 키워낸 장본인이다. 구시가지를 방치한 채 신시가지로 파이를 더 키우는 것은 중앙정부의 뜻을 잘 살려낸 것이었고, 그가 퍼뜨린 허황된 '꿈의 도시'를 사람들은 자신의 것으로 착각했다. 그리하여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비즈니스 맨과 비즈니스 우먼을 자처하는 상황에서 이 책의 주인공이 등장한다. 고등학교 시절 고시 준비 하던 지금의 남편을 만났고, 고시 뒷바라지를 10년 하고 결국 남편이 고시를 포기하고 난 다음에도 단란한 가정의 꿈을 포기하지 않던 낭만적인 그녀였다.  

그러나 가난한 삶 속에서 전망 없고 희망 없는 남편을 바라보는 그녀의 시각은 아들에 대한 초조함으로 이미 바뀌었다. 대학 시절 친구였던 주리는 그 시절부터 이미 젊은 몸을 팔아 스폰서를 통해 사치스런 삶을 살던 여인. 그 친구가 신시가지에 이사를 왔고 주인공 그녀와 만났다. 친구 주리를 통해 매춘업을 소개 받은 그녀는 자식의 과외비를 충당하겠다는 명목으로 '비즈니스 우먼'이된다. 요즘 애들이 진짜 싫어하고 혐오하는 부모는 실패한 부모라며, 아이가 좋은 대학도 못 가고, 그래서 별 볼 일 없는 인생을 살게 되었을 때 뭐라고 변명할 거냐는 게 이 일을 시작할 때 망설이던 그녀를 설득한 주리의 논리였다.  

참, 답답했다. 그렇게 아이의 과외비를 위해서 몸을 파는 엄마들이 이미 있다는 것을 알지만 그것이 정말 아이를 위한 선택인지 묻고 싶어진다. 아이가 정말 싫어하고 혐오하는 부모가 경제적으로 실패한 부모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면, 아이를 그렇게 키워낸 부모의 탓이 크다. 그 가치관은 아이의 것이 아니라 먼저 부모의 것인 게 맞을 것이다. 자신은, 부모가 부유함과 안락함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그 부모가 혐오스러운지 먼저 되짚어 물어야 할 게 아닌가. 경제적으로 불우했던 것 이외에도 그 부모가 아이를 사랑으로 품어주지 않았다면 저런 변명들이 통할 것이다. 하지만 밥은 먹고 살면서, 적어도 굶고 비새는 지붕 아래 사는 것도 아니면서 내 아이를 좀 더 앞줄에 세우기 위한 교육비를 벌기 위한 저런 타협은 스스로 악마와의 거래에 손을 내미는 꼴로 보인다. 그녀가 주리에 대해서 연민을 느끼려다가도 결국 환멸을 느끼는 것과 똑같은 모양새다. 김규항 씨가 자주 지적하는 우리 안의 명박스러움이다.  

상당히 뻔하게 흘러갈 뻔한 이야기에 극적 긴장감을 불러 일으킨 인물은 '타잔'이다. 그도 세상 끝으로 떠밀려 더 이상은 물러설 곳도 없는 구시가지의 주민이다. 그녀와 타잔의 만남은 무슨 첩보 작전을 보는 것 같았다. '비즈니스' 상대로 만났다가 공범자가 된 느낌을 주었던 사내, 연민을 불러 일으켜 내 손으로 지은 음식을 먹이고 싶었던 사내, 그리고 나의 손길을 더 필요로 하는 그의 자폐아 아들... 아이러니하게도 돈으로 만났던 그들은 서로를 깊이 알게 되고 나서 돈관계까 청산되고, 알몸으로 만났던 사이가 오히려 더 조심스럽고 정숙한 몸가짐으로 변한다. 도둑질을 새로운 업으로 지니게 된 남자가 세상의 작고 여린 존재에 대해서 한없이 연민을 가지는 순수한 사람으로 묘사된다. 그 부조화 속에서 그럴 수도 있다는 독자의 동의가 입혀지면서 이 세계의 모순과 절망감이 더 크게 느껴진다. 

그녀는 '조국'을 애타게 찾는다. 나의 조국이 무엇인지, 누구인지를 말이다. 나라 잃은 서러운 시기를 상상해볼 때, '조국'이란 단어는 참으로 뜨거운 이름이다. 그 이름 앞에서 죽어간 열사들도 무수히 많았다. 오늘날 우리의 조국은 어떤 존재인가 돌이켜 보게 된다. 뭐랄까.. 민망한 느낌이다. '국격'을 말하지만 참으로 격이 느껴지지 않는 부끄러움을 자주 보게 된다. 조국의 방패막이를 전혀 느끼지 못하고 사는 그녀와 타잔 등은 스스로를 무국적자로 인식한다. 사실 이 나락, 무수한 국민들을 그렇게 버린 채 굴러가고 있지만... 주리와 그녀의 젊은 정부, 그리고 그녀보다 한 수 위인 이혼한 남편에게 조국은 '돈'이다. 한때 '대파'와 '쪽파'로 낭만적 사랑 놀이도 했었던 주인공 나와 그녀의 남편의 조국도 거기서 멀지 않다. 다만 얼마만큼의 집착과 욕망을 보이느냐의 차이일 뿐.   

정우는 때마침 이불을 발로 차내며 뽀드득뽀드득 하고 이를 갈고 있었다. 예전엔 보지 못했던 습관이었다. 온몸이 부르르 떨렸다. 아이가 이를 갈면서 걸어가야 할 벼랑길이 한눈에 바라보이는 기분이었다. 그것은 내가 몸을 팔면서까지 부추기고 내몰아온, 자본주의 무한 경쟁 사이로 난 광포하고 가파른 벼랑길이었다. 패배하면 죽는다, 라고 말해온 것이 나였고, 아비가 갔던 길을 답습하면 안 된다, 라고 채찍질해온 것이 나였다.
나는 그애가 오로지 전사가 되기를 바랐다.
지어미의 자리를 다 버리면서까지 내가 '비즈니스'에서 얻은 수익으로 사고자 한 것도, 생각하면 그 광포한 전사의 길로 아이를 내몰기 위한 가죽 채찍 같은 것에 불과했다. 전사가 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전선은 이미 침대 속까지 들어와 있었다. 자식의 과외비를 벌기 위해 오욕이 가득한 화류항으로 나가는 어미들이 있는 유례없는 나라가 내 조국이고, 그 어미의 가죽 채찍질을 사랑으로 받아들이며, 세습되는 '귀족'들의 앞길을 열어주기 위해 오직 약육강식의 정글 속을 헤쳐나가는 전사로 길러지는 아이들의 나라가 내 조국이었다. – 136쪽

그래서 애석하게도 자폐아 여름이의 조국은 주인공 '나'가 될 수 있다. 돌아가신 엄마의 그림자를 채워줄 수 있고, 현재 나를 따뜻하게 보살펴줄 수 있는 사람. 그 엄마를 친아들 정우가 아닌 생판 남인 여름이가 조국으로 여긴다. 아이가 자폐아가 아니었다면, 그 아이의 조국도 조금은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진정, 애석하게도 말이다.  

결과적으로 그와 그녀의 비즈니스는 실패한다. 성공할 수 없는 사업이었다. 그들은 순진했고 그래서 또 다시 피라미드의 하부 구조에 안착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구조가 그러할진대, 똑같은 수법이나 비슷한 대응으로는 어깨를 나란히 할 수는 없다. 외고를 보내려고 안달하는 엄마들 위로 유학을 보내어 더 대단한 졸업장을 따오게 하는 학부모가 있고 그 먹이사슬은 점점 더 견고해질 것이다. 그러니 이러한 사회 구조 안에서는 뱁새가 황새를 따라갈 수가 없다. 돌아오는 것은 찢어진 가랑이 뿐.  

앞서도 이야기했듯이 자본주의 사회의 적나라함을 이야기하면서 독자에게 뿌듯한 기쁨을 주기란 힘들 것이다. 소설가가 대책까지 마련해 놓을 수는 없지만 허무함을 주며 이야기를 마칠 수 있는지, 혹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잔잔한 감동을 주면서 이야기를 끝낼 수 있을 지는 결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이야기'가 흡인력 있는 글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책에 별점 하나를 깎는 이유이다. 더블에서 '딜도가 우리 가정을 지켜줬어요'는 그 후자의 경우에 속한다. 내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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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1-01-04 2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또다시 말이죠, 대물의 서혜림 공약이 생각나는군요.
국민을 지켜주는 국가가 되겠다는.
머 다른거 필요있겠습니까, 약자를 지켜주기라도 해달란 말입니다 라고 함께 외치고 싶네요.

마노아 2011-01-04 21:20   좋아요 0 | URL
국가는 말할 것도 없고 국민 개인들도 약자를 지키는 것에 함께 동의해야 하는데 무상급식 문제를 놓고 보면 아직도 그런 마음들이 많이 부족해요. 으으...갑갑한 일이에요...

전호인 2011-01-06 1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허수아비춤을 읽고 아직 리뷰를 쓰지 못하고 있습니다. 교수직마저 박탈당한 그분(갑자기 이름이 생각나지 않네요)이 시민단체 사이트에 올린 글 자체가 허수아비춤의 느낌을 그대로 말해주는 듯하여 그것을 그대로 올릴까 생각중입니다. 이 책 표지만 보고 헐 했는 데 내용은 다른가보군요. 간직했다가 나중에 기회를 엿보렵니다. 현재 더블을 읽고 있는 데 아직 딜도까지는 진행이 안됐네요.ㅎㅎ

마노아 2011-01-06 15:21   좋아요 0 | URL
딜도 이야기는 더블 두번째 책에 나와요. 용산이 그리 먼 산이 아니란다에서 제가 웃으면서 울었어요.^^;;;
허수아비춤은 분노를 보여주시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걸 '문학적'으로 표현은 못하신 것 같아요. 작가님의 명성에 비해서 상당히 실망스러웠어요. ㅠ.ㅠ
읽고 나서 쓰레기 같은 세상이라고 마구 폭발하고 말았으니 작가님의 의도는 어느 정도 성공하신 거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