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이세벽 지음 / 굿북(GoodBook)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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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일생을 소설의 방식으로 재구성한 것은 재밌었으나 비문과 오타가 많고 모든 문장을 현재형으로 서술한 것은 상당히 불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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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를 품은 달 1
정은궐 지음 / 파란(파란미디어)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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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의 첫 소설로 이 책을 꼽은 것은 솔직히 드라마 때문이다. '성균관 스캔들'이 워낙 재밌어서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과 '규장각 각신들의 나날'을 즐겁게 읽었다. 그리하여 새 드라마의 예고편에 바빠진 마음이 서둘러 책장을 펼쳤다. 때마침 컴퓨터 고장으로 책읽기도 좋은 나날이었다.

 

작품은 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실제 인물을 모델로 삼지는 않았다. 다만 연산군이 선대 왕이었고, 사림파를 쓰기 위해서 왕이 애쓰고 있는 중이니 조선 전기 정도로만 이해하면 될 것 같다.

 

작품은 스물 세살의 젊은 임금 훤이 온양 행궁에서 몰래 빠져나왔다가 어느 집에서 비를 피하면서 시작한다. 그곳에 한 무녀가 있었고 임금임을 바로 알아보고 쉬어갈 자리를 마련한다. 왕은 한 눈에 그녀에게 반했다. 마음 깊은 곳 상처로 남은 첫사랑을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다. 그녀에게서 그리운 난향이 났다. 그의 스승의 향기였고, 또 사랑하는 여인의 향기였던 난향.

 

작품은 시간을 8년 전으로 돌려 세자 시절에 만났던 인연들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열다섯 세자의 스승으로 온 이는 열일곱 나이에 장원급제한 강직한 선비 허염이었다. 두살 차이 스승을 인정할 수 없어 앙탈도 부리고 심술도 부려보았지만 결국 백기를 든 훤은 도리어 스승의 정에 이어 친구의 정까지 나누게 된다. 뭇 여인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이 엄친아 허염이 동생을 무척 아끼는 것을 알았고, 그 호기심이 결구 오고 가는 편지 속에서 연모의 감정으로 변하였다. 그리고 그 감정은 염의 동생 연우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세자는 열셋 어린 나의 연우 글씨에 기가 죽어 답장을 못 썼건만, 연우는 마음이 없어 그리한 줄 알아 섭섭했다. 그녀가 보낸 배추 심은 씨앗을 훤이 공들여 키웠고, 답장을 받기 위해 괜스리 배춧잎이 몇 장 나왔냐고 묻는 연우의 마음은 서로 다르지 않았다.

 

늦되어서 체격도 작고 얼굴도 작았던 세자는, 사랑에 눈을 뜨면서 부쩍 몸이 자라버렸다. 세자빈 간택 이야기가 나왔고 치열한 경쟁을 뚫고 연우는 세자빈의 자리에 오른다. 하지만 책봉례를 다 치르기도 전에 큰 병이 들어 사가로 돌아왔고, 돌아오자마자 열 셋 어린 나이로 죽고 말았다. 세자와는 글만 나눴을 뿐 단 한 번도 얼굴을 보지 못한 사이였다. 그렇게 그녀를 보내고 훤의 어린 시절은 모두 끝이 나고 말았다. 이 부분을 작가는 '문'이라는 소재를 통해서 아주 실감나게 묘사하였다.

 

훤의 오열을 묻어 버리려는 듯 비현각의 문이 닫혔다. 비현각의 동쪽에 있는 구현문이 닫히고, 이모문이 닫혔다. 자선당의 정문인 이극문도 닫혔다. 사정문이 닫히고, 근정문이 닫히고, 흥례문이 닫혔다. 마지막으로 광화문이 육중한 소리를 내며 굳게 닫혔다. 거대한 무덤 속에 훤을 겹겹이 묻은 채로 모든 문이 닫히고, 세상은 순식간에 짙은 어둠 속으로 들어갔다. -194쪽

 

잠깐 옥의 티를 지적하자면 여기서 '흥례문'을 '홍례문'으로 표기한 것은 살짝 실수라 하겠다.

 

훤과 연우가 편지를 나누면서 서로의 사랑을 키우는 장면은 독자의 가슴도 설레게 하는 예쁜 이야기였다. 그 예쁜 이야기가 이렇게 급작스럽게 비극으로 끝났다. 그런데 한 장이 끝난 이 다음 부분의 제목은 '열리는 문'이다. 극적인 대비고, 그래서 더 기대되는 전개일 수밖에 없다.

 

다시 8년 뒤로 돌아가 행궁에서 돌아온 경복궁으로 가보자. 훤은 궁에 돌아온 뒤로 다시 무녀를 찾아보았지만 어디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그가 주고 온 이름 '월'이라는 이름만 남은 채 그녀의 흔적은 온데간데 없었다. 그러나 사실 월은 훤의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다. 왕의 액받이 무녀였던 월은 궁의 가장 북쪽 궁벽진 곳 성수청에서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병이 깊은 훤의 액막이가 되어 곁을 지켰다. 약속했던 시간의 마지막 날, 훤은 별운검 제운의 기지로 월을 놓치지 않고 잡는다. 왕과 액받이 무녀라니,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는 관계건만 훤의 마음은 자꾸만 깊어간다. 의도하지 않아도 월에게선 자꾸 연우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얼굴조차 보지 못한 정인이지만 추억이 깃든 어떤 것들이 자꾸만 훤을 자극하고 만다. 훤이 혼란스러운 것은 당연하다.

 

월과 연우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이름조차 없던 그녀에게는 어떤 서러운 사연들이 깃들어 있을까. 명색이 로맨스 소설인데, 비극적일지언정 두 사람의 사랑에 대해서는 의심하지 않았다. 다만 그 주변의 또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가 궁금했다. 훤과 함께 연우를 사랑했던 이복형 양명군과, 월을 사랑한 운검 제운. 또 허염을 사랑한 훤의 여동생 민화공주와, 염을 짝사랑했던 연우의 노비 설의 이야기 말이다.

 

가장 관심이 갔던 인물은 김제운이었다. 서자 출신으로 그림자 같이 살아온 그에게 길을 열어준 것은 본댁 마님이었던 박씨 부인이었다.

 

“네가 하고 싶은 것이 있느냐?”

제운은 대답하지 못하였다.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도 몰랐고, 하고 싶은 일이 있어야 하는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지금껏 해야 하는 일만 있었다. -425쪽

 

지금껏 눈치로만 살아온 여덟살 서러운 인생에 처음으로 '하고 싶은 일'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할 기회를 가졌다. 그리하여 박씨 부인을 통해서 글을 배우고, 그녀의 추천으로 검을 배웠다. 빼어난 아이였고, 그래서 박씨 부인은 아이가 아깝고 가여웠다. 자신의 배를 빌어 나온 아이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소인이 운검이 되면 마님께서 기뻐하실까요?”

“운검이 되는 것을 기뻐하지는 않으실 거다. 네가 되고 싶은 것이 운검이라면, 그래서 그것을 이룬다면 기뻐하실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네가 검술을 좋아하느냐 아니냐인 것이다.” -435쪽

 

자신을 알아준, 자신을 세상 속으로 꺼내준 이에 대한 보답이었다. 다행히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아이는 검을 잡은 이 중에서 최고의 사내가 되었다. 승진에 제약이 있었지만 임금이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무사가 되었고, 한 사람만으로 능히 임금을 지킬 수 있는 검객이 되었다. 입이 무겁고 차가운 표정만 지을 줄 알던 이 사내에게도 연정이 찾아왔다. 그것이 월이었다. 그녀는 임금의 여자였다. 이러니 이 사내가 '비운의' 서브 주인공 역으로 딱이지 않은가. 주인공이 아니고, 그래서 사랑도 이루지 못하지만 더 빛날 수 있는 캐릭터다. 아쉽게도. 드라마의 캐스팅은 이 부분에서 아직 답을 모르겠다. 성인 배우가 등장하지 않았으니 아직 이른 감이 있지만 캐스팅 설명서의 사진으로는 썩 어울려 보이지 않는다. 내게 떠오르는 이미지는 강동원이나 김남일이 딱이지만, 그들은 국방의 의무를...;;;;;;

 

하여간! 2권에 가서 가장 감동적이었던 부분은 제운이 박씨 부인에게 준 가장 큰 효도 때문이었다. 서자를 구박하는 본댁 마님의 구도에만 익숙한 우리인데, 그 서자를 친자식보다 더 아끼고 인물로 키워주는 커다란 마음의 여자가 등장해서 독자는 참으로 훈훈했다.

 

성균관과 규장각 시리즈보다는 앞선 작품이기에, 아무래도 보다 정교하지는 않았다. 더 재밌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애틋한 사랑 이야기가 계속해서 마음을 급하게 만들게 하였고, 각종 조선시대 용어와 단어들이 호기심도 자극하였다. 작가는 넓게 펼쳐놓은 복선들을 아주 영리하게 제때에 맞춰 찾아 써먹는다. 무척이나 영리하게 나오는 훤의 캐릭터가 결국 작가의 솜씨가 아니고 무엇인가.

 

“나 또한 이름 없기는 마찬가지다. 태어나자마자 원자로 책봉되었기에, 이름이 내려졌으나 그 순간부터 어느 누구도 그 이름을 입에 담아선 안 되는 것이 되었다. 나는 훤이라 불러 주는 이 없이 단지 원자로만, 세자로만 불리었다. 왕이 된 지금은 훤이란 내 이름은 글로도 써서는 안 되는 이름이 되었다. 이러하니 너와 나의 처지가 이름이 없기는 매한가지가 아니더냐.” -31쪽

 

세자시강원의 많은 스승, 아침에 눈을 떠 잠자리에 들기까지 여러 스승이 끊임없이 얼굴을 바꿔 가며 세자를 향해 글을 읆었다. 그런데 스승이 바뀌고 책이 바뀌고 글자가 바뀌어도 바뀌지 않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백성이었다. 모든 가르침의 가운데에는 백성이 있었기에 세자는 언제나 백성을 배웠다. -138쪽

 

작품에서 열불이 났던 건 민화공주의 허염에 대한 사랑과 선왕의 자식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다. 너무 적극적으로 표현한 민화공주와 그리도 애틋했으면서 결코 표현하지 않았던 부왕의 사랑은 극과 극이었다. 너를 사랑하지만 너에게 그 사랑을 보여줄 수 없는 이유를 알려주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상대를 위한 배려도 때로는 독이 될 수 있다. 최선의 선택을 하지 못한 그에게 답답함에 한숨을 쉬어본다.(그렇지만 안내상 씨 캐스팅은 아주 좋아요!)

 

양명군 캐릭터도 다소 아쉬웠다. 결정적으로 안타까운 것은 드라마의 아역 배우가 정일우보다 더 훈남이라는 것? 하핫, 정말 아깝더라. 김수현은 캐스팅으로 아주 흡족하다. 제운 역을 맡겼어도 좋은 얼굴이다. 한가인은, 김수현보다 연상이다. 그리고 여주인공 역할보다 10년 연상이다. 하아, 그래서 김이 좀 센다. 어리면서 연기 잘 하고 카리스마 있는 남자 배우들은 좀 보이는데, 그런 사례의 여자 배우가 좀 약한 편 같다. 그에 비하면 성균관 스캔들은 참으로 훌륭한 캐스팅이 아니었던가!

 

자꾸 드라마 쪽으로 이야기가 샌다. 어쩔 수 없다. 그게 드라마 원작 소설의 운명이기도 하다. 허준에서 '내의원'이 소재가 되었고, 대장금에서 '수랏간'이 주요 소재가 되고, 동이에서는 '감찰부'가 나왔다. 이제 이번 작품에서는 '성수청'이 주요 소재가 되었다. 그게 흥미롭다. 궁중 암투와 외척의 득세가 빠지지 않고, 권력에 집착한 간신 캐릭터도 진부하지만, 그것들에게서 다소 숨을 돌려주게 하는 이야기 바탕이 되어줄 것으로 기대된다. 사극을 보는 재미에는 이런 시각적인 신기함이 항상 포함되어 왔으니까.(그런 면에서 전미선 씨는 아주 좋은 선택!)

 

표지 이야기도 잠깐 하자. 이번 '해를 품은 달'은 개정판인데 예전 책보다 표지가 훨씬 좋다. 성균관과 규장각 시리즈도 마찬가지였다. 무려 '개정판'인데 더 좋아져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지만. 절판되어 많은 독자들을 울게 했는데 개정판이 나왔으니 축하할 일이다. 작가님의 '창작의 신'은 지금 어디쯤 와 있을까. 개인적으로는 규장각 다음 이야기를 원하고 있다. 작가님, 부지런을 떨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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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스탕 2012-01-08 16: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티비에서도 해품달 이야기를 하네요. 하여간 올해 첫 드라마로 시작부터 예사롭지가 않아요. 계속 이 분위기를 이어갔으면 싶어요. 그러자면 대본도 좋아야 할테고 배우들 연기도 잘 받쳐줘야 할텐데 말이에요.
전 하도 오래전에 읽어서 거의 생각이 안나요;; 드라마 보면 새로울거에요. ㅎㅎ

실제로 액받이 무녀라는 직업(?)이 있었는지 무척 궁금했어요. 이 소설의 배경인 조선뿐 아니라 그 이전의 역사에서도요. 어떻게 생각하면 정말 그런 무녀들 한둘쯤 뒀을수도 있었겠다 싶기도 하고요.

마노아 2012-01-08 17:08   좋아요 0 | URL
한밤의 티비연예군요! 광고하는 것 보고서 보고 싶었는데 엄니가 기독교 방송을 틀어놓고 절대 채널을 못 바꾸겠다 하셔서 못 봤어요. 아까비...ㅜ.ㅜ

액받이 무녀가 인간 부적이라고 하는데, 저는 사실 책 보면서 처음 알게 된 거거든요. 있었을 것 같긴 한데 잘 상상이 안 가긴 해요. 임금 정도 되니까 있는 것인지.... 근데 꽤 잔인한 부적이긴 해요. ^^;;;
 
빵과 장미 문학동네 청소년문학 원더북스 13
캐서린 패터슨 지음, 우달임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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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역사는 줄곧 투쟁의 역사였다. 주린 배를 채우고 추위로부터 몸을 지키기 위한 자연과의 투쟁이 그러했고, 지배자의 억압에 저항해 온 긴 역사가 있어 왔다. 그리고 법적으로 '신분제도'라는 것이 사라진 뒤에도 사람들은 자본가가 가진 폭압적인 힘에 대항하기 위해 지금껏 싸워왔다. 이 책의 배경인 1912년의 미국에서도 그랬다.

 

20세기에 접어들면서 미국의 산업혁명은 최정점을 찍고 있었다. 자본가들은 높은 이윤을 유지하기 위해 낮은 임금을 받고도 일할 수 있는 이주 노동자들을 대거 고용했다. 매사추세츠 주 로렌스의 거대 방직 공장에는 유럽에서 넘어온 많은 가난한 노동자들이 최저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임금을 받고도 가족의 하루 식량을 위해서 허리가 휘도록 일을 하고 있었다. 매사추세츠 주의회는 공장주들에게 여자와 어린이의 노동시간을 주 56시간에서 54시간으로 단축하라는 명을 내렸고, 공장주들은 줄어든 작업시간으로 인해 발생한 이윤 손실을 임금 삭감을 통해서 메우려고 하였다. 이러한 사측에 반발해 노동자들은 파업으로 대항했다. 이때 등장한 유명한 구호가 "우리는 빵을 원한다. 그리고 장미도!"였다. 주린 배가 가장 1차적인 목표 대상이었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지혜롭게도 그들은 알아차렸고, 그리고 요구하였다. 이 책의 저자 캐서린 패터슨은 이때의 파업에 동조하여 미국의 다른 지역에서 파업 노동자들의 자녀를 대신 보호해 주었다는 사실에 주목하였다. 그리고 3년 간의 자료 조사 끝에 이 소설이 탄생했다. 소설은 파업 노동자들이 똘똘 뭉쳐서 자본가들의 폭력과 거짓말로부터 스스로를 구원해 낸 모습을 풀어 나가며 로사와 제이크라는 두 어린 아이를 내세워 어두운 사회의 제일 밑바닥에 자리한 가장 힘없는 약자들의 고군분투를 그려냈고, 그 아이들의 성장하는 모습을 통해서 가족의 소중함과 이 아이들이 받아 마땅한 관심과 보호, 그리고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하였다. 담담하지만 찡하게!

 

소년과 소녀가 처음 만났던 곳은 골목길 쓰레기 더미 사이에서였다. 2년 동안 일도 하지 않고 어린 아들이 벌어온 돈으로 술만 진탕 마셔대면서 툭하면 아들을 죽도록 패는 아버지, 그 아버지에 대한 증오로 추위를 떨쳐내려 애쓰는 제이크가 로사와 마주쳤다. 다 찢어져서 구멍이 난 구두 대신 새 구두가 필요했던 로사는 제 구두를 숨겨두면 혹시 엄마가 구두를 사줄까 하는 마음으로 쓰레기 더미 속에 자신의 신발을 숨겨두었던 터였다. 하지만 엄마는 종일 공장에서 서서 일하는 언니 애나에게 구두가 더 필요하다고 여겼다. 결국 로사의 계획은 실패했고, 아무 보온 효과도 없을지언정 맨발로 지낼 수는 없으니 쓰레기와 다를 바 없는 신발을 찾으러 온 것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노숙을 하고 있는 소년이 가여워서 자기네 집 부엌에서 하룻밤을 재워주며 인연을 갖게 된다. 비록, 도움을 받은 제이크는 다음 날 집에 있는 유일한 식량이었던 빵 한조각을 훔쳐 달아나는 것으로 보답했지만.

 

로사는 학교에 다니는 아이였다. 이탈리아에서 이주해 온 가정의 아이였고, 교양있는 미국인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 삶의 목표였다. 공부에 관심이 없었던 언니는 일찌감치 공장에서 일하는 쪽으로 길을 틀었고, 로사는 자신이 소유한 한 권 뿐인 역사책만 가지고도 학급에서 1등을 하는 성실한 학생이었다. 그런 로사는 엄마와 언니가 파업 투쟁에 참여한 것이 불만이었다. 노동이 없으니 급여도 없고, 당연히 생활은 더 어려워질 것이었다. 아빠는 돌아가셨고, 막내 리치는 이제 돌을 좀 지났을 뿐이다. 게다가 파업 행진은 지나치게 위험했다. 학교에 오면 노처녀 핀치 선생님의 신경질적인 경고 목소리가 크게 울린다. 선생님은 아이들의 부모님들이 파업에 참여하는 것이 어리석고 무책임하다고 말씀하셨고, 아이들의 교육에 무관심하다고 일갈하셨다. 또 그들이 야학에 등록하지 않는다며 현실을 바꾸려고 하지 않는 게으름을 타박했다. 그녀의 사고 체계에서는 장시간의 노동에 시달리고도 집에 돌아오면 가사 노동에 시달리는 아이들의 부모님이 야학에 들어가서 공부를 하는 일은 아주 사치스러운 일이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녀에게는 파업 투쟁의 대상인 공장주 빌리 우드가 근면과 성실, 그리고 교육을 통해서 지금의 자리에 올라간 자랑스러운 인물이었다. 하지만 세상이 그렇게 순진하게 돌아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아이들도 이미 알고 있다.

 

"저기요, 선생님." 되바라진데다 아일랜드인이기도 한 조 오브라이언이 말했다. "빌리 우드가 사장이 된 건 공장주의 딸이랑 결혼했기 때문이잖아요." -30쪽

 

이쯤 되면 뭐든 안 해 본 게 없다고 늘 주장하시는 어느 국가 지도자가 떠오른다.

 

열 세 살 제이크는 파업의 대의에 대해서 관심이 없다. 제이크의 관심은 오로지 오늘 밤 어디서 잠을 잘 수 있느냐와 어찌 배를 채울 것인가에만 몰려 있다. 파업 중에는 돈을 벌 수 없어서 아버지께 술을 사 드릴 수 없고, 아버지는 그것을 허리띠 채찍으로 앙갚음하셨다. 본의 아니게 파업 행진 대열에 끼어 소방 호수로 물대포물 세례를 받던 날, 제이크는 안젤로 아저씨네 집에서 저녁을 얻어 먹고 젖은 옷 대신 체구가 작은 룸메이트 아저씨의 옷을 빌려 입고 집으로 돌아왔지만, 이날도 남의 옷이 피투성이 될 만큼 맞고 말았다. 제이크는 성당으로 몸을 피했고, 그곳의 온기에 취해 퍼뜩 잠이 들었다가 헌금함을 깨서 돈을 훔쳐 달아났다. 이러한 일상은 제이크에게 낯설지 않다. 들지키만 않는다면 얼마든지 더 할 각오였다. 제이크가 로사네 집에서 두 번째로 신세를 지던 날은 식탁 위의 빵을 훔치는 대신 1페니를 두고 갔다. 훔친 돈이었지만 본인은 하룻밤 신세진 값을 한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렇게 위험한 제이크의 행보에 제동이 걸린 것은 어느 신부님께 붙잡힌 뒤였다. 신부님은 고약한 냄새에 찌든 제이크를 빡빡 씻기게 했고 맛있는 저녁도 대접해 주었다. 거의 한 소년을 가톨릭 신자로 바꿔놓는 건 물론이고, 신부가 되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게 할 정도였다. 그러나 여기서 신부가 베푼 선에 대해서 잠시 한숨을 쉬게 만드는 부분들이 있었다. 그는 자신과 한 테이블에서 소년이 식사하도록 하지 않았다. 소년을 배려해서였을까? 글쎄, 예수님이었다면 기꺼이 이 소년과 한 식탁을 나누었을 것이다. 신부는 소년이 돌아가기 전에 무려 50센트라는 거액의 은화를 내주지만, 이 파업은 악마가 꾸민 소행이라는 것을 부모님께 전하라는 밀명을 내린다. 아아, 어찌 백년 뒤 한국교회가 자본가와 노동자들에게 대하는 태도와 이리도 닮았을까.

 

이야기의 전환은 아이들이 버몬트 행 기차를 타면서 시작된다. 아이를 맡긴다는 부모의 서명을 받은 뒤에야 기차를 타고 이웃 도시로 갈 수 있었는데, 원래 로사가 갈 곳은 뉴욕이었다. 그리고 뉴욕을 제 인생의 새출발 기지로 여긴 제이크는 서명을 위조해서라도 그 기차에 탈 생각이었다. 그러나 로사는 큰 도시가 아닌 작은 도시가 덜 외로울 거라는 엄마의 판단으로 버몬트로 가게 되었고, 글을 읽을 줄 몰랐던 제이크는 로사가 탄 기차가 뉴욕행이라 확신하고 의자 밑에 몰래 숨어들어갔다. 그리하여 정말 원하지 않았건만, 두 아이들은 남매 행세를 하며 제르바티 부부의 집에 맡겨진다.

 

아이들은 평생동안 입어보지 못했던 따뜻한 옷을 입고, 따뜻한 집에서 따뜻한 밥을 무려 하루 세끼 꼬박꼬박 챙겨 먹고, 그 사이사이엔 간식까지 먹는 호사를 누려본다. 그렇지만 로사는 여전히 로렌스에 남아 있는 엄마와 언니, 그리고 동생 리치가 걱정이었고, 아버지의 일로 두려움에 떨고 있던 제이크는 호시탐탐 이 댁의 돈을 훔쳐서 뉴욕으로 튈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로렌스에서는 파업 노동자들에게 경찰이 가한 폭력 소식이 들려왔고, 엄마와 언니가 감옥에 갇혔다는 소식에 로사는 애가 타서 견딜 수가 없다. 비록 잘 마무리 되어서 이들의 투쟁은 원하는 바를 얻어내는 역사적 결과로 귀결되지만, 그 사이사이에 아이들은 나락에서 천국을 거듭 왕복해야 했다.

 

책 속에는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고 저마다의 진심과 정의를 내세운다. 로사는 교육받은, 교양이 넘치는 미국인이 되는 것이 목표였고, 엄마가 흥분해서 말투가 외국인처럼 변하는 것을 싫어했다. 로사의 기준에 거칠고 교양 없는 외국인들은 비록 가난할지언정 자신의 가족보다 더 아래에 위치한 사람들이었다. 제이크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으로 타본 자동차를 로사가 신기해하자 그 감탄하는 꼴 때문에 자신 역시 방금 3등 칸에서 내린 하층민이 되어버렸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하층민 생활을 하고 있었더랬지만, 도둑질에서 수치심을 느끼지는 못하면서 쪽팔린 건 더 싫어하는 허세를 갖고 있었다. 이 아이들의 이런 모습을 탓하고자 함이 아니다. 배우지 못하고 부모의 배려 속에서 살지 못한 제이크가 굶어죽을지언정 남의 것에 손을 대는 건 나쁜 일이야!하며 도덕심을 내세우는 아이라면 이 책의 주인공이 될 수 없을 것이다. 그건 자연스럽지 않으니까. 아이들은 비록 철저히 이기심으로 움직이던 때가 있었지만, 고난과 역경을 겪으면서 점차 성장한다. 또 많은 사람들이 연대 투쟁해서 파업을 성공적으로 끌어가는 것에서도 새로운 희망을 내다본다. 그리하여 나 혼자만이 아니라 더불어 행복해지는 삶을 소원하게 되고, 두려움으로부터 도망치는 삶이 아니라 미래를 향해 달려나가는 삶을 꿈꾸게 된다.

 

핀치 선생님은 또 어땠는가. 그녀의 좁은 사고 폭으로는 파업으로 맞설 수밖에 없는 노동자들의 가련한 처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그녀는 진심으로 아이들의 안전을 걱정했다. 그리고 어려운 형편 속에서 힘들게 공부하는 로사를 진정으로 응원했다. 비록 초기에 그녀가 보여준 모습은 무척 실망스러운 것이었지만, 이들의 파업 투쟁이 역사를 어떻게 움직였는가를 눈으로 목격했으니, 그녀의 굳은 머리도 분명 조금씩은 변해갔을 것이다.

 

가장 가슴을 뜨겁게 만들어준 이는 제르바티 씨였다. 아들을 잃은 뒤 마음의 상처를 싸매쥐고 살아왔던 석공 기술자, 아니 예술가인 이 사장님은 '어른됨'의 진면모를 보여준 멋있는 캐릭터였다. 아이들은 먼저 보호해줘야 하는 대상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 배고픈 아이가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 사고를 일으켜도 왜 그랬는지 이유를 물어보고 들어줄줄 아는 사람, 그리고 어려운 부탁을 꺼내기 전에 알아서 해결해줄 수 있는 힘있고 강한 어른이었다. 그의 힘은 비단 그가 가진 경제력에서만 나온 것이 아니었다. 그는 제이크의 아버지와도 달랐고, 로렌스의 공장주 빌리 우드와도 달랐다. 그리고 그런 어른됨됨이를 보여주면서 그 역시 자신이 가진 상처로부터 회복되는 기적을 맛보았다. 아름다운 만남이고 소중한 인연이다.

 

1929년에 원산의 부두노동자들이 총파업을 벌였을 때, 식민 지배국이었던 일본의 노동자들이 조선의 노동자들에게 연대의 손길을 뻗어왔다. 비록 파업은 성공하지 못했지만, 그들이 보내주었던 따스함은 노동자들에게 큰 힘이 되었을 것이다. 이 책에서도 미국 전역에서, 그리고 또 다른 세계에서 이들의 파업을 지켜보고 함께 분노해 주었다. 그리고 응원해 주었다. 그 응원이 노동자들이 더더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실어 주었다. 이들은 중요한 순간을 앞두고 '투표'를 통해서 자신들의 일보 전진을 결정했다. 그렇게 그들은 역사가 되었다. 자본가와 노동자가 벌인 대립과 투쟁의 역사는 지난했다. 백년이 지난 지금도 그와 같은 반목은 여전히 목격된다. 그리고 이 싸움은 앞으로도 꽤 오래 치열하게 전개될 것이다. 언제나 더 가진 자가 강했고, 더 비겁했다. 이 책에서 나온 것처럼 눈뭉치를 던진 사람은 감옥을 가도, 다이너마이트를 설치해서 노동자들의 짓으로 위장을 했던 자는 보석금으로 풀려났다. 이와 비슷한 사례를 오늘의 대한민국에서도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다. 그랬기에, 우리는 여전히 지혜롭게 대응하고, 우직하게 똘똘 뭉쳐야 한다. 우리가 대범해지는 만큼 더 사악해지는 자들을 향해 '쫄지마!'를 외치며 단단히 연대해야 한다. 일선에 나설 수 없다면, 이 책에서 아이들을 대신 돌봐주고 응원을 그치지 않았던 다른 도시의 사람들처럼 간접적으로 연대할 길을 찾아야 한다. 실례로 지난 FTA반대 집회로 엄마들이 유치장 신세를 지게 되자 커뮤니티의 다른 엄마들이 아이들을 대신 돌봐준 사례가 있었다.

 

만약 이 책이, 그리고 실제 역사 속에서 노동자들이 원했던 것이 단지 '빵' 만이라면, 그들의 투쟁은 지쳐서 금방 나가 떨어졌으리라. '장미'를 함께 원하는 인간 본연의 갈망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연대의 구호 역시 공허한 것이 되었으리라. 우리 모두에겐 빵과 장미가 함께 필요하다. 그리고 어린이들에겐 보호와 관심, 그리고 사랑이 필요하다. 우리가 쏟아부어야 할 그 감정은 소모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우리의 가슴을 뜨겁게 지펴줄 소망의 싹이 될 것이다. 우리 사는 이 세상을 더 따뜻하고 아름답게 만들 수 있는 희망의 싹이!

 

"내 생각엔," 엄마가 조용히 말문을 열었다. "우리가 원하는 건...... 단지 우리의 배를 채워줄 빵만은 아닌 것 같아요. 우리에게는 빵만이 아니라 그 이상의 것이 필요하죠. 우리는 우리의 가슴과 영혼을 위한 양식도 원해요. 우리가 원하는 건 -그걸 뭐라고 해야 하나, 우리가 원하는 건, 그 뭐냐- 푸치니의 음악 같은 거예요. 우리에게는 아름다운 것들도 어느 정도 필요해요. 우리의 사랑스러운 아이들을 위해서 말이죠."

엄마는 몸을 숙여 손가락에 감긴 곱슬머리에 키스했다.

"우리는 장미도 원해요......"  -114-1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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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여성 노동자가 더욱 고단한 이유... 『노동의 배신』
    from 도서출판 부키 2012-06-10 14:50 
    1908년 전 3월 8일, 미국 여성 노동자들은 임금 인상과 노동조합 결성권, 투표권을 요구하며 시위와 파업을 벌였습니다. 이를 계기로 3월 8일은 여성의 날, 투쟁하는 여성 노동자들의 날이 되었지요. 그로부터 1백여 년이나 지났건만 대한민국에는 ‘빵과 장미’가 필요한여성들이 많습니다. 2007년 ‘이랜드 사태’는 비단 비정규직 문제만이 아니라 비정규
  2. 연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응원
    from 그대가, 그대를 2014-06-21 00:39 
    26년, 노리개, 슬기로운 해법이상은 내가 제작 두레에 참여한 영화들이다. 그리고 어제 또 다른 작품의 제작 두레에 참여했다. 제목은 "귀향"이다.최근 무슨 똥배짱으로 버티는지 이해할 수 없는 국무총리 지명자 때문에 더더욱 마음앓이를 하고 계시는 위안부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담을 영화이다. 정부가 나서서 더 보듬고 책임을 져야 할 분들이지만 늘상 이분들을 챙겨주는 것은 연대의 손길을 내미는 사람들이었다. 몇 달 전에는 근무하는 곳 인근 대학의 청소 노동자
 
 
쿠자누스 2011-12-20 2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청소년 도서로 이만한 책이 있고 또 번역까지 되었다는 게 `어린이를 위한 한비야`가 나온 것만큼 놀랍네요 http://blog.aladin.co.kr/cusanus/2457183

마노아 2011-12-20 23:35   좋아요 0 | URL
알라딘 링크 글을 보니 뭔가 섬뜩하네요. 사실이라면 말이죠. 거기서 더 링크된 글은 아직 못 읽어봤어요. 길어서 출력해서 봐야겠습니다. `어린이를 위한 한비야`가 나온 것만큼 놀랍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모르겠어요. 이 책은 청소년 성장소설로 꽤 훌륭하거든요.

루쉰P 2011-12-21 0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우 정말 굳 책이네요 ^^ 제가 읽고 싶은 책이에요 마노아님의 리뷰 덕분에 제가 책을 더 산다는 ㅋ '신 신'도 살려고 저장 중 ㅋ 이를 어쩌나 책만 쌓여 가네여 ㅋㅋㅋ

마노아 2011-12-21 01:40   좋아요 0 | URL
청소년 성장도서들 중에는 감탄할 만한 좋은 작품들이 꽤 많았어요. 그런 책들은 읽고 권해도 실패할 확률이 적더라구요. 요새 그리움만 쌓이네~윤민수 버전으로 많이 들었는데, 책이 대신 쌓이고 있어요.^^ㅎㅎㅎ

머큐리 2011-12-21 1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진 리뷰네요..^^ 그런데 왜 난 이 소설을 청소년 성장도서로 생각하지 못했을까요? 애들을 너무 어리게만 본게 아닌가 하는 반성이...ㅎㅎ

마노아 2011-12-21 11:05   좋아요 0 | URL
등장인물이 너무 어려서 그런가봐요. 저도 어린애들이 주인공이면 아이들 대상으로 생각하곤 했거든요. 그런데 저 시대의 십대 초반은 지금의 십대 후반보다 어른스러웠던 것 같아요. 일단 경제적으로 말이지요.^^;;;;
 
변호 측 증인
고이즈미 기미코 지음, 권영주 옮김 / 검은숲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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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이 남편과 교도소 쇠창살을 사이에 두고 차가운 입맞춤을 한다. 짧은 면회 시간, 남편은 이미 사형 판결이 났으니 무의미한 노력을 기울이지 말라고 하지만 아내는 아직도 포기할 수가 없다. 끝까지, 끝까지 붙잡고 늘어지겠다고 했다.

 

여자는 전직 스트리퍼 댄서, 남자는 대재벌 가의 외동 아들이다. 꽤 엉망진창 생활을 했던 이 도련님이 바에서 이 여자를 보고 한눈에 반했다. 그리고 몇 달 뒤 결혼에 골인한다. 당연히 집안에선 난리가 났다. 여자는 자신을 받아주지 않는 이 대단한 가문에서 고용인들에게조차도 무시를 당하기 일쑤지만 특유의 강인함을 펼쳐서 기죽지 않고 잘 살아보려고 결심한다. 집안의 실권을 쥔 시아머지는 류머티즘으로 내내 가택 생활 중이긴 하지만 꼬장꼬장함만은 잃지 않고 있었다. 노인은 아들에 대한 금전적 지원을 모두 중단하겠다고 선포하기까지 했지만, 당찬 이 아내는 자신이 돈을 벌어서라도 가족을 부양할 생각을 한다. 물론, 전직으로 돌아가겠다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사건이 있던 날은 남편의 누나인 시누이 부부와, 남편과 전에 사귀었던 친척 여자 아이, 그리고 집안의 주치의와 전속 변호사까지 모두 모인 날이었다. 우스개 소리로 오간 아버지를 죽이고 재산을 나눠 갖자는 얘기를 들으며 아내는 역겨움에 실신해 버린다. 그리고 깨어났을 때는 자신이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부인의 임신으로 아버지의 마음을 돌릴 기회를 얻었다고 여긴 남편은 별채의 아버님께로 가고, 한 밤중에 깨어난 부인은 그 밤에 아버님이 살해됐다는 사실을 알아버린다. 남편이 그랬거나, 혹은 남편이 가장 의심을 받을 거라고 여긴 아내는 살해 도구와 열쇠의 지문을 지우고 다시 방으로 돌아오지만, 수사망이 좁혀오는 것을 피해갈 수 없었다. 심지어 변호사들마저 불리한 증언을 계속했고, 아내는 새로운 변호사를 통해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증인을 법정에 내세우며 반격을 가한다.

 

작품은 꽤 느리게 진행됐고, 분명히 심각한 반전이 있을 거란 짐작에 꽤 주의를 기울이며 읽게 만들었다. 더운 여름인데 에어컨 이야기가 나오지 않아서 대재벌 가에도 에어컨이 없을 정도면 꽤 옛날 작품이겠거니 했다. 아닌게 아니라 작품이 발표된 것은 1963년이라고 한다. 책의 첫 머리에 이 작품의 성분 함량표가 제시되었는데, '고전의 반열'에 속하느냐는 질문에 5점 만점에 5점을 받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출간 50년 정도면 고전이라고 할 만하다. 대반전도 5점이었고, 속도감은 3점, 캐릭터에 3점, 논리정연에 4점, 선정성에 1점이다. 대반전과 속도감, 캐릭터, 선정성 점수에 모두 동의한다. 논리정연은 다소 못 미치는 3점 정도라 생각하지만.

 

작품은 확실히 꽤 놀라운 반전을 보여준다. 반전의 종류는 내가 생각했던 류가 맞았지만, 방향은 달랐다. 잘못 짚은 게 오히려 반가운 경우였다. 이런 느낌의 반전을 다른 작품에서 이미 만났기 때문에 짐작 가능했지만, 작품이 창작된 연도를 살핀다면 아마도 이 책이 더 먼저 발표되었을 것이다. 그러니 이 작품의 값어치가 떨어질 수는 없다.

 

난 이렇게 영화로는 표현하기 힘든, 소설로는 얼마든지 표현 가능한 이야기들이 참 좋다. 때로 영상을 만나서 더 좋아지는 작품들도 있지만, 문자의 영역에서 가능하거나 혹은 더 자유로운 것들이 있다는 것이 묘한 쾌감을 준다.

 

현재 서술하고 있는 관점과, 과거의 이야기가 교차 진행되고, 그 말투들이 꽤 느리게 들리게 때문에 속도감은 현저히 떨어지지만, 가독성을 떨어뜨리는 것은 잦은 오타와 비문들이다. 문장들이 무척 부자연스럽고 잘 쓰지 않는 한자어를 매끄럽게 바꾸지 않은 것들이 불편했다.

 

67쪽 두 사람 점차 그런 일은 아무래도 상관없어졌다.

76쪽 우물 쪽으로 가시면 안 돼요, 도련님. 우물을 위험합니다.

77쪽 보지 않으려도 그녀의 시선은 꼭 그쪽으로 가곤 했다.

160쪽 무슨 일이 있어서 져선 안 된다.

165쪽 그녀는 프랑스식 창문을 열려 와들와들 떨리는 손을 뻗으며 다시 한 번 돌아보았으나, 의사는 이미 소파에 길게 드러누워 있었다.

201쪽 별채와 그 주변에는 아직 경찰 쪽 사람들이 아직 많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213쪽 서류를 든 오가타 경위는 만점 받은 성적표를 자랑하지 않으려 애쓰는 우등생처럼 침착성이 없었다.(침착한 게 아니라?)

216쪽 뭣보다도 히다 씨가 별채에 들어가려도 열쇠가 없습니다.

 

반면 표지는 아주 잘 뽑았다. 표지의 분위기가 주는 느낌이 작품 속에서 기대되는 반전을 더 잘 끌어내었고, 더불어 시공사의 미스터리, 스릴러, 경계소설 전문 브랜드인 '검은숲'이라는 이름도, 또 로고인 검은새의 모습도 이런 책의 분위기에 아주 걸맞아 보인다.

 

작품의 해설을 보니, 남자 작가일 거라고 여겼는데, 작가는 여자였다. 두 명의 전남편과의 사이에 꽤 흥미로운 에피소드가 있었다고 하는데, 일본 사람이 아닌 나로서는 들어본 적이 없는 이야기다. 검색하면 혹 나오려나? 그나저나, 작가는 1985년에 만취 상태에서 실족사했다고 한다. 어이쿠! 그의 미스터리한 작품 세계만큼이나 극적인 주문이다. 오래 살았더라면 좀 더 재미난 작품을 많이 쓸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덧붙이기) 띄어쓰기 안 했다고 검색이 안 되는 건 너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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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찰을 전하는 아이 푸른숲 역사 동화 1
한윤섭 지음, 백대승 그림, 전국초등사회교과 모임 감수 / 푸른숲주니어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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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운동을 소재로 한 역사 동화가 나왔다고 해서 관심을 가졌다. 역사적 실체에 다가가는 것과 이야기가 주는 재미와 감동을 어떻게 엮어나갔을까 궁금했는데,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대성공이다!

 

주인공은 현재 보부상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가 기억하는 어릴 적 최초의 기억은 열 세살 때부터다. 무척 늦은 나이 같지만, 그 나이 때에 겪었던 사건이 워낙 큰 일이었던지라 다른 기억들에게 자리를 비키지 않는다.

 

그가 아직 열 셋이었을 때, 그리고 그의 보부상 아버지가 살아계실 적부터 이야기가 거슬러 올라간다. 아버지는 북한산의 어느 노스님에게서 서찰을 한 장 전해 받고, 그 서찰을 전하기 위해서 전라도로 가야 한다고 하셨다. 엄청 중요한 서찰인지라 아들에게조차 누구에게 가는 것인지 자세한 내막을 알리지 않았다. 다만 한 사람을 구하고, 때로는 세상을 구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하셨다. 어린 아들도 그 중요성을 짐작하고 자세히 캐묻지 않았다. 하지만 수원에 도착해서 하룻밤을 묶던 날,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말았다. 세상 천지에 홀로 떨어진 아이의 두려움과 설움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의지할 곳 없는 아이는 목표를 세워 달려나가야만 했다. 그 목표란 아버지께서 완수하지 못한 서찰을 전달하는 임무다.

 

 

 

 

아이는 수원에서 오산, 평택, 아산까지 이른다. 서찰은 한문으로 적혀 있었고 영리했던 아이는 서찰이 노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서찰 속 10글자를 끊어서 알아낸다. 그 과정에서 세상에 공짜란 없다-라는 아주 중요한 명제를 온 몸으로 깨닫는다. 아이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대가를 지불했고, 값을 지불한 글자는 온전히 아이의 것이 되어버렸다. 처음엔 값을 요구한 어른들이 무척 야속해 보였지만, 그 과정에서 아이가 가져가는 깨달음이 더 컸기에 오히려 어떻게 전개될지 더 흥미진진하게 보게 되었다.

 

더불어, 아이가 자신의 값어치로 흥정을 하게 되었을 때는 신이 나기까지 했다. 아이는 남다른 재주가 있었고, 그 재주가 사람들에게 값을 지불해도 좋을 충동을 일으켰다. 아이는 많은 것을 배웠고, 배운 그 이상으로 자신이 가야 할 방향을 제대로 잡고 있었다.

 

작품 속 배경이 '동학농민운동/전쟁/혁명'인 까닭에 일본군과 청나라 군이 싸우는 대목이 나온다. 전력적으로 일본군이 훨씬 우세했고, 실제로도 일본군의 승리로 끝났던 그 싸움에서 사람들은 동학농민군을 편들기도 하고, 그들의 죽음을 애달퍼 하기도 했지만, 누구도 임금과 관군이 옳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 부분이 참 쓰디 썼다. 제나라 백성을 제압하기 위해서 외국 군대를 툭하면 끌어들이는 임금이라니, 어느 백성이라고 그런 임금과 그런 명에 움직이는 관군을 역성들 것인가.

 

주인공 아이가 글자를 알아내기 위해서 거래를 한 사람 중에는 양반 도련님도 있었다. 아이와 마찬가지로 열 셋 동갑이었고, 세상이 변해가는 만큼 그도 다른 양반들과는 다른 면모를 보여주었지만, 그래도 올곧이 양반의 허영을 벗지는 못했다. 아쉽지만, 그 편이 더 설득력 있었다. 갑오개혁으로 신분제도가 사라진 뒤에도 양반과 노비의 차이는 오래도록 하늘과 땅 만큼의 거리가 있었으니까.

 

아이가 '행복'하다고 느끼는 대목에서는 무척 감동스러웠다. 열 셋 나이에 처음으로 물에 비친 제 얼굴을 바라보았던 아이, 날마다 장돌뱅이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고된 일상을 살았을 이 아이가 어느 대목에서 '행복'을 느끼며 살았겠는가. 비단 아이뿐 아니라 그 시절 힘없고 가난한 백성으로 살던 이들 중 누가 감히 행복이란 말을 입에 담으며 살 수 있었을까. 그런데 이 아이가 행복을 느꼈다. 그리고 그 행복이라는 감정을 전달하고 퍼뜨렸다.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살벌한 시대였고, 각박한 때였던 만큼, 인심도 그같은 세태를 닮아 있었다. 주막집에 어른 없이 아이 혼자 들어서면 주모들은 동냥하는 아이가 왔나 해서 경계하는 모습부터 보였다. 아이가 돈을 내밀고 나서야 손님 대접을 해주곤 했다. 그렇지만 그들도 인정이라는 게 있었다. 일본군과의 전투가 있던 날, 주막을 나선 아이가 무사히 돌아오자 아이가 살아온 것만으로도 기뻐서 방값을 대신해주지 않았던가. 게다가 먼 길 떠나는 아이를 위해 따뜻한 옷을 준비해 준 이들도 있었다. 그 고마움을 아이는 분명 갚았을 것이다. 시간이 흘러도 말이다. 때마침 아이 역시 보부상으로 성장했으니, 그 길들을 다시 되짚으며 고마운 사람들을 만날 기회가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그럴 때에 아이는 제 직업과 소명을 소중하게 여기고 또 행복해 했을 것이다. 넘겨 짚는 이야기건만, 그렇게 생각하니 독자의 마음도 훈훈해진다.

 

 

 

키가 작았던 녹두장군 전봉준. 허나 큰 마음과 의젓한 기개를 가졌던 그의 영혼은 그림처럼 거인이었을 것이다. 그 마음이 배신을 당할지라도 스스로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던 역사의 큰 별 하나. 이미 그가 관군에 체포되어 처형당했다는 역사적 진실을 알고 있기에, 아이의 임무가 성공한다 할지라도 그의 죽음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어떤 반응을 보일지, 어쩌다가 그런 결과를 낳았는지, 또 아이는 그런 결말을 어찌 받아들일지 자꾸 책장을 재촉하게 했다. 바쁜 마음을 달래며, 이야기는 가장 아름답게, 그리고 완성도 있게 마무리 된다.

 

 

책의 마지막에는 역사적 배경에 대한 친절한 설명이, 같은 시간 세계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그리고 아이가 서찰을 전하느라 이동했던 경로와 동학농민군의 진로를 지도에 담아 설명해 주었다. 어린이 친구들의 이해를 돕는 데에 큰 힘이 될 것이다.

 

168쪽에 옥의 티가 하나 있다. 정약용이 지은 '애절양'의 일부에서 '쌀 한 톨, 배 한 치도 바치는 일 없으니' 라고 썼다. 원문은 비단이지만 '베'로 쓰는 쪽이 세금의 의미로 더 낫다고 동의한다. 하지만 '배'가 아니라 '베'라고 써야 맞다. ^^

 

책이 재밌어서 버스 안에서도 읽으면서 귀가했는데, 대학로를 지날 무렵 연극 포스터 '수상한 궁녀'를 보았다. 작가 한윤섭의 작품을 연극으로 올린 게 아닐까 궁금해졌다. 작품 목록에 흥미를 돋우는 제목들이 꽤 된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다른 작품들을 찾게 만들었으니, 이야기의 힘이 참으로 컸다. 게다가 감동 주머니까지! 이만하면 아주 흡족한 독서가 아닌가. 고맙고 보람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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