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젊은 날의 숲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느 해인가 김훈의 책으로 새해를 연 적이 있었다. 꽤 오래 전에 나왔던 그 책은 무척 어렵고 무거웠다. 한 권을 다 읽어내면서 숨이 가빴다. 그리고 그 해는 대체로 독서가 느리고 버거웠다. 그게 김훈 탓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나는 꼭 김훈 탓 같았다. 그래서 새해 처음 잡는 책은 지나치게 무겁지 않은 책으로 고르려고 한다. 이 책은 12월 초에 한 번 잡았었다. 절반 쯤 읽다가 잠시 덮어두었다. 답답했기 때문이다. 칼의 노래를 읽고 나서 빗살무늬 토기의 추억을 읽었더니 두 주인공이 똑같이 이순신의 목소리를 냈다. 이순신으로 느끼게 되는 김훈의 목소리였다.   

공기가 무거워서 꽃잎은 축축했고, 가벼운 것의 예기를 뿜어내지 않았다. 꽃잎에 이슬을 매단 채 아침햇살을 받으면 패랭이꽃은 이파리 끝까지 긴장하면서, 쟁쟁쟁 소리가 날 듯한 기운을 뿜어내는데, 흐린 날 아침에 꽃은 긴장하지 않았다. -163쪽


이 책의 주인공은 29살의 처녀다. 하지만 모든 목소리가 여전히 중후한 김훈의 것으로 들린다. 그 불협화음과 부조화를 견디기 힘들었다. 이런 느낌은 그 동안도 줄곧 느껴왔지만 주인공의 연령대와 성격이 크게 차별화되지 않아서 지나갈 수 있었는데 이번에는 몹시 반감을 느끼고 말았다. 이번 주인공도 과묵한 편이고 제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인물이니 '성격' 자체야 뭐라고 할 수 없는 부분인데도 캐릭터에 대한 몰입이 현저히 떨어졌다. 인정하기 싫었지만, 김훈에 대한 맹목적인 사랑을 거둘 때가, 기어이 오고 만 것이다. 

김훈이라는 이름에서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문체와 문장이다. 그의 간결한 문체는 권위가 있어 보였고 근사한 무게감이 있었다. 그런데 오래 접하다 보니 이것도 지겨워진다. 작가 스스로도 매너리즘을 혹시 느끼지는 않는지 궁금하다.  

나는 어머니의 말에 대답할 수 없었다. 대답할 필요가 없고, 대답할 도리가 없는 말이었다. 대답을 할 수는 없었지만, 거기나 여기가 다 마찬가지라니, 어머니의 마음속에서 그 양쪽이 모두 다 위로받기를 나는 바랐지만, 거기나 여기가 다 마찬가지이므로 양쪽 모두가 더욱 쓸쓸해지는 것이나 아닌지를 생각하면서 나는 밥을 물에 말아서 넘겼다. -16쪽 

길고 긴 문장이었지만 내용은 하나다. 결국엔 문장의 구조만 바꿔놓은 동어 반복이다.  

거기서 북쪽으로 방향을 꺾자, 아득히 흐리고 빈 공간이 펼쳐졌다. 자동차가 단 한 번 우회전함으로써 그렇게 아무것도 들어서지 않은 막막한 세상이 전개될 수 있었다. 내가 면접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이 네거리에서 서울 쪽의 익숙한 일상을 향하여 좌회전할 때, 그때 내 앞에 전개되는 공간 또한 저렇게 아득할 수밖에 없겠지만, 익숙한 아득함은 익숙해서 아득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좌회전과 우회전은 별 차이 없을 터이지만, 나는 한 번의 우회전으로 낯선 아득함을 향하고 있었다. -55쪽 

앞에 찾아놓은 문장과 똑같은 기분을 느끼게 한다. 앞으로 나아갔으면 하는데 하나마나한 똑같은 말을 반복하면서 자꾸 멈칫거린다. 그게 숨이 막혔다. 여전히 범접하기 힘든 아우라를 뿜으며 멋진 문장을 곳곳에 배치하지만 이제는 그 문장들에 현혹되지가 않는다. 그보다는 이야기의 힘을 보고 싶었다. 그런데 이야기도 나를 끌어당기지 못했다.  1인칭 시점이 줄 수 있는 어떤 매력과 흡인력을 잘 살리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주인공 '나'의 아버지는 하급 공무원으로 임직 중에 무수한 비리를 저질러 재물을 축적한 것이 발각되어 구속되었다. 아버지는 자신이 상납한 상관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혼자 죄값을 치렀다. 엄마와 딸은 아버지를 견디기 힘들어 했고, 오욕을 느꼈다. 아버지가 원치 않기도 했지만 가족들은 옥바라지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 무책임해 보였고 비겁해 보였다. 엄마는 가석방된 아버지가 머물 아파트를 따로 구입했다. 이혼을 한 것은 아니지만 이혼과 별반 다르지 않은 거주형태였다. 아비는 옥에서 병을 얻어 나왔고, 어미는 간병인만 붙였다. 밤이 되면 잠이 오지 않는다고 멀리서 근무하는 딸에게 전화해서 징징대는 엄마였고, 그것을 진저리나게 싫어하지만 성질은 내지 않는 딸의 건조한 대꾸가 오래도록 이어진다. 이들의 행보는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도 별로 변하지 않는다. 무척,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 가족들이 있을 수 있는 거지만 마주치자니 화가 났다.  

자폐아를 두고 있는 자신도 한때 자폐아였던 안요한 실장은 주인공 '나'처럼 생기가 없었다. 너무 정적이어서 그 고요함이 독자를 답답하게 만들었다. 군 제대를 앞두고 있던 김중위가 그나마 이 작품에서 유일하게 가장 역동적인 인물이었다. 그래봤자 군인이기 때문에 행동반경과 행동의 표정이 한정되어 있지만... 

주인공 '나'는 세밀화를 그리는 화가인데 그녀의 입을 빌려 수목원의 나무와 벌레와, 한국전쟁의 흔적으로 발견된 뼛조각 등을 집중해서 설명한다. 그것은 두 계절 동안 여행을 다니면서 그것들을 관찰한 김훈의 눈과 입의 투영이었다. 그 과정을 통해서 작가는 '내 젊은 날의 숲'을 열심히 말했겠지만, 내게는 잘 들리지 않았다. 들렸다 하더라도 별 의미가 없었다. '사랑'이나 '희망'같은 단어를 써보지 않았다는 작가. 그 부재와 결핍 때문이었을까. 독자가 읽는 내내 이리 답답하고 죽은 느낌이 들었던 것은...  

일신상조회의 조기는 빈소 맨 앞에 걸렸고 유흥업소 주인들이 보낸 조화가 그 옆으로 진열되었다. 최국장은 일신상조회가 걷어 모은 조의금 봉투를 누워 있는 어머니에게 전했고, 어머니는 돈봉투를 받아서 나에게 내밀었다. 아버지는 죽어서도 출소하지 못했고, 죽어서도 형을 면제받지 못하고 있었다.-328쪽 

죽어서도 출소하지 못하고 죽어서까지도 형을 면제받지 못하는 아버지의 죄업. 살아있는 인간이 모두 그렇게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잠시 생각했다. 그 연결 고리에 적을 두고 있는 우리들이기에 사랑이나 희망같은 단어는 언감생신인 것일까.  

작가에겐 스타일이 있는 것이고 추구하는 바가 있기 때문에 독자가 감놔라 배놔라 할 수는 없는 노릇. 이제 김훈과는 잠시 거리가 필요하다. 여전히 새 작품이 나오면 눈을 반짝이며 잠시 달뜬 기분을 느끼겠지만, 과도한 기대치로 괜히 실망을 갖지는 말아야겠다고 다독여 본다. 공무도하에 이어 이번 작품은 나에게는 좋은 궁합이 아니었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양철나무꾼 2010-12-31 04: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잠시 거리가 필요하다는 님의 말 수긍이 가는 걸요.

저는 김탁환도 그렇고 김훈도 그렇고...요즘 좀 우울했거든요.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그들은 묵묵히 그대로 있는데, 우리가 변한 것 같기도 해요~ㅠ.ㅠ

마노아 2010-12-31 10:22   좋아요 0 | URL
저는 최근에 파울로 코엘료와 이제 김훈까지, 애정 전선을 좀 점검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김탁확은 사실 예전에 버린..;;; ㅎㅎㅎ
김탁환도 나오면 궁금하긴 한데 읽고 나서 역시... 이렇게 되곤 하거든요.
젊은 피의 공급이 필요해요. 우리 우울해 하지 마요!(>_<)

후애(厚愛) 2010-12-31 0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내년에 읽으려고요.
그러고보니 한국은 내년이 내일이군요.
해피 뉴 이어~~~ ^^

마노아 2010-12-31 10:23   좋아요 0 | URL
후애 님도 해피 뉴 이어~!
하루도 채 남지 않은 2010년이라니, 어쩐지 막 뭉클해요.^^

마녀고양이 2010-12-31 0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리뷰입니다.

김훈님의 신작으로 벌써 리뷰를 여러개 읽었네요. 읽을수록
아... 이번 작품은 보지 말아야겠어 라고 생각되니.. ㅎㅎ.
답답하고 죽은 느낌이라... 이그.

마노아 2010-12-31 10:24   좋아요 0 | URL
그래도 평점들은 엄청 좋더라구요. 저도 뭐 별점은 네 개지만..^^;;
공무도하에서 주춤거렸던 것이 이번 작품으로 제동이 걸렸어요.
역시 좀 서로 거리를 둬야 애정이 회복될 것 같아요.^^ㅎㅎㅎ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 2 - 개정판
정은궐 지음 / 파란(파란미디어) / 2009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권이 상콤 발랄했다면 2권은 긴장긴장 화르륵 활활~이었달까. 사람들이 드라마에서 아쉬워한 부분이 2권의 이 숨막히는 긴장감과 찐한 러브러브 장면이 아니었나 감히 짐작해 본다.  

드라마에서는 금등지사 이야기가 추가되면서 미스테리한 부분이 있었고, 이선준과 문재신, 그리고 윤희네 집안의 중첩된 은원 관계가 크게 자리했었다. 원작에서는 금등지사 이야기가 없고, 좌의정이나 병판이 등장은 하되 그리 무게감도 없어서 캐릭터도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그래서 걸오와 대사헌의 갈등은 드라마 쪽이 더 울림이 컸다.  

장치기 놀이는 소설 쪽이 훨씬 이야깃거리가 많았다. 여림이 단순히 옷버리기 싫어서 흙묻히기 싫어하는 위인이 아니라, 정말 운동에는 아무 소질이 없고 심지어 대물보다도 동재에 도움이 안 된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런데 대물과 여림 덕분에 기생들의 응원이 장난 아니게 되자 동재생들이 경기에 져도 좋으니 가랑이나 걸오 말고 대물과 여림을 달랠 걸... 하고 후회하는 장면이 재밌었다. 혈기왕성한 유생들의 거친 경기로 임금 앞에선 대사성은 안절부절이지만 임금의 말은 태평하다.  피 흘리는 당파싸움보단 철 있는 짓이라는 게 임금의 생각. 왜 아니겠는가. 이 정도면 훠얼씬 공정한 경기니까. 축국과 장치기, 게다가 줄다리기까지 진행되었는데, 마지막 줄다리기에는 임금도 직접 참가했다. 한쪽 팔을 쓰지 못하는 이선준 대신이었다. 임금이 동재 편에 서니 소론과 남인 편을 드는 것 같고, 이선준 대신 들어갔으니 노론 편을 드는 것도 같고... 확실히 한 번의 행보로 두 마리 토끼를 잡아채는 임금의 솜씨 답다. 임금이 상대 편에 있으니 서재 유생들이 난감할 법 하지만 일부러 져주는 일만 없으면 최고의 시합이 될 수 있다는 이선준의 명대답이 마음에 든다. 그 덕분에 대물 윤희가 맘 고생을 좀 했지만... 

시청자들은 걸오앓이를 했지만, 사실 걸오는 윤희 앓이를 제대로 했다. 내가 드라마에서 이선준 캐릭터를 더 좋아한 것에 비해 원작 소설에서는 걸오가 더 마음에 들었다. 거친 사내지만 배려가 늘 깔려 있었다. 창으로 윤희를 꺼내어서 맨발이 된 그녀에게 자기 신발부터 내민 장면이나, 말복 더위를 식히려 단체로 계곡에 갔을 때 여기저기서 술 권할까 봐 으름장으로 그녀를 지켜준 장면 등등 말이다. 가끔 이선준과의 사이를 알기에 질투를 섞어 둘만의 시간을 방해하기도 했지만, 그런 것도 없이 해바라기한다면 그건 걸오가 아니라 여림이지...  

여림 캐릭터도 참 안쓰럽다. 드라마에서는 그의 그늘이 신분을 숨긴 것에 대한 자격지심 정도인데, 원작에서 그의 가장 큰 가시는 마음 속 깊이 자리한 정인 때문이다. 이미 결혼도 했지만 우정같은 사이이고. 그의 마음에는 가질 수 없는 사람이 들어 있다. 설마 설마 했는데 그게 진짜 그 사람일 줄이야. 그 마음을 적절히 드러내면서 그 사람 곁을 떠나지 않는 방법이란, 지금의 그 과장되고 헤픈 캐릭터여야만 했던 것이다. 여림의 속내를 알고 나니 이 책이 얼마나 여자들의 입맛에 맞춤되어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이런저런 설정들은 대체로 여자들한테 먹히고 들어가는 것들이어서 말이다. 드라마 용은 결코 될 수 없는 설정들... 

지금의 우리나라에서도 동성애는 기피되고 마는데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이야기에 동성을 사랑하는 이야기는 당연히 위험하다. 남색 소동은 꽤 긴장감을 주는 이야기였는데 계곡에서 이선준이 자신이 사랑한 사람이 남자 김윤식이 아니라 여자 김윤희라는 것을 알아차리는 장면만큼의 흥분을 주지는 못했다. 드라마에서 단순히 물에 빠져서 젖은 옷을 벗겨주려다가 알아차리는 장면은 너무너무 심심한 표현이었던 것이다. 이 장면을 읽을 때 나는 크리스마스 콘서트를 보려고 객석에 앉아 있을 때였는데 얼굴이 후끈거려서 그 추운 날에 볼빨간이 되고 말았다.  

수면 아래에는 세상이 없었다. 세상이 없으니 윤리도 없었다. 그 좁은 곳에는 두 사람만이 있었다. 겹쳐진 입술과 입술만이 있었다. 차가운 물속에 잠겼어도 서로의 입술은 따뜻하였다. -198쪽 

이 부분은 아직 이선준이 윤희가 여자라는 것을 모를 때다. 물속에서 충동적으로 입술을 훔쳤을 뿐이다. 이제 자신의 감정을 더 이상 속일 수 없게 된 그는 성균관을 나갈 것이라 말한다. 윤희는 그의 잘못이 아니라고 말을 한다. 그가 대답한다. 

"귀공에게는 잘못하지 않았소. 허나 귀공을 제외한 모든 세상에 나는 잘못하였소."-200쪽 

상대를 남자로 알고 있는 그가 자신이 사랑하는 감정에는 잘못이 없다고 말을 한다. 그 사랑만큼은 진실이라고 얘기하는 것이다. 그러나 동성을 사랑하는 것을 인정받지 못할 세상에 그는 죄인이라고 고백한다. 윤희가 어찌 그를 죄인으로 남겨둘까. 그리하여 마침내 스스로 자신이 여자임을 밝히는 장면은... 다른 독자분을 위해서 생략한다. 아주... 에로틱했다.^^ 

한 문장만 공개해 보자.  

빗물을 마시듯 그녀의 몸을 마셨다. -207쪽 

얼마 전 친구는 내게 동화책만 많이 봐서 연애를 더 못한다고, 당장 끊으라고 했다. 그리고 대신 찐하디 찐한 책을 대량 보내주겠다고 했는데, 그리고 나서 그 다음 날 이 장면을 본 것이다. 으하하핫, 정말 동화책을 끊어볼까? 뭐 이런 생각이 막 지나갔다. 2011년에는 독서 연령대를 좀 높여야겠다. ^^ 

초선과 부용화 캐릭터는 상당히 아쉽다. 초선은 너무 허망하게 작품에서 사라졌고, 부용화는 옹졸하게 그려졌다. 변명하기에 급급하고 자신의 감정에 책임을 다하지 못했던 그녀는 윤희의 캐릭터와 대조되면서 지나치게 주인공만 빛내주는 역할을 했다. 어쩌면 드라마 작가도 그런 것을 읽었기 때문에 드라마에서는 두 사람의 캐릭터를 좀 더 다듬지 않았을까.  그 부분은 좌의정과 병판, 대사헌과 대사성 등도 마찬가지다. 드라마 마지막 회에서 캐릭터들이 갑자기 너무 착해진 것이 상당히 흠이긴 한데, 원작에서처럼 과거급제를 두고서 윤희와의 혼인을 허락하는 내용은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생각할 때 쉬이 용납되지 않는다. 해피 엔딩을 위해서 감수하는 작품의 질적 하락이랄까. 

그래도 잘금4인방을 자연스럽게 규장각으로 이끄는 정조의 행보는 참 좋았다. 이선준이 개유와의 서책을 읽고 싶어하자 과거에 급제해서 규장각에 들어와 보라고 하는 임금의 짓궂은 답변. 유생으로서 대꾸할 말이 없다. 게다가 훌륭한 인재를 탐내는 임금의 그릇은 또 얼마나 크던가.  

"성균관 유생은 제아무리 뛰어난 인재라도 고작 물고기에 지나지 않음을 모르느냐. 집춘문 너머에는 물고기가 새겨진 연못인 부용지가 있고, 그 위에 바로 어수문과 규장각이 있다. 물고기가 물을 만나 용이 되는 곳, 그곳이 규장각이란 의미다. 내가 너희들이 용이 되어 마음껏 노닐 수 있는 물이 되어 주겠노라. 더 크고 강한 용이 되고 싶다면, 나는 더 깊고 넓은 물이 되어 줄 것이다. 그러니 더 이상 기다리게 하지 말고 어서 와라. 나를 기다리게 만드는 것도 불충이다. 멀리 떨어져 있으면 지켜 주기도 힘들다." -337쪽 

임금 자신이 곧 용이면서 신하를 용으로 만들고 스스로 물이 되어 주겠다고 하니, 이런 말을 들은 신하라면 어찌 충성을 맹세하지 않을까. 윤희의 고백처럼 그런 임금을 만나는 것 또한 축복일 것이다. 그리고 이럴 때에 여인인 자신이 끝까지 같이 갈 수 없는 한계를 바라보며 안타까워하는 것도 실감이 났다. 그래서 그녀가 여자라는 것을 알면서도 기어이 규장각으로 끌어주는 이 멋진 임금님과 그런 그들이 나오는 이 이야기를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인생의 성찰을 엿보게 하는 그런 성숙한 이야기는... 사실 별로 없다. 그게 목적인 소설이 아니니까. 그저 들끓는 피를 가진 아름다운 청춘들이 있다. 그들도 고민을 하고 그들도 성장한다. 이들이 아니었다면 굳이 그렇게까지 궁금하지 않았을 성균관 유생 이야기. 과거 이야기. 장치기 놀이 등등... 재미난 이야기 꽃밭을 만나서 신나게 노닐다 온 느낌이다. 게다가 그 꽃밭에는 꽃유생들이 있더라는...! 

이제 무대는 그나마 안전했던 성균관이 아니라 프로의 세계 규장각으로 옮겨간다. 거길 나서면 청나라 사신 이야기까지 나오겠지. 남은 이야기가 많아서 기쁘다. 이들의 이야기가 끝나지 않아서 행복하다. 독자를 행복하게 하는 작가라니, 얼마나 재주 많은 문학의 힘인가.


댓글(6)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0-12-28 14: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2-29 10: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10-12-28 18: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휴, 공개한 한 문장이 아주 그냥.. ㅎㅎ

마노아 2010-12-29 10:17   좋아요 0 | URL
피를 확 끓어오르게 하더라고요. ㅎㅎ

따라쟁이 2010-12-29 1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흐흐, 저는 이 글 드라마 되기 전에 다 읽었는데, 성규관도 좋고, 이 뒷편이 뭐드라.. 그... 규장각 각신들의 나날인가,, 생활인가.. 그것도 좋았어요.

마노아 2010-12-29 13:00   좋아요 0 | URL
규장각 각신들의 나날이요~ 읽을 게 더 남아서 아주 기뻐요. 두 권짜리 책 안 좋아하는데 이 책은 예외예요.^^ㅎㅎ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 1 - 개정판
정은궐 지음 / 파란(파란미디어) / 2009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해마다 올해의 책이 있는 것처럼 올해의 드라마도 꼽아봤다. 2007년도에는 한성별곡을, 2008년도에는 일지매가, 2009년도에는 미남이시네요? 그리고 2010년에는 성균관 스캔들이 있었다. 원작이 워낙 유명하다는 것을 알았지만 일부러 방송 전에 보지 않았다. 원작을 능가하는 드라마를 만나기 힘들기 때문이었다. 이제 드라마를 먼저 본 나는 드디어 원작을 찾아 읽게 되었고 둘 모두 멋지다는 평범한 결론을 내려버렸다. 각자 매력 포인트가 다르긴 하지만. 

익히 알려진대로 이 이야기는 졸지에 성균관 유생이 되어버린 남장 여인 김윤희의 파란만장한 성균관 생활기이다. 그녀를 둘러싼 세 명의 남정네들과 함께 '잘금 4인방'으로 불리지만 이 책 1권에서는 아직 '잘금'의 ㅈ도 등장하지 않았다. 드라마에선 이선준이 김윤식의 실력을 알아보고 성균관으로 들어가지 않을 수 없게끔 다리를 놓았지만, 원작에서는 김윤희가 자청에서 사수 노릇도 하고 거벽 자리도 알아보는 모습이 나온다. 그녀의 빈궁한 가세를 생각할 때 이쪽이 훨씬 더 설득력이 있다. 굶어 죽나, 들켜 죽나 매한가지인 노릇이니. 

캐릭터들을 비교하면서 보는 재미가 컸다. 드라마에서 뭘 극대화시켰는지, 어떤 점을 강조했는지 비교할 수 있고, 이 책에서는 어떤 점이 강점으로 드러나는지 찾아보느라 읽는 내내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먼저 이선준. 박유천이 연기한 드라마의 이선준은 워낙 법도를 중시하는지라 상당히 까칠했다. 김윤식과도 투닥거리고 으르렁거리는 장면도 초반에 꽤 많았다. 게다가 외관에서 보다시피 꽃미남이긴 하지만 육체파는 아니었다. 그런데 원작에서 묘사하는 이선준은 잘 생겼고 게다가 건장하기까지 하다. 그리고 무척이나 상냥한 사람이어서 처음 마주친 그 순간부터 이리 착한 사내가!라는 감탄사를 내놓게 했다.  

"모든 인간은 제가각 삶의 추를 가슴에 달고 있습니다. 추의 무게도 사람마다 제각각이지요. 나이가 어리다 하여 나이가 많은 이들보다 반드시 가벼운 삶의 무게를 지닌 것이 아니니, 눈물을 흘려선 안 된다는 법도 없습니다." -71쪽 

소과 초시에서 처음 만났는데 먼저 시권을 제출할 수 있었음에도 자신이 내버리면 늦게 쓰고 있던 윤식이 초조해할까봐 배려해 주는 모습을 보였다. 더불어 자신의 그런 배려를 포장하지 않고 자신이라면 그럴 것 같다고 말하는 겸손함까지. 기억나는 추억이 있다. 고등학교 때 나랑 같이 밥을 먹던 내 짝꿍은 무척 밥 먹는 속도가 느려서 빨리 먹던 나는 속도를 맞추느라 일부러 밥을 조금씩 남겨 놓았다. 미리 다 먹고 젓가락 내려놓으면 천천히 먹던 그 친구가 밥 먹을 때 불편할 것 같아서. 그런데 이 친구가 내가 일부러 천천히 먹는 것을 모르고 자기 밥 그만 먹겠다고 일어나는 게 아닌가. 아씨, 나는 밥 남길 생각 없었는데, 후다닥 먹어치우느라 고생했던 기억이 스윽 스쳐간다. 오래 됐지만 왠지 울컥! 

드라마에서 걸오가 처음 등장하는 씬이 참 멋있었다. 위험에 처한 윤희 낭자를 도와줬고, 험한 꼴을 볼까봐 눈을 가리고 상대를 제압했던 아주 멋진 장면! 많은 팬들이 거기서부터 걸오앓이를 시작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명장면이 원작에서 사실은 이선준의 것이었다. 오옷, 캐릭터가 차별화되니 이리 멋진 장면도 나눠쓰게 되는구나!  

윤희를 제외한 다른 캐릭터들은 사실 드라마에서 아주 멋지게 옷을 차려입었다. 훌륭한 원작 덕분이지만 그것을 시각화하고 입체적으로 만든 공로가 분명 있다. 그래도 주인공 윤희의 캐릭터는 아무래도 원작의 섬세함을 다 담아내지 못했던 듯하다. 뭐랄까. 그녀의 감정 곡선이 롤러코스터를 타는 모양새가 정말 눈앞에 그려졌다. 내가 그녀였더라도 그랬을 것 같은 이심전심. 

초시 합격 발표를 보러 여자 옷 차림으로 나섰다가 이선준과 마주쳤을 때 재빨리 옷매무새를 가다듬는 그 손길이 애처로왔다. 작아져서 팔목이 보이는 짧은 저고리, 상투를 투느라 짧아진 머리카락을 숨기느라 애써 선택한 새앙머리를 쓰개 치마로 급히 가리는 모습 등등 말이다. 어쩔 수 없이 감추지 못한 낡은 치마의 빛바랜 색이 그녀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가난해도 의젓했던 윤희였지만 마음을 빼앗긴 상대 앞에서 아름답게 보이고픈 것은 당연한 욕망이니까. 

성균관에 들어가서 그녀는 내내 불안해했다. 여자인 것이 들통날까 봐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랬음에도 같은 중이방을 쓰는 이선준 앞에서는 자꾸 여자의 모습과 본능이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다. 그걸 다스릴 수 있다면 그게 더 놀라운 일이었을 것이다. 혹여 자신이 여자라는 것이 들통나면 그 불똥이 튈까 봐 이선준만은 제가 여자라는 걸 가장 모르기를 바라면서도, 그 앞에 여자로 설 수 없고 남자의 외피를 입고 있다는 것에 그녀는 자주 설움을 느낀다. 그러다가 윤식의 누이 윤희의 이야기가 화제에 오르면 저도 모르게 선준 앞에서 그녀를 멋지게 포장을 하게 된다. 못하는 바느질 솜씨도 좋다고 떠벌리고 심성도 곱다고 제 입으로 자랑한다. 더불어 누이의 이름을 빌려 자신이 선준에게 느낀 마음을 표현하는 장면은 슬프면서 아름다웠다. 아, 그 마음이 얼마나 요동쳤을까나.  

아직 1권만 보았기 때문에 몇 번 등장하지 않은 부용화 캐릭터는 진심을 잘 모르겠다. 양갓집 정숙한 규수로 나오는데 드라마에서는 깨방정 철딱서니 귀여운 아가씨로 등장해서 혹시 원작 소설도 그같은 본심이 있는 건지, 아님 정말 얌전한 처자인지 아직 모르겠다. 아무튼 부용화가 등장하는 바람에 윤희의 더듬이가 아주 예민하게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아무리 남장을 하고 있어도 속이 여자인데 감까지 느려질 리가 없다. 더군다나 그녀는 이선준과 오래 함께 있을 수 없는 처지였다. 남장 노릇하고 있는 것도 그렇거니와, 집안을 생각한다면 과거에 급제하더라도 지방관 관직에 머물려 도성을 떠나 있어야 할 몸이었다. 그러니 매 순간 순간이 소중했고, 지금 이 순간을 방해받는 것이 참을 수 없을 만큼 싫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그 상대가 자신도 반할 만큼 아름다운 여인이라면 더욱! 그래서 일부러 서운하게 돌아서고, 그게 미안해서 다시 되돌아 보고, 그랬다가 마주보고 있는 두 사람을 보고 더 큰 좌절을 느끼는 그녀는 천상 사랑에 빠진 처자. 이 책이 로맨스 소설이니까 당연한 것일 수도 있지만 그 미묘한 심리 묘사들과 상황 전개가 매끄럽고 자연스러워서 몰입감이 점점 커진다.  

드라마는 시각적인 요소를 위해 사실 고증에 있어서 많이 양보하거나 포기하고 넘어갈 때가 많아 보인다. 그런 면에서 책은 훨씬 더 당당하고 자유롭다. 이를테면 식당에서 밥을 먹을 때 밥상 없이 바닥에 전포 펼쳐 놓고 상을 대신하는 모습 등등 말이다. 드라마에선 모두 독상을 받았는데 성균관에서 그 많은 학생들에게 상을 제공하진 못했다. 무심코 지나칠 수 있는 장면이지만 사실감을 부여하는 것 같아서 만족스러웠다.  

드라마에서는 정조 임금의 캐릭터와 박사 정약용이 참 마음에 들었는데, 원작 1권에서는 정조의 출연 분량이 너무 적다.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그래도 처음으로 김윤식을 만난 장면에서 그를 다독이는 모습은 내가 기대하는 정조의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너는 학문에만 전념하여 하루라도 빨리 대과에 급제해 나에게로 오라. 내 너의 미려한 용모를 기억하고 있겠노라." 

김윤식 행세를 하고 있는 윤희에게는 날벼락이고 사정을 알고 있는 독자에게는 참 재밌는 장면이다. '나에게 오라'는 전제 군주가 할 수 있는 요구가 당당해 보였다. 그건 순전히 정조 임금을 향한 나의 편애에 기인한 것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감정이입이 더 좋다.  

아우 김윤식의 마음씀씀이도 잘 표현해 주었다. 누이가 성균관에 가 있는 동안 제가 여자 옷을 입고 누이 행세를 하겠다는 말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패였음에도 대견해 보였다. 때는 조선시대니까.  

초선의 캐릭터는 또 어떻던가. 아직 1권만 본 내가 드라마처럼 그녀가 숨겨진 살수일지는 알 수 없지만(현재까지의 분위기로 보아서는 그럴 것 같지 않다.) 허영끼 많고 욕심도 많은 기녀임에도 나름의 품은 설움들과 진정성 느껴지는 연모의 감정이 잘 살아 있다. 이제껏 그녀를 칭찬하던 사내들이 늘 외모에 치중되어 말한 것에 비해 윤희가 그녀의 그림 솜씨를 칭찬한 것이 기뻤던 것이다. 양반들의 허세 쩌는 행동거지가 충분히 그려진다. 저보다 잘난 기생도 있을 수 있건만 어디 인정 한 번 해봤겠는가. 

드라마에서는 걸오가 한문으로 벽서를 썼는데 원작에서는 처음부터 언문으로 벽서를 썼다.  

"딴 나라 글자를 딴 나라 말처럼 엮은 시가 무슨 시겠냐? 시는 감정을 담는 그릇인데, 남의 글자로 무슨 감정을 얼마나 담는다고. 그건 우리의 감정이 아니다." -401쪽

왜곡된 우리의 영어 교육과 우리 말, 우리 역사에 대한 천시가 생각나서 한숨이 나왔다. 그런 마음이니 작가도 걸오의 입을 빌려 이런 말을 했을 것이다.  

주인공 윤희가 미모롭기만 한 것이 아니라 글씨에 재능이 있고 학문을 탐하는 마음을 가진 것도 반갑다. 그녀가 말한 대로 여인에게 배움의 기회가 닫혀 있던 시공간 안에서 비록 동생의 이름을 빌려서 하는 공부지만, 성균관에서 거관수학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행운인가. 목숨을 걸만큼 위험하기는 하지만 독자는 이미 그녀의 행복한 결말을 알고 있으니 걱정은 접자. 처음으로 갖게 되는 스승님이 가슴을 벅차게 하고, 그 자리에 함께 하지 못하는 동생을 위해 열심히 필사를 하는 그녀의 부지런하고 착한 손이 아름답기만 하다.  

로맨스 소설답게 유건의 끈 하나에도, 잠든 머리의 상투가 얼굴을 할퀴는 장면 하나에도 미묘한 떨림과 긴장감을 동반시킨다. 그모습을 연출하는 인물들의 심리를 읽어내는 것이 즐겁다. 동시에 성균관 유생답게 학문과 정책을 가지고 서로의 의견을 나누는 장면도 근사하다. 노론과 소론, 남인, 게다가 무당무파를 주장하는 여림까지 한데 어우러진 그들의 뒤로 '탕평비'가 배경으로 서 있는 장면에서 1권이 끝난다. 당파 싸움이 치열했던 시대를 배경으로 하면서 그것을 한껏 비틀고 사용해서 멋진 연출을 하는 작가의 감각이 눈부시다.  

"난 변화를 시키려는 게 아니라, 단지 비난만 하고 끝내는 무능은 저지르고 싶지 않을 뿐이오. 세상에는 완벽한 정책은 없소. 보다 나은 정책이 있을 뿐이지. 그러니 그 어떤 정책이라도 비난이 따를 수밖에 없소. 그 비난을 최소화할 수 있는 보다 나은 조선을 위한 정책을 알고 싶소. 진심으로." -249쪽 이선준 

"나라의 돈을 풀어 가난을 구제한다고 대수는 아니지요. 그저 돈만을 나눠 주면 이 나라의 백성은 모두 거지가 될 것이고, 그 돈으로 일거리를 만들어 준다면 이 나라의 백성은 모두 일꾼이 될 것입니다. 이 땅에는 농부들만 있는 게 아님에도, 가난을 구제하고자 나서는 방법이 죄다 거지를 양성하고 있습니다. " (김윤희) 

"일거리를 만들어 준다고? 글쎄다, 이놈의 신분 아래에 묶여서는 그도 힘들지 않겠나? 누구나 천한 일거리는 하지 않으려고 할 터이니 말일세. 신분을 철폐하는 것도 문젤세. 지금 신분 철폐를 외치는 이들도 실상은 신분 철폐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신분 상승을 바라는 것이거든. 이름 없는 한낱 작은 동물이라고 하더라도 제각각 서열을 만들고, 동네 어린 꼬마들조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위와 아래를 만들어 놓지 않는가. 지금의 신분 체계를 무너뜨린다고 하더라도 인간은 또다시 새로운 신분제도를 만들어 위와 아래를 둘걸세. 그것이 본능이야. 만약에 돈이 곧 신분이 되는 세상이 오면 어떨 것 같나? 난 그것도 비참한 건 매한가지일 듯싶으이." (구용하) -419쪽 

시대적 배경을 18세기 후반으로 잡은 것은 아주 현명해 보인다. 자본주의의 싹이 트고 있고 신분제도가 흔들리고 있는 때, 개혁의 꿈을 안고 있는 군주가 화합정책을 쓰려고 애쓰고 있던 그 모든 조건들이 작품 속에서 하고 싶은 말들을 맘껏 뱉을 수 있게 뒷받침해주고 있다. 이들의 이야기 2부에 해당하는 '규장각 각신들의 나날'에서는 좀 더 매섭고 구체적인 정책 비판도 나올 수 있지 않을까? 그러면서도 로맨스는 빠뜨리지 않고.  

순식간에 읽었는데, 그래도 더 읽을 거리가 3권이나 남아 있어서 흐뭇하다. 오랜만에 마음이 불편하지 않은 재미난 소설을 만났다. 덕분에 행복하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락방 2010-12-21 17: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거 한 3,4년전에 읽었는데 인용하신 대사들을 보니 아주 낯설어요. 물론 임금이 멋지다는건 책을 읽으면서 알고 있었지만. 마침 어제 누군가가 성균관을 읽었다면서, 선준과 윤희의 대사가 너무 좋아서 제가 페이퍼를 썼을거라고 생각했대요. 그런데 저는 성균관에 대한 페이퍼는 쓴 적이 없고, 이 책을 재미있게 읽었음에도 읽고나서 바로 방출했었거든요. 아, 갑자기 돌려달라고 해서 다시 읽어보고 싶어지는데, 그렇다고 또 제가 다시 읽을것 같지는 않네요.
규장각 각신들의 나날도 친구가 빌려준 지 일년이 다 되어 가는데 계속 그냥 두고만 있어요. 읽을 생각을 안하고. 하핫 ;

마노아 2010-12-21 17:38   좋아요 0 | URL
저 이거 읽으면서 막 나도 작가가 되고 싶다... 이런 생각이 막 꿈틀거렸어요. 하나의 세상을 창조시키는 멋진 작업이잖아요. 게다가 이렇게 사랑도 만들어내고 이뤄지게도 하고 아프게도 하고, 하여간 어찌나 감정이입이 되던지 부럽고 질투나고 막 신나고... 하여간 깔깔대며 읽고 있으니 엄마가 뭐가 그렇게 재밌냐고 한 소리 하셨어요.^^;;;
소설 두 번 잘 안 읽는 저니까, 아마 저도 두번씩 곱씹어 읽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다음 이야기를 기대하고 있어요. 하지만 제일 바라는 건 드라마를 하나 더 만들어주는 거죠. 제일 힘든 바람이긴 해요.^^

같은하늘 2010-12-23 2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성스~~~ 전 TV도 책도 보지 않았지만, 푹 빠져든다는 소문이...^^

마노아 2010-12-24 02:04   좋아요 0 | URL
하나만 본다면 드라마를 더 추천하겠는데, 드라마를 보면 애정이 생겨서 원작도 챙겨보게 되지 않을까요? ^^

섬사이 2010-12-24 1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전 우리 큰딸때문에 읽었어요.
<규장각 각신들의 나날>까지요.
네 권의 책이 딸아이 친구들 사이를 돌다가
지금은 도서관 아줌마들 사이를 돌고 있지요.
작가가 <청나라 사신들의 나날>을 집필 준비중이라던데
딸아이와 함께 기대하고 있답니다. ^^
행복한 크리스마스 보내세요, 마노아님~

마노아 2010-12-24 13:07   좋아요 0 | URL
이런 책은 한 번 돌면 되돌아오기까지 오래 걸릴 것 같아요. 거의 붐을 형성하잖아요.^^
와우, 청나라 사신들의 나날이 다음 작품이에요? 뭔가 집필 중이란 소린 들었는데 제목의 운을 맞췄네요.
캐릭터도 겹치는지 궁금해요. 아무튼 기대가 커요. 2권 읽고 있는데 무척 재밌어요.^^
섬사이님도 크리스마스 행복하게 지내셔요. ^^
 
브리다
파울로 코엘료 지음, 권미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을 사게 된 것은 순전히 '표지' 때문이었다. 표지가 무척 인상적이었고 강렬하도록 예뻤다. 바람 부는 들판에 초록 원피스 입은 여인이 뒷짐 지고 서 있는데, 그 모습이 어찌나 단아하고 매력적이던지 '저기요!'하고 부르고 싶은 마음이었다.  

내용에 대한 정보도 전혀 몰랐다. 그냥 'feel'이 통했달까. 분명 책의 내용도 내 마음에 쏙 들거야...라는 근거 없는 믿음으로 책을 구입했다. 그리고 내 감이 얼마나 부정확한지 절실히 깨달았다.  

이 책은 파울로 코엘료가 연금술사 직후에 집필해서 1990년에 출간한 소설이라고 한다. 연금술사가 무려 1988년도 작품인데, 읽을 때는 전혀 오래됐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그런데 이 책은 사실 꽤 초기작이라는 것은 알고 읽어서인지 보다 촌스럽고 거칠다는 인상을 받았다. 어쩌면 사전정보에 의한 선입견일 수도 있다.   

브리다는 그가 순례 길에 올랐을 때 만났던 실존 여성을 모델로 쓴 작품이라고 한다. 세상의 비의를 배우고 싶다는 이유로 숲속의 현자를 찾아가서 배움을 청하는 젊은 여자의 이야기이다. 좀 더 정확히는 '마법사'를 찾아갔고, 그녀는 22살의 대학생으로 낮에는 직장 생활을 하고 밤에 학교를 다녔다. 남자 친구가 있고, 비의를 깨우치는 과정에서 본인이 '마녀'라는 것을 깨우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태양 전승과 달 전승이 나오고, 그녀의 소울 메이트를 알아보기까지 혼란을 겪었고, 의식을 치르면서 성장해 간다. 대략의 내용은 이렇다. 그러니까 참... 주제와 소재에 특별히 관심을 갖지 않는다면 좀처럼 소화하기 힘든 내용이랄까. 특유의 '잠언'으로 매끄럽고 그럴싸한 문장들은 줄줄이 나온다. 그러니까 도무지 이해도 안 가고 마음에도 안 차지만 끝까지 보게 만드는 힘은 있다.(게다가 제법 빠르게 읽힌다!) 

그렇지만 읽는 내내 답답했다. 뭔가 현실적인 이야기, 그리고 살아있는 이야기로는 다가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꽤 좋아하던 작가였는데 이제는 좀처럼 소통하기 힘든 어떤 벽을 느꼈달까.  

사실 그다지 주목하지 않았었는데, 파울로 코엘료는 매번 작품에서 어떤 '영성'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였다. 자아의 신화를 찾는 것도 그렇거니와 우주의 이야기, 내면의 목소리, 신과의 대화 등등.... 뭔가 현실적이고 우리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기보다 자꾸 내면을 탐구하고 신화와 전설에 천착하는 모습을 보였던 것 같다. 내가 읽었던 작품으로는 연금술사/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피에트라 강가에서 나는 울었네/악마와 미스 프랭/11분/다섯번째 산/흐르는 강물처럼/승자는 혼자다..까지였던 것 같다. 이 중 가장 좋았던 것은 '피에트라 강가에서 나는 울었네'였고, 에세이는 내 취향이 아니었고(개인적으로 에세이 장르를 안 좋아한다.) 승자는 혼자다는 꽤 싱거웠다. 그래도 대체로 믿고 읽는 작가진이었는데 이번에는 읽기가 좀 힘들었다. 사람들이 나는 파울로 코엘료 별로야... 라고 말할 때 잘 이해가 안 갔는데 어쩌면 내가 느낀 이 기분과 만나는 것일까?  

어쩌면 이 책에서 나오는 켈트족이나 드루이드교, 성 패트릭의 기독교 전승 등이 그 문화권에 전혀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기에 더 거리감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확실히 이 책보다 나중에 나온 책들보다는 궁합이 확연히 떨어진다.  

몇몇 재밌는 부분이 있었다. 브리다의 남자친구가 전생을 기억하는 브리다의 얘기를 못 믿겠으면서도 믿는 것을 예로 들어줄 때의 이야기다. 131쪽인데 '전자 발사' 기계가 두 개의 구멍에 전자를 발사하면 전자가 분리되지 않은 채 두 개의 구멍을 동시에 통과한다는 이야기를 한다.(브리다의 남자 친구 로렌트는 과학도.) 이 실험은 내가 바로 하루 전에 애니메이션으로 본 내용이다. 파울로 코엘료 식으로 이야기하자면 뭔가 우주가 끌어당기는 느낌이랄까.  

현자로 나오는 마법사들보다 브리다의 아버지가 딸에게 들려준 말이 내게는 더 지혜롭게 느껴졌다.  

"얘야, 이 세상에 완전히 잘못된 건 없단다." 아버지는 시계를 바라보며 말했다.
"멈춰서 있는 시계조차 하루에 두 번은 시간이 맞잖니." – 137쪽


훌륭한 아버지시다.  

'포르토벨로의 마녀'는 읽지 못했는데, 그 역시 표지가 예뻐서 관심은 갔더랬다. 그런데 거기도 등장하는 '마녀'가 나를 긴장시킨다. 브리다의 마녀 같은 느낌이면 좋아하긴 힘들 것 같다. 워낙 마법사나 마녀는 SF소설이나 영화 속의 느낌으로만 받아들이는 빈약한 상상력의 독자도 문제가 있지만, 억지로 궁합을 맞춰가며 읽기엔, 읽어야 할 책도, 읽고 싶은 책도 지나치게 많으니까.

그래도 사두고 못 읽은 '순례자'는 언제가 읽어야지. 그래도 아주 애정이 사라지진 않아서 궁금하긴 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은교
박범신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시인 이적요가 사랑에 빠졌다. 70 노시인을 격정으로 몰아버린 소녀는 열 일곱이었다. 그리고 시인의 필명은 적요寂寥였다. 

적요寂寥 

이름처럼 고요하게, 그리고 고아하게 살아온 삶이었다. 평생 시 외에는 잡문을 전혀 발표하지 않았고, 가정도 꾸리지 않았고, 젊어서는 독재정권에 저항하다가 10년간 옥고도 치렀던, 그래서 누구도 범접하기 힘든 하나의 성을 쌓아올린 시인 이적요, 그가 사랑에 빠졌다.  

언뜻 롤리타가 떠오르기도 하고 괴테가 떠오르기도 하는데, 그저 단순히 사랑의 열병 이야기는 아니었다. 시작은 시인의 노트에서 출발한다. 시인은 죽음을 앞두고 있었고, 유서도 이미 써두었다. 시인은 자신의 인세 수입을 한은교에게 권리를 주었고, 밀봉해서 남기는 이 노트는 사후 일년 뒤 개봉할 것을 지시했다. 이 모든 일은 오랜 지인인 후배시인 Q변호가사 맡아서 해줄 것도 당부했다. 그는 명백히 한은교를 사랑했다고 얘기했고, 그리고 자식같던 관계의 후배 작가 서지우를 본인이 죽였다고 했다.  그러니 사후 1년 뒤에 공개할 시인의 노트는 은교를 만나 사랑하기까지, 그리고 서지우를 왜, 어떻게 죽였느냐에 대한 가감없는 기록을 담고 있었다. 믿지 못할 놀라운 이야기를 하면서 시인은 자신이 반성하지 않고 있다고 분명히 밝혔다. 회한도 없다고 했다. 시인의 마지막 말은 지극히 시적이었다. 

눈이 내리고, 그리고 또 바람이 부는가. 소나무숲 그늘이 성에가 낀 창유리를 더듬고 있다. 

관능적이다. -13쪽 

관능적이다-라는 표현이, 이 작품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좋은 단어가 될 터이다. 사람을 죽였다는 얘기를 하면서까지 시적 언어를 다듬은 시인의 행적과 생각을 읽어나가는 일은 그 자체로 관능적이었다.  

Q변호사는 얼마나 충격을 받았을까. 사후 1년이 지나 기념사업을 시작하고 있는 마당에 접한 이 진실에 그는 정신이 혼미했을 것이다. 게다가, 은교에게는 또 다른 노트가 있었다. 시인보다 먼저 죽은 서지우 작가가 남긴 노트. 그렇게 두 개의 노트가 교차해서 지나가고 현재를 진행해 나가는 Q변호사의 이야기가 서술된다. 작품은 미스테리했고 은밀하게 관능적이었고, 그리고 서로를 파멸로 이끌어가는 인물들로 인해 서글펐다.  

시인 이적요는 전략적인 인물이었다. 그가 평생 시만 고집한 것도, 독신으로 산 것도, 또한 필명을 '적요'라고 지은 것도 모두 그의 철저한 계산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평생 오로지 시만 썼다는 게 무슨 자랑이 될 수 있단 말인가. 혼자 살았다는 게, 필명이 적요寂寥라는 게 무슨 카리스마인가. 그러나, 우리 풍토에서는 그런 것들이, 나의 시작詩作에 붙어 놀라운 성과를 확대 재생산해낼 수 있었다. 시인으로 살아남기를 꿈꾸었기 때문에, 내 시의 가치를 전략적으로 높은 곳에 올려놓고자 하는 나의 욕망은 부도덕하지 않다고 믿었으며, 그것이 편견으로 가득 찬 지식인 사회에 대한 통렬한 야유의 한 가지 방식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어쩌면 시인으로서의 내 성공에 대해, 그 무렵 자학적인 묘한 감정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도대체 내 시가 그만한 존경과 흠모를 받아서 마땅한가. 내 시에 대한 대중의 존경과 흠모는 우리 사회의 미묘한 관습들을 재빨리 간파해서 반어적으로 부응함으로써 얻은 과도한 전리품은 아닌가.(...)내가 평생 구도하듯이 혼자 살았다는 것도, 잡문 한 번 쓰지 않았다는 사실도 물론 회자됐다. 나의 입장에서, 그런 평가들은 나의 전략에 머리 좋은 자들이 놀아난 결과에 불과했다. 나는 그래서 혼자 앉아 속으로 말하곤 했다.

"엿 먹어라!" – 142쪽

그런데 세상을 향해 엿 먹어라!라고 외쳤던 시인의 냉소는, 결국 시인 자신에게로 돌아왔다. 시인은 스스로가 위선자임을 알았고, 정직하지 못하다는 것도 알았다. 그 자신, 사실은 겁이 많은 인간임도... 알지 않았을까. 그런 시인의 곁에 아들같은 제자 서지우가 있었다. 학생 시절 시인을 스승으로 잠시 만났고, 갑작스레 문학도의 길을 걷고자 전공을 때려치웠던 그는, 애석하게도 문학적 재주가 부족했다. 가르쳐도 보고 달래도 보고 야단도 쳐보았지만, 기본적으로 밭이 부실해서 소출이 적었다. 본인에게 재주는 없건만 남의 재주는 알아볼 정도의 안목은 있던 것이 또 그를 불행하게 만들었다. 그는 스승 이적요를 존경했고 사랑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이 망가지는 게 싫었고, 그가 쌓아온 이미지가 무너지는 것도 참을 수 없었다. 자신에겐 환상과도 같은 시인이 어린 처녀 은교를 사랑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만약 서지우가 은교를 스승을 망칠 아이로 경계하지 않았더라면, 그러면서 동시에 은교를 탐내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스승의 자존감을 더럽히지 않았더라면, 오히려 이적요 시인의 사랑은 청춘을 향한 그리움과 동경 정도로 끝나지 않았을까. 서로가 서로를 아끼고 사랑했지만, 도리어 애증으로 갈무리한 스승과 제자는 파국을 향해 치달을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은 똑같이 잘못했고 똑같이 어리석었고, 똑같이 가여웠다. 그 사이에 있던 은교는, 그것을 알아차렸다. 동시에 사랑받았고, 동시에 두 사람을 우롱한 결과를 낳았지만, 동시에 두 사람의 사이를 질투했던 열일곱 그 아이 은교. 

나이라는 것이 참 얄궂었다. 서지우는 스승의 반토막 나이로 상대적으로 젊은 자신을 과시했다. 늘 열등감에 파묻혔던 그로서는 내세울 수 있는 유일한 무기이기도 했다. 그런 서지우도 십대 은교에 비하면 아저씨에 불과했다. 인기와 명성을 얻었지만 스스로의 능력으로 인한 결과가 아님을 알고 있으니 불안하기만 했고, 뭐라도 좀 성취를 얻고 싶었지만 앞이 깜깜하니 도둑질을 하면서도 자기 합리화를 시킨다. 시인도 마찬가지였다. 모욕과 분노를 자양분 삼아 처절한 응징과 복수를 합리화한다. 벼랑끝으로 상대를 몰아갔지만, 밀쳐 떨어지는 그 발목에 자신의 발목도 함께 묶여 있음을 알지 못했다. 알았다 해도, 멈출 수 없었다. 그렇게 그들은 둘이 아니라 하나였다.

늙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범죄'가 아니다, 라고 나는 말했다. 노인은 '기형'이 아니다, 라고 나는 말했다. 따라서 노인의 욕망도 범죄가 아니고 기형도 아니다, 라고 또 나는 말했다. 노인은, 그냥 자연일 뿐이다. 젊은 너희가 가진 아름다움이 자연이듯이. 너희의 젊음이 너희의 노력에 의하여 얻어진 것이 아닌 것처럼,

노인의 주름도 노인의 과오에 의해 얻은 것이 아니다,

라고, 소리 없이 소리쳐, 나는 말했다. – 250쪽 

작품 속에서 묘사된 여러 정황처럼, 늙었다는 것만으로 차별 받고 멸시를 받는 일이 많은 불공평한 세상이다. 나이로 우대 받는 일도 있다고 해서 상쇄될 성질의 서러움이 아니다. 갖고 싶은 것이 없었다면 허허 웃으며 넘어갈 수 있는 일도 욕심이 눈을 가리니 노여움이 커진다. 헌데, 찬란하게 빛나는 젊음에 대한 열망과 도전, 사랑에 대한 갈망 없이 '계획했던' 시인의 인생을 마무리 했더라면, 시인은 더 행복했을까? 물론 더 나빠졌을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그리 되면 그는 자신이 엿먹이고 있다고 믿었던 세상이 자신에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는 것을 몰랐을지도 모른다. 정작 통렬하게 비판받아야 할 대상이 본임임을 인정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건 시가 아니라는 걸 말이다.  

가장 초라해진 것은 은교라고 생각한다. 어리다는 것, 반짝반짝 빛나고 있음을 스스로도 알고 있고 그것을 이용할 줄도 알았던 그 소녀. 마음 가는대로 당기기엔 인생이란 불놀이가 지나치게 위험하다는 것을, 이제 온몸에 각인하며 살아야 할 테니 말이다. 그런 제멋대로 은교도 지켜야 할 이름에 대해서 행동으로 움직였다는 것은 일종의 면죄부로 읽혀진다. 사랑에도, 젊음에도 책임이 따른다는 무서운 사실을 동시에 확인하면서...  

작가는 이 작품을 한 달 반 만에 미친 듯이 써내려갔다고 한다. 그것도 밤에만 썼으니 독자도 밤에만 읽으라고 당부한다. 밤에만 읽기에는 지나치게 관능적인 이 소설을, 나는 낮밤 구분하지 않고 몰아쳐서 읽었다. 볕을 염두에 두고 읽기엔 이야기의 흡인력이 너무 강렬했다. 동반자살이라도 하듯 끝을 향해 달려나가는 욕망의 주인공들은 위태롭기 그지 없었지만, 어쩔 수 없이 자연스러운 인간 군상임을 부인할 수 없는 노릇이다. 소설 속에 세상이 보이고 인간이 보이니, 소설가는 참으로 위대하지 않은가.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0-12-08 15: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2-08 16: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2-09 02: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2-09 10: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꿈꾸는섬 2010-12-08 2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노아님 너무 멋진 리뷰에요. 은교, 읽어 보고 싶네요. 너무 궁금해졌어요.

마노아 2010-12-09 00:16   좋아요 0 | URL
헤헷, 꿈꾸는섬님도 관능의 바다에 풍덩~ 빠져보셔요.^^ㅎㅎㅎ

같은하늘 2010-12-09 0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은교> 리뷰를 보면 극과 극을 달리던데...
마노아님 리뷰를 보니 꼭 봐야할듯~~

마노아 2010-12-09 02:18   좋아요 0 | URL
모 아니면 도인 은교 리뷰들이에요.^^

감은빛 2010-12-10 17: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책 나왔을 때, 제 선생님이셨던 강은교 시인이 생각났습니다.
이 리뷰를 읽고 나니, 관심이 생기네요!
멋진 리뷰 잘 읽었습니다. ^^

마노아 2010-12-10 21:06   좋아요 0 | URL
오늘 글샘님의 시 페이퍼를 줄줄이 읽다가 강은교 시인의 이름을 본 것 같은데 그분인지 모르겠어요.
재밌는 책이에요. 시간 나실 때 함 읽어보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