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피아 : 돈과 마음의 전쟁
우석훈 지음 / 김영사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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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꼽사리다를 한참 들을 때 우석훈의 소설 출간 소식을 들었다. 그러니까 지난 대선 전이었나보다. 영화로도 제작이 될 것이고 어쩌고 저쩌고... 우석훈은 몹시 흥분되어 있었고 들떠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기분은 소설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우린 김대중, 노무현으로 이어지는 민주 정부 10년을 지냈지만, 그 10년 동안에도 참 허덕이며 살았다. 물론, 이때의 '우리'는 지금도 재산 숨기느라 분주한 그런 사람들을 말함은 아니다. 정치적으로 민주주의를 지향해도 경제 민주화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결국은 제자리 걸음이라는 걸 경험으로 체득했다. 그래서 지난 대선에선 '경제 민주화'가 화두였다. 본심이야 어떨지 몰라도 박근혜 후보 역시 표면적으로 경제 민주화를 소리 높여 외쳤다. 뭐, 믿지는 않았지만.


바로 그 경제 민주화를 가로막는 주범으로 세글자를 꼽을 수 있다. 모.피.아. 이 책은 바로 그 모피아와 모피아의 권력을 찾아와 시민의 품으로 안겨주려고 하는 세력 간의 전쟁을 다루고 있다. 이른바 쩐의 전쟁이다. 책 속에 등장하는 돈의 단위가 너무 어마어마해서 오히려 실감이 덜 난다. 모피아의 대부 이현도는 시민의 손으로 뽑힌 대통령을 흔든다. 첫번째 공격은 22조였다. 하핫, 이거 4대강 사업에 들어간 돈 아닌가. 1조라는 돈은 만 명의 사람에게 각각 1억원 씩 나눠줄 수 있는 돈이다. 거기에 곱하기 22. 1억도 어마한데 1조를 넘는 단위가 계속 나온다. 대통령은 이 돈을 막을 수 없었다. 결국 경제권을 넘겨주고 식물 대통령으로 전락한다. 그 과정에서 모피아들은 야금야금 경제 부처를 장악하고 국무총리 자리를 차지하며 자기들의 기득권을 확장한다. 이런 자세한 내막을 모르는 국민들은 힘없고 무능한 대통령을 타박한다. 힘껏 밀어서 겨우 정권교체를 이루어 냈는데, 그후로도 나아지는 삶이 없으니 얼마나 힘이 빠지겠는가. 


지난 대선에서 정권 교체를 이루지 못했지만, 이루었다 해도 위와 같은 시나리오가 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이 충분히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러니까 하나마나한 정권 교체가 의미 없다는 건 아니지만, 지금껏 이렇게 배불려 온 모피아라는 실체가 두렵다. 눈에 보여서 대놓고 욕할 수 있는 재벌 그 이상이 아닌가 싶다. 


이현도는 공격에 앞서 오지환이라는 한국은행 팀장을 청와대에 심었다. 오지환은 성실한 인물이었고 욕심도 없는 사람이었다. 이현도는 젊은 시절의 자신을 떠올리며 대통령이 최소한의 방어는 할 수 있게 똑똑한 인물 하나를 내준 것이다. 그러니 대통령은 오지환을 더더욱 신임하기 어려웠다. 적이 보낸 이 실력자가 진정 내 사람인지, 아니면 스파이인지 어찌 판단할 수 있을까. 물론, 함께 시간을 보내며 그가 보여준 진심들이 결국은 대통령의 마음을 움직였지만, 이런 캐릭터 설정은 지나치게 낭만적이다. 설득력은 부족한. 


작품에는 대단하다 싶은 인물들이 많이 등장한다. 팬타곤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무기녀 김수진, 돈세탁 전공 경제녀 허세연, 마지막으로 법률녀 남진경까지. 킬러들이 등장하고, 그 킬러들을 단숨에 제압하는 영화적 캐릭터들이다. 뭐랄까. 영화로 만들면 정말 그림은 잘 나오겠다 싶지만, 그 영화 역시 개연성이나 설득력은 좀 떨어지지 않을까 싶다. 아무래도 본업이 소설가인 작가가 아니다 보니 대사들도 좀 어색하다. 또 특유의 어려운 말 많이 쓰는 습관이 나와서 경제 용어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로서는 이해가 안 되는 대목들이 많았다. 그러니까 그런 면에서 이 책은 꽤 불친절하다. 


대통령은 권력을 상실하고 반쪽 권력자가 되었지만 절치부심했다. 다시 올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서 오지환을 비롯한 세력들이 방어진을 구축했고, 22조의 기금을 마련했다. 다시 환 공격이 시작되었을 때 막어내야 할 밑천이었다. 또 대통령은 북한과 접촉해서 은근하게 통일을 준비했다. 그 대목에서 김정은과 리설주까지 나온다. 언론을 통해 접하던 이미지보다는 훨씬 살아있는 냄새가 나는 캐릭터로 말이다. 대한민국이 통일을 준비하니 미국이 불편한 심경을 내비친다. 강정에 해군기지를 세우겠다고 하니 이번엔 중국이 버럭 성을 낸다. 이렇듯 이 책에는 새누리당과 민주당,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등등 실제 인물들이 등장하고, 실제 있었던 사건들도 쏙쏙 끼어 있다. 심지어 마지막에 무한대 금액의 공격이 들어올 때는 방어하기 위한 작전 명이 '저녁이 있는 삶'이었다. 지난 대선에서 나온 구호 중에서 가장 매력적이었던 그 문구 말이다. 


3부에 등장한 머니 전쟁은 그야말로 치열했다. 모피아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는 대통령, 통일로 다가서려는 대통령에게 하야를 하지 않으면 무한대의 돈으로 공격하겠다고 이현도는 선포했다. 오지환을 비롯한 청와대 쪽 인물들은 밤을 지새우며 막아냈지만 준비한 돈을 다 털어냈을 때 환율은 2,200원이었다. 여기서 200원만 더 올라가면 대한민국이 파산이었다. 상대는 우체국 연기금마저 끌어다 썼다. 국민의 세금으로 국민을 치는 공격이 나온 것이다. 정말 야비하고 더럽기가 한량 없다. 누구누구 닮았다고 말하고 싶어지는구나!


밤새 50조원의 공격을 막아냈지만 더 이상은 무리였다. 오지환은 핸드폰으로 동영상을 찍었다. 자신들이 지금 어떤 전쟁을 치르고 있는지, 대통령이 어떤 입장에 있는지, 그리하여 대한민국이 얼마나 위험한 지경에 이르렀는지를 설명하고 국민들에게 하루만 돈을 빌려달라고 호소했다. 공적자금과 연기금이 자국의 화폐를 공격하는 이 이상한 나라의 역사를 바꾸자고, 국민의 마음이 담긴 돈이 투기자금을 이겨내는 걸 보여주자고 전 세계를 상대로 호소했다. 시민과 연대의 정신이 투기의 시대를 극복하고 신냉전으로 가는 걸 이겨내자고 읍소했다. 잘 쓰면 유용한 이 돈이 더 이상 무기가 되어 돌아오지 않게, 평화의 돈으로 만들자고 절규를 담아 부탁했다. 동영상은 삽시간에 인터넷으로 확대되었고, 대통령은 국회를 향해 걸어갔다. 그가 두른 띠의 앞에는 '원화를 지키자'라고 써 있고, 뒤쪽에는 '경제 민주화'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대통령의 행렬에 시민들이 동참했고, 방송국들은 앞다투어 그 장면을 보도했다. IMF 때 돌반지 꺼내가며 나라의 위기에 십시일반으로 도움이 되었던 그 국민들이 또 다시 대통령을 돕기 시작했다. 꼬깃꼬깃 구겨진 만원자리 몇장에 주름진 손에 오래도록 걸쳐 있었던 금반지를 대통령의 주머니에 넣어줬다. 시민들은 은행으로 달려가 돈을 이체하기 시작했다. 이런 움직임은 전 세계를 향해 확대되었다. 대한민국 국민이 아니어도, 이 무시무시한 돈의 전쟁에서 검은 돈이 설치지 못하도록 힘을 보내려고 하는 연대의 움직임이 곳곳에서 포착된 것이다. 재밌었던 것은 중국 반응이었다. 무려 1조원 이나 되는 돈을 빌려준 인민 은행은 일본쪽 엔화는 받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개인적인 메시지를 같이 보냈다. 하하핫, 나름 깨알 같은 재미랄까. 


세계적 연대는 원산 부두 노동자 파업을 떠올리게 했다. 일제 강점기 원산에서 있었던 총파업. 그때 세계 노동자들이 연대의 움직임을 보였다. 그 중에는 식민본국 일본인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국경을 넘는 뜨거운 연대였으며 참여였다. 이 책을 읽는 동안 그 모습이 겹쳐졌다. 어찌 보면 무척 감상적인 접근이고 또 어찌 보면 작위적일 수도 있는데, 그러면서도 이 신파스런 장면들은 뜨거웠다. 마음이 돈을 이겼던 것이다. 잔돈이 목돈을 이겼고, 푼돈이 큰돈을 이겼다. 시민들은 자신의 손으로 뽑은 대통령을 지켜냈다. 하야 선언을 할 뻔한 국회 앞에서 대통령은 승리를 선언했다. 머니 전쟁에서 시민들과 국제 연대의 힘으로 이겨냈고, 빌린 돈을 갚고도 무려 30조원이나 남을 것이라고 했다. 대통령은 이번 일을 계기로 외환은행을 '원화은행'으로, 국민의 돈을 지키는 공공의 은행으로 전환하자고 말했다. 또 이번에 희생양이 된 산업은행은 시대의 흐름에 맞추어 시민은행으로 전환하자고 했다. 그렇게 시민을 위한 경제, 시민경제를 받치는 은행을 만들자고. 모두모두 반가운 소리였다. 이게 소설이라는 것이 안타까울 만큼.


작품에는 나름 로맨스도 나온다. 오지환과 무기녀 김수진이 사랑에 빠지는 과정은 자연스럽지 않다. 단지 사십 대의 사랑이라는 표현으로 어떤 설득력을 가지겠는가. 아무튼 두 사람은 사랑을 했고 가정도 이뤘다. 그리고 이들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는 북한에서 출생했다. 그 옛날 '신라방'이 있었던 것처럼 평양에는 '한국방'이라는 것이 생겼다. 당장 개성공단만 보더라도 지금으로서는 참으로 소원한 일이지만, 정말 언젠가는 한국방이라는 것이 평양에 생기고, 조선방이라는 것이 서울에도 생기며 자연스럽게 교류하고 협력할 때가 오기를 소망한다. 이렇게 소설 속에서나 보는 것 말고, 현실 속에서 실체적으로 이루어지기를... 퇴직 공무원들의 로펌 취직을 10년 간 금한다는 법률안 제안이 책 속에 있었는데, 현실에서도 이런 것 이뤄졌으면 좋겠다. 모피아라는 곰팡이가 대한민국을 장악하며 악취를 풍기지 못하도록 말이다. 


이야기에 힘이 많이 들어가 있고, 이어지는 흐름은 다소 부자연스럽다. 엔딩씬은 문장이 많이 부족하다는 것도 느끼게 했다. 그래도 이야기 속에서 만나고 싶은 우리나라가 있었다. 만들고 싶은 우리 사회도 있었다. 그걸 보여준 것은 또 하나의 공이지 싶다. 돈과 마음의 전쟁! 과연 대적이 가능할까 싶은 그 대상과 당당하게 싸워서 이길 수 있다는 희망이 가능했으면 좋겠다. 소설처럼, 영화처럼. 


덧글) 오타가 좀 있다.

78

유독 내려하지 않거나 >>> 내려가지 않거나

104

시민의 정부에서 청와대는 뱅커들이나 기업들이 움직임을 잘 관찰하고 있었지만 >>> 기업들의

109

김수진의 팔이 오지환이 어깨를 감쌌다. >>> 오지환의

121

노 대통령 이야기를 하면서 조금씩 어깨가 흔들리던 이현도의 눈에서 살짝 눈물이 흘렀다. >>> IMF 때 이야기니까 김 대통령이라고 해야 하지 않나?

125

오지환이 한국은행을 중심으로 공개적으로 움직이는 돈의 세계에 속한 사람이라면 허세연은 어둠 속에서 움직이는, 그야말로 검의 돈의 세계에 속한 사람이었다. >>> 검은 돈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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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int236 2013-07-27 14: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돈을 빌려달라, 검은 돈이 더 이상 설치지 못하게 하자면서 도움을 요청하는 부분에서 뿜었습니다. 내용은 비장한데 드래곤볼의 원기옥하고 똑같은 설정이라. 우석훈이 드래곤볼을 재미있게 봤나봐요.

마노아 2013-07-27 23:43   좋아요 0 | URL
저는 7번 방의 선물을 떠올렸어요. 말도 안 되는 신파에 억지 설정인데도 눈물샘을 자극하잖아요. 천만 명이 볼만큼의 영화가 아니건만 거뜬히 천만이 보고서 꽤 호평도 받았던... 꼭 그런 느낌이었어요.

곰곰생각하는발 2013-07-28 06: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이거 소설이었습니까 ?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마노아 2013-07-28 10:43   좋아요 0 | URL
네! 무려 소설이었습니다.^^ㅎㅎㅎㅎㅎ
 
시간 가게 - 제13회 문학동네어린이문학상 수상작 보름달문고 53
이나영 지음, 윤정주 그림 / 문학동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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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작스럽게 하게 된 교실 대청소 때문에 학원에 늦게 되었어요. 셔틀 버스를 놓쳤거든요. 부랴부랴 학원으로 향하는 찰나에 시간 가게 전단지를 보게 되었어요. 


시간이 필요하십니까?

시간이 부족한 분께 시간을 드립니다.

-시간 가게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호기심이 일었어요. 나는 그때 정말 시간이 필요했거든요. 전학 온 새 학교에서 수영이를 꺾고 1등을 하는 게 엄마의 꿈이었잖아요. 시간 가게 할아버지는 하루에 한 차례, 10분의 시간을 살 수 있다고 했어요. 그리고 그 시간을 사는 대가로 지불해야 하는 것은 행복한 기억이라고 했죠. 세상에, 단지 기억 뿐이래요. 큰 돈을 요구하면 어쩌나 걱정했거든요. 행복한 기억 한자락 내주고 살 수 있는 시간이라니, 이건 분명 괜찮은 거래라고 생각했어요. 엄마가 그랬잖아요. 앞만 보고 달려야 한다고. 


처음으로 시간을 사게 된 건 학원까지 가는 길이었어요. 지각하지 않으려고 했던 거죠. 내 몸속에서 뭔가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었지만 그게 뭔지 어떻게 확인하겠어요. 일단 수업에 늦지 않는 게 중요했거든요. 지각에 단어 시험까지 겹쳐서 숙제가 배로 늘어났어요. 엄마한테 잔소리 듣기 싫어서 몰래 하느라고 애먹었어요. 내가 얼마나 바쁘게 살고 있는지, 초단위로 쪼개서 살고 있는지 엄마는 아세요? 엄마가 짜준 계획표는 30분 단위로 꽉 차 있죠. 나 그거 엄청 숨막혔는데, 엄마도 그거 알고 계세요?


수학 시험 때였어요. 문제 하나가 막히자 나머지도 줄줄이 안 풀리는 거예요. 수영이는 쓱쓱 문제를 풀고 있는데 말이지요. 난 초조했어요. 또 다시 수영이를 이기지 못하면 엄마는 얼마나 실망할까요? 20등도 아닌 2등인데도 엄마는 나를 낙오자 취급 했잖아요. 엄마에게는 1등 아니면 아무 의미가 없었던 거죠. 나는 시간을 사기로 했어요. 10분, 10분이면 충분했거든요. 교실 안의 모든 것이 멈췄어요. 내가 산 10분이 흘러가는 동안 움직일 수 있는 건 나뿐이거든요. 난 수영이의 시험지를 베꼈어요. 그 덕분에 올백을 맞았죠. 당연히 전교 1등이에요. 수영이는 다른 과목에서 한문제를 틀렸대요. 난 정말 기뻤어요. 내 힘으로 얻은 성적이 아니었지만 크게 문제 삼지도 않았어요. 이건 나만 아는 비밀이니까요. 1등하면 전학 오기 전 내 단짝 친구인 다현이를 생일날 초대해도 된다고 했잖아요. 다현이에게 이 소식을 전하자 나만큼이나 기뻐해 주었어요. 역시 내 베프답죠. 


1등을 했지만 행복한 기분은 오래 가지 않았어요. 시험이 한번 뿐인 게 아니잖아요. 단지 중간고사가 끝났을 뿐이니까요. 엄마는 영어 인증 시험도 잘 봐야 한다고 했고, 체력을 키우기 위해서 스포츠 클럽을 다니는 건 어떠냐고도 하셨죠. 난 사실 싫었어요. 내겐 그저 체육 학원일 뿐 스트레스 해소는커녕 스트레스 추가용일 뿐이거든요. 


난 자꾸자꾸 시간을 샀어요. 준비물을 깜박했을 때 친구들 것을 몰래 가져오는 용으로 쓰기도 했고, 밉살맞은 친구를 골탕 먹일 때도 10분의 시간을 샀어요. 근데 이상해요. 시간을 사면 살수록 점점 더 행복한 기억을 떠올리는 게 힘들어졌어요. 하필 그날은 수학경시대회였죠. 행복한 기억이 떠오르지 않아서 애먹다가 지난 중간고사 때 전교 1등을 했던 기억을 떠올렸어요. 그런데 이게 어쩐 일일까요. 시간 가게에서 받아온 시계의 버튼을 눌렀는데도 시간이 멈추지 않는 거예요. 난 시계가 고장난 줄 알았어요. 덕분에 시험은 망쳤죠. 또 다시 1등은 수영이 차지. 


난 시간 가게 할아버지에게 따져 물었죠. 할아버지는 머리로 만들어 낸 행복이 아니라 몸과 마음이 기억을 하는 진짜 행복으로만 시간을 살 수 있다고 했어요. 이게 뭔 소린지... 하여간 나는 시간이 필요했어요. 그래서 시계를 고쳐달라고 했죠. 할아버지는 그 대신 행복한 기억을 두 개씩 팔아야 한다고 했어요. 난 거래를 했어요. 2개 아니라 3개를 팔아서라도 난 시계가 필요했어요. 그렇지 않고는 시험을 잘 볼 자신도 없고, 엄마의 기대를 만족시킬 수도 없거든요. 


엄마가 날 위해서 열심히 일한다는 것 알아요. 아빠가 위암으로 돌아가시고 엄마가 나만 보고 산 것두요. 근데, 그것 알아요? 그 기대가 무겁다는 것. 기대가 곧 사랑이라는 것 알지만, 사랑이 아프기도 하다는 것 말이에요. 엄마를 만족시키는 일이 나의 최대 과제였어요. 엄마가 늘 강조하신 미래를 위해 난 오늘을 포기하며 살았어요. 오늘 행복하지 않은데 미래의 행복이 과연 의미가 있을까요?


난 많은 시간을 샀고, 그 바람에 많은 행복했던 기억을 팔았어요. 그리고 혹독한 대가를 치렀어요. 내게 소중한 사람들과의 추억이 깡그리 사라진 거예요. 그들과 함께 나눴던 추억의 물건을 보아도 그 물건에 어떤 사연이 있는지 나는 기억하지 못했어요. 외할머니가 오셨을 때도 그랬죠. 하물며 아빠와의 기억까지... 난 어떡하죠? 내가 도대체 무엇을 팔아서 무얼 산 걸까요? 시간만 사면 다 해결될 줄 알았는데... 1등만 하면 충분히 행복해질 줄 알았는데... 난 여전히 쫓기고 있고 불안하고 무섭기까지 해요. 내 안의 소중한 기억들이 모두 사라지고 나면, 텅 빈 껍데기만 남은 나는 대체 뭐가 되는 걸까요? 공부하는 기계? 엄맘는 정말 내가 그리 사는 걸 바란 건가요?


난 거래를 되돌리려고 했어요. 내가 팔았던 내 기억을 되사고 싶었거든요. 그 바람에 내 시간을 내주어야 했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되찾고 싶었어요. 그래야만 했어요. 그런데, 그게 쉽지가 않네요. 세상에 공짜는 없다더니, 정말인가봐요. 난, 시간을 사고 파는 과정에서 정말 많은 것들을 알아차렸어요. 사실 그 깨달음은 시간만이 줄 수 있는 것들이기도 했어요. 시간가게의 경험은 무서운 대가를 치렀지만 나에게 다른 세상도 보여주었거든요. 


엄마, 사랑하는 엄마. 나를 있는 그대로 봐주세요. 엄마 딸 윤아는 공부를 잘하기도 하지만 때로 잘 안 될 때도 있어요. 시험 문제 하나 틀렸다고 내 인생이 틀어진 것처럼 호들갑 떨지 말아주세요. 가기 싫은 학원을 억지로 가지 않을래요. 꿈을 향해 다가가는 친구를 위해서 시간도 내주고 축하도 해주고, 나의 꿈은 무엇인가 고민도 해볼래요. 지금은 그런 과정이 더 필요한 때 같아요. 


나는 조금 천천히 갈래요. 뒤도 안 돌아보고 앞만 보고 달렸더니 내가 몽땅 사라져버렸어요. 나는 조금 천천히 가는 대신 나와 내 주변을 더 살필래요. 그러니까 엄마도, 내 공부에만 올인하지 말고 엄마 인생을 살아요. 지금처럼 피곤이 덕지덕지 쌓여서 짜증도 같이 쌓인 모습 말고요, 휴식도 취하고 여유도 가지면서 엄마의 시간을 갖도록 해요. 그리고 우리의 소중한 시간도 같이 만들구요. 난 그 시간을 다시는 팔지 않을 생각이에요. 차곡차곡 내 가슴에 새길 거예요. 공부만 강요하고 압박 주는 그런 엄마로만 기억하는 건 싫어요. 넘어졌을 때 왜 빨리 안 일어나냐고 화내는 엄마가 아니라 괜찮냐고 물어봐주는 엄마를 보고 싶어요. 그런 엄마로, 돌아와 주세요. 


어쩌면 엄마도 시간 가게의 유혹을 받을 지도 몰라요. 그렇지만 절대로 흔들리지 마세요. 이건 경험자가 주는 충고예요. 네버, 네버! 10분의 시간을 사기 위해서 지불해도 될 만큼 값싼 행복은 없어요. 우리의 소중한 행복, 값으로 환산할 수 없는 아름다운 행복, 앞으로도 많이 만들어 가요. 엄마, 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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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집 소녀
잭 케첨 지음, 전행선 옮김 / 크롭써클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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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보니 연속으로 하드고어에 속하는 책을 읽게 되었다. 예전에 마태우스 님의 리뷰를 통해 책 내용은 이미 알고 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는 내내 아주 불편했다. 


이 작품의 소재는 사실 실화에서 따왔다. 열여섯 소녀를 학대해서 죽음에 이르게 만든 사이코패스의 이야기가 그것이다.(소설에서는 14세 소녀로 나온다.) 책에서 소녀가 지하실에 감금당하고 학대를 당하기 시작하는 것은 100여 쪽이 훌쩍 지나서의 일이었다. 앞부분은 다소 지루한 편이었고, 이웃집 소년 데이비드가 소녀에게 마음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이야기의 화자가 소년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드러날 수 있는 부분이다. 전쟁이 끝난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고, 시골 외곽의 마을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다소 어려운 경제적 형편을 짐작할 수 있고, 또한 바로 그 사회경제적 환경이 이곳에서 벌어진 끔찍한 사건에서 여러 동조자들이 나왔다는 것을 어느 정도 이해하게 만든다. 물론, 그것이 면죄부가 되지는 않지만. 실제로 우리나라에서도 어느 작은 시골 마을의 지적장애 소녀를 마을 어른들이 오랜 기간에 걸쳐 윤간했다는 기사를 본 기억이 난다. 이 소설에서 소녀를 상대로 '친구'들이 수십 일에 걸쳐서 학대를 했고, 심지어 거기에는 남매도 있었다. 그러니까 여자 아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나이가 많건 적건, 남자건 여자건, 하나같이 주인공 소녀를 괴롭히며 즐거워 했지 이 비상식적이고 끔찍한 일에 대해서 제동을 걸지 않았다. 집단 광기에 다름 아니다. 


이웃집 소녀 맥은 다리가 불편한 여동생 수전과 함께 루스의 집에 맡겨졌다. 부모님은 돌아가셨다. 맥은 꾸준히 루스로부터 괴롭힘을 당해왔지만 초반에는 그 사실들을 밝히지 않고 버텼던 것으로 보인다. 마침내 참지 못하고 경찰에 신고도 했지만 경찰은 어른 루스의 말만 듣고는 맥의 말을 무시했다. 어린 아이가 그냥 반항하는 정도로 여겼던 것이다. 이 책의 시작이 된 실제 사건에서도 그랬다고 한다. 학대받은 소녀의 자매가 편지를 받고는 찾아왔지만 만나지 못했고 다른 수를 내지도 못했다. 이때의 막막함이란...


루스는 대체 왜 맥을 그토록 괴롭혔던 것일까? 그녀는 불행한 결혼생활을 했고, 경제적으로 궁핍했고, 자신과 달리 젊고 아름다운 맥을 질투했다. 그녀는 자신이 느끼는 성적 결핍을 맥을 창녀로 만드는 것으로 채우려고 했다. 그것도 자신의 아들들을 동원해서. 나아가 이웃집 아이들까지 끌어들여서. 그 아이들은 한때 맥의 친구들이기도 했다. 맥을 좋아했던 데이비드는 폭력에 직접적으로 가담하지 않았지만 그 긴 시간 동안 방조함으로써 공범이 되었다. 심지어 지하실에 묶인 채 발가벗겨진 맥을 보면서는 몽롱해지기까지 했다. 그녀를 좋아했고, 사춘기에 다달은 소년의 욕망까지도 이해한다고 해주어도 이건 아니었다. 맥이 나에게 뭐 바라는 것 있냐고 쏘아붙였을 때 데이비드의 뜨끔했을 얼굴이 제대로 그려졌다. 


실제 사건은 소설보다 더 끔찍했다고 알려져 있다. 소설에서 아이들은 맥의 얼굴에 오줌을 쌌지만, 실제 사건에서는 소녀에게똥을 먹였다고 한다. 또 자신들이 저지르는 폭력 행위에 실비아(실제 사건의 피해자)의 동생 제니도 동참하게 협박했고, 끓는 물을 붓고는 소금으로 문지르기까지 했다고 한다. 세상에나......


어리다고 해서 무조건 순진하거나 순수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기본적으로 인간이라면 지켜야 할, 가져야 할 기본 덕성이라는 것은 있지 않은가. 루스 아줌마는 정신 이상자였다. 이렇게 정신이 이상한 엄마 밑에서 자란 세 아들도 당연히 정상은 아닐 것이다. 그럼 이 가족은 모두 비정상이라고 해두더라도, 나머지 아이들은 무엇일까? '집단 광기'라는 말로 다 설명이 되는 것일까? 하긴, 히틀러는 무려 600만이나 되는 유태인을 학살하지 않았던가. 현실은 소설보다 더 공포스럽고 잔인한 것을, 내가 이해할 수 없다고 해서 그런 일이 없었던 일로 둔갑하지는 않는다. 무섭지만, 사실이 그러했다. 


그나마 소설이 실제의 이야기보다 나았던 것은 결말이었다. 적어도 루스 아줌마에 대한 '심판'은 이뤄졌으니까. 비록 그것이 충분하지는 않다 하더라도, 아마도 작가 역시 이 짐승(짐승, 미안해!)만도 못하고, 벌레(벌레 미안미안!!)만도 못한 인간 쓰레기에게 '자연사'라는 선물은 주고 싶지 않았나 보다. 동감이다. 


오랜 세월이 흘렀다. 데이비드는 두번의 결혼을 실패하고 세번째 결혼을 앞두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무언으로 참여했던 폭력의 실체를 알고 있었다. 자신이 얼마나 무서운 짓을 했는지, 용서받을 수 없는 짓을 했는지 알고 있다. 자신의 바닥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나중에 엄마의 유품을 정리하면서 스크랩해둔 신문 기사를 찾게 된다. 거기에는 루스의 세번째 아들이 저지른 살인사건이 담겨 있었다. 루스가 뿌려놓은 왜곡의 씨앗이 어떻게 열매를 맺었는지를 보여준 것이다. 데이비드의 엄마는 다른 아이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라고 적어 놓았다. 거기에는 다른 이웃집 남매의 이름도 추가되어야 하고, 데이비드의 이름도 추가되어야 마땅하다. 그가 평생 동안 스스로에게 묻고, 참회하고, 또 괴로워하면서 갚아야 할 빚이 거기에 있는 것이다.갚을 대상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지만... 


대신 싸워줄 만큼의 용감함을 바라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신고라도 해주는 용기는 내주며 살았으면 한다. 모두들 그만큼씩의용기만 내주어도 이 무서운 세상이 조금은 더 안전한 세상이 되지 않을까. 모두가 한발자국 씩만 용기를 내준다면.


헐리우드에서 두차례 영화로 제작되었다는데 우리나라에서는 개봉하지 않은 듯하다. 아마 너무 끔찍해서 그런 게 아닐까. 작품을 보고 나서 영 기분이 안 좋다. 무서운 책이었다. 


덧글) 9쪽 마지막 줄

우리나라가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떨어뜨리기 17개월 전인 1946년에 태어났다. 마티스가 막 여든 살이 되던 해이기도 하다.

>>>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진 것은 1945년이다. 마티스는 1869년 생이다. 연도가 이상하게 표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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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13-07-09 09: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 제목은 "언 아메리칸 크라임" 입죠. 주노에서 미혼모 역활 제대로 해준 엘렌 페이지 주연이죠.

굉장히 불편한 영화.....

영화 고령화 가족을 보면 주인공 인모(박해일)가 형 한모떄문에 깡패들에게 엄청 두둘겨 맞으면서
"늬들은 유구한 역사를 통해 지켜왔던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했다."고 하죠.


마노아 2013-07-09 19:45   좋아요 0 | URL
인셉션에 나왔던 배우 맞죠? 포스터 보니 알아보겠어요. 이 영화 찍을 때는 꽤 어렸을 텐데 후유증 없나 모르겠어요.
인간의 존엄성. 작품 속에서 맥은 바로 그 존엄성을 보여주었는데, 그걸 다 깨부수는 괴물들을 만난 거죠. 조카 18색 크레파스 욕을 잔뜩 해주고 싶어요.ㅡ.ㅡ;;;;;

moonnight 2013-07-09 17: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짜, 벌레와 짐승들에게 미안함을 느끼게 만드는 인간들. ㅠ_ㅠ 저도 영화랑 책 읽고 너무너무 무서웠던 기억 나네요. 사람인 게 부끄러워요. ㅠ_ㅠ;;;;;;;;;;;;;;;;

마노아 2013-07-09 19:47   좋아요 0 | URL
그렇죠? 부끄럽고 끔찍했어요. 그러고 보니 예전에 본 '마터스'가 생각나네요. 그건 극장 가서 봐서 더 충격적이었어요. 아흐 동동다리...ㅜ.ㅜ
 
마지막 이벤트 높새바람 24
유은실 지음 / 바람의아이들 / 2010년 3월
평점 :
절판


일흔 아홉, 딱 죽기 좋다던 나이라 하셨던 할아버지. 한 해 전에는 일흔 여덟, 딱 죽기 좋은 나이라고 역시 말하셨던 할아버지. 그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한방 쓰던 손자 영욱이더러 손 꼭 잡아달라던 할아버지. 곧 죽을 것 같다며 자식 손주들 모두 몇 차례나 집합 시켰다가 양치기 소년이 된 할아버지는, 정작 당신 가실 때 모두들 와보라고 연락했지만 아무도 오지 않았다. 언제나 같은 편 들어주던 손자 영욱이만 그 자리에 있었을 뿐이다. 물론, 영욱이도 할아버지가 그렇게 가실 줄 몰랐다. 그저 체기가 있을 거라고 여겼고, 습관처럼 많이 드시던 활명수, 3병 사달라는 것 한병만 사다 드린 게 못내 미안하기만 하다.

 

할아버지는 집안의 사고뭉치였다. 젊어서는 성격 나쁜 남편이었고, 사기도 많이 당해서 자식들 고생도 많이 시켰다. 할머니는 고모가 시집가자마자 이혼을 요구하셨고, 일본 남자와 재혼을 해서 일본 땅으로 가셨다. 사기로 집까지 날린 할아버지를 아버지가 모셔왔지만, 아버지는 할아버지를 싫어했다. 자신이 어려서 미워하던 그 아버지의 모습으로 자신이 나이 들어간다는 것도 모른 채.

 

식구들은 얼굴 가득 검버섯 덮인 할아버지 얼굴을 불편해해서 같이 밥먹는 것도 피했고, 할아버지 냄새 심하다고 역시 꺼려 했다. 축농증이 있는 영욱이는 할아버지 냄새 따위 상관 없이 할아버지와 친구처럼 지냈다. 무섭고 싫은 아빠한테는 존댓말을 써도 할아버지와는 반말을 사용했다. 친밀감의 표시였다. 할아버지 검버섯 핀 얼굴을 보물찾기로 상상하고, 할아버지 벗겨진 이마를 만지며 잠드는 버릇도 있었다. 휴대폰 단축번호 1번은 할아버지였고, 바탕화면도 할아버지와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할아버지의 진심을 가장 많이 알고 있었고, 가장 큰 위로가 되어주었고, 가장 많은 영향을 받은 것도 역시 할아버지였다.

 

어린 영욱이는 할아버지와 십수년을 알고 지냈지만 다른 식구들은 수십 년의 세월을 함께 겪었다. 영욱이가 이해하지 못하는 어른들의 세월이 분명 있었을 것이다. 거기에는 가족이라고 쉽게 용서할 수 없는, 가족이기에 더 힘든 은원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 얽혀진 실타래를 할아버지는 풀고 가고 싶어하셨다. 그렇게 해서 준비한 마지막 이벤트. 그러나 이 엉뚱한 이벤트가 유족들을 심난하게 만들었다. 영욱이로서는 할아버지의 유언인데 왜 안 지키려는지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할아버지의 진심을 제대로 읽는 사람이 그만큼 드물었던 것이다.

 

작품은 할아버지가 생존해 계실 때에도, 또 장례식장에 계실 때에도 시종 진지함과 유머의 경계를 잘 지켰다. 뻔뻔한 밉상 스타일의 진상 어른을 잘 표현한 큰 고모부와 여성 호르몬이 많을 것 같은 작은 고모부의 대조와 큰 고모와 작은 고모의 성격 차이가 보이고, 또 엄마와 큰 고모-그러니까 며느리와 딸의 신경전도 볼 만 했다. 뿐인가. 장례식장이라는 작은 공간을 통해서 문화와 정서, 그리고 사람을 모두 보여주었다. 언제나 재미를 주지만 그 속에 늘 사람이 있고 감동이 있던 유은실 작가님 솜씨다웠다.

 

할아버지 마지막 가는 길을 끝까지 배웅한 영욱이, 그리고 그 영욱이가 마지막에 발견한 할아버지와의 추억과 선물은 끝까지 코끝을 찡하게 만들었다. 이후로도 영욱이에겐 그 노래가, 그 하얀 쪽배와 토끼가 오래오래 곁에 머물 것이다. 서로에게 이보다 더 큰 선물, 더 큰 이벤트가 있을까.

 

하필 할아버지가 마지막에 남겨준 문자 메시지는 '치사한 표영욱ㅠㅠ'이었다. 활명수 3병 대신 1병만 사서 그리 되었다. 마지막 메시지일 줄 알았더라면, 또 마지막 심부름이 될 줄 알았더라면 당연히 그러지 않았겠지만 그렇게 예고 없이 찾아온 이별 앞에 준비되지 않은 인사는 허망한 흔적을 남겨버렸다. 할아버지 떠나보내며 받을 수 없는 긴 메시지를 남기는 영욱이를 보며 역시 같이 울었다. 나도 그랬던 기억이 났기 때문이다. 나는 꼬박 한 달 동안 아빠에게 편지를 썼다. 그 편지는 지금도 가지고 있다. 보낼 수도 없고 읽을 수도 없다. 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눈물 상자이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이 작품 속 할아버지와 우리 아빠는 닮았다. 여기 할아버지처럼 사고를 치신 건 아니지만 그만큼 무시 당하고 대접받지 못하셨다. 나하고만 친하게 지낸 것도 비슷하다. 그래서 더, 이 책은 마음에 오래 남는다.

 

서로에게 좋은 사람으로 오래 남아야겠다는, 당연하고도 늘 생각해오던 결론에 또 도달한다. 그리고 평소에 잘하자!란 다짐도 또 해본다. 헤어지고 나서, 다시 만나기 어려울 때 후회하지 말고. 서로에게 늘 반가운, 그래서 이벤트 같은 사람도 되어보자고 또 생각해 본다. 적어도 누구에게는 꼭 '좋은 사람'으로 남기를... 이 책의 큰 고모부 같은 뻔뻔하고 욕심사나운 어른으로는 늙지 말아야지. 불끈!

 

우리 할아버지는 옛날에 나쁜 아버지였습니다. 그래서 아빠는 할아버지를 미워합니다. 나한테도 언제나 싸늘한 시선을 보내는 아빠. 하지만 할아버지는 나한테 말합니다. "넌 진짜 좋은 애야." 할아버지도 나한테는 세상에서 제일 좋은 사람입니다. 사우나에 갈 때도, 만화책 빌리러 갈 때도, 박물관에 갈 때도 언제나 이벤트라고 하는 할아버지. 그리고 이제, 할아버지가 준비한 마지막 이벤트가 시작됩니다. -뒷표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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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개츠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5
F.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김욱동 옮김 / 민음사 / 2010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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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츠제럴드의 명성은 익히 들어왔지만 정작 그의 작품은 그닥 아는 게 없었다.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흐른다-를 읽었는데, 내게는 원작보다 영화가 훨씬 좋았기 때문에 위대한 개츠비에 대한 갈증이 그리 크지 않았다. 이번에도 영화 개봉을 앞두고 부랴부랴 책을 읽었는데 초반에 몰입이 되지 않아 힘들었다. 이번에도 내게는 영화 쪽이 더 선명하고 좋았다. 개인적으로 바즈 루어만을 좋아하고,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도 좋아하니 시너지 효과가 있기도 했을 것이다. 또한 1920년대 미국 사회에 대한 정보도 없는 관계로, 혼탁하고 무질서했던 당시의 사회상을 영화는 영상과 음악으로 함께 보여주니 훨씬 이해도 쉽고 몰입도도 좋았을 것이다. 그래도 이런 영화가 나올 수 있었던 건 분명 원작이 훌륭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 않고는 이토록 오랜 시간 동안 사랑받을 수는 없을 것이다.

 

소설 속에서는 왜 '위대한' 개츠비가 되는지 잘 이해가 가지 않았는데 영화는 그 부분도 아주 쉽게 설명했다. 그걸 '위대'하다고 말할 수 있는 건지는 의문이지만, 적어도 작중 화자의 입장에서는 그럴 수 있다는 걸 이해했다.

 

작품을 보면서 개츠비에 대해 연민도 느끼고 부러움도 느꼈다. 그가 일생을 건 여자는 그럴 만한 가치가 없다는 걸 몰랐다는 데에 연민을 느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몸을 던져 사랑할 대상을 갖고 있다는 것에는 하염없는 부러움이 일어버린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그렇게 절절한 사랑도 한번은 해봐야 하는 게 아닌가 싶어서.

 

작품이 1920년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우리가 강을 사이에 두고 강북 강남 나눠 있듯이 미국 동부의 도시에서도 이스트에그와 웨스트에그로 나뉘어서 서로를 디스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흥청망청 부어라 마시고, 또 윤리와 도덕이 실종된 시절을 살다가 벼락처럼 경제대공황을 맞게 되는 거겠지. 필연적인 결과로 보인다. 그리고 그 폐해는 전 세계가 함께 겪어야 했다. 참, 안타까운 역사였다.

 

민음사 버전의 위대한 개츠비는 내 입장에서 번역이 크게 좋지 않았다. 말끝마다 "형씨"라고 붙였는데, 영화에서는 "친구"라고 번역했다. 뉘앙스를 생각할 때 영화 쪽이 더 어울리게 들린다. 그밖에도 심혈을 기울였다는 역자의 말에도 불구하고 나는 다소 만족스럽지 않았다. 해서 시간이 좀 더 흐른 다음에 다시 위대한 개츠비를 읽고 싶어졌을 때는 타 출판사 번역으로 접해 보고 싶다. 시간이 오래 지나면 단순 비교가 힘들겠지만, 그보다는 다르게 다가올 위대한 개츠비가 궁금한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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