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은 우리 별에 있어
존 그린 지음, 김지원 옮김 / 북폴리오 / 2012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잘못은 우리 별에 있어'라는 제목은 책 속에 인용된 책 속 구절이다. 제목 자체로는 인상 깊지만, 그 구절이 문맥 속에서 크게 인상깊지는 않았기 때문에 어떤 책이었는지 굳이 찾아보지는 않았다. 반면 영화 제목은 '안녕, 헤이즐'로 무척 평범하지만 대신 귀에는 쏙 꽂히는 제목으로 갔다. 책을 보고 크게 좋았다면 영화도 찾아 봤을 테지만, 책이 큰 감흥을 주지 못해서 영화까지는 찾아보지 않았다.

 

내가 서포트 그룹에 간 건 예전에 겨우 18개월짜리 자격 취득 교육을 받은 간호사들이 나한테 알아먹지 못할 외국 이름이 붙은 화학물질을 투여하게 놔뒀던 것과 같은 이유에서였다. 부모님을 행복하게 하고 싶어서. 세상에서 나이 열여섯에 암에 걸리는 것보다 더 지랄맞은 일이 딱 하나 있는데, 그건 암에 걸린 자식을 갖는 거다. -12쪽

 

암에 걸린 열여섯 소년 헤이즐, 자신을 위해 헌신하는 부모님의 마음을 어지럽히지 않기 위해서 내키지 않는 서포트 그룹에도 들어가서 다른 암 투병 친구들의 이야기를 듣고, 기적적으로 암을 치료한 사람들의 이야기도 듣는다. 그곳에서 만난 어거스트와는 연인이 된다.

 

헤이즐에게는 인생의 책이 하나 있는데 제목이 "장엄한 고뇌"이다. 제목은 무척 그럴싸 하다. 이 책을 어거스터스도 읽게 되었다. 헤이즐은 책의 뒷내용이 너무너무 궁금하지만 작가는 뒷이야기를 쓰지 않고 있다. 그리하여 생이 얼마 남지 않은 이 아이들이 마지막으로 쓸 수 있는 하나의 소원을 이 작가 만나는 데에 쓴다는 것까지는 무척 문학적이고도 낭만적이고, 극적인 짜릿함을 주어서 좋았지만, 그걸 표현해 내는 글발은 크게 와닿지 않았다. 사실 전반적으로 이 책의 내용은 많이 아쉽다. 소재 자체가 상투적이어서가 아니라, 그걸 담아내는 작가로부터 이것은 '소설'이야, 내가 지어낸 이야기야...라는 느낌이 너무 강하게 들어서 말이다. 이를테면, 작품으로 하여금 독자 스스로 감동받게 해야 하는데, 작가가 대놓고 '슬프지? 슬프지? 자, 이제 울어!'하고 강요하는 느낌이었던 것이다.

 

그래도 좋았던 것을 꼽으라고 한다면 두 주인공보다 그들의 부모님이 참 좋았다. 특히 헤이즐의 부모님들. 다분히 '이상적'인 캐릭터이긴 했지만, 이런 부모님들이 계시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이 어린 딸의 긴 암투병에 당연히 지치고 무섭고 힘들텐데도, 그 와중에도 본인의 인생을 포기하지도 않고 절대로 뒷전으로 미뤄두지도 않는다. 그래서 엄마의 고된 도전에 딸 헤이즐도 격한 응원을 보낼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작품을 보면서 아주 오래 전에 읽었던 '지상에서 가장 슬픈 약속'이 떠올랐다. 중학교 때였던가? 라디오에서 한참 광고를 하던 작품을 읽게 되었는데, 어린 내가 읽기에도 아주 식상했다. 그렇지만 베스트셀러였다. ㅎㅎ 이 작품도 물론 누군가에겐 아주 좋은, 재밌는, 의미있는 작품일 것임을 부정하지 않는다. 모두에게 다른 감흥을 줄 테니까. 어쩌면 영상으로 만나는 작품은 좀 더 다르게 다가올 수 있을 것이다. 혹여 기회가 된다면 만날 수도 있겠지만 아직은 아니다. 일단 우리의 만남은 여기까지!


댓글(6)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락방 2014-12-02 08: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상에서 가장 슬픈 약속] 저도 읽었어요. 어릴적에. 라디오에서 엄청 광고했잖아요. 게다가 사춘기 소녀들을 흠뻑 빨아들일 제목이고 말이지요. 그렇지만 읽고 나서 되게 황당했던 기억이 나요. 여자가 남자를 찾아갔는데 마지막에 법정인가, 거기에서 눈 딱 마주치고 그냥 끝나버리는. 여자는 남자를 찾아가는 게 인생의 목표 같은 것이었는데 남자는 그렇지 않다, 뭐 이런 말 하는것 같아서 다 읽고나서 `이게 뭐여..` 했던 기억이 납니다. 마노아님도 읽으셨군요, 그 책을. ㅋㅋㅋㅋㅋ

마노아 2014-12-02 10:34   좋아요 0 | URL
맞아요. 그 책은 제목이 90% 먹고 들어간 것 같아요. 굉장히 기대하게 만들었는데 용두사미였죠.
동시대를 살아온 사람의 티가 이렇게 나요. ㅋㅋㅋ
다락방의 꽃들도 그때 그렇게 광고했는데...^^ㅎㅎㅎ

다락방 2014-12-02 10:45   좋아요 0 | URL
라디오에서 했던 광고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게 영화 [엔들리스 러브(영원한 사랑이었나)] 에요. 톰 크루즈랑 브룩 실즈 주연이라고 광고를 엄청 했는데, 그당시 톰 크루즈 인기가 하늘을 찔렀거든요. 그런데 나중에 그 영화 보니까 톰 크루즈는 브룩 실즈의 오빠로 나오는 조연이더라고요. ㅋㅋㅋㅋㅋㅋㅋㅋ이런 미친 광고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마노아 2014-12-04 06:50   좋아요 0 | URL
저 작년에 정은임의 영화 음악을 오래오래 들었거든요. 이게 20년 전 방송인데 광고 듣는 재미가 아주 컸어요. 손발이 완전 오그라들고요,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그런 제품들이 마구마구 나오더라구요. 격세지감을 느꼈달까요. ㅎㅎㅎ

[그장소] 2014-12-03 17: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당시의 라디오 광고를 성우분이 하셨는데..그 목소리가 굉장한...!! 주말의 명화에나 나오시고 라디오도 황금시간대에 방송을 하시던 그런분..였는데..갑자기..이름이..(이...뇌를!!)암튼, 그 목소리에 혹해 외국번역서 사다 몇 번 읽었는데..
아닌말로..딱~로맨스소설 삘~ 다니엘 스틸,쥬드 데 브르, 피에르 뒤쉔느...앤 타일러 등등..
책값이 5000원 일때!

마노아 2014-12-04 06:51   좋아요 0 | URL
그 성우분 누굴까요. 저 한때 성우 목소리에 꽂혀서 마구 파고 다니던 때가 있었거든요. 지금도 장세준 씨의 죽음이 가슴아프답니다.ㅜ.ㅜ
책값이 5천원을 넘기지 않던 시절의 문화생활, 아 정말 아득하게 느껴지네요.
 
봄에 나는 없었다 애거사 크리스티 스페셜 컬렉션 1
애거사 크리스티 지음, 공경희 옮김 / 포레 / 2014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언니가 운영하던 옷가게를 대신 봐주던 시절, 무언가를 사고 싶지만 뭘 골라야 할지 몰라 한참 고민하는 손님들이 가끔 어느 게 좋아보이냐고 묻곤 했다. 그럴 때 나는 대체로 이제껏 시도해보지 못한 옷을 한번 사보라고 권하곤 했다. 내 권유대로 안 입어봤던 무언가를 사는 손님은 적었다고 기억한다. 대체로 익숙한 디자인과 색상을 고른다. 그게 더 편할 것이고 모험에 대한 부담도 적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가끔 그런 작은 곳에서의 일탈도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사실 우리는 더 중요하고 더 큰 문제에 대해서 쉽게 일탈하기는 더 어렵지 않은가. 그러니까 이런 작은 부분에서라도 좀 변화를 줘 보라는 의미였다. 몇 해 전 내가 일년에 한번 내지 두번도 겨우 신을까 말까 한 빨강색 샌들을 샀던 것처럼. 


앞서 말했듯이, 인생의 더 중요한 부분에 대해서는 훨씬 더 안전한 패를 고르려고 할 것이다. 결혼을 생각할 때, 진로를 결정할 때. 그리고 그런 선택을 하고 난 다음에는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서 장황하게 설명한다. 누가 궁금해하는 것이 아닌데, 사실은 나 자신을 납득시키고 인정시키는 과정이 필요해서다. 그렇게 스스로에게 나름의 면죄부를 준다. 그렇게 타협을 해가기 때문에, 젊어서 진보적인 태도를 보이던 사람도 나이 들어서 보수적인 관점으로 변해가는 건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의 조앤을 보면서...


조앤은 바그다드에 있는 딸을 만나러 다녀오는 길에 사막의 호텔에서 발이 묶인 영국 부인이다. 평생 제법 돈을 잘 버는 남편 덕에 호강하고 살았고, 자식들도 그만하면 잘 키웠다고 스스로 자랑스러워 하는, 그리고 팽팽한 얼굴과 교양으로 무장한 습관까지 스스로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부인이라고 여기는 그녀다. 그러나 폭우로 생긴 와디 덕분에 기차는 오지 않고, 갖고 있던 책도 다 읽어버려서 도무지 '생각'말고는 할 게 없는 상황에 떨어지자 그녀는 이제껏 알지 못했던, 절대 알고 싶어하지 않던 자기 자신의 진면목에 대해서 들여다 보게 되었다. 그리고 인정할 수 없는, 지금껏 상상도 하지 못했던 자신이라는 사람의 진실에 접근해 갔다. 본인이 주변 사람들에게 얼마나 무심했는지, 얼마나 이중적인 얼굴을 했는지, 그 때문에 가족들조차도 얼마나 외로웠는지......


조앤은 바버라에게 애정이 없었다. 이해하려는 마음도 없었다. 조앤은 딸의 취향이나 요구는 전혀 개의치 않았고, 아이에게 좋을 만한 일을 자기 흥에 겨워 이기적으로 결정해버렸다. 그녀는 바버라의 친구들을 따뜻하게 맞아주지 않았고, 그 아이들의 기를 죽였다. 바버라에게는 바그다드로 가는 것이 탈출구처럼 보였을 것이다. -203쪽


세 자녀에게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집에 고용된 하인들은 칭찬이라곤 없는, 마음에 안 드는 것에 대한 지적질만 가득한 고용주가 힘겨워 그만두기까지 했다. 그녀의 일관된 태도였다. 


바그다드로의 여행도 마찬가지였다. 아픈 딸을 돌보러 온 것이라고 명분을 들이댔지만 진실은 거기서 멀었다.


여행을 한다는 데 마음이 끌렸던 건 아닐까? 신선함에, 새로운 세상을 본다는 사실에? 헌신적인 엄마 노릇을 한다는 데 끌렸던 건 아닐까? 아픈 딸과 심란한 사위에게 환영받는, 매력적이고 모험적인 자신을 기대한 건 아닐까? 이 먼 데까지 달려와 주다니 정말 좋은 분이세요 같은 말을 듣고 싶어서? -204쪽

남편은 그녀가 딸의 집에 가는 것을 적극적으로 말렸다. 딸은 이제 영국으로 돌아간다는 엄마를 형식적으로 안타까워 했지만 그녀가 집에 더 머물까 봐 전전긍긍했다. 그녀의 침범(?)은 오히려 딸 부부의 연대를 돈독히 하게 만들었으니 그녀의 공이 아주 없지는 않지만.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농부가 되어 농장을 운영하고 싶던 남편을 설득해서 변호사로 주저앉힌 것이 조앤이었다. 그 덕분에 아이들은 안정적인 교육을 받을 수 있었고, 그녀도 편안하게 살 수 있었다. 하지만 남편은 고단했고 외로웠다. 아빠를 이해하지 못하는 엄마를 아이들은 이해해줄 수가 없었다. 그녀만 몰랐던 사실이었다. 그녀가 몰랐던 건 당연하다. 알고 싶지 않았으니까. 지금 이대로도 충분히 만족스럽고 행복한 것을. 그러나 그녀만 만족스러웠다. 그런 그녀를 떠나고 싶어서 일찍 시집가버린 딸이 있고, 그런 엄마를 피해 멀리 아프리카 대륙까지 건너가 살고 있는 아들이 있다. 그녀는 자기만의 성에서 홀로 행복하고 홀로 만족해 했다. 지금처럼 그녀 자신에게 집중할 시간이, 기회가 오지 않았다면 아마 평생 그런 자신을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결과는 아이러니하게도 그녀의 가족이 그녀에게 줄 수 있는 단 하나의 사랑의 표현이었다. 


책은 꽤 많은 지면을 덜어서 그녀의 이중적인 모습을 차곡차곡 보여준다. 스스로를 이타적인 인물이라고 여기는 그녀의 지극히 이기적인 삶을, 늘 다른 사람을 돌아보며 살았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남에게 보여지는 체면만 챙겼다는 것을, 자신의 기준으로는 비루해 보이는 다른 사람을 경멸하거나 동정하는 그녀가, 사실은 누구보다 불쌍한 사람이라는 것을 예리한 통찰력을 담아 보여준다. 조앤 말고도 조앤의 친구인 블란치와 로드니가 마음을 준 레슬리 셔스턴 캐릭터도 무척 인상 깊었다. 조앤과 대조적으로 보이면 보일수록 더 돋보이는 것도 어쩔 수 없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필력이란 이런 것인가 싶어 읽는 내내 감탄했다. 추리 소설의 여왕이 아니라, 인간 그 자체를 꿰뚫어 보는 섬세함이 돋보인다. 작가는 이 작품을 수년 동안 구상했지만, 완성하는 데는 단 삼일만 걸렸을 뿐이고, 단어 하나 고치지 않고 그대로 출간했다고 한다. 세상에, 천재잖아! 


작가가 주장했듯이, 또 나 역시 동의하듯이 인간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자신과 만나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모두들 인정하지만, 정말 그런 시간을 만난다면 누구라도 도망치고 싶을 것이다. 나와 만나다니, 나를 알아차리다니... 세상에, 그건 정말 두려운 일이 아닌가. 한발자국 밖에서 들여다 보는 나라는 인간이, 나의 기대와 달리 아주 후지다면 뒷감당이 쉽게 되지 않을 것이다. 떨치고 일어나 더 나은 나로 발돋움해야 마땅하겠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었어! 내지 그건 다 이유가 있었던 거야! 라며 자기 합리화를 하는 되돌이표를 걷게 되지 않을까. 보통의 사람들이라면 말이다. 


그래서 이 작품의 주인공 조앤이 답답하고 한심하다가도 연민을 느끼게 한다. 봄에, 나 역시 그곳에 없었을까 봐. 앞으로도 거긴 내가 있을 곳이 아닐까 봐 두려워서. 조앤처럼 그런 그녀라도 지켜주려고 애쓰는 사람조차도 없을까 봐. 독자를 자기성찰하게 만드는 작가라니, 애거사 크리스티는 괴물이다. 그녀에게 완전히 포위됐다. 항복!

당신은 외톨이고 앞으로도 죽 그럴 거야. 하지만 부디 당신이 그 사실을 모르길 바라. -261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두근두근 내 인생
김애란 지음 / 창비 / 2011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울어라 울어라 등 떠미는 소설들이 있다. 공지영 작가의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이 그랬고, 신경숙 작가의 엄마를 부탁해가 그랬다. 대놓고 체루성인 것을 아는데, 알면서도 눈물을 안 흘릴 수 없었고, 그래놓고도 감동까지 받아서 어쩐지 자존심도 좀 상하는? 그런 청개구리 같은 마음을 먹게 하는 소설들이 있다. 이 작품도 그랬다. 무려 조루증을 앓고 있는, 열일곱 나이에 80대 노인의 신체를 갖고 있는 이 소년의 이야기에 어찌 먹먹해지지 않을 수 있을까. 원치 않아도 조숙해져버린, 그렇게 아이를, 청년을, 젊음을 강탈 당한 이 아이의 속깊은 마음들에 독자는 마음을 모조리 빼앗겨 버렸다.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란다.

그리고 나는 무럭무럭 늙는다.

누군가의 한 시간이 내겐 하루와 같고

다른 이의 한 달이 일년쯤 된다.

이제 나는 아버지보다 늙어버렸다.

아버지는 자기가 여든살이 됐을 때의 얼굴을 내게서 본다.

나는 내가 서른넷이 됐을 때의 얼굴을 아버지에게서 본다.

오지 않은 미래와 겪지 못한 과거가 마주본다.

그리고 서로에게 묻는다.

열일곱은 부모가 되기에 적당한 나이인가 그렇지 않은가.

서른넷은 자식을 잃기에 적당한 나이인가 그렇지 않은가.

 

아버지가 묻는다.

다시 태어난다면 무엇이 되고 싶으냐고.

나는 큰 소리로 답한다.

아버지, 나는 아버지가 되고 싶어요.

아버지가 묻는다.

더 나은 것이 많은데, 왜 당신이냐고.

나는 수줍어 조그맣게 말한다.

아버지, 나는 아버지로 태어나, 다시 나를 낳은 뒤

아버지의 마음을 알고 싶어요.

아버지가 운다.

 

이것은 가장 어린 부모와 가장 늙은 자식의 이야기다. -6쪽

이 책의 프롤로그다. 구구절절 병을 얻게 되는 과정을 설명하지 않고 이미 저질러진 결과에서 시작한다. 열일곱에 부모가 된 젊디 젊은 부모님의 이야기도 짐작하게 한다. 이 작품, 대박인 걸!


이 책을 언제 샀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분명 샀는데, 구매 목록에 안 떠서, 그럼 선물 받았나? 하고 기억을 더듬어 봐도 생각나지 않는다. 뭐 아무튼, 내게 이 책이 있었고, 출간 당시 굉장히 평이 좋았던 것도 생각난다. 영화가 개봉하지 않았더라면 더 오래 묵혀 두었다가 읽었겠지만, 영화 개봉은 나를 등 떠밀어 어서 읽어!라고 다그쳤다. 그렇게 펼친 책장은 쉽사리 덮이지 않았다. 굉장히 흡인력이 있었고 이야기도 흥미로웠다. 불행의 끝을 달리는 소재이지만, 그와 대조적으로 부모님의 이야기에는 웃음기가 많았다. 슬픈 이야기를 펼칠 때조차도.


일단 출산을 결정하고 나자 나머지 일은 비교적 순조롭게 풀려나갔다. 어머니는 그간 마음고생한 것에 복수라도 하듯 마음놓고 산모로서 특권을 누렸다. 어머니는 틈이 날 때마다 온갖 연예인 사진을 보며 호들갑을 떨었다. 아가야 봐봐, 우성 오빠야. 잘 생겼지? 이건 희선 언니. 어디 보자, 또...... 아버지와 달리 가장 좋아하는 사자성어가 ‘경국지색’이었던 어머니는, 태아에게 좋은 것만 보여주라는 얘기를 그렇게 엉뚱하게 실천하고 있었다. -34쪽


경국지색이 이렇게 팔리는구나! 굉장히 설득력 있는 걸! 기회가 된다면 써먹어 보고 싶은 눈호강이다. 기왕이면 강동원 사진으로~


김애란 작가의 문재를 여러 차례 확인할 수 있었다. 어떤 표현들은 너무 예뻐서 북다트를 정신 없이 꽂다 보니 책등이 까맣게 변할 지경이었다.


두 사람은 한동안 컴컴한 허공을 바라봤다. 창밖에선 서서 잠든 나무들이 짙은 한숨을 토해내고, 마당 앞 키 큰 작물들은 바람의 방향에 따라 머리채를 흔들며 산이 꾸는 꿈을 곁눈질하고 있었다. -36쪽


그러나 그 재능이 너무 넘쳐서, 어떨 때는 캐릭터를 뛰어넘는, 혹은 잘 어울리지 않는 말들을 하기도 한다. 이 대목은 무척 마음에 드는 부분이었지만, 동시에 너무 소설같다는 느낌을 주기도 한 대목이다. 


“아빠.”

“엉?”

“지금 슬퍼요?”

“응.”

“나 때문에 그래요?”

“응.”

“제가 뭘 해드리면 좋을까요?”

아버지가 멀뚱 나를 쳐다봤다. 그러곤 뭔가 고민하다 차분하게 답했다.

“네가 뭘 해야 좋을지 나도 모르지만, 네가 하지 말아야 할 것은 좀 알지.”

“그게 뭔데요?”

“미안해하지 않는 거야.”

“왜요?”

“사람이 누군가를 위해 슬퍼할 수 있다는 건,”

“네.”

“흔치 않은 일이니까.......”

“......”

“그러니까 너는,”

“네, 아빠.”

자라서 꼭 누군가의 슬픔이 되렴.”

“......”

“그리고 마음이 아플 땐 반드시 아이처럼 울어라.”

“아빠?”

“응?”

“전 이미 아이인걸요.”

“그래, 그렇지......”  -49쪽


내 기억이 맞다면 이동진의 빨간책방에서 이동진이 읽어준 대목이지 싶다. 찾아보지 않아서 장담은 못하겠지만.


영화 '잭'에서 로빈 윌리엄스는 노화 속도가 4배였다. 10세가 되었을 때 40대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름이는 열일곱 나이에 80대, 혹은 그 이상의 늙음을 가져버렸다. 날마다 챙겨먹는 약이 이미 한아름이고, 노화에 따른 장기의 손상을 막을 길이 없다. 가장 치명적이었던 것은 눈이었다. 


간이 상하고 위가 아픈 건 어떻게든 참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눈이 멀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덜컥 겁이 났다. 하느님이 내게 진짜 외로움을 주시려나보다 싶어 숨이 막혔다. 마치 누군가가 평생을 감옥에서 보낸 내게, 수고했으니 이젠 독방으로 가라고 독려하는 것 같았다. -99쪽


정말 저런 기분일 것 같다. 작가는 작품 속 캐릭터와 얼마나 동화가 되어서 내용을 전개해 나가는 것일까. 많은 자료 조사 끝에 탄생하겠지만, 그걸 바탕으로 깔고 심적으로도 충분히 물아일체가 되어버리는 게 아닐까. 이 작품을 쓰는 동안, 아름이와 함께 환호하고, 아름이와 함께 절망하고, 그리고 절박하게 슬퍼하지 않았을까. 이런 작품을 탈고하고 떠나보낼 때는 또 얼마나 쓸쓸할까, 멋대로 그런 상상들이 따라왔다. 


아름이의 기구한 사연이 방송을 탔고, 여러 시청자들의 메시지를 받았다. 누군가는 격려를 해줬고, 누군가는 위로를 해줬다. 그런 것들에 초연할 수 있다고 믿었지만 그렇지 않다는 걸, 충분히 마음 다치고 또 마음 담아두었다는 걸 아름이도 인정해야 했다. 


여러 글을 읽는 동안, 나도 모르게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해라는 말, 예전에는 나도 참 싫었는데,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이 먼 곳에서 건네주는 따뜻한 악수가 먹먹했다. 터무니없단 걸 알면서도, 또 번번이 저항하면서도, 우리는 이해라는 단어의 모서리에 가까스로 매달려 살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어쩌자고 인간은 이렇게 이해를 바라는 존재로 태어나버리게 된 걸까? 그리고 왜 그토록 자기가 느낀 무언가를 전하려 애쓰는 걸까? 공짜가 없는 이 세상에, 가끔은 교환이 아니라 손해를 바라고, 그러면서 기뻐하는 사람들은 또 왜 존재하는 걸까. 나는 몇 개의 글을 더 훑어봤다. 그리고 그러는 동안 내가 조금은 덜 외로워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182쪽


그래서 때로는, 필요악이 될 걸 알면서도 동정이라는 감정도 필요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누군가에게는 그런 마음의 한 조각이라도 필요하다고......


서하와 메일이 오갈 때, 어쩐지 불안했다. 내가 생각한 것과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았지만, 비슷한 반전이 불안하게 드러났다. 사람이 사람에게 얼마나 잔인할 수 있는지, 신은 또 얼마나 모질 수 있는지 한탄하게 만드는 대목이었다. 아름이의 이런 지적이 일견 타당하게 느껴졌다. 


“하느님을 원망한 적은 없니?”

“솔직하게 말해도 돼요?”

“그럼.”

“사실 저는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뭐를?”

“완전한 존재가 어떻게 불완전한 존재를 이해할 수 있는지...... 그건 정말 어려운 일 같거든요.”

“.......”

“그래서 아직 기도를 못했어요. 이해하실 수 없을 것 같아서.”

그런 뒤 나는 겸연쩍은 듯 말을 보탰다.

“하느님은 감기도 안 걸리실 텐데. 그죠?” -170쪽

완전하니까 불완전한 존재도 이해할 것 같지만, 동시에 완전한데 어떻게 불완전함을 이해할 것인가!라고 물을 수 있을 것 같다. 배부른 자가 배고픈 자를 온전히 이해하기 힘든 것처럼... 


좋았던 부분이 참 많았지만 장씨 할아버지와의 이 부분이 유난히 좋았다. 겸허히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동의...


“평생 아픈 대신 장수하는 자식과 건강한데 요절하는 자식 중 하나를 고를 수 있다면, 할아버지는 무얼 고르시겠어요?”

(...)

“아름아.”

“네?”

“그런 걸 선택할 수 있는 부모는 없어.”

“......”

“넌 입버릇처럼 항상 네가 늙었다고 말하지. 그렇지만 그걸 선택할 수 있다고 믿는 거, 그게 바로 네 나이야. 질문 자체를 잘못하는 나이. 나는 아무것도 안 고를 거야. 세상에 그럴 수 있는 부모는 없어......” -296쪽

영화 이야기도 조금 해보자. 영화는, 볼만했지만 압도적으로 책 쪽이 훨씬 좋다. 다만 강동원이 나온다는 거~ 영화 말미 계곡에 들어가 있는 강동원을 카메라가 허리 부분부터 천천히 미끄러져 올라가며 비추는 장면이 나온다. 말라서 이렇다 할 복근은 없지만, 아무튼 군살도 없는 배와 가슴팍이 나오고, 이어서 물에 젖은 얼굴이 나오는데! 당연히 여기가 하이라이트인데! 내 옆에 앉은 커플의 남자가, 그 순간 여친의 눈을 확 가려버린 것이다. "보지마!"라고 외치며. 이후는 상상에 맡기겠다. 나같으면 이 오징어가! 하고 주먹이 날아갔을 지도...ㅎㅎㅎ


암튼, 소설을 뛰어넘긴 힘들 거라고 예상했고, 그 예상이 맞았지만, 그럼에도 영화가 원작에 없던 장면으로 마음을 끌었던 것은 순전히 김갑수의 힘이었다. 아, 짧고 강렬한 그 연기란! 퇴락한 눈빛 안에도 부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뜨겁고, 또 뜨거웠다.


작품 말미에 나오는 아름이의 소설은 그 자체로 또 하나의 완성된, 완벽한 소설이었다. 좋다. 좋다. 참 좋다. 


사그라지는 생명으로 써낸, 그랬기에 더 강렬한 생명력으로 빛난, 청춘을 살아내지 못한 아이가 상상하며 그려낸 부모님의 덜 익어서 더 싱그러웠던 사랑 이야기가 진정 눈부셨다.


체루성 작품이면 어떠랴. 기꺼이 울어주겠다. 그게 더 자연스러운 거라면 거부하지 않겠다. 


어디선가 까르르 박꽃 같은 웃음이 터져나왔다. 돌아보니 젊은 레지던트 하나가 간호사들에게 농담을 걸고 있었다. 나는 내 속 단어장에서 ‘추파’라는 낱말을 꺼내 만져보았다. 가을 추, 물결 파. 가을 물결.

‘예쁘구나, 너. 예쁜 단어였구나......’ -195쪽


두근두근 내 인생이 내게 추파를 던졌다. 이 가을에 느끼기에 충분히 좋은 물결이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세실 2014-09-16 1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보다 책이 좋다는 말 공감이요^^ 책은 우리가 무한 상상할 수 있어서 더 그렇겠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동원, 송혜교 보는 즐거움은 꽤 컸어요. 특히 강동원~~~
나이들수록 건강함도 큰 축복이라는 생각 합니다.

마노아 2014-09-16 12:56   좋아요 0 | URL
재밌게도 영화 먼저 보고 책을 보면 영화가 더 재밌는 경우도 생기더라구요. 그래도 보통은 책 먼저 보고 영화 보려고 해요. 그 편이 더 좋아요^^

강동원과 송혜교가 정말 열일곱 나이로 보이더라구요. 세월을 거스르는 미모들이었어요~

북극곰 2014-09-16 1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엉엉 울었어요. 그래도 이 책은 자존심 상하지 않았어요. ^^
우행시랑, 엄마를 부탁해는 찔끔거리면서도 정말 싫었거든요.

표지도 참 잘 뽑았단 생각을 했었더랬어요.

마노아 2014-09-16 12:57   좋아요 0 | URL
울라고 만든 이야기에 울 수밖에 없었지만, 손들 수밖에 없었어요.
버틸 재간이 없더라구요.
표지도 예쁘고, 제목도 두근두근합니다.^^ㅎㅎㅎ
 
다른 모든 눈송이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단 하나의 눈송이
은희경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평소 소설을 아주 많이 읽지 않지만, 어쩌다 보니 요 근래는 연달아서 소설을 읽게 되었다. 그리고 반복적으로 느낀 것은, 이 타고난 글쟁이들의 맛깔난 솜씨에 내가 연이어 감탄하고 있다는 것이다. 글쟁이들이기에 각별히 표현되고 연출되는 이 이야기들은 평범할 때조차도 단단히 빛이 난다. 어휴, 다들 왜 이리 반짝반짝이는 거야!


시외버스를 타고 처음 K시로 오던 날 그녀는 심하게 멀미를 했다. 싸늘해진 그녀의 손을 다정하게 쥐며 남편이 말했다. 낯선 곳이라 멀게 느껴지는 것뿐이야. 자주 다니다보면 가까워져. 이제 곧 서울로 프랑스어 학원도 다녀야지. 당신 꿈이잖아. 그녀는 창밖에 펼쳐진 황폐한 아파트 부지를 바라보며 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프랑스에 가고 싶다는 건 진심이 아니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아무렇게나 해본 말이었다. 남편은 꿈과 비밀을 공유하는 게 사랑의 첫 단계라고 말했지만 그녀에게는 털어놓을 이야기가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다. 억압된 꿈, 그리고 짧은 일탈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비밀. 그것은 아버지 집 거실의 수족관 안에서 헤엄치던 관상어와 똑같이 투명하게 성장해온 그녀와는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 남편이 프랑스어 교본을 선물했을 때 그녀는 당황했다. 남편의 의도와는 달리 꿈이 아니라 비밀이 하나 생겨버린 기분이었다. -49쪽


첫번째 이야기가 뜬금 없이 끝나는 것 같아서 적이 당황했다. 응? 이렇게 끝나? 오줌싸다가?? 어여쁜 표제작이 들어간 작품인데 조금 어이 없었다. 게다가 이 작품이 장편일 거라고 여겼는데 단편이어서 조금 아쉽기도 했다. 그런데 그건 오산이었다. 이 작품은 단편 소설 여러 개가 묶여 있지만 그들의 시간은 미래와 과거가 중첩되어 있고, 캐릭터도 겹치며 하나의 거대한 이야기를 큰 그림으로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러니까 단편들을 묶었지만 크게 보면 장편으로 보아도 문제될 게 없고, 다 읽고 나서야 이야기의 퍼즐이 완성되면서 충만감이 끝도 없이 밀려 온다. 서로 다른 지면에 발표한 작품들인데, 모두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건 애초에 작정을 하고 쓴 게 아닐까? 놀라운 반전이다! 어휴, 속단했던 게 미안할 지경이네. 


차라리 쥐약을 놓았어야 했을까. 그녀는 약보다 덫이 확실하다는 약사의 충고를 따랐던 걸 후회했다. 약이었다면 밤새도록 쥐덫을 매단 채 여기저기 부딪혀가며 사투를 벌이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희망 없는 시간이라면 차라리 지속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아주 잠깐 그녀를 괴롭혔다. -55쪽


첫번째 이야기에서 나왔던 소심했던, 그렇지만 자신의 감정에 솔직했던 소녀는 시간이 흘러 억척스런 아줌마가 되었다. 남편과는 위장이혼을 했고, 도피성에 가까운 외국 생활에선 좌충우돌 날마다 전쟁이다. 진정한 의미의 벼룩시장이 그곳에서 펼쳐졌는데, 어휴 이런 분위기가 이곳에서도 조성된다면 내가 내다 팔 물건은 진짜 많은데... 라는 곁가지 생각이 잠시 끼어들었다. 책은 좀처럼 쉽게 내놓지 못하겠지만 악세사리나 옷은 아주 많으니까.


때때로 그해 여름을 떠올리곤 한다. 엄마는 늘 텔레비전의 볼륨을 높였고 집안의 모든 전등을 밝혀놓았다. 소리를 크게 한다고 영어를 더 잘 알아들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불을 켜놓는다고 해서 삶이 명쾌하게 보이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엄마는 자기를 둘러싼 어둠에 최소한이나마 저항의 신호를 보내야만 했다. 그때 엄마와 한편이 되어준 것은 불행한 여인의 식탁과 초대받지 못한 처녀의 파티 드레스, 그리고 잊혀진 작가의 후회스러운 젊은 시절 등 행복 바깥의 것들이었다. 그때 좀 이상했던 건 사실이잖아. 내 말에 엄마는 고개를 저었다. 너는 보수적인 열세 살이었거든. 엄마는 인생에 대단한 것은 없고 모두가 고독 속에 죽어갈 거라고 생각하면 행복하지 않다는 사실이 조금은 견디기 쉬워진다고 한다. 아마 그런 식으로 사라의 죽음이라는 목차에다 자신의 고독을 슬쩍 끼워넣었을 것이다. 죽음같이 센 쪽에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드러낸다면 그 앞에 잠시 고독을 내려놓는 것쯤 대수롭지 않은 일일지도 모른다. -146쪽


실수만 연발하는 불안한 엄마, 게다가 말도 통하지 않는 엄마 때문에 더더욱 스트레스를 받았을 열세살 아들이, 시간이 흘러 그때의 엄마를 이해하기 시작한다. 그때의 엄마가 얼마나 외로웠는지, 타인의 고통을 자양분 삼아서라도 힘들게 버틸 응원이 필요했는지......


십팔 년 만의 무더위가 찾아온 그해 여름은 길고도 뜨거웠다. 아스팔트는 열기를 내뿜으며 눅진해졌고 영업사원들의 와이셔츠는 먼지와 땀이 뒤섞여 금세 목깃이 새카매지곤 했다. 식당이나 술집에는 작년보다 훨씬 많은 냉방기와 선풍기가 필요했다. 나무들은 너무 많은 잎을 만든 걸 후회하며 축 늘어져 있었다. 동네 노인들에게 그늘을 뺏긴 고양이는 낮 동안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다가 한밤중에야 울타리 밑에서 울었다. K시의 아내들이 얼음 띄운 오이냉국을 만들거나 냉장고 안에 수박을 반으로 쪼개 넣고 남편들의 퇴근시간을 기다렸으므로 상가 지하에는 그것들이 가장 먼저 동났다. 쉽게 잠들 수 없는 열대야가 이어졌고 그런 식이라면 지겨운 여름 하루는 언제까지고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61쪽


온실 속 화초처럼 자랐던 새댁은 신도시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출근한 남편이 돌아오기까지 그녀는 혼자 뜨개질을 했고, 공들여 요리를 했다. 남아서 어찌할 바 모르게 만드는 시간을 무협지로 때우기도 했다. 그녀에게 프랑스어 학원을 다니라고 했던 남편, 아내를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다짐다짐했던 남편은, 그렇지만 결혼 전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자신은 물론 한공간에 있는 사람까지도 더 외롭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늦은 아침 마루에 나가보니 아버지는 텔레비전을 켠 채 외출했던 차림 그대로 소파에 잠들어 있었다. 그것은 완의 기억에 저장돼 있는 아버지의 모습 중 가장 익숙한 모습이었다. 퇴직한 뒤, 그리고 이혼한 뒤에도 그다지 변한 게 없다는 뜻이었다. 늘 남을 외롭게 했고 자신의 외로움을 감추지도 못했다. 영원히 적응하지 못할 시차를 지니고 타인들의 섬 사이를 떠돌아다니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실은 완은 아버지에 대해 잘 몰랐다. 알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94쪽


그런 아버지를 마침내 떠난 엄마를 아들은 뒤늦게야 이해한다. 자신이 버려진 것이 아니라, 자신 때문에 지금껏 참아온 엄마의 인내를, 그리고 사랑을...


상관 마. 촌놈 자식. 어머니는 그 남자가 자신에게나 중요한 것을 세상의 전부로 보고 호들갑을 떨 뿐 아니라 자신과 다르거나 모르는 세계에 대해서는 무조건 깎아내리고 보는 촌스러움이 싫었다고 했다. 완의 생각에도 거기 비하면 아버지는 자기 방식을 전혀 강요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철저히 방치했다. 그러나 요즘 완이 새로 알게 된 것이 있었다. 방치하는 건 방향이 없다는 점에서 대처하기가 더욱 까다로운 폭력이었다. 자기 존중감을 박탈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사랑을 좌절시킨다는 점에서 사람을 무력하게 만들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는 것은 죽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어머니의 말을 완은 이제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다. -103쪽


작품 속에서 메인 캐릭터가 되지는 못했지만, 유학 간 완을 짝사랑했던, 다시 만나서 기뻤던, 그러나 끝내 엇갈리고 만 스페인 도둑에 등장한 여자 아이가 마음에 남는다. 그런데 이름은 생각이 안 나네... 마지막 버스 정류장과 택시 정류장에서 엇갈리던 비오던 날의 두 사람은 그 자체로 한편의 영화였다. 극적으로 엇갈려서 더 아쉬움이 남고 안타까움이 생긴다. 이 책이 연작으로 더 나온다면 혹시라도 그 인연이 다시 이어질까? 


과학자들은 MRI 기술을 이용해 화분 속 식물이 뿌리를 내리는 과정을 촬영했다. 식물은 화분의 안쪽 공간은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가장자리를 향해 뿌리를 뻗어나가다가 화분이라는 벽에 부딪히면 성장을 중단했다. 화분 크기만큼만 뿌리를 내리는 것이다. 번지점프에서처럼 화분 속의 식물에게도 안전한 초기 설계가 필요할는지 모른다. -111쪽


은희경의 소설을 아마도 처음 접한 것 같다. 명성을 확인했고 호감도 커졌다. 목소리만 들었었는데 이제 작품을 만났으니 한층 더 가까워졌다. 소녀적인 감성을 지녔지만, 냉정할 때는 한없이 냉정해질 수 있는 강단이 있지 않을까, 멋대로 상상도 해보았다. 제목이 너무 길고 어려워서 한번에 틀리지 않고 말하기 힘들 것 같지만, 반가운 만남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도플갱어
주제 사라마구 지음, 김승욱 옮김 / 해냄 / 2006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중학교 역사교사 테르툴리아노 막시모 아폰소. 이 우스꽝스러운 이름의 주인공은 어느날 동료교사의 추천으로 비디오를 한편 빌려보았다. 영화에 대한 감상은 그닥 만족스럽지 않았으나 어느 순간 정신을 번쩍 들게 만들었으니, 조연 중의 주연으로 등장한 한 배우가 자신과 똑같이 생긴 것이다. 심지어 오년 전 자신이 수염을 길렀을 때의 모습과 정확히 일치했다. 지난 앨범을 찾아가면서까지 확인해본 일이다. 잠이 올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던 이 사나이의 지나치게 조용한 일상에 큰 파문이 인 것이다. 


작품 속에서는 비디오를 돌려보는 시절이어서 영화처럼 간단한 구글링으로 상대 배우가 누구인지 금세 알아차리지 못한다. 남자는 아주 집요하고 끈질기게 자신과 똑닮은 배우를 찾아낸다. 해당 영화사의 영화를 대거 빌려서, 마지막에 나오는 자막의 이름을 대조해서 해당 배우가 나오지 않은 작품의 이름은 지워가면서 범위를 좁혀가는 것이다. 


주제사라마구 특징이 문장이 아주 길다. 지칠만큼! 눈 먼 자들의 도시나 눈 뜬 자들의 도시는 그것도 매력이었는데, 이 작품이 그 작품만큼 재미가 없어서인지 아주 힘들었다. 읽다가 말장난에 지쳐서 나가 떨어지는 기분이다. 


당신도 나와 똑같은 일을 겪을 겁니다, 거울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볼 때마다 그것이 당신의 얼굴인지 내 얼굴인지 결코 알 수 없을 거예요. 솔직히 말해서 아무래도 당신이 미친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그 흉터를 생각해 봐요, 만약 내가 미쳤다면, 아마 당신도 미쳤을걸요. 경찰을 부르겠습니다. 글쎄요, 경찰이 이런 일에 관심을 가질까요, 내가 한 일이라고는 다니엘 산타클라라라는 배우와 통화를 하려고 전화를 두 번 건 것뿐인데, 내가 그 배우를 협박한 것도 아니고, 모욕한 것도 아니고, 해를 끼친 것도 아니잖아요, 내가 정확히 어떤 범죄를 저질렀다는 거죠. 어쨌든 아내와 나를 불쾌하게 만들었죠, 그거면 충분해요, 이제 전화 끊겠습니다. -246쪽


하여간 이 남자의 고단한 작업이 끝나고, 똑같은 얼굴에 똑같은 흉터까지 지닌 이 조연 배우를 만나기까지, 정확하게 이 책의 절반을 소요한다. 긴 기다림이 필요했다. 이쪽이야 이미 충격을 받았고, 마음의 준비도 했지만, 상대방은 어디 그렇던가. 그러나 나와 똑같은 존재가 세상에 있다는데, 만나고 나면 그것으로 인해 도리어 일상의 평온이 깨질 거라고 예상이 가능하다고 해도 어떻게 그 궁금증을 포기하겠는가. 나라도 당연히 만난다. 그리고 만나지 않으면 그 불안은 어쩔 것인가? 나와 똑같이 생긴 생명체가 버젓이 같은 도시에 살고 있다고 상상하는 것도 좀 무섭지 않은가? 클론도 아니고? (클론이면 더 무섭겠지만...)


배우 다니엘 뿐아니라 아내 헬레나도 혼란에 빠져 있다. 남편과 똑같다는 그 사람, 이미 확인한 바로는 목소리도 똑같다. 그런 사람이 우리 주변을 맴돌고 있다. 만나지 않겠다고 선을 그었지만 이미 상대방은 그들의 머릿속을 점령했다. 


그는 아침식사를 준비하려고 부엌으로 갔다. 아내가 한 말이 생각났다. 그 사람이 우리 머릿속에 들어와 있어. 그녀는 원래 그렇게 단호하다. 아니 정확히 말해서 단호한 것은 아니다. 간결함이라는 재능을 갖고 있을 뿐이다. 짧고 함축적이고 간결한 말 네 마디로 다른 사람 같으면 사십 마디를 말해도 할 수 없는 말을 하는 것. -258쪽 

그녀가 눈을 떠보니 방 안이 거의 어둠에 가까운 어스름 속에 잠겨 있었다. 남편의 느리고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갑자기 집 안에서 다른 숨소리가 들려온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누군가가 집 안으로 들어와서 돌아다니고 있었다. 거실일 수도 있고, 부엌일 수도 있고, 복도로 통하는 문 뒷일 수도 있었다. 어쨌든 그 존재가 바로 여기 있었다. 두려움으로 몸을 떨면서 헬레나는 남편을 깨우려고 팔을 뻗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 이성이 그녀를 제지했다. 여긴 아무도 없어, 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저 바깥에 누가 있을 리가 없어, 그냥 내가 지레 겁을 먹은 거야, 가끔 꿈이 그 꿈을 꾸고 있는 뇌에서 빠져나오는 경우가 정말 있지, 사람들은 그런 걸 환영, 환상, 예감, 징조, 다른 세상에서 온 경고라고 해, 숨소리를 내며 집안을 돌아다니는 사람, 방금 내 소파에 앉은 사람, 커튼 뒤에 숨은 사람은 사람이 아니라 내 머릿속의 환상이야, 나를 향해 곧바로 다가와서 내 옆에서 자고 있는 이 남자와 똑같은 손으로 나를 어루만지며 똑같은 눈으로 나를 보는 사람, -252쪽


두 사람은 기어이 만났다. 만났고, 경악했다. 심지어 마음의 준비를 하고 나온 아폰소마저도 충격을 받았다. 두 사람은 이 놀라운 사태 앞에서도 우스운 기싸움을 벌인다. 바로 민증깐 것이다. 


그래, 태어난 시각이 언제죠. 오후 두 시예요. 안토니오 클라로가 유감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나는 그보다 삼십 분 전, 아니 정확히 말해서 십삼시 이십구분에 머리를 내밀었어요, 미안하지만 당신이 태어났을 때 내가 이미 세상에 있었어요, 그러니까 당신이 복사본이에요.-302쪽 


일방적으로 '복사본'이라는 호칭으로 불려버렸다. 졸지에 클론으로 전락해버린 셈이다. 그러나 이렇게 말로 먼저 자신이 원조라고 강요할 만큼, 다니엘 쪽이 더 흔들렸다. 그랬기 때문에 무리수를 두었고, 그것이 그들의 파멸을 불러왔다. 자신이 원본이라고 우기는 순간, 상대방의 여자 역시 내 여자로 만들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힌 것이다. 


그는 자신의 몸을 훑고 지나간 전율이 사본이라는 첫 번째 단어가 아니라 복사본이라는 두 번째 단어 때문에 생겨난 것임을 의식했다. -331쪽 


이제부터는 작품이 좀 더 흥미로워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전작들의 아우라만큼 빛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 작품을 원작으로 해서 '그을린 사랑'을 연출한 드니 빌뇌브 감독의 '에너미'는 훨씬 흥미롭고 역설적이고 충격적인 작품을 만들어 냈다. 소설로 시큰둥했던 반응을 오오! 하며 등받이에서 몸을 떼게 만들어 냈으니까. 


소설은 정말 나와 똑같이 생긴 유기체로서의 도플갱어를 만들어 냈지만, 영화는 그보다 나의 욕망이 투여된 또 하나의 자아로서의 도플갱어를 표현해 냈다. 전제조건이 다르기 때문에 결말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탄탄한 원작이 있기 때문에 그걸 뛰어넘는 패러디도 나오는 거겠지만, 그래도 내 저울은 영화 쪽으로 더 기울었다. 그래도 원작을 먼저 읽고 영화를 봤기 때문에 더 수월하게 다가간 것은 맞다. 영화가 친절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방금 떠오른 이 생각은 마치 오랫동안 지연되다가 샤워기에서 떨어져내린 축복 같았다. 세 여자가 발코니에서 벌거벗고 즐긴 샤워(『눈먼 자들의 도시』에 나온 장면-옮긴이)가 아니라, 안전이 언제 깨어질지 몰라 불안한 아파트에 혼자 갇혀 있는 이 남자가 누린, 정화의 샤워. 물과 비누를 가지고 연민 어린 손길로 그의 몸을 더러움으로부터 해방시키고 그의 영혼을 두려움으로부터 해방시켜 주는 샤워. 그는 일종의 향수와도 같은 고요한 마음으로 마리아 다 파즈를 생각했다. -369쪽


이런 식으로 전작의 한 대목을 가져오는 장치는 소설가가 해낼 수 있는 하나의 특권이 아닐까. 그 작품을 즐겁게 본 독자로서도 반가운 장치다. 


'눈 먼 자들의 도시'와 '도플갱어' 그리고 '동굴'까지 포함해서 주제 사라마구의 '인간 3부작'으로 꼽는다. 흠, 기왕이면 세트를 맞춰서 동굴까지 읽어야 하지 않을까 잠시 생각이 스친다. 모두 인간의 내재된 욕망, 욕심, 진심... 이런 것들이 보였다. 동굴에선 무엇을 찾아야 할까? 몹시, 철학적인 느낌이다.


혼돈은 해석되기를 기다리는 질서일 뿐이다.

-『반대의 책』                                          - 5쪽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락방 2014-08-28 15: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읽으면서 제가 보지 못한 영화 [에너미]를 떠올렸거든요. 혹시 그 영화가 이게 원작인가? 하고 말이지요. 그런데 맞네요. 저도 에너미를 보도록 해야겠어요.

마노아 2014-08-29 09:17   좋아요 0 | URL
묵혀둔 책을 영화 보기 전에 보려고 부랴부랴 읽었어요. 근데 그러고 또 한참 지났네요. 감독에 대한 애정 때문에 역으로 책을 보게 된 경우예요.^^

아무개 2014-08-28 16: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98년도인가 그쯤에 눈먼자들의 도시를 친구에게 선물 받았었어요.
뭐 이렇게 재미없고 두꺼운 책을 나더라 읽으라는거냐 싶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렇게 십년 넘게 책장에 꽂혀만 있던 책은 얼마전 파지 할머니 손으로 넘어 갔지요. ㅜ..ㅜ

이 책 주었던 친구가 책을 참 많이 읽던 녀석이었어요. 데미안도 고딩때 이놈땜시 읽고 이게 뭔소리야 싶었던 기억이...
그러고 보면 저는 책을 읽지 않아도 많이 읽는 친구들을 항상 좋아했던거 같네요.

마노아 2014-08-29 09:19   좋아요 0 | URL
앞서 눈먼 자들의 도시와 눈뜬 자들의 도시는 재밌게 읽었는데, 이 책 읽을 때 꼭 그런 기분이었어요.
뭐 이렇게 재미 없이 두껍기만 할까...ㅎㅎ
책보는 친구가 많은 건 어쩐지 무척 기분 좋은 관계인 걸요. 우리도 독서 클럽 하나 만들어 볼까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