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과
구병모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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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65세의 조각(爪角). 겉으로 보기엔 자그마한 체구의 할머니 정도로 보이지만 그녀는 40년 이상 업계에 몸을 담은 전문 킬러였다. 그들의 언어로는 방역업자로 통한다. 어린 시절 구구절절 사연 많은 이야기는 건너 뛰자. 여러 우여곡절을 거쳤고 갈곳 없는 그녀를 받아준 것은 류였다. 류의 본업을 모르던 조각은 자신을 덮친 주한미군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해치웠고, 그 찰나의 솜씨를 알아본 류가 그녀를 전문 킬러로 키웠다. 이미 결혼해서 아이까지 있던 류였지만 조각은 그를 마음에 담았다. 


그러나 업계의 속성상 적이 많은 그들이었다. 가족을 모두 잃고 홀로 된 류가 안아주던 밤, 그는 지킬 무언가를 만들지 말자고 말했다. 그렇게 말했던 류도 누군가를 지키며 제 목숨을 버렸다. 이 바닥에서 연민은 가장 불필요했고, 지켜야 할 무언가를 만드는 것은 제 생명을 스스로 깎아먹는 짓이었다. 

그렇게 무엇도 남기지 않고 무엇도 아끼지 않은 채 40여 년이 흘렀다. 이제 노년에 접어든 조각은 마음과 달리 빠르게 쇠해가는 몸의 변화를 눈치 채면서 퇴직의 시간이 가까워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다늦게, 이제와서 누군가가 마음에 들어와 버린 것이다. 말도 안 된다고 스스로 여기지만, 뭘 해보려고 하는 것도 아니지만, 피도 눈물도 없을 전문 킬러가 평범한 사람들의 소소한 일상을 부러운 눈길로 바라보게 되었다. 그들의 자그마한 평화가 지켜지기를 원했다. 자신이 개입하지 않으면 아무 위험도 없었을 그 평화는, 그러나 그녀 자신이 뿌린 씨앗으로 산산이 부서질 위기에 처한다. 업계에 몸 담은지 40년이 지났으니 그녀 손에 죽어간 사람이 오죽 많았겠는가. 게 중에는 그렇게 저세상 간 사람의 유가족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 아이가 그녀처럼 킬러가 되지 말란 법도 없다. 그렇게, 노쇠해서 사그라지는 그녀에게 젊디 젊은 킬러가 복수의 칼을 품고 다가오는 것이다. 조각 자신도 기억하지 못하는 먼 시간 속의 일을 근거로.

무척 흥미로운 소재다. 킬러가 등장하는 것도 평범하지 않은데 그 킬러가 65세 할머니다. 나이는 65세고 아직은 젊은 사람 못지 않은 근육을 자랑하지만, 얼굴 주름만 보면 열살은 더 늙어보이는 쇠잔한 몸의 노인이 주인공이다. 지켜야 할 무언가를 갖지 않던 이 할머니가 버려진 개를 한마리 주워왔다. 개 역시 늙어있었고 누가 먼저 죽을지 가늠할 수 없는 나이였다. 서로의 육체가 쇠해가는 것을 지켜보며 의지하는 모습이 짠했다. 작가가 이 작품을 쓰게 된 것은 냉장고 안에서 형체도 알아볼 수 없게 망가져버린 과일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파과破果다. 


달콤하고 상쾌하며 부드러운 시절을 잊은 그 갈색 덩어리를 버리기 위해 그녀는 음식쓰레기 봉지를 펼친다. 최고의 시절에 누군가의 입속을 가득 채웠어야 할, 그러지 못한, 지금은 시큼한 시취를 풍기는 덩어리에 손을 뻗는다. 집어 올리자마자 그것은 그녀의 손안에서 그대로 부서져 흘러내린다. 채소 칸 벽에 붙어 있던 걸 떼어내느라 살짝 악력을 높였더니 그렇다. 어쩔 수 없이 그녀는 부서진 조각들을 하나하나 건져 봉지에 담고, 그러고도 벽에 단단히 들러 붙은 살점들을 떼어내기 위해 손톱으로 긁는다. 그것들은 냉장고 안에 핀 성에꽃에 미련이라도 남은 듯 붙어서 잘 떨어지지 않는다. 그녀는 문득 콧속을 파고드는 시지근한 냄새를 맡으며 눈물을 흘린다. 얼마쯤 지나 그녀 어깨가 흔들리고 신음이 새어 나오자 무용이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웅얼거리듯 짖기 시작한다. -222쪽


문장을 끊지 않고 한페이지 전부를 사용할 만큼 길게 늘여놓았다. 의도한 만연체겠지만, 그래도 독자는 읽기에 피곤했다. 특히 첫 장면의 지하철 진상 노인에 대한 묘사는 초반부터 읽는 사람을 엄청 지치게 만들었다. 하지만 무심히 앉아 있다가 일어난 노부인이 킬러라는 것을 알아차리면서 작품은 빠른 속도로 독자를 끌어당겼다. 300쪽이 훌쩍 넘는 책인데 다 읽는데 얼마 걸리지 않았다. 이 작품으로 무언가를 남겼냐고 묻는다면 그건 좀 대답할 거리가 궁색하지만, 적어도 흥미와 재미만은 확실히 챙겼다고  답하겠다. 나는 분명 책을 읽고 있는데, 읽는 내내 영화를 보는 기분이었다. 이게 영화로 만들어진다면 얼마나 흥미로울까. 비슷한 소재로 소지섭 주연의 '회사원'이 있었지만, 젊고 싱싱한 육신을 가진 배우가 킬러라는 건 너무 식상하지 않은가. 중년 여배우가 액션도 소화하면서 킬러로 나온다면... 와우... 무척 신선할 것이다. 김해숙 씨 같은 배우라면 어떨까. 액션은... 무리일까? 그렇다고 은교처럼 젊은 배우가 노인 분장하고 찍는 건 어쩐지 사기 같아서 별로고...


그녀의 이름처럼 손톱에 대한 이야기가 몇 번 나왔다. 상징적인 소재다. 그리하여 마지막 구절에서 작가는 이렇게 묻는다.

그래서 당신의 결론은 破果입니까, 破瓜입니까.


그러게. 어느 쪽일까? 어느 쪽이어도 상관 없고, 둘 모두여도 괜찮다. 시간은 정직하다. 40년 경력의 킬러 할머니에게도, 사람에게 된통 데여버린 나에게도. 이 불공평한 세상에서 유일하게 공평하게 주어진 건 오직 시간 뿐. 당신의 한시간과 나의 한시간이 같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가. 그걸 어떻게 쓰는가는 각자의 몫. 분노가 치밀어 오르던 밤 내 옆에는 소설 한권이 있었다. 피도 눈물도 없는 킬러가 등장하는 소설. 내 감정을 비추어볼 때, 적절한 선택이었다. 다시 골라 보겠다. 내게는 破瓜가 맞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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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2-06 08:2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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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2-06 13:5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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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내 모든 것 안녕, 내 모든 것
정이현 지음 / 창비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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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를 회고하고 추억하는 게 마치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그 90년대에 청소년기와 청년기를 거쳤던 사람으로서 그 사실이 반갑기도 하고 다소 씁쓸하기도 하다. 어느 쪽이든 90년대를 자주 생각하게 한다. 이 소설도 그랬다. 작품에 등장하는 세명의 친구들은 나와 동갑이다. 초등학교 때부터 삼총사가 되어 함께 지낸 아이들에게는 다른 친구들이 끼어들기 힘든 틈을 가졌다. 


이야기의 처음을 열었던 지혜는 자신의 눈과 귀로 받아들인 것을 다시 내보내지 못하는 아이다.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에서 신세경이 맡았던 소이가 그랬듯이. 본인이 원하지 않아도 모든 걸 다 기억하고, 그래서 폭주하는 기억들로 머리가 터질 것 같은 아이다. 그래서 누군가와 관계를 맺는 것을 싫어하고 말수도 없고 내성적인 아이다. 그러나 사실 지혜는 말도 많고 삐지기도 잘하는, 셋이 있을 때는 적극적인 성향의 아이였다. 


준모 역시 사연 많은 아이다. 틱 장애 중에서도 가장 상태가 나쁜 뚜렛 증후군이었다. 영화 '수상한 고객들'에서 임주환이 맡은 김영탁이 그랬다. 의도하지 않아도 입만 열면 저절로 욕이 튀어나온다. 준모의 초등학교 시절이, 그리고 중학교 시절과 지금 고등학생이 될 때까지 아이가 얼마나 큰 고통과 갈등을 겪었을지 얼마든지 짐작 가능하다. 


그리고 작품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아이는 세미다. 다단계 사업으로 지명수배가 되어 이혼도장을 찍고 미국으로 도피한 엄마, 엄혹한 할머니 할아버지 댁에 딸을 맡겨놓고 나몰라라 하는 무책임한 아빠를 둔 이 아이가 한남동 대저택에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살고 있었다.


"하여간 드라마 탓이야. 요즘 판검사가 무슨 대수라고. 품위 없게."

할머니가 품위를 따질 때마다 나는 혹시 내가 그 단어의 뜻을 잘못 알고 있는 건가 싶어 혼란스러워지곤 했다.- 33쪽


1994년 여름, 폭염으로 인한 사망자는 3384명이었다.

무더위를 이기지 못하고 폐사한 가축의 빈 우리를 뉴스에서 보았다. 저런. 뜨거운 물에 우린 잎차를 마시던 할아버지가 혀를 찼다. 할머니가 단언했다. 종말이 가까웠다니까요. 그들은 반팔 실내복 위에 칠부 소매의 얄따란 카디건을 덧입고 있었다. 그 집의 실내온도는 언제나 25.5도와 26도 사이를 유지했다. 나의 조부모는 한의사의 조언대로 찬 기운이 몸에 스며드는 일만큼 해로운 건 없다고 믿는 눈치였다. 세상에는 얼음도, 설탕도, 콜라도, 배달 치킨도 먹지 않는 삶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럼에도 경건하지 않은 삶 말이다. -62쪽

1994년의 여름이란, 그 시간을 살아본 사람만이 기억할 수 있는 끔찍한 뜨거움이었다. 그 더운 날에도 세미는 방학 내내 학교 도서관을 찾았다. 집에 있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찜통 더위 속에서 겨우 인간의 존엄성을 지켜주는 낡은 선풍기 한대가 도는 도서관에서 세미는 자신보다 하루라도 더 먼저 태어난 책들만 읽었다. 열여덟 인생이 지나치게 무거워서, 떠밀려 넘어지지 않으려고 안간 힘을 쓰는 게 안쓰러웠다. 원망스럽지만 그래도 보고 싶은 엄마, 미워 죽겠지만 내칠 수 없는 아빠, 두렵고 불편하지만 그럼에도 신경 쓰이는 할머니, 그리고 누가 어른인지 아이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 고모까지. 아이인데도 이미 어른으로 웃자라 버려야만 했던 이 아이의 인생이 사주 보는 젊은 아가씨에게도 보였나 보다. 


"학생은 꽃이에요, 절벽에 핀 풀꽃. 잊고 잊히며 살아야 해요. 있는 듯이 없는 듯이. 오래 안고 가지 말아요. 무슨 일이더라도."

잔디밭에서 아무 풀도 짓밟지 않기 위해 애쓰는 사람처럼 여자는 조심조심 말하고 있었다.

"사무쳐도, 아파도, 다 흘려보내요. 내 것이 아닌 듯. 그러면 꺾이지도 밟히지도 않을 거예요." -88쪽


절벽에 핀 외로운 풀꽃. 잊고 잊히며 살아야 한다는데, 그게 쉽게 된다면 인생이 이리 무거웠겠는가. 다 흘려보내라고 말해주지만, 흘려버리게 어디 세상이 가만 두던가. 세미의 엄마가 세미를 낳은 건 스무 살 때였다. 몸은 성인이었지만, 부모는 모두 어른으로 자라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최소한의 바람막이도 되어주지 못한 분별 없고 무책임한 못난 부모에게 화가 치밀었다. 그 부모도 행복하지는 않았겠지만, 그래도, 그래도 그래선 안 되는 거였잖아!


준모의 엄마는 아들을 위해 날마다 교회에 가서 기도를 드렸다. 얼마나 간절했을까. 아무리 애원해도 함께 가주지 않던 아들이 모처럼 기분 좋았던 어느 날 엄마를 따라 교회를 찾았다. 아아, 그런데 그 교회란 것이 흔히 보는 장로회나 감리교, 침례교  혹은 성결교 같은 게 아니었다. 교회당도 아닌 옥상에서 집회를 갖고 비닐봉지를 뒤집어 쓰고 기도하는 모습이란, 내가 준모라도 혼비백산 도망칠 것 같다. 이후 아이가 더 마음의 문을 닫았을 것은 자명한 일이다. 


면허 언제 땄어?

안 땄는데.”

그럼, 운전 잘해?”

몰라, 오늘이 처음이야.”

, 미쳤어 정말.”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지혜는 허리가 꺾이도록 웃었다. 세미의 생일이었다. 어머니는 가게에서 쓰는 미니 승합차의 열쇠를 주면서 트렁크에 실린 아이스크림 케이크를 가지고 가라고 했다. 차를 통째로 가지고 가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차가 없어진 사실을 알면 그녀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맨 먼저 당황할 것이고 곧 화를 낼 것이고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할 것이다. 그러나 걱정은 되지 않았다. 하느님에게 다 일러바치고 그분으로부터 답을 구할 테니까. 그리고 머잖아 편안해질 테니까. -145쪽


교회에 대해서, 종교에 대해서 생각이 많은 요즘이었기 때문에 더 답답해졌다. 오 마이 갓!


작품 말미에 내 모든 것에 '안녕'을 고해야 하는 사건이 터진다. 스무살을 바라보고 있던 열아홉의 5월이었다. 그러니까 고3 5월이다. 타이밍이 안 좋았다. 돌봐야 할 사람을 까맣게 잊었던 것은 욕먹을 일이긴 했지만 하필 그때 그런 일이 터진 건 지독히 나쁜 우연이었다. 도움 청할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 정말 급한 일 있을 때 불러달라고 했던 걸 기억해준 건 고마웠다. 그렇지만 그 대가가 지독했다. 준모보다도 지혜에게. 무엇도 내버릴 수 없는 기억력을 가진 아이이기 때문에 그랬다. 비밀을 공유해준 대가로 이후 지혜는 자신을 가두고서 살아야 했다. 이게 정말 누군가가 모욕당하지 않는, 존엄을 지키는 방법이었을까? 문득, '아이 엠 러브'에서 틸다 스윈튼이 떠올랐다. 당시 그녀의 입장과 그녀가 갈망하던 모든 것에 동의하고 감정이입이 되었지만 그 타이밍이 아들의 죽음 뒤였기 때문에 온전히 인정해줄 수 없었다. 꼭 그런 기분. 이 선택을 반드시 해야 했던 거니? 


본인의 잘못이 전혀 개입하지 않은 사건이었다면 아이의 선택을, 아이가 만들어낸 비밀에 동조가 됐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책임소재가 분명히 따라올 일에 이런 식의 처리는 핑계로도 보인다는 게 문제였다. 그래놓고 십여 년 뒤 서른에 접어들었을 때의 모습은 서로를 바꿔버린 느낌이었다. 잊고 잊히며, 다 흘려 보내서 꺾이지도 않고 밟히지도 않게 변한 것 같다. 대신, 그 멍에는 다른 사람에게 옮아갔다. 안녕은 한 명만 한 것이 아니라 셋이 같이 해버렸다. 


비밀은 지켜졌고, 나와 지혜와 준모는 다시 모이지 않았다. 우리는 마침내 뿔뿔이 흩어질 수 있었다. 내가 끔찍이도 두려워했던 것은 혼자 남겨지는 게 아니었다. 이 세상에 혼자인 사람이 오직 나 혼자뿐인 거였다. 준모도 지혜도 어딘가에 혼자 있을 거라 생각하면 아무리 우스운 영화를 봐도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어른들은, 어른이 되면 원래 다 그런 거라고들 말했다.

너의 아이가 살고 있는 아침의 집에 너는 꿈에도 들어가지 못하리라.’

서른을 며칠 앞둔 어느 날, 책에서 이런 구절을 읽었다. 나는 나직하게 중얼거려보았다. 안녕, 아침의 집. 안녕, 내 모든 것.-228쪽


혼자 남겨지는 게 싫었는데, 사실은 나 혼자만 남겨지는 게 끔찍했다. 누구라도 물론 그럴 것이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모두 함께 아침의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된 것은 더 잔인한 일 아닌가. 슬프고 슬픈 일이다.


직전에 미야베 미유키의 소설을 아주 천천히 읽었다. 의도한 바가 아니지만 빠르게 읽히지 않아서 답답했고, 재미가 있음에도 느린 속도 때문에 갑갑했다. 이 작품은 아주 빠르게 읽힌다. 이야기도 빠져들게 만드는 힘이 있다. 고치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 제 몸을 찢었지만 나비가 되는 일은 너무나 힘들었던 아이들의 이야기에 연민을 갖고 읽어냈다. 시작은 지혜가 열었고, 마무리는 준모가 닫았다. 그렇지만 이야기의 전반적인 진행은 세미가 맡았다. 나름의 배분일 테지만, 다소 균형이 안 맞는다는 느낌이 든다. 무엇보다 말미의 이야기가 무거운 기분을 더 가중시켜서 끝맛이 개운치가 않다. 그래도 준모가, 본인도 충분히 어렸던 그 아이가 마지막에 베푼 배려는 뜨겁고도 아릿했다. 너의 그린란드는, 너의 사막은 또 얼마나 춥고도 고독할까. 그래도 네 말을, 너의 욕을 알아들을 수 없는 그곳에서 네가 자유로울 거라고 위안을 가져본다. 얼음으로 가득한 성에서 엘사가 외롭지만 자유함을 느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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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1-30 04:3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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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1-31 01:0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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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의 위증 2 - 결의
미야베 미유키 지음, 이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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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의 마지막에서 료코는 학교를 휩쓸었던 살인사건의 진실을 자신들의 손으로 파헤치겠노라고 결심했다. 의분에 가득차서 나온 말이었고, 어느 정도는 충동적이었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신중한 아이는 한때의 감상으로 이런 커다란 일에 제 몸을 던지지 않았다. 왜 이 일을 해야 하는지 당위성을 설명했고, 자신이 당한 부당한 대우를 역이용해서 유리한 패를 던지기도 했다. 그리고 뜻을 같이 하는 아이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처음엔 호기심이었을 수도 있고, 일종의 마음의 빚 덜기일 수도 있었다. 그런데 전심을 다해 변호인 측과 검사 측으로 나뉘어서 사건을 파고들다 보니 어느새 모두가 진심이 되고 말았다. 그것도 제법 전문적인 느낌이 나는 법정인으로!


가장 시선했던 것은 변호인 가즈히코의 등장이다. 조토 제3중학교 학생도 아닌 가즈히코는 지난 해 크리스마스에 죽은 가시와기와 초등학교 때부터 알고 지낸 사이라고 했다. 같은 학원도 다녔던... 오이데 슌이의 변호를 맡으려 했던 후지노 료코가 검사가 되는 바람에 비어버린 자리를 가즈히코가 차지했다. 사건에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오이데 슌지로부터는 객관적인 시선이 가능한 인물이라는 점에서 그의 변호인 낙점은 적절해 보였다. 그러나 그에게서 노다 겐이치가 '강 건너를 보고 온 눈'을 읽었을 때 그는 이 사건에서 가장 요주의 인물이 되고 말았다. 1권 첫 시작에서 등장했던 공중전화 박스의 인물이 가즈히코가 아닐까 생각한다. 이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커다란 사연과 트라우마를 안고 있는 그의 과거와, 지나치다 싶을 만큼 똑똑하고 냉정한 아이가 한번씩 무너질 때를 생각하면 이번 재판은 오이데 슌지의 변호가 아니라 가즈히코의 변호가 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그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일지 진심으로 궁금하다. 


중2에서 중3으로 막 올라간 아이들, 그래봤자 열다섯, 열여섯인 아이들이 살인사건과 관련된 재판을 치른다. 어이없다고 치부하기 딱 좋은 상태지만, 진지하게 들여다보면 그렇지가 않다. 아이들은 이 재판을 준비하면서 확실히 변하고 있고 성장하고 있다. 사실 재판을 시작하게 만든 후지노 료코가 제일 그랬다. 같은 반 학우였던 가시와기가 죽었을 때 반 아이들이 흐느껴 우는 걸 보며 짜증나 하던 게 그 아이였다. 평소에 전혀 친하지도 않았고, 한달 이상 등교거부를 하고 있어도 걱정조차 없던 사이였는데, 그 아이가 죽었다고 하니 대성통곡을 하는 아이들을 지나치게 감정적이라고 본 것이다. 인정한다. 둘 모두 맞다고 본다. 후지노의 지적도 사실이지만, 내가 아는 누군가, 그것도 나랑 동갑인, 그래서 아직 어린 학우가 자살했다고 한다면 이제껏 없던 관심도 새로 생겨서 안타깝고 가엾고 슬퍼질 수 있다. 그것 역시 인지상정이니까. 그러나 이후 반응은 다르다. 그때 눈물 한방울 안 흘렸던 후지노는 입시를 앞두고 이 사건에 끼기 싫어하는 다른 아이들과 달리 진실에 도달하고자 애썼다. 이건 후지노가 우등생이어서 가능한 작업이 아니다. 진심으로 이 답답함을 깨부수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재판의 당사자인 피고인 오이데 슌지. 불량 패거리의 리더이고, 학교와 친구들에게 참으로 민폐 덩어리인 아이였다. 그런 아이도, 만약 억울하게 살인자라는 오명을 쓴 거라면 마땅히 변호받아야 하고, 자신의 억울함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미야케 주리도 마찬가지다. 그 아이가 고발장을 쓴 사람이라고 어른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그리고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진심으로 그 아이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왜 그런 고발장을 썼는지, 정말로 무언가를 알고 있는 건 아닌지... 


후지노는 재판을 준비하면서 여러 가지 진실과 맞닥뜨린다. 머리로 막연하게 생각하는 것과 현장에서 직접 부딪히는 것은 확실히 달랐다. 검사로서 자신의 증인을 믿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믿어야 하니까 믿는 게 아니라, 믿으니까 믿어지는 진짜 신뢰를 확인한다. 이 똑똑한 아이가 재판에서 어떤 활약을 할지 사뭇 기대가 된다. 반대편 변호인도 보통 인물이 아니니 말이다.


노다 겐이치의 성장도 눈부셨다. 이 아이는 그야말로 강 건너편을 보고 온 아이다. 그때 그렇게 절망에 몸부림치던, 그래서 무서운 계획을 실행에 옮기고자 했던 아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노다는 변했다. 평소에 얌전하고 조용해서 눈에 띄지 않는 아이였던 노다 겐이치. 성적으로 눈길을 끌거나, 말썽을 부려서 관심을 갖게 하는 아이가 아니라면 학교에서 집중받기 힘들다. 노다도 그랬다. 그런 노다의 장점들이 변호인의 조수 역할을 하면서 여려 면에서 관찰되었다. 세심하고 따뜻한 아이다. 노다가 변하니까 아버지도, 어머니도 변했다. 좋은 쪽으로. 그렇게 가족의 상처가 아주 조금씩 아물어가는 듯 보인다. 다행스럽다. 


망나니 아빠를 둔 오이데 슌지. 이 재판의 피고인인 오이데. 이 아이도 자랐다. 느리지만, 아주 더디게 천천히,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도 성장했다. 몸은 이미 어른이지만 마음은 자라지 않은 아이어른이었던 오이데도 변화를 보였다. 폭력 아빠 밑에서 폭력으로만 모든 걸 해결할 줄 알았던 상처입은 짐승 같던 이 아이가 주변 사람을 신뢰하기 시작했다. 엄마가 맞을까 봐 걱정했고, 도움을 요청하고 도움의 손길을 잡을 줄 알게 되었다. 흡사 늑대 소년같던 아이가 인간의 말을 이해하고 구사하는 것처럼 변했다. 이제 이 아이도 자신이 저질렀던 무수한 악행들과 찬찬히 마주할 때가 왔다. 6일에 걸쳐 이루어질 3권의 재판에서 오이데 슌지도 진정으로 구원받고 되살아나기를 기대한다. 


등장하는 인물들 중 학생들은 어린대로 그 순수함과 열정으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어른은 어른대로 그 성숙함으로, 또 배려하는 마음으로 따스함을 느끼게 했다. 딸을 잃고 마음이 지옥이었을 마쓰코의 엄마는 재판의 검사를 맡고 있는 료코에게 이렇게 말해준다. 


"네 입장이 이렇게 곤란해지는 건 마쓰코도 원치 않을 거야."

"제가 시작한 일인걸요."

"하지만 넌 아직 어린아이잖니. 도망쳐도 괜찮아."  -398쪽


일련의 사건들로 책임을 지고 물러난 전임 교장 쓰자키 선생님도 그랬다. 좋은 선생님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속물이거나 무책임한 선생들이 많았던 학교에서 처음부터 온전히 학생들의 편이셨던 쓰자키 선생님은 이번에도 역시 존경의 눈빛을 보내게 만들었다. 제몫의 역할을 잘해내는 아이들을 지켜보면서 응원하고, 동시에 기꺼이 방패도 되어주고 무기도 되어주는 그런 어른, 그런 선생님. 그런 분이 있어서 참으로 다행이었다. 참으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감정 중 가장 강렬한 반응을 보이게 하는 것은 '억울함'이라고 들었다. 공감이 간다.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게 만들고, 한겨울에도 열로 달아오르게 하는 감정이란 다름 아닌 억울함 아니던가. 그 억울함 때문에 수년 동안 거리 시위를 하고 무고함을 밝히기 위해서 투쟁하는 사람들이 있지 않은가. 이 작품 속 아이들도 그랬다. 어른들도 그랬다. 그들은 모두 자신의 억울함을 풀고 싶어했고, 그래서 진실을 밝히고 싶어했다. 이제 바로 그 진실을 밝혀낼 재판의 막이 오른다. 아이들이 치르는 교내재판이니 법적 효력도 없고, 얼마만큼 만족스러운 결과를 낼지 알 수 없다. 그러나 모두들 진실을 알아내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고, 그 과정에서 그동안 몰랐고, 알려고 하지 않았던 진실에 이미 많이 다가섰다. 이미 충분히 의미있는 작업이었지만, 그 이상의 것을 보여줄 것이라는 것을 의심치 않는다. 지금껏 드러났던 것과 전혀 다른, 혹은 허를 찌르는 새로운 진실과 마주칠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기꺼이 마음을 열고 참여하겠다. 진실은 후련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아프기도 하다는 걸 충분히 알고 있으니. 나 역시 겐이치처럼, 가즈히코처럼 제 그림자를 밟고서 지켜보겠다. 누구도 그림자로부터 도망칠 수는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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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개 2014-01-24 09: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걸 장르소설이라고 하나요?아닌가??
리뷰 읽으면 한번 읽어 보고 싶다 생각하다가도
이상하게 딱 손이 안가네요.

아..저는 언제 이렇게 잘! 그리고 성실하게 리뷰를 써볼까요. ㅜ..ㅜ


마노아 2014-01-24 13:28   좋아요 0 | URL
미스테리 혹은 추리물 장르소설이라고 하는 것 같아요.
확실히 밤을 새워 읽을 만큼 흡인력이 있는 소설은 이쪽 장르 같아요.
감동 때문보다는 재미 때문이지만요.^^
읽는 데 워낙 오래 걸려서 리뷰 쓰고 나니까 막 후련해요.
3권은 며칠 쉬었다 읽어야겠어요.(>_<)
 
너를 봤어 - 김려령 장편소설
김려령 지음 / 창비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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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에 집중해 들어가기까지 제법 시간이 걸렸다. 아마도 그동안 읽어온 김려령 작가의 책들이 청소년들을 주 대상으로 하는 글들이었기 때문에 그런 선입견이 있었나 보다. 꽤 높은 수위의 문장들이 나오자 나도 모르게 당황했다. 그제서야 이전과는 무척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럼에도 집중이 잘 되지 않았다. 이 문장을 누가 말한 것인지 되새겨 보아야 알아차릴 수 있는 문장은 피곤했다. 게다가 글이 무겁기까지 했다. 한 해의 마무리를 짓는 소설로는 좀 부담스러웠다. 그런데, 어느 순간이 지나가자 몹시 집중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다락방으로 올라간 아내 때문에 아래층에 있는 '나'가 무겁다고 했을 때 그저 무심히 지나쳤는데, 그 아내가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아차린 순간 이야기가 달리 보였다. 뭔가 불미스럽다고 여긴 것들의 기준을 다시 세워야 했던 것이다. 


글쓰는 사람들을 소재로 한 것도 흥미롭다. "그들이 사는 세상"이 드라마 만드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드라마로 풀어냈듯이, 이 책은 소설 쓰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소설로 풀어냈다. 죽이 잘 맞는 두 명의 후배를 엮어서 연작 소설을 기획하는 장면이 유독 재밌었다. 


"육상경기가 한번만 열리는 게 아냐. 대신 우리는 작전을 달리해 보자고. 1부 작가가 장르 인물 다 감추고 달리고, 그걸 2부 작가가 요령껏 받아서 달리는 거야. 앞에서 살려놓은 거 뒤에서 죽일 수도 있고, 죽여놓은 거 살릴 수도 있겠지. 자메이카 팀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쭉쭉 달리든가. 누가 능력자인지 좀 보자. 자신 없어?"

"같은 팀이면서 왜 다 감추고 가야 하는데요?"

"낯선 곳에 뚝 떨어진 사람이, 생각지도 못한 세계를 포착할 수도 있거든."  74쪽


오, 이런 기획 정말 흥미롭다. 서간 형태로 주고 받는 글들도 이미 나와 있지만 이런 식으로 남의 글을 받아 자신이 완성하는 형태의 소설도 있을까 호기심이 일었다.


그러고 보니 좋아했던 드라마 중에 '떨리는 가슴'이라고 있었다. 여섯 명의 연출가와 여섯 명의 작가가 2부작씩 맡아서 총 12부작짜리 옴니버스 드라마를 만들었다. 등장인물은 같고 그들의 캐릭터 설정도 동일하지만, 누가 연출하고 누가 글을 쓰느냐에 따라서 느낌이 확 달라졌다. 그럼에도 고수들인지라 전체적인 균형을 흩어놓지 않았다. 이런 매력적인 드라마를 주말 밤도 아닌 애매한 5시 정도에 편성해서 시청률을 바닥이었지만...;;;;;


섹스 전문 작가와 살인 전문 작가가 글을 이어 쓰게 되었으니 살고 죽이는 생사가 쥐락펴락 진행될 것 같았다. 꿈의 고지인 10만 부를 찍으면 세계에서 가장 큰 성기박물관을 짓겠다고 하고, 또 하나는 황금작두를 만들겠다고 했다. 각자의 취향이 반영된 소망이다. 


하하하. 실제 십만부가 나가도 서울에 작은 전세방조차 마련하기 힘들다. 소설가에게 십만부는 그런 것이다. 심정적 부담은 돼도 한번쯤은 가뿐하게 밟고 가고 싶은 고지.
"우리는 시인이 아닌 걸 하늘에 감사해야 해. 시 쓰는 도욱선배는 만부만 나가면 당장 천문대를 살 거래."
"평론 하는 전소희는 천부만 나가도 나로호를 쏠 수 있지 않을까?" 77쪽


재밌게 썼지만 글쟁이들의 회한이 담긴 표현 같아서 조금 안타까웠다. 이 분야만 그렇겠냐마는......


사회적으로 성공했고, 뭇 사람들의 선망과 존경을 받는 인물이지만, 그 인물의 내면에 깊은 우물이 있어 다가오는 사람도 빠지게 만들고, 본인도 그 안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허우적댄다. 문득, 장국영이 떠올랐다. 내 친구 하나는 장국영이 생존해 있을 때 그 얼굴을 보면 우울함이 읽혀져서 자살할 상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스스로 목숨을 버리기 전에는 나로서는 상상해 보지 못한 일이다. 하기사, 그렇게 말하자면 그 야무지고 사랑스러웠던 진실 언니는 어떠했던가. 


폭력이 난무하는 집에서 성장한 주인공은 개천에서 용이 난 경우였다. 아내 역시 그런 인물이었다. 서로가 깊은 우물이어서 더없이 어두컴컴했던 두 사람이지만, 그랬기에 서로를 더 잘 이해할 것 같아 보이지만, 내 경험으로도 그런 조합은 그다지 좋지 않다. 서로에게 빛이 되어주질 못하고 안식이 되지 못한다. 스스로를 견뎌내고 버텨내는 것만으로도 버겁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주인공을 읽어내는 것이 조마조마했다. 그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그로 인해 행복해하고, 모든 걸 다 내주더라도 채워지는 만족감을 느낄 때조차 아슬아슬했다. 기어코 무언가가 터질 것만 같아서.


제목이 독특했다. 이 제목은 이 책에서 두번 쓰인다. 한번은 가슴을 왈랑거리게 만드는 설렘으로, 한번은 가슴을 애잔하게 만드는 서글픔으로...


다른 사람의 눈동자에서 읽혀지는 나를 목격한다면 얼마나 큰 충격을 받을까 싶다. 그 안에서 비치는 내가, 내가 바라는, 혹은 남들도 바라는 그럼 모습이라면 좋겠지만, 내가 감당하지 못하는, 남엠게 내보일 수 없는 그런 모습의 나라면... 그런 나를 보았다면... 누구라도 내쫓고 싶지 않을까. 너를 봤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걸 인정해버릴 때, 뒷감당할 자신이 없을 테니 말이다. 


너를, 봤어. 네 눈에서... 나를 봤어. 그것은 나였어. 세상이 가만 두지 못하고, 내가 어쩌지 못하는 가여운 내가......


200여쪽에 달하는 비교적 짧은 느낌의 소설이었다. 그런데 다 읽고 나니 전력질주로 장거리 달리기를 한 것 같은 피로가 몰려온다. 등장인물들에게 지나치게 감정이입이 되어버린 탓이다. 힘은 들지만, 그 경험이 나쁘지 않다. 이런 인물들을, 조금은 더 이해하게 된 것 같아서... 조금 더 연민을 가질 수 있게 되어서... 더불어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지난 몇달 간 나를 참으로 힘들게 했던, 안 보고 싶지만 안 볼 수 없어서 더 슬펐던 그 사람이. 덕분에, 조금은 더 너그러워질 수 있을 것만 같다. 그 안에서 나도 보았으니까. 나 역시... 너를 보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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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 정유정 장편소설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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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권 인근 도시 화양. 불볕이란 이름을 가진 이 인구 29만의 도시에 원인모를 전염병이 발생했다. 최초 발병자는 개 번식사업을 하던 남자였는데, 병에 걸린 개에 물린 이후 눈이 빨갛게 변하고 온몸에서 피를 흘리는 증상을 보이다가 죽었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119구조대원에게 전염병이 퍼지고, 응급실의 의사와 간호사가 '빨간눈'에 감염되었다. 발병 후 고열에 시달리다가 폐출혈을 일으키고 길어야 사흘이면 죽게 되는 이 치명적인 전염병은 삽시간에 퍼져버렸고, 정부는 도시 전체를 고립시킨 채 나가지도 들어가지도 못하게 통제를 해버렸다. 당연히 이 도시 안에서는 예상할 수 있는 모든 흉악하고 추한 범죄가 일어난다. 약탈과 방화, 강간과 살인이 예사로 일어난다. 공권력은 이 사태를 막지도 못하고 시민을 안전하게 지켜주지도 못한다. 오히려 이 바이러스가 외부로 번져나갈까 전전긍긍할 뿐이다. 살든지 죽든지, 그 모든 것은 이 안에 갇힌 사람들의  복불복이었다. 


작품은 여섯 명의 화자를 앞에 내세웠다. 그들 각자는 자신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했지만 글을 관통하는 전체적인 맥락은 3인칭이다. 적당히 거리를 유지하면서 인물의 내면까지도 드나드는 아주 영리한 시점이다. 첫번째 인물은 알래스카 출신 수의사 서재형이다. 알래스카에서 한국인 최초로 참여했던 개썰매 레이스에서 화이트 아웃에 빠져버린 재형은 굶주린 늑대의 공격을 받는다. 살아남기 위해 썰매와 자신을 묶었던 끈을 끊어버린 재형은 골절상을 입은 채 조난 당하고, 가족과도 같은 개들은 늑대의 희생양으로 사라진다. 그 아이들은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썰매개 마야의 아이들이었다. 재형을 구해내기 위해 사흘길을 달려온 마야는 무한한 신뢰와 애정이 담긴 눈으로 그에게 물어왔다. 


"대장, 내 아이들을 어쨌어?"


재형이 가졌을 죄의식과 트라우마가 무엇이었을지 충분히 짐작 가능하다. 결국 재형은 알래스카를 떠나 한국으로 돌아와서 유기견들을 보호하는 수의사로서 '드림랜드'를 운영한다. 그러나 사이코 패스 박동해에게 매맞을 죽을 뻔하던 쿠키를 구해준 것이 도리어 악연이 되어서 언론에 의해 온통 난자당한다. 그 악연의 한 고리에 윤주가 있다.


김윤주 기자는 자신이 얻은 제보에 따라서, 나름의 합리적 의심을 거친 채 기사를 작성했다. 그러나 그 기사는 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했고, 왜곡된 진실은 누군가를 파멸에 이르게 만들었다. 더구나 인수공통전염병이 돌고 있는 화양에 대한 그녀의 기사는 더 큰 해일을 몰고 와서 수많은 유기견들을 만들어낸 것도 모자라 살처분 과정에 이르기까지 했다. 그 살처분의 현장에서 개들의 살려달라는 절규를 듣고 온몸으로 울어낸 그녀가 이후 화양에서 겪은 고초는 어쩌면 참회에 가까운 것일지도 모르겠다. 


노수진은 화양 의료원의 간호사다. '네수진'이라는 별명으로 통하는, 도무지 거절이라고는 하지 못하는 이 착하고 순박한 아가씨는 무수한 직장동료와 환자들이 '빨간눈' 괴질에 걸려 죽음의 문으로 걸어가는 과정을 묵묵히 배웅해야 했다. 끔찍한 전염병과 학살이 난무하는 이 무서운 도시의 이야기에서 유일하게 웃어갈 틈을 준 캐릭터가 있다면 그건 노수진이었다. 작가의 실제 경험담을 바탕으로 한 군부대 방문기며, 나이팅게일 선서식에서의 꽈당 수진도 그랬다. '네'밖에 못하는 이 처자의 이름이 '노' 수진이라는 것에서 작가의 네이밍 센스가 돋보였다.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와 행방을 알지 못하는 군인 남동생을 기다리면서 날마다 밥을 차린 그녀의 행보가 안타까웠다. 인정하기 싫어서 도피하고자 했던 처절한 쌀밥 한그릇이 아니던가.


문득 기준이 떠올랐다. 해 질 무렵이면 찾아와 현진이와 아버지를 찾지 못했다고 전해주는 남자. 그녀는 그의 말을 시신을 찾지 못했다로 들었다. 하루 온종일 베란다를 서성이며 그가 오는 해 질 녘을 기다리며서도 그를 만나는 것이 두려웠다. ‘찾았다고 할까 봐 두려웠다. 찾고 나면 그가 오지 않을까 봐 두려웠다. 그녀에게 한기준은 세상에 남은 유일한 한 사람이었다. 그녀가 알고 있는 마지막 한 사람, 그녀를 알고 있는 단 한 사람, 그녀가 만날 수 있는 살아 있는 한 사람. -421쪽


한기준은 소방대원이다. 아내와 아이를 잃은 그의 불타는 복수심은 유일한 동물 화자 링고와 닮아 있다. 둘은 똑같이 외쳤다. 


"이 개새끼들이 내 아내를 죽였어."


링고는 살고 싶다는 열망보다 더 강하게 복수심을 불태웠다. 내 사랑을 죽인, 내 아내를 앗아간 자를 향한 무서운 집착은 생명을 돌보지 않은 채 그를 앞으로 나아가게 했다. 그리고 그 절절한 외침을 재형은 알아들었다. 자신 역시 자신의 사랑하는 개를 죽게 한 상대를 향해 복수의 칼날을 내리지 못했다. 인간에게 요구하지 못하는 것을 개에게도 요구하지 못하는 그에게선 인간을 만물의 영장이라고 여기게 하는 허영도 없고, 짐승을 '그것'이 아닌 '그대'로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이 있다. 여기에서 작가는 '희망'을 찾아냈다. 그는 성자가 아니고 절대자도 아니다. 그도 어린 시절 제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 가족같은 개들을 늑대의 희생양으로 삼았던 돌이킬 수 없는, 그래서 지울 수도 없는 과거를 갖고 있다. 그래서 그가 어찌 보면 자신의 원수라고도 할 수 있는 상대를 구하기 위해 제 몸을 던졌을 때 모든 속죄가, 진정한 구원이 일어났다. 마치 영화 설국열차에서 주인공이 식량으로 내놓지 못했던 제 팔을 어린 소년을 구해내기 위해서 작동하는 엔진 속으로 밀어넣었던 것처럼!


인간의 힘과 지혜가 힘을 쏟지 못하는 버려진 도시 화양에서 죽은 자가 이유 없이 죽었듯이 살아남은 자도 마땅한 이유로 행운을 거머쥐지 못했다. 물론, 그것이 누군가에겐 더 큰 고통과 절망으로 다가오기도 했지만. 이곳에선 가장 죄없는 자들이 가장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고, 가장 죽어 마땅한 자가 지나치게 오래 살아남기도 했다. 그리고 가장 뜨겁게, 가장 인간적으로 보였던 이는 늑대개 링고였다. 숭고해 보이기까지 했던 서재형의 헌신 덮고도 남을 매력이었다. 


화양이 고립되었던 기간을 뜻하는 숫자 28. 이 길지도 짧지도 않은 숫자는 참으로 속절없어 보인다. 28일은 바이러스의 원인을 규명하기에 턱도 없고, 대책을 마련하기에도 무리인 숫자였지만 29만의 인구를 무참히 학살되도록 방치할 수 있는 긴 숫자이기도 했다. 무고한 사람들이 죽어갔고 억울하게 희생당했건만, 이 저주받고 버림 받은 도시 바깥의 사람들은 안에서 있었던 일들에 대해서 침묵했다. 약속이나 했듯이 일제히...


화양에서 일상을 앗아간 세상은 화양을 잊은 것 같았다. 죽은 자를 땅에 묻듯, 시간과 망각 속에 화양을 매장해버린 후 자신들의 일상을 영위하고 있었다. 화양에 대한 뉴스는 점점 줄어들었다. 곧 시작될 브라질월드컵 얘기에 밀려 어느 날엔 아예 언급도 없이 넘어가기도 했다. 당연한 얘기지만 그날 새벽에 대한 이야기는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날 새벽, ‘700미터 구간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진상이 밝혀지려면 기나긴 세월이 지나야 할 터였다. 바깥세상 사람들은 그 일을 믿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야 마음이 편할 테니까. -473쪽


이런 비겁한 침묵이, 사악한 카르텔이 화양에서만 있었을까. 80년 광주에서,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아니 지금까지 줄곧... 우린 얼마나 많은 '살려달라'는 외침에, '살고 싶다'는 절규에 등을 돌리고 살아왔을까. 그들의 화양이 언제라도 내가 사는 곳이 될 수도 있을 터인데...... 


표지의 파란 숫자는 사실 붉은 핏물이어야 마땅했지만, 차마 붉게 표시하지 못한 제목이었다. 그러나 도리어 그 서늘하게 파란 핏물이 선혈이 낭자했던 이곳의 참혹함을 더 객관적으로 보여주는 느낌마저 일었다. 영화 판권이 이미 팔렸다고 알고 있는데, 여러모로 영상으로 만들기 좋은 요소를 가진 작품이다. '붉은 눈'과 설날 연휴를 낀 1월과 2월의 '하얀 눈' 풍경은 아주 대조적일 것이고 고도의 연기력을 요구하겠지만, 관객의 마음을 반드시 사로잡고 말 스타와 링고의 러브 스토리도 기대가 된다. 다분히 영화 '감기'와 겹쳐질 내용이지만 더 큰 울림과, 그리고 더 큰 관객몰이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영화평론가 이동진은 한기준 역에 하정우를, 서재형 역에 강동원을, 김윤주 역에 공효진을, 박동해 역에 류승범을 가상 캐스팅 대상으로 꼽았다. 상상만 해도 그야말로 드림팀이다. 


나로서는 처음 만나는 정유정 작가의 책인데 첫만남이 지나칠만큼 격정적이었다. 잠시 숨좀 돌리고 작가의 다른 책들을 더 읽어야겠다. 2013년이 아직 며칠 더 남았지만, 내게는 올해의 베스트였다. 


덧글) 유일하게 발견한 오타가 있다.

459쪽

그 한복판로 들어가버렸고 >>>한복판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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