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혁명, 광활한 인간 정도전 1~2 세트 - 전2권 소설 조선왕조실록
김탁환 지음 / 민음사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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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가'라는 이름을 붙여도 좋은 우리 역사 속 인물이 누가 있을까? 흥선 대원군이 제법 개혁을 시도했고 어느 정도 성과도 이루었지만 외세의 침탈이라는 시국과 맞물려서는 썩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조광조의 이름도 떠올랐지만 그의 성급한 개혁이 얼마만큼의 피로를 불러왔는지도 착잡하게 떠오른다. 그렇다면 누가 남을까? 역시, 정도전 밖에 없다. 가장 성공한 역성혁명의 뒤에 그의 이름 세글자가 뚜렷이 박혀 있다. 


이 책은 소설가 김탁환이 야심차게 시작한 '소설 조선왕조실록'의 첫문이 되었다. 조선이라는 장대한 역사는 침흘릴 만큼 탐나는 기록들을 많이 남겼다. 역사에 관심 많은 소설가라면 팔걷어부치고 도전하고 싶은 거대한 언덕일 것이다. 이미 써낸 이야기도 많으니 굽이굽이 잘 연결한다면 500년 역사를 모두 담아내는 것이 만만치는 않겠지만 불가능하지도 않겠다. 그리고 그 첫번째 문에 이성계가 아닌 '정도전'을 세웠다는 것에 기분 좋게 동의한다. 조선을 연 개창자는 이성계지만 정도전 없이는 불가능했다. 그가 기획했고, 설계했고, 뼈대를 세운 나라가 바로 조선이다. 


새 나라의 기틀을 잡고, 그 사이사이 정갈한 이름을 짓고, 역사를 집필하고 제도를 만들었다. 한 사람이 이렇게 많은 일을 해낼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조선의 르네상스 인간, 조선의 다빈치 정도전! 이 책은 바로 그 광활한 인간 정도전을 다루고 있다. 그의 일대기를 연대순으로 모두 짚은 것이 아니라, 그의 인생에서 가장 극적인 순간을 꼭 집어서 응축하여 보여주었다. 첫소절은 그가 이방원으로부터 죽임을 당하던 바로 그 날의 새벽이었다. 마치 죽기 직전 인생의 파노라마가 지나가는 것처럼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가 혁명의 과업을 이루기 위해 첫걸음을 떼었던 날은 언제일까? 아니, 조선이라는 나라가 문을 열기 위해서 첫발자국을 떼게 만든 사건은 무엇이었을까? 1392년 3월 17일. 바로 이성계가 낙마하던 날로 잡을 수 있겠다. 명장군 이성계가 낙마했다. 믿기지 않은 소식이었지만 사실이었다. 작품은 이성계가 말에서 떨어지던 찰나의 순간을 아주 자연스럽게 표현했다. 아, 이런 상황이라면 가능하겠군! 대장군 이성계는 해주에서 움직이지 못했고, 정몽주는 임금과 함께 왕성에 있었다. 그리고 정도전은 영주에서 귀양살이 중이었다. 고려의 쇄신을 원했던 세 사나이가 모두 다른 곳에서 다른 입장으로 서 있었다. 여기서 혁명의 싹이 튼다. 


이성계를 경계하는 인물들은 그가 움직이지 못할 때 쳐야 한다며 정몽주를 흔들었고, 이성계를 왕으로 옹립해서 훗날 자신이 왕이 되길 원했던 아들 이방원은 아버지를 설득하지 못하자 정도전을 찾아온다. 정도전이라면 정몽주의 위험함을 알아차리고 대장군을 옹립하는 것에 동의할 것이라고 여긴 것이다. 젊은 이방원은 정도전이 포은에게 갖고 있는 신의와 기대를 알지 못했다. 재상 정치의 탁월함을 함께 인정하고 있는 정도전과 정몽주. 두 사람은 모두 새 바람을 원했지만 정몽주는 고려라는 기본 틀 안에서 바꾸기를 원했고, 정도전은 고려가 아닌 새 나라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믿었다. 같은 결과물을 원했지만 그 과정에서 동원되는 수단이 달랐다. 이를테면, 정몽주가 개혁을 원하고 정도전은 혁명을 원했달까? 


개혁이 마음만큼 수월했다면 정도전도 그 길을 가자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개혁은 혁명보다도 어려운 법. 자신이 서 있는 자리부터 뒤흔들 수 있어야 개혁이 가능한데 그게 어디 말처럼 쉬운가. 정도전이 사전혁파 과정에서 수구성을 내보인 자신의 스승을 탄핵했다가 죄를 입어 귀양을 간 것도 그런 사례가 아닌가. 


작품 속에서 귀양 가 있는 정도전은 하루하루 답답한 마음으로 희망고문을 당하는 스스로와 마주한다. 큰뜻을 품었지만 움직일 수 없는 광활한 사내가 해낼 수 있는 거라곤 문장을 만들어내는 것 뿐이었다. 그렇게 소설가 김탁환은 정도전의 붓끝을 빌려 그의 생각을, 그의 경험을, 그리고 그의 작품들을 재현해냈다. 


“여기 큰 집이 하나 있다고 합시다. 당우(堂宇) 그러니까 지붕은 왕이고 동량(棟樑) 그러니까 용마루와 들보는 정승이며 기초는 백성에 빗댈 수 있습니다. 기초는 마땅히 단단하고 두터워야 하고 동량은 마땅히 편안하고 우뚝 솟아야 하니, 그다음에야 당우가 튼튼할 겁니다. 동량은 위로는 지붕을 받들고 아래로는 기초에 의지하여 서니, 재상이 왕을 받들고 백성을 어루만지는 것과 흡사합니다. 일찍이 상나라의 명재상 이윤도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신하는 위로는 덕을 펴고 아래로는 백성을 가르친다.’” -1권 55쪽


작품 속에서 그려진 대장군 이성계는 온화한 성품을 가진 탁월한 무장이었다. 그의 걸음은 신중했고, 왕 자리에 대한 욕심은 그다지 보이지 않는다. 대의가 자신에게 있다면 제 몸을 던지겠지만, 그 대의가 자신에게 있는지 없는지는 먼저 명분이 주어지기 전에는 움직이지 않을 기세다. 스스로 명분을 만들 마음은 보이지 않는다. 필요하다면 명분도 만들 사람은 그의 아들 이방원이었다. 


정몽주는 어떨까? 그는 무척 의뭉스러워 보였다. 그를 뒤흔들며 정도전과 이성계를 치라고 부추기는 무리들에게 경거망동하지 말라고 일갈은 할지언정, 그들을 보호하려는 적극적인 움직임은 보이지 않는다. 필요하다면 동지였던 이들을 잘라낼 마음이 그에게서 엿보였다. 이것이 단순히 소설의 설정일까? 실상 내가 느끼기에도 역사 속의 포은은 그런 인물로 느껴졌다. 그가 대장군의 문병을 자처하며 이성계의 막사를 찾은 일을 순수한 병문안으로 읽을 수가 없다. 그를 척살시킨 이방원의 행동을 기막힌 타이밍이었다고 추켜세우지는 못하겠지만.


정도전은 심장이 빠르고 크게 뛰는 사람으로 보인다. 그의 가슴엔 열정과 꿈과 야망이 가득하다. 그는 똑똑하고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이었지만 정몽주만큼 신중하게 움직일 줄은 모르는 사람이었다. 작품에선 그랬기 때문에 그가 포은을 잃게 되는 것으로 묘사된다. 물론, 정도전 자신은 그걸 이방원 탓으로 여기지만. 그래서 정도전이 후에 이성계의 뒤를 이을 세자 자리를 방원의 이복동생에게 넘기게 만드는 걸로 묘사했다. 정도전 같은 인물이 그렇게 소인배처럼 굴었을까 싶지만, 그가 막내 아들을 세자로 밀어붙인 것은 잘했다고 편들 수도 없다. 게다가 그 바람에 그는 제 목숨을 잃고야 만다. 참으로 묘하게 얽히고설킨 인연들이다. 


성격이 뚜렷하게 구분되는 세 남자가 등장하는데 각자 맡은 임무가 다르듯이 각자 뿜어내는 매력도 다르다. 주인공이어서가 아니라 누구라도 정도전에게서 가장 큰 매력을 느낄 것 같다. 


너는 명심하라, 한 고조가 장자방을 쓴 것이 아니라 장자방이 한 고조를 썼음을. -2권 108쪽


맞다. 내 생각에도 정도전은 장자방 같은 인물이었고, 그가 있었기에 이성계가 조선의 태조가 된 거라고 믿는다. 하지만 모두가 그렇게 알아차릴 수 있다면, 그랬기에 그가 오래 살아남기는 어려운 것이라고 또한 여긴다. 왕조국가에서 임금의 머리 위에 있는 신하의 목숨줄이란 그런 게 아닐까. 더군다나 이방원 같은 새끼 사자를 건드려 놓았으니.


이성계가 해주에서 머무는 동안은 하루하루 자세히 묘사했는데, 정몽주가 죽고 이성계의 조선이 세워지는 과정은 한문장으로정리하고 빠르게 지나갔다.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고 깔끔하게 지나가는 속도감에서 정갈함마저 느껴졌다. 이 책이 그가 죽는 날의 새벽에 쓰여진 첫 문장에서 시작된다는 걸 생각한다면 더더욱!


세 사람의 인연은 참으로 기묘하다. 이성계는 조선을 열면서 조선의 주인이 되었다. 그리고 정도전은 그 조선이라는 나라를 실질적으로 개척했다. 그리고 정몽주는 죽음으로써 조선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결국 세 사람은 모두 역사의 승자가 된 것이 아닌가. 함께 죽을 수는 있어도 함께 살기는 어렵다고 여긴 라이벌이기도 했지만, 긴 역사로 볼 때 그들은 그렇게 함께 싸웠기 때문에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그들이 치열하게 고민하고 구상했던 많은 것들을 새 나라에 뿌리를 내리면서 말이다. 


신기하게도 이들의 면면을 오늘날의 정치인들에게서 확인하게 된다. 차마 이름을 밝히기 곤란한 유명한 정치인들의 모습이 겹쳐서 씁쓸하기도 하고, 그 행보가 기대되기도 한다. 부디 그들의 행적이 말들의 잔치가 되지 않고, 개혁이든 혁명이든 시대의 부름에 응답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과업과 대의를 감당해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런 의미에서 광활한 인간 정도전을 만날 기회를 한번씩 가졌으면 한다. 정치인들이 자주 읽는 책으로 정관정요가 있다고 했던가? 이제는 혁명가 정도전을 읽을 차례다. 그의 가슴과 머리에 넓은 우주가 있다. 임금이 먼저가 아니라 백성이 먼저인 우주가.


너는 언제나 백성의 편에 서라. 왕을 중심으로 역사를 쓰거나 읽지 마라. 왕은 다만 구중궁궐에 틀어박혀 옳다 그르다 결정만 내리고, 그 결정이 잘못되었을 때는 책임을 질 신하를 고르는 데만 급급한다. 백성이 왜구에, 돌림병에, 굶주림에 죽어 나가도 왕은 애석한 표정만 지으며 귀신들에게 도움을 바라는 연기나 피워 올린다. 도적을 물리쳤다면 백성이 한 일이다. 풍년을 이뤘다면 백성이 한 일이다. 궁궐을 짓고 성을 쌓았다면 백성이 한 일이다. 고행은 전부 백성이 하고 영광은 모두 왕이 누리니, 어느 백성이 그 왕을 자신들의 왕으로 떠받들겠는가.

너는 왕이 부르면 그 이유를 미리 살피고 꺼내 놓을 이야기와 왕이 던질 질문과 또 거기에 합당한 답을 고려하고 가라. 백성이 부르면 우선 가라. 고민은 천천히 해도 늦지 않다. -2권 10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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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개 2014-02-26 08: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것참...
보관함에도 없던 책이
마노아님 리뷰덕에 장바구니로 갑니다^^
ㄷㄹㅂ 님이 주신 쿠폰으로 이책 사야 할까봐요.

마노아 2014-02-26 11:08   좋아요 0 | URL
아하하핫, 그렇게 빨리 장바구니로 이동을 하다니!
이책 제가 드릴게요. 저 다 읽었어요. 안 그래도 아무개님 고양이 책도 드려야 하는데요.
저한테 비밀댓글로 주소 좀 알려주세요. 아무개님 당분간 움직이기 힘든 거죠?
제가 우편으로 보낼게요.^^

2014-02-26 13: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2-26 14: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후애(厚愛) 2014-02-26 2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벌써 보관함에 담아 두었는데 리뷰를 읽고 더 읽고 싶어지는 책이에요.^^
나중에 꼭 봐야겠습니당~

마노아 2014-02-27 19:38   좋아요 0 | URL
정도전에 관한 관심이 무르익는 요즘이에요. 드라마는 보지 못했는데 인기 있는 것 같아서 그것도 반가워요.^^
 
생의 이면 - 1993 제1회 대산문학상 수상작, 개정판
이승우 지음 / 문이당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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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만난 이승우의 소설이다. 그의 소설을 읽으면서 우리 말의 아름다움을 깨달았다는 친구의 평을 나 역시 확인했다. 이렇게 잘 연마되어 가슴을 후벼 파는 문장을 벼려내는 작가라니, 한국문학의 보배라 하겠다. 


작품은 무척 독특한 구성을 갖고 있다. 박부길이라는 소설가를 인터뷰하는 형식으로 진행되는데, 그 박부길의 생 전체를 조명하는 내용이 마치 액자식 소설처럼 이어진다. 박부길의 생이 시작된 작은 섬마을과, 그가 섬마을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원죄의 탄생과, 그후 이방인으로 세상과 조화하지 못하고 그렇다고 등지고도 살지 못했던 서늘한 인생살이가 드라마틱하게 펼쳐진다. 


아버지가 어린 그에게 준 상처는 천형 그 자체였다. 그것은 원죄가 되어 어디로 가든지 박부길의 삶을 따라다녔고 그는 결코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그런 그에게 구원이 되어준 여자가 있었다. 목숨보다 더 사랑했고 그녀 역시 그의 사랑을 받아주었다. 그러나 극복하지 못해서 원죄라고 하는 것일까. 아버지가 남긴 그 폭력성은 그에게서도 고스란히 드러나서 가장 사랑하는 여자를 가장 잔인하게 스스로 떨궈버리게 만든다. 스스로 헤어나지 못하고 벗어날 수 없는 가혹한 운명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랑처럼 수월한 것은 없다거나 사랑은 자연 발생적인 것이므로 따로 노력할 필요가 없다는 따위의 안이한 생각에 빠져 있다. 사랑에 실패하는 사람은 많지만, 사랑에 대한 자신의 능력 부족이 실패의 원인이라고 인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사랑을 유쾌한 감정 놀음이나 우연한 몰입쯤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사랑을 그렇게 이해하는 한 배우려 하지 않을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그것은 틀린 생각이다. 사랑에도 기술이 있다. 살아가는 데 필요한 기술들을 배우고 익혀야 한다면, 사랑이야말로 그래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사랑보다 더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사랑을 배우지 않을 때, 종종 사랑은 흉기가 되어 사람을 상하게 한다. -258쪽


기억보다 가슴에 남을 무수한 문장들이 있었지만 이 부분이 가장 강렬하게 가슴을 쳤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경우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잔인한 흉기를 휘둘렀던가. 가족에게, 연인에게, 또 그밖의 많은 것들에게...  '사랑'이라는 단어 대신 관심을 넣어도 좋겠고, 동정을 넣어도 어색하지 않겠다. 


작품의 제목이 작품 속에서 박부길의 작품 제목으로 다시 등장하고, 그의 또다른 소설 제목과 비슷한 제목의 소설이 박부길의 연표에 등장한다. 실제로 박부길처럼 신학을 공부한 작가의 이력 덕분에 여러모로 등장 인물이 작가 자신과 겹친다. 얼마나 닮아 있는지, 얼마만큼 반영되어 있는지는 그의 또 다른 작품들을 통해서 확인해야겠다. 


책을 읽은지 삼개월도 더 지났는데 좀처럼 리뷰를 쓰기 어려웠다. 짧은 100자 평 정도로 대신할 생각이었는데 아쉬움이 남아 글을 더 보태고 말았다. 어떻게 표현하든 하나만은 분명하다. 이승우의 소설을 알게 된 것은 독자로서 큰 축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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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2-17 09: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2-17 11: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살인자의 기억법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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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제목부터 궁금증을 자아내는 소설이었다. 작중 화자는 살인자다. 그것도 연쇄 살인범. 그는 무수한 살인을 저질렀지만 한번도 잡히지 않았고 그래서 감옥살이 한번 해보지 않았다. 하지만 뇌수술을 받은 뒤 살인 의욕이 떨어져서 그후 25년 동안 살인을 저지르지 않고 살아왔다. 그렇게 70세 노인이 된 그에게 알츠하이머가 찾아왔다. 시도 때도 없이 기억이 사라진다. 깜박하는 수준이 아니라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 자체를 통으로 잊어버린다. 과거의 일은 더 선명하게 기억나건만, 오늘 아침 일이 생각나지 않고, 알짱거리는 저 개가 우리집 개인지 남의 집 개인지도 구분하지 못한다. 기억을 잊지 않기 위해서 수없이 메모를 하고, 앞으로 할 일을 녹음기로 녹음한 뒤 수시로 재생시키면서 자신의 행동을 체크한다. 노력형 전직 살인자 치매 환자라고 할 수 있겠다. 


독특한 설정뿐 아니라 몹시 유머러스하다는 것이 작품의 강점이다. 


나는 꽤 오래 시 강좌를 들었다. 강의가 실망스러우면 죽여버리려고 했지만 꽤나 흥미로웠다. 강사는 여러 번 나를 웃겼고 내가 쓴 시를 두 번이나 칭찬했다. 그래서 살려주었다. 그때부터 덤으로 사는 인생인 줄은 여태 모르고 있겠지? 얼마 전에 읽은 그의 근작 시집은 실망스러웠다. 그때 그냥 묻어버릴걸 그랬나.
나 같은 천재적인 살인자도 살인을 그만두는데 그 정도 재능으로 여태 시를 쓰고 있다니. 뻔뻔하다. 9쪽


시를 쓰는 킬러라니. 이걸 낭만적이라고 해야 하나, 엽기적이라고 해야 하나. 그는 자신이 알고 있고 자신있는 소재를 가지고 시를 쓴다. 당연히 피가 난무하는 현장 묘사가 등장하지만, 강사는 그것이 '상징'일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누구라도 그럴 수밖에.


현재 이 자의 가장 큰 고민은 수양 딸이 살해될 위험에 처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고수는 고수를 알아보고 살인자는 살인자를 알아보았다. 연이어 주변에서 일어나는 연쇄살인의 주범으로 그가 지목한 상대가 딸아이 주변을 맴돌고 있다. 그는 25년 만에 다시 연장을 갈아야 할 때가 왔음을 인식한다. 그러나 어쩌랴. 그는 수시로 잊어버리고 마는 치매 환자인 것을... 이제 전직 연쇄살인마가 어떻게 이 난관을 헤쳐 나갈지 독자는 기대를 갖고 지켜보게 된다. 


작품은 비교적 짧은 편이고 그마저도 빠르고 쉽게 읽힌다. 해설에서 빨리 읽으면 제대로 읽는 게 아니라고 했지만, 부러 천천히 읽을 마음이 들지는 않았다. 내게는 이 작품이 재밌었지만 예상 가능한 반전에서 다소 흔한 설정이었고, 어떤 의미를 찾기보다는 어느 정도 포장이 잘 된 감성적인 소설로 읽힌다. 그걸 단점이라고 말하기는 곤란하지만, 딱히 어떤 메시지를 찾거나 의미를 두기는 어려워 보였다. 그것 대로 나쁘지 않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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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의 위증 3 - 법정
미야베 미유키 지음, 이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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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학생이 학교 옥상에서 추락사했다. 경찰은 자살이라고 발표했고, 학생의 부모도 동의했다. 그런데 며칠 지나서 고발장이 날아왔다. 죽은 학생은 이 학교의 문제아 3인방에 의해서 죽게 된, 즉 타살이라는 내용이었다. 경찰은 고발장의 진실성을 믿지 않았다. 믿지 않을 충분한 근거도 있었다. 하지만 학생을 보호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고발장이 은폐되었고, 그것이 학교의 부정적인 면만 낱낱이 파헤쳐온 방송 기자의 손에 넘어가면서 일파만파 걷잡을 수 없이 일이 커지고 말았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또 다른 학생이 불우하게도 사고를 당해 죽고 말았다. 이런 일련의 과정들을 거치면서 학생들은 많은 상처를 받았다. 그래서 이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는 재판을 열기로 결심했다. 고교 입시를 앞두고 있는 중요한 여름방학이었지만, 이 재판을 졸업 과제로 명명하고 변호인과 검사 측으로 나뉘어서 증인을 찾으며 사건을 파고 들었다. 그리고 이제 대망의 재판이 열린 것이다. 3권은 재판 첫째 날부터 시작한다. 


참 흥미로운 전개였다. 이미 1권에서 사망한 학생이 자살이라는 걸 충분히 설명했다. 고발장을 쓴 학생이 거짓말을 했다는 것도 미리 밝혔다. 그렇지만 2권에서 등장한 다른 학교 학생이 변호인을 맡으면서, 또 그 아이가 이 사건에 중요한 핵심을 쥐고 있다는 걸 짐작하게 하면서 이미 답안지가 나온 문제를 여전히 흥미롭게 바라보게 했다. 미야베 미유키의 놀라운 필력이다. 


이 아이들에게 이 재판이 왜 중요한지를 이 긴 이야기를 통해서 충분히 설명했다. 사실 어른들에게도 이 재판은 필요했다. 학교의 선생님, 학부모들, 방송 관계자들과 경찰서 관계자들까지... 처음에 이 재판을 찬성했건 그렇지 않건 상관 없이 모두에게 이 재판은 의미가 있었다. 게다가 재판은 전혀 어수룩하지도 않았다. 실제 재판과는 분명 차이가 있고, 실제 재판과 같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지만 이 재판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였다. 오이데 슌지 같은 망나니도 달라질 수 있는 변곡점을 만들어 주었고, 아이의 죽음으로 힘들어 하는 학부모들에게 이해와 공감의 장을 열어주었다. 그리고 스스로 헤어나올 수 없는 수렁에 빠져 있던 많은 사람들을 건져내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구제불능인 인물도 당연히 등장했다. 모기 에쓰오 기자가 그랬다. 그의 잘난척하는 얼굴에 제대로 한방 먹여준 간바라 변호인의 기지와 지혜에 박수를 치고 싶었다. 그런 순발력은 없어도 학생들을 향한 뜨거운 마음으로 진실성을 보여준 쓰자키 전 교장도 마찬가지였다. 목표가 아무리 훌륭해도 방법과 과정이 정당하지 않다면 목표의 순수성마저도 의심 받게 된다. 모기 기자도 이 재판에서 부디 얻고 가는 게 있어야 할 텐데, 그런 은총이 모두에게 똑같이 베풀어지는 건 아니었다. 그러니까 모두 똑같은 '어른'은 아닌 것이다. 


단지 나이를 먹었다고 해서 어른이 되는 게 아니다. 그에 걸맞는 책임감이 따라오고 성장이 필요하다. 2권에서 아이 어른과 어른 아이가 나왔는데, 여러 학부모들과 어른들을 통해서 그걸 확인하게 된다. 사사키 형사가 이 재판에서 어른들은 완패했다고 인정하는 것에 동의한다. 당신들은 하지 못하는 걸 이 아이들이 해냈다. 그러니까 이 아이들은 조금은 다른 어른으로 커갈 수 있다고 믿는다. 물론, 믿어주고 응원해주고 기다려준 어른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당신들은 졌지만 진 게 아니다. 후지노 검사가 졌지만 이 재판에서 진정한 패자는 없는 것처럼.


재판은 엿새에 걸쳐서 다섯 차례 진행되었다. 중간에 휴정을 하루 했기 때문이다. 열다섯 밖에 먹지 않은 학생들이 진행하는 재판인데 긴장감을 놓을 수가 없었다. 심지어 검사와 변호인의 공방은 어찌나 치열하고 불꽃이 튀던지, 너무 훌륭해서 설득력이 떨어졌다. 아무리 우수한 학생이라고 해도 이 아이들이 아직은 중학생이라는 걸 자꾸 상기하기 때문이다. 재판에 방청인으로 참석했던 사람들, 증인으로 출두했던 많은 사람들이 학생들이 진행하는 재판이기 때문에 평소의 포지션으로 접근했었다. 반말도 예사였고, 판사의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듣다가 법정에서 쫓겨나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재판이 모두 끝나고, 배심원들의 평결이 떨어질 때, 재판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몸가짐은 달라 있었다. 숙연해졌다고 할까. 그렇게 진심을 다했다. 그리고 그 결과도 뜨거웠다. 


간바라 가즈히코. 이 재판의 변호인이면서 유일하게 외부 학교 출신인 아이. 그러나 사건에는 가장 깊이 관여해 있던 그 아이가 못 견디게 안쓰러웠다. 이미 2권에서 등장한 아이의 친부모에 관한 이야기. 그 엄청난 트라우마를 등에 지고 이렇게 잘 자라준 아이가 대견하고 그런 만큼 더 안타까웠다. 이렇게 성장하기까지 아이가 겪었을 마음고생과 성장통은 얼마나 아팠을까. 그걸 떨쳐낼 수 있게 양부모님이 만들어준 따뜻한 울타리가 감사해서 독자인 내가 두 손 꽉 잡아주고 싶었다. 그리고 그걸 끌어내 준 노다 겐이치에게도 진심으로 고마웠다. 1권을 읽으면서부터 단 한명의 주인공을 꼽으라고 한다면 난 이 캐릭터를 선택하고 싶었다. 이 작품은 여러 화자가 나오고 매 장이 시작될 때마다 각기 다른 인물의 입장에서 서술했지만, 마지막엔 결국 노다 겐이치로 끝내지 않을까 싶었다. 내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강 건너를 보고 온 그 눈. 살의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지 몸소 깨달았던 아이. 그래서 공포와 분노와는 질적으로 다른 살의를 구분할 수 있던 이 아이가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의를 정당한 자기방위라고 말했다. 아무 법적 효력이 없는 그 선언이 구원처럼 들렸다.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널 뻔한 사람의 팔을 잡아준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참으로 고마웠다. 겐이치 역시 가즈히코처럼 참으로 잘 자라주었다. 잘 견뎌 주었고 잘 이겨냈다. 이렇게 어려운 고개를 넘어간 사람은 다시 그 고개를 넘으려는 사람에게 손을 뻗어주고 타는 목에 물한잔도 건넬 수 있는 여유와 힘이 생긴다. 그렇지만 세상에는 제 안의 독을 공동우물에 풀어서 다 함께 죽자고 덤벼드는 사람도 존재한다. 가시와기가 그랬다. 


제 목숨을 담보로 사람을 시험하는 것은 얼마나 비겁한 일인가. 그의 표면적 죽음은 자살이지만, 그 스스로 집행한 타살에 더 가까웠다. 그러니 이 재판의 진정한 피고인은 오이데 슌지가 아니라 가시와기 다쿠야다. 재판을 끝내고 난 뒤 그의 부모님의 모습은 측은했다. 사건의 진실에 가장 가까이 다가갔지만, 그래서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큰 아들의 상처도 돌아봤지만 거기까지였다. 그들이 특별하다고 느꼈던 아들의 성격과 특징은 다른 사람에겐 독이었다. 해독제도 없는 치명적인 바이러스. 심지어 소시오패스를 연상시킬만큼 무섭기까지 했다. 더 많은 희생이, 상처가 퍼질 수 있었는데도 아이들의 용기와 지혜가, 그리고 진실에 다가가고자 하는 열망이 자체 백신을 만들었다. 한 사람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모두의 마음이 보태고 보태어져서 가능했다. 


이 사건의 피고인으로 등장한 오이데 슌지는, 가시와기의 죽음에 대해서는 무죄이지만, 그 밖의 무수한 사건들에 있어서는 명백한 유죄였다. 그걸 묻어두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이 재판으로 한걸음을 어렵게 떼낸 그라면, 그 속의 아이 어른도 이제 껍질을 깨고 조금 더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부디, 아버지와는 다른 어른으로 자랐으면 좋겠다. 그 첫걸음은 마스이 노조무에게 사과하는 것으로 시작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네게도 마음을 나눌 친구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으면 좋겠다. 


미야케 주리도 마찬가지다. 스스로 가키우치 미나에의 얼굴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았으니, 유령으로 살지 않을 방법도 자신의 힘으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너의 억울함을 알아주는 이가 있었고, 너에게 온몸으로 사죄하는 이를 만났고, 그리하여 너 역시 네 모든 걸 걸고 지켜내고 싶었던 걸 경험했으니, 이 재판 전의 미야케 주리와 재판 후의 미야케 주리는 분명 다른 사람이 될 거라고 의심치 않는다. 네가 좋은 어른으로 성장하는 것이 아사이 마쓰코에 대한 참회라는 것도 영리한 너는 분명히 알아차릴 테지.


가시와기 다쿠야는 스스로 재판관이 되었다. 그는 세상 속에 섞이지 못하는 자신을 스스로 왕따시켰다. 그가 지적한 부조리함과 유치함이 어느 정도 사실이었다고 해도, 그는 자신의 잣대로 모든 걸 판단하고 심판하고 정죄하려 드는 오만함을 보였다.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오답이라고 단정했고, 자신이 바로잡을 자격이 있다고 착각했다. 마치 스스로 신의 자리에 올라 하찮은 인간들을 심판하는 모양새를 연출했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입었고 누군가는 죽어야 했다. 그 누군가에는 다쿠야 본인도 포함된다. 모든 것이 시시하고 의미가 없다고 말했던 그는 자기애가 없는 것이 아니라 자기애만 있는 지극한 에고이스트로 보인다. '나'만 있고 '남'은 없던 너의 작은 틀이 측은하다. 이런 아이마저도 품을 수 있는 다양한 창을 갖추지 못한 현실의 교육 시스템도 안타깝지만, 그런 문제 많은 학교도 결국 살아남은 아이들의 건강한 마음으로 바꿔나갔다. 그러니, 살아 있지 못하면 아무 것도 바꾸지 못한다. 바뀐 것을 확인할 수도 없다. 살아서 견뎌내고 이겨내고 버텨내자. 그리고 바로 그 버틸 힘을 내기 위해 서로에게 용기가 되어주자. 외로운 옥상 난간 따위는 떠올리지도 않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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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과
구병모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65세의 조각(爪角). 겉으로 보기엔 자그마한 체구의 할머니 정도로 보이지만 그녀는 40년 이상 업계에 몸을 담은 전문 킬러였다. 그들의 언어로는 방역업자로 통한다. 어린 시절 구구절절 사연 많은 이야기는 건너 뛰자. 여러 우여곡절을 거쳤고 갈곳 없는 그녀를 받아준 것은 류였다. 류의 본업을 모르던 조각은 자신을 덮친 주한미군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해치웠고, 그 찰나의 솜씨를 알아본 류가 그녀를 전문 킬러로 키웠다. 이미 결혼해서 아이까지 있던 류였지만 조각은 그를 마음에 담았다. 


그러나 업계의 속성상 적이 많은 그들이었다. 가족을 모두 잃고 홀로 된 류가 안아주던 밤, 그는 지킬 무언가를 만들지 말자고 말했다. 그렇게 말했던 류도 누군가를 지키며 제 목숨을 버렸다. 이 바닥에서 연민은 가장 불필요했고, 지켜야 할 무언가를 만드는 것은 제 생명을 스스로 깎아먹는 짓이었다. 

그렇게 무엇도 남기지 않고 무엇도 아끼지 않은 채 40여 년이 흘렀다. 이제 노년에 접어든 조각은 마음과 달리 빠르게 쇠해가는 몸의 변화를 눈치 채면서 퇴직의 시간이 가까워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다늦게, 이제와서 누군가가 마음에 들어와 버린 것이다. 말도 안 된다고 스스로 여기지만, 뭘 해보려고 하는 것도 아니지만, 피도 눈물도 없을 전문 킬러가 평범한 사람들의 소소한 일상을 부러운 눈길로 바라보게 되었다. 그들의 자그마한 평화가 지켜지기를 원했다. 자신이 개입하지 않으면 아무 위험도 없었을 그 평화는, 그러나 그녀 자신이 뿌린 씨앗으로 산산이 부서질 위기에 처한다. 업계에 몸 담은지 40년이 지났으니 그녀 손에 죽어간 사람이 오죽 많았겠는가. 게 중에는 그렇게 저세상 간 사람의 유가족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 아이가 그녀처럼 킬러가 되지 말란 법도 없다. 그렇게, 노쇠해서 사그라지는 그녀에게 젊디 젊은 킬러가 복수의 칼을 품고 다가오는 것이다. 조각 자신도 기억하지 못하는 먼 시간 속의 일을 근거로.

무척 흥미로운 소재다. 킬러가 등장하는 것도 평범하지 않은데 그 킬러가 65세 할머니다. 나이는 65세고 아직은 젊은 사람 못지 않은 근육을 자랑하지만, 얼굴 주름만 보면 열살은 더 늙어보이는 쇠잔한 몸의 노인이 주인공이다. 지켜야 할 무언가를 갖지 않던 이 할머니가 버려진 개를 한마리 주워왔다. 개 역시 늙어있었고 누가 먼저 죽을지 가늠할 수 없는 나이였다. 서로의 육체가 쇠해가는 것을 지켜보며 의지하는 모습이 짠했다. 작가가 이 작품을 쓰게 된 것은 냉장고 안에서 형체도 알아볼 수 없게 망가져버린 과일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파과破果다. 


달콤하고 상쾌하며 부드러운 시절을 잊은 그 갈색 덩어리를 버리기 위해 그녀는 음식쓰레기 봉지를 펼친다. 최고의 시절에 누군가의 입속을 가득 채웠어야 할, 그러지 못한, 지금은 시큼한 시취를 풍기는 덩어리에 손을 뻗는다. 집어 올리자마자 그것은 그녀의 손안에서 그대로 부서져 흘러내린다. 채소 칸 벽에 붙어 있던 걸 떼어내느라 살짝 악력을 높였더니 그렇다. 어쩔 수 없이 그녀는 부서진 조각들을 하나하나 건져 봉지에 담고, 그러고도 벽에 단단히 들러 붙은 살점들을 떼어내기 위해 손톱으로 긁는다. 그것들은 냉장고 안에 핀 성에꽃에 미련이라도 남은 듯 붙어서 잘 떨어지지 않는다. 그녀는 문득 콧속을 파고드는 시지근한 냄새를 맡으며 눈물을 흘린다. 얼마쯤 지나 그녀 어깨가 흔들리고 신음이 새어 나오자 무용이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웅얼거리듯 짖기 시작한다. -222쪽


문장을 끊지 않고 한페이지 전부를 사용할 만큼 길게 늘여놓았다. 의도한 만연체겠지만, 그래도 독자는 읽기에 피곤했다. 특히 첫 장면의 지하철 진상 노인에 대한 묘사는 초반부터 읽는 사람을 엄청 지치게 만들었다. 하지만 무심히 앉아 있다가 일어난 노부인이 킬러라는 것을 알아차리면서 작품은 빠른 속도로 독자를 끌어당겼다. 300쪽이 훌쩍 넘는 책인데 다 읽는데 얼마 걸리지 않았다. 이 작품으로 무언가를 남겼냐고 묻는다면 그건 좀 대답할 거리가 궁색하지만, 적어도 흥미와 재미만은 확실히 챙겼다고  답하겠다. 나는 분명 책을 읽고 있는데, 읽는 내내 영화를 보는 기분이었다. 이게 영화로 만들어진다면 얼마나 흥미로울까. 비슷한 소재로 소지섭 주연의 '회사원'이 있었지만, 젊고 싱싱한 육신을 가진 배우가 킬러라는 건 너무 식상하지 않은가. 중년 여배우가 액션도 소화하면서 킬러로 나온다면... 와우... 무척 신선할 것이다. 김해숙 씨 같은 배우라면 어떨까. 액션은... 무리일까? 그렇다고 은교처럼 젊은 배우가 노인 분장하고 찍는 건 어쩐지 사기 같아서 별로고...


그녀의 이름처럼 손톱에 대한 이야기가 몇 번 나왔다. 상징적인 소재다. 그리하여 마지막 구절에서 작가는 이렇게 묻는다.

그래서 당신의 결론은 破果입니까, 破瓜입니까.


그러게. 어느 쪽일까? 어느 쪽이어도 상관 없고, 둘 모두여도 괜찮다. 시간은 정직하다. 40년 경력의 킬러 할머니에게도, 사람에게 된통 데여버린 나에게도. 이 불공평한 세상에서 유일하게 공평하게 주어진 건 오직 시간 뿐. 당신의 한시간과 나의 한시간이 같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가. 그걸 어떻게 쓰는가는 각자의 몫. 분노가 치밀어 오르던 밤 내 옆에는 소설 한권이 있었다. 피도 눈물도 없는 킬러가 등장하는 소설. 내 감정을 비추어볼 때, 적절한 선택이었다. 다시 골라 보겠다. 내게는 破瓜가 맞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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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2-06 08:2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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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2-06 13:55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