뺑덕 창비청소년문학 61
배유안 지음 / 창비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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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읽었던 고전 소설에 심청전이 있었다. 연꽃에 싸여 궁으로 들어오던 그림도 기억나고 심봉사가 눈뜨던 장면도 생생히 기억난다. 그런데, 뺑덕 어멈은 기억나지 않는다. 미안하다. 일등만 기억하는 더러븐 세상~을 외치면서 늘 주인공만 기억하고 살았다. 뺑덕어멈도 기억이 나지 않는데 당연히 뺑덕을 알 리 없다. 그런데 그 잊혀진 존재 뺑덕에게 관심을 갖는 작가 분이 계셨다. 고맙게도 이렇게...


어미는 아들 없는 집에 후실로 들어왔으나 아들만 낳고 쫓겨났다. 본처는 처음에 아이를 귀히 대했다. 그러나 제 배로 아들을 낳자 돌변했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뺑덕이의 서러운 신세. 아비는 병으로 죽었고 뺑덕이는 집안의 애물단지로 전락했다. 그에겐 가시같이 박힌 어미란 존재. 어떻게 후벼 파면 비명을 지를 줄 아는 동네 친구 녀석 때문에 부아가 치밀면 흠씬 두들겨 패주었지만, 그렇게 세상을 향해 바락바락 악을 쓴다고 비어진 가슴이 채워지지 않는다. 결국 집을 떠나야만 했다.


한 번은 보고 떠나려던 어미를 마침내 보았지만 그 어미의 사는 모습이 예사롭지 않았다. 기대했던, 혹은 바라왔던 모습이 아니어서 실망했다. 실망하는 자신이 또 실망스러웠다. 자식을 알아보지 못하는 어미가 야속하기도 했다. 두고 온 자식과 비슷한 또래의 아이를 보았으면 한번쯤 자식을 떠올릴 법도 한데, 그러지 않는 어미가 속상했다. 


다시 찾은 바다. 뱃사람이 되고자 했지만 바다가 얼마나 무서운지 알아채버린 뺑덕은 바다를 등지고 뭍으로 올랐다. 잠시간 어미 곁에 있어 볼 요량이었다. 그곳에서, 청이를 만났다. 젖동냥으로 자신을 키운 눈먼 아비에게 지극 정성으로 효성을 다 하는 그 아이 청이...


자, 이제부터는 우리가 아는 바로 그 심청전 이야기이다. 공양미 삼백 석에 인당수로 제 몸을 던진, 그렇게 해서라도 아비의 눈을 뜨게 하고자 했던 그 소녀의 이야기 말이다. 하지만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뺑덕이 주인공인 채로 흘러간다. 뺑덕이 바라보는 뺑덕 어미, 뺑덕이 느끼는 심청이 말이다.


나는 이런 이야기들이 참 좋다. 권교정 작가가 처음에 내 마음에 들어왔던 것도 동화를 패러디한 그 빼어난 솜씨에 반했기 때문이었다. 파울로 코엘료의 '다섯번째 산'을 가장 좋아하는 것도 성서에 나오는 엘리야의 이야기를 아주 그럴싸하게, 또 설득력 있게 풀어냈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밀고 올라가는 추진력이 좋았는데, 그래도 딱 꽂히는 문장은 적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속단이었다. 뒷심이 좋은 작품이었다.


어미 말대로 돈에 팔려 가는 건 왜 항상 여자일까? 용왕은 왜 살아 있는 제물만, 그것도 왜 여자애만 원하나? -172쪽


내말이 그거다. 왜 꼭 여자만... 여자만 재물이 되었냔 말이다. 강의 신 하백은 대답하라 오버!


나는 소리 죽여 울었다. 바락바락, 그거 애쓰며 산 거 맞아요. 나는 어미가 산 세월을, 어떻게 해 볼 힘이 없어 혼자 버둥댄 흔적을 보듬어 안았다. 그러자 내가 어미에게 안기는 것 같았다. 아가야, 귓전에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어머니, 어머니. 내 안의 응어리가 조금씩 녹아내렸다.

(...) 어미가 어미의 삶을 찾도록 시간을 주어야 한다. 나에게도 시간이 필요했다. 머잖아 정말로 아들이 되어 다시 올 것이다. 그때 어미가 심 봉사와 함께 있든 아니든, 심술 맞고 우악스럽든 아니든 나는 어미의 아들이 될 것이다. 그래서 어미 있는 아이가 될 것이다. 나는 담담해졌다. 아니, 든든해졌다. -196쪽

어미 있는 아이가 되겠다는 뺑덕, 아니 병덕의 다짐이 참으로 아팠다. 어미 없이 살아야 했던 너의 세월과, 아이를 잃고... 혹은 잊고 살아야만 했던 뺑덕 어미의 신산한 삶이 교차해서 지나갔다. 얼마나 무수한 뺑덕이와 뺑덕 어미가 이 땅에 있을 것인가......


“하하, 이제 정말로 배를 타는 것같이 타서 하는 말이다. 누군가의 아들이 되어 보니 세상이 다르지?”

그래, 나는 그냥 뺑덕이 아니고 누군가의 아들 뺑덕이었다. 배 바닥을 딛고 선 허벅다리에 힘이 실렸다. 문득 땡중의 말이 떠올랐다. 기적. 누군가의 아들이 된 것, 독기가 빠지고 이렇게 허벅다리에 뻐근하게 힘이 실리는 것이 기적이 아닐까? -203쪽?


결과가 좋으니 뾰족하게 나온 입을 다물게 되지만, 그래도 그 땡중 너무하셨소. 자식 팔아 눈을 뜬들, 그 아비가 행복할 수 있겠냔 말이다. 이야기는 감동적이지만, 부디 심청이같은 결단은 내리지 맙시다. 그래서 불치병에 걸린 엄마가 뱃속의 아이를 포기하면 제가 살 수 있음에도 아이를 살리기 위해 제 생명을 포기하는 그런 설정을, 나는 아주 싫어합니다. 어미 생명과 맞바꿔 태어난 그 아이와, 그걸 지켜보아야 하는 아이 아빠는 어떻게 살라는 겁니까? 네? 난 그게 이기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부모의 삶을 부정하는 것이 자신을 얼마나 불행하게 하는지, 또 얼마나 오래도록 긴 상처를 남기는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부모라고 다 훌륭하고 자랑스러운 사람들은 아니다. 상처받고, 주눅 들고, 후회에 찬 시간을 보내는 부모도 많다. 평범하고 더러는 미숙하기 짝이 없는, 그래서 자식에게 당당하지 못한 부모들의 신산한 삶 또한 받아들이고 보듬어 주는 것이 청소년들이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길 아닐까? 그럼으로써 자신의 삶을 더 튼튼히 세울 수 있지 않을까? -210쪽


작가의 말이다. 부모의 삶을 부정하는 것이 자신을 얼마나 불행하게 하는지...에 콱 박혀 버렸다. 누구도 부모를 선택해서 태어날 수 없는데, 그렇게 복불복으로 맺어진 인연이 아플 때가 얼마나 많던가. 그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에게 조금씩만 연민을 가지자고 말해 보겠다. 아주 조금만... 당신도, 나도 가엾을 때가 많으니... 그저 서로를 향해 조금씩만 안쓰러워 하자고...... 


엄마의 일흔번째 생신... 1월에 여행을 다녀오고, 지난 주에 이모들 모시고 식사를 하고, 다시 오늘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많은 일들이 있었다. 거하게 잔칫상을 차린 것도 아니건만 온몸의 진이 다 빠져버렸다. 그 안에서 삭여야만 했던 온갖 감정들 때문이다. 그건 살아온 시간과 앞으로 살아갈 시간을 반영한 결과였다. 많은 이야기들이 있지만, 그 이야기들이 꼭 해피엔딩은 아니지만... 그래도 우리의 소중한 인연을 함께 보듬어 보려고 한다. 모두모두 수고했어요. 이렇게 한 가족으로 만나 살아온 지난 삶 말이에요. 앞으로도, 우리 열심히 살아봅시다. 이 울타리 안에서. 


배유안 작가의 초정리 편지를 참 좋아한다. 그렇지만 서라벌의 꿈과 창경궁 동무는 다소 아쉬웠다. 그 아쉬움의 끝에 다시금 애정의 불꽃을 확 질러준 뺑덕이었다. 그래서 도서관에 쿠쉬나메 신청해 두었다. 몹시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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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륜
파울로 코엘료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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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가 예뻤다. 하얀 바탕 위에 새겨진 저 싱그러운 붉은 열매와 '불륜'이라는 단어는 얼마나 자극적으로 어울렸던가!

게다가 상당히 오랫동안 애정했던 파울로 코엘료의 작품이었다. 크게 고민하지 않고 바로 질렀다. 

사은품으로 받은 지퍼백은 너무 뻣뻣해서 불편했지만 투명한 것이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책은, 소설은, 하아... 한숨부터 먼저 쉬자.


코엘료 아저씨, 대체 이 소설은 왜 쓴 거예요? ㅜ.ㅜ


나는 11분을 아주 재밌게 읽었다. 정말 심장 떨려서 얼굴이 붉어지는 경험을 했더랬다.

피에트라 강가에서 나는 울었네-도 아주 좋았다. 

파울로 코엘료는 사랑을 다룸에 있어서도 아주 능숙한 작가라고 여겼다.


그렇지만 이 작품은, 뭐랄까... 무의미한 섹스를 관음증처럼 관찰하고 있다는 느낌?

이유 없는 일탈, 납득이 가지 않는 돌출행동, 그렇다고 최대한 야하고 섹시하게 보여주겠어-같은 각오도 아닌...

정말 이도 저도 아닌 그런 어정쩡한 작품이 되고 말았다.

하고자 하는 말이 뭐였어요? 

호불호는 갈려도 기본 시청률은 나와주는 미니시리즈 작가가 어느 날 갑자기 돈독이 올랐는지 막장 아침 드라마를 쓰고 있는 그런 기분? 


우리가 작품으로 만난지 십여 년이 흘렀는데, 너무 오래 만난 것 같아... 당분간 떨어져 지냅시다. 서로 거리가 필요해요. 

이번 작품은 잘못된 만남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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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5-03-27 0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저 책은 저 표지가 구매에 영향을 상당히 주었어요^^; 마노아님 리뷰 읽으니 저 책 다시 읽어 봐야하나 싶습니다, 마노아님, 편안한 하루 되세요

마노아 2015-03-28 09:52   좋아요 0 | URL
표지가 예뻐서 냄비받침도 사고 싶었지만 제목 때문에 그건 포기했어요.
저는 읽고 바로 팔았습니다. 두번 읽을 수 없었어요. 트허...(>_<)

다락방 2015-03-27 08: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파울로 코엘료를 안좋아하면서도 이 책을 샀다능....집에 있다능.....orz

마노아 2015-03-28 09:52   좋아요 0 | URL
파울로 코엘료 굉장히 애정했는데 애정 바닥났어요. 탈탈탈...;;;;;

비로그인 2015-03-27 1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파울로 코엘료가 하두 유명해서 읽어봤는데 저하고는 안 맞더라구요.

마노아 2015-03-28 09:53   좋아요 0 | URL
십여 년 전에 읽었던 책들은 좋았는데 근간에는 계속 안 맞네요.ㅜ.ㅜ

아비가일 2015-03-27 1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좋아하던 파울로코엘료가 시간이 지나면서 세월과 타협한 느낌이랄까. 암튼 좀 실망스러웠어요

마노아 2015-03-28 09:53   좋아요 0 | URL
뭐든 써내면 팔리니까 마구 펴내는 느낌이에요. 이 작품은 줄거리를 나열하는 것도 아까웠어요...;;;;

블라썸 2015-03-27 16: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랑타령으로 끝나버리는 주인공 ㅠㅠ 솔직히 파울로 코엘료의 이 책은 그닥 와닿지 않더균요.

마노아 2015-03-28 09:54   좋아요 0 | URL
사랑도 불륜도 그 어느 것도 공감이 안 가더라구요. 종이 낭비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렇게혜윰 2015-03-29 2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으려다 제목이 남편보기에 영 거슥해서 자꾸 숨기다보니 겨우 두쪽 읽었는데 이런 평이라니....ㅠㅠ

마노아 2015-03-29 23:36   좋아요 0 | URL
후루루룩 읽고 중고샵에 넘기셔요. 저는 그리 했어요.^^ㅎㅎㅎ
 
고교 입시
미나토 가나에 지음, 권남희 옮김 / 북폴리오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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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미나토 가나에의 전작들이 워낙 강렬했다. 군더더기 없이 짧고 굵직하게, 사건의 핵심을 향해 곁눈질하지 않고 바로 들이받는 쾌감이 있었다. 꽃잎이 상하지 않은 채 꽃봉오리 째 그대로 떨어져 나간 어떤 처연함이 느껴지는 문장들이었다. 그래서 평점이 안 좋았음에도 불구하고 최소한의 기본은 하겠지 싶었는데, 아주 실망스럽게 읽고 말았다. 별점 두개 줘본 것이 언제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 꽤 이례적일 것이다. 


우리보다 더 심하면 심했지 덜하지 않을 일본의 입시제도. 게다가 고등학교도 시험 쳐서 들어가니 그 피곤의 적립량은 어마어마할 것이다.(어쩌면 지금은 대한민국이 더 앞질렀을까?)


인생의 초반부에 불과하건만, 그 한번의 입시경쟁으로 모든 것이 결정난 것처럼 호들갑을 떠는 세상에 경종을 울리는 것까지는 좋다만, 그러기 위해서 가져온, 혹은 만들어낸 이야기가 많이 지나쳤다. 사건을 꾸민 사람들의 사연이나 사정에 수긍이 전혀 안 가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도 많이 지나치다는 느낌이었다. 한마디로 '설득력'이 떨어졌다. 일으킨 사건에 비해 그 속사정은 다소 작게 느껴졌던 것. 


드라마 대본용으로 만든 소설이었다. 아무래도 시나리오와 소설은 다른 법이니까 매력의 포인트가 같지 않겠지만, 어쩐지 그것도 변명이라고 느껴질 만큼 완성도가 부족했다. 극본 말고 그냥 소설을 쓰세요..ㅜ.ㅜ


이 작품 하나는 몹시 실망했지만, 그렇다고 미나토 가나에를 버릴 정도는 아니었다. 그의 다른 작품들은 여전히 관심이 간다. 게다가 최근작 '꽃 사슬'은 제목도 예뻐! 헌데 평점은 평범하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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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면조와 달리는 육체노동자
천명관 지음 / 창비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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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 된다는 건, 지우고 싶은 기억을 새기는 것이라고 대학 때 한 교수님이 말씀해 주셨다.

어리다고 꼭 순수하고 깨끗한 것은 아니지만, 그냥 일반론으로 볼 때 대체로 어른이 되어갈수록 우리는 더 때묻고, 감추고 싶거나 지우고 싶은 기억들을 많이 갖게 된다. 나 역시도 그렇다.


하지만 어른들은 그런 속내를 감추거나 덮고, 또 아닌 척 위장을 하는 데에도 익숙하게 된다. 과연 성공했느냐의 여부와 상관 없이. 여기 이곳에 그런 어른들이 가득 담겨 있다. 삶이라는 무대에서 한껏 열연을 펼쳤지만, 이제는 무대에서 쫓겨나거나 떨어지거나, 혹은 무대가 홀랑 타버린... 그렇게 벼랑 끝으로 몰린 사람들이 가득하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어떻게 해야 하나 막막하기만 하지만, 그 와중에 쓰디쓴 유머 한자락도 뱉어낼 수 있는 그런 소박하고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들이다. 지질하고 갑갑하지만 연민 한줌 쥘 수밖에 없는 나와, 우리와 몹시 닮은 사람들의 이야기...


핑크 편이 유난히 마음이 쓰였다. 대리기사가 가장 만나고 싶지 않은 손님이 외제차를 몰고 있는 동창이라는 것. 크게 공감했다. 나도 그렇게 내 직업군에서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 꼭 걸맞지는 않지만, 어제 꼭 그런 기분을 느끼게 하는 상대를 만났다. 그리고 앞으로도 이런 식의 만남이 꽤 있을 것 같다는 불편한 진실을 마주해야 했다. 가슴에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며 나이만 먹는 기분이다.


이럴 때 쓴 소주 한 병 정도 마셔줘야 뭔가 그림이 될 것 같았지만, 그저 진한 커피 한잔으로 대신했다. 수다를 조금 떨고 싶었지만 마침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말로 풀어낸다고 뭐 달라질 것도 없지만, 그냥 그 순간에는 혼자 있는 게 서러웠다. 그래서 책을 읽었다. 책 속 남자가, 여자가, 그들의 못난 행동들이, 지질한 변명들이 모두 나같고 나였고, 나일 것 같아서 눈물이 났다. 


마치 그 각각의 인물들을 모두 경험해본 것처럼, 마치 살아본 것처럼 자연스럽고 천연덕스럽게 서술해 가는 천명관의 거침없는 문장들. 페리 박의 사투리가 어색하지 않아서 의외였는데 원래 여수 출신이었다는 지성처럼, 천명관이 창조해내는 캐릭터들은 제각각 걸맞는 옷을 입고 마땅한 연기를 해내고 있다. 천생 이야기꾼이다.


개인적으로는 단편집을 좋아하지 않아서 아마도 그의 장편이 더 나에게는 맞을 것 같지만, 이 짧은 이야기들로도 천명관을 맛보는 데에는 손색이 없다. 이야기가 가득 필요한 날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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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5-02-28 18: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대화가 필요한 날이었군요.ㅠ
천명관 명성은 들었는데도 작품은 못읽었어요.

마노아 2015-03-01 21:08   좋아요 0 | URL
고래에 대한 명성이 자자한데 그 작품은 아직 못 보았어요.
한권만 읽었는데도 입담이 대단한 걸 바로 알겠더라구요. ^^
 
검은 꽃 - 개정판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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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동진이 진행하는 새벽 라디오 프로그램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요일 코너는 '변방의 북소리'다. 다른 요일들에는 시그널이 나오고 오프닝 멘트가 나오지만, 변방의 북소리는 책의 구절을 읽으면서 시작한다. 파격적인 진행이다. '빨간책방'에서도 책 읽어주는 코너가 있고, '책, 임자를 만나다' 코너에서 소개한 책들에 흥미를 느껴 구매하고 읽는 경우가 많지만, '변방의 북소리'는 한 시간을 올곧이 책 읽는 데에 거의 쓰므로 책에 대한 강렬함이 더 컸다. 그렇게 소개된 책으로 이 책, '검은 꽃'이 있다. 


김영하의 문장력은 익히 소문난 그대로다. 깔끔하고 강렬하며 깊이 빨아들인다. 초반의 힘이 아주 센 작가다. 




1905년, 조선에서의 기구한 삶을 접고 새로운 인생을 열어보고자 천 여명의 사람들이 멕시코행 배에 올랐다. 망망대해를 건너 도착한 땅은 그러나 젖과 꿀이 흐르는 곳이 아니었다. 캐릭터 각각의 신상과 면면은 배를 타고 오는 동안의 일정으로 모두 소개했다. 황족의 딸인 연수 일가가 왜 그 배를 탔는지, 바오로 신부가 왜 소명을 접어버리고 머나먼 멕시코를 택했는지, 좀도둑 중의 좀도둑 최선길과 혈혈단신 이정까지... 


오도 가도 못하는 배 안에서 서로에게 끌린 이정과 연수의 로맨스. 그녀가 지나갈 때면 흠씬 풍기는 사향냄새가 독자까지도 매료시켰다. 그러나 낭만적인 사랑을 꿈꾸기에는 그들의 신분 차보다 그들이 처한 현실의 벽이 더 높았다.


유카탄 반도엔 강이 없기로 유명하다. 반도의 대부분이 낮고 평평한 석회암지대라 비가 내려도 물이 고이질 않는다. 큰 나무도 많지 않고 키가 작은 잡목과 덤불 들만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물은 지하 수십 미터 아래의 우물에서 길어올릴 수밖에 없는데 이 때문에 마야의 고대 유적지 근처에선 아직도 직경이 수십미터에 달하는, 차라리 지하수 연못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거대한 우물들이 종종 발견되곤 한다. 사람들은 사다리를 타고 석회암층 아래로 내려가 물을 길어 올라온다. (...) 보통 1km 족히 떨어진 곳에 세노테가 위치하고 있었다. 물은 땅에 떨어지는 즉시 증발하거나 스며들었다. 물이 흔하고 지반이 단단한 땅에서 이주한 조선인들을 가장 먼저 괴롭힌 것은 바로 물의 부족이었다. 하늘과 땅, 그 사이를 강산(江山)이라 부르던 사람들이었다. 강과 산이 없는 세상을 그들은 상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유카탄엔 그 두 가지가 모두 없었다. -114쪽


금수강산이란 말의 의미가 확 와닿던 순간이었다. 고개를 들면 어느 각도에서건 마주할 수 있는 대한민국의 산. 그 산에서 마주할 수 있는 계곡. 흔해서 쉽게 깨닫지 못하는 소중한 산하가 이 책 속에서 그 존재감을 크게 드러냈다. 그렇지만 이곳 멕시코에서는 적어도 얼어죽을 걱정은 없다는 자조 섞인 소리에 이 탐나는 자연환경의 치명적인 속살도 같이 드러났다. 어딘들 아니 그렇겠냐만은, 이땅은 백년 전에도 지금도 가진 자에게만 윤택한 곳이었으니......


저기, 나는 안 돌아가려네. 모두가 눈을 크게 뜨고 쳐다보았다. 배에 올라탄 이래로 그같은 말을 듣기는 처음이었다. 그까짓 나라, 해준 것이 무엇이 있다고 돌아가겠는가. 어려서는 굶기고 철드니 때리고 살 만하니 내치지 않았나. 위로는 되놈에, 로스케 등쌀에, 아래로는 왜놈들 군홧발에 이리 맞고 저리 굽신, 제 나라 백성들한텐 동지섣달 찬서리마냥 모질고 남의 나라 군대엔 오뉴월 개처럼 비실비실, 밸도 없고 줏대도 없는 그놈의 나라엔, 나는 결코 안 돌아가려네. 주리지만 않으면 어떻게든 여기에서 버텨보려네. 땅도 사고, 그는 침인지 눈물인지를 꿀꺽 목구멍으로 넘기곤 말을 이었다. 물론 장가도 가야지. 새끼도 낳고. -96쪽


목숨을 부지할 한뼘의 땅이라도 있었다면 그들은 이 배에 오르지 않았을 것이다. 땅이 없었기에 군인이 되었고, 땅이 없었기에 장가를 가지 못했고, 결국 이 메마른 땅으로 와야 했던 그들이었다. 오늘날의 청춘들이 떠오른다. 대학을 졸업하면 기다리는 것은 수천 만원에 달하는 학자금 빚과 비정규직 일자리뿐. 그들에게 연애와 결혼, 이어지는 출산과 육아는 먼 나라 이야기이다. 그런데 우리의 경제 부총리께서는 비정규직으로 못살겠다는 청춘들을 향해 정규직이 과보호되고 있다고 뻘소리를 내뱉고 있다. 그까짓 나라 해준 게 뭐가 있다고 돌아가냐는 말이 남의 얘기로 들리지 않는다. 이 나라에서 열심히 공부시켜서 유학을 보내고, 거기서 터를 잡고 돌아오지 않는 인재가 많이 있다. 단순히 그들을 '애국심'에 호소해서 돌아오라고 할 것이 아니라, 기꺼이 돌아가고 싶은 나라가 되어야 하는 게 맞지 않나. 오늘도 여당측 위원이 세월호 기초조사 예산에 0원을 책정했다는 뉴스타파 기사를 보면서 할 말을 잃었다. 


굶다시피 하는 날들이 계속되었다. 그럼에도 이종도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밥은 가장 먼저, 많이 먹었다. 마치 그것이 자신의 숭고한 의무라도 되는 것처럼 그는 식사 때마다 흙바닥일지언정 가장 좋은 자리에 앉아 가장 먼저 밥숟가락을 들었다. 아들에게는 고생한다는 말 한마디 하지 않았고, 아내와 딸에게도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가부장 하나 때문에 온 가족이 몰살당하는 일이 다반사인 왕조의 후손이었다. -130쪽


이역 만리까지 오게 된 것은 순전히 이종도의 결정 때문이었다. 천여 명에 이르는 조선인들을 대표한다는 착각 속에 그는 이곳 멕시코 땅을 밟았다. 말 한마디 안 통하는 이곳에서 '위대한 문자' 한자로 대화가 될 거라고 예상했다. 조선에서 농사로 뼈가 굵은 이들도 혀를 내두르는 에네켄 농장에서 손이 고운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능력이 되어도 할 마음이 없는 인사였다. 그럼에도 밥은 가장 먼저, 많이 먹었다는 저 냉소 깊은 문장이 껍데기만 남은 양반의 위선을 제대로 보여주었다.


의지할 곳 없는 이곳에서 서로에게 기대고 힘을 모으려는 마음이 왜 없겠는가. 당연히 그런 마음들이 보인다. 그러나! 바뀌지 않는 것들이 있다.


하루 일이 끝나면 남자들은 술을 마셨다. 남자들과 똑같이 일했지만 여자들은 집에 돌아와서도 쉬지 못했다. 불을 피우고 밥을 안쳤다. 옷을 깁고 집 안을 치우고 다음날 가지고 나갈 장비를 챙겼다. 차가운 개울물에서 빨래 한번 시원하게 해봤으면 더는 원이 없겠네. 어느 충청도 여자가 서쪽을 바라보며 말하자 다른 여자들이 눈물을 흘렸다. 빨래는 목욕만큼이나 사치였다. 우물은 멀었고 수량도 부족했다. 어서 우기가 오기를 기다리는 것밖엔 도리가 없었다.

30도를 넘는 더운 날에도 여자들은 치마저고리를 벗지 못했다. 웃통을 벗어붙인 남자들은 술만 마시면 제 아내를 두들겨팼다. 벌써 노름을 시작한 이도 있었다. 노름과 술은 조선 남자들의 뿌리깊은 병폐였지만 쉽게 고쳐지지 않았다. 악다구니와 울음소리, 비명과 고함이 밤마다 이어졌다. 유카탄은 남자들에게도 지옥이었지만 여자들에겐 언제나 그 이상이었다. -151쪽


여권이 신장되었다고 하는 오늘날에도 크게 다르지 않다. 한달 반 쯤 전에 다녀온 결혼식에서 신랑과 신부는 서로에게 서약서를 썼다. 새신랑은 집안일을 가급적 많이 '돕겠다'고 썼다. 맞벌이 부부인데 집안일은 부인의 일이고 자신은 도우면 된다는 생각을 그 사람만 하고 있는 게 아니다. 새신부는 남편에게 '순종하며' 살겠다-라고 썼다. 하아, 부창부수랄까... 


유카탄 반도에서의 삶은 고단하고 처절했다. 큰돈을 벌어 조선 땅으로 돌아가든지, 아니면 미국 땅으로 건너가 새출발을 하는 게 이들의 목표였지만 하루하루 입에 풀칠하기도 빠듯한 실정이었다. 애초에 불공정하고 비도적인 계약 조건이었음을 그들이 은 알지 못했고, 속았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이미 계약의 노예가 된 뒤였다. 그러나 또 끈질기기로 치면 어디에 내놔도 뒤지지 않는 민족 특성답게 이들은 곧 마야인 노동자들보다 더 많은 에네켄을 베어냈고, 빚을 털어내고 기어이 조선으로 돌아가는 사람도 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모두가 그럴 수는 없는 입장. 


이들의 가혹한 상황을 알아봐 준 이들이 생겼다. 동포들의 눈물겨운 상황을 고국으로 알리고, 또 다른 교포들에게 알려서 이들을 구제하려고 발에 땀이 나도록 뛰어준 이들. 


문제는 경비였다. 이 부분에서 하와이와 본토의 한인들은 놀라운 희생정신을 발휘한다. 이들은 모든 경비를 자신들이 부담하기로 하였고 즉각 모금에 들어갔다. 하와이에서 5441달러, 본토에서 536달러가 걷혔다. 이 밖에 미리 약정한 후원금도 5000달러에 달했다. -278쪽


배 안에서의 시간은 꽤 천천히 흘러갔지만, 유카탄 반도에 도착해서의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이들의 사연도 빠르게 진행되었다. 로미오와 줄리엣 같은 이정과 연수의 로맨스가 결국은 실현될 것인가, 그들은 끝끝내 다시 만나질 것인가 독자는 뒷장을 재촉하며 읽어나갔다. 


처음 경험한 전투의 승리는 이정의 이성을 마비시켰다. 그는 미국도, 연수도 잊었다. 무수한 아시엔다에서의 멸시와 고난도 모두 잊었다. 전투의 승리에는 순정한 기쁨이 있었다. 그리고 혁명군 내부의 분위기도 마음에 들었다. 그것은 요시다의 주방에서 맛본 것과 비슷했다. 남자들만의 세계. 세상의 모든 의무로부터 면제된 세계. 그들은 더럽고 지저분하고 시끄러웠지만 그 안에는 어떤 편안함이 있었다. -287쪽


아기를 가진 연수 쪽이 이정을 더 못 잊는 게 인지상정이긴 하지만, 전투의 승리에 취한 이정은 테스토스테론에 중독된 것 같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때의 그에게는 연수조차도 중요하지 않아 보였다. 작품 말미에는 등장했던 사람들의 인생 최후를 짧게짧게 기술해 주었는데, 가장 충격적으로 큰 폭으로 변한 인물이 연수였다. 그럴 수밖에 없던, 신산한 삶이었다고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몰입감이 좋은 소설이었다. 각각의 캐릭터들도 살아 있었고 조선과 멕시코를 비교하며 서술하는 대목에서도 그 확연한 차이가 눈에 그려지는 듯했다. 소재도 눈길을 끌었고, 문장력도 압도적이었다. 그러나 아쉬움이 있었으니, 절정까지 천천히 쌓아오르던 이야기가 너무 가파르게 마무리 되었다. 밀림 한가운데에 세워졌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작은 나라가 조금 뜬금없었다. 거기에 대한 설명이, 설득이 좀 부족하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다.


생각해 보면, 김영하의 작품들은 늘 즐겁게 읽다가 마무리에서 좀 김빠지면서 책을 덮었던 기억이 난다. 속도 조절이 다소 필요하지 않나 싶다. 그럼에도 또 다른 김영하의 작품들을 기꺼이 만날 생각이다. 아쉽기에 더 찾게 되는 미련이 그에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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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5-02-12 17: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마노아님. 요즘 책 읽는데 삘받았나 봐요!! >.<

마노아 2015-02-12 17:06   좋아요 0 | URL
찾아보니 이거 11월에 읽었더라구요. 요새 밀린 리뷰 열심히 쓰고 있어요.ㅎㅎㅎ

다락방 2015-02-12 17:32   좋아요 0 | URL
책 읽는데 삘받은 게 아니라 리뷰 쓰는데 삘 받은 거였군요. ㅎㅎ

마노아 2015-02-13 01:51   좋아요 0 | URL
밀린 리뷰가 카드빚처럼 쌓이더라구요. 털어내고 싶었어요. ㅋㅋㅋ

2015-02-13 08: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2-13 23: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옆차기 2015-03-02 0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정과 연수의 로맨스만으로도 숨막힐 지경이었던 기억이 나네요..
Dreamer form DFOLD

마노아 2015-03-02 23:09   좋아요 0 | URL
이정과 연수의 이야기는 정말 숨막힐 정도의 감정이 느껴졌지요.
영상으로도 느껴지는 글이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