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수 사용 설명서
전석순 지음 / 민음사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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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철수의 자세한 규격 설명서가 있다. 

 

대한민국의 평범한 20대 남성이라고 할 수 있지만, 대학을 졸업하고 1년째 취업을 못하고 놀고 있는 철수는 점점 하자가 있는 상품으로 분류되어 가고 있다. 주량이 술 한 잔에 불과한 철수, 조금이라도 당황하면 금세 온몸이 붉어지는 철수, 그래서 갖은 오해에 시달리지만 제대로 된 변명 한 번 하지 못하는 우리의 철수, 사는 게 보통 피곤한 일이 아니다.  

철수의 부모님은 대한민국의 평범한 부모님 그 자체였다. 내 아이의 손이 피아노에 재능있어 보인다기에 학원에 들여보내고, 공부를 못하는 게 아니라 잠시 안 하고 있을 뿐이라고 여기고, 취업을 못하는 게 아니라 고르느라 잠시 주춤한 것 뿐이라고 애써 설명하는 그런 부모님들이었다. 서로가 평범한 사람들이지만, 그 조합이 그다지 환상적이지 않았다는 게 문제였을까? 피아노를 제대로 치지 못하자 피아노 선생님께 손등을 자로 맞았던 때부터, 철수는 당황해 버리면 손등에 오선지가 드러나고 열이 발생한다. 급기가 그 열은 온몸으로 퍼지고, 버스 안에서는 치한으로 몰리기에 충분한 수준으로 돌변한다. 아이가 그렇게 30년 가까이를 살았는데, 부모님은 왜 그렇게 되었는지 알지 못한다. 철수도 설명하지 못한다. 그저 사용설명서를 작성해서 그것을 보여드렸으면 좋겠다고 바랄 뿐이다. 가족 안에서 철수는 소통하지 못한다.  

연애 전선은 무난했을까? 그럴 리가! 남들보다 꽤 진도가 느렸던 철수는 여자 친구들로부터 원성을 받는 일이 잦았고, 그조차도 결국 제품의 하자로 취급되기에 이르렀다. 마침내 첫 키스에 도달하고, 모텔 방에 입성까지 하고서도 철수의 장벽은 낮아지지 않는다. 몸에 오르는 열이 문제였다. 열을 내리고자 소주를 온 몸에 발랐더니 맨 정신으론 안 될 것 같았니? 소리나 들어야 했고, 해열제를 먹다가 들켰을 때는 더 당황스러운 소리를 들어야 했다. 약 먹고도 이 정도 뿐이니?라니...  

이런 사례가 줄줄이 이어진다. 취업 전선에서, 연애 전선에서, 그리고 가족 모드에서... 사촌 누군가의 결혼식에 참석했다가 온 친척들의 비교의 장에서 최고 하자품으로 스스로를 인식하는 순간, 그저 예의 없는 사촌으로 남을 것을 후회해봤자 이미 늦은 일이다. '철수'라는 가장 무난한 이름을 지녔지만, 무난하게 사는 일이 어디 쉽단 말인가? 남들만큼 공부해서 대학 가고, 졸업해서 취업하고, 적당한 때에 결혼해서 또 아이 낳아 기르는 그 사이클을 따르는 일, 내가 살아보니 정말 어렵던데, 철수에게 동병상련의 위로의 눈길이라도 보내줘야 하는 건지 한참 헷갈린다.  

'오늘의 작가상'이라는 멋진 상도 받은 작품이건만, 이 작품에 쏟아지는 별점들은 혹독하기 짝이 없다. 내가 그들의 마음을 다 알수는 없지만, 일견 이해가 가고도 남았다. 읽는 내내 너무 답답했던 것이다. 철수가 가여운 건 사실인데, 대한민국의 현실이 20대에게 포부를 주기보다 좌절부터 안겨주는 일이 많다는 것을, 오죽하면 영혼이라도 팔아서 취직하고 싶다는 말이 나오겠냐며 나 역시 침을 튀기며 철수를 위한 변명을 잔뜩 늘어놓고 싶지만 그게 되지 않는다. 철수, 왜 이렇게 답답하니! 

사람이 위를 바라보며 살기엔 너무 기가 죽고, 아래를 내려다보며 살자니 또 의욕이 안 생기는 게 사실이다. 그렇지만, 철수의 제품 사용 환경이 남들보다 나쁘지는 않다. 양친 다 살아 계시고, 보아하니 경제적으로도 표나게 부족하지도 않다. 몸에 어디 장애가 있는 것도 아니고, 연애모드 사례를 들여다 보면 그 와중에 연애 경력도 꽤 된다. 정말 치열하게 먹고 사는 일에 목숨 걸어야 하는 20대는 연애도 사치라는 것을 철수가 알고나 있는지... 면접 모드를 들여다 보면 소박한 아르바이트 한 건이라도 해보았는지 의문이다. 최소한의 사회 생활을 해보았더라면, 이 정도록 막막하지는 않을 것 같다.   

철수 스스로도 본인이 오죽 답답하겠는가. 그러니 제품사용설명서를 계속 언급할 것이다. 그런데, 모두들 그렇게 산다. 나는 사실 이래요! 내 진심은 이렇고, 나란 사람의 가치는 보이는 것보다 더 뛰어나요!라고 말하고 살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철수의 그 길고도 긴, 온갖 주의사항이 남발되는 제품 사용설명서를 대체 누구라고 읽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러니, 147쪽의 질문은 너무 늦게 튀어나왔지만 이제라도 나와서 다행인 의문이었다. 

   
 

 사용 설명서가 완성되어 갈수록 철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걸 읽고서도 엄마와 아버지, 누나가 철수를 선택했을까. 그녀들이나 친구들, 또 면접관들은 어땠을까. 이걸 읽고도 철수를 사용할 생각이 들었을까. 혹시 사용 설명서가 없는 제품이었기 때문에 철수를 선택하고 사용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리고 철수는, 과연 철수는, 철수를 선택했을까. -147쪽

 
   

스스로에 대해서 자학을 하라는 얘기는 물론 아니다. 서른을 앞두고 있는 나이라면, 시작은 네 잘못이 아니었을지라도 이제는 본인의 책임이 되어버린 것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너의 인생, 곧 너 자신이기 때문이다. 자꾸만 열이 오르는 너의 특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떠나버린 그 무수한 여자 친구들, 한 번이라도 잡아 보았던가. 잡고 싶을 만큼, 잡지 않고는 못 버틸 만큼 사랑했던 적은 있던가. 늘 남들 하는 만큼은 해야할 것 같아서 적당히 사람을 만난 것은 아닌지, 스스로 되물어볼 일이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너와 비슷한 고민을 갖고 있는 그녀를 만난 것은 참으로 불행 중 다행이랄까. 너를 이해해줄, 그리고 너로부터 이해받을 사람의 가졌을 위안이 다행이었다. 그래, 그 속도를 유지하는 거야. 지금까지는 네 속도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속도였다는 것을 이제라도 알아차리렴! 

   
  철수는 조금 더 자 두려고 눈을 감다가 문득 깨닫는다. 철수 사용 설명서를 쓸 수 있는 사람도, 그걸 가장 먼저 읽어야 하는 사람도 결국은 한 사람이라는 것을. -221쪽  
   

계속되는 사용설명서 타령에 독자도 지쳐갈 무렵, 다행히도 철수도 깨닫고 만다. 자신이 작성해 온 그 긴 설명서를 가장 먼저 읽어야 할 사람이 본인임을 말이다. 비록 그것이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이긴 했지만, 그랬기에 철수의 인생은 좀 더 달라질 것임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리고 사실 철수에게 하고 싶은 당부의 대부분은 나 자신에게 보내는 메시지임도 외면하지 않겠다. 철수를 응원하는 게 곧 나 자신을 응원하는 것임을 나도 충분히 알고 있으니까. 

 

오른쪽이 껍데기 표지인데, 벗기면 왼쪽으로 나온다. 얇은 책이어서 굳이 양장본까지 갈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게다가 표지도 안쪽 붉은색이 더 마음에 든다. 소심한 철수와 비교되는 악동의 표정이 혹 철수의 바람일까?  

162쪽에 철수는 하루에 약 2560칼로리 정도를 필요로 한다고 썼는데 '킬로 칼로리'로 고쳐야겠다. 철수 굶어죽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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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1-08-29 1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철수 사용설명서가 이런 내용이었군요. 궁금했는데...
대한민국엔 철수가 넘쳐나고 있다는 걸 우린 모두 알지요.ㅜㅜ

마노아 2011-08-29 21:39   좋아요 0 | URL
제목이 무척 흥미롭지요? 저도 어떤 내용인지 궁금했는데 읽으면서 참 마음이 아팠어요..ㅜ.ㅜ

루쉰P 2011-08-29 2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지내시죠? 오랜만에 서재에 들어왔어요. ㅋㅋ 저 책은 저도 샀는데 책을 너무 한꺼번에 지르는 바람에 사놓고 손도 못 대고 있다가 마노아님의 리뷰가 올라와 신나게 구경하고 갑니다.
결론은 어찌보면 뻔하다고 생각하지만 전 이 소설의 새로운 방식과 그리고 뻔하지만 의미 있는 지적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사람은 눈 앞의 텔레비는 봐도 자신의 속눈썹은 못 보잖아요. 자신에 대한 설명서 같은 분석을 통해 자신을 바꾸어 내기 위해 근거를 잡고, 그것을 토대로 자신을 변혁해 가는 것! 그것이 어찌보면 답답하고 기회를 안 주는 세상에 항거할 수 있는 유일한 스킬과 스펙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그렇게 자신을 변혁하면 세상도 사회도 가족도 바꿀 수 있지 않나란 그런 생각을 이 리뷰를 보며 생각해요.
마하트마 간디나 마틴 루터 킹이 얘기한 핵심도 자신을 바라 보고 변혁하는 것이니까요. ^^
저도 마치 많이 아는 것처럼 썼찌만 아직 저도 제 사용설명서를 4% 정도 밖에는 쓰지 못한 것 같아요. 흠..마노아님의 리뷰를 읽으니 저도 얼른 읽어야 겠다는 결심을 합니다!
근데 대문 사진이 또 바뀌셨어요? 본인 얼굴이신가요. ㅋㅋ 만약 본인 얼굴이시라면 미인이십니다. ^^

마노아 2011-08-30 07:29   좋아요 0 | URL
오랜만이에요, 루쉰P님.^^ 책장 정리한 지 한 달 정도 지났는데, 옆으로 누운 책 없이 만들었다고 기뻐했건만, 다시 옆으로 누운 책들이 속속 속출하고 있어요. 손도 못댄 채 저를 노려보고 있는 책들 때문에 심히 마음이 찔리고 있답니다.^^
이 책은 어느 정도 결말이 보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끝까지 지켜보고 싶은 마음이 들게 했어요.
스스로의 사용설명서를 작성하는 일이 변명보다 반성과 새로운 도전에 대한 다짐이 된다면 분명 좋은 결과를 줄 거예요. 그런데 저 자신의 사용설명서를 작성한다고 생각하면 너무 아찔하고 아득하네요.
대문 사진은 제 사진 맞습니다. 자주자주 바꾸는 편인데, 잘 나온 사진 생기면 또 바꿀 거예요. 칭찬 고맙습니다.^^

꿈꾸는섬 2011-08-29 2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읽으셨군요. 정말 기발한 책이죠.

마노아 2011-08-30 07:29   좋아요 0 | URL
기발하고 기가 찬 책이었어요.^^
 
로라, 시티 - 죽은 자의 두 번째 삶이 시작되는 시티!
케빈 브록마이어 지음, 김현우 옮김 / 마음산책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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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아프리카 공동체에서 인간은 지상에 살아있는 사람, 사샤sasha, 그리고 자마니zamani 이렇게 세 부류로 나뉜다. 본인은 죽었지만 그와 시간을 함께 보낸 사람이 아직 지상에 남아 있는 경우, 그는 사샤, 즉 살아 있는 죽은 자가 된다. 사샤들은 완전히 죽었다고 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살아 있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는 아직 살아있기 때문이다. 살아 있는 사람들이 머릿속에 그들을 떠올릴 수도 있고, 예술작품을 통해 그들을 표현할 수도 있고, 이야기 속에서 다시 그들을 삶으로 데리고 올 수도 있다. 그를 기억하고 있는 마지막 사람마저 죽고 나면, 그 조상은 사샤이기를 그만두고 자마니, 즉 죽은 자가 된다. 일반화된 조상으로서 자마니는 잊히지는 않고 경외의 대상이 된다. 많은 이들이…… 그 이름으로 기억되지만, 그들은 더 이상 살아 있는 죽은 자는 아니다. 그 둘은 엄연히 다르다. -제임스 로웬, 『선생님이 가르쳐준 거짓말』 -9쪽

어린 아이가 소중한 사람을 잃었을 때, 아이를 위로해주기 위해서 곧잘 해주는 이야기가 네 마음 속에 그 사람이 살아있으니 영영 이별은 아닌 거라고, 그런 얘기들을 곧잘 하기도 하고 또 들어보기도 하면서 우린 살아온 것 같다. 그것이 단지 위안삼아 하는 말이 아니라 그렇게 믿고 사는 공동체가 있고, 또 그런 사람들이 사는 시티를 구상한 소설가도 있다. 케빈 브록마이어의 소설은 죽은 자의 두 번째 삶이 시작되는 시티를 구체적으로 표현한다.  

시티에 모여든 사람들은 자신이 이미 죽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고, 죽음의 순간도 기억한다. 또 자신이 이 시티에 남아 있는 것은 자신이 살다가 온 그 지상에 누군가 자기를 기억하는 사람이 남아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들은 시티에서 생전에 마무리 짓지 못했던 것들을 마무리 짓기도 하고, 끊어졌던 관계를 잇기 위해서 노력하기도 하고 줄곧 꿈꿔왔던 꿈을 이루려고 도전도 한다. 시티의 인구가 무한대로 증가할 것 같지만 지구의 인간들도 꾸준히 죽기 때문에 시티는 인구 과잉으로 몸살을 앓지 않는다. 더군다나 현재 지구는 치명적인 바이러스로 전 인류가 거의 전멸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에 오히려 시티의 사람들이 대거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지금 시티에 남아있는 사람들은 지구의 마지막 생존자 '로라 버드'가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녀는 현재 남극에 있다. 코카 콜라 직원으로 남극에 파견을 갔지만, 같이 갔던 사람들도 모두 죽고 그녀 혼자만이 남았다. 기지와 연락이 두절되면서 사정을 알아보러 갔던 두 남자 직원이 돌아오지 않자 기지로 찾아나섰던 그녀는 그곳에서 전 대륙을 뒤덮은 바이러스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세상에 단 홀로 남아있는 원천적 고독에 시달려야 했다. 혹시나 어딘가에 누군가가 살아있을 거란 희망을 버리지 못하지만, 시시각각 닥쳐오는 시련들은 그런 기대를 덧없음으로 바꿔버린다.  

이렇게 로라의 현재 상황과 그녀의 기억이 이루어낸 시티의 사람들 이야기가 번갈아 가며 교차한다. 처음엔 그저 한 사람의 등장 인물로 보였지만, 뒤로 가면 그가 로라의 기억 속에서 어떤 인물이었는지가 언급되어 다시 마주친다. 게 중에는 로라의 첫사랑도 있고, 어릴적 친구도 있고, 부모님도 있고, 잠시 스쳐갔던 사람들도 있다. 한 사람의 기억 속에 잠재되어 있는 인물들이 하나의 시티를 이룰 정도라니 그 숫자에 놀라게 된다. 작품 속에서 로라는 30대 초반이기 때문에 아주 오래 산 사람도 아닌데도 말이다.  

거의 마지막에 도착한 사람은 로라의 남극에서의 동료 두 명이었다. 그 중 퍼켓은 자신이 아주 어릴 적에 자전거 사고로 죽은 형을 찾아 나선다. 자신이 시티에 도착함으로 인해서 시티에서 곧 사라져버린 자신의 형이었다. 그는 형을 기억해줄 수 있는 지상의 마지막 사람이었는데 이제 자신마저 죽었으니 형은 시티에서도 볼 수 없게 된 것이다. 로라가 그의 형을 알지 못하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가 형의 자취를 찾아 나서고 그 흔적을 느끼는 부분이 참 아련하고 애틋했다.  

빌레 톨바넨은 매일 밤 8번 가와 바인 가가 만나는 모퉁이의 술집에서 당구를 쳤다. 술집에서 만나는 친구들은 그가 살아 있을 때부터 만나오던 친구들이었다. 핀란드의 오울루에 있는 술집에서 함께 술을 마실 때 그들은 종종 "우리 죽어서 다시 만나세, 8번 가와 바인 가가 만나는 모퉁이의 술집에서"라는 가사의 노래를 부르곤 했다. 한 명씩 차례차례 죽음을 맞이한 후, 그들은 정말 8번 가와 바인 가가 만나는 모퉁이의 술집을 찾았다. 반신반의하며 조심스럽게 술집 문을 열고 들어서니, 당구대 주변에 친구들이 모여 있었고, 마침내 모두 다시 만날 수 있었다. -29-30쪽 

습관처럼 농담삼아 하던 말을 그들의 입장에서 현실화되던 장면이다. 이런 모습도 참 애틋하니 먹먹하다. 죽어서도 다시 만날 수 있는 친구들과 가족이 있다는 건 참 벅찬 일이지만, 이들이 모두 로라의 기억 속에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면 언감생신일 테니 이들의 행복한 재회는 복불복이다. 코카콜라의 홍부 부사장 린델이 그랬다. 로라는 그를 알지만 그의 가족을 모르니 그가 보고 싶은 엄마도 아내도 아들도, 누구도 만날 수 없다. 시티에서 린델은 그런 로라를 원망하기도 한다.  

로라는 기본적으로 따뜻한 사람이었다. 무엇이든 버리는 것을 싫어해서 평생 온갖 것들을 주변에 두고 살았던 그녀. 경우에 따라서 그런 습관은 무척 답답해보일 수도 있지만, 그 덕분에 시티 안은 다양한 사람들로 가득 찰 수 있었다.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추억과 삶이 공존했다.

그런데 시티 안의 사람들은 추억을 재생시키며 자신들이 죽은 이후 세계가 어떻게 되었을지 궁금해하기도 하고 나름의 삶을 꾸려나가느라 애를 쓰지만, 그런 시티의 존재도 모르고 남극의 얼음 속에서 하루하루를 치열하게 살아가는 로라의 처지는 가엾기만 하다. 그녀가 가장 극적인 위험을 만났을 때 시티에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나쁜 기상 상태를 유지하는 것은 당연해 보였다. 언뜻 김강원의 '여왕의 기사'가 떠올랐다. 여왕이 사랑을 잃고 마음에 겨울이 오면 온 나라가 겨울의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던 이야기 말이다.  

작품 속에서 한국이 두 번 나오는데 하나는 코끼리가 멸종되고 한국의 공장에서 만 개씩 대량생산된 플라스틱 상아 목걸이 이야기를 할 때였고, 시티 안에 한국 식당이 있어서 김치와 국수를 판다는 얘기였다. 코끼리와 고릴라가 모두 전멸한 지구라고 하니 지금보다는 더 앞서나간 미래 사회이지만, 그때도 전 세계에 대량생산된 물건을 뿌릴 대상으로 한국은 좀처럼 어울려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작가의 관심이 반영된 거라고 생각하니 아주 나쁘지는 않다. 

코카콜라라는 거대 자본의 기업이 해낼 수 있는 광고와 홍보 효과, 그리고 동시에 일어날 수 있는 치명적 위험에 대해서 아찔함을 느꼈다. 그렇다고 이 작품을 반자본주의 적 감성으로 다가갈 일은 아니다.  

작품이 <뉴요커>에 게재된 뒤 바로 영화화가 결정되었다고 하는데 '더 로드' 같은 느낌의 영화가 나올 지, 혹은 '러블리 본즈' 환상적 느낌의 영화가 나올지 자못 궁금하다. 로라의 이야기를 할 때면 한없이 안타까울 것이고, 시티의 이야기를 하면 대조적으로 밝은 이야기도 가능할 것이다.  

근래에는 어릴 적에 있었던 일, 마주쳤던 사람, 혹은 내가 했던 말들 등등... 이런 걸 기억하고 있단 말이야? 싶은 기억들이 조각조각 자꾸 나를 건드린다. 아주 사소한 것들까지도 자세히 기억나는 바람에 양심이 자꾸 아프기도 했었다. 그런 내 기억들을 다 담아내면 로라가 만들어낸 시티와 아주 흡사할 것 같다. 가족의 가족으로 올라가고, 친구의 친구, 친구의 가족으로 이어지고, 어쩌다 알게 된 사람들과 그들의 가족 등등... 많은 카테고리가 마인드 맵처럼 주렁주렁 가지를 칠 것 같다. 그 세계에서 내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가장 따뜻한 구역에서 서로 옹기종기 모여서 내 얘기를 하고 있다고 상상을 해보면 어쩐지 시큰하다. 이 책과 같은 가정이 성립하려면 그들이 모두 이 세상 사람이 아니어야 할 테니까.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고 우리는 말하는데, 경계를 넘어 그 사람들이 나중에 다시 만난다고 가정을 한다면, 역시 허투루 넘길 사람이 하나도 없다. 기억하는 자와 기억되는 자, 그 공통 분모인 기억이 다만 아름답기를 원할 뿐이다.  

덧글)오타가 몇 개 있다. 

105쪽 매리언와 필립에게>>매리언과 필립에게
241쪽 린델는 거지가 다음 >>>린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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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1-07-08 15: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를 읽다보니 제가 이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그때의 애틋함과 먹먹함이 다시 막 떠오르네요. 그러면서 지금 내가 누군가와 관계를 끊는다고 한들, 만약 이 책속의 도시가 존재한다면 그 누군가는 여전히 그곳에 있겠구나, 싶어져요. 그렇다면 관계를 맺고 끊는건 소홀히 해서는 안되는걸까요? 어렵네요. 그곳에, 제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거라고 생각하니 먹먹해져요, 마노아님.

마노아 2011-07-08 15:33   좋아요 0 | URL
로라는 마지막 사람인데, 로라가 죽으면 시티에 아무도 없을 텐데, 로라는 어쩌지요? 로라 생각에 정말 먹먹해요. 그녀의 공포와 추위와 외로움이 너무 가여워요. 내가 잊고 싶어하는 동창이 하나 있는데, 나와 그 아이를 같이 기억하는 누군가가 분명 있을 테니, 보고 싶지 않은 사람도 시티에 가면 만날 수밖에 없게 되네요. 시티에서조차도 왕재수면 어쩌지요?
아무튼, 이거 영화로 나오면 엄청 슬플 것 같아요.ㅜ.ㅜ

다락방 2011-07-08 15:35   좋아요 0 | URL
일단 소재 자체가 굉장히 흥미롭기 때문에 이건 영화로 나와도 충분히 좋을 것 같아요. 영화를 보다 보면 펑펑 울지는 않아도 주루룩 눈물이 흐를 것 같아요. ㅜㅡ
근데 말이죠, 로라의 남자친구요, 물론 전(前)남자친구..지만, 다른 여자랑 사귀는 거 보니까 막 서운하더라구요. ㅜㅡ

마노아 2011-07-08 16:00   좋아요 0 | URL
그 관계도 로라가 엮어준 건가 싶어 참 아이러니 했어요.
근데 그 남자 너무 동문서답해서 좀 얄밉더라고요.
왠지 연애하면 여자 고생시킬 것 같아서 말이죠. 흥!

다락방 2011-07-08 16:09   좋아요 0 | URL
흥! 남자들이란.. -_-

마노아 2011-07-08 16:33   좋아요 0 | URL
그렇죠? 흥, 킁!!

굿바이 2011-07-08 16: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직 읽지는 않았는데, 죽은 자의 두 번째 삶이 시작되는 시티,라는 부제에서 덜컹합니다.
물론 가정이겠지만 죽어도 또 시작되는 삶이 있단 말입니까? 이렇게 참담할 수가 있나요.
이 세상에서 유통기한이 다 하면 그걸로 영영 끝이었으면 좋겠는데 말입니다 ㅡㅜ

마노아 2011-07-08 16:56   좋아요 0 | URL
아아, 유통기한이라고 하니 시들어가고 상해가는 제가 보이네요..ㅜ.ㅜ
부제가 이 책의 대부분을 말해주는 것 같아요. 진정 덜컹!하는 제목입니다.
 
링컨 차를 타는 변호사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3-21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3
마이클 코넬리 지음, 조영학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한 해에 두 번, 6월 말과 12월 말에 읽었던 책 중 가장 좋았던 것들을 모아 리스트를 만든다. 이제 금년 상반기 리스트를 작성할 때가 다가왔다. 6월은 며칠 남지 않았고, 이변이 없는 한 금년 6개월 동안 내가 읽은 책 중 가장 스릴 넘치는 재미를 선사해 준 것은 이 책이 될 것이다. 새벽 4시까지 읽다 자느라고 지금도 눈이 퀭하지만 그쯤은 조금도 아쉽지 않다.  

이 책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영화 때문이다. 보고 싶은 영화가 생겼는데 원작 소설이 있다면 대체로 원작 소설을 읽고 싶어진다. 그래서 책을 구입하고 또 시간이 흘러흘러 영화 보기 전날까지 이른 것이다. 재밌어서 늦도록 읽기도 했지만 영화 보기 전에 다 봐야 하는 나름의 임무를 완수해야 했던 것이다.  

앞서 영화를 먼저 보고 온 언니는 별로였다고 했다. 게다가 왜 링컨 차를 타는 변호사라는 건지 제목의 이유가 끝까지 나오지 않았다고 투덜댔다. 책을 읽다가 그 의미를 알고는 피식 웃었다. 링컨 차가 어떤 차인지 알았더라면 조금 더 이해가 쉬울 뻔했다. 

요렇게 생겼다. 사진만 봐서는 이게 얼마나 고급 차인지 사실 모르겠다. 암튼 책에는 설명해준다. 주인공 마이클 할러 변호사는 대표적인 속물 변호사인데 한 때 잘 나갈 때 링컨 차를 네 대나 구입해 버렸다. 계기판이 10만을 찍으면 공항 리무진 버스 서비스로 팔아치울 생각이지만 그 전까지는 링컨 차를 타며 잘 나가는 변호사 행색을 할 생각이다. 게다가 수임료를 내지 못한 의뢰인을 전용 운전사로 고용까지 하고 있다. 급여는 거의 아르바이트 수준이었지만. 

확실히 미국 법은 우리나라와 많이 다른 것 같다. 우리나라 법을 잘 아는 것은 아니지만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작품 초반에는 마이클의 스케줄을 따라다니며 그의 변호사 일과 그의 외뢰인에 대한 대략적인 윤곽을 잡는 일에 할애했다. 어느 날 그는 '대박' 의뢰인을 건지게 되었는데 젊은 부동산 재벌 루이스 룰레가 그였다. 전과 기록도 없고 인상만으로는 순수 그 자체로 정말 '무고한' 의뢰인으로 보였던 이다. 어느 날 한 여자가 끔찍한 폭행을 당했고 강간 살해 위협을 받았다. 극적으로 구조된 현장에서 루이스가 잡혔고 그는 자신이 함정에 빠진 거라고 주장했다. 초반에 자료를 찾다 보니 사건은 무척 쉬워 보였다. 마이클은 대박 수임료가 오히려 너무 쉬우진 나머지 날라가는 것에 안타까워해야 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추가 구멍이 보이기 시작한다. 여자와 마찬가지로 루이스도 거짓말을 했고, 그 거짓말의 규모가 자꾸 꺼진다. 그리고 마침내 책의 중반에 이르르면 입이 쩍 벌어지는 실체에 다가서게 된다.  

이 첫번째 반전은 사실 싱겁게 알아차렸다. 극장 포스터에 내용이 적혀 있었던 것이다. 다소 분했지만, 그 반전은 미리 알려주고 시작해도 무리는 없다고 보였다. 중요한 건 그 다음이었으니까.  

그렇게 작품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해서 스릴러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이런 장르의 책을 내내 읽은 사람은 평범한 내용의 책이나 드라마 등은 무척 시시하게 느껴질 것 같았다.  

작품이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재판에서 검사와 변호사가 한 판 붙을 때였다. 상대 검사는 첫 재판이었고, 그러니 애송이라 불릴 만했다. 이런 싸움에서는 아무래도 경험이 중요했다. 마이클은 상대 검사를 거의 KO패 시킨다. 하지만 그 승리가 기쁘기만 할 수는 없다. 그가 지은 죄가 있고, 그가 두려워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속물 변호사'가 주인공인 것은 '정의로운 변호사'가 주인공인 것보다 오히려 매력적일 수 있다. 속물도 인간인지라 그가 맞닥뜨리게 될 진실과, 또 그가 선택해야 마땅한 가치 안에서 분명 번민할 것이기 때문이다. 마이클도 그랬다. 다섯 살에 돌아가신 아버지도 변호사셨는데, 그분의 책을 통해 아버지를 만난 마이클은 '무고한 의뢰인'에 대한 서술을 각인하고 있었다. 가장 무서운 의뢰인이 무고한 변호사라는 것 말이다. 그런 의뢰인을 만나기도 힘들지만, 그의 무고를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그보다 더 끔찍한 일은 없다. 평생을 죄책감 속에서 살아야 하니 말이다.  

두 번이나 이혼한 마이클이지만, 그래도 그가 꽤 매력적인 인간임을 보여주는 건 전처들과의 사이에서 나타난다. 첫번째 부인과는 여전히 사랑하고 있었고,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딸아이는 마이클의 가장 약한 부분이었다. 그리고 충동적으로 결혼했다가 금세 헤어진 두번째 전처는 마이클의 현재 비서로 사업 파트너가 되어 있다.  

세상이 많이 바뀌긴 했지만, 여전히 책 속에서 묘사되는 미국 사회는 백인과 흑인, 그밖의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이 존재하고 무엇보다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자 사이의 간극이 어마어마하다. 그건 링컨 차를 타고 다니는 백인 변호사 마이클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룰이다. 그런 위선 속에서도 꽤 찡한 장면들은 분명히 연출된다. 그런 게 우리 사는 세상 모습이고, 또 마이클 코넬리의 필력인 듯하다.  

책을 다 보고 나니 과연 이런 작품을 영화가 얼마나 옮길 수 있을지 걱정하게 된다. 이미 다 알고 있는 내용이니까 더 심심해질 수도 있겠다. 반면, 알고 보니까 저 자의 저 얼굴 뒤에 어떤 속마음이 있는지도 알아차리면서 볼 수 있겠다. 일장일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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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1-06-25 1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노아님, 소설 읽으신 거죠? 전 영화만 봤어요.
긴장감 늦추지 않고 재미있게 봤어요.
링컨차는 속물변호사를 대변해주는 걸로 봤어요.
매튜 맥커너히의 연기도 아주 좋았어요.^^

마노아 2011-06-26 00:29   좋아요 0 | URL
새벽까지 소설 읽고 낮에 영화도 보고 왔어요.
전 소설을 막 읽고 나서 본 터라 아무래도 원작의 긴장감과 스릴이 훨씬 강렬했는데 영화도 좋았어요.
만약 영화만 보았다면 그 자체로도 무척 만족했을 거예요.
매튜 맥커너히는 그 배역에 딱이었어요.^^

oren 2011-06-25 2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 리뷰가 이니라 책 리뷰네요. ㅎㅎ

저는 이 영화를 보면서 현실 속의 '그랜져 검사'를 연상시키던「부당거래」라는 영화가 떠오르더군요. 그리고 제가 자주 만나는 선배님('벤츠500'을 타는 변호사)도 떠오르더라구요. ㅎㅎ.

영화 「부당거래」를 보면서 '검사'라는 직업도 '하는 일이 참 거칠구나' 생각했는데, 이 영화를 보면서 변호사도 하는 일이 만만찮게 거칠구나 하는 생각도 많이 들더군요(물론 영화속 주인공처럼 '총'까지 맞아가며 일하는 변호사는 현실적으로 별로 없겠지만 말입니다.)

아무튼 책에 대한 멋진 리뷰 잘 읽었구요, 영화에 대한 재미있는 리뷰도 기대할께요~

마노아 2011-06-26 00:32   좋아요 0 | URL
이 영화는 결말을 알고 보아서 그래도 좀 통쾌한 편이었는데 부당거래는 제가 조정래 씨의 허수아비춤을 읽고 난 직후 보아서 가슴이 터지는 줄 알았어요. 너무 답답하고 화가 나고 그랬거든요. 많이 공부한 의사와 검사는 환자와 범죄자들을 만난다는 점에서 좀 아이러니하기도 해요. 어떤 묘한 균형 같은 것도 느껴지고요.

앗, 그렇지만 영화는 리뷰를 쓰지 않을 생각으로 책 리뷰를 쓰고 나간 건데....;;;;;
40자 평으로 대신해볼까 고민 좀 해야겠습니다.^^ㅎㅎ

블루데이지 2011-06-26 0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링컨차가 저렇게 생겼군요!!
저는 이 영화주인공 매튜 맥커너히를 영화 '10일 안에 남자 친구에게 차이는 법'에서 봤었는데
여배우 케이트 허드슨과 잘어울리고, 미소가 참 아름다운 커플이라서 기억에 남아요!!
저도 일단 책을 읽고 영화를 보러 가야겠네요~~마노아님처럼 저도 소설을 읽자마자 뛰어가 봐야겠어요.
감사드려요!!

마노아 2011-06-26 12:55   좋아요 0 | URL
사진보다 영화 속에서 보는 차가 훨씬 멋있었어요. 차 앞부분이 무척 길던데 우리나라에선 주차공간 많이 차지해서 좀 곤란한 차이기도 했어요.^^
전 매큐 맥커너히 영화를 본 게 없더라구요. 얼굴은 익숙한데도 말이죠.
그냥 유명배우여서 낯이 익은건가 봐요.
다른 작품들도 궁금해졌답니다.
블루데이지 님도 책과 영화 모두 재밌게 보셔요~

다락방 2011-06-26 0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꺅 >.<
마노아님 프로필사진!!!!!

마노아 2011-06-26 12:56   좋아요 0 | URL
음하하핫, 부지런을 발휘해서 바꿔보았습니다~ ^^

hnine 2011-06-26 1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프로필 사진 보고 끌려들어왔어요.
그림인줄 알았어요.

마노아 2011-06-26 12:56   좋아요 0 | URL
센스쟁이 hnine님! ^^

순오기 2011-06-27 0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 괜찮았어요~~~~~~ 마노아님의 프로필 사진만큼이나!!
공장장님 사진에서 과감히 본인의 이미지로 바꾼데는 어떤 마음이 작용했을까요?^^

순오기 2011-06-27 13:39   좋아요 0 | URL
아~ 핸드폰 오후에 택배할게요.
두세 개 필요하면 두세 개 보낼수도 있으니 문자로 알려주세요~^^

마노아 2011-06-27 14:23   좋아요 0 | URL
사진 찍어준 사람의 강력한 요청이 있었어요.
꼭꼭 바꾸라고요.ㅋㅋㅋ
멋진 공장장 사진을 발견하면 또 갈아탈 거예요. 아하하핫^^ㅎㅎㅎ

... 2011-06-27 06: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로필 사진!!!! 마노아님, 무슨 파마 하신거예요? 알고 싶어요!!!!

마노아 2011-06-27 14:23   좋아요 0 | URL
일반 펌이에요. 다만 바람머리처럼 바깥으로 뻗치게 해달라고 했어요.
전문 용어로 이름이 따로 있는지는 모르겠어요.^^;;;;
 
나무소녀 카르페디엠 8
벤 마이켈슨 지음, 홍한별 옮김, 박근 그림 / 양철북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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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브리엘라. 너는 누구보다도 나무를 잘 타는 소녀였어. 나무에 오르면 하늘에 더 가까이 갈 수 있다고 믿었더랬지. 네가 열 살이 되었을 땐 어떤 나무라도 못 올라갈 곳이 없었어. 가지가 몇 개 없는 나무라도 문제 없었지. 네가 열 네살이 되었을 때 너의 마을 사람들은 너를 가리켜 '라 알리 레 하윱'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어. 너희 키체 어(과테말라의 중서 고지대에 사는 마야 인, 키체족이 사용하는 언어)로 '나무소녀(Tree Girl)'라는 뜻이었지. 네게 꼭 어울리는 멋진 이름이었단다.

너는 곧 다가올 킨세아녜라에 입을 특별한 위필(마야 전통 의상인 여성용 블라우스)을 짜고 있었어. 네가 열다섯 살이 되는 성인식을 준비하고 있었던 거야. 너는 참 똑똑한 아이였지. 형편이 넉넉지 않아서 형제 중 혼자서 학교에 다닐 수 있었는데 그 때문에 호르헤 오빠는 몹시 속상해 했지만 동생 앞에서는 의연하게 굴 줄 아는 멋진 사나이였지.

너의 생일날 치러진 성인식은 네게 축복된 날이어야 마땅했단다. 하지만 그날의 축제는 군인들의 출연으로 완전히 망쳐지고 말았어. 군인들은 너를 모욕했고, 거기에 말대꾸를 했다는 이유로 호르헤 오빠를 잡아가고 말았던 거야. 식구들 중에서 가장 게으르던 열세 살 레스테르마저도 분노에 떨며 반군에 들어가겠다고 말을 했지. 반군은 너희 인디오의 권리를 위해 싸운다고 생각했으니까.

오빠가 잡혀간 뒤에도 가브리엘라 너는 학교를 그만두지 않았어. 너는 두 달 전부터 마누엘 선생님의 조교가 되어서 어린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책임이 막중했지. 여러 날이 지났지만 오빠를 찾지는 못했어. 마을에는 전쟁이 일어날 거란 소문이 파다했고 분위기는 점점 험악해져 갔어. 12월이 되자 군인들이 나타나서 마을에서 떠나라고 요구하기까지 했지. 이 땅이 너희 땅이라는 권리증을 제시하라면서 말이야. 너의 아버지는 조상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저 왔다가 가는 방문객일 뿐이라고 설명했지만 처음부터 인디오들을 몰아내려고 작정을 한 군인들이 그 지혜로운 말을 받아들일 리가 없었어. 30일의 유예 기간을 주었고, 너희 마을 사람들은 모두 똘똘 뭉쳐서 그 땅을 떠나지 않기로 결의를 했지. 군인들은 반군이 나타났을 때 알려주는 조건으로 그곳에 남으라고 했어. 군인들은 젊은이들을 잡아다가 강제로 입대시키곤 했고 파다한 소문과 불신이 마을을 더 흉흉하게 만들었어. 그리고 그 와중에 네 어머니는 병에 걸려 돌아가시고 말았지.

엄마가 돌아가시고 1년이 채 되지도 않은 때에 전쟁 소식이 들려왔어. 너희 마을 사람들은 모두 관심도 없어 하는데 군인들은 반군들이 공산주의자라며, 반군을 돕는 사람도 공산주의자라며 너희를 자꾸 몰아붙이고 있었어. 마침내 군인들은 야외 수업 중이던 마누엘 선생님을 어린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때려죽이기까지 했지. 너는 아이들의 손을 꼭 잡고 도망쳤지만 여섯 명의 아이들은 군인들의 총에 하나 둘씩 쓰러지기 시작했어. 마지막까지 네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네가 그 중 가장 큰 여자 아이였기 때문일 거야. 너를 살려두려던 게 아니라 다른 볼 일이 더 있었던 거였겠지. 네가 극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네가 나무 소녀인 까닭이었어. 숲으로 도망친 네가 나무 꼭대기로 올라가 숨은 것을 군인들은 발견하지 못했던 거야.

너는 살아남았지만 긴장과 초조로 범벅된 시간을 살아야 했어. 아빠를 제외하곤 집에서 네가 가장 큰 어른이 되고 말았으니까. 너는 하루 종일 동생들을 돌봐야 했어. 막내 알리시아는 너를 엄마라 부르며 따랐지만 너는 그것을 굳이 수정해주지 않았어. 모든 아이들에게는 엄마가 필요한 법이었으니까. 너는 아빠가 거두어들인 옥수수와 커피를 읍내 장에 가져가서 팔곤 했어. 동이 트기 두 시간 전에 일어나 세 시간 동안이나 걸어야 도착할 수 있었던 시장에서 커피를 판돈으로 생필품을 사왔지. 고되었어도 커피를 판 날은 견딜 만 했어. 커피를 팔지 못하고 다시 들고 돌아오는 길은 짐이 더 무거워서 발걸음도 천근만근이었기 때문이야.

날이 갈수록 마을 전체가 불에 타고 마을 사람들이 학살당하는 끔찍한 소문이 번졌지만 정부군과 반군은 서로 상대 짓이라고 발뺌을 하고 있었어. 하지만 너는 그렇게 잔인한 이들은 군인일 거라고 믿고 있었지. 너의 두 눈으로 그들의 잔인함을 똑똑히 목격했으니까 말이야.

그날은 토요일이었어. 너는 장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너희 마을이 불타오르는 것을 목격하고 말았지. 너는 열심히 뛰었어. 곳곳에 시체가 쓰러져 있는 것이 보였어. 네가 아는 많은 사람들이 이미 죽은 사람이 되어 너를 맞이했지. 네 가족들도 무사하지 못했어. 아빠와 어린 동생들도 모두 총에 맞고 말았어. 너는 공포와 충격으로 넋이 나갔지만 피범벅이 된 손으로 얕은 무덤을 팠지. 사랑하는 가족들을 엄마의 재를 묻은 신성한 땅에 묻어야 했기 때문이야. 폐허 속에서 네가 건질 수 있었던 유일한 것은 엄마의 유품인 빗 하나였어. 소중한 빗을 품안에 갈무리한 채 너는 서둘러 그 자리를 떠야 했어. 또 다른 보병 정찰대가 지나가기라도 한다면 큰일이었으니 말이야. 너는 멕시코 국경을 향해 걷기로 결심했어. 기억 말고는 아무것도 짊어지지 않았지만 그것은 네가 장에 지고 간 어떤 짐보다도 더 무겁게 네 마음을 짓눌렀지. 너의 등 뒤에는 죽음의 재가 깔려 있었고, 네 앞길에는 부연 구름이 뒤덮여 있었어. 그토록 위험한 나라에 집도 미래도 없이 홀로 남은 어린 여자 아이, 그게 너를 설명하는 가장 객관적인 단어였던 거야.

하늘도 무심하지 않으셨는지 숲에서 너의 동생 알리시아와 안토니오를 만날 수 있었어. 하지만 안토니오는 이미 깊은 총상을 입은 터였고, 도망치는 과정에서 끝내 숨을 거두고 말았어. 이제 네 곁에 남은 유일한 혈육은 충격으로 말을 잃은 어린 알리시아 뿐이었던 거야. 온통 망가진 발을 억지로 끌며 북으로, 북으로 향하기만 했어. 네가 선택할 수 있는 다른 길은 보이지 않았던 거야. 그리고 그 여정에서 해산의 순간을 맞닥뜨린 산모를 만나고 말았지. 한 번도 아이 낳는 것을 본 적도 없는 네가 갓 태어난 아이의 탯줄을 끊고 아이를 거두고 말았지. 군인들이 오고 있었고 너는 산모를 남겨둔 채 서둘러 그 자리를 뜨고 말았어. 신의 가호가 있기를 원했지만, 아마도 그 산모는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었을 거야. 네가 아는 온 세상이 전쟁으로 물들어, 네 곁의 소중한 이들 대부분이 떠나간 그 시점에서도 새로운 생명은 그렇게 여지없이 태어나다니,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지.

침착하고 현명한 가브리엘라. 너는 아기에게 먹일 염소젖을 구하기 위해 장으로 달려갔어. 네가 알고 있는 에스파냐 어도 통하지 않고, 너의 부족어 키체 어도 통하지 않는 상황에서도 너는 간절한 몸짓과 눈빛으로 염소젖을 구해내고 말았어. 브라보 가브리엘라! 하지만 그 안도의 순간에 가장 극적인 비극이 닥치고 말았던 거야. 군인들이 장터에서 사람들을 학살하기 시작했거든. 너는 본능처럼 나무 위로 올라갔고 그 위에서 꼬박 이틀 동안 무수한 사람들이 고문을 당하고 강간을 당하고 학살을 당하는 모든 광경을 목격하고 말았어. 그게 네 영혼을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상처를 입히고 말았지. 너 혼자 살아남았다는 사실은 너를 죄책감으로 덮고 말았지. 그때 너는 결심했던 거야. 두 번 다시 나무에 올라가지 않겠다고. 네게 구원이 되어주던 나무가 너를 다시 죄책감에 싸이게 만드는 대상이 되어버리다니, 참으로 서럽고 비참한 일이 아닐 수 없어.

네가 표정을 잃어버린 것은 바로 그때였어. 알리시아가 아가를 데리고 기다리고 있던 장소에 가보았지만 알리시아는 거기에 없었지. 그 아이들이 죽었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래서 찾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지만 너는 더 이상 받을 상처도 없을 만큼 충분히 망가져 있었어. 갈증과 굶주림, 그리고 피곤에 절어서 국경을 향해 걷던 너는 철저히 무심해지고 말았지. 도움을 구하는 이들에게 힘을 실어줄 수 있을 때에도 너는 외면했어. 네가 충분히 올라갈 수 있는 벚나무의 버찌를 따달라는 노인들의 요구도 거절했고, 네가 저장해둔 음식을 향해 구걸의 손을 내밀기라도 하면 매섭게 거절하는 법도 익히고 말았지. 네가 나빴던 것은 아니야. 전쟁은 사람의 영혼을 그토록 메마르게 하고 몸과 마음을 모두 파괴해 버리는 힘을 지녔으니까. 그럼에도 지켜보면서 참 아팠단다. 가엾은 가브리엘라...

겨우 국경을 넘어 난민 수용소에 도착한 뒤에도 희망은 여전히 멀기만 했어. 햇볕 한줌과 한 모금의 비를 피할 한 뼘의 공간도 없었고, 물 한 방울 빵 한조각도 구하기 힘들었던 그곳 난민 수용소는 지옥을 방불케 했거든. 구호품을 실은 트럭이 나타나면 몸싸움도 불사해야 했어. 네가 밀친 노인 두 명과 어린 남자 아이를 보는 순간 너는 수치심에 몸 둘 바를 몰라 했지. 너의 부모님이 너의 그 모습을 보기라도 했다면 몹시 슬퍼하셨을 테니까. 결국 너는 너보다 더 방수막을 필요로 하는 할머니 두 분께 천막을 양보했고, 그 분들은 너와 함께 지내기를 원하셨지. 그렇게 세 사람이 한 공간에서 지내게 되었던 거야. 너는 기억이 너를 자극하지 않도록, 미래에 대한 불안이 너를 잠식하지 않도록 오로지 식량을 구하는 일에만 전념했어. 그 와중에 할머니 한 분이 돌아가셨고, 또 얼마의 시간이 흘러 너는 극적으로 알리시아를 만날 수가 있었지. 네가 떠나갔던 그 장터 근처 숲에서 마리아 아줌마께 구조된 알리시아와 아기 모두 만날 수 있었던 거야. 함께 지내던 카르멘 할머니는 갑자기 군식구가 셋이나 늘어나자 반사적으로 인상을 찡그리셨지. 네가 이해해줬으면 해. 살아남는 일이 보통 힘겨운 일이 아님을 서로가 온 몸으로 알고 지냈던 때잖아. 마음은 그렇지 않더라도 생존을 향한 본능이 사람을 그렇게 팍팍하게 만들어버렸던 거지. 너도 경험했던 일이니 분명 이해할 수 있을 거야. 그래도 네가 조금 더 기운을 차린 것은 참 다행이었어. 네게 남은 하나의 가족, 그리고 네가 밀라그로(기적이라는 뜻의 에스파냐 어)라는 이름을 지어준 아기까지 보살피기 위해 더 열심히 살아야 했으니까.

네가 그곳 난민 수용소의 아이들을 위해서 공놀이를 제안한 것은 정말 멋진 생각이었어. 아이들이 다시 행복해지는 법을 배우기 위해선 놀 줄 알아야 한다는 네 말은 절대적으로 진리야. 요즘 대한민국의 초등학생들은 너무 바빠서 통 놀 시간이 없거든. 게다가 놀 때도 혼자서 게임을 하지 친구들과 더불어 노는 것을 잘 몰라서 여러모로 걱정이 된단다. 너는 구호 요원에게 공 구하는 것을 좀 더 신경 써달라고 재촉하기도 했지. 아이들은 오늘 행복해져야 한다고, 내일이면 늦는다고 말한 너의 애원은 내 마음까지도 뭉클하게 했단다. 바로 그 말이 정답이야. 내일이 아닌 오늘, 바로 지금 행복해져야 마땅해. 우리 모두 말이야.

너의 공놀이는 아이들과 어른을 대상으로 한 학교로까지 번져 갔어. 너와 뜻을 같이 한 마리오 아저씨는 사람들이 미국에 대해 갖는 환상을 깨고 똑바로 현실을 볼 것을 요구하신 분이기도 했지. 정부군에게 무기를 제공하고, 그들을 훈련시킨 게 바로 미국 정부였거든. 칠판도 책상도 없는 교실에서 무얼 배운다는 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만, 그때 수용소의 사람들에게는 희망을 버리는 것보다 더 무섭고 힘든 일은 없었거든.

마리오 아저씨의 아버지와 형은 라티노 농장에서 면화 따는 일을 했었는데 농장주가 한마디 경고도 없이 비행기로 밭에 농약을 뿌리고 말았대. 농약을 온통 뒤집어 쓴 형님은 고통에 시달리다가 끝내 목숨을 잃고 말았지. 마리오 아저씨는 그렇게 말하셨어. 농장주가 자기 개들한테라면 그렇게 농약을 뿌렸겠냐고... 나는 문득 남의 나라 산하에 고엽제를 잔뜩 뿌리고 또 묻은 미군의 행태를 떠올렸지. 그렇게 자기만 소중하고 다른 사람의 생명은 먼지만도 못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다는 사실에 참을 수 없을 만큼 화가 나. 흥분해서 미안. 너의 이야기를 좀 더 해야지.

가브리엘라. 너는 용감한 아이였지만 아직은 보호가 필요한 어린 소녀였어. 마리오가 반군에 지원하겠다며 떠났을 때 너도 알리시아의 손을 잡고 그곳 수용소를 벗어나려고 했어. 너에게서 힘을 얻고 희망을 찾아가던 사람들 따위는 모두 버리고 갈 수 있을 것 같았겠지. 하지만 난 네가 가지 못할 거라고 짐작했어. 너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용감하고 아름다운 마음씨를 지닌 아이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야.

나는 네가 너 자신과 화해할 수 있게 된 것이 진심으로 고마웠어. 그리하여서 네가 다시 나무 소녀가 될 수 있게 된 것도 축복이라고 생각해. 네가 살아남은 것이 비겁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이제라도 깨달아 주어서 정말 다행이었지. 이제 너에게는 새로운 가족들이 생겼어. 지금 네가 희망을 심고 물을 주며 열심히 키워내고 있는 그 나무가 있는 곳이 바로 너의 집이란다. 거기서 새롭게 시작하는 거야. 기억나니? 나무에 오르는 것은 하늘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는 사실을...

나무 소녀 가브리엘라, 하늘을 향해 거침없이 올라가던 용감한 소녀. 네가 태어난 아름다운 마을엔 오래도록 전쟁이 이어졌고 그 때문에 무수한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어. 너도 많은 상처를 입고 말았지. 너의 전쟁은 그것이 끝이 아니었어. 네가 살아가는 동안에 맞닥뜨릴 전쟁은 앞으로도 많이 있을 거야. 너는 여자이기 때문에 마주치는 부당함과도 싸워야 하고, 네가 인디오이기 때문에 당하는 멸시와도 싸워서 이겨야 해. 강하다는 것이 옳은 게 아님에도, 강하기 때문에 제 행동을 모두 정당화시키는 거대한 세상에 너는 작고도 작은 존재. 그렇지만 너와 같은 사람들의 작은 용기가 모여서 이 세상을 평화롭고 아름답게 만들어갈 수 있을 거야. 그 작은 불씨의 하나인 너를 끝까지 응원할게. 내가 사는 이 세상에서 또 다른 모습으로 말이야.

그러니까 나무 소녀 가브리엘라. 우리 하늘을 바라보는 것을 그만두지 말자. 더 열심히 사모하고 더 열심히 꿈을 꾸자. 네가 꿈을 이루면, 너의 꿈은 곧 다른 사람의 꿈이 되고 말 거야. 그 꿈, 우리 함께 이뤄 나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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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조 지음 / 은행나무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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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꽤 잘 나가는 극단이었지만 지금은 이렇다 할 연극을 못 세우고 시간이 흘러버린 극단 명우. 그 명우의 홍보 직원이자 극작가인 장유안은 얼마 뒤 자신의 첫 작품을 무대에 올리기로 되어 있었다. 인생의 제법 중요한 순간이었던 그때에 극단의 살림을 책임지던 실장이 사라져버렸고, 그녀는 졸지에 실장 임무까지 맡게 되지만 극단 식구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지는 못했다. 5년 동안 사귀어 온 남자 친구는 이렇다 할 직업은 갖지 않은 채 아르바이트로 연명 중이었고, 두 사람은 만나서 밥 먹고 모텔을 찾는 순서만 되풀이하며 서로의 감정을 소모시키고 있었다.  

한편 극단 일을 하면서 알게 된 동료 작가는 알고 보니 고등학교 동창이었다. 그때도 글을 잘 써서 학생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누렸던 그 친구 앞에서 십여 년이 지났건만 주인공 유안은 여전히 열패감을 느낀다. 

위장이혼을 했던 아빠는 따로 살림을 차리고 아이까지 생겼다며 영영 엄마와 헤어져버렸고, 언니 재영은 동호회에서 만난 싱글맘과 전세금을 반씩 부담하며 동거 중이었다. 엄마는 재영을 다시 집으로 불러들이려고 무지 애를 섰지만 재영의 결심은 확고했고 그들은 자주 충돌했다. 그리고 그때마다 서로를 원망하며 마음에 생채기를 내기에 바빴다. 엄마는 재영 때문에 아빠가 집을 나간 것이라고 하고, 또 그런 그들을 보며 유안은 엄마 때문에 아빠와 언니가 모두 떠난 거라고 탓을 한다.  

등장인물들은 대체로 자기 생각만 하고 있었다. 누군들 자기가 가장 중요하고 먼저 생각하는 대상이 아니겠냐만은, 이들은 자신이 그러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상대가 지나치다고만 생각한다. 거기에 대해서 스스로 답을 찾을 때도 있지만 머리로 아는 것이 가슴으로 체득되는 것은 아니다.  

왜 항상 우리는 상대보다 더 많은 걸 주고 더 많은 걸 실망하게 되는 것일까. 나의 오랜 친구는 내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네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너이기 때문에 네가 실망스러운 거라고. - 200쪽 

내가 열을 주었기 때문에 상대도 똑같이 열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 관계는 피곤해질 수밖에 없다. 엄마는 할머니에게 무척 냉랭하게 굴다가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이제까지의 평정심을 무너뜨리고 만다. 배우인 엄마는 아이의 학교 운동회에 갈 때도 완벽한 메이크업을 고수하는 분이시건만 할머니가 심장 마비로 홀로 계시다가 돌아가시자 헝클어진 모습을 보이고 만다. 할머니의 유품을 정리하고 할머니의 시골 집에서 딸들과 함께 잠든 날, 엄마는 왜 그동안 할머니에게 냉랭했는지를 고백한다.  

내가 사랑받지 못해서가 아니야. 엄마는 그런 식으로 자꾸 나한테 들켰어. 그럼 털어놓든지. 그게 너무 서운한 거야. 하나뿐인 딸자식한테 친구처럼 터놓을 수도 있었잖아. 부모 노릇도 하고 싶고 자기 사랑도 지키고 싶었던 거지. - 263쪽  

할머니가 마음에 둔 사람은 할아버지가 아니었다. 출산을 하고 몸을 풀러온 딸을 위한 미역국이 아닌 그 사람을 위한 메주가 동동 띄워져 있었을 때 엄마가 느꼈을 노여움은 충분히 짐작 간다. 고백한 대로 감정을 들키면서 자꾸 아닌 척하는 게 서운했을 것 같다. 그런데 거기에 하나가 더 있지 않았을까? 엄마의 1순위, 엄마의 가장 큰 사랑의 대상이 자신이 아니라는 것이 용납되지 않았던 것 말이다. 더구나 외동딸이었으니 그 사랑을 독점하는 것은 자신의 몫이라고 생각했을 것 같다. 부모 노릇도 하고 싶고 자기 사랑도 지키고 싶었을 거라는 추측도 틀리지 않겠지만, 자식에게 남편이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있다는 걸 쉽게 꺼낼 수 있는 부모가 얼마나 될까? 할머니도 그 사람을 사랑하는 자신을 사랑했고, 엄마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할머니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두 사람도 모두 '나를 더 생각한' 사람들이다. 

언니 재영은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딸이다.  

아버지는 내가 원하는 것은 말없이 다 사주었지만 재영에게는 왜 그것이 필요한지부터 묻곤 했다. 재영은 아버지에게 자세히 설명하고 아버지는 재영에게 상의하여 신중하게 골랐다. -248쪽 

재영은 자신이 그렇게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했다는 것을 자각하지 못했다. 그래서 무심하게 행동했고 그것은 아빠를 서운하게 만들었고, 그 모습을 지켜보는 유안은 집 안에서도 또 열패감을 느껴야 했다. 언니를 '언니'라고 부르지 않고 속으로 생각할 때는 늘 '재영'이라고 이름을 부른 것도 그런 감정이 반영된 것은 아닐까. 우연히 만난 아빠에게서 빨래 냄새를 맡고 그것으로 현재의 아빠가 자신들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확인을 하고 싶었던 재영은 아빠의 냄새가 안정된 새 가정의 냄새로 두르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진짜 이별을 해야 했다. 그리고 그 밤, 유안은 오랫동안 방치해뒀던 자신의 블로그에 아빠에 관한 글을 쓴다. 

전체 공개, 스크랩 허용, 검색 허용 버튼에 체크하고 글쓰기 저장 버튼을 클릭한다. 아버지를 비공개 카테고리에 넣지 않은 건 아버지를 위해서였다. 아버지는 바깥, 전체 공개 카테고리에 있는 게 더 나았다. 아버지는 내 블로그에서 깨어나 모락모락 숨을 토해 낸다. new 표시가 달린 아버지 글은 24시간 후에 new를 떼어 버리고 고요히 침잠할 것이다. 내가 컴퓨터를 부팅할 때마다 야금야금 전기를 먹으며 살아나는 내 아버지. 아. 따뜻한 나의 아버지. 아버지가 있었던 기억만으로도 나는 살아갈 수 있을 것 같다.
참 이상하다. 몸이 사라진 곳에서 마음을 기억하며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 -252쪽

나는 이 글을 보면서도 유안이 아버지를 위해서 썼다고 밝혔지만, 그것이 자신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위로가 필요한 것은 그녀였다. 그리고 이렇게 씀으로써 정리가 되어 그녀가 평안을 찾은 것은 퍽 다행이라고 여긴다. 

등장하는 캐릭터 중 가장 화를 돋우는 인물은 승원이었다. 그가 변변한 직장을 구하지 못한 것은 속상한 일이지만, 구하려고 애도 쓰지 않은 것은 더 속상한 일이었다. 공장을 운영하시는 아버지가 계시지만 그 곁을 도우려고 하지도 않았다는 것도 마찬가지로 속상하다. 제3자가 곁에서 본다면 유안이 왜 그 관계를 지속하는지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다. 현실도 답이 없지만 헤어지는 것이 두려워서 오늘을 견디며 살아온 연인에게 어떤 미래가 있을까.   

“어떻게 살래? 이 말이 제일 싫다. 지금 내가 이렇게 살고 있는 건 어떻게 살 거냐는 걱정을 끼치고 있다는 거잖아.” -292쪽 

연극계를 떠나 카페를 차린 한 사장이 제일 듣기 싫은 말이 뭐냐는 질문에 답한 것이다. 나는 저 답이 가슴에 콕 박혔다. 오랜만에 전화 통화하는 사람이 묻는 어떻게 지내냐는 질문을 내가 가장 싫어하는 것과 맥락이 통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승원의 열패감도 이해가 가고, 그가 유안에게 이별을 고할 수밖에 없는 마음가짐도 공감이 간다. 하지만 방법이 나빴다. 비겁했고 저열했다. 그래서 그 동안의 찌질함을 보태어 더 화가 났다. 유안이 다시 그에게로 가서 주저앉고 같은 패턴을 반복할까 봐 조마조마했다. 

다행히 유안은 승원보다는 건강했고 용감했다. 고등학교 시절 자신의 시를 저평가한 친구의 말을 듣게 된 후 다시 시를 쓸 수 없었던 그녀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이렇게 극작가로 일어선 것이 고마웠다. 그것도 배고플 게 뻔한 연극 세계에서 살아남았으니 더 대단하다.  

솔직히 작품은 중간까지는 몰입이 쉽지 않았다. 시각적으로 가장 임팩트가 컸을 레스토랑의 정전 씬은 극적인 상황에 비해 너무 싱겁게 지나갔고, 고교 때 단짝 친구 정민의 자살 소식을 전하는 장면도 무덤덤하기만 했다. 건조한 것도 아니고 무심한 것도 아닌, 뭔가 밍숭맹숭하고 양념이 덜 된 느낌으로 진행되던 소설은 중반을 넘어서면서 긴장감과 궁금증을 같이 자아냈다. 승원이 유안을 밀어내고 난 다음부터일 것이다.  

택시는 쉬이 오지 않았다. 승원의 연락이 오지 않는 휴대전화 액정 화면은 막막하고 맹랑했다. 이토록 작은 세상이 나의 전부를 거머쥐고 있었다. – 224쪽  

휴대전화의 작은 액정 화면에 매달려 그것이 그녀의 온 세상을 지배했던 것처럼, 그 순간에는 독자도 작은 책의 두쪽 화면에 온 정신을 집중하고서 몰입했다. 클라이막스가 늦게 찾아오긴 했지만, 꾸준히 언덕을 향해 올라갔고, 무리수를 두지 않고 차분히 내려오며 작품은 완성되었다.  

어제까지 내 삶의 중심이 나였던 인물이, 오늘 깨달음을 얻었다고 해서 내일부터는 나를 향한 사랑을 타자로 옮기는 건 쉽지 않을 것이다. 그게 바람직하다고도 말하지 못하겠다. 그래도 이제는 나를 사랑하는, 나만 생각하던 나를 조금은 벗어나 그 생각에, 그 마음에, 그 행동반경에 또 다른 사람이 깃들 여지가 생겼다면 그 사람의 삶은 보다 성숙해질 수 있을 것이다. 원하던 사랑 곁에 머물 용기를 얻고, 새롭게 다가서는 사랑을 향해서도 좀 더 기꺼이 문을 열 수 있을 것이다. 나만 생각하던 내가, 이제는 나도 생각하는 나로 바뀔 때가 되었다. 그런 나를 응원하는 나를 생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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