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지기 때문에 놀러 왔지 - 조선의 문장가 이옥과 김려 이야기, 제1회 창비청소년도서상 수상작 창비청소년문고 1
설흔 지음 / 창비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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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흔 작가의 '소년, 아란타로 가다'를 재밌게 읽었다. 한 소년의 세상 밖으로 뛰쳐나가 성장해가는 모습이 역동적으로 다가왔었다. 이 작품의 주인공 김려는 소년이 아닌 인생을 살만치 산 인물이지만 그의 깨달음과 성찰 역시 성장의 모습을 닮아 있다. 이 책 역시 성장 소설이라고 부르고 싶은 이유이기도 하다.  

정조의 문체반정에 꼭 따라오는 이름이 '이옥'이다. 정조에게 제대로 걸려서 인생이 확 틀어져버린 비운의 사나이기도 하지만, 임금을 상대로 끝까지 고집을 꺾지 않은 뚝심의 사나이이기도 했다. 물론, 임금의 명을 따르는 시늉은 했었지만.  

정조는 패관소품을 싫어했다. 가볍고 쉽고 새로운 형태의 글쓰기를 억제하고 옛문장들을 본받아 순정한 글을 쓰기를 바랐다. 문체에 대한 그의 집착은 병적이었고, 그 바람에 이옥과 김려 같은 희생자가 나오기도 했다. 이 책은 이옥과 김려의 글을 바탕으로 그 사이사이에 이야기를 엮어놓은 글이다. 그들의 인생 여정이 기본 골격이긴 하지만 사이사이에는 작가의 상상력이 가득 들어 있다. 옛 글을 읽고 있지만 옛스럽지 않고, 지나치게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재미난 글이었다.  

시작은 고을 현감으로 재직 중인 김려에게 이옥의 아들이 찾아오면서 시작한다. 이옥의 아들 우태는 버르장머리도 없었고 예의도 몰랐다. 아버지의 글보따리를 내려놓으며 값을 치르라고 덤비는 막무가내의 우태 덕분에 김려는 늘 마음 한구석에 자리하고 있지만 쉽사리 꺼내어 불러들이지 못한 이옥의 이름을 격하게 떠올린다. 더불어 고통스러웠던 유배시절의 기억도 함께. 

이옥과 더불어 사귀며 문체 때문에 욕을 보긴 했지만 유배 결정이 난 것은 강이천 때문이었다. 유언비어를 퍼뜨려 나라를 어지럽힌 그의 벗이었던 까닭에 김려 또한 죄인이 되어 머나먼 북쪽 함경도 경원으로 유배길을 떠났다. 때는 겨울이었고 가는 길목길목의 고단함과 수모는 살을 에는 바람을 더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가는 도중에 부령으로 유배지가 바뀌어서 북쪽으로 덜 가게 되었지만 부령 유배길이 쉬웠던 것은 아니다. 편안하고 따뜻했던 삶밖에 몰랐던 그가 세상의 인심과 세상 사람들의 서러움을 목격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강을 다 건넜어도 죽음의 그림자는 떨어지지 않았다. 나를 맞이한 것은 얼어 죽은 시체였다. 채 자라지도 못한 소년 하나가 몸을 웅크린 채 죽어 있었다. 진저리를 쳤다. 죽은 것은 소년 하나뿐이 아니었다. 얼어 죽은 시체는 곳곳에 널려 있었다. 검은 새가 아쉬운 마음에 입을 쩝쩝거리며 하늘로 날아갔다. 무심한 세상이었다. 내가 어깨에 힘을 주고 글을 쓸 때 세상은 사람을 죽이고 있었다.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임금의 의중을 짐작하려 애쓸 때 세상은 눈과 바람으로 자신의 지배권을 확고히 다지고 있었다. 이 거친 세상에서 글이란, 사람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김려는 무엇이며, 이옥은 또 무엇이며, 임금은 또 무엇일까. 머릿속이 하얗게 되었다. 세상이 사라지고 나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 58쪽

그렇지만 그의 깨달음은 아무래도 양반의 신분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이옥도 마찬가지였다. 문체로 인해 군역의 벌을 받게 된 그는 군역을 피하기 위해 숙제 아닌 숙제를 마치려고 무척 애를 썼지만, 그 군역이라는 것을 백성들은 모두 의무로 지고 있던 것들이었다. 물론 이런 문제점들은 그 시대를 사는 사람이 아닌 오늘을 사는 사람들이니까 쉽게 비판할 수 있는 문제다. 그랬기에 작가 역시 그 비판의 칼날을 이옥의 아들 우태의 입을 빌어 내밀었던 것이 아닐까. 

"거듭 말하지만 아버지를 비판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 한계를 지적하는 것이외다. 그러니까 아버지는 방외인이라는 말입니다. 그 글이라는 게 아름답기는 하지만 그건 현실에서 한 발 물러서서 관찰하는, 관찰자의 시선에 다름 아니다, 이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182쪽

우태의 등장은 김려에게 시련을 안겨 주었다. 지금은 고을 현감으로 큰 무리 없이 조용히 지내는 그였지만 과거 그의 행적을 꼬투리 잡아 삼키고 싶어하는 인물들은 아직도 있었다. 우태의 행보는 김려의 과거를 끄집어내는 동기가 되었고, 우태의 입을 막지 않으면 자신의 죄를 스스로 인정하게 되는 꼴이 되고 말았다. 부끄러웠지만 김려는 우태의 입을 막기 위해 매를 들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신이 우태의 '복종'만을 요구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것이 곧 과거 정조 임금이 이옥과 자신에게 요구했던 것이라는 것도 알아차린다. 더불어 임금이 느꼈던 노여움까지도. 

그 밤, 의원이 다녀간 뒤에도 자리를 떠나지 못했던 김려는 이미 고인이 된 이옥과 마주하게 된다. 초주검 상태가 되어 앓아 누워있는 아들을 앞에 두고 이옥은 부령 땅에서의 김려의 이야기를 듣고자 한다. 소설의 진행상 나와야 하는 글을 삽입하기 위한 설정이지만 다소 무리가 보였다. 이옥은 김려의 말문을 트이게 하기 위해서 자신이 썼던 글을 먼저 소개한다.  

21세기 독자의 눈으로 본다면 순수하게 흠뻑 취하기는 무리가 있지만 확실히 이옥의 글들은 생동감이 있었다. 격식을 따지지 않았고 부러 어려운 말도 쓰지 않았고, 조선의 평범한 백성들과 그들의 삶이 주인공으로 등장했다. 그 자신이 그 속에 풍덩 빠지면서 살지는 못했지만 순수한 관찰자로서의 역할은 충실히 해낸 것이다.  

그 밤에 이옥과 더불어 김려가 나눈 이야기들도 몹시 드라마틱했다. 부령에서 만난 사람들, 그의 이웃이 되어준 사람들, 그의 친구가 되어준 사람들, 그에게 위로가 되어준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그리고, 이제껏 김려가 잊고 살아온 사람들이었다. 이제 다시 지배자의 신분이 된 남자의 변해버린 마음을 더 부각시켜버리는 옛 이야기들. 김려는 부끄럽기만 했다. 

깨어난 우태와의 대화 속에서 김려는 다시 한 번 자신이 몰랐던 이옥의 자신에 대한 우정에 부끄러움을 느낀다. 친구가 고맙고 그리워졌다. 그리고 자신이 우태에 대해 많은 것을 오해했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많이 늦었지만, 이제 자신이 가야 할 길, 해야 할 일에 대한 지침이 세워진 김려는 단단해진다. 어두웠던 표정이 밝아지고 글에 기운이 돋는다. 그는 성장했다. 그리고 더 멋져졌다.  

작품의 말미에 이옥이 남긴 근사한 글이 소개된다. 멋진 글이라고 제목을 붙여도 좋을 만큼 온통 멋진 것들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진다. 조금만 옮겨보자. 

아침에도 멋지고 저녁에도 역시 멋지다. 날이 맑아도 멋지고 날이 흐려도 멋지다. 산도 멋지고 물도 멋지다.(...)요컨대 그윽해서 멋진 것도 있고, 상쾌하여 멋진 것도 있고, 활달하여 멋진 것도 있고, 아슬아슬하여 멋진 것도 있고, 담박하여 멋진 것도 있고, 알록달록하여 멋진 것도 있다. 시끌시끌하여 멋진 것도 있고, 적막하여 멋진 것도 있다. 어디를 가든 멋지지 않은 것이 없고, 어디를 함께하여도 멋지지 않은 것이 없다. 멋진 것이 이렇게도 많아라! 
이 선생은 말한다. "멋지기 때문에 놀러 왔지. 이렇게 멋진 것이 없었다면 이렇게 와 보지도 않았을 게야." -198-199쪽 

가을날 북한산을 실컷 유람하고 흥에 겨워 쓴 글이지만, 공간과 시간을 못박아두지 않더라도 멋지다고 감탄할 것들이 우리에게 많이 있다.  시름일랑 잊어버리고 멋지기 때문에 놀러왔다고 경쾌하게 외쳐보는 일, 그 자체로도 얼마나 멋진 일인가! 

오늘날의 우리보다 조선의 양반들에게 글은 삶 그 자체였다. 이 작품에 해설을 쓰신 강명관 교수의 얘기를 들어보자. 

조선 시대로 더 거슬러 올라간다면 문학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위엄을 가졌다. 수준의 차이는 있지만 사회의 지배층인 양반은 모두 문인이었고, 그들의 일상은 문학으로 이루어졌다. 문학 작품은 인간의 일상과 교직되어 있었으니, 친구가 찾아와서, 누가 죽어서, 술을 마시며, 한가해서, 흰머리가 나서 시를 지었다. 꽃을 보고, 달을 보고 시를 지었다. 이뿐인가? 집을 지으면 기문을 썼고, 친구가 책을 쓰면 서문을 썼다. 누가 죽으면 행장을 짓고, 제문을 짓고, 비문을 쓰고, 묘지를 썼다. 문학은 삶과 분리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기에 글쓰기란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금전적인 대가가 주어지지 않지만 문인으로 명성을 날린다는 것은 생을 걸어 볼 만한 일이었다. – 201쪽 

백성들의 고단한 삶과 대비해서 핀잔 주지 말고, 있는 그대로 그네들의 삶을 이해해보려고 한다면 자신을 드러내는 글쓰기에 소신을 굽히지 않았던 인물에 대한 이야기는 몹시 매력적이다. 멋지기까지 하다. 멋지니까 독자는 읽을 수밖에. 

표지의 글자가 무척 재밌는 디자인을 하고 있다. 표지까지는 좋았는데 책 속 그림은 내 생각에 좀 유치했다. 띠지의 색이 표지의 색과 잘 어울리는데 띠지를 벗기면 공간이 많이 비어보여서 다소 아쉽다. 띠지 없이 표지 자체로 완성된 그림이 나는 더 좋다.   

아쉬운 부분이 더 있다.  40쪽에 -이옥에게 덧씌워졌던 그 모든 죄가 풀린 것은 경신년(1800) 2월, 어떤 이들은 성군이라고 했으나 그에게는 걸주보다 모질기만 했을 임금이 죽고 아직 어린 새 임금이 보위에 오른 뒤였다.- 

정조가 죽은 것은 1800년 6월 28일이었으니까 날짜 선정에 문제가 있다.  

82쪽에는 서학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해 놓았다. -조선 시대에 '천주교'를 이르던 말. 특히 천도교를 동학이라 이르던 것에 상대하여 쓰였다-라고 적고 있는데, 서학이 천주교를 이르던 말은 맞지만, 서학에 대비해서 동학이라 이름을 붙인 것이니 저렇게 설명해 놓으면 동학이 먼저 생긴 종교처럼 보인다는 게 문제이고, '천도교'란 이름은 그보다 한참 뒤에 동학의 이름이 바뀌는 것이니 역시 설명이 적당하지 않다. 청소년 문고답게 친절한 설명을 붙이려던 것이었겠지만 지나치게 친절해서 문제였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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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11-05-16 1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읽고 있는데 그냥 제 일상과 겹쳐서 한문장 한구절 읽고는 생각에 빠지곤 하네요

마노아 2011-05-16 21:32   좋아요 0 | URL
요즘 하늘바람님은 좀 더 밝고 신나고, 마구마구 웃을 수 있는 책들을 보셨으면 해요. 그렇게라도 웃으면서 지내도록 해요, 우리!

마녀고양이 2011-05-18 1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노아님 서재에서도 이 책을 보네요.
인용글 정말 좋은데요! 제목이 끄덕여지네요. '멋지기 때문에 놀러왔지!', 그럼요.
오늘이나 모레 주문할 때, 이 책 꼬옥 사야지 하고 다시 한번 다짐하고 갑니다~

마노아 2011-05-18 11:17   좋아요 0 | URL
설흔 작가님의 글은 꽤 유쾌한 것 같아요. 집에 다른 책도 더 있는데 기대가 되고 있어요.
멋지기 때문에 놀러온 이 세상에서 우리 멋지게 놀아요.^^
 
코끼리에게 물을 (양장)
새러 그루언 지음, 김정아 옮김 / 도서출판두드림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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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오랜만에 속이 충만해지는 소설을 만났다. 영화 개봉 소식을 듣고 원작을 미리 읽고 싶어서 책을 구입했지만 영화보기 전 날까지도 한 장을 못 읽었다. 밤 12시가 넘어서 읽기 시작했고, 영화 시작 전에 2/3 정도를 읽었을 것이다. 그러니 결말은 영화를 통해서 미리 만났다. 일견 궁금증을 빨리 해소해서 속이 시원했고, 차분히 제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서 아쉽기도 하다.  

작품은 두 개의 시간대를 동시에 진행시킨다. 주인공 제이콥이 스물 세 살에 서커스단을 처음 만났던 1931년의 시간과, 그 시간을 양로원에서 회상하는 아흔 세 살의 나이-그러니까 아마도 2001년-가 그 축이다.  스물 셋의 제이콥은 코널 대학 수의학과에 재학 중이었으며 졸업 시험만을 남겨둔 상태였다. 애석하게도 부모님이 불시에 교통사고로 돌아가셨고, 그에게는 남겨진 재산이 하나도 없었다. 아버지가 돈을 예금한 은행은 파산했고(때는 경제공황 기간이다), 그의 학비를 대기 위해서 대출을 받은 은행에는 집이 저당잡혀 있다. 아버지는 가난한 이들에게 돈 대신 닭이나 달걀을 진료비로 받던 덕망 높은 수의사이셨지만 이제 그는 빈털털이가 된 채 정처 없이 길을 떠나고 만다. 그리고 운명처럼 무임승차한 기차가 그의 인생을 완전히 전환시켜 버린 '벤지니 형제 지상 최대의 서커스'였다.

노인이 된 제이콥은 자신의 나이가 아흔인지 아흔 셋인지도 확실히 구분이 가지 않고 어제와 오늘의 일도 잘 떠오르지 않고 사람의 이름을 기억하는 것도 너무 어렵다. 양로원에서의 그는 괴팍한 노인네이고 심술 맞기도 하고 꼬장꼬장한 영감님 그 자체다. 어느 날 그를 격분시킨 것은 같은 양로원에 있는 어느 노인의 과장된 허풍 때문이었다. 자신이 서커스에서 코끼리에게 물을 줬다고 말을 하는 노인에게 제이콥은 거짓말쟁이라고 역정을 냈다. 그가 서커스단에서 7년을 일했고, 꽤 오랜 시간 코끼리와 함께 생활해 왔다는 것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은 제이콥을 예의도 모르는 정신 나간 노인으로 여길 뿐이다. 억울한 마음에 항변해 보지만 오히려 우울증 환자로 지목되고 기운이 쭉 빠지는 약을 처방받기까지 한다. 이 양로원에서 제이콥의 마음을 만져주는 이는 간호사 로즈메리 뿐이다. 지혜로운 그녀의 목소리를 들어보자. 

"나이를 먹다 보면-얀콥스키 씨 이야기가 아니라 일반적인 사람들 얘기에요. 물론 안 그런 사람도 있지요. 아무튼, 나이를 먹다 보면, 오랫동안 생각해온 것, 오랫동안 소망해온 것이 진짜처럼 느껴질 때가 있잖아요. 그러면 그것을 진짜라고 믿게 되고, 그러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그것이 정말로 인생의 일부가 되잖아요. 그런데, 남들이 거짓말 말라고 다그치면-나는 상처를 받겠지요.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다 잊어버려도, 누가 나더러 거짓말쟁이라고 하면 절대 잊을 수가 없겠지요. 얀콥스키 씨의 말대로 맥긴티 씨의 말이 사실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맥긴티 씨가 왜 화가 나셨는지 이해할 수 있으시겠지요?" – 298쪽  

지금은 성질 팍팍한 노인이 되었지만 젊었을 적의 제이콥은 상냥하고 따뜻한 사람이었다. 그를 미워하던 월터와 친구가 되는 과정, 건드렸다 하면 누구든 가차 없이 응징하는 오거스트 앞에서도 코끼리 로지를 위해서 저항을 했더랬다. 습관처럼 유태인을 욕하는 것에 발끈했고, 전혀 상관없는 여성일지라도 누군가 치마 속을 들여다보는 파렴치한 짓을 하는 것을 보면 다급한 제 상황에도 불구하고 저지하려고 나서는 이였다. 물론, 그런 상냥함과 친절함, 온정 때문에 그는 한꺼번에 코끼리와 침팬지와 강아지와 열 한 필의 말과 임신한 아내를 동시에 책임져야 하는 가장의 자리에 놓이기도 하지만. 

"그런 유태인 새끼는 쓸만한 구석이 하나도 없다고."
"입 조심해!" 내가 소리친다.
월터가 말을 멈추고 나를 쳐다본다. "대체 왜 그래? 이봐, 너는 유태인도 아니잖아? 유태인이야? 이런,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 그냥 다들 하는 욕이잖아." 그가 말한다.
"그래. 그냥 다들 하는 욕이야." 나는 고함을 지른다. "다들 하는 욕인데, 나는 다들 하는 욕에 아주 질렸다고. 배우는 일꾼에게 욕을 하고, 일꾼은 폴란드 사람에게 욕을 하고, 폴란드 사람은 유태인에게 욕을 하고. 난쟁이는-자, 말해 봐, 월터. 그냥 유태인과 일꾼이 싫은 거야? 아니면 폴란드 사람이 싫은 거야?"
월터가 얼굴을 붉히며 바닥을 내려다본다.
"싫어하지 않아. 싫어하는 사람 없어." 잠시 후에 덧붙인다. – 355쪽 

서커스 단에서 쌓아가는 일상과 마주치는 건 사탕 봉지를 펼쳐드는 것 같은 설렘을 주었다. 서커스단 최고의 섹시녀 바바라의 쇼는 숨을 멎게 할만큼 긴장감을 주었는데 영화는 15세 관람가인지라 그런 긴장감은 모두 자동 패쓰였다. 무얼 더 바라랴. 코끼리 로지와의 만남은 기승전결이 아주 뚜렷했다. 망해버린 서커스단에서 코끼리를 구입하느라 단장은 재정을 파산 직전까지 몰아갔고, 일꾼들과 배우들에게까지 급여가 밀려버렸다. 그럼에도 코끼리는 단 한 마디도 알아듣지 못하는 바보였다. 게다가 좀 많이 먹고 좀 많이 싸나. 보통 애물단지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코끼리가 알고 보니 요물이었다. 어찌나 영리한지, 뭇 사람들을 깜짝깜짝 놀라게 하지 뭔가. 작가는 작품 속에서 사용한 여러 에피소드가 실제로 일어났었던 일이었다고 정리해 준다. 역자 역시 코끼리의 놀라운 생태에 대해서 설명을 보탠다. 

코끼리는 지상에서 가장 몸집이 큰 동물이자, 상당히 똑똑한 동물이다. 거울에 비친 자기를 알아보는 동물은 인간, 원숭이, 돌고래, 그리고 코끼리뿐이다. 가죽도 꽤 두꺼워서(2.5cm), 서커스단 동물 감독 오서스트가 갈고리로 마음껏 찍어도 생명에는 지장 없다. 한편, 코끼리는 술을 좋아하고 복수심이 강한 동물이다. 1998년 12월, 1999년 10월, 2002년 12월, 인도에서는 불만을 품은 코끼리들이 마을을 쑥대밭을 만드는 사건이 있었는데, 최소한 몇 마리의 코끼리는 술에 취한 상태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끝으로, 코끼리는 미국 공화당을 상징인데, 그것이 코끼리의 잘못은 아니다. – 553쪽 

내 기억 속의 코끼리는 아기 코끼리 점보가 큰 귀를 펄럭이며 하늘을 날아다니는 그런 모양새 뿐인데, 복수심에 불타오르는 코끼리라니, 정말 뜻밖이다. 언제고 코끼리 등에 올라타보는 체험을 해보리. 말레나처럼은 못하더라도.... 

말레나는 동물 조련을 책임지고 있는 오거스트의 아내다. 열일곱 나이에 띠동갑 오거스트에게 시집갈 때 그녀는 자신의 가족과 척을 져야 했다. 카톨릭 집안의 부모님은 유태인에게 시집가는 딸과의 연을 끊었다. 오거스트는 매력적인 남자였지만 성질머리가 조울증처럼 극과 극을 오간다. 한없이 친절하고 한없이 폭력적인 성향을 동시에 가진 남자다. 말레나가 자신에게 한 눈에 반한 상냥한 제이콥에게 마음이 끌리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도 원작 소설은 말레나가 제이콥을 사랑하게 되는 과정이 설득력 있게 그려졌지만, 영화 속에서는 많은 것이 생략되어서 누구라도 그녀를 구해줄 왕자로 보였을 것 같았다. 558쪽에 이르는 긴 내용의 소설을 두 시간짜리 영화로 옮기면서 원작의 감동을 그대로 재현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게다가 주인공 말레나 역은 아무리 생각해도 리즈 위더스푼과는 지나치게 어울리지 않는다. 하지만 영화의 가장 큰 단점은 제목을 '코끼리에게 물을'이 아니라 '워터 포 엘리펀트'라고 지은 것. 무의미한 영어 남발이다. 어차피 의미도 같건만...... 

아흔 셋의 제이콥은 지금 무척 실망한 상태다. 양로원 앞에 서커스단이 왔고, 이제 공연을 시작할 시간이건만 자신만 가족이 오지 않아서 홀로 홀에 버려져 있다. 이제까지 그런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하필 오늘, 그를 방문할 차례였던 큰아들이 약속을 까먹었고, 다른 약속을 잡는 바람에 올 수 없다는 것이다. 다른 가족들도 연락이 되지 않아서 누구도 오지 않는다. 제이콥이 얼마나 기다려온 순간인데 하필 오늘 이런 실망을 맛보게 되다니, 인생이 얄궂다. 그의 아들도 이미 71세이니, 깜박깜박 정신을 탓할 수도 없다. 다섯 아이가 번갈아 오던 것이 아니라, 제이콥에게는 이미 손자 손녀, 증손자, 증손녀, 어쩌면 고손주까지 있을지도 모르니 그 순서가 얼마나 오래 지나서야 돌아오던가. 늙는 것도 서럽고, 서커스를 보지 못하게 된 것도 서럽기만 하다. 

소설의 주인공 제이콥은 지금 아흔 살 혹은 아흔세 살의 노인이다. 자신의 나이를 정확히 알지 못하는 나이, 정확히 말해서, 올해가 몇 년도인지 정확히 알지 못하는 나이. 더 정확히 말하면 알 필요가 없는 나이. 내가 있길 기대하며 거울을 볼 때마다 웬 낯모를 노인이 나를 쳐다보고 있는 것을 보고 화들짝 놀라곤 하는 나이. 희미한 눈동자 뒤에서 아무리 열심히 나의 흔적을 찾으려 해봐도 소용없는 나이. 야단맞는 것에 익숙해지고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데 익숙해지고 남들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것에 익숙해지는 나이. 온전한 정신을 지키는 것이 가장 큰 바람이 되는 나이. "이제부터 내리막길이야. 금방 끝이 나겠지만. 그래도 끝까지 정신만은 온전하길 바랐는데. 정말 바랐는데." – 554쪽 

아흔이 넘은 나이는 정말 까마득해 보인다. 물론, 요새는 워낙 장수가 트렌드인 세상이어서-얼마 전 엄마는 친구의 모친상에 다녀오셨는데 그 분은 연세가 100세가 넘었다. -90세에도 정정하신 분들이 많지만 그 분들이 겪고 계실 외로움은 꽤 크고 무거울 것이다. 

노인 제이콥은 한탄한다. "사실 이제 내 진부한 이야기를 가지고는 그들의 관심을 끌 수 없다. 그것을 그들의 잘못으로 돌릴 수도 없다. 내가 겪은 이야기는 모두 다 유행이 지났다. 나는 스페인 독감, 자동차의 첫 등장, 일이차 세계대전, 냉전, 게릴라전, 스푸트닉을 직접 경험했고 그에 대한 경험담을 들려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래봤자 이 모든 것은 이제 오래전 이야기에 불과하다. 그러나 나한테는 오래전 이야기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 나는 이제 더이상 새로운 경험을 할 가능성이 없다. 그게 바로 늙는다는 것의 실상이다. 그게 바로 문제의 핵심이다. 나는 아직 늙고 싶지 않다." – 556쪽 

노인 제이콥은 외롭고 답답한데, 그런 그의 답답한 마음을 뚫어줄 기회가 생긴다. 휠체어를 끌어줄 누군가를 기다리지 않고, 누군가의 도움을 바라지 않고 스스로의 다리를 움직여서 도착한 서커스단, 그러고도 문전박대를 당할 뻔했지만, 아직 그곳에는 그의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이 남아 있었다. 더군다나 전설과도 같은 그의 서커스단 경험에 솔깃해 할 인물이 말이다. 어제 있었던 일은 가물가물해도 70년 전 그때의 일은 오히려 더 또렷한 법. 추억을 재생시키는 그의 모습은 여전히 청춘을 닮았다.  

소설은 두 개의 시간대를 운영하면서 그와 말레나의 사랑이 어떻게 마무리가 되어질지에 대해서 오래오래 함구한다. 끝까지 인내를 갖고 이야기를 따라가지 않으면 만나볼 수 없게끔 말이다. 다행히 그 기다림을 지루하지 않게 만들었다. 이야기는 흥미진진했고 잔잔한 여운이 오래오래 가슴에 남았다.  

작가는 다른 소설을 준비하던 과정에서 우연히 서커스 관련 자료를 보게 되었고, 하려던 이야기도 미뤄두고 서커스를 소재로 한 새 이야기 창조에 올인했다. 작품에도 이름으로 계속 언급되는 링글링 서커스 박물관이 실제로 플로리다 주 사라소타에 있어 그곳을 방문했다고 한다. 작은 땅덩어리를 가진 우리나라에서는 기차 전량을 서커스단으로 쓰는 규모의 서커스를 상상하기 어렵다. 그런 서커스단이 여러 개 있다면 더더욱.... 코끼리를 정원에 풀어놓고 키우는 수의사를 상상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니 실제로 미국에서 있었던 코끼리 공개 처형은 더더욱 다른 나라의 이야기이다. 그렇게 일상의 나로서는 만날 수 없는 이야기를 이렇게 소설을 통해서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 반갑고 고마웠다. 재미 속에 감동을 주는 이야기였다면 그 고마움은 더 커질 수밖에 없다. 태양의 서커스 바레카이는 22만원에서 6만원까지의 좌석 등급을 갖고 있는데 뭐라도 하나 보고 싶은 마음이다. 과연 6만원 좌석에서도 볼 건 다 볼 수 있는 건지 알 수 없지만... 

내 책은 초판1쇄인데 오타가 몇 개 있다. 

154쪽의 '글세'는 '글쎄'로,
505쪽의 '패트를 뒤지고'는 문맥상 '뒤집고'가 맞을 것 같다.
554쪽에는 역자가 덧붙인 글에 코끼리를 먹은 것이 소화되는 기간이 제일 긴 동물(22개월)이라고 써놓았다. 납득이 안 간다. 아무래도 임신 기간을 잘못 쓴 것 같다. (코끼리의 임신 기간은 22개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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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벌 2011-05-09 1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아 이거 보셨군요`~ 이걸 보셨네요~ 저 이걸 우연히 발견하곤 읽고나서 득템했다`~ 소릴 질렀어요. 진짜로요 ㅎㅎ 작가인 새러 그루언은 새러 그루언은~ ㅋㅋㅋㅋㅋㅋ 전 영화를 보지 않기로 했어요. 그냥 원작만.

마노아 2011-05-09 21:44   좋아요 0 | URL
아아, 정말 좋았어요. 책의 감동이 커서 영화가 가벼웠어요. 좋은 책이에요. '문학'을 가까이서 만났다는 느낌이 강해서 무척 행복했답니다.^^

순오기 2011-05-10 14: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동네 영화관에 이거 걸렸는데, 조조는 없고 15시부터 네번 상영하네요.
심야를 가고 싶지만, 새벽 세 시에 민경이가 수학여행 떠나요~ 독도로 체험학습가는데, 날씨가 도와줄런지...

마노아 2011-05-11 20:51   좋아요 0 | URL
원작에 비해 영화가 많이 아쉬워요. 영화보다 책을 추천하고 싶어요. 느낌이 아주 좋아요.
날이 궂었는데 독도 어땠을라나 몰라요. 맑은 날씨로 볼 것 다 보고 느끼고 와야 할 텐데요...
 
불량 가족 레시피 - 제1회 문학동네청소년문학상 대상 수상작 문학동네 청소년 6
손현주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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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울이가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된 계기는 도덕 수행평가 때문이었다. 자서전을 쓰라는 게 수행평가의 과제인데 가족을 중심으로 쓰라는 게 힌트였고, 대상에게는 장학금도 수여하겠다고 하셨다. 원성이 자자한 가운데 여울이는 자신의 가족을 돌아본다. 가족이라는 단어 두 글자가 벌써부터 한숨을 물어내게 할 만큼 여울이네 가족은 상태 불량이다. 오죽하면 제목이 불량 가족 레시피일까. 

여울이네 집은 보기 드물게 대가족이다. 그렇지만 권장할 만한 가족 구성은 절대 아니다. 일단 가장 큰 어른으로 집안일을 도맡아 하시는 여든 셋의 할머니가 계시고, 채권 추심 일을 하고 있는 아빠가 있다. 그리고 서로 엄마가 다른 세 아이가 있고 뇌경색에 걸려 몸이 불편한 삼촌까지 있다. 오빠와 언니의 엄마들은 호적에라도 올라 있지만 혼외 자식인 막내 여울이는 그마저도 되어 있지 않다. 나이트 댄서라는 직업만 알고 있을 뿐, 여울이는 엄마에 대한 기억이 아무 것도 없다. 전문대에 다니는 큰오빠는 다발경화증이라는 병을 앓고 있어서 기저귀를 차고 생활해야 하고, 고3인 언니는 심각한 비만인데 만날 욕을 달고 살며 여울이와 으르렁거리기 바쁘다. 언니와 반대로 빼빼 마른 여울이는 집을 떠나 가출이 아닌 '출가'를 하는 게 지상 최대의 목표다. 이런 여울이에게 유일하게 기쁨을 주는 일은 현재로서는 코스플레 뿐이다. 옷을 장만하려면 돈이 꽤 드는 관계로 아빠의 주머니를 슬쩍슬쩍 손대는 것도 여울이를 바쁘게 하는 일 중 하나다. 

이런 조건을 갖고 있는 여울이네 집이다 보니 사연이 없을 수가 없고 사건이 없을 수도 없다. 식구가 많아서 40평대 아파트에 살고 있지만 보증금 2천 만원에 월100만원의 세를 겨우겨우 내고 있는 가난한 살림. 할머니는 황천 길이 멀지 않은 시점까지 손주 손녀에 병든 아들 뒤치닥꺼리를 하느라 허리를 펼 세가 없다고, 양로원에 들어가 편히 사는 사람 팔자를 노상 부러워하고 계시다. 며느리가 들어오면 허리 좀 펼까 싶었지만, 며느리들마다 자식 새끼만 안겨주고 떠나버리니 신세 한탄이 아니 나오면 그게 더 이상할 지경이다. 불곰이라는 별명으로 통하는 아빠는 가족을 모두 채권 추심의 무임금 알바로 쓰기만 하고, 심지어 아이들은 그 일로 학교를 결석하기까지 한다. 아무 것도 제대로 돌아가는 것이 없다. 여울이가 자신의 가출을 '출가'로 명명하며 그 날만을 꿈꾸는 것이 백 번 이해가 간다. 물론, 그 가출은 여울이만 원하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가족들은 잦은 불화와 충돌로 서로를 할퀴다가 하나 둘 가출을 감행한다. 첫 스타트는 언니였다. 미술 공부를 하고 싶었던 언니는 아빠와 크게 싸우고는 손찌검을 당하자 다음 날 새벽에 짐을 싸들고 집을 나갔다. 재능이란 이 집에서 '불필요한 개인기'라고 명명한 여울이의 표현이 안타깝게도 맞아 떨어지는 순간이다.  

언니에 이어 삼촌과 큰오빠가 같은 날 집을 떠나버렸다. 모두 아빠와 싸운 뒤다. 아빠 역시 유일하게 돈 버는 사람으로서 무거운 짐을 얹고 휘청거리는 중이었다. 서로 따뜻한 대화와 격려가 오고 가는 집이 아니었고, 그런 것이 가능한 분위기도 아니었다. 어쩌면 서로의 노력이 부족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걸 기대하는 것조차 무리수인 집이 분명 있다고 여긴다. 가난하고 궁핍한 살림살이와 엄마의 부재, 복잡한 가계도와 병마까지... 그런 집에서 따뜻한 우애와 서로에 대한 헌신과 희생을 기대하는 것은 지극히 비현실적인 드라마를 원하는 것이 아닐까. 

여울이는 코스플레 행사장에서 천사 복장을 한 40대 아줌마와 알게 된다. 워낙 평균 연령대가 어린 행사장인지라 눈에 튀기도 했지만, 하필 '천사'인지라 더 부각되었을 것이다. 톨스토이를 유난히 사랑하는 이 아줌마는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의 미하일 천사를 다음 코스플레 대상으로 이미 정해 놓았다. 그 덕분에 여울이는 톨스토이의 책을 접하게 되는데, 이 열일곱 학생이 판단한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 대한 결론이 서글프다. 

미하일은 세몬과 살면서 그 질문의 답을 얻는다. 사람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은 미래를 볼 수 있는 지혜고,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것은 사랑이며, 사람은 사랑 때문에 산다는 게 그 답이었다. 미하일은 지극히 종교적인 이 세 가지 답을 깨닫고 하늘로 올라간다.
누군가 내게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답할 것이다.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는 것은 영원한 생명이며, 인간의 내부에 있는 것은 욕심이며, 결국 인간은 자기 자신의 힘으로 살아간다. 우리 가족을 생각하면서 얻은 답이다. 모두들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고 있지, 누군가의 관심과 사랑으로 살아가는 인간은 한 명도 없다. – 103쪽 

사람이 사랑 때문에 산다는 명제가 오답이 아님에도, 한참 꿈과 낭만이 많을 법한 이 여고생에게 그것이 허무하게 들릴 정도라면 그 인생은 벌써부터 얼마나 고단한 것일까. 그리고 그것은 여든 셋의 할머니에게도 마찬가지다. 자식 손주들이 뿔뿔이 흩어지면서 할머니는 다시금 자신이 들어갈 수 있는 양로원을 물색하느라 바쁘셨다. 할머니마저도 가출을 원하고 계신 것이다.  

마침내 아버지의 사업은 종말을 고했다. 집에도 압류 딱지가 붙었고, 아버지는 구속까지 되고 마신다. 아버지마저 집에서 사라지고 할머니는 부산 동생 집으로 옮기도록 결정되었다. 본의 아니게 식구들이 모두 사라지면서 여울이의 출가가 완성되게 된 것이다. 이런 극단적인 소원 성취라니, 울 수 없어서 웃어야만 할 것 같았다. 삐에로 같은 슬픈 웃음을 말이다.  

여울이는 아주 성실하고 착하거나, 또 가족에 헌신적인 그런 아이는 아니다. 또래 아이들만큼 욕심도 많고 가끔 돌출 행동도 하고 반항도 하는 평범한 아이다. 가족 구성이 원만하지도 않고 집안 살림이 편안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일찍 철들어서 안쓰런 아이도 아니었다. 허나 그런 아이도 집이 이렇게까지 해체되어 버리니 철이 들지 않을 도리가 없다. 도덕 선생님이 수업 시간에 말씀하신 것처럼 위기에 처한 여울이네 가족은 이제 진화가 필요하다고 판단한다. 

여울이는 마무리 단계에서 그런 결론을 내렸지만, 이미 가출을 감행한 다른 식구들도 똑같은 판단을 내렸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것을 규정한 언어는 달랐을지라도. 이 정도 불량 가족이라면, 애석하지만 각개격파가 필요하다. 여울이의 경우는 아직 지나치게 어리지만, 그래도 그 곁에 남기로 결심한 할머니가 계시니 완벽한 벼랑 끝은 아닌 거라고 안심해 본다. 쉽지는 않겠지만, 여울이도 언니도 자신의 꿈을 잠시 유예한 채 오늘을 충실하게 살아나갈 것이다. 삼촌 역시 언제가 될지 알 수 없지만 미국에 가 있는 아이들을 만나기 위해서 하루 24시간을 풀가동 시키며 버티고 있다. 자세히 나오지 않았지만 오빠 역시 그럴 것이고, 아빠 역시 교도소에서 인생 후반부를 열심히 설계하실 것이다.  

작품은 청소년 소설이라고 해서 무리하게 분홍빛 미래를 제시하지 않는다. 현실은 이만큼, 혹은 그보다 더 시궁창일 때도 얼마든지 많이 있으니.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울의 바닥을 치게끔 만들지도 않는다. 진화를 외치는 여울이의 기개를 믿게 만들어 주었으니... 

아쉬운 부분도 분명 있다. 최소한의 사회적 안전망이 없는 여울이와 비교되는 친구 류은이는 부모의 과도한 기대와 간섭으로 숨막혀 하지만, 그 갑갑증이 잘 묘사되지 않았고, 그렇다고 그 바람에 여울이의 서러움을 부각시키지도 못했다. 40대 나이에 코스플레에 나섰던 아줌마가 천사에 집착하는 이유가 잘 설명되지 않았고, 뭔가 사정이 있을 것 같은 분위기만 풍겼을 뿐 연결 고리가 없어서 동 떨어진 느낌을 자아냈다. 여울이의 첫사랑 세바스찬도 등장과 퇴장, 그리고 사이사이의 에피소드도 자연스럽지 않고 툭툭 끊어지는 느낌이다. 뭔가 의욕은 앞섰지만 좋은 재료로 아주 맛깔스런 음식으로 변화시키지는 못한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같은 청소년 소설은 언제나 반갑고 고맙다. 다양한 아이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통로가 되어주는 것 같아서. 아직은 아이의 목소리는 설익고, 할매의 목소리가 좀 더 자연스럽지만, 작가의 다음 작품에서는 분명 더 현실적이고 실감나는 목소리가 들릴 거라고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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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1-04-25 2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중학교 도서실에서 빌려왔어요. 리뷰는 책 읽고 나서 읽을게요~ ^^

마노아 2011-04-26 12:52   좋아요 0 | URL
위저드 베이커리가 연상되는 전개였어요. 이런 진행도 분명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루쉰P 2011-04-26 0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데 내용이 너무 우울해서...리뷰만 읽었는데도 말이죠. ^^ 그래도 책을 읽고 쓰시는 후반부의 날카로운 평가는 저에게도 많이 도움이 됐네요.

프로필 사진 바뀌셨어요. 누가 보면 마노아님 남자인 줄 알거에요. ㅋㅋㅋ

마노아 2011-04-26 12:53   좋아요 0 | URL
무척 우울한 내용이지만 그걸 발랄하게 전개시키긴 했어요. 다만 그걸 모두 버무린 힘은 좀 약했고요.^^

아아, 저 사진을 못 알아보면 너무 슬플 거예요. 울 공장장님이 이렇게 찬밥이 되어가다니...ㅜ.ㅜ

버벌 2011-04-26 0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머꼬네집에 놀러올래?" 보셨어요? 전혀 다른 내용의 소설인데. 왜 이 리뷰를 읽고 "머꼬.."가 생각나는지 모르겠네요. ㅡㅡ;;;;;; (참 이상하다) 오랫만에 서점에 나가봐야겠어요. 요즘 계속 인터넷으로만 구입을 해서. 나가서 불량가족도 찾아보고 올게요 ^^ 관심이 없었는데.리뷰보니 급 보고파져서. 리뷰 읽는 걸 중단해야 할까봐요. 락방님도 그렇고 마노아님도 그렇고. 여기저기 기웃 기웃 리뷰를 읽으면 죄다 보고 싶어져요. 이번달 카드값에 월급은 벌써 바닥을 쳤는데. 더 내려갈 곳도 없는데 어쩌란 말인지 모르겠어요. ㅠㅠ

마노아 2011-04-26 12:54   좋아요 0 | URL
머꼬네집에 놀러올래는 처음 들어본 책이에요. 제목이 무척 재밌어요.
불량 가족하니까 조반니 과레스끼의 까칠한 가족도 떠오르긴 해요. 분위기가 많이 다르긴 하지만요.
알라딘 서재질은 책지름신을 늘 동반하곤 해요.
이건 피해갈 수 없는 숙명이에요. 훌쩍...ㅜ.ㅜ

버벌 2011-04-26 21:08   좋아요 0 | URL
안 보셨으면 보세요. 처음 직장 들어왔을때니 근 9~10년 된것 같네요. 보험 설계사분이 보험 들라면서 자신의 책 빌려줬었어요. 기대안하고 읽었는데 기억에 많이 남는게... 재미있게 있었어요. ^^ 한번 찾아봐야겠네요. 오랫만에 머꼬네도. 까칠한 가족은.. ㅎㅎㅎㅎㅎ 읽다가 웃다가 했는데 지금까지 완독은 못 했어요. 한번 손을 놓으니 이어 읽기가 쉽지 않네요.

마노아 2011-04-27 00:26   좋아요 0 | URL
전 머꼬가 외국 이름인가 했더니 우리나라 작가님 책이었네요.
하핫, 다시 읽어보니 우리말인 것을요.^^ㅎㅎㅎ
추천해 주셨으니 기회 되면 읽어볼게요. 어떤 책인지 저도 궁금해졌어요.
저도 읽다가 중단된 책은 다시 읽기가 힘들더라고요. 결국은 처음부터 읽게 되고요.
그렇게 해서 중단된 저의 로마인 이야기가 떠오르네요. 5권까지 읽었는데 1권부터 다시 읽어야 기억날 것 같아요..ㅜ.ㅜ

버벌 2011-04-27 02:11   좋아요 0 | URL
뒷 권이 안나와서 본의아니게 읽기가 중단된 경우도 있잖아요. 얼음과 불의 노래가 그쪽인데... 새로 나올때마다 그 두꺼운 책들을 1부 부터 읽어야 합니다. 5부가 나온다는 소리가 언제부터 들렸는데 아직도인지. 1부부터 읽을 각오를 하고 있으니 제발 좀 나왔으면 좋겠어요. 마노아님. 마틴옹에게 여행좀 그만 다니고 글 좀 써달라 소원을 빌어주세요. 저는 순수함을 잃어버려서 마음이 바르지 못해 기도가 안 먹힐거에요 ㅠㅠ

마노아 2011-04-27 18:08   좋아요 0 | URL
으하하핫, 어제 브론테님 서재였던가, 암튼 스티븐 킹 서문이 생각나요. 어느 80되신 할머니가 자신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결말만 살짝 얘기해달라고....ㅎㅎㅎ
저 이번에 일본에서 지진 났을 때 사랑하는 그 많은 만화가들 생각이 났어요.
결말을 모를 수도 있겠단 생각에 조바심마저..^^;;;

양철나무꾼 2011-04-26 0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화자의 목소리가 실패인가 보네요.
재능이 '불필요한 개인기'라고 하다니, 여울이 어찌보면 맹랑한걸요.
근데 여울이를 응원해 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왜죠?^^

마노아 2011-04-26 12:55   좋아요 0 | URL
바른 표현을 쓰려는 의도에 어떤 부분은 뉴스를 보는 느낌이 나고, 반면 욕쟁이 언니를 표현할 때는 욕을 위한 욕처럼 들리고 그 사람의 목소리로 들리지 않았어요. 할머니의 입담은 자연스러웠는데 말이지요.
불필요한 개인기는 참 착잡했어요. 우리 같이 여울이를 응원해요.^^
 
야행관람차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27
미나토 가나에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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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급 주택가가 밀집되어 있는 언덕 위의 히바리가오카. 그 중 가장 선망의 대상 축에 속하는 집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 외과의사인 남편을 언제나 조용해 보이던 아내 준코가 살해했다는 것이다. 둘째 아들 신지는 그날밤 행방불명이 되었고 세상은 이 날의 사건으로 온통 떠들썩하다. 이 날을 정점으로 사나흘 간격 사이에 벌어졌던 일들을 각각의 등장인물의 눈과 입을 통해서 계속해서 재구성되고 재현된다.  

먼저 살인 사건이 일어난 집의 맞은 편에 위치한 엔도 가족의 이야기를 하자. 히바리가오카에서 가장 자그마한 집. 인테리어 일을 하는 남편 게이스케와 언덕 아래 이웃 동네 슈퍼에서 파트 타임 일을 하고 있는 엄마 마유미, 그리고 원하던 사립 중학교를 가지 못한 뒤 컴플렉스에 싸여서 일주일이 멀다 하고 히스테리를 부려 동네 시끄럽게 만드는 딸 아야카가 한 가족이다. 엄마 마유미는 예쁜 집을 지어 사는 것이 평생의 꿈이었다. 그래서 히바리가오카에 집을 짓게 된 것에 무척 행복해했다. 비록 33년 치의 대출 할부금이 남아 있지만. 그 집에 어울리는 벽지와 바닥을 고르고, 그 집의 품격에 맞게 딸아이도 가까운 명문 사립고에 가길 바랐다. 하지만 딸 아야카는 입시에 실패한 후 철저히 패배주의자가 되어버렸다. 이게 모두 엄마 탓이라고 여기고 엄마에게 막말을 해대며 집안의 집기도 부수기 일쑤다. 그런 일이 벌어질 때마다 아빠 게이스케는 방관자로 일관한다. 

이웃집에는 히바리가오카의 터줏대감을 자임하는 고지마 사토코가 있다. 아들 내외는 외국에 나가 있는데 돌아오면 같이 살 수 있게 주방도 두 군데로 만드는 리폼 작업도 해놓았지만 아들 내외는 돌아올 생각이 없다. 온 동네 일에 참견을 하고 히바리가오카의 품위를 손상시키는 일을 참아내지 못하며, 그런 일이 벌어지면 그에 대한 심판을 할 수 있는 권리를 가졌다고 착각하고 있는 할머니다.  

사건의 중심인 다카하시 가족 이야기도 해보자. 외과 의사와 사별한 첫부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요시유키는 의사인 엄마 아빠의 유전자를 물려받았는지 머리가 좋았고 다만 인물은 별로라고 한다. 두번째 부인과의 사이에서 딸 히나코와 막내 신지가 태어났는데 둘 다 엄마를 닮아 인물이 좋았지만, 공부도 잘하고 머리도 좋은 히나코와 달리 신지는 엄청난 노력으로 가까스로 성적을 유지하고 있었다. 마주보는 집의 엔도 가에서는 명문 사립 중학교를 다니는 신지를 늘 부러워했지만, 신지와 그의 엄마는 성적으로 인한 어마어마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부자 동네에 살고, 외과의사 아버지를 두고, 모두가 부러워하는 명문 학교에 다니고 있지만, 그런 것들이 그들에게 행복을 가져다는 주는 것은 당연히 아니었다. 오죽하면 살인 사건이 벌어졌을까.  

인터넷은 악플로 도배가 되었고, 히나코의 담임 선생님은 학생을 똑바로 쳐다보지도 않으면서 형식적으로만 의논하라고 말한다. 친구들은 위로 문자 한 통 없이 뒤에서 수근거리고 있고, 히바리가오카의 반상회에서는 이 집 벽에 온갖 비방문을 붙여댔다. 심지어 자칭 터줏대감 고지마 사토코는 신지의 방 창문에 돌을 던져 유리를 깨는 만행까지 저지르며 당당해한다.  

등장 인물들은 모두들 심각한 정신적 장애를 가진 것처럼 몹시 불안해 보였다. 부자 동네의 가장 작은 집으로 이사 오고 앞집 아이와 늘 비교된다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박해하는 아야카가 엄마와 아빠에게 보이는 행동은 도가 지나쳐서 프라이팬으로 머리를 때려주고 싶을 정도의 분노를 느끼게 만든다. 그런데 그런 아야카의 속내로 들어가 보면 더 비겁하고 못된 학교 급우들이 나오고, 엄마의 꿈의 전당인 이 집과 동네가 위치한 언덕이 주는 스트레스가 말도 못한다. 사람들은 사립학교에 몹시 집착한다. 좋은 대학에 들어갈 수 있는 확률을 높여주고, 그것이 곧 좋은 직장과 좋은 혼처까지 보장해 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강남 교육 열풍 따라잡기 분위기랄까.  

형과 누나에 비하면 한참 모자라다는 생각에 자괴감을 안고 있는 신지조차도 맞은편 집 아야카와 자기를 두고 입시 화이팅을 외치자 어디다가 비교를 하냐고 생각하며 우습게 여긴다. 고지마 사토코는 자신의 마음에 차지 않는 행동을 보이는 학생의 면전에서 별볼일 없는 학교의 학생일 거라고 지레 짐작을 해버린다.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아이들의 성적으로 아이의 등급을 매기고 있었고, 아이들 역시도 거기에 편승해 자신의 등급을 자체 평가하고 있었다. 서로가 서로를 비교하고 저울질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누구도 행복하지 못했고, 아내가 남편을 죽이는 무시무시한 사건까지 이르게 만들었다.  

사건이 있던 날, 집에서 멀리 떨어져서 지내고 있던 장남 요시유키의 여자 친구는 그가 동생들 걱정을 하자 자기 걱정을 먼저 해줘야 하는 게 아니냐고 떼를 쓴다. 이런 정신 나간 여자를 보았나! 요시유키 역시 도망치고 싶은 마음에 의학부 수업을 핑계로 집으로 바로 돌아가지 않는다. 집으로 갈 때도 신칸센을 타지 않고 일부러 밤늦게 도착하는 버스를 타버린다. 딸 히나코는 사건의 진범이 엄마가 아니라 차라리 동생이었으면 좋겠다는 말까지 한다. 인간이야 모두들 이기적인 존재이기는 하지만, 아빠가 죽었고, 엄마가 그 범인인 이런 존속 살인 사건에 이들이 보여준 행태는 하나같이 비상식적이었다. 이 집만 그런 게 아니다. 엔도 가도 그랬다. 아야카의 히스테리는 걷잡을 수 없이 커져버렸고, 끝내 엄마 마유미는 폭발해 버린다. 자칫하다간 딸을 잡을 뻔했는데 가까스로 멈추긴 했다. 이 사건을 목격한 참견꾼에 수다쟁이인 고지마 사토코는 싸움 재발 방지 차원이라며 이 집 거실에 주둔한 채 좋아하는 가수가 나오는 TV 프로그램을 시청한다.  

아, 이쯤 되면 읽다가 도리어 스트레스 지수가 올라가는 것만 같았다. 워낙에 일본 사회가 다른 사람들에게 절대로 민폐 끼치지 않아야 하고, 남의 시선을 굉장히 신경 쓴다고는 들었지만, 가식을 넘어 위선적인 모습들을 마주하고 보니 마음이 갑갑해져왔다. 그리고 더 불안한 것은, 이런 일본 사회의 모습을 우리나라가 엄청 닮아가고 있거나 이미 흡사해져 갔다는 것이다. 초등학생들조차도 살고 있는 아파트의 평수에 따라 친구를 가르고 있고, 초등 저학년인 아이들이 성적순으로 친구를 골라 사귀는 모습이 흔해져 버렸다. 벌써부터 어린 아이들이 학급 친구를 친구가 아닌 경쟁자로만 생각하고 그 경쟁자를 꺾기 위해서 집단 따돌림도 불사하는 모습을 심심찮게 마주하게 된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내 조카의 학급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다.  

야행관람차에서 등장하는 사건들도 처음엔 작은 것에 불과했다. 작은 스트레스와 히스테리가 점점 눈덩이처럼 불어나더니 연쇄작용으로 불을 붙여버렸고, 사람이 죽는 일에까지 미쳐버렸다. 그리고 거기에는 모두가 조금씩 부채질을 하였고, 그 재는 자신에게로 돌아왔다. 알게 모르게 말이다.  

단순히 여기서 끝냈다면 작품은 인상만 찌푸리게 하고 불쾌한 기분만 남겼을 것이다. 하지만 작가는 다행스럽게도 숨통을 트여주고 작품을 마무리한다. 모두에게 이기적이고 못된 심성이 있기도 하지만, 그 모두에게도 착한 심성이 다행히 간직되고 있다. 다만 그들은 겁이 많고, 소심하고, 혹은 무지해서 잘못된 방향으로 감정을 표출하는 실수를 저질렀던 것이다. 이웃과 친구와 그리고 가족의 허물을, 슬픔을 달래주고 덮어주고 위로해주는 심성도, 그들 안에 분명히 있었던 것이다. 물론 자신의 스타일에 맞는 각자의 방법으로! 

작가의 전작인 '고백'이나 '속죄'보다는 사건의 규모가 작기는 했지만 오히려 우리의 삶 속에서 보다 자주 마주치는 불씨에 대한 이야기여서 감정이입이 더 잘 된 것 같다. 그리고 그랬기에 더 걱정이 된다. 등장인물들이 하나같이 스스로로 인해서 행복해하지 않고 남과 비교하고 스스로를 깎아내고, 또 과장된 욕망을 맞추기 위해서 타인의 인생을 강요하는 중대한 실수들을 저지른다. 그 모습들은 결국 우리의 모습들이 아니던가.  

히바리가오카에는 곧 일본에서 제일 큰 규모의 야행관람차가 세워질 예정이라고 한다. 밤하늘에 우뚝 솟은 관람차. 천천히 느리게 회전하는 관람차 안에서는 언덕 위의 히바리가오카와 언덕 아래의 마을들이 똑같이 작게 보일 것이다. 위에 있을 때에는 모두 아래에 있고, 아래 쪽에서 볼 때는 모두 위쪽으로 보일 것이다. 사람들이 인위적으로 나누고 스스로를 가둬버린 계급을 깨버리지 않는다면 이렇게 병든 사회에서 휘청거리지 않고 건강하게 살 방법이 없을 것이다. 바다 건너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닌 우리의 이야기로 받아들인다면 보통 경각심을 가질 일이 아니다.  

이 소설은 미나토 가나에와 만나는 네번째 작품이었다. 특유의 속도감 있는 필체는 여전하고 사건의 몰입도도 크다. 다만 등장인물이 돌아가면서 자신의 시점에서 이야기를 재구성하는 방식을 벌써 네 번재 접하다 보니 다소 질리는 감은 있다. 그걸 트레이드 마크로 쓰려는 건지는 알 수 없지만, 다음 작품에서는 좀 변화를 주었으면 한다. 역자 후기를 보니 '왕복서간'이라는 신작이 일본에선 이미 발표했나 보다. 국내에도 곧 나오지 싶다. 스타일의 변화는 원하지만 아무튼 다음 작품도 꼭 읽어볼 생각이다.   

덧글) 25쪽에 '히바리가오카 로 향하는'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띄어쓰기가 잘못된 것 같다. 아래 각주로 '종달새 언덕'이라는 뜻이 나오는데 그걸 표시하기 위한 공간이지 않았을까. 다만 표시하는 걸 잊고 한 칸만 띄어버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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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10 00: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3-10 01: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녀고양이 2011-03-10 1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백 작가의 작품이겠군요..............
재미있고 붙들자마자 끝까지 읽어야겠지만, 한없이 맘은 불편할거 같은 이 느낌. ^^

읽을까 말까 한참 고민되는, 읽으면 읽길 잘 했어 싶은 그런 작가였습니다, 기억에.

마노아 2011-03-10 12:07   좋아요 0 | URL
마지막에 미소지어지는 어느 부분이 없었더라면 이 작가의 최악의 작품이 되었을지도 몰라요. 다행히 만회해주고 마무리를 지어주었어요. 처음 읽었던 고백이 가장 흡인력 있고 결말도 인상적이었는데 그 후로도 계속 관심이 가요.^^

카스피 2011-03-11 1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마노아님 리뷰를 보니 책을 읽고 싶은 생각이 불끈 솟아오는데요^^

마노아 2011-03-11 12:02   좋아요 0 | URL
미나토 가나에 책이 늘 본전은 챙기게 해요.^^
 
규장각 각신들의 나날 2
정은궐 지음 / 파란(파란미디어)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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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를 먼저 접한 나로서는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은 드라마 쪽이 훨씬 더 재밌었다. 그런데 온전히 책으로만 만난 규장각 각신들의 나날은 소설의 전편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보다 훨씬 재밌었다. 이야기의 무대도 더 넓어졌고, 등장 인물들의 캐릭터도 보다 생기있었다. 로맨스는 줄어들었지만 그것도 나쁘지 않았다. 무엇보다 가장 마음에 들었던 것은 주인공 윤희가 사형들의 도움 없이도 홀로 우뚝 서는 모습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도움이 불필요한 게 아니고, 윤희도 그들에게 큰 도움이 된 인물이었으니 그것이 주인공의 자질을 증명하는 수단은 아닐 테지만, 성균관 시절보다 더 성장한 각신으로서의 모습이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빼어난 미모를 감춘 남장 여인 윤희가 성균관 시절에는 '대물'이라는 별호를 얻더니 규장각 각신이 되어서는 심지어 '변강쇠'라는 칭호마저 얻게 되었다. 여난이랄까. 어디를 가도 그녀에게 반하여 정신줄 놓는 여인네들이 있으니 운신이 보통 곤란한 게 아니다. 심지어 이번에는 임금의 여인이랄 수 있는 궁녀라니!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에서 허무하게 퇴장했던 초선이 다행히 보기 좋게 부활했고 망가진 캐릭터도 잘 마무리하며 퇴장하였다. 훗날엔 진정 윤희와 같은 여자로서 우정을 나눌 지도 모를 일이다.  

이번 이야기에서 가장 좋았던 것은 구용하와 임금 정조였다. 구용하가 맨날 비실비실 웃고 돈자랑만 해대고 여자만 밝히던 그 속성을 버린 건 아니지만, 그걸 오히려 장점으로 살려서 제 능력을 펼쳐 보인 게 흐뭇했다. 암행어사 이선준은 너무 뻔한 패이고, 암행어사 구용하는 허를 찔리는 패이니 어찌 즐겁지 않을까. 게다가 차 피하려다가 포를 만난 격을 연출한 임금의 아뿔싸! 표정을 상상하는 것도 몹시 즐거운 일이었다. 임금 앞에서도 부러 '색향'만 찾아 지나갔다는 얘기를 당당히 하는 그의 배포, 빠르게 돌아가는 잔머리는 그의 둔한 몸동작의 단점을 충분히 만회시켰다. 또 웃고 정색할 때의 표정 가름도 확실해서 의외의 카리스마도 보여주었다. 목숨 따위가 아닌 명예를 거둬간다는 얘기가 시대적 배경과 상황에 맞물려 설득력 있었다. 다만 그가 꽁꽁 감춰둔 아내의 이야기는 이번에도 포장이 벗겨지지 않아 자못 궁금하기만 하다.  

1권에서 임금은 윤희에게 어느 정도의 적개심을 보였더랬다. 이해가 간다. 굳이 그의 과거와 상처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그 당시 조선에서 거둘 수 없는 여인에게서 보인 지나칠 정도의 재능과 장점 등은 오히려 계륵만도 못했을 것이다. 버리자니 아깝고 취할 수는 없었던 딜레마. 그렇지만 임금은 서두르지 않았다. 딱 한 번 감정이 폭발한 적이 있었지만 그때 보여준 인간미가 오히려 그의 슬픔을 더 잘 드러내고 말았다. 성격 팍팍하고, 너무 똑똑하고 일을 많이 해서 신하를 더 피곤하게 만드는 일중독 임금이지만 더 나은 길을 모색하고자 끊임없이 애쓰는 군주의 모습을 잘 보여주었다. 청벽서에게 한 방 먹여준 것도 시원했고 말이다. 그런데 가만 보면 이 책의 개그는 구용하와 임금이 거의 독차지한 듯 싶다. 문득, 그런 상상을 해봤다. 사극에서 임금의 말투가 "됐고!"라고 자르는 요즘 유행하는 말투로 점잖지 못하게 나간다면? 하핫, 진지하고 심각한 신하들의 사색이 된 얼굴 표정이 그려져서 즐겁다.  

재신의 암행어사 활동과 선준의 뒷수습 내용은 몇마디 문장으로만 정리하고 지나갔다. 용하 편에서 이야기를 길게 썼기 때문에 적당하게 보인다. 사실, 선준같은 모범생의 뒷수습은 굳이 글로 보지 않아도 될만큼의 궁금증만 주니까 그 정도로 됐다. 지나치게 FM인 그이다 보니, 아비 앞에서 드러누웠다는 말이 도리어 큰 웃음을 준다. 그래, 가끔은 그렇게 망가져야지! 

선준의 아비 정무와 재신의 아비 근수의 모습 등도 보기 좋았다. 바늘 하나 들어갈 것 같지 않은 꼬장꼬장한 양반들이지만 공과 사를 구별하고 있었고 결정적인 순간에는 아집도 버려주었으니...  

반다운도 한 건 했다. 키재기 편은 다음 이야기를 위한 하나의 포석일 테지만 여기서 보여준 앙큼한 행동이 귀여워서 한참 웃었다. 청나라를 다녀오고 훌쩍 몇 년이 지나있으면 다운의 시문도 훨씬 훌륭해져 있을 것이고, 키도 보란 듯이 자라 있을 테지. 서방님의 숨이라도 가져가보고 싶어한 다운의 숨놀이가 이 책에서 가장 로맨틱한 부분이었다. 지금은 외사랑이지만 훗날엔 재신이 그 아비가 어미에게 그런 것처럼 다운을 많이 아껴줄 거란 기대를 가져본다.  

의외로 입만 열면 아부를 줄줄 늘어놓는 윤희. 가난한 집에서 가장 노릇하며 억척스럽게 살아가는 그녀의 근성을 비굴하지 않게 잘 보여주었다. 그런데 오른손 명필이 왼손 명필도 가능한 것일까? 뭐, 가능하다고 치자. 실제로 양손 모두 글씨 잘 쓰는 사람들이 있으니... 대단한 능력이다!  

그동안 고생한 덕구 아범 대신 다음 이야기에선 '덕구'가 등장할 터인데 용하가 왜 그를 마다하고 싶어하는지 몹시 궁금하다. 책이 나오면 그 모든 궁금증이 다 풀릴 테지. 윤희의 그림자에 가려졌던 진짜 윤식도 뭔가 제몫을 해내었으면 좋겠고, 윤희가 남자 옷을 입지 않고도 제 모습 그대로 실력을 보여도 되는 날들이 온다면 좋겠다. 비록 거기가 청나라라는, 조선을 벗어나 있다는 한계는 있을지라도 그 시절에 그만하기가 어디인가. 다음 이야기를 즐겁게 기다려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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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가방 2011-03-08 16: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신과 다운...그들이 사랑하며 사는 얘기도 듣고 싶어요.ㅋ
처음엔 다운이 재신의 무뚝뚝함 때문에 마음고생 하지않을까 걱정했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다운의 사랑스러움 때문에 재신이 녹아없어질 것 같더라구요..ㅎㅎ

아래에서 일곱번째 줄 후반부의 한 낱말.. 오타인거죠..?? ㅎㅎㅎㅎ

마노아 2011-03-08 20:14   좋아요 0 | URL
좀 과장된 귀여움이 있긴 했지만 그래도 재신이랑 붙여놓으니 잘 어울렸어요.^^
아아, 오타는 아주 절묘한 부분에서 났군요. 냉큼 고쳤습니다. 고마워요.^^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