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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리포트 1 - 나는 고발한다
정경아 지음 / 길찾기 / 2006년 8월
평점 :
절판
와리바시라는 이름
이규리
젓가락과 사타구니 사이
여자라는 상징이 있다
벌린다는 것, 좋든 싫든 벌려야 하는
그런 구조가 있다
여학교 때 체육선생은
개각(開脚)하는 아이들 등을 꾹꾹 눌러
나무젓가락 가르듯 기절시키곤 했다
꼭 그래야 했을까
간혹 젓가락이 반듯하게 나뉘질 않고
삐뚤어지거나 엇나가는 건
젓가락의 저항이다
말 못하는 다리의 저항이
삐긋 다른 길로 들게 했을까
와리바시란 이름 딱지 영 못 떼고
생을 마감하는 불운처럼
사타구니 불안을 영 마감할 수 없는
여자이야기,
참 길고 질긴 이야기
어떤 책들은, 그리고 어떤 주제들은, 제목만 들어도 울컥! 뜨거운 것이 치밀 수밖에 없다. 한국근현대사를 공부할 때, 한국전쟁을 공부할 때, 그리고 '위안부'에 대한 것을 접할 때.
실수였다. 이 책을 처음 지하철에서 펴든 것은. 몇 페이지 읽지도 않았는데 눈물부터 주르륵 흘렀다. 바로 내릴 때가 되어서 다행이긴 했지만, 지난 번 "해방"을 읽을 때와 똑같은 실수를 저지른 것.
안전한(?) 곳에 도착해서 책을 다시 펴들었다. 신나는 음악도, 감미로운 음악도 모두 방해가 되었다. 배경음악은 필요치 않다.
이 책의 시작은, '위안부' 문제를 다룬 다른 책들과 출발이 조금 달랐다. 네덜란드인 "얀"의 증언을 먼저 제시한 것. 책 속에서 등장하는 사람들도 그랬듯이, 나 역시 서양인이 '위안부'의 희생자였었다는 사실이 조금 뜻밖이었다. 50년이라는 세월을 고통스런 침묵 속에서 살아야 했던 그녀는 92년 TV에서 증언한 한국인 할머니를 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91년 첫 증언을 했던 김학순 할머니로부터 시작된 침묵 깨기. 용기는 그렇게 전염이 된 것이다. 그렇게 피해 할머니들이 함께 모여 서로를 얼싸 안고 잘 살아 주었다고... 잘 싸워 주었다고 서로를 다독일 때 견디기 어려운 분노가 치솟았다. 대체 누가 이들을 이렇게 비참하게 만들었을까. 어찌 아직도 그들의 서러움은 끝나지가 않는가...
강간 피해자에 대한 사회적 시선은 서양이라고 곱지는 않았다. 그들과 한국의 차이는 50보 100보, 그러나 그 50보와 100보의 차이는 많이 컸다. 유교적 사회질서가 남아 있는 한국은 아직도 강간피해자를 향해 네가 처신을 잘못한 탓이지!란 소리로 이미 상처입은 사람을 두 번 죽인다. 얼마 전 주부대상 아침 프로에서 한 강사분이 방청객과 게스트를 대상으로 질문을 던졌다. "미니 스커트를 입고 밤 늦은 시간 거리를 걷던 여성이 강간을 당했다. 여자에게 책임이 있는가?"
놀랍게도, 대부분의 방청객과, 게스트 중에서도 남성 아나운서 하나만 빼고는 여자들이 전부 다 그 여성에게 책임이 있다고 했다. 식사하다가 숟가락 던질 뻔했다.ㅡ.ㅡ;;;; 소위 21세기를 사는 사람들(그 중엔 젊은 사람들도 많다)의 인식이 이러할 진대, 해방이 되어 조국에 돌아왔다고는 하나, 겨우 붙잡은 목숨줄의 할머니들(그때는 여전히 어리고 젊었을 나이의 그분들)이 얼마나 험한 세월을 살았을 지는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이 책의 제2장 아소의 기묘한 여행에서, 현장을 직접 겪었던 군의관 아소를 직접 만나 인터뷰한 내용이 시작될 때, 난 그래도 지식인으로서 양심선언을 하는 사람이 등장할 거라고 내심 기대했었다. 그는 지식인이었는지는 몰라도 바른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이 아니었고, 바른 양심은 더더욱 없었다. 그의 보고서에는 '위안소'를 가리켜 '위생적인 공동 변소'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딱 그만큼이 그가 가진 시각이었다.
'위안부'의 역사를 짚어 올라가자니, 일본이 20세기 초에 저지른 범죄의 현장을 피해갈 수가 없었다. 그곳이 중국이건, 인도네시아건, 태평양의 어느 섬이건. 사람이 아닌 물건처럼 취급된 사람들, 죽이기 전에 반드시 강간을 당했던 숱한 여성들, 소모품처럼 이용하다가 쓸모가 없어졌다고 판단되면 가차 없이 버려지고 죽임 당한 그들은 2000년 전의 노예가 아닌 20세기의 성노예들이었다. 전시 병사들에게 채찍과 병행할 당근으로서 제공된 여자들은 어려운 형편에 돈을 벌 수 있게 해준다는 사기행각에 속아 넘어온 그 시절의 심청이들이었고, 또 어떤 사람들은 백주 대낮에 납치되어 왔고, 또 어떤 이들은 일본 경찰의 함정에 빠져 잡혀온 사람들이었다. 그 모든 일들을 나라 잃은 백성들이 당한 설움이라고 못박아 책임을 물을 수 있겠는가. 나라 잃은 것도 서러운데 그 모진 세월을 살았고, 보상 받지 못했고, 더욱이 '사과 한마디' 듣지 못했다는 것이...
전쟁이 끝나고 해방이 되었을 때에도 그녀들에게 바로 자유가 주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들을 이용하여 패전한 일본의 지도자들은 승리자를 위한 또 하나의 '위안'을 준비했던 것. 그래, 그 잔치를 준비한 일본의 지도자들이 인면수심인 것을 이미 알고 있다쳐도, 그 차려준 잔치를, '위안'을 그대로 삼켜버린 인사들은 대체 누구인가. 이 책의 끝에는 2권의 내용이 예고되어 있다.
고통 끝에 다가온 종전, 그리고 전범 재판. 그러나, 당시 연합국의 일원으로 인정받지 못한 우리나라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전쟁의 승리자인 연합국-그 중에서도 가장 강력했던 미국은 이 역사적 재판을 어떻게 벌였을까?
벌써부터 한숨이 나온다. 보지 않고도 어떤 내용이 등장할 지 짐작이 가기 때문이다.(물론 당연히 보아야 하고 기다리고 있지만...;;;)
역사는 단 한번도 멈추어 선 적이 없다. 언제나 끊임 없이 흐르고 또 흐르고 있는데, 그 역사의 물결 속에서 지나갔던 일들은 과거의 일로 화석처럼 굳어 있지 않다. 살아있는 사람에게, 남겨진 자들에게 '기억'이라는 이름으로, 그리고 '상처'라는 이름으로 아직도 자취를 남기고 있다.
첫단추를 잘못 꿰면 아무리 끝까지 단추를 채웠어도 결국 다시 풀러서 제대로 입어야 한다. 잘못 꿰어진 과거사의 단추를 일본은 언제까지 모른 척하며 제대로 입었다고 고집을 피우며 우길 것인가. 분하게도, 우리가 더 다급하고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 할머니들의 연세는 이미 연로하시다. '위안부'였었다고 신고하신 분들 중에는 돌아가신 분도 많이 계시다. 매주 수요일이면 무거운 걸음을 떼어 일본 대사관 앞에서 시위를 하시는 그분들의 지친 어깨를 이제는 쉬게 해드려야 하는데, 힘없는 정부와, 무관심한 국민들과, 너무 강하고 너무 뻔뻔한 일본이라는 '국가' 자체가 숨막히게 답답하다.
그러나 무력하다고 손 놓고 있을 일이 아니다. 작품 말미에 소개된 이옥선 할머니의 말처럼 "정신 차리고!" 눈 부릅떠야 할 일이다. 절대로 주저앉아서는 안 된다. 그들에게 말도 안 되는 면죄부를 주어서도 아니 되고, 할머니들이 스스로 지쳐 포기하시지 않게 우리가 힘이 되어드려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 역시 결코 잊어서는 안 되겠다. 한 '위안부' 할머니의 표현대로 "용서할 수는 있지만 잊을 수는 없는" 일이었으니까. 우리가 울타리가 되어주고 우리가 따스한 위로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 책이 쓰여진 시기가 3월이라고 나왔는데 책이 느즈막하게 나온 것 같다. 예정된 2권과 3권도 속히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리고 많이들 읽고 많은 관심을 갖고 또 행동으로 촉구되길 바란다. 우리 모두에게.